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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금 나는 깨어있다 원문보기 글쓴이: 추공
[지공화상(指空和尙)]
양주시 회천읍 회암리에 경기 북부의 큰절인 회암사 터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楊州牧)」 ‘불우’조에 “1174년 금나라 사신이 왔는데 춘천 길을 따라 인도하여 회암사로 맞아들였다”라는 기록과 함께 고려 때의 스님인 보우의 비문에 “13세의 나이로 회암사 광지선사로 출가하였다”라는 내력이 실려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기록에는 회암사를 인도의 스님으로 고려 땅에 들어와 불법을 폈던 지공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나온다.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화상은 당시 인도 최고의 불교 대학이었던 나란타 절을 본떠 266칸의 대규모 사찰을 창건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지공이 여기 와서 말하기를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 나란타 절과 같다”라고 말한 후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 뒤 고려 말의 뛰어난 승려였던 나옹화상이 중건 불사를 하게 되며, 회암사는 드디어 전국 사찰의 본산이 되면서 수많은 승려들과 대중이 머물게 되었다.
한때 절의 승려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목은 이색은 「회암사 주조기」에 “집과 그 모양새가 굉장하고 미려하여 동방에서 첫째”라고 적었고, 이 절은 그 뒤 나옹화상의 제자 무학대사가 중건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고,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례하게 하였다. 또한 이성계는 둘째 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과 함께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암사에는 그런 의미에서 역대 왕을 제사 지냈던 곳이며, 이성계의 정신적인 은신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이곳에 머물렀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2000년 6월쯤 이성계와 무학대사 등의 호칭이 새겨진 대형 청동 풍탁(건물 추녀에 매달던 종)이 발견되었다.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 ‘조선국왕(朝鮮國王)’, ‘왕현비(王顯妃)’, ‘세자(世子)’라는 15자(字)가 새겨져 있어서 새삼 시공을 초월한 역사의 근거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회암사는 성종 3년(1471)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3년간에 걸쳐 중창하게 되었고, 명종 때 이르러 크게 중창하게 된다.
불심이 깊었던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허응당 보우대사가 회암사를 중심으로 불교 중흥을 기도한 것이다.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를 열고(1565년 4월 5일) 그 이틀 뒤인 4월 7일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유생들로부터 ‘보우를 처형하라, 회암사를 불태워라’ 하는 상소가 올라오고 실록에는 “명종의 그 일을 걱정한다”라는 기록이 실려 있다.
초파일에 제주도로 유배된 보우대사는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피살되고 나옹화상 이후 200여 년간에 걸쳐 전국 제일의 도량이었던 회암사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어 불태워졌다.
회암사가 사라지면서 조선의 불교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고 회암사는 또다시 수난을 당하게 된다.
회암사 터 북쪽 한쪽의 부도전에 모셔져 있던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부도와 부도비 등 유물이 광주의 토호 이응준에게 제거되고 만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지방 토호들은 절을 빼앗아 자신들 선조의 묘택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응준은 풍수사 조대진이 “세 화상의 부도와 부도비를 없애버린 후 그곳을 묘역으로 삼고 법당 터에다 묘지를 세우면 크게 길한다”라고 부추겼다.
