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EBS
절망을 이기는 철학 제자백가 – 묵자
정의 없는 세상에 분노할 때
기원전 771년 야만족과 결탁한 제후들에 의해 주나라의 수도 호경이 함락당합니다.
고대 4대 폭군중 하나인 유왕도 이들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유왕의 죽음과 함께 300여년 지속된 주나라 왕실의 권위는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낡은 왕국의 시대 뒤에 춘추전국시대라 불리는 500년간의 난세가 시작됩니다.
춘추전국 시대는 단지 전쟁이 많아서 난세가 아니었습니다.
기존의 가치가 송두리째 붕괴하고 전쟁이 일상화 하면서 약자들의 삶이 철저히
짓밟히는 절망의 시대였습니다.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하고 끝내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게
하는 세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름 그대로 전국시대는 혼란과 폭력을 의미 합니다.
이시기에 인류가 그동안 의지하고 살아온 기본적인 원칙, 가치와 이념이 모두
상실됐습니다.
하지만
절망과 어둠은 오히려 새로운 생각의 밑거름이 됩니다.
절망적이기에 더욱 절실한 마음으로 희망을 찾아 나선 이들
세상의 고통에서 눈 돌리지 않고 짓밟히는 이들의 편에 서서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생각의 폭발을 보여준 그들을 우리는 제자백가라
부릅니다.
기원전 440년
강대국 초나라에 초라한 행색의 사나이가 찾아옵니다.
그의 이름은 묵적 묵자라는 이름의 존칭으로 불리던 그는 송나라에 대한 초나라의
공격을 막기 위해 단신으로 초나라의 수도를 찾은 것입니다.
공수반이 초나라를 위해 운제를 제작 했습니다.
초나라는 운제라는 살상력이 강력한 무기를 이용해 북쪽의 작은 나라인 송나라를
공격하려 했던 것입니다.
운제라는 위력은 당시에 성을 공략하기에 더 좋은 장비가 없었습니다.
송나라를 위해 왔지만 사실 그는 송나라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송나라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며 벼슬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조국도 아닌 송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초나라를 찾아온
것일까요?
그리고 강대국 초의 대군에 맞서 혼자만의 힘으로 어떻게 전쟁을 막으려는
것일까요?
고대 중국의 설화에 따르면 초나라 남쪽에 교라는 부족이 살고 있었다합니다.
그런데 이 부족에게는 기괴한 풍습이 하나 있었습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잡아먹는 것이죠.
이를 의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먹어보고 맛이 좋으면 임금에게 바치는데 임금은 그 아비에게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끔찍하고 잔인한 풍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묵자의 생각은 조금 달랐습니다.
묵자는 말합니다.
중국의 풍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터에서 그 아비를 죽게 만들어 놓고 그 아들에게 상을 주는 것은 그 자식을 먹고
그 아비에게 상을 주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어떻게 야만인들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것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묵자가 초나라로 찾아간 기원전 440년 무렵은
춘추전국시대 중에서도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습니다.
춘추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춘추시대는 비교적 평온 했습니다.
이후 중국은 전쟁이 계속되는 전국시대로 들어섭니다.
수세기 동안 죽음은 일상이 되었고
중원에서 벌어지는 주요 제후국들의 무력 충돌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전국시대의 전쟁은 무척 잔혹했습니다.
전쟁 중에 발생하는 포로를 식량을 축내고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벼랑에서 밀어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잔인해지면서 아무 힘없는 보통 사람들의 삶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직접 잡아먹지 않을 뿐이지 서로의 자식을 잡아먹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로까지 전락한 것입니다.
어떤 풀이 시들지 않으리오.
어느 날에 행군이 끝나리오.
어느 누가 부역을 피하리오.
사방에 전쟁이요. 부역이라오.
어떤 풀이 마르지 않으리오.
어느 누가 홀아비가 아니리오.
슬프다 나는 군인이 되어
어찌 악한 백성이 되었는가?
(시경: 소아의 하초불황 중에서)
하지만 세상이 온통 전쟁에만 골몰하고 있던 그때 약소국을 침략하는 것이 강대국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던 전국시대에 강대국에 침략전쟁에 온몸으로 맞선
평화의 전사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묵자와 그의 제자들 이었습니다.
묵자의 성씨인 묵은 중국어에서 검은색을 뜻합니다.
고대에는 죄인이나 천민의 얼굴에 문신을 새겼는데 이것을 경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그들이 천민 이었고 묵은 그들이 형을 선고받은 죄인이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사회의 최하층 계급에 속했습니다.
이것이 묵자의 성씨 묵의 의미입니다.
다른 이들은 묵이 목수가 사용하는 도구인 먹줄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묵자가 목수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문신한 선생이 아니라 건축으로 유명한 먹줄 전문가였다는 것이죠.
또한 이는 공성 무기에 정통한 묵자를 설명해줍니다.
묵자의 군사부분 저자는 군사기술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냥 만들어 낸 것이 아니란 것이죠.
묵자와 그들 집단은 목수와 직공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기술들을 잘 아는 이유가 설명 되죠.
거기에 농민들까지 참여해서 조직이 만들어 졌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낮은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중심을 이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묵자가 전쟁을 반대한 이유는
그들이 하층민이었다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묵자는 전국시대 초기 사람으로 정의 없는 혼란한 전쟁의 시국에 처해 있었습니다.
전쟁은 여러 재해 중 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파괴력이 가장 강한 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사회는 쇠퇴 합니다.
묵자는 서민의 편에 서서
농민이나 사회 최하층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해
무엇보다 민생을 돌볼 것을 주장했고 이러한 상황을 아주 가슴 아파했습니다.
세상이 이토록 어지럽고 백성들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냐?
바로 전쟁 특히 불의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자는 노동자와 백성들을 대신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묵자와 그의 제자들은
단지 평화를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들이 직접 약자의 편에 서서 전쟁터에
나선 것입니다.
첫댓글 혼란의 춘추전국시대가 500년간이나 지속되었군요 영화 묵자도 있는데 볼만합니다
알던 이야기지만 이렇게 만나게 되니 처음 접하는 이야 기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문득 고구려를 떠올려 봅니다.
고구려....................답답한...마음이...........
묵가군 저희카페도 묵가군처럼 뭉쳐서 난세를 돌파해야죠
세상에는 죽을힘을 다해서 전쟁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중궈화족과 백두산족의 첫싸움이 치우단군과 헌원의 탁록대전입니다
지금의 중국대륙에서 변방에서 백두산족 헌원씨가 중궈화족과 동물을 숭상하는 씨족을 연합해서 단군이 다스리던 하은주 나라의 이전 시대, 우리에게는 단군 동이 12족(몽골족,훈족,흉노족,숙신족 등등) 의 홍익인간 재세이화로 대표되는 동이족의 문화에 반기를 든 첫싸움이고 전쟁입니다
현재 고대의 역사를 증거하는 실증주의와 성리학 후 조선시대에서 사대주의로 고구려 이전 시대의 고대 동이족의 역사를 금서로 지정하여 고대역사를 소실한 역사가 있습니다
바이칼 호수와 만주벌판 백두산은 우리의 정신적인 고향입니다 이것을 말살하려 했던 식민학자 이병도의 업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