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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다(1)
요 12:1-11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요 12:1-11 / [예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마26:6-13,막14:3-9]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기 엿새 전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로 가셨다. 2) 그곳에서는 예수를 대접하기 위해 잔치가 벌어졌다.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손님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3) 그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아 드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4) 그러자 예수의 제사로서 장차 예수를 배반할 자인 가룟 유다가 5) `그 정도의 향유라면 큰 돈이 될 텐데 왜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하고 나무랐다.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는 제자들의 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으면서 가끔 그 돈을 훔쳐내는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하는 대로 가만두어라. 그 여자는 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8) 가난한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그렇게 오래 있지 못할 것이다.' 9) [나사로를 죽이려는 음모] 예수께서 베다니에 오셨다는 말을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를 뵙고 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된 나사로도 보려고 그곳으로 떼지어 몰려왔다. 10)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11) 나사로가 살아남으로써 많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멀리하고 예수를 따랐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드디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가 첫 번째 머무신 곳은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의 장소인 베다니입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1-3) 예수는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를 맞은 베다니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이곳에서 마리아는 돌발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것은 삼백 데나리온의 나드향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1년 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습니다. 이것은 노예적인 행위였지만 그의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마리아는 자신의 물질과 인격을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께 온전히 드림으로 예수를 향한 극진한 감사와 신앙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유다의 비판(4-8)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이런 일에 대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마리아의 순수한 감사와 신앙을 질책하였습니다. 예수 공동체의 회계를 맡은 유다의 고백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 그는 도적이었습니다. 유다는 신앙보다 물질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마음과 신앙을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행위를 용납하라고 하시며, 그녀의 기름 부음은 예수의 거룩한 죽음을 위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일어날 일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음이러라(9-11)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죽었다가 부활한 나사로의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앞다투어 베다니로 와서 구원자 예수와 살아난 나사로를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를 대적하는 이들에게는 그를 체포할 기회였지만 많은 사람에게는 메시야 예수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많은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적용: 마리아의 신앙적인 모습과 가룟 유다의 가증한 모습은 큰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의 진실한 신앙의 모습과 가증스런 외식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사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보이는 육신의 삶은 매 순간 건강과 질병을 거치고 보이는 것에서 기쁨과 슬픔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며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허무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인생을 바칠 수 있냐는 질문에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 몇 명이나 될 수 있을까요?
< 설 교 >
은혜 받은 자의 삶
요 12:1-8 / 조상호 목사
이솝우화의 <늑대와 학> 이야기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날 늑대가 저녁을 너무 빨리 먹다가 뼈를 삼켜 버렸습니다. 그 뼈가 목에 걸려 빼려고 아무리 노력을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 때 학이 옆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여보게 친구, 내 목에 뼈가 걸려 있는데, 자네의 긴 주둥이로 내 목구멍에 박힌 뼈를 뽑아 주지 않겠나? 그러면 그 사례는 톡톡히 치르지!” 학은 늑대에게 “늑대 양반, 어디 한 번 봅시다.”하며 자신의 주둥이를 늑대의 입안에 집어넣어 늑대의 목구멍 깊숙이 박힌 뼈를 뽑아 주었습니다. ”옳지 됐어. 야, 이제 살겠다. 시원하다.“ 늑대는 자신의 목에 걸렸던 뼈를 뽑고 나서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학은 늑대에게 ”늑대씨, 사례비를 주시오. 나는 가겠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늑대가 소리쳤습니다. ”무엇이 어째? 사례비를 달라고? 너의 머리가 나의 입안에 들어왔을 때, 내가 너의 주둥이를 토막 내지 않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라고. 사례는 무슨 사례야, 내가 너를 살려 준 것만으로도 너는 나에게 감사해야해.“
우리는 이것을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은혜를 등지고 그 은덕을 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배은망덕하지 말고 받은 은혜를 잊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은혜’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은혜 받은 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베다니는 전에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리신 곳입니다. 베다니에 도착한 예수님께서 누구의 집에 들어가셨는지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동일한 사건이 언급되어 있는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문둥이 시몬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다니라는 동네의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예수님과 나사로를 비롯한 많은 동네 사람들이 참석하였고,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는 잔치 음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잔치 분위가 고조되어 있는데 갑자기 “쨍그렁!”하는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음식을 담은 그릇을 나르다가 실수로 그릇을 떨어뜨린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리아가 굉장히 비싼 향유담은 옥합을 깨뜨린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담은 옥합을 깨뜨린 후, 그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붓더니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어떤 제자는 값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며 마리아의 행동을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막14:7~9) 이 사건은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헌신의 모습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은혜 받은 자는 헌신하라
미국 시카고에 가면 무디 목사님이 세운 무디 신학교가 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살아있을 때, 한번은 수양관에 올라가는데 먼저 기도하고 내려오는 무디 신학교의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학생들이 기도하고 은혜 받고 내려오다가 무디 목사님을 만나니까 너무 좋아서 “무디 목사님, 저의 얼굴을 보세요. 지금 막 기도하고 은혜를 받았는데, 저희들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막 빛나죠?”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무디 목사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보게들, 모세는 시내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올 때 자기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걸 몰랐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은혜 받았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말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삶이 다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삶의 모습이 다릅니다. 마리아를 보십시오. 마리아는 주님의 머리와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발에 부어 드렸던 향유는 보통 향유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히말리야 산맥과 인도 일부 지방에서만 서식하고 있는 향나무에서 추출한 가장 값비싼 나드 향유였습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마리아가 고가의 향유를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평소 베다니에 오시던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통해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미 우리가 지난 3주전에도 살펴본 것처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요11:5). 거기다가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마리아는 차고 넘치는 은혜를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값비싼 향유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대단히 아까운 것이었지만, 마리아가 볼 때는 오히려 기쁨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 받은 사람은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깊은 은혜를 경험했으면 그 은혜에 감사해서 주님께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1일부터 3일 오후까지의 가족 수양회에서 그리고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의 치유세미나와 특별집회에서 주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오규목사님을 통해서 오랫동안 간직했던 쓴 뿌리들을 뽑아주시고 다른 사람과 주위 환경으로부터 상처받은 심령과 마음을 만져주시고 내적인 치유를 해주셨습니다. 육적으로도 수많은 성도들의 아픈 이빨을 치료 해주시고 금이빨로 바꾸어주시고, 팔과 다리, 허리 등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도 방언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등을 주시고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 재 충만을 통해 신앙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쁨과 평강이 넘쳐서 손을 들고 발을 구르며 춤을 추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안에 푹 잠겼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은혜 받은 후의 삶입니다.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그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라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까? 아니면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 이름 날리게 하려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으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듣지 않고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해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헌신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체험하게 하시고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받은 능력과 은사를 자랑하거나 남들과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 2003년을 맞이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많은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조상호목사 개인이 봉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필요로 하십니다. 현재 유초등부는 한국 방문 중인 선생님들을 제외하고 5명의 선생님들이 120여명의 우리 자녀들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당장 7명의 교사 선생님이 더 필요합니다. 7명이 추가되어 12명의 선생님들이 세워진다 할지라도 교사 1인당 10명의 어린이들을 교육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그래도 교사에 비해 어린이들의 수가 많습니다. 한 명의 교사가 8명의 어린이들을 맡으려면 최소한 10명이 더 충원되어 15명의 교사가 있어야 합니다. 중고등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4명의 선생님들이 6~70여명의 학생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한명의 교사가 무려 15명의 학생을 맡고 있다는 계산입니다. 중고등부에도 최소한 6명의 선생님이 더 필요합니다. 찬양팀도 자리가 많이 비어 있습니다. 어쿠스틱 기타와 베이스 기타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키보드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은 싱어들도 필요합니다. 재능은 둘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재능을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능보다도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자세를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미디어 선교팀도 손길이 필요합니다. 사운드, 비디오, 컴퓨터, 등의 파트에도 소수의 사람이 섬기다보니 문제가 발생되고 있습니다. 많은 손길이 보강되어 교대로 봉사하면 더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버스도 운전할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임시방편으로 돌아가면서 봉사하고 있지만, 성인들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교회 구석구석 봉사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 받은 마리아가 향유담은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헌신한 것처럼, 은혜를 주신 주님께 헌신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나누어 드린 <2003년도 봉사 희망지원서>를 가지고 기도하신 후 26일까지 꼭 제출하시기를 바랍니다. 년 초부터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땅에 쏟아버리지 마시고 헌신하시는 2003년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라
은혜를 받은 자는 헌신을 하되 최선을 다합니다. 은혜를 받은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 향유담은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것은 향유 몇 방울 정도가 아니라 한 근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가격으로 따지면 무려 300 데나리온이나 되었습니다. 1 데나리온은 일반 근로자 하루의 임금입니다. 그러니까 300 데나리온은 일반 근로자가 안식일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 동안 먹지 않고 쓰지 않고 1년 동안 열심히 일해야 모을 수 있는 거액이었습니다. 하루에 일당을 5만원으로 계산해도 오늘날의 돈으로 약 1,500만 원짜리 향유였습니다. 이러한 거액을 들여야만 구입할 수 있는 향유를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사실 마리아의 이러한 행동은 우리에게 엄청난 도전입니다. 우리는 콜라 한 병을 실수로 땅에 쏟아 버려도 아깝다는 생각을 하는데 마리아는 1,500만원을 부어버린 것입니다.
작년 12월20일, 우리 미션 2002 남태평양팀이 피지로부터 돌아 온 날이었습니다. 저녁 6시20분이 넘은 시간에 선교팀이 공항에 도착했기 때문에 금요집회에 참석하려면 서둘러서 공항에서 교회로 직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점심 식사를 하지 못했고 저녁식사 시간도 이미 다 되어 배가 고팠던 선교팀의 한 형제의 제의에 따라 맥도널드에 들러 햄버거와 콜라를 사서 교회 버스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교회 버스가 움직이는 바람에 햄버거와 함께 사왔던 종이컵에 담긴 콜라 한잔을 교회버스 운전석 옆에 그만 다 엎질러버렸습니다. 저는 그 때 얼마나 아까운 생각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콜라 한잔이 아니라, 맹물 한 잔이라도 땅에 부으면 아깝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저는 2불도 채 되지 않는 콜라 한잔도 아깝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리아는 1,500만 원짜리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은 계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다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사랑이란 값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값을 묻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낌없이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늘 보좌도 내어주셨습니다. 자기의 생명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엇이 길래’ 주님께서는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마리아는 은혜를 주신 주님을 사랑하기에 아낌없이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며 주님께 드렸습니다.