이응준은 이를 실행했고 이 일은 7년 뒤(순조 28년, 1828) 세상에 알려졌다. 이응준과 조대진은 외딴 섬으로 유배를 갔고, 경기 지방의 승려들이 모여 상의한 결과 현재의 절터에서 800여 미터 떨어진 천보산 중턱에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이어받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산 언덕배기에 세 분의 부도와 부도비를 다시 세우고 흩어진 유물들을 수습했다는 기록이 무학대사의 음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 지공선사와 무학대사의 몸돌을 복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회암사와 같은 폐사지로 이름난 곳은 경주의 황룡사지, 익산의 미륵사지, 원주의 법천사지와 거돈사지 그리고 여주의 고달사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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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 회암사 조사전에는
고려시대 유명한 왕사(국사) 세분의 화상이 그려져 있는데,
* 첫번째 (맨위)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고려에 오신 지공 국사(왕사) 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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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중간)는 고려에서 중국을 왕래하며 지공 국사의 제자가 되시고
역시 고려시대 지공 국사의 대를 이으신 나옹 국사 (왕사) 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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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번째 (아래)는 회암사에 들어가서 나옹 국사의 제자가 되시고
고려말 태조 이성계의 왕사(국사)가 되어 새로운 왕조의 왕이 될것을
예언하고 조선 건국의 수도를 한양에 정하는데, 최고의 역할을 하신
무학대사님 화상
※ 무학대사님은 지리,역학,무술(축지법)등 모든분야에 도통하신 분으로
조선 초기 실학파들에 의해 불교가 숭유정책에 밀려 쇠퇴하게 되어
역사적으로 기록된 자료가 많이 부족하나, 앞으로 크게 연구되어야
할 부분인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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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화상 십이시송(十二時頌)]
○ 첫 새벽 인시(寅時)
미친 기틀 안에 도인의 몸이 있다
궁색한 고통으로 이미 한량 없는 겁을 지냈건만
항상 여의주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구나
물건에 집착하면 미혹의 나루턱에 빠지니
터럭만큼이라도 있으면 벌써 티끌이네
옛 시절의 형상 없는 경지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선지식을 구해 다니니 참되지 못하다
○ 해돋는 묘시(卯時)
작용하는 곳에서 잔꾀를 부리지 말라
설사 신기로운 광명이 유와 무를 비추어도
한 생각 일으키면 벌써 악마의 홀림을 받았다
공력을 들여서는 끝끝내 알지 못하니
밤낮으로 '나'와 '남'의 분별에 끄달린다
망설이지 말고 그대로 좇아라
언제 마음에 번뇌가 생기었던가
○ 밥 먹을 때 진시(辰時)
무명은 본래 석가의 몸이다
앉고 누움이 원래 도인 줄 모르고
그토록 분주하게 고통만을 받는구나
소리와 빛을 따라 친소를 따지면
오직 그는 더럽혀진 사람일 뿐이요
미음을 써서 불도를 구하려 하면
허공에 물어보아야 티끌을 벗어나리
○ 해가 솟는 사시(巳時)
깨닫지 못한 사람은 가르쳐 주어도 모른다
설사 조사의 말씀을 통달했더라도
마음에다 참뜻이라는 것을 두지 말라
현묘함만을 지키고 문자는 잊으라
잘못 알면 여전히 옳지 못하다
잠시라도 스스로 긍정해서 뒤쫓지 않으면
여러 겁을 악마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 한나절인 오시(午時)
사대로 된 몸 안에 값진 보배가 있다
아지랑이와 허공 꽃을 버리지 않고
