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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을 찾아서
이부섭 동진쎄미켐 회장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11호(2020. 10.15)
이부섭(화학공학56-60) 동진쎄미켐 회장
연탄창고에서 시작…… 부도 극복하고 1조 소재 기업으로
우리나라 소재 산업의 역사인 이부섭(화학공학56-60) 동진쎄미켐 회장을 뒤늦게 찾았다. 지난해 일본 수출 규제 품목의 하나인 포토레지스트(감광액)를 오래 전부터 만들며 소재 국산화에 앞장서온 기업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을 때도, 50억원의 발전기금을 모교에 쾌척했을 때도, 공과대학 동창회장으로 선출됐을 때도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인터뷰할 정도의 사람이 아니”라며 사양했다.
지난 9월 25일 서울 상암동 사무실에서 만난 이 회장은 동창회 일행에게 저녁 식사까지 4시간을 할애했다. 인터뷰 장소에 놓인 칠판에는 태어난 시기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연표가 빼곡했다. 동진쎄미켐 50년사를 정리한 작가도 대동했다. 사전 질문지의 답변은 A4 35장에 달했다. 하면 확실하게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회장은 “인생의 한 시기만 이야기해도 하루가 걸릴 텐데 괜찮겠냐”며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동창회 일행을 맞이했다. 포토레지스트 국산화 현황부터 정통 엔지니어 기업가가 걸어온 삶에 관해 묻고 들었다.
-건강해 보이세요. 늘 웃는 인상 때문에 복을 받는 게 아닌가 싶고요.
“그래 보인다니 감사합니다. 등산을 좋아해요. 서울 근교에 아름다운 산이 많잖아요. 간간이 골프도 즐기고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회사 경영하는 사람으로서 업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경쟁력 있는 발포제와 반도체 및 전자재료를 만들기 위해 신규 해외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경기도 화성에 포토레지스트 공장을 증설했다는 기사도 눈에 띕니다만.
“내년 4월 완공 예정입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총면적 1,100평 규모로 짓고 있어요. 모든 공정을 자동화하고 제조환경을 클린룸(Cleanroom)화 해 10nm(1나노미터=10억분의 1m) 미만의 반도체 회로 구성에 맞는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할 계획입니다. 현재 우리 회사의 포토레지스트 제조 능력은 연간 15만 갤런인데, 신규 공장에서는 연간 40만 갤런 이상의 생산이 가능합니다. 참고로 국내 연간 포토레지스트 사용량이 약 70만 갤런이고 전 세계로는 250만 갤런으로 추정합니다.”
-동진쎄미켐의 매출 규모가 궁금합니다.
“2019년 내부 기준 전체 계열사 총 매출은 약 9,900억원입니다. 올해는 코로나 상황에도 불구하고 매출액 내부 기준 1조 2,000억원을 예상합니다. 임직원은 해외인력을 포함해 1,940명이고요. 국내 7개, 중국 13개, 대만, 인도네시아 총 22개 공장을 갖고 있습니다. 매출 비율은 반도체용 포토레지스트 60%, 디스플레이용 포토레지스트 30%, 발포제 10% 정도 됩니다. 발포제는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우리 회사가 세계 최고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해 초만 해도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80% 이상을 일본 제품에 의존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현재 어느 정도 국산화가 됐는지 궁금합니다.
“10nm 이하 포토레지스트와 10nm 이상급으로 나눠질 텐데, 정밀한 10nm 이하 포토레지스트는 아직 일본 제품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실정입니다. 우리 회사에서도 고성능 포토레지스트를 개발했고 실험 중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신규 공장에서 고품질의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게 될 겁니다. 5년 이내에 불화아르곤(ArF) 포토레지스트 등 고성능 재료의 국산화율을 50% 이상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의 미세한 회로를 그리기 위해 원재료인 웨이퍼 위에 뿌리는 감광액이다. 회로를 그린 마스크를 웨이퍼 위에 씌우고 빛을 쏘면 회로 모양을 제외한 나머지 포토레지스트를 바른 부분은 사라진다. 옛날 필름에 발라진 감광액과 같은 원리다.
이 회장은 1962년 서울대 대학원에서 ‘감광성 수지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포토레지스트가 전문 분야인 셈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화학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당시 취업이 쉽지 않음에도 화학공학을 소신 있게 선택한 배경이다. 경기고 시절 화학반 반장을 맡아 화장품을 만들고 아이스크림도 만들어 먹었다. 10월 개교기념일을 앞두고 수소가스를 넣은 풍선에 화학반 소개 플래카드를 띄워 홍보하기도 했다.
-동진쎄미켐 설립은 1967년인데, 대학원 졸업 후 무슨 일을 하셨나요?