사랑의 교회의 옥한흠목사님의 글에 실린 이야기를 읽고 은혜가 되어 그것을 소개합니다. 오래전에 인도에서 선교 사역을 하시던 미국 목사님 한분이 어느 날 갠지스 강가로 나갔다고 합니다. 강가에 나가보니 한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강둑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잘 생겼고, 다른 한 아이는 몸이 불구인데다 앞을 보니 못하는 시각 장애아였습니다. 인도에서 오랫동안 선교사역을 하던 이 선교사님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 저 여자가 두 아이들을 갠지스강에 빠뜨려 신에게 제사하려고 하는구나.’생각하고 부리나케 달려가서 그 부인을 붙들고 “제발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마시오. 그건 쓸데없는 일입니다. 왜 아이를 희생시키려고 합니까?”하고 간곡히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완강했습니다. 그 여인을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자, 그 선교사님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저 멀리 갔던 그 여인이 다시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 중 하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 생기고 정상적인 아이는 없어지고 불구자요 시각 장애아만 데리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아니 신에게 바치려면 불구에다 눈이 멀어 인생을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 아이를 바칠 것이지, 왜 성한 아이를 바치셨나요?”라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여인이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미국에서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 인도에서 섬기는 신은 우리가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을 원하고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아이를 드려야지, 어떻게 불구의 몸을 가진 아이를 드리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헛된 힌두교신을 믿는 인도 사람들도 최선의 것으로 헌신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최선의 것으로 주님께 헌신하고 있습니까?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의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당신의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려 주셨습니다.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깨뜨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옥합을 움켜쥐고 아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달라고만 합니다. 기도를 들어보면, ”작년에는 죽을 쑤었지만, 올해에는 우리 자녀들이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작년에는 침 맞느라 병원에 돈 많이 갖다 바쳤지만 올해에는 남편 건강하게 해주세요. 올해에는 사업이 흥왕케 해주세요. 올해에는 허리 펴고 살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요청만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과 요청을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옥합을 깨지도 않은 채 하나님의 옥합만 깨달라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않으시고 사기를 당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내 옥합은 깨지 않은 채 하나님의 옥합만 깨달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처럼 최선을 다해 주님께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돌보느라 바쁘고 학업에 전념하느라 바쁘고 직장 생활 하느라 바쁘고 사업을 하느라 바쁘지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헌신할 때 주님께서는 더 큰 옥합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3) 기회가 있을 때 헌신하라
1,500만원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붓는 마리아를 보고 옆에 있던 가룟 유다가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며 마리아의 행동을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7절과 8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담은 옥합을 깨드린 것은 예수님의 Funeral Service(장례)를 위해서였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유월절 엿새 전,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닷새 전이기 때문에, 이제 5일 후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장사지내게 됩니다. 마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의 장례를 기념하였습니다. 만약 마리아가 이 기회를 놓쳤다면 예수님의 장례를 기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헌신하고 싶다고 항상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회가 지나가면 우리가 아무리 헌신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연세 드신 모 집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목사님, 이제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하고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고 싶어도 보여야지요.” 또 두 달 전 교회 주차장과 가든을 정리할 때, 연세 드신 또 다른 모 집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쉽지가 않네요.” 여러분! 성경도 읽고 싶다고 항상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하고 싶어도 항상 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연세가 들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지역에서 사역할 때, 어느 여자 집사님께 중고등부 교사를 부탁했더니, “자녀들을 돌보아야 하고, 수영장도 다녀야 하고, 골프도 쳐야 하기 때문에 바빠서 할 수 없다”고 하며 거절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마음을 돌이켜 교사로 봉사하려고 하니까 이제는 반대로 학생들이 너무 나이 드신 선생님은 싫다고 하며 거절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분은 중고등부 교사 하고 싶어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주어지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봉사할 마음은 있어도 봉사하지 못합니다. 건강이 나빠지면 헌신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6절에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원래 “시간을 사라”는 의미입니다. KJV이나 ASV 영어 성경에는 "Redeem the time"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시간을 구속하라”, “시간을 구원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아무 의미 없이 흘려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구속하시기 바랍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디안 선교에 전 생애를 바쳤던 데이빗 브레이너의 일기는 매우 평범한 일기입니다. 그러나 그의 일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 놓고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저 유명한 조나단 에드워드나 요한 웨슬러, 윌리암 케리, 짐 엘리엇 같은 사람들도 그의 일기를 읽고 자신들의 인생이 변화되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의 일기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특징은 ‘시간에 대한 의식’이 일기 속에 베어 있습니다. 촌음을 아껴가며 하나님의 일에 철저하게 자신을 헌신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읽는 이로 하여금 큰 감동을 줍니다. 죽음 직전에 그가 몹시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었을 때의 한 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10월11일 저녁에는 지독한 열과 괴로움을 주는 오한에 시달렸다. 매우 친절한 간호를 받았다. 너무나 무가치한 나에게 이렇게 큰 사랑과 관심을 가져다주니 부끄럽기만 하다. 살고 죽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버린 지금은 내 마음이 평안하다. 이것은 생사를 초월한 놀라운 만족감이다. 이제는 완전히 탈진한 형편이어서 더 이상 사역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한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고통은 내가 지금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사실이다. 아!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힘이 닿는 데까지 내가 맡은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한다면 이 얼마나 주 앞에 죄송스러운 일인가. 아!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그 뜻을 저버리면 안 될 텐데.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그분 앞에 부끄럼이 없는 모습으로 서야 할 터인데.” 그는 항상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깨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을 흘러 보내지 말고 데이빗 브레이너처럼 촌음을 세월을 아끼시기 바랍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년 초부터 가족 수양회와 특별 집회에서 여러 가지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경험한 줄로 믿습니다. 아니 수양회와 특별집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이미 은혜를 받은 자들인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주님께 올 수 없다고 하였는데(요6:65) 주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불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와서 주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마리아처럼 은혜 받은 자답게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헌신을 하되 최선을 다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죽도록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판단의 삶을 넘어 헌신의 삶으로
요 12:1-8 / 최승천 목사
이제 그 무더웠던 여름도 서서히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더움의 잔재와 오늘처럼 거세게 비 뿌리는 비의 끝은 있지만 그래도 머물려던 여름의 힘이 다가오는 새로운 계절의 힘을 이기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연의 섭리는 흐름이고 그 흐름 속에 우리는 다양한 느낌과 감동을 받으며 우리의 삶을 성숙시켜 갑니다.
오늘은 성도의 믿음의 세계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성숙함, 그리고 그 성숙함으로 이루어지는 헌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성도의 삶의 최고봉, 그리고 믿음이 깊은 성도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것이든 자신 있게 행하고, 어떤 일이든 능력 있게 행하며, 어떤 일이든 실수 없게 처리하는 것이 아주 우수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 모든 능력을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삶에서 이제는 내게 주셨던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주님께 드리는 헌신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나를 위해서 예수를 믿던 수준에서 이제는 나의 삶이 주님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이와 같은 헌신의 삶으로의 전환이 바로 영적 성숙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지역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푸시는 장면에 참석하셨을 때 일어나는 장면입니다.
나사로의 동생 마르다가 나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그리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습니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중의 하나인 가룟 사람 유다가 화를 냅니다.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삼백 데나리온에 팔 수 있고 귀한 구제를 할 수 있을 텐데 왜 예수님의 발에 부었냐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것은 삼백일분의 장정의 임금입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한 사람의 연봉에 해당되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렇게 비싼 것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부어서 허비하다니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가룟 유다는 분노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가룟 유다를 제지합니다.
“그냥 두어라. 이것은 내 장례를 준비하였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내가 너희들과 오랫동안 같이 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하여 넌지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리석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깨닫지 못했고 예수님의 다른 병행구인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오늘 똑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또 다른 내용을 추가하고 있으니 이 여인이 얼마나 큰 행복한 일을 한 것인가를 추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냐하면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이 행한 모습도 전파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마리아가 나드 옥합을 깨뜨려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녀의 머리털로 씻었던 이와 같은 내용이 우리에게도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내용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실한 은혜를 이루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판단의 삶을 넘어서는 헌신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판단이 우선된 개선 지향적 삶과 헌신이 우선된 은혜 지향적 삶이 있는데 진정한 성도의 기쁨과 감격은 헌신이 우선된 은혜 지향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계산만 하고 산다면 늘 불평하고 불만하고 만족할 틈이 없습니다.
유다는 그 향유를 팔면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많은 돈을 받을 것을 계산해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헌신도 숫자로만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것은 유다의 진심도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정말 그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가 보관하다가 일정한 돈을 훔치고 싶은 마음에 분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유다의 계산은 어리석은 거짓된 계산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다보면 내가 주님께 무엇을 해드렸는데 혹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해주었는데 라는 것을 수치화시켜 계산만 하다보면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계산은 내심 나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계산도 되지 않고 공평하게 계산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속상하고 더욱 더 마음이 상심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유리한 쪽으로 계산하니 항상 내가 많은 것을 주었고 나는 적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속상하게 되는 거죠.
항상 우리가 남에게 준 것은 커 보이고 받은 것은 작아 보입니다. 주님께 헌신한 것은 커 보이고 주님께 받은 것은 작아 보이는 것이 우리의 부패한 인간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늘 계산하면 내가 준 것이 커 보이고 내가 받은 것은 적어 보여 우리 인생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축복의 삶이 왜 계산을 넘어서는 삶인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계산을 넘어서는 능가하는 삶을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자, 이렇게 말씀 드리죠.
여러분, 지갑에 돈이 가득 들어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 가게 가서 물건을 살 때, 이 물건 저 물건 살 때 대강 얼마쯤 되겠다 하고 생각하고 물건을 사겠죠.
열심히 열심히 아주 작은 숫자까지 계산하지 않고 살 겁니다. 그런데 지갑에 돈이 아주 약간 들어있어요. 그러면 물건을 사면서도 언제든지 열심히 계산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만약에 내가 산 물건의 총합계하고 지갑에 있는 돈하고 안 맞으면 계산대에 갔다가 이것을 내가 또 덜어내야 하니 좀 부끄럽다하니까 잘 계산해서 사겠죠.
저는 우리 성도들이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넉넉한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하셔서 계산하지 않고 내 손에 집히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내가 계산하지 않아도 될 만한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주는 것 계산하지 않고 베푸는 것 계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 계산하지 않고 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계산을 능가하는 축복과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더욱이 오늘 성경을 보면 가룟 유다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이 저렇게 나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발 앞에 부을까 라고 그는 도무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그가 잘못했다고 판단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도 다른 사람의 행위와 마음 씀도 이해의 차원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해하려고 마음먹으면 모든 것 이해할 수 있고 오해하려고 마음먹으면 모든 것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어서 무엇인가 다른 사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어요.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모두 훌륭한 사람이어야지 내가 행복할 수 있지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모두 다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나도 불행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을 소중하고 고귀하게 여길 때 우리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진정한 은혜를 지향할 때 우리 삶에는 평안과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는 이것이 값이 얼마인가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을 내가 섬기는 최고의 하나님께 나의 최선을 다해서 섬겨야지 하는 마음밖에 없었던 거죠. 그는 계산을 할 수 있었으나 계산을 하지 않고 주님께 그 나드 향유를 부어드렸던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없어졌는지 생각하지 않고 내가 얼마나 주님을 기쁘게 했는지, 내가 얼마나 없어졌는가 생각하지 않고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기쁘게 생각했는지 하고 생각하고 산다면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삶이겠습니까?
헌신한 것 자꾸 생각하지 말고 잊어버리라고 했죠. 헌신한 것을 자주 생각한다는 것은 현재의 헌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헌신한 것 잊어버리고 새로운 헌신을 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저는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섭섭한 것 잊어버리고 감사한 것만 생각 합시다.”
다시 한 번요.
“섭섭한 것은 즉시 잊어버리고 감사한 것은 평생 잊지 말고 삽시다.”
저는 늘 그런 마음을 가집니다.
섭섭한 것은 즉시 잊어버리자. 그러나 감사한 것은 평생 잊지 말고 기쁨으로 살자.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한 번 맺은 인연을 아름답게 생각하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요. 우리 마음속에 늘 그런 마음 가지고 살아야 돼요.
요즘 사람들이 굉장히 좀 고독한가 봐요.
요즘은 남성들이 더 고독해진다고 그래요.
특별히 자녀들이 커가면서 아버지하고 얘기를 잘 안한다고 그래요.
지난주에도 에스라공부 끝나고 밥을 먹는데 (두어 주정도 된 것 같아요.)
한 남자분이 얘기를 하더라고요. 애들한테 “좀 대화 좀 하자. 이렇게 얘기를 했더니 말을 안 하더라.” 이렇게 얘기를 안 하더라 얘기했더니 옆에 있는 분이 뭐라고 얘기 하냐면 “대화하자 그러니까 말을 안 하지. 그런 말 하지 말고 말을 시작해야지......” 이렇게 대화하는 것을 제가 옆에서 들었어요.
그런데 첫째는 애들이 아버지하고 얘기를 안 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점점 여성들이 남성호르몬이 충만해져서 상냥해지는 것이 없어져서 남성들한테 더욱 더 대화상대를 잘 안 해주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남성들이 더욱 더 고독해지는 것 같아요. 이렇게 고독해지는 것의 상당부분은 섭섭하고 서운해서 고독해져요. 뭔가 섭섭하고 뭔가 서운해지고 내가 그러다보니까 소외당하는 것 같고 그래서 고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독해지지 않으려면 섭섭한 마음 서운한 마음을 좀 버리면 덜 고독해지는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하면 섭섭한 마음 서운한 마음을 우리가 버릴 수 있을까?
제가 오늘 가르쳐 드릴게요.
옆의 사람 보세요.
그리고 인사합시다. 자, 따라서 합니다.
정확하게 보세요. 잘 보셨죠? 자, 인사합니다.
“환자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섭섭하지 않아요. 아셨죠?
환자라고 생각하면 섭섭하지 않아요. 다 환자예요. 환자니까 내게 그렇게 대하는 거고 환자니까 내게 서운하게 대하고 환자니까 섭섭하게 대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환자라고 생각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상대방보고 말할 때는 말하지 말고 속으로만 얘기하고 겉으로는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환자구나 하고 인사하라고 얘기했죠?
그래요. 우리가 마음에 섭섭한 생각을 없애야 돼요. 서운한 생각을 없애야 돼요. 그러니까 섭섭한 것 잊어버리고 감사한 것은 평생 잊지 말고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너 어디 내손에 안 걸리나 보자.’ 이렇게 겨누고 있으면 10년 동안 겨누어보면 한번은 손에 걸립니다. 그러나 10년 동안 나는 다 망가져요. 남을 불행하게 하기 위해서 나도 불행해지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남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축복된 삶이지 남을 불행에 몰아넣기 위해서 나까지 불행해진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그래요. 우리의 삶은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은혜의 백성으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우리 마음에 있어야 돼요.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을 짓기로 결정했어요. 백성들에게 공포합니다.