뜻을 일으켜 수행하니 더욱 괴롭다
일찍이 미혹하지 않았거니 깨달음을 구하지 말고
아침볕이 몇 번 오든 내버려 두라
형상 있는 몸 안에 형상 없는 몸이 있고
무명의 길 위에 무생의 길이 있다
○ 해가 기우는 미시(未時)
마음에다 언제 참뜻을 두었던가
저 문자들엔 친하고 성글음이 없으니
마음을 가지고 확실한 뜻을 구하지 말고
이지저리 맘대로 해서 숨기지 말라
영원히 인간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살지 않는다
운전하고 활용하되 빛과 소리를 여의지 않으니
여러 겁 동안 잠시라도 버린 적이 있던가
○ 해가 저무는 신시(申時)
도를 배우려면 먼저 가난함을 싫어하지 말라
형상 있음이란 본래 거짓으로 쌓인 것이지만
형상 없음인들 어찌 참되다고 할 수 있으랴
정결케 하자는 것이 도리어 괴로우니
어리석음을 잘못 알아 가까이 하지 말라
당장에 구하지 않아 처소마저 없게 되면
잠깐만이라도 출가한 사람이라 불리우리라
○ 해가 지는 유시(酉時)
비고 거짓된 음성은 길지 못하다
도의 기쁨의 진수도 먹지 않거늘
뉘라서 더구나 무명의 술을 마시랴
버릴 수도 지킬 수도 없으니
거침없이 거닐은 일 전혀 없었다
설사 그대가 고금 일을 많이 알아도
여전히 미쳐서 밖으로 달리는 짓이다
○ 초저녁 술시(戌時)
미친 사람 애를 쓰다가 어두운 방으로 들어간다
설사 한량 없는 시간에 마음이 통한다 해도
여러 겁이 어찌 오늘과 다르겠는가
헤아리고 망설이면서 중얼거리니
마음만을 더욱 캄캄하게 한다
밤낮으로 광채를 놓아 유무를 비추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바라밀이라 부른다
○ 가만히 있는 해시(亥時)
털끝만큼도 닦아 배우려는 마음을 내지 않아도
형상 없는 광명 속에서 항상 자유롭다
석가를 초월하고 조사를 지나치니
마음에 작은 티끌이라도 있으면 장애를 이룬다
걱정없이 놓아서 길이 바보같이 지내면
거기엔 원래부터 통달한 사람으로서 멋이 있다
○ 한밤중 자시(子時)
마음에 생멸 없음에 머물면 그것이 곧 생사이다
생사가 어찌 유와 무에 속하랴마는
사용할 때엔 당장 사용할 문자는 없다
조사의 말씀은 바깥의 일이니
일어날 때에 안다 하여도 옳지 않다
마음 먹고 구하려 하나 진실로 자취가 없으니
생사의 악마가 와도 마음대로 시험케 한다
○ 닭이 우는 축시(丑時)
한 개 둥근 구슬의 빛이 오래되어
안팎에서 두루 찾아도 전혀 없지만
경계 위에서 활용할 때엔 섞였다 드러난다
머리도 볼 수 없고 손도 없으니
세계가 무너질 때 그것은 썩지 않는다
알지 못한 사람이 한 마디만 듣지만
아직껏 뉘라서 입을 달싹했던가
- 지공화상(誌公和尙) 십이시송(十二時頌) , 마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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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通度寺)의 삼성각(三聖閣)에 봉안되었었던 삼화상(三和尙) 진영은 1807년에 서봉 인총(西奉印摠)의 증명하에 양공(良工) 의윤(義允)이 조성한 것이다.
삼화상은 고려 후기의 사회적 모순과 불교계 내부의 갈등을 개혁하고자하는 의지를 보였던 고승들이다.
조선시대의 억불의 분위기에서도 이들 삼화상은 조사신앙(祖師信仰)의 대상이 되어 여러 곳에 진영이 모셔졌으며, 조선 전기 삼화상이 조사신앙의 예배대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함께 봉안하는 경향이 유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들 삼화상은 지공화상(指空和尙)을 가운데에 두고, 좌측(左側)에 나옹화상(儺翁和尙)을, 우측(右側)에 무학화상(無學和尙)을 봉안했던 것으로 이 중 하나인 지공화상의 진영이다.
지공은 호승(胡僧)으로서 충숙왕대에 고려에 들어와 당시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그 뒤 원나라로 돌아가 고려인이 지은 법원사에 주석하면서 많은 고려 승려들을 지도하였다.
갈색(褐色) 상단(上段)과 돗자리로 반분(半分)된 이단구도(二段構圖)의 형식을 취하고 전신(全身) 좌안(左顔) 8분면(八粉面)으로 고식(古式)을 띠는 의자상(倚子像)이다.
단조로운 갈색 상단, 승석문(繩蓆文)이 시문된 하단의 돗자리는 강조되지 않으면서도 조화로우며 그 경계를 적색으로 마감하고 있어 안정적이다.
인물의 키를 훨씬 넘는 의자는 호형(弧形) 등받이, 곡선의 팔걸이, 여의두(如意頭)형 문양으로 마감된 끝장식, 금구(金具) 장식이 된 쭉 벋은 다리등으로 직선과 곡선의 묘미를 잘 살려 표현되었다.