“첫 직장은 대한사진화학공업사였습니다. 인화지를 만드는 회사였죠. 첫 월급이 5,000원이었어요. 특별보너스로 1만원을 더 주긴 했지만, 자존심이 상하더군요. 회사원으로 동기부여를 찾기 어려워 이듬해 그만두고 한국생산성본부의 기술부장으로 입사했습니다. 월급 3만7,000원으로, 당시 사정으로는 상당히 높고, 활동 범위도 넓었습니다. 공무원 국장급 대우를 받은 거죠. 문제는 산업분야가 너무 넓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고, 실상 책상에서 일 없는 날이 많았어요. 가만히 앉아 있는 성격이 못돼 견디기 힘들더군요. 그러던 중 한국사진필름의 공장장 자리를 제의 받았습니다. 책상에 앉아 서류나 만지는 것보다 실험실에서 인화지를 만드는 신기술을 연구하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회사를 옮겨 젊은 공장장으로서 인화지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이 일도 회사 주인이 바뀌면서 그만두고, 이후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사업을 결심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습니다.
“유학 생각도 했어요. KIST 원장을 지낸 김은영 동기와 독일 다름슈타트 공과대학에서 공부할 계획으로 탄광 광부로 지원하려고도 했지요. 당시 독일까지 운항하는 민간 비행기가 없었는데, 탄광 광부에 지원한 사람만 탈 수 있는 비행기가 있었어요. 사무실에 인터뷰 갔다가 생산성본부에 있을 때 모셨던 본부장이 있어서 혼비백산해 도망쳐 나왔습니다. 얼마나 창피합니까? 그분이 그 일도 관여했던 것 같아요. 김은영 동기 혼자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지요. 이후 사업으로 뜻을 굳히고 젤라틴, 에폭시 수지 추출 사업, 폴리스타일렌 개발 등을 했지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논밭을 팔아 운영자금을 마련하고 집 연탄창고에 실험실을 만들어서 했습니다. 아내가 직장을 갖고 있어 가능했던 것 같아요.”
-어려움도 많으셨지요.
“사업 초기 석유화학제품 관세 철폐로 폴리스타일렌 제조에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폴리스타일렌의 원료인 스타일렌모노머의 특별관세는 그대로 둔 채 폴리스타일렌 관세만 없애면서 원료 값은 올라가고 제품 가격은 오히려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창업 10년까지 다섯 차례 이사를 했던 일입니다. 폐수 등의 문제로 연희동-불암동-시흥동-길동을 거쳐 1975년 인천 주안에 인천공장을 건설해 드디어 정착하게 됐죠. 의지와 무관하게 사업장을 계속 옮겨야 하는 일이 무척 고달팠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형 화재사건도 있었고요. 가장 힘들었던 것은 70년대 말 오일쇼크로 부도 위기에 놓였을 때입니다. 제2차 석유파동으로 PVC산업과 신발산업의 불황은 관련 업계의 도산으로 이어졌지요. 특히 국내 주요 거래처였던 대동화학이 부도를 내면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대동화학과 2억원 한도의 융통어음을 서로 바꿔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어음 결제일이 되면 두 배로 갚아야 했죠. 결국 부도를 맞고 1981년 법정관리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여러 친구의 도움과 운으로 위기를 극복해 그 해 12월에는 흑자로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법정관리는 1989년 해제하게 됐고요. 지구력과 담력으로 버틴 시간이었습니다.”
화학도에서 사업가로 변신해 여러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간에는 6·25 전쟁 중이던 중학생 시절 소중한 경험이 있다.
“1950년 6월 5일 경기중학교에 입학하고, 20일 후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낙동강까지 전선이 밀렸으나,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됐죠.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점령했으나 10월 중순, 30만명에 달하는 중공군이 급습해 유엔군이 패퇴하게 되면서, 그 당시 기찻길 위로 피난을 오는 사람들이 줄지어 내려오고, 이후 혼란한 전황 속에서 크리스마스 날, 마차를 타고 피난 가게 됐습니다.
