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송(墓地頌)
박두진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髑髏)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문장』 5호, 1939.6)
[어휘풀이]
-북망 : 북망산의 준말. 무덤이 많은 곳이나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을 이르는 말. 중국의 베이망(北邙)산에 무덤이 많다는 데서 유래한다.
-촉루 : 해골
[작품해설]
「묘지송」은 「향현(香峴)」과 더불어 정지용에 의하여 초회 추천된 작품으로, 당시 문단에서는 경이로움과 충격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묘지’에서 느낄 수 있는 일반적 통념을 뒤엎었을 뿐 아니라, ‘죽음’을 ‘부활’의 높은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킨 박두진의 탁월한 시작 능력이 발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소재호 하는 작품들은 대개 비애감·공포감·허무감 등을 주조로 하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죽음’이 정반대의 시각으로 부활의 이미지로서 형사화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생의 종착점이 아닌 새로운 생명이 부활하는 영생지(永生地)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죽음은 결코 두려움이나 무상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밝고 환하고 빛나는 곳으로 묘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삶의 폭넓은 긍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주검에 대한 찬미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멧새의 의성음(擬聲音)으로써 전체의 분위기를 밝고 활기찬 것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산문 율조 또한 이 시의 건강한 호흡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1연은 시적 공간인 공동묘지의 묘사 부분으로, 무덤의 잔디를 금잔디로 미화함으로써 묘지의 일반적 느낌을 제거시키고 있다. 2연에서는 무덤 속의 촉루와 주검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촉루와 주검을 ‘하이얀 촉루’와 ‘향기로운 주검’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인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강렬한 긍정적 인식을 엿보게 한다. 3연은 시인의 생사관이 드러난 부분으로, 살았을 때 서러웠던 삶이니 죽어서 서러울 것이 없고, 오직 무덤 속을 환하게 비출 태양만이 그리울 것이라는 내용이다. ‘서러운 삶이 끝났기에 오로지 슬프지 않다.’는 역설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일제 치하의 암흑기를 살던 당시 우리 민족의 힘겨운 생존과 무관하지 않으며, 주검이 태양을 그리워한다는 표현은 시인이 죽음을 삶의 연장선으로 보는 데서 기인한다. ‘무덤 속을 비출 태양’은 현실적으로 자유의 태양, 즉 보다 나은 세상의 도래를 뜻하고, 종교적으로 영혼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신생(新生)의 갈망’으로 대표되는 시인의 미래 지향적 초극의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4연은 주제연으로 봄날의 무덤의 모습을 느껴지기까지 한다. 게다가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의 의성어의 효과적 활용은 주검에 생명감과 활기를 불어 넣어 준다.
[작가소개]
박두진(朴斗鎭)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40년 『문장』에서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낙엽송(落葉頌)」, 「의(蟻)」, 「들국화」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56년 제4회 아세아 자유문학상 수상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1970년 3.1문화상 수상
1976년 예술원상 수상
1981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정년 퇴임
1984년 박두진 전집 간행
1989년 제1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1998년 사망
시집 : 『청록집』(1946), 『해』(1949), 『오도(午禱』(1953), 『거미와 성좌』(1962), 『인간밀림』 (1963), 『하얀날개』(1967), 『고산식물』(1973), 『사도행전』(1973), 『수석열전』(1973),
『속 수석열전』(1976), 『야생대(野生代)』(1981), 『에레미야의 노래』(1981), 『포옹무한』 (1981), 『박두진시집』(1983), 『박두진=한국현대시문학대계 20』(1983), 『박두진전집』 (1984), 『별들의 여름』(1986), 『그래도 해는 뜬다』(1986), 『돌과 사랑』(1987), 『일어 나는 바다』(1987), 『성고독』(1987), 『불사조의 노래』(1987), 『서한체(書翰體)』(1989), 『가시 면류관』(1989), 『빙벽을 깬다』(1990), 『폭양에 무릎 꿇고』(1995), 『숲에는 새 소리가』(1996), 『고향에 다시 갔더니』(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