그 위 가장자리가 반원형의 문양이 시문된 암녹색 천이 덮혀져 있다.
나옹, 무학화상과는 다르게 머리에 여의두(如意頭)형 보관(寶冠)을 썼으며 호분(胡粉)이 가미된 얼굴은 담묵(淡墨)의 세필(細筆)로 이목구비(耳目口鼻)를 간략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구획하였다.
조그맣지만 단단하게 느껴지는 두상, 거칠면서도 투박해 보이지 않는 안면(顔面)의 모근(毛根), 지긋한 눈매, 단정한 코, 조그맣지만 꽉 다문 입술 등의 얼굴은 위엄있고 단아한 기품의 고승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백색(白色) 내포, 군청색(群靑色) 장삼(長衫), 적색(赤色) 가사(袈裟)를 착의(着衣)하였으며 영자(纓子)가 길게 내려와 있다.
장삼 배면(背面)의 분홍색 채색(彩色), Ω(오메가)형의 주름을 보여주는 의습선(衣褶線), 농담(濃淡)의 묘를 살린 선염(渲染) 처리 등은 도식적인 선묘(線描) 표현에 화려한 장식성의 미감을 부여하고 있다.
지물(指物)로는 왼손으로 불자(佛子)를 사선으로 길게 들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묵주(默珠)를 잡고 있다.
안정된 구도에 주색조인 적·녹색의 색감의 대비등이 돋보이며 조사 신앙의 단적인 예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의자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띠고 있어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나옹,무학,지공 - 삼화상(三和尙) 진영]
지공 화상은 신통력이 뛰어난 스님이었읍니다. 그래서 양나라 무제는, 이상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 하여, 스님을 잡아서 옥에 가두었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를 자유롭게 다니는 지공 화상을 볼 수 있었읍니다. 옥졸이 잘못 지켜서
그런가 하고 옥에 가보면 스님은 옥 안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 이야기를 보고받고서 무제는 크게 놀랐읍니다.
무제는
지공 화상을 궁중에 모셔놓고, 잔치를 베풀어 참회를 올리며, "스님, 몰랐읍니다. 옥에 모실 것이 아니라 대궐로 모시겠읍니다. 궁중에 머물러
계시면서 법문을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읍니다.
지공 화상은 그 청을 받아들여 궁중에 머물기로 하였읍니다.
그런데 스님이 계시던 절에서도 예전과 똑같이 지공 화상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법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리가 없다 하여 가서 알아보니 과연 사실이었읍니다.
이에 양나라 무제는 크게 발심하여, 천자 자리에 있던 40여년 동안 불교를 더없이 융성시켰읍니다.
지공스님이 돌아가실 즈음에
무제가 물었읍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오래 가겠읍니까?"
"내 탑이 무너질 그때까지..."
지공스님이 돌아가신 뒤에 무제가 몸소 종산 정림사에 가서 탑을 세우고 그 안에 전신(全身)을 모셨읍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지공 화상이 구름 위에 서서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장사 지내러 온 수천, 수만의 대중이 그것을 보고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였읍니다. 그
많은 사람이 멀마나 환희심을 내었겠읍니까?
그 일을 기념하여 개선사(開善寺)라는 절을 짓고 천하에서 으뜸가는 탑을 세우게
하였읍니다. 더디어 나무로 지은 그 탑이 다 만들어지자, 무제는 비로소 '아차! 잘못했구나. 지공스님께서 돌아가실 때 당신의 탑이 무너질 때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는데, 목조탑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그리하여 그 탑을 헐고 새로이 석조탑을
짓기로 결심하고는, 사람들에게 시켜 그 목조탑을 헐기 시작하였읍니다. 바로 그때 후경이 쳐들어와서 양 무제는 망하고 말았읍니다.
양 무제가 어느 때인가 지공 화상께 이렇게 물은 적이 있읍니다.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읍니까?"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목의 두 곳을 가리켰읍니다. 그 때에 무제는 '무슨 말씀인가, 목이 달아난다는 뜻인가?'