동빙고동 방향으로 가면 강이 꽁꽁 얼어서 마차가 지나갈 수 있다고 해 그리로 가게 됐어요. 아버지, 어머니, 형수, 조카 두 명, 큰누이 등 7식구가 마차에 쌀과 밥 해먹을 그릇, 이부자리 등 소가 끌 수 있을 만큼 다 싣고 가고 저는 자전거를 탔습니다. 위로 두 형이 있었으나 인민군 점령 시 큰형은 북한군에게 납치돼 이북으로 끌려가다가 돌아가시고, 작은 형은 국군에 편입돼 복무 중이었어요. 강을 지나가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얼음이 잘 얼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소가 짐이 잔뜩 실린 마차를 끌면 바퀴 부분을 따라 얼어붙은 바닥이 ‘우지지직’ 하고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나요. 이러다 물에 빠져 다 죽겠다 싶었죠. 다행히 추운 날씨 덕에 그런 일은 없었지만, 조금만 따뜻했더라면 피난 가다가 모두 강에 빠져 죽었을 겁니다. 1951년 1월 4일(1·4후퇴), 서울이 재 점령 당했습니다. 전선은 평택, 오산까지 밀렸고, 우리 가족도 진천을 지나 증평까지 가서 피난 생활을 했지요. 같은 해 4월쯤 모를 내야 하는 시기라, 아버지가 아직 한강에서 정식으로 도강을 허가하지 않아 야미 배(밀항선)가 있다고 둘이 먼저 서울로 올라가자 하셨어요. 그래서 그 근처에서 2~3일을 기다리다가 쌀이 떨어져 하는 수없이 명아주 풀을 뜯어다 죽을 끓여 먹으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겨우 새벽에 도강에 성공해 용산 근처 한강 북쪽에 도착했습니다. 연희동까지 또 한나절을 걸어와 집에 도착해서 보니 그 많던 쌀, 벼가 싹 다 없어졌더군요. 피난민들이 다 가져간 거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행주에 계신 고모에게 벼를 얻어다 쌀을 만들어 끼니를 이어가며 모낼 궁리를 하니 이것도 너무 막연했습니다.
6월이 되어 모내기 철이 왔는데, 1만 2,000평(60마지기)이나 되는 논에 모내기를 하려면 많은 일꾼이 필요했습니다. 전쟁 중에 가산이 풍비박산 난 상황에서 품삯을 줄 돈이 없었어요. 집안엔 아버지, 어머니, 저 셋뿐. 큰형은 민족청년단장으로 일하다가 인민군에 끌려가 돌아가셨고, 작은형은 국민방위군으로 들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전시상황이었으니까요. 돈을 벌 사람은 저뿐인 거예요.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워대며 한숨만 내쉬고 있는 아버지를 보다 못해 돈을 벌어 모를 심을 수 있는 인력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당시 유엔군이 서울 문산까지 진격해 있는 상황이라 초콜릿, 껌 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져다 장사를 하겠다는 계획을 어머니께 설명 드리고 돈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죠.
어머니는 돈을 실크 인조견 보자기에 정성스레 싸서 허리춤에 꽉 묶어주셨습니다. 금촌에서 문산까지 가려면 차에서 내려서 샛길을 한참 걸어가야 했는데 걷다 보니 무언가 허리 쪽이 허전한 느낌이 들어요. 그 중요한 보자기가 없어진 겁니다. 어머니께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보자기에 싸주신 것이 이렇게 될 거라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요. 미끌미끌하여 스르륵 풀린 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 거죠. 결국 걸어왔던 샛길을 따라 금촌역까지 가서 다시 샅샅이 뒤져봤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전 재산이 다 없어져 빈털터리가 됐고, 가다 보니 날은 어두워지고. 근처 농가가 하나 보여서 찾아가 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어린 중학생이 도둑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지 밥도 못 먹고 굶은 저에게 저녁을 차려주셨고, 하룻밤 재워도 주셨어요. 돈도 잃고, 잠도 겨우 자는 마당에 편히 잠이 왔겠어요.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에 일찌감치 일어나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터덜터덜 문산으로 향했죠. 도착해서 이러한 사정을 물건을 판 분에게 말하니 ‘고생이 많았구나’ 하며 물건을 외상으로 줬습니다. 어린 나이에 전 재산을 잃어버려 세상일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일어날 기회를 줘서 그때 그것이 큰 고마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후 군용열차를 타고 그 물건을 가져와 남대문 시장에 가서 전부 다 팔았습니다. 약 5배는 남기고 본전을 찾아 외상으로 받은 돈을 다음날 가서 다 갚았죠. 그렇게 미제 장사를 하며 돈을 벌어와 인건비를 다 해결, 모내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 얘기를 부모님께 하지는 못했어요. 그래서인지 표현에 서투른 아버지는 ‘고생했다. 네 덕에 잘 마쳤다’ 한마디 말씀하셨지만 떠올려보면 그때 나를 포근히 안아주면서 따뜻하게 칭찬해주셨다면 어린 나이에 눈물이 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긴 이야기를 마친 이 동문은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 밤을 새우며 위기를 극복하고 집의 그 큰 논에 모내기 작업을 마쳐 그 해 농사를 잘 마무리한 사건은 그 후 사업경영에 끈기 있는 노력으로 사업을 성공시키는 효시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단련된 투지력이 없었다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업하는 과정에서 친구들의 도움도 많았습니까?
