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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 30. 허락지 아니하고 31. 민망하여 32. 악한 종아 33. 불쌍히 여김 같이
마 18: 30. 허락지 아니하고 -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그 종은 그 동료의 청을 허락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가두었다.
그는 자기가 주인에게 1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것을 기억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 큰 은혜를 기억하였다면, 그는 100데나리온 정도의 빚은 기꺼이 탕감해 주었을 것이다.
1]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가 거절했다(허락치 않았다)'는 동사의 미완료형인 '우크 에델렌'(*)은 채무자가 계속적으로 간청함에도 불구하고 이 채권자가 용서하기를 싫어하여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하여 준 임금에 비해 그 종의 마음이 얼마나 딱딱하고 완고했는가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별히 허락하다'는 뜻의 헬라어 '델로'(*)는 '사랑하다'는 뜻을 내포한 단어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상대방의 하찮은 소청이라도 들어줄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사랑이 없는 마음을 가진 자는 또한 이웃의 눈물 젖은 호소를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지게 된다.
2]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27절과 대조가 되는 구절이다.
임금은 그를 놓아보내었으나(석방)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채무자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투옥). 25절의 경우와 같이 가족과 소유를 다 파는 것이 언급되지 않았는데, 채무액이 소액이기 때문이다.
돈을 지급할 때까지 사람을 구속하는 일이 언급되었다.
* 마 5: 25-26 –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고대 사회에서는 채무자를 투옥시키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Deissmann).
본문과 같이 일백 데나리온 때문에 옥에 갇힌다고 하는 일은 억울한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헐값의 노예라고 할지라도 당시에는 오백 데나리온에 팔렸다.
그의 빚보다 더 많은 액수로 사람을 파는 일이 불법이듯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구속하는 일도 잘못된 일이었다.
임금에게 지불 기간의 연장을 요청했던 그가 자신의 채무자의 지불 기한 연장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구속한 사실은 그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 주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특히 우리가 서로를 용서해야 할 근거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일만 달란트의 빚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비유하며, 백 데나리온의 빚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범한 잘못을 비유한다.
하나님께서 일만 달란트의 빚과 같은 우리의 죄, 곧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했던 죄를 용서해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의 잘못을, 그것이 어떠한 잘못이라 할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3] 용서를 모르는 종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는 계속해서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순간들을 경험한다.
항상 하나님께 빚진 자로서 살아가는데 그 빚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갚을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갚으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갚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웃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진 빚을 갚도록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기회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자기중심이므로 이것을 망각하고 기회를 잃어가면서 인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본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것을 지적하시며 바르게 살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1) 긍휼 없는 인간의 본성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① 인간 본성의 부패
첫째 아담을 통해서 들어온 죄는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부패시켰다. 이것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며 인간들끼리도 분열되었다.
선악과에 현혹된 인간의 마음은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욕심을 품게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게 사용되어져야 할 돈이 오히려 사람을 죄짓게 하는 도구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죄의 근원이 욕심이라면 나 자신의 조그만 욕심이 책임자다. 욕심이 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 욕심이 형제를 욕하고 옥에 가두는 것이다.
② 부패한 인간의 모습
본 비유에서 채권자는 채무자를 어떻게 대합니까? 먼저 ‘붙들었다’고 햇다. 부패한 인간은 이웃의 자유를 박탈한다. 놓아주지 않고 잡아서 복종시키려 한다.
다음은 ‘목을 잡고’ 윽박지른다. 목을 잡는 행위는 죽이려는 위협이다. 부패한 인간 세계에서는 남의 자유를 박탈하기도 하고 자신의 자유를 박탈당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생명을 죽이기도 하고 생명을 잃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와 생명을 파괴하는 인간의 행위에서 부패한 자신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고 있다. 억누르거나 억눌리는 일체의 모습을 하나님은 결코 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③ 용서가 없는 인생
욕심으로 채워진 인간의 마음은 하늘을 가리우고 자연을 황폐화시킴으로써 인간 서로 간의 인정마저 고갈시키고 있다.
죄된 본성의 청산이 시급한 이 때에 욕심의 살을 찌우기 위한 무수한 노력들이 이웃과의 단절을 가속화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영혼을 스스로 죽이고 있다.
사랑이 식어진 영혼은 죽은 것이다. 용서는 사랑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으며 부패한 본성에서는 나올 수도 없다. 하나님의 용서를 맛보지 않는 자는 용서 없는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잊음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① 잊을 것과 기억할 것
사람들은 사소한 일은 기억하면서도 중요한 일은 잊고 사는 것 같다. 빌린 돈은 잊지만 빌려준 돈은 잘 기억한다. 도움 받은 것은 쉽게 잊지만 도와준 것은 잘도 기억한다. 자신을 높이는 일은 빠짐 없이 기억하는가 하면 낮아지는 일은 애써 잊으려 한다.
문제는 중요한 것을 망각한다는 사실이다. 죄된 성품은 완전히 잊혀질 수록 좋다. 그러나 죄된 성품을 깨닫게 한 것까지 잊어서는 안된다. 망각할 것과 기억할 것은 엄연히 있으되 자신이 받은 것, 낮아지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부족한 것을 알아야 성장하기 때문이다.
② 은혜를 잊음
용서하지 않는 종은 잊을 것을 기억하고 기억할 것을 잊은 어리석은 자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만을 기억한 무지한 자다. 임금과 자신의 관계를 자신과 자신의 친구의 관계에서 적용하지 못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탕감해 준 분은 바로 하나님이다. 값없이 얻은 것을 비싸게 매매하려고 한 종은 누구입니까? 우리 자신이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수확을 기대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어리석은 자다.