하고 의아해 하였읍니다.
나중에 후경이 쳐들어오자 그제서야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었읍니다. 지공스님이 목을 두번 가리킨 것은
바로 목 후(喉) 자, 목 경 자를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지공화상 진영]
불국토를 만들겠다는 원력을 세운 지공스님이 계셨는데, 주문을 외우면 동쪽에도 있다가 금방 서쪽에도 있고 하니까. 양나라 무제(464~549)는 아주 요사스러운 중이다 해서 잡아다가 궁 안에 있는 감옥에다 가둬 버렸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나기를 지공화상이 여전히 시장에도 나타나고, 당신의 절에서 강의도 하고, 그런다는데, 그래서 사람을 시켜서 조사해봐라 그랬습니다.
조사해보니 여전히 지공스님 당신의 절에서 강의도 하고 또 서울에도 나타나고 부산에도 나타나고
그런가하면 여전히 옥안에 지공스님이 있어요. 깜짝 놀랬습니다.
양무제가 몸소 감옥에 가서 지공스님을 찾아뵙고 사죄를 드립니다.
「제가 큰 죄를 지었나이다. 제가 궁으로 모시고 가서 공양을 올리겠습니다.」그래서 궁으로 갔습니다.
지공 화상이 여러 법문을 죽 하십니다.
공덕이야말로 참으로 이 세상을 새로운 세계로 만드는 조건이다.
그래서 ①공덕을 많이 지으라고 합니다. ②그 다음에 경전 독송을 할 것을 권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황제까지 될 수 있는 공덕을 지을수 있게 되느냐?입니다.
양무제는 전생, 전생, 또 전생 과거 전생에 지나가는 스님이 더위에 지쳐서 쓰러진 것을 보고
물과 삿갓을 공양 했습니다. 그 공덕으로 내생에 황제가 됐다고 합니다.
양무제는 지공선사가 말하기를 양무제는 그 이 지공선사가 말하기를 하루는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님! 스님하고 대왕하고 무슨 관계, 과거에 무슨 관계였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과거에 내 제자였다. 내 제자였는데 그 놈은 밤낮 공부는 잘 않고
부처님한테 절은 열심히 하는데 공부는 않고 사람 사람들 사귀고 베푸는 것을 좋아 하더구나.
그러더니 황제가 된 거야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양무제를 제도하기 위해서 세상에 지공화상이 한 번 더 왔다 그랬습니다.
양무제가 그렇게 죽게 된 동기가 곧 또 나옵니다.
나오기 전에 지공화상이 시 지은 게 있어요.
서너 구절을 송하여 드리겠습니다.
보시는 마치 우물속의 샘물과 같아
아침에 가서 길어오면 저녁에 보충이 되며
3일 아침을 길러가지 않으면
우물물이 어찌 가득 솟아 나오겠는가.
부귀하고 빈궁함에는 원인이 있으며 속세의 인연으로 정해진 것이니 억지로 구하지 말지니라.
봄에 종자를 뿌리지 않았으면서 빈손으로 황무지 밭에서 가을에 수확을 바라지 말라.
한 방울의 물이모여 강을 이루듯 복을 많이 쌓고 조그마한 보시가 감은(感恩)의 파도를 이룬다네.
믿기지 않거든 양무제를 보시라 과거 생에 삿갓 하나 보시하여 왕이 되었다네.
양무제는 경전을 보면서 수행도 열심히 하며,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하고 지공(志公) 선사를 더욱 더 잘 모셨다.
그러나 양무제의 황후 치(眼)씨는 인과를 믿지 않고 궁인들을 질투하였다.
또한 양민을 괴롭히고 삼보를 공경하지 않았으며, 지은 업이 매우 무거웠다.
그러던 황후는 요절하여 죽은 후 양무제의 꿈에 나타나 “저는 구렁이의 몸을 받아 몸을 감출 곳도 없으며, 배가 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또한 온몸의 비늘 속에 독충이 피를 빨아먹으니,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양무제는 부부의 옛정을 생각하여 지공 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어떻게 하면 황후를 천도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귀중한 법문을 얻게 되었다.