“우리가 이 광야에서 성막을 지어서 이동성막을 지어서 어디를 가든지 성막을 앞세우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백성들에게 얘기했어요. 그래서 날짜를 정해서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귀중한 것을 그 성막을 짓는데 소용되도록 가지고 오게 했어요. 그런데 동이 트기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서 그 줄이 너무나 길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 성막을 짓는데 필요한 것을 가져오다보니까 너무나 많이 가져와서 이제는 더 이상 필요없다 이제는 그만하자. 그래서 이제까지 못 가져온 사람 뒤에 서 있는 사람...... 다 돌아가라고 하고 사람을 돌려보냈어요.
이것이 바로 백성들의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은혜의 백성들의 마음이에요.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정말 무엇인가 드리고 싶은 안타까움 속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계산해서 이만하면 되겠지. 이 정도면 되겠지. 최소한 이 정도면 체면은 되겠지. 아니면 하나님은 이 정도는 봐주실 거야. 라는 것이 헌신이 아니라 내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나의마음의 안타까움을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리고 싶어 애쓰는 것이 헌신입니다. 우리는 직분에 헌신, 기회의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렇게 비오는 날 성가대 찬양하니까 너무나 감사해요.
비 오는 날 목소리도 잘 안 나오죠. 또 비오는 날 악기도 소리 잘 안 나죠?그런데도 이렇게 열심히 찬양을 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지난주에 제가 기도제목 보고 기도하잖아요. 기도제목 보다가 또 마음이 울컥한 기도제목을 보았습니다. 뭐냐 하면 노래를 하시는 분인데 수술하셨어요. 지금 회복 중에 계신데 지금 상태가 그래서 어쩌면 내가 노래를 못 부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기도제목을 써냈는데 이제 기도를 부탁하는 거죠. 그런데 그 제목을 보니까 너무너무 마음이 울컥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전에 제가 새벽기도회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강단에 올라오셨어요. 그래서 예고 없이 올라오셔서 저도 깜짝 놀라 생각을 했는데 그래도 누군가 기도를 받으러 올라오셨겠죠. 그랬는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목사님, 제가 병원에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야 되는데 (이번에 성대부분에 암이 생겨서 수술을 하시게 되었어요.) 제가 혹시 이번에 수술결과에 따라서 어쩌면 이렇게 음성을 내는 것-소리를 내는 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제 수술결과에 따라서 어쩌면 평생 동안 말을 할 수 없는 이런 상태가 되실 수도 있다는 거예요.
제가 그 말씀을 들으니까 정말 마음이 너무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간절히 기도드렸는데요 정말 우리 인생은 하루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여러분, 이렇게 찬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찬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 성도님들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봉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정말 주를 바라보고 기대하고 소망하는 축복의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봉사할 기회가 있을 때, 은혜가 있을 때 주의 역사를 이루어야 돼요.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힘이 있을 때, 그리고 우리에게 지식이 있을 때, 지혜가 있을 때, 열심이 있을 때, 내 두 다리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내 눈이 맑을 때, 내 두 손에 힘이 있을 때 봉사하고 헌신하자고 말씀 드리잖아요. 우리에게 기회 있을 때 봉사하는 것이 은혜죠. 계산을 지향하는 삶은 늘 피곤해요.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죠.
빌립이 뭐라고 그럽니다.“예.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면 오천 명을 먹일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맞아요. 정확한 계산입니다. 빌립이 계산 잘했어요. 그런데 오천 명을 먹일 떡을 누가 팔아요? 누가 만들어놨을까요?
그러니까 이것을 말해야 소용없는 어리석은 탁상공론이고 그것은 셈 계산해봐야 소용도 없는 계산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은 기적을 생각하고 계셨던 거예요.
그런데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있죠? 그런 가운데 어떤 소년이 안드레의 인도함을 받아서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의 요만한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 이것이 혹시 이것이 예수님께 소용될 일이 있습니까?”하고 가지고 와요. 아니 오천 명인데 그까짓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가 뭐냔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소중히 받아서 그것을 가지고 축복하여 기도하시고 그것을 가지고 떼어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를 남기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계산과 주님의 계산은 틀려요. 우리의 셈법하고 주님의 셈법하고는 틀리단 말이죠.
그래요.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의 전환에 따라 삶이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저는 계산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는 계산을 할 줄 알면서도 계산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사는 겁니다.
두 번째, 주님을 사랑해서 진실한 헌신을 이루는 삶은 행복한 삶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삶입니다. 진실한 헌신을 이루는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축복의 섭리를 이루어가는 거죠. 주님을 사랑하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헌신이 이루어져요. 사랑하면 모든 개념이 달라지죠.
여러분 사랑하면 우리에게 생기는 첫 번째 개념이 뭐죠?
무엇인가 주고 싶어요. 사랑하면 주고 싶어요.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그의 생명을 주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병든 자는 고쳐주셨고 배고픈 자는 먹여주셨고 눈물 흘리는 자는 위로해주셨고 무엇인가를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헌신이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축복을 받으면 자연히 따라오는 축복이기도 하죠.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께서 아끼는 것들을 사랑하는 거죠.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이 아끼는 사람들도 사랑했어요. 성전미문 앞을 지나가는데 앉은뱅이 걸인이 있었어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니 절대 그냥 지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주머니에 뒤져보니까 아무것도 줄게 없어요. 예수님은 이 때 그냥 지나가셨을까?
‘아니야,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 거야.’ 베드로는 거기서 또 생각했던 거예요. 그 때 생각해 보니까 베드로에게 생각이 한 가지 났던 거죠.
‘가진 것은 없지만 은과 금은 나에게 없지만 나에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일어나라’
예수님이 하셨던 것을 그는 그 마음속에 생각하고 예수님이 주셨던 것을 본인이 주고 싶어 했던 거죠.
그래요. 마침내 그 앉은뱅이 걸인은 일어나게 되었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이와 같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주님 앞에 헌신할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도 없고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해서 봉사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드릴 수 있고 누구든지 봉사할 수 있고 누구든지 어려운 이웃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이와 같은 일들이 우리들에게는 있는 거죠.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어떤 은혜를 받아야 하는가 생각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께 어떤 것으로 나의 삶을 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축복받으려고 예수를 믿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를 드리려고 예수를 믿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중에 내가 하나님 앞에 축복받아서 잘 먹고 잘 지내야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 여기 한 사람도 없어요. 우리는 그와 같은 구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정말 내가 잘되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떤 것을 이루어야지 하고 우리는 마음에 사명과 은혜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거죠.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어느 집 심방하다보니까 벽에다 큰 휘호로 써 붙여놨더라고요.
뭐라고 썼냐면 ‘예수그리스도는 내 삶의 전부입니다.’
그 휘호 써놓은 것 보니까 정말 마음에 감동이 되더라고요.
그래요. 예수그리스도는 내 삶의 전부예요. 예수그리스도는 내 삶의 전부입니다. 일부가 아니에요. 그 예수님을 위하여 내 삶을 살아가는 거죠. 헌신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받아서 축복이 아니라 내가 주님 앞에 무엇을 드릴 수 있으니 그것이 축복인 겁니다.
헌신은 일단 내 것이 없어져야 돼요. 헌신했는데 나는 손해 본 것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헌신도 아니에요. 헌신은 내 것이 없어져야 돼요. 그런데 내게 없어진 빈자리를 주님께서 채워주는 것이 축복이에요. 그래요. 남의 것 가지고 생색내는 것 이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내 것 드림으로 말미암아 내 것이 뚝 떨어져 나가는 것이 헌신이란 말이죠.
헌신이란 삶은 후회가 없어요. 쌓아두고 남겨둔 삶은 후회가 될지 몰라도 헌신한 삶은 후회가 없습니다. 헌신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뜻과 섭리를 이루어요.
오늘 이 여인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다고 본인은 전혀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오늘 보니까 이 여인은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거예요. 조금 시간이 지나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정말 향유를 부은 것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맞았던 겁니다. 큰 위대한 일은 그것이 큰 위대한 일이 될지 몰랐을 때 이루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내가 위대하고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위대한 일 아니에요. 어느 날 나는 평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이 위대한 일이 되는 거예요.
나는 좋은 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별로 좋은 일 아닙니다. 나는 좋은 일인지도 모르고 날마다 하는 것 이것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거예요. 날마다 하니까 그것이 특별한 일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고 있는 거죠.
사람에게 평가받지 못해도 주님에게 평가받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고 싶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헌신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이루는 주의 축복이 있어야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주님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헌신의 마음은 인간적인 박애주의나 그 어떤 동정심 심지어는 위장된 선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박애주의가 굉장히 뛰어난 것처럼 보였어요.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라고 이렇게 힐난했습니다.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형식논리로 봐도 박애주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가룟 유다는 형식논리로는 박애주의를 주장했어요. 그러나 그것이 맞다할지라도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는, 주님의 능력은 박애주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이뤄야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법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법을 가지고 세상을 품고 사랑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가끔 혹시 어려움이 있다면 이런 걸 겁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교회에 적용하려는 겁니다. 세상의 리더십을 교회에 적용하려고 그러고 세상의 방법을 교회에 적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110V짜리를 220V에 사용하려고 한다거나 220V짜리를 110V에 사용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아요. 사용하려면 트랜스를 이용해서 전압을 조정하든지 아니면 거기 있는 콘센트를 조정해서 맞는 것을 사용해야 되죠. 입구도 틀린데 꽂아지기나 하겠습니까? 맞지가 않죠.
그래요. 세상의 방법가지고 교회에 그냥 적용이 안돼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세상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돼야 합니다.
그래요.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다보면 결국 세상에서 큰 역사를 이루는 겁니다.
주님은 미워하지 말라 했어요.
사랑하라 했어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어요.
구제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지나치게 쌓아두어도 가난하게 되지만 남에게 베풀어 구제하는 자는 더욱 더 부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법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의 법도 이루게 되고 세상에서 칭찬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거죠.
우리는 동정심을 능가하는 더 큰 차원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됩니다.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동정심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이루어주는 것이 돼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우리는 빵과 함께 복음을 전한다고 분명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빵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에요.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말씀만 하지 않으셨어요. 주님께서는 배고픈 자는 먹이시고 병든 자는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고 슬픈 눈물 흘리는 자는 눈물을 거두어주셨고 그들을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복음을 전해주셨어요.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을 전해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구원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그들의 현실적인 삶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아픔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위로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고기 한 마리 주면 한 끼 먹여주는 것이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을 먹여주는 것이라고 얘기하죠.
그런데 거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이 너무너무 배가고파서 기운이 없어요. 그 때 물고기 한 마리 주면 한 끼 먹여주는 것이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 먹여주는 것이니까 내가 너를 평생 먹여줄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줄게. 그 사람이 과연 배울까요?
지금 기운이 없고 혼미한데 과연 교육효과가 있을까요?아무것도 배우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빵이라도 한 조각씩 주고 물고기라도 한 마리 줘서 배고픈 것 면해주고 정신 차리고 뭔가 고맙구나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주는구나 하고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서 교육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세워놓은 다음에 가르쳐줘야 그 사람이 물고기 잡는 법을 배우죠.
우리는 잘못하면 이런 형식논리에 빠질 때가 너무나 많아요. 우리는 실제로 사랑이 없이 형식논리만 가지고 접근하다보면 우리는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에요.
제가 말씀드리죠. 그래서 우리는 선언적 교회되지 말고 실천적 교회되라고 얘기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날마다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내가 그에게 무엇인가 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야 되죠.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말로 하지 않고 그들의 삶의 감동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삶의 모습이죠. 그래서 우리는 선언하지 말고 실천하자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진정한 나눔은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 가운데 동정이 아닌 지속적인 사랑의 베풂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속적으로 못해요. 왜냐하면 일정한 선을 긋고 이상은 안 나가요. 그런데 정말 우리가 사랑과 은혜를 베푼다는 것은 내가 피곤해지기까지 그 일을 하는 거예요. 내가 피곤해지는 순간에 왔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주의 역사를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도와주더라도 일정한 금을 긋고 도와준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선을 넘어서 헌신해야 해요.
일정한 금을 긋고 헌신해요. 그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피곤해지고 힘들어질 때까지 헌신할 때에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의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거죠.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주를 위해서 아름다운 소망과 헌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를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룬다면 정말 우리는 우리의 한계까지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나갈 때 우리에게 진정한 주님의 자비와 은혜의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주고 헌신이라는 것은 참된 평안을 주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이룹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주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은혜와 소망이 넘쳐 주의 아름다운 영광을 이루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제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이와 같은 것을 보며 교회 오는 성도들이 참 고마웠어요. 그리고 뿐만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 성도들을 굉장히 기뻐하실 거예요.