“경기고, 서울대 동기들이 큰 힘이 됐죠. 예전에는 화공과를 나와서 갈 곳도 없었어요. 한국의 산업이 그만큼 경공업 위주였기 때문이죠. 그러니 다들 산업은행 기술평가역으로 가 있어서 사업자금을 대출받을 때 도움 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반도체 포토레지스트를 개발하게 된 계기도 지도 교수이신 심정섭 선생님의 도움과 같은 전공을 한 선배 친구 후배들의 합작품입니다.”
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 이종찬 전 국정원장, 조양래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회장,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위원장 등이 고등학교 동기다. 아남의 김주채 회장, 한국타이어 조양래 회장과는 요즘도 골프를 즐긴다.
-과학기술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화공과 5회 졸업생이신 고 오원철 선배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으로 얼마나 큰 일을 하셨습니까. 포항에 포항제철, 울산에 석유단지, 부산 거제의 조선단지부터 목포, 군산, 구미, 서산, 반월, 인천 남동에 주요 단지를 설계해 우리나라 산업의 근간을 닦으신 분입니다. 기술을 바탕으로 한 대한민국 산업이 커온 것을 보면 그 분의 능력에 가슴 벅찬 긍지를 느낍니다. 당시 한 일화가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오원철 비서관에게 ‘자네는 포항제철부터 시작해 울산, 마산, 부산, 여수, 인천 등 다 돌아보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어디서 그렇게 밤낮으로 회의를 해서 그 장대한 계획을 수립했나?’ 하고 물으시니 오원철 비서관께서 ‘자리가 마땅한 데가 없어서 매일 광화문과 종로 사이에 있는 큰 음악감상실 다방을 빌려 썼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박 대통령께서 ‘무어야! 국가 사항을 다방에 모여서 했다?!’ 하시며, 기밀이 유지될 수 있는 곳을 당장 구하라고 명령 받아 오 비서관이 찾은 곳이 그 당시 삼청동에 있었던 외무부 장관 공관이었습니다. 외무부 장관의 공관은 더 좋은 한남동으로 이전시키고, 삼청동 그곳이 이른바 그 당시 한국 엔지니어스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렇듯 가장 먼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산업을 발전시킨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고, 이 혁신을 이루어낸 주체가 바로 1950년대 초반부터 이공대학을 졸업해서 산업계에 투신한 엔지니어들이었습니다. 지난 40년간 조선, 자동차, 전자, 화학분야 등 우리 기업들에 몸담았던 엔지니어들의 노력으로 현재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일류 기업으로 부상했습니다.
산업의 핵심요소가 과학기술과 인재입니다. 과학기술이 기업의 본질이라면 인재는 기술의 원천입니다. 어떠한 신기술 개발도 사람의 노력과 우수한 인재 확보 없이는 실현될 수 없습니다. 각고의 노력과 충분한 재원을 투자하여 산업계의 인재를 키우고 배출해내야 합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기술을 존중하고 기술자를 우대한 나라는 선진 강대국으로 발전하고 국민이 행복했으며, 기술을 천대하고 기술자를 탄압한 나라는 국력이 쇠퇴하고 국민이 불행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한 말씀.
“앞서 잠깐 말씀 드렸습니다만, 6·25라는 민족적 비극의 전쟁에서 살아남고 특히 중학생 때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미제 물건을 팔아 기어코 부모님께서 모내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드린 경험을 통해 끈기와 인내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습니다. 훗날, 사업을 시작해서 1980년대 오일쇼크가 터져 부도를 맞았을 때도 굴하지 않고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때의 홍역을 치른 덕분입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이보다 더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고난이 우리 정신력을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 단련된 정신이 더 큰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고 그 다음엔 큰 결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인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하늘도 돕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본연의 위치에서 평상시 꾸준히 노력한다면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정리=김남주 기자
프로필
△1956년 경기고 졸업
△1960년 서울공대 화학공학과 학사
△1962년 서울공대 화학공학과 석사
△1963년 한국생산성본부 기술부장
△1967년 동진쎄미켐 창립
△1998년 제31회 과학의 날 대통령상 기술상 수상
△1999년 제3회 한국공학기술상 수상
△2002년 한국공업화학회 회장
△2006년 금탑산업훈장 수훈
△2009년 한국엔지니어클럽 회장
△2011년 서울대발전공로상
△2012년 한국벤처창업대전 대통령상 수상
△2014년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회장
△2019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명예박사 학위 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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