양무제는 마음으로 참회를 구하게 하고, 참회도량을 세웠다. 아울러 500명의 고승을 청하여, 경전에서 찾아 10권의 참회문을 기록하였다. 이것을 ‘양황보참’이라 한다.
양무제는 삼보의 가피를 받아, 황후의 영혼이 현신한 구렁이를 이끌어 참회 천도도량의 단 아래 오게 하였다.
스님들이 단에 올라 예불, 송경하면서 단을 돌았다. 과연 황후는 삼보의 은혜를 받아 구렁이의 몸을 벗고, 천인(天人)의 몸을 얻어 구름 속에서 몸을 나타내면서 감사의 예를 올리면서 사라졌다.
그래서 매년 ‘수륙재〔무차수륙재의〕 법회’를 거행하는데, 그 목적은 과거세의 부모 친지들을 천도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
세월이 많이 흐른 어느 하루는 양나라의 양무제가 지공화상께 물었습니다.
「화상께서는 이 나라가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지공화상께서는「내 탑이 무너질 때까지」라고 했습니다..........
그 양무제는 지공스님이 돌아가실때가 된걸 느끼고 이번엔 제가 언제까지 살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목을 앞을 한 번 만지고 뒤를 한 번 떡 만졌습니다.
여기는 한자로 쓰면 후, 인후 喉, 이비인후과 있지요
그 후자입니다. 목구멍 후(喉), 경(頸)은 뒤목의 경추경(頸)자, 그러지요
그런데 무슨 소린 지를 몰랐어요.
지공스님이 돌아가시자 큰 절을 짓고 지공 화상 탑이 높이 올라가야 되는데
마음이 급해서 공기가 빠른 목탑을 빨리 세우라 했습니다.
8층정도..... 8층 목탑을 장엄하게 얼마나 좋습니까.
목탑을 다 짓고 나서 아차 했습니다. 뭐죠?
이 나라가 언제까지 간다고?....... 탑이 무너질 때 까지라고 그랬죠.
깜빡 잊어버렸네.
석탑을 세워야 되는데 그래야 오래 갈 것인데
목탑을 세웠으니 목탑이 저게 얼마 못 갈 것 같애. 다시 목탑을 무너뜨리라고 했습니다.
석탑을 다시 지으려고.... 목탑이 다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자기 신하중 후경이라고 하는 가장 아끼고 믿었던 신하가 반란을 일으켜 양무제를 칩니다.
믿었던 자기 신하의 손에 의해 바위굴 속에 갇히게 되었다.
처음엔 원망과 저주로 시간을 보냈지만 차츰 맘을 바꾸더니, 신심이 돌발하여 바위굴을 법당 삼아 공부를 하게 되었고
결국 활연대오하여 여기 바위굴에 갇힌 전생의 연유를 보니
이 몸의 전신은 포수요. 나를 가둔 나의 신하는 전생 바위굴에 내가 가두어 죽인 원숭이였다.
인연 따라 주고받는 응보 누굴 원망하고 무엇을 슬퍼하리오.
아들들에게도 원수 갚지 말라고 유언도 하였다.
[지공화상 진영]
[서천백팔대조사 지공대화상]
지공화상(誌公和尙)은 인도 마가다(Magadha)국 만왕(滿王)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여덟 살에 나란타사 율현(律賢)을 스승으로 계를 받는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서 깊은 사원이자 대학이었던 나란타사는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폐교가 되고, 지공화상은 이 대학의 마지막 졸업생이 된다. 그 헛헛함을 달래려 했던 것일까.
지공화상은 19세 이후 인도 전역의 순례를 마치고 중국 원나라에 들어와 교화를 편다. 특히 원나라 천자를 만나 불법을 강론하매 천자의 총애가 지극하였다.