오늘 비가 오는 우중에도 이렇게 주님 앞에 가서 예배드려야 되겠다하는 뜨거운 마음이 우리 평생 동안 유지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 평생 동안 하나님께 헌신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거하는 은총의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행복합니다
요 12:1-8 / 김삼환 목사
성경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말하지요. 이 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이라고 하는 귀한 선물을 가지고 이 땅 위에 지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모든 생명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감추어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은, 피조물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그릇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이는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도 알 수가 없습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힘이 넘쳐나는 분이십니까? 능력만 있으신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되셔서 사랑으로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은 거룩합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아름답고 정결합니다. 사랑은 생명체입니다. 열매입니다. 능력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열매가 있을 수 없고 사랑이 없는 곳에 발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라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사랑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약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치료해 줍니다.
1998년 7월 24일, 미국 메사츄세츠 주립대학 병원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메리 게첼'이라고 하는 93살 된 할머니가 그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심장 질환으로 쓰러져서 오랜 기간동안 혼수상태에 있던 이 할머니가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병원에서는 곧 몇 시간 이내로 돌아가실 것 같아 가족들을 불렀습니다. 온 가족들이 다 왔습니다. 할머니 앞에 아들들, 자부들, 딸들, 사위들이 다 왔습니다. 손자들도 왔습니다. 그 중에 제일 어린 막내 손녀가 하나 있었습니다. '데이빗 로라인'이라고 하는 이 손녀는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이 손녀가 할머니 있는 침대에 올라가서 "할머니, 할머니 일어나! 일어나! 할머니 사랑해!" 그러면서 할머니에게 키스도 하고 할머니 가슴을 두드렸어요. 그러니까 온 식구들은 더 눈물을 흘렸지요. 그런데 너무너무 놀라운 것은 혼수상태에 있던 이 게첼 할머니가 깨어나는 거예요. 돌아가신 게 아니라 살아난 거예요. 이 일이 주치의와 의사들이 보는 데에서 있었기 때문에 온 세계 뉴스가 되었어요. 사랑의 소리, 사랑하는 손녀의 소리를 들은 거예요. 깨어나는 거예요. 기적이 일어나는 거예요.
1995년 미국 위클린 뉴스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보도되었어요. '트레시 보너'라고 하는 여자와 '마크 보닝'이라고 하는 남자는 서로 매우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이 보링이라는 남자가 그만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뇌사상태가 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몇 개월 동안 소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의학적으로도 더 이상의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그의 애인인 '트레시 보너'가 병원에 모르게 들어갔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속삭였어요. "나는 네가 없어도 너를 사랑해.", "나는 너를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었어." 빨리 일어나라는 거예요. 키스를 해 줬어요. 내가 얼마 전에 거기 다녀왔다는 얘기도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또 기적이 일어났어요. 남자친구 마크 보닝이 깨어난 거예요. 눈을 뜨는 거예요. 말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잘 살았다는 얘기예요. 놀라운 일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모든 세포와 유전자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미줄처럼 치어져 있어요. 우리는 사랑의 옷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사랑이 없으면 죽는 거예요. 마틴 루터도 말하기를 사랑 없는 인생은 죽은 것과 같다고 그랬어요. 그렇지요. 산 사람이 어찌 사랑을 모르고 사랑을 떠나 살수가 있겠어요. 세 번이나 재상을 지냈던 글레스턴 경도 말하기를 재물이나 지위도 사랑에 비하면 쓰레기와 같다고 말했어요. 정말입니다. 세계가 아무리 넓을 지라도 사랑 없는 곳에서 무리가 넓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사랑이 없는데, 사랑이 떠나갔는데, 사람이 무엇을 먹고 건강을 얻으며 어디에서 잠을 자야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돈 위에서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 권력 위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것입니까? 데싱도 말하기를 사랑없는 인간은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큰 일을 하는 지도자일수록 지식이 있고 영도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감정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그 사람은 민족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야이든지 그렇습니다. 예술 분야도 그렇습니다. 정치분야도 그렇습니다. 정치 분야에서 크게 쓰임 받는 세계적인 인물들은 다 로맨스가 많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뜨겁지 않고 풍부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일에도 크게 쓰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다윗을 보십시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백성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다윗이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잘먹어서 살찌는 것도 아니고 잘 입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먹어야, 사랑을 입어야, 사랑의 품안에 안기어야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모든 만물은 사랑입니다. 여러분 사람만 사랑하는 줄 아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식물도 사랑하고요 동물도 곤충도 사랑합니다. 이 여름철에 많은 풀벌레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밤에 들리는 작은 풀벌레 소리들이 사랑을 부르는 소리예요. 전부 연인을 찾는 소리예요. 새 한 마리가 어디에서 하루종일 무엇을 하면서 즐거워하며 살아가는지 아십니까? 둥지가 적어도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잠자리가…. 조그만 버러지 한 마리들이…. 날아가는 새들이…. 물고기가…. 시골에서 물 속에 있는 돌을 들어보면 그 작은 돌 속에도 다 부부가 있어요. 여러분, 식물도 그래요. 은행나무! 은행나무 암컷만 있으면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수컷만 있으면 열매맺지 않습니다. 은행은 언제나 암컷하고 수컷이 같이 바라보면서 있을 때에 은행나무가 맺어지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세요? 사랑 없는 생명이 아무 것도 없어요. 물 속에 있는 큰 고래! '저렇게 큰 게 무슨 사랑하느냐?' 아닙니다. 고래는 사랑이 더 많다고 합니다. 6km반경까지는 언제나 사랑하는 고래를 두고요 계속해서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먼 길을 갈 때도, 천리를 갈 때도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가고, 가족과 함께 가면서 '푸우!' 그러면서 가는 거예요. 물고기는 물 속에서, 새는 날면서, 식물들은 다 땅속에서 사랑을 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생명이든지 사랑 없이 살아가는 생명은 없습니다. 사랑이 전부입니다. 사랑이 그들을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이 그들을 만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닭을 몇 마리 먹입니다. 며칠 전에도 내가 보고 감격스러운 것이 있었어요. 장탉이 암탉하고 같이 다니는데 장닭이 버러지 한 마리를 찾아 발견하면 자기가 안 먹는 거예요. 버러지 한 마리를 주어다가 놓고는 이 암탉을 부르는 거예요. 이래가지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고 또 먹이고요 그 다음에 먹을 것이 있으면요 꼭 암놈을 불러요. 그래서 내가 "얘야, 너도 남자 노릇하려면 먹어야지. 어떻게 다 그렇게 주냐?" 그 장닭이 행복한 장닭입니다. 사랑이에요. 사랑! 사랑이 없으면 병드는 거예요. 사랑 없는 사회, 사랑 없는 가정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겁니다. 끝난 가정이에요. 우리는 사랑의 노래를 부리고 사랑의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의 음식을 먹으면서 사랑의 이불을 덮을 때에 그것이 참 사랑이요 또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랑과 함께 영원히 행복의 꽃이 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목포에 집회를 자주 다닌 적이 있습니다. 목포에는 '공생원'이라고 하는 고아원이 있어요. 그 고아원에 계신 목사님이 아주 귀한 분이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연세가 80이 넘으시지만 늘 집회에 오셨어요. 그런데 하루는 저보고 우리 고아원에 좀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아원에 가서 구경을 하게 됐습니다. 처음입니다. 다녀보니 얼마나 시설이 잘 되어 있는지요? 고아원이 옛날 고아원이 아니에요. 고아들이 마루같은 큰방에 자는 게 아니에요. 전부 다 가족 같았어요. 보모가 어머니 역할, 아버지 역할 하면서 제일 큰누나는 고등학교 2학년, 그 다음 중학생, 초등 학생, 이런 식으로 가족 단위로 같이 밥을 해 가지고 방방이 먹는 거요. 밥을 해 가지고 전부 떠서 먹는 게 아니고 아니에요. 줄서서 먹는 게 아니에요. 그냥 상에 둘러앉아 같이 먹는 거예요. 방방이 시장에 나가서 맞는 음식을 차려오고 데리고 나가서 네가 원하는 신발 사주고 원하는 옷을 해주는 거예요. 그전처럼 똑같은 고무신 신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좋아졌어요. 너무 놀라운 건 피아노 과외를 다 시키는 거예요. 공부하고 싶은 거 다 과외 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목사님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참 신기합니다. 이렇게 잘 해주는데 아이들에게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따라오세요. 여기를 꼭 보셔야 됩니다." 목포 앞에 섬이 있지 않습니까? 그 섬에 갔었는데, 이 고아원에서 생기는 많은 환자들이 다 있는 거예요. 고아원에 들어와서 정신적으로 병이 드는 거예요. 완전히 정신이 나간 거예요. 뇌성마비 환자가 너무 많은 거예요. 갑상선 환자가 많이 생기는 거예요. 불치의 병이 많이 생기는 거예요. 많은 아이들이 그곳에 와 있는 거예요. 39%가 거기 와 있는 거예요. 너무 놀라운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모든 걸 다 해주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세계 전문기구들에게 연구를 의뢰했는데 찾아낸 건 하나예요. 사랑이 많아야 되는데, 사랑을 받아야 되는데 사랑을 못 받는 걸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라는 거예요. 오히려 잘해주면 잘 해줄수록 언밸런스가 생겨서 정신적으로 더 공허해 진다라는 거예요. 해줄수록 더 불행해 진다는 거예요. 더 방황한다라는 거예요. 병이 안 들어도 입원도 안 해 있어도 마음의 병은 다 들어있어요. 중학교만 졸업하면 탈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요. 왜 그렇습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무엇이 있어야 사람이 부유하고, 무엇이 있어야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잘 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사랑을 받지 못한 이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의 사회가 이토록 과격하고 흥분하고 증오하고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고 온갖 걱정 근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사회가 병든 것을 무엇으로 치료하고자 하십니까? 어디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사람답게 하고 사랑만이 가치 있게 하고 빛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황홀하게 하고 복 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생명은 키(Key)는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히브리어 사랑의 동사는 '아헬'이라는 말입니다. '숨'이라는 거예요. 숨쉬는 거예요. 사랑이 없으면 죽는 거예요. 숨 못 쉬는 것과 같아요. 가정에 사랑이 없으면 숨이 끊어진 가정이에요. 사회가 사랑이 없으면 숨이 끊어진 거예요. 누가 이 사회를 정치적으로 잘해서 이 나라를 잘 다스린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사랑 하나만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건져주신 거예요. 주님은 사랑의 왕, 주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영원히 사랑 하나 가지고 온 인류를 다스리십니다. 또한 주의 사랑의 품안에 안겨 온 인류가 행복을 얻는 것은 바로 주님이 갖고 계신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고 이삭을 사랑하고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야곱은 얼마나 사랑하는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사랑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이란 곧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은 사람이란 거예요. 만 왕의 왕 되시는 사랑의 왕이 우리를 찾아 오셔서 나를 당신의 품안으로 안아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암탉이 날개 아래 새기를 모음같이 내가 너희를 품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품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의 품안에 있습니다. 아가서에는 주님과 우리 사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이 만든 구슬꿰미 같구나!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분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목은 상아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락 빈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인간의 쾌락이 사랑에 있구나. 솔로몬이 그 화려한 궁궐에 있었지마는 행복은 사랑에서만 찾을 수 있었어요. 주님과 우리의 사이가 이 세상을 이 험한 세상을 행복하게 화창하게 만드는 길은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의 사랑을 감사할 때에만이 인간이 이 세상을 복되게 살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간의 축복과 능력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에도 죄 많은, 가장 불행했던 마리아가 주님을 영접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이 여인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으로 등장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거예요. 만 왕의 왕이에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편에서는 불가능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면 가능한 거예요. 여러분, 감옥에 있는 분이 밖에 있는 분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밖에 있는 분이 안에 있는 분을 사랑하면 옥문은 열릴 수 있는 거예요. 이 죄 많은 이 땅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는 거예요. 이것이 신앙이에요. 이것이 기독교예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예요.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 우리와의 만남이에요. 그래서 이 험한 세상을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두려움이 없는 거예요. 사랑은 뜨거워요. 사랑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아요. 어떤 분은 교회가 가까워서 잘 나오는 줄로 아는데 아닙니다. 사랑이 있어야 나옵니다. 사랑이 있어야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헌금하느냐? 아닙니다. 사랑이 있어야 감사의 예물 드립니다. 사랑이 있어야 돼요. 누가 봉사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 있어야 봉사합니다.
