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교 재학 시 서예 특기 장학생으로 학업을 마친 뒤 군 입대 후에도 서예로 명승을 떨친 경남도청 공보관실 윤판기(57) 사무관. 그는 창의적인 발상으로 대한민국 최초 광개토호태왕비체 한자폰트 개발과 한글 (물결체·동심체·한웅체·낙동강체) 폰트를 최다 개발해 경남도청을 비롯해 도내 88개 기관과 각급 학교 컴퓨터 1만 여대 17여억원 상당을 무료 공급한 장본인이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로 개발한 “광개토호태왕비체” 한자폰트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내세우고 있는 시점이라서 더욱 더 가치 있는 훌륭한 역사적 자료로 남기를 기대하고 있다. 윤 사무관은 무엇보다 자신이 한자인 광개토호태왕비체를 비롯해 한글인 물결체, 동심체, 한웅체, 낙동강체를 개발한 데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의령에서 출생해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초교 2년때부터 서도부에 들어간 것이 오늘 자신이 이 자리에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한 동기가 아닌가 쉽다고 말했다. 그러나 윤 사무관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결국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서예에 대해서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을 하지 못하면서 윤 사무관은 곧바로 창녕 외가에서 1년여 동안의 세월을 보내게 됐다. 그가 창녕 외가에서 보내면서 학교가 아닌 서당을 다니게 됐다. 창녕 변씨 집안의 한문서당이었다. 이후 그는 타인의 도움으로 중학교 3년을 서예 특기 장학생으로 입학 한 뒤 학업을 마쳤다. 윤 사무관에게는 중학교 졸업 이후 또 다시 고교 진학이란 난간에 부딛쳤다. 하지만 그의 서예 소질에 남달라 고교 역시 타인의 도움으로 창녕 이방면의 옥야고교에 3년 서예 특기 장학생으로 진학을 한 뒤 졸업했다. 이어 그는 군 입대를 하게 된다. 윤 사무관의 군 입대 이후에도 그에겐 서예라는 특기가 있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 시절로 노 대통령의 처남인 김복동 장군의 눈에 발탁됐다. 이후 그는 군부대 행정과에 근무하면서 전군 모필(붓으로 쓰는 글)경연대회에서 당당하게 1등을 했다. 그러자 육군본부는 그를 육군본부에 파견근무를 시킬 정도로 서예에 탁월했었다고 당시의 사연들을 소회했다. 제대 후 윤 사무관은 현재 창원에 있는 현대 위아에 7년동안 근무한 뒤 1985년 경남도로 스카우트가 됐다. 특채로 공무원이 된 것이다. 그는 당시 문화동보담당관실에 근무했다. 윤 사무관에겐 늘 특채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닐 정도로 서예에는 타인의 실력을 추종할 정도로 탁월했기 때문이다. 윤 사무관은 퇴직 이후에는 후학을 위해 매진하겠다는 소심한 입장을 밝히면서 “서예(손 글씨)가 컴퓨터에 밀려 사장되어 가고 있는 것이 너무 아쉽다”면서 “손 글씨가 정서함양에 좋다. 필요하다”며 문화예술인에 대한 대접(?)이 우리나라는 다소 부족하다면서 너무 안타깝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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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재 윤판기 사무관이 성철스님 출가 시 쓴 글귀 | 다음은 윤판기 사무관과의 일문일답.
-서예를 하게 된 동기는. ▲의령군 낙서면 정곡리 죽림마을에서 초등학교 2학년때 서도부에 들어가 각종 서예휘호대회에 출전해 수많은 상을 받았다. 초교 졸업 후에도 한문서당에 잠시 다닌 경력이 붓을 잡게 된 계기가 된 게 계기라 할 수 있다. 이 후에도 군대 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계속 손에서 몽당붓을 놓지 았다. -한문서당에 다녔다는 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 ▲없었다. 다만 가정형편이 여의치 못했다. 당시 집안이 어려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하지 못했다. 중학교 진학을 못하면서 결국 1년 동안 창녕에 있는 외가에 가게 됐다. 창녕 외가에 지내는 동안 창녕 변씨 집안의 한문서당을 다니게 됐다. 