지공화상은 바로 이 무렵인 1326년(충숙왕 13) 3월 고려땅에 들어와 1328년 9월까지 2년 반 동안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 개경 감로사(甘露寺)와 숭수사(崇壽寺), 인천의 건동선사(乾洞禪寺), 양산 통도사 등 전국 사찰을 방문해 법회를 연다.
지공화상은 특히 선(禪)사상과 무생계법(無生戒法)의 계율관을 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불교는 나말을 기점으로 폭넓은 계층에서 선불교가 중흥되었던 터에, 한 이국(異國) 스님에 의해 수행자로서 투철한 지계정신을 재충전받으며 크게 고무됐던 것으로 보인다.
입국 이후 3년도 채 안되는 이 기간 동안 고려불교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지공화상을, 위로는 왕에서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크게 환대했다는 기록이 그 같은 사실을 엿보게 한다.
전국 순회법회를 마치던 그해(1328), 회암사의 지형이 마치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인도땅의 나란타사와 흡사하다는 데서 절 짓기를 시작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절터를 보고 한눈에 인도의 나란타사를 떠올렸다면 중창의지의 발로는 자연스런 것이었으리라.
지공화상이 이곳 회암사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다. 지공은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고려인이 지어준 법원사(法源寺)에서 불법을 편다. 1348년부터 11년간 원나라에서 공부한 나옹은 3년 동안 지공화상 문하에서 법을 배우고 3번이나 찾아가 법을 물어 마침내 심인(心印)을 전수받는다.
또한 이무렵 고려국 유학생이었으며 뒤에 무심선(無心禪)으로 유명했던 백운 경한(白雲 景閑, 1298~1374), 나옹의 제자가 된 무학 자초(無學 自超, 1327~1403) 등이 지공화상 문하에서 불법을 배웠으니, 고려 말 조선 초 불교를 주도했던 인물들에게 다시금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고려로 들어와 국경을 넘나들며 법을 폈던 이국의 한 유능한 선사는 1363년(공민왕 12) 연경 천수사(天壽寺)에서 입적에 든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372년 제자 달예(達睿)가 영골을 모셔왔고, 공민왕은 명을 내려 이곳 회암사에 부도와 부도비를 세우고 사리를 안치하니 나옹이 그 일을 담당했다.
지공화상에 관한 이 같은 내력은 목은 이색(李穡)이 지은 지공화상 비문 ‘서천제납박타존자부도명병서’(西天提納薄陀尊者浮屠銘幷序)에서 밝혀졌다.
지공화상의 뒤를 이어 회암사를 전국의 중심사찰로 만든 이는 고려 말 불교의 찬란한 거목으로 첫손에 꼽히는 혜근 나옹선사이다.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맞이하고 불문(佛門)에 든 나옹은 회암사로 들어와 수행 정진하다 깨달음을 이뤘으니 불과 24세 때였다.
나옹은 이때 지공선사에 대한 정보를 훤히 입수해두었을 터였고, 어지간히 존경심을 키워둔 뒤였을 것이다. 나옹은 1348년(충목왕 4) 원나라 유학길에 오르자마자 곧장 법원사로 향해 지공선사를 찾는다.
원나라에 머문 11년 동안 처음 3년간을 지공의 회상에서 정진하고, 항저우(杭州) 휴휴암(休休庵)·정자선사(淨慈禪寺)에서 수행하다 임제종의 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서 법을 받는다.
그뒤 지공선사를 세번째 찾아뵙고는 또다시 법맥(法脈)을 이어받으니, 나옹은 드물게 두 스승에게서 심인을 전수받은 경우가 된다.
원나라 황제의 청으로 광제선사(廣濟禪寺)에서 개당법회를 열기도 했던 나옹은 광활한 중국땅을 돌아보고 귀국, 이번에는 공민왕과 태후의 청이 곡진하여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서 내려와 대궐로 발길을 옮겨 선법의 요체인 심요(心要)를 설한다.
이때부터 고려땅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고, 이곳 회암사에서 수행자와 일반 대중에게 불법을 펴 고려 말 불교를 새롭게 부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나옹선사는 4년에 걸친 중창불사를 마치고 회향법회를 하는 날 회암사를 떠나 밀양 영원사로 가다가 여주 신륵사로 말머리를 돌려 거기서 입적한다. 1376년(우왕 2) 5월 15일, 세수 57세였다.