오늘날 온 세계에 나가 있는 수많은 선교사들이 저 어려운 여건 속에 어떻게 몇 십 년을 살 수 있습니까? 오늘 아침 1부 예배에 우간다의 김정년 선교사님 오셨어요. 44살에 우간다에 가셔서 금년에 환갑이에요. 처녀예요. 주님을 위해서 처녀가 환갑이 되어서 오셨어요. 그 나라는 건강한 남자들도 그곳의 좋은 호텔에 있으면서도 한 주일 못 있는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16년을 지냈느냐? 그 흑인들, 그 중에서 병든 분들만 또 돌보아요. 어떻게 지낼 수 있었느냐? 위의 사랑! 저분을 사랑하니까! 사랑이 우리를 이렇게 행복하게 하고 힘있게 하는 것입니다. 저도 약혼하고 저희 집사람을 만나려고 하는데 교인들이 자꾸 신경 쓰는 겁니다. 교회 여자 청년들이 자기들끼리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약혼했는데도 못 만나고 늘 밤이 오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래서 밤이 되면 교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찍이 자요. 그러면 교인들이 '우리 전도사님 잘 잔다.' 그때 12시에 일어나는 거예요. 일어나서 집사람 있는 곳으로 가는 거예요. 자전거 타고 가서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집사람도 나를 기다리지요. 그래서 둘이 낙동강으로 나옵니다. 지금 보면 얼마나 무서운지…. 그런데 무섭지 않아요. 그리고 새벽기도 할 시간까지 거기 있다가 자전거 타고 오는데 새벽기도 시간까지 4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거예요. 여러분, 저에게도 이런 로맨스가 있었습니다. 밤이 뭐 문제냐? 교회가 뭐…. 여러분, 주님을 사랑해봐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이 세상의 사랑은 밝아질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어요. 오늘날 많은 부부가 행복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에요. 저 사랑이 섞이지 않으면 이 사랑은 가치가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랑도 장애물을 넘을 수가 없고 오래 갈 수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흠이 있고 영원하지 못한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사랑은 모두가 다 장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같이 사랑이 풍년이 든 시대에도 참 사랑이 없는 것은, 우리 가정이 무너지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병들어져 있는 것은 참 사랑이 떠난 사랑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옥합을 깨뜨리고 주님을 향하여 비싼 향유를 부어 드리면서 살아갈 때, 내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될 줄로 믿습니다. 많은 분들은 주님을 향해서는 적당하게 살아가고 이 세상에는 알뜰하게, 철저하게,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행복한 줄 알고 잘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하나님의 사랑이 비추지 않는 나라와 개인이나 사회는 어두운 사회가 되고 병든 사회가 됩니다. 소련 보십시오. 공산국가가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에 문을 닫고 그 민족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해 집니까? 며칠 전에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아 건설의 최원석 회장님의 부모님이 그렇게 잘 믿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에게 신앙을 물려주지 못했어요. 돈은 물려주었는데 믿음을 물려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불신 혼인을 한 것입니다. 들어온 부인이 우상 숭배만 하고 결국에는 그만 기업도 무너지고 가정도 무너지고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비추어 주지 않은 이 기업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업도 하나님의 사랑이 같이 해야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그 사랑에 의해서 영원히 그 기업이 복을 받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걸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사업을 하나님을 떠나서 사업을 하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최회장이 지금 교회로 돌아왔대요. 다 잃어버리고 다 떠나고 만신창이가 되고 이 세상에서 다 잃어버리고 탕자와 같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몇 십 년만에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대요. "담배 피우겠냐?" {안 피우겠습니다.} "술 먹겠냐?" {안 먹겠습니다.} "주일 지키겠느냐?" {철저하게 지키겠습니다.} 사랑의 왕에게로 이제 다시 안기는 거예요. 많은 사람이 주의 사랑을 떠나서 얻은 것 같지만 하루아침에 다 떠나가는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들 보십시오. 아버지를 떠나갈 때 모두가 다 찾아오는 것 같았지만 돈 없으니 다 떠나갑니다. 이 같은 이 세상의 사랑, 에로스의 사랑, 믿을 수 없는 이 사랑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참 사랑, 주님의 사랑에 영원히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사랑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없습니다. 과거는 아름답습니다. 참 사랑이니까요. 인간의 에로스의 사랑은 돌아보면 후회스럽고 상처뿐입니다. 그때는 좋았지만 돌아보면 부끄럽습니다. 현재는 평안입니다. 자유입니다. 소망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사랑의 왕이 같이 하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미래는 소망입니다. 사랑의 주님과 함께 걸어가니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영원한 천국까지 갈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부족할지라도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과 함께 걸어가면, 사랑의 왕이 같이하면, 능력 많으신 사랑의 손이 우리를 잡으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줄로 믿습니다.
미국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할렘가라는 곳에 많이 모여 삽니다. 미국이 우리 나라의 가난한 곳보다 더 가난한 빈민촌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볼티모어에 있는 어느 대학의 학생들이 그 지역의 빈민들이 모여 사는 할렘가에 가서 한달 동안 전부 조사를 했어요. 전체를 파악을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 전체적으로 종합을 해서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이들에게는 절대로 미래가 없다.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이들의 미래는 소망이 없다고 했어요. 25년이 지났어요. 그 학생들이 조사한 모든 것이 입력되어 있는 데이터를 가지고 학생들을 다시 조사를 했어요. 20명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80명을 파악을 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거예요. 180명 가운데 176명이 다 성공을 했어요. 변호사, 의사, 사업가, 각 분야의 성공한 학생들이 너무 많았어요.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전혀 소망이 없는, 보이는 면으로는 전혀 길이 없는 이 할렘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나의 답이 나왔어요. 여선생님 한 분이 선교사로서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어요. 소망을 주었어요. 주님이 너희들을 사랑한다고 전해주었어요. 찬송가를 가르쳐 주고 말씀을 가르쳐 주었어요. 아이들의 눈이 빛났어요. 아이들에게 소망이 생겼어요. 공부를 했어요. 나쁜 행실을 고쳤어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보다 더 귀한 복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넘치는 사랑을 내게 받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참 사랑을 모른 채 방황하는 많은 사람에게 이 사랑을 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미국에 헬렌켈러를 여러분이 알지 않습니까? 태어난 지 1년만에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이런 불치의 병이 걸렸어요. 그런데 그녀에게는 '설리반'이라고 하는 이 여선생님이 있었어요. 설리반 선생님 자신도 고아 출신이에요. 자기도 너무 불행했을 때 예수를 믿어 가지고 행복을 얻었어요. 고아원에 갔던 남동생은 불행하게 죽고 자기 혼자 남았지만 주님을 의지하고 새 소망을 가진 그녀는 '이 헬렌켈러를 내가 맡아야겠다.'고 결심을 한 거예요. 그래서 6살까지 아무 교육을 받지 못한 헬렌켈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어주었어요. "주님이 너를 사랑한다." 아무 전달이 안되지만 계속해서 주의 사랑을 전해서 헬렌켈러의 마음을 열었어요. 결국에는 헬렌켈러는 20살 때 하바드 대학을 졸업해서 20세계 최고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어요. 주의 사랑을 받든지 주의 사랑을 주든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할 때에만 우리 인간의 병은 고쳐지고 문화는 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속문화는 피어나면 피어날수록 인간은 병이 듭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에로스적인 사랑이 넘치면 넘칠수록 사람은 잘못되어 나가는 겁니다. 어디에서 여러분이 길을 찾고 있습니까? 무엇이 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비추어지고 주의 사랑을 감사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이구,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실 수 있을까!'라고 느끼는 순간마다 힘이 되고 능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같이하는 한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도 장미꽃이 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가정되길 원합니다. 어떤 직장 생활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을 받아 사랑의 분위기가, 사랑의 운동이, 사랑의 대화가 오고가는 이 나라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법? 예수님은 법 때문에 죽었어요. 법이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다 죽인 거예요. 한 4-5년 전에 이런 설교했습니다. '법! 법!' 그러면 서울 시민 다 죽는다고 했어요. 4천만 다 죽이는 거예요. '사랑! 사랑!' 그러면 다 살아납니다. '법! 법!' 그러면 결국 자기도 죽고 자기 아들도 죽어요. 다 가두어야 돼요. 자기도 물론 가야 돼요. 안 갈 사람이 누가 있어요? 먼저 가야지…. 그러나 '사랑! 사랑!' 그러면 다 사는 길이에요. 다 일어날 수 있어요. 다 해결돼요. 사랑이 부족한 줄 알아야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뜨거워하며 감사할 때 이 나라는 풍요로워지고 가정은 행복하고 마음 문이 열려지고 여러분의 하는 모든 일에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는 마리아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깨어진 옥합
요 12:1-8 / 홍정길 목사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마음에 깊은 감동으로 남는 사건이 있다면 어떤 사건입니까? 우리들이 너무 좋고 아름다운 추억이 있으면 그 추억 속에 그냥 머물러 있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 추억 이 내게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고 언제든지 가슴 가까이 두고 추억의 박물관에서 꺼내보고 싶어하는 목록이 됩니다. 이런 추억이 우리 주님 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추억만은 내가 전파 되는 곳곳에 반드시 회자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처럼 소중하게 붙잡고 머물러 있고 싶은 한 순간, 이 베다니 마을에서 생긴 일입니다. 이 일이 생긴 주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한 주간입니다. 이 주간에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 당하시고 구원을 주신, 사망 권세가 깨지고 부활의 능력으로 덧입는 영광을 안겨준 주간입니다. 장소는 베다니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는 이 사건이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있었다고 말합니다. 문둥이 시몬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분은 추측하기를 주 께서 치료해주신 열 문둥이 가운데 다시 돌아와서 감사한 한 문둥이였 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문둥이였고 지금은 치료받 은 상태라는 말입니다. 또 어떤 사 람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아마 그 문둥이 시몬이 라는 사람이 마르다의 남편이었을 것이다. 하여튼 우리 주님이 베다니 에서 한 집의 잔치를 받고 계셨습니 다. 오로지 예수님을 위한 잔치입니 다. 만약 문둥이 시몬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자기를 그 저주에서 풀러주신 주님을 향해서 감사가 쏟 아져 주님 앞에 드려질 자리였을 것 입니다. 어떤 학자는 문둥이 시몬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다음에 마르 다가 그 집의 실질적인 주인이어서 베다니의 사건이 기록될 때마다 문 둥이 시몬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무지 추측이니 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마르다, 마리아 자매에게는 가정 의 기둥인 오라비 나사로가 얼마 전 에 다시 사는 놀라운 축복을 누렸기 때문에 그 감사와 감격은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잔치가 배설되었 는데 역시 행동파인 마르다는 열심 히 오락가락하면서 그 잔치의 모든 일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이 때, 갑자기 상황이 바뀝니 다. 마리아가 그 때까지 무엇을 하 고 있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 니다. 갑자기 뛰어나오더니 예수님 발 앞에 순전한 나드향 한 근을 옥 합을 깨뜨려서 붓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에는 우리 주님 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다고 말합 니다. 기름을 부어주는 것은 당시 최대의 영예입니다. 다윗은 시편 23 편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 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 위에 바르셨 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잔칫상에 들어갔을 때, 주인 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는 것은 최 대의 영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 론이 처음 대제사장으로 부름을 받 고 즉위식을 가지던 날, 모세는 그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하나님의 축 복을 선물했습니다. 시편 133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배로운 기름 이 시온,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같고"(시 133:2) 그냥 바른 것이 아니라 너무 좋고 귀할 때는 머리에 부었습니다. 부으 면 그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 을 타고 흐르고 수염을 타고 흐르는 그 기름이 옷을 적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부었던 이 기름은 얼마나 양이 많던지 머리 위에서 몸 을 타고 그 발까지 적셨단 말입니 다.
그러자 이 여인은 자기 머리털 을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 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극진한 대접을 할 때는 반드시 그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발을 씻길 것을 하인들에게 명령하는데, 하인 들이 심기가 불편할 때는 주인에게
"주인님, 나는 오늘만은 발 씻는 것 을 면제해주세요."