우연찮게 한문서당을 다니면서 오늘의 실력도 다지게 된 것 같다. -중·고교를 특기 장학생으로 다녔다고 했다. 그 만큼 실력이 출중했는가. ▲글쎄다. 나는 잘 몰랐다. 그런데 주변에서 나의 서예를 높이 평가해 주었다. 때문에 중고교를 특기 장학생으로 입학을 하면서 공부를 하게 됐다. 당시는 조금 부끄러워서 이야기를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게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윤판기는 누구인가. ▲경남도청 공보관실에 근무하고 있다. 5급 홍보연구원으로 도정 홍보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93년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광개토호태왕비체로 특선을 수상한 이후 한국서가협회 이사와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초대작가·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외교통상부 슬로건-국민과 함께 세계와 함께, 감사원-聽乎無聲視於無形, 중앙선거관리위원회-天下憂樂在選擧, 람사르총회슬로건-건강한 습지 건강한 인간, 대한민국경찰청슬로건-믿음직한 경찰 안전한 나라, 경남도슬로건-당당한 경남시대!, MBC경남슬로건-경남의 미래 함께 열어갑니다, UN사막화방지총회 기념 퍼포먼스-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 등 수많은 금석문을 휘호한 장본인이다. -호는 무엇인가. ▲허재(虛齎)다. -지금까지 몇번의 작품전을 가졌나. ▲개인전 7회와 초대·그룹전 300여회에 이른다. -공무원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광개토호태왕비체(KS5601기준 4888字)손 글씨 한자 폰트를 개발해 주목받고 있다. 중견작가로서 한자와 한글 폰트를 개발하게 된 동기와 배경에 대해 소개한다면. ▲서예는 어떤 예술보다도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전해 온 예술이고, 현대인의 흩어진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최고의 힐링문화라고 생각해 왔다. 예술과 생활이 양분되어 존재할 수 없는 다변화 시대에 서예술의 미적 요소를 생활에 도입, 삶의 질을 향상시킴과 아울러 우리 민족의 내면적 흥과 멋을 일깨우고 삶의 품격을 높이며, 서예라는 독특한 예술이 독창적이고 지극히 감성적인 미의식을 21세기 첨단산업과 연계시켜 폰트로 거듭났을 때 독특한 디자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컴퓨터로 필기도구를 대신한다 해서 감성 표현까지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컴퓨터 시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감성과 정신이 살아 있는 서체, 폰트의 실용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21세기 첨단 문화시대에 우리손글씨가 사장되지 않고 당당히 선도적 위치에 설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으며, 디자인계도 감성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디자인 세계를 열며 세계무대로 당당히 앞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시대는 컴퓨터를 이용해 편리한 문자생활을 하고 있지만, 딱딱한 고딕체 글씨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좀 더 자연스러운 것에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다. 폰트가 21세기 첨단산업과 만나, 현대에 와서는 각종 출판, 인쇄, 광고(방송자막) 등에서 손 글씨가 각광을 받고 있다. 따라서, 한글 물결체와 동심체, 한웅체, 낙동강체는 각각 2,350字. 폰트뱅크 (대표:손동원)에서 손글씨 폰트를 개발하였으며, 현대사회는 브랜드가치가 주목받는 시대이므로 한자 광개토호태왕비체는 4,888字. 전국에서 처음 폰트를 개발하여, 한글 한웅체와 광개토호태왕비체의 주목성이 뛰어나므로 출판인쇄광고(방송)용으로 많이 사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서체 폰트 개발자에게는 향후 어떤 인센티브가 주어지나. ▲사후 70년 동안‘디자인보호법’의 적용을 받게 되므로, 그 역사적인 가치를 더하게 된다. -한자 폰트 외 한글도 네 가지 서체나 폰트를 개발 하였다. 