나옹선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자초(自超) 무학대사는 1327년(충숙왕 14)에 태어났다. 지공화상이 인도에서 들어와 회암사를 지은 바로 다음해다.
18세에 혜감(慧鑑)국사의 제자 소지(小止)선사의 제자로 출가한 뒤 용문산 혜명(慧明)국사 밑에서 공부하고 평북 연변 묘향산에 들어가 수도한 무학대사는 훗날 지공화상의 법손자가 되어 이곳 회암사를 일으킨다.
무학이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화상을 만난 것은 1353년(공민왕 2). 이듬해, 역시 원나라에 들어와 지공화상의 법을 받고 있던 나옹화상을 법천사(法泉寺)에서 만났을 때, 나옹은 대번에 무학의 큰 그릇을 알아봤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뒤 나옹은 무학에게 “서로 안다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다 해도 마음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와 나는 이제 한집안이다” 하였다.
이들은 그렇게 법제자와 스승으로 맺어졌으나, 법맥전수(法脈傳授) 의식은 2년 뒤 고려에 귀국한 다음 천성산 원효암에서 불자(拂子)를 내려 치러졌다. 1371년 나옹이 왕사가 되어 송광사에 머물 때는 의발(衣鉢)을 내림으로써 거듭 당신의 살림살이 모두를 무학에게 전한다.
무학대사는 벌써 스승의 운명을 점쳤던지 모르겠다. 1376년 회암사를 중창한 스승 나옹은 무학을 불러 수좌(首座)를 삼고자 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길을 떠났으니 말이다.
바로 그해 나옹은 왕명으로 회암사를 떠나다가 열반했고, 무학은 전국의 명산으로 숨어들어 행각하면서 자취를 보이지 않았다. 공양왕이 왕사로 삼고자 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은둔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만난 것은 바로 이무렵.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설봉산 토굴에 머물던 무학대사를 찾아와 꿈 해몽을 부탁했다.
“꿈에 무너진 집에 들어가 서까래 3개를 지고 나왔습니다. 또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지는 꿈을 꾸었는데 무슨 징조인가요?” 하는, 너무나 잘 알려진 내용이다.
무학대사는 장차 백성을 다스릴 임금이 되는 꿈이니 발설을 삼가라고 일러주었고, 이로부터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조선 건국의 주역과 조언자로 깊은 관계가 형성돼간다.
이성계는 새 도읍의 터잡기 작업을 하면서 무학대사와 늘 동행해 다스림에 대한 담소를 거듭하며 의지처로 삼았다.
건국과 함께 무학대사를 왕사로 책봉해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라는 긴 호를 내렸다.
이에 무학대사는 화답이라도 하듯 태조에게 법을 내린다. “유교는 인(仁)을 말하고 불교는 자비를 가르치지만 그 작용은 하나이며,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필 때 백성의 어버이가 되고 나라는 절로 부강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법문과 함께 옥에 갇힌 사람도 방면해줄 것을 청원했다. 태조는 대사의 말대로 정치할 것을 약속하고 죄수를 풀어주었으며, 이곳 회암사에 대사를 머물게 한다.
태조가 한 나라의 임금으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무학대사를 초청, 슬쩍 농을 걸기를 “대사는 꼭 돼지와 같구려” 하였는데, 무학대사는 의외로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지요” 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훗날 태조가 아들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권력의 무상함을 곱씹으며 쓸쓸함을 달래고 위로받던 곳도 무학대사가 있던 회암사였다. 이곳에서 운명을 같이했던 그들의 자취도 향훈도 가신 지 오래다.
1398년, 무학대사도 왕사 자리를 내놓고 용문산과 금강산으로 옛 발자취를 따라 머물다가 1405년(태종 5)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서 열반에 든다. 세수 78세. 함허 기화와 사명대사 등의 제자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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