라고 그 발 씻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던 것이 요즘 이스라엘에서 나온 문서 에서 발견됩니다. 남의 발을 씻는다 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혹시 사랑하는 남편 의 발을 씻겨 보신 경험이 있으십니 까? 우리가 등은 쉽게 밉니다. 그렇 지요? 그런데 발을 씻겨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사랑하는 아내의 발을 씻어본 남편이 계십니까? 심리적으 로 이 발을 씻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하인들이라도 너무 모욕감을 가질 때는 거절할 수 있었 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하인이 씻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발을 씻어줍니다. 그 발은 어떤 발 입니까? 자기 집에 오셔서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있을 때 그 발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그 발은 어떤 발입 니까? 인생에 가장 슬프고 고통스럽 고 아팠던 사랑하는 오라비가 죽었 을 때, 슬픔을 가눌 수 없어 그 발 아래 자기 삶 전체를 엎어놓고 무릎 꿇었던 발입니다. 그 발이 자기를 구속하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의 모든 먼지를 뒤집어쓰고 그 집에 왔습니 다. 그 거룩하신 발 앞에 머리를 풀 었습니다. 중동 사람들은 지금도 여 인네들이 머리를 묶지 않고 풀어진 머리로 다른 사람 앞에 나가는 것이 실례입니다. 그녀는 발을 씻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걸레가 준비되 지 않았는지, 의식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자기 머리채를 걸레로 삼아서 그 발을 씻고 있습니다. 그 러자 그 방에 향기가 진동했다고 합 니다. 이 나드는 원래 티벳과 인도 접경에 있는 히말라야의 높은 고산 지에서 나는 향료입니다. 너무 귀했 기 때문에 당시에는 다른 향료와 조 금씩 섞어서 사용했습니다. 4복음서 에 나온 말이 조금씩 다릅니다. 아 주 값비싸다고 기록된 부분도 있고, 아주 고귀한 것이라고도 기록된 부 분도 있고,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극상품이라는 뜻도 있고, 순전한 향 유라고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사람 들은 이 충격적인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자 중 하나가 불평하 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팔아서 300 데나리온을 받으면 가난한 사람을 잘 섬길 수 있을 텐데.."
계산 잘하 는 가룟 유다가 이 나드가 300 데 나리온이 나간다고 셈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에 제자들에게 이 야기합니다. 그랬더니 그 부정적이 고 원망하는 마음이 일시에 퍼집니 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이 분기가 충전했다(마 26:8)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옥합이라고 말하는 이 사라석 고는 지금도 유럽의 골동상에서 고 가를 주고 매매되는 일종의 도기입 니다. 그냥 그 병에서 따라도 됩니 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그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랬더니 불평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들이 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많은 시간 교제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귀 한 일을 먼저 앞서 행했어야 되었음 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들은 불평하 고 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 제자들의 사고는 돈 중심이었습니 다. 어떤 안목으로 사태를 보느냐는 참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제 자처럼 매사를 돈 중심으로 생각합 니다. 돈이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 다. 저는 일리는 있지만 멸시해야될 단어 중의 하나가 시간이 돈이라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모든 것의 가치척도의 중심인 것처럼 잘 못 오도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가룟 유다가 그랬어요. 그는 예 수님 따라다니면서 돈 만지는 일을 했습니다. 자기 일에 충성하고 몰입 하다 보니까 예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 는지도 잃어버린 채, 최대의 관심은 자기에게 맡겨진 그 돈입니다. 우리 가 조심해야될 것은 교회에서 봉사 하고 헌신할 때, 잘못하면 우리가 맡고 있는 일 때문에 주님의 의도와 관심사를 멀리할 수도 있는 연약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때 보면 성가대하시는 분 중에는 성가대 외 에는 예배가 아니라고 떠드는 사람 도 있더라구요. 기도를 안 하면 예 배가 아니라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성경공부하지 않는 것은 교 회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야 되고 그 최후의 권위가 우리 주님께 있어야 하는데, 자기가 잘 하고 자기가 관심있고 자 기가 맡아있는 그 일 중심으로 모든 일을 평가하려고 드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나쁘게 변질된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예요. 그는 돈을 만지며 예수님의 모든 뒷 바라지 하며 돈을 쓰는 권리를 가지 고 자기 개인의 적은 영달에 만족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는 도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님이 가난했는데, 어떻게 도적질 해 먹었겠습니까마는 돈을 늘 만지다 보니까 콩떡을 만들면 떡고물이 떨 어진다는 그런 사고입니다. 적극적 으로는 안 했는데, 결국은 쓰다보면 내 중심으로 바뀌어지는 경우를 봅 니다. 요즘, 서울의 큰 교회에서 누 가 재정위원장이 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교회가 많다고 합니 다. 50억, 100억, 200억, 어떤 은행 에 돈을 맡기느냐에 따라서 실적이 달라지니까 재정위원장 하려고 노력 하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 봅니다.
마태복음, 마가 복음에는 제자 들이 분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주께 서 말씀하십니다.
"저를 괴롭게 하 지 말라."
여기 요한복음은
"저를 가만히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 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 상 있지 아니하리라."
두 마디 말씀 을 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행하 고 있는 일은 나의 장사를 위한 것 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는 너 희를 곧 떠날 것이다. 그리고 주께 서는 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이 행한 그 모든 일은 반드시 알려져야 된다"
그렇다면 오늘 이 사건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배워야 될 것은 마 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과연 무엇인 가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 가의 골고다에 달리실 때 이 베다니 의 마리아는 곁에 가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예수님 살아있을 때, 예수님을 위해서 향유를 모두 썼기 때문에 그 후에는 가지 않습니 다.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요?그 비결은 우리 주님의 발 앞에 있는 시간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기쁜 날, 예수님의 발 앞에 있었습니다. 그의 최대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무 엇을 생각하고 계신가? 예수님께서 어떤 의지를 가지셨는가? 우리 예수 님께서 무엇을 가장 원하시는가? 였 습니다. 그는 자기 언니와 함께 일 하면서도 예수님의 동정 하나를 놓 치지 않으려고 마음 전체를 기울였 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았습니다. 그의 눈은 예수님 의 눈동자와 부딪쳐 있습니다. 그의 귀는 예수님의 입에 집중되어 있습 니다. 그의 심장은 주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그 뜨거운 사랑을 받으 려고 몸 전체로 나갔습니다. 여러 분,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에 실패하 면서도 그 발 앞에 앉아있는 시간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관심을 불러냅니다. 사랑하면 깊은 관심이 쏟아집니다. 이 여인은 우리 주님을 중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 분의 최대의 관심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집중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생 애, 가장 쓰라린 비극, 사랑하는 오 라비가 죽었던 절망의 그 시간에도 이 여인은 그의 발 앞에 엎드려서 그 분께 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랑하는 주님이 얼마 있으면 십자 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알았습 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 나오는 그 말씀 중에 제자들이 귓등 에 흘려 버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내가 얼마 있으면 유대 관 원들에게 붙잡혀 곤욕을 당하다가 십자가에 죽으리라."
계속해서 말씀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공생애 시작 하면서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처럼 인자가 높이 들려야 되리 라."고 주께서 어떤 죽음을 당할 것 인가를 계속해서 말했는데, 제자들 은 안 믿었습니다.
"예수님, 당신 보 니까 물위를 걸어다니시던데, 당신 보니까 에워싸인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없는 투명인간처럼 그냥 지나 가시던데, 당신이 명령했더니 바다 와 바람도 잔잔해지시던데, 당신이 물고기 두 마리, 보리 떡 다섯 덩이 로 사람들에게 나눠주니까 5천명이 먹고도 남던데, 당신이 이미 죽어서 썩기 시작한 시체를 향해서 나사로 야 나오너라 명령하니까 나사로가 벌떡 일어나던데, 그 권능을 가지고 죽어요? 어림없습니다. 당신은 메시 야입니다. 이 땅을 다시 회복시킬 분이십니다. 그 때 나는 당신의 좌 편, 우편에 앉겠습니다."
제자들은 끝까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주께 서 죽으신다는 의미를 그들은 몰랐 습니다. 주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주님이 되 기 원했습니다. 주께서 어떤 길을 가시겠는가에 대한 관심이 없었단 말이예요. 사랑은 상대편을 향한 관 심입니다. 우리가 장애 가진 형제, 자매들을 사랑할 때도 말로만은 안 됩니다. 관심입니다. 그 사람 중심 이어야 합니다. 이 여인은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발 앞에 앉아있는 시 간이 얼마나 되십니까? 그래서 그 분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그 대로 순전하게 받는 시간이 얼마나 되십니까? 기도해도 그냥 내 소원 말하고, 성경을 봐도 내 이익된 것 만 뽑아 쓰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 사랑할 줄 아는 마 리아는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 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나드를 담은 그 옥합이라도 쓰게 안 깨뜨려야 될 것 아니예요. 또 다 준 다고 해놓고 따라놓고 보면 좀 남으 니까 떡고물이라도 남길 수 있쟎아 요. 그런데 이 여인은 다 주기로 작 정했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주기 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귀한 당시의 도기인 옥합을 깨버립니다. 완전히 쏟아 부었습니다. 하나도 남 김없이 주기로 작정했습니다. 여러 분, 사랑은 그러합니다. 우리가 자 식들에게 주고 주고 또 주어도 모자 라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낌이 없습 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그 사랑이 주님께로부터 자기에게 날마다 넘쳐 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주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입 니까? 자신을 주셨습니다. 주시다 주시다 못해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그 영광의 사랑을 알았습 니다. 아낌없이 자기를 향해 쏟아주 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그 역시 아낌없이 자기에게 가장 소 중한 옥합을 깨뜨려서 주님의 머리 에 붓고 자기 머리털을 걸레로 삼아 주님의 발을 닦는 헌신으로 나아갔 습니다.
"내게는 당신 이상 존귀한 분이 없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가하면 세 번째로는 사랑 은 기회를 잃지 않습니다. 이 여인 은 주변의 여러 정황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 실 날이 임박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깜짝 놀란 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되어지는 것을 보았습니 다. 나사로를 불러내니까 나사로가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발 앞에 있을 때, 자기에게 부어 준 그 사랑의 멧세지, 온 인류 대속 을 위해 죽으시기로 작정한 어린양 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대로 온 예 루살렘과 유대의 모든 세력들이 움 직인다는 사실을 이 여인은 감지했 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더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 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유월 절 어린양 대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영광의 장례식을 생각하면서 향유를 부어드렸던 것입니다. 여러 분, 우리들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사건에 대해 기회를 놓치는 경우 가 참 많습니다. 토마스 칼라엘은 평생 살면서 자기 아내에게 수고했 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 아내가 어느 날 병들어서 죽었습니다. 그는 그 시체를 붙잡고
"여보, 5분만 눈 을 떠다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이 말을 하고 싶다구요."
울부짖 었습니다. 우리들이 귀한 시간들을 놓쳐버리고 소중한 기회를 놓쳐버리 고 이처럼 5분만 눈 떠달라고, 혹은 임종 직전에 내게 1년만 달라고, 그 러면 주님을 위해서 사랑의 헌신과 봉사를 하겠다고 붙잡습니다. 부끄 러워서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회를 놓치고 후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많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좋은 생각을 구체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사람 이 적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하고 끝냅 니다. 이 여인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사랑은 그 분을 향한 관심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아낌없 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 양보하는 것 같은데 기회만은 절대 로 놓치지 않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헤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코메디에나 나올 소리입니다. 사랑의 소중한 기 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5년 전인가요? 이 본문을 설 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이 마리아의 옥합을 깨뜨리자고 했습니 다. 나드 한근이 300 데나리온이니 까 한 데나리온이 한 사람 하루 품 삯이에요. 그러니까 300일 품삯입 니다. 우리가 1년에 300일을 일 못 합니다. 52일 쉬고 공휴일 쉬면 280일 좀 넘습니다. 그래서 1년 연 봉의 옥합을 깨뜨리자고 했습니다. 그 옥합 깨뜨린 결과로 이 아름다운 건물, 밀알학교를 주께서 주셨습니 다. 제가 당시에 로스엔젤리스에 갔 었는데 어떤 장애인 가정에서 저를 초청해서 만나서 이야기합니다.
"남 서울교회가 장애인들을 위해서 학교 를 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우리 가 얼마나 소망하며 기뻐했는지 모 릅니다."