③ 은혜를 기억하는 자의 즐거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는 감사의 생활로 나난니다. 그래서 이웃을 용서하게 되고 또 용서함으로 이웃과의 관계도 화목해진다.
감사와 용서, 그리고 화평은 그 내용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결과다. 은혜를 기억하려면 생각해야 한다. 무엇이 은혜인가를 생각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 이것을 성도는 기도라고 한다.
요구하고 달라는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기꺼이 참여하리라는 기도다. 수동적이고 타성에 끌리는 기도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기도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신앙인은 짧은 즐거움으로 만족하지만 생각하는 신앙인은 영원한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3) 하나님을 배워야 함
①포용하시는 하나님
성도에게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미처 사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말이다. 도저히 인간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범죄라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죄인은 무엇인가 불안하고 도저히 메꾸지 못할 정도의 공허함이 마음에 있다. 세상 법은 그저 몸 하나만을 사회와 격리시켜 죄인을 방치하지만, 하나님은 불안함과 공허함까지 메꾸어 주시므로 그토록 중요한 자유를 그냥 조건 없이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범죄를 근본적으로 차단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야 한다.
② 거룩한 분노의 하나님
성을 내거나 분노하는 일이 결코 신앙인의 모습은 아니다. 신앙인은 온유하며 항상 부족한 것을 깨닫는 겸손한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가 깨어진다면 신앙인은 제사장 적인 자세에서 예언자적인 자세로 바뀌어야 한다. 용서하지 않는 종을 심판한 임금의 진노는 하나님의 노여움이다. 하나님의 질서가 깨어진 것에 대한 예언자들의 분노, 이것을 거룩한 분노라고 한다.
세상의 분노는 질서를 깨뜨리지만 거룩한 분노는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 세상의 분노는 복음을 가리우지만 거룩한 분노는 복음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을 가린다. 때문에 우리는 분노하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배워야 한다.
③ 사랑의 하나님
모든 인간에 대한 차별 없는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차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진노하시는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이다. 다툼과 분쟁으로 상처 입은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화평을 이루시기 위한 사랑의 행위다.
너무 많은 물질로 죄를 지을 것 같아 필요한 것만큼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지금 많은 재물로 허덕이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필요 없는 것들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거저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기 때문이다.
마 18: 31. 민망하여 -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
그 종의 동료들은 그가 용서치 않음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였다.
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받은 사랑을 주는 사랑으로 환원하지 못하는 자는 참사랑을 모독하는 자이다.
옥에 갇힌 동료들의 친구들이 그 일을 보고 그들의 마음이 심히 민망하였다.
2]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그들이 임금에게 가서 그들이 본 사실을 일일이 다 보고하였다.
마 18: 32. 악한 종아 -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
주인은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붙였다.
1]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첫 번째 부름이 회개의 호출이었다면 두 번째의 부름은 정죄와 심판에의 호출이었다.
이 지상에 모든 불의한 자, 형제 사랑을 외면하는 자는 두 번째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
* 사 63: 4 -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이 부름 이후에는 영원한 투옥과 영원한 형벌만이 있을 뿐이다.
2]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1) 악한 종아
25장에서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에 대해 주인이 책망한 말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 마 25: 26 -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악한'이 붙은 이 말은 왕의 유죄 선고를 의미한다.
* 마 7: 23 -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마 25: 41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 눅 19: 22 -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이 한마디에 의해 전에 그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특사(特赦)의 은전은 상실하게 되었다.
'악한 종'이란 말이 종말의 심판에 관한 말씀 중에서 종종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이 채권자가 그의 큰 빚을 갚지 못한 대가로 끝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2) 네가 빌기에(*, 파레카레사스)
'간청하다'의 뜻인 '파레카레오'(*)의 과거형으로 여기에서는 26: 53에서와 같이 '단순히 한 번 간청한 것으로 충분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 마 26: 53 -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본문의 경우 과거의 계속된 동작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을 사용하지 않고 어떤 동작이 일어난 것만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을 사용한 것은 용서가 빚진 자의 간청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무한한 자비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마 18: 33. 불쌍히 여김 같이 -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
주인은 그 종에게 그가 베푼 것과 같은 긍휼을 그도 그의 동료에게 베풀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 종은 그 주인에게 긍휼을 입은 것과 같이 그 자신도 그의 동료에게 긍휼을 베풀었어야 했다.
1]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받아들인 자비'와 그가 '행했어야 할 자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문을 영적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첫 번째 자비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자비로서 두 번째 자비, 즉 사람들에게 행해질 자비를 촉구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요인이 된다.
첫 번의 자비는 은혜와 감사의 정도가 엄청난 것임에 비해서, 앞으로 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로서의 두 번째 자비는 자비를 행하는 자에게는 당연한 의무이며 도리이고, 또 은혜와 감사의 정도로 지극히 미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또 하나의 자비가 있다. 세 번째 자비는 벤겔(Bengel)에 의하면 하늘나라의 관대하신 보상(benigna talio)을 의미하는 것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 7)라는 말과 같이 성도가 장래에 받게 될 하나님의 자비를 의미한다.
2]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마땅치 아니하냐(*, 우쿠 에데이세) - 의문사 '우크'(*, 아니하냐)에서 강조하고 있는 긍정적 대답은 악한 자의 최후의 양심의 가책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해서 결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부여된 처지는 오로지 자신의 채무자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데이) 때문이다.
미완료형 '에데이'(*)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탕감 받은 이 사람에게만 계속적으로 부여된 도덕적 의무가 바로 형제, 동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땅한 일을 하였을 경우 그것은 칭찬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종은 그 동료의 청을 허락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가두었다.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
그 종은 그 동료의 청을 허락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가두었다.
설교 감사합니다.
그 종은 그 동료의 청을 허락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가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