한사람이 한글서체와 한자서체 폰트를 동시에 개발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한글과 한자서체의 특성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먼저 물결체(한자 전서체와 한글서예를 접목한 노자의 상선약수처럼 자연과 함께 물이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한글서체)와 동심체(아이들의 마음처럼 밖으로는 천진함을 드러내고 안으로는 순박함을 간직한 동글동글한 귀여운 한글서체), 한웅체 (기교(技巧)를 부리지 않은 질박(質朴)하고 고졸(古拙)한 맛이 나며, 현대적인 감각을 살린 광개토태왕비체와 가장 조화를 잘 이룰 수 있는 한글서체), 낙동강체(태백의 황지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수천자락을 굽돌아 천삼백리를 흐르는 우리민족의 젖줄인 낙동강처럼 유연하여 참치미(參差美)를 살린 한글행서체)다. 또 광개토호태왕비체(소박(素朴)하고 장중(莊重)하며, 착한 시골아이들처럼 뽐내지 않고 우직하여 범박(汎博)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며, 광개토호태왕비 필의(筆意)를 기본으로 고졸(古拙)한 맛을 살린 한자서체)를 말한다. -광개토호태왕비체로 대한민국서예대전 특선을 받았다, 언제인가 ▲1993년이다. -광개토호태왕비체를 쓰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나. ▲제가 대한민국 최초로 개발한 ‘광개토호태왕비체’한자폰트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내세우고 있는 시점이라서 더욱 더 가치 있는 훌륭한 역사적 자료로 남기를 기대한다. -역사에 남을 수많은 금석문을 남겼다. 그동안의 성과라면. ▲필묵으로 세상과 맺은 인연(筆墨世緣)은 수없이 많지만, 성과라면 우선 경남도청 광장에 우뚝 서 있는‘경남탄생100주년기념탑’의 도민헌장비문 글씨와 역시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경남지방경찰청정원 자연석에 각석되어 있는 ‘一等慶南警察’글씨 등은 후손에 길이 남을 작품이라 생각하면서, 중앙선관위, 대한민국경찰청, 대한지방행정공제회 등 그동안 수없이 많은 글씨를 남겼지만 제가 오래전에 쓴 통영시의 ‘海底터널’동판글씨 등은 이미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므로 서예가로서 긍지와 보람을 느낀다. -저서로는 어떤게 있나. ▲윤판기서전, 묵상의 여백, 간화묵선, 묵천여정, 필묵세연 등 5권의 서집을 출간하여 경상남도 창작우수공무원으로 세 번이나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주요글씨로는 경남도문화예술회관, 창원시의회, 昌原大都護府沿革碑, 선구자노래비(마산역광장), 호암학습관, 호암이병철회장상, 경남탄생100주년기념도민헌장각석(도청광장)등을 휘호했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라면. ▲퇴직 후 후학양성에 집중해 보고 싶다. 도내 곳곳에 건립되어 있는 문화센터나 평생교육원, 주민센터에서 후학양성을 할 계회이다. 지금도 많은 곳에서 강의를 요청하고 있지만 공무원이어서 강의 요청에 응하지 못하고 있다. -전시회 중 어떤게 가장 기억에 남나. ▲직년 여름과 연말에 개최된 한전 아트프라자캘러리 초대전과 서울 인사아트프라자캘러러 한글서예 정예 작가전에 초대된 것이 가장 좋았던것 같다. 이날 20여 점을 전시해 좋은 반응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서예가 예술작품에만 그친다면 우리 글씨는 몇몇 서예가들의 전유물에 그치고 대중과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에는 “경제를 살리겠습니다” “국민을 섬기겠습니다”와 같은 각종 케치프레이즈와 책표지, 방송자막 등 특유의 감성이 살아있는 손 글씨가 유행이다. 우리글씨가 새로운 생활속 디자인으로 다시 태어나 영원한 생명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손 글씨 ‘윤판기 물결체’와 ‘동심체’‘한웅체’‘낙동강체’‘광개토호태왕비체’가 관공서는 물론 전 분야에 많이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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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원선생님! 감사합니다. 초록이 꿈결처럼 흐르는 이 좋은 계절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