장애 가진 자식 때문에 미 국으로 이주해오신 분이에요. 그러 니까 우리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지 금은 미국 정부에서 자기들을 잘 섬 겨준대요. 그런데 한국에서 한 교회 가 장애인 학교를 짓는다는 소식이 미국에 있는 장애인 가정에 소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깨뜨려진 옥합은 향기가 진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이런 옥합이 있을 수 있습 니다. 소천하신 우리 교회 공석남 장로님, 증권사 사장으로 계시다가 1년을 떼어내서 일본에 가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시다 돌아오셨습니다. 정운길 장로님은 고등학교 영어교사 하다가 명예퇴직을 하시고는 오클라 호마 주립대학에 가서 외국 사람으 로서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영어를 가르쳐야하는가 하는 대학원 코스를 마치시고 또 성경공부 해야겠다고 달라스 신학교에 가서 성경을 잘 공 부할 수 있는 기초적인 학문을 했습 니다. 그리고 지금은 태국 방콕에서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고 계십니다. 유제영 장로님은 지난 해 1년간 일 본 사역을 잘 마치시고 올해 우리와 함께 예배를 같이 드립니다. 주 앞 에 드려진 옥합이라고 저는 믿습니 다. 윤영곤 집사님은 연해주에서 우 리 동포들과 러시아 사람들을 섬기 기 위해서 병원을 정리하고 선교훈 련도 마치셨습니다. 바보들입니다. 생애 소중한 부분을 허비해버린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사랑은 주고 주고 또 주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 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그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 러운 교회가 될 것인가는 중심으로 주님 앞에 옥합을 깨뜨린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로 결정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준비하는 분도 봤습니다. 은퇴하면 선교사로 갈 거래요. 어떻게 갈 겁니까? 그러 니까 자기가 다른 돈은 벌어놓은 것 은 없지만 집 한 채는 있으니까 그 전세금 받아서 은행에 넣어 이자 나 오면 선교비 염려할 것도 없고 저개 발국가로 가려고 하는데 일반회사 생활하면서 배웠던 개발도상의 과정 을 도와주며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 하겠다고 합니다 만약 모든 그리스 도인들이 그렇게만 결정하면 우리 나라에서 10만 명의 선교사도 보낼 것 같아요. 우리에게 전체를 주신 주께서 전체를 받으시길 기뻐하십니 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마 리아의 귀한 헌신이 우리의 생애의 푯대가 되어서 주님 마음에 지워질 수 없는 주님과 나만의 아름다운 러 브스토리를 만들어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것 하나는 가지고 주님 앞에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그 사건만 생각하면 신이 나고 그 사건 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으시고 그 사 건만 생각하면 흐뭇해하시는 이런 헌신 말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 그 영광스러움으로 채워지는 복된 한 평생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 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리아의 감사행위
요 12:1-8 / 김홍도 목사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즐겨 찾아 가시던 동네가 있는데 그 곳은 바로 "베다니" 입니다. 이 "베다니"에는 문둥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시몬이 있었고 죽어 냄새나던 자리에서 예수님이 살려주신 나사로와 예수님을 지성껏 대접하던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른 어떤 곳보다 이 베다니에 자주 찾으시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엿새전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한 주일 전쯤 해서 예수님께서 이 베다니 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문둥이었던 시몬의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아마도 이 나사로의 집과 함께 어울려서 잔치를 한 것 같습니다.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예수님께서 나사로와 그외 다른 사람들과 앉아서 말씀하시는데 마리아가 아주 값이 비싼 나드 향유가 든 옥합을 예수님 앞에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리고는 여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모두가 감격해서 바라보는데 가룟 유다가 그것을 보고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고 허비하느뇨?"고 마리아를 책망했습니다.
사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돈 주머니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돈을 훔쳐내는 도적놈이라 돈이 탐이나서 한 말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편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 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하늘의 신령한 말씀을 듣고 너무 감사하였고, 또 자기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게 된 은혜에 감격하여 사랑하는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표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이 마리아의 감사 행위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배울 바가 있습니다.
1. 타산을 초월한 감사입니다.
당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인데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향유라고 했으니 근 일년이나 벌어야 되는 값입니다. 또 이것은 당시 시집갈 처녀들이 시집갈 밑천으로 저축해 두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시집갈 밑천이요 일년동안을 벌어야 되는 막대한 돈을 아까움 없이 부어드렸다는 것은 계산을 초월한 감사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이와 같은 희생적인 감사행위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고 그 이름을 존귀케 해 주셨습니다. 잠언 22:1에 보면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무엘상 2:30에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리스도께 지극한 감사의 표시를 한 마리아는 금, 은, 보물에 비할 수 없는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지 왜 허비하느냐고 한 가룟 유다는 그렇게 계산과 타산만 하더니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고 목매달아 자살할 때 몸이 곤두박질하여 창자가 흘러나와 죽고 말았습니다.
타산만 따지던 가룟 유다의 운명은 비참하게 됐지만 타산을 초월해서 귀한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는 존귀하게 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릴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릴 때 너무 타산적이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실 수 없고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어느 교인이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옛날돈 1원(몇 천원 상당)과 1전(몇 백원)을 각각 다른 주머니에 넣고 갔다가 목사가 설교를 잘하면 1원짜리를 내고, 설교를 시시하게 하면 l전짜리를 냈다고 하는 섯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언제나 정성껏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든 못하든 예배는 정성껏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없어도 예배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예배드리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가대 찬양을 들으러 나오고, 어떤 이는 목사의 설교만 들으러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설교가 시시하다고 생각되면 교회 갈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설교가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이 기뻐 받으실 만한 정성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계적인 부호 A. A Hyde란 사람이 한때 빚을 잔뜩 지고 있는 데도 십일조 하는 것을 본 어떤 사람이 "당신, 빚은 안 갚고 십일조 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빚을 먼저 갚아야 내 빚도 갚습니다" 하면서 꾸준히 계속 십일조를 바치더랍니다. 그러더니 그는 마침내 세계적인 부호가 되었습니다.
광주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 중에 성경교회 이모장로님의 초대를 받아 갔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그 장로님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가 여러해 전에 사업을 하다가 200만원 빚을 졌었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200만원 빚을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100만원 더 빚을 내다가 감사헌금을 드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장로님이 "내가 무엇인가 물질 생활에 잘못이 있길래 이러한 징계를 받은 줄 압니다. 하나님이 200만원 빚을 갚아주실 분이면 300 만원도 갚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고 말씀하 셨다는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얼마 안 가서 그는 큰 축복을 받아서 몇억대 부자가 된 것을 보고 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계산이나 타산을 앞세우지 아니하고 감사하고 헌신하게 될 때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신다 는 사실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 축복을 받을만한 감사는 타산과 계산을 초월한 감사입니다. 나 할 것 다하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끼니라는 것도 생각지 아니하고 주의 종의 명령에 순종했더니 놀라운 기적 으로 흉년 기간을 무사히 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치약을 보면 콜케이트 치약이 있는데 이것은 유명한 콜케이트 회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설립자 윌리암 콜케이트(William colgate)는 거지와 같이 가난했는데 십일조를 드리다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10의 1을 하고 축복을 받으니까 10의 2를 하고 나중엔 10의 3조, 10의 4조를 하다가 10의 5 조까지 하는 가운데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축복받을 만한 기뻐하시는 감사는 계산이나 타산을 초월한 감사입니다.
2. 겸손한 감사입니다
그 비싼 옥합을 깨뜨려서 붓는 정도이면 아마 어깨를 으쓱거릴 만한 자세도 하고 자랑도 할만한데 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엎드려 자기가 귀중히 여기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겸손한 행위입니까? 참으로 귀한 것을 바치면서도 겸손한 행위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 이 칭찬도 하시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옛날 어느 농촌에 유지 한 사람이 예수 믿기를 작정하고 교회에 나왔더랍니다. 마침 감사절이 다가오 니까 이 몇달 밖에 안 나온 사람이 쌀을 두 가마니나 헌금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도 교인도 모두 들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무엇이 틀렸는지 교회를 안 나오더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심방을 가시고, 장로님들이 심방을 가셨지만 아무리 심방을 가도 토라져서는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구?" 그러면서 그저 하는 말이 그 말이더랍니다.
결국 나중에 알아보니까 다른게 아니라 성찬 예식 때 성찬 떡과 성찬 포도주를 세례 받은 사람만 받게 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분급하지 않았더니 이 사람은 새 신자라는 신분도 모르고 "세상에 내가 그래도 쌀을 2가마씩이나 헌금했는데 아, 그 눈꼽만한 빵떡 한 개도 안 주고 소눈알 만한 포도주 한 잔 주기 싫어해?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구?" 자꾸 이렇게 원망하면서 교회를 안 나왔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것을 이해시켰다고는 합니다만 이러한 시험에 들게 된 것은 자기가 무엇을 좀 바쳤다고 교만했기 때 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하고 무엇을 드릴 때는 겸손한 마음으로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드리면서도 복을 못받는 것은 겸손한 자세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잘한다고 칭찬받을 때 교만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칭찬받을 때 교만하지 말 아야 하고 다른 사람이 칭찬받을 때 시기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는 교만해지거나 우리에게 시기가 들어올 때 마귀는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요동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10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 이라 할지니라" 했습니다.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눅 17:7, 8). 이와 같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바치고 나서도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것을 한 것 뿐입니다 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세상에 없는 귀한 것을 바쳤다 할지라도 또 10의 1조뿐 아니라 10의 9조를 바쳤다 할지 라도 '무익한 종이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께 칭찬도 받고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고 하나님께 더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1:2에 보면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교만해지면 자연히 욕을 먹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낮아지는 자는 모든 사람 앞에 더욱 존귀와 칭찬을 받고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겸손한 감사입니다.
3. 최선을 다한 감사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있는 힘과 정성을 다 기울여서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향유는 너무 귀하고 비싸기 때문에 마치 요사이 "타부" 향수나 "샤넬" 향수처럼 조금씩 바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조금씩 부어 드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옥합을 아예 깨뜨려서 부어 드렸습니다. 우리 주님은 성도들이 많든 적든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가 그날의 생활비 전부를 바치는 것을 보고 비록 엽전 두 푼을 바쳤지만 그 모든 사람보다 제일 많이 바쳤다고 했습니디 정성이 없는 사람은 신앙도 없습니다. 주님께 얼마나 정성이 있느냐에 따라서 믿음도 비례 합니다. 물질을 바치는 것만이 아니라 교회의 무슨 일을 해도 그 사람이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믿음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식물의 첫 열매와 짐승의 첫 새끼, 사람은 맏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어느 임금이 신당 앞에 제사드리는 한 사람을 보고 신하에게 그 연유를 알아보도록 심부름을 시켰더니 갔다와서는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까 돼지 족발 하나와 술 한 잔을 부어 놓고 복을 비는데 "금년에 소는 쌍둥이만 낳게 해 주시고, 돼지는 한 마리가 10마리씩 배게 해 주시고, 곡식은 잘되어서 창고가 넘치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제사를 드리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드릴 때나 무엇을 감사할 때 정성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때나 감사할 때는 하나님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도 봄으로 마귀가 비웃고 조롱하지 않도록 언제나 조심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 어떤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지만 어떤 이는 힘껏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억지로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쁨으로 드리며 힘껏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정 성을 기울여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되겠습니다.
선명회를 시작한 피얼스 박사(Dr. Pears)가 같은 계통으로 대구에 있는 동산병원 준공식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 미국 사람이라고 다 부자여서 돈을 많이 내어 이 동산병원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라디오 방송으로 한국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병원을 지어야겠다고 광고를 했더 니 어떤 분이 편지와 더불어 50불을 붙여 왔는데 그 편지 내용이 "나는 지금 중병으로 침대에 내내 누 워서 사는 사람입니다. 방송으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한국에 있는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헌금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내가 늘 벗삼아 듣고 있던 라디오를 팔아서 50불을 보냅니다" 하는 것이었 답니다.
신명기 6:5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고 했습니다.
말라기에 보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이 얼마나 타락했던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데 제일 좋고 비싼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눈먼 것, 병든 것, 다리 비틀어진 것 등 팔아 먹지도 못할 것을 가져 다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하시면서 "차라리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고 하시면서 책망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때마다 언제나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킵니다. 우리가 l년동안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이 감사절에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기울여서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감사절을 지킬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예수님과 베다니 마리아
요 12:1-8 / 이필재 목사
지난 주일에는 바리새인과 막달라 마리아사이에 일어난 예수님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주인공들이 달라집니다. 12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와 베다니 마리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장소도 지난번에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이었는데 오늘은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의 집이 나옵니다. 내용에도 좀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의 예수님 세족 사건은 회개와 죄사함 구원의 감격에 초점이 있고, 오늘 베다니 마리아의 예수님 세족은 감사와 헌신에 초점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약 일주일 전에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이것을 더욱 의미화 해서 말씀하셨고, 나사로의 집에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나사로의 집에서는 큰 잔치를 벌어졌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잔칫집에 가신 기록이 여러 번 나와 있습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 가신 것을 시작으로 해서 군중들 가운데 많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참여하신 잔치는 모두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잔치 자리에 예수님이 손님으로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2절에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라고 아주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의 집은 예루살렘 동쪽에서 약 4킬로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마지막으로 전도하시던 예수님과 이 집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제일 심방을 많이 가신 집이 나사로 삼남매의 집입니다. 오늘 말씀 12장뿐만 아니라 11장에도 나사로의 집에 가신 것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이때도 예수님이 심방을 오시니까 마르다는 음식을 만드느라고 바빠서 마음이 분주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동생 마리아가 자신의 부엌일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다소 불평스럽게 말을 한 기록도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의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셨던 세 번의 기록 가운데 한번이 나사로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찾아가서 죽어있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우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 다른 사람들도 이 집 식구들과 예수님은 특별관계에 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 이후를 보면, 대제사장들이 예수와 나사로를 함께 죽이려고 모의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럴 정도로 관계를 맺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오늘 잔치는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려주신 후이기 때문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감사 차원에서 예수님을 향한 일종의 헌신예배와 같은 의미의 잔치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열두 제자, 그 동네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는 잔치 자리가 되었습니다. 나사로의 소생 사건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큰 선물이었다면 오늘은 주님을 위한 충성입니다. 지금 이렇게 잔치를 함으로 무엇인가 또 다른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 때와 공통점이 나타나는데 발 씻는데 비싼 향유를 부었다는 것과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는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과 제자들, 동네 사람들이 그 집에 모여 밥 한 끼 잘 먹고 헤어졌다면 요한은 이렇게 기록으로 성경에 남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발 씻는 것을 본 가룟 유다가 심하게 참견을 하는 바람에 그것에 대해 예수님의 설명을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를 책망했고,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했습니다. 왜 책망했고, 왜 칭찬했는가? 무슨 교훈이 들어있는가? 이것을 조명해 봄으로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상식 수준을 넘는 엄청난 가격의 향유를 발 씻는 데다 투자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나오는 향유는 분명하게 가격이 나타나 있습니다. 계산을 잘하는 가룟 유다가 300데나리온이라고 가격을 측정했습니다. 그러면 300데나리온이면 우리 돈으로 얼마나 되기에 이것이 이렇게 문제가 되었나? 성경에 나타나있는 대로 해석하면 가격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부흥회를 하셨습니다. 모인 사람이 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만 5천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자와 아이를 합치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 시대에도 신도들 가운데는 여인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오병이어를 내놓은 사람도 어른이 아니고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는 또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줄잡아도 1만 명 정도는 모인 큰 부흥 집회를 인도하셨습니다. 제 목회 경험으로 보면, 그렇게 많은 부흥회를 다니고 그렇게 많이 설교했는데, 군인 교회만 빼놓고는 언제나 여신도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 자리도 여인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 여자 다 빼고 남자만 5천명이라고 했으니까 1만 명이 넘는 군중집회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종일 늦게까지 부흥회를 하셨습니다. 해가 저물어가는 데까지 예수님이 계속 설교를 하셨는데 제자들이 좀 짜증을 부렸습니다. “그만 돌려보내소서. 해가 저물었나이다. 사람들이 지금 몹시 배고파하고 있습니다. 부흥회도 신체적인 조건을 맞춰가면서 해야 은혜를 받든가 말든가 할 것이지, 배는 고픈데 계속 붙들고 설교만 하십니까?” 아마 교인들이 많이 모이니까 예수님도 신나셨나 봅니다. 제자들이 짜증을 부리니까 예수님이 “아, 그러면 먹을 것을 주면 될 것 아니냐?”, “이곳은 빈들이요 해도 저물었나이다.”라고 빌립이 말합니다. “이 많은 사람을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합니다. 돈도 없지만 있다고 해도 어느 음식점에 가서 1만 명 먹을 음식을 준비해 먹이겠습니까? 이 위기 상황을 해결하려면 빨리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200데나리온이면 1만 명 정도가 한 끼 먹을 수 있는 돈이 됩니다. 우리 돈으로 한번 계산해 보면 지금 나가서 설렁탕이라든가 햄버거라든가 간단하나 음식을 5천원 정도로 계산해 본다면 5천원씩 1만 명 계산하면 얼마입니까? 아니, 어느 학교들을 나오셨기에 그렇게 간단한 수학도 모르십니까? 5천만원이 되지 않습니까? 그게 200데나리온입니다. 사실상 1만 명이 한 끼 먹으려면 5천만원은 있어야 1만 명이 한 끼 먹을 수 있다고 계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향유의 가격은 300데나리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얼마입니까? 7천5백만원 정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옛날 유대 사회에 어떻게 이런 비싼 향유가 있었는가? 저도 몰랐는데 가보고 알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향유 산업이 제일 발달한 곳이 그쪽 지역입니다. 카이로에 가시면 선물센터의 90퍼센트 이상이 향유입니다. 누구든지 호기심 때문에 한 박스씩 사오게 되어 있습니다. 요만한 병에서부터 이만 한 병까지 “옛날 임금님이 쓰시던 향유 어쩌고….”하면서 설명을 하는데 안 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쓰려고 하는 것보다도 재산 증식용으로 보유하는 것으로서 오래된 향유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더 비싸집니다. 우리가 금덩어리 사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산 증식용 향유가 그 사회에는 많았다는 말입니다. 2,000년 전에 유대 사회에서 이만하면 마리아는 부자에 속합니다. 비록 부모 없이 삼남매가 살아왔지만 물질 능력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마다 잔치 수준의 음식을 차리고 지금 마르다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씻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향해서도 사람들이 제일 아까워하는 것이 물질, 돈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을 향하여 주머니가 열려있지 아니한 사람들을 보고 믿음 있다고 말하지 말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문제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격과 재물이 상대적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성경에서도 인정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계약 관계라고 신학에서 설명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관리를 잘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 주었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완벽하게 창조하시고 맨 나중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인간이 이만하면 넉넉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모든 조건을 완비하신 다음에 인간을 만드시고 모든 세상 창조물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인구가 많아지면 뭘 먹고 살 것인가 생각하면서 그렇게 전쟁을 많이 해 왔습니다. “뭘 마실까 뭘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이 다 만들어놓으셨습니다. “너희들이 생각을 잘못하고 관리를 잘못해 굶주릴 뿐이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인구가 많아질수록 잘 삽니다. 여러분, 선진국들이 왜 이민을 받아들입니까? 남의 나라 사람들을 왜 받아들이겠습니까? 사람이 와야만 자기들도 잘 살 수 있다는 계산을 해서 받아들이는 겁니다. 미국에 있는 모든 경제학자들이 미국에 와 있는 불법 체류자들이 경제에 도움이 되느냐 손해가 나느냐를 연구 발표했는데 단 한 사람의 경제학자도 손해가 난다고 발표한 사람이 없습니다. 괜찮다고, 그 사람들 다 여기서 살게 하라고, 미국 경제에 도움을 준다고 발표했습니다. 사람이 많을수록 경제가 발전하고 더 잘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원리입니다. 지금보다 인구가 10배나 더 많아져도 인간은 넉넉히 살 수 있는 조건을 하나님이 다 만들어놓으시고 “전쟁하고 싸움질하지 말고 관리만 잘 하라. 그러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그겁니다.
계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다 주시고 하나를 도로 찾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계약입니다. 자, 그 대표적인 것을 보시면 오늘날의 안식일이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여러분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덥다고 요즘 영화구경 많이 하시죠? 또, 해수욕장에 가서 재미나게 가족들과 함께 노셨죠? 돈도 버셨죠? 노래도 불렀죠? 춤도 추었죠? 연속극도 보셨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해라! 죄가 되지 아니하는 한에서 너희들 마음대로 행복하게 해라!” 하나님이 “이건 하지 말라, 저건 하지 말라.” 안 그러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행복감을 누리고 내 의사가 결정하는 대로 뭐든지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는 도로 가져와라!” 이것이 안식일의 개념입니다. “이 날은 내 날이니까 나한테 와서 예배드려라!” 이것이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십일조 헌금 내시는 교우님들이 많이 계실 겁니다. 어느 교회나 보면 십일조 교인은 25퍼센트 정도입니다. 아주 잘하는 교회가 30퍼센트가 조금 넘고 그렇습니다. 70퍼센트 이상은 안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물질을 우리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밥 사먹고 옷 사 입고 집사고 필요한대로 다 썼습니다. 내 능력껏 내 행복에 필요한 대로 써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금반지 산다고 사지 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좋은 집 산다고 “그건 사지 말라!”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네가 결정해서 네 맘대로 해라! 다 쓰라! 그러나 하나는 도로 가져와야 한다.”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계약입니다. 우리가 가끔 헌신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헌신 예배의 뜻이 뭡니까? “마땅히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살겠습니다.”라는 약속의 예배입니다. 만약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리지 아니할 때 도둑의 개념이 됩니다. “너희들 왜 도둑질 해? 내가 다 주었잖아? 마땅히 나한테 가져와야 할 것 있잖아? 그거 왜 안하지?”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 계약을 하셨는가? 하나님이 욕심이 많아 무엇을 많이 가져오라고 이렇게 가져오라고 하신 것인가? 계속 주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소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셨고, 이 관계를 벗어나면 있는 것마저도 없어지는 진리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것은 너희가 지키라! 이 계약을 깨뜨리지 말라!” 지금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소비한 그 마음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마리아는 이것보다 더 큰 보물이 있었다면 그것을 드렸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이것이라도 드려야 만분의 일 보답하는 기쁨이 생기기 때문에 헌신 예배로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오라버니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헌신에 초점을 맞추어 잔치를 벌이고 향유를 깨뜨린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하나님의 선언이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데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을 정했을 때 그 마음을 보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삭이 죽었습니까? 180세까지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언제나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생각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낭비적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발 한번 씻는데 그렇게 많은 물질을 허비할 필요가 있는가? 이 점에 있어서는 가룟 유다의 말이 더 합리적입니다.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데….” 만약에 7천5백만원 가지고 우리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면 1만원씩만 나눠주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까? 만약 이 돈을 가지고 한 끼 일만 명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그런 돈이 아닙니까? 또,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낭비하느냐? 이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지금 갈보리교회에 일주일에 돈을 달라고 오는 사람들을 세어보니까 250명 정도 됩니다. 만약 이때 예수님도 상식적으로 말씀하신다면 “마리아야! 유다의 말이 옳다. 이런 일을 하려면 나와 상의했어야지.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잘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말씀이 어떻게 나오나 하면 옥합을 깨뜨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향유 뚜껑을 열고 아까워가지고 ‘졸졸졸’ 이렇게 따른 게 아닙니다. ‘팡!’ 깨뜨려서 한꺼번에 왈칵 쏟아 부은 것입니다. “유다야! 너 말 참견하지 마라! 마리아야, 잘했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내가 말했지? 이제 며칠 있으면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해! 나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해!” 마태복음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할 때 이 여자의 행한 일도 전하라!” 발 씻는 사건을 복음화 하여서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사건을 놓고 예수님과 가룟 유다의 시각이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지난번에는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시각이 또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지금 우리 갈보리교회는 빚을 잔뜩 지고 쩔쩔 매면서도 일 년에 15억원 이상을 선교비로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북한동포 구제 사업에 밀가루 보내기 운동을 4년 4개월 동안, 5천명 식량을 헌금해서 보내준 사람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것 먹고 앞으로 언젠가는 예수 믿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복음화를 위해서 했습니다. 그렇다고 밀가루 먹고 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세례 받았다는 소식도 없고 신학교 들어갔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그러면 낭비한 것인가? 괜찮습니다. 열매는 언젠가는 하나님이 거두십니다. 열매를 내가 뿌리고 내가 거두려고 자꾸 계산을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낭비했어! 다 뿌렸어.’ 거기서 끝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역사가 흐른 다음에 다 열매를 거두십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우리가 선교를 하고 선교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외국 가서 예수 믿는 사람 하나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해도 나는 선교 잘했다고 늘 말합니다. 왜? “당신이 그곳에 가서 몇 년 동안 살아있었던 것만 해도 선교입니다. 지금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역사가 흐른 다음에는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나는 항상 그렇게 말합니다.
저희 교회 교인이 아닌 이웃교회 어느 장로님이 절 찾아와서 저더러 1시간 정도 상담을 하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더니 오시자마자 저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분이 대성통곡을 하는 겁니다. “아니, 얘기를 해야 같이 울든가 말든가 하지요.” “예, 목사님! 저는 헛수고 했습니다. 그게 억울해서 우는 겁니다.” “뭘 헛수고하셨는데요?” 일이 이렇게 된 겁니다. 미국에 가서 보석가게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어요. ‘어떻게 살까 했는데 하나님이 돈을 많이 주셔서 부자가 되었으니 주님의 일을 이제부터 열심히 하자! 뭘 할까? 그래, 교회 하나 세우자!’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목사가 있어야 해서 제 친구목사와 어떻게 둘이 만났다고 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를 하나 세웁시다. 돈은 제가 다 대겠습니다. 목사님은 목회만 열심히 하세요.” 그러니 그 목사님은 이런 좋은 사람을 만나서 너무 너무 좋았을 것입니다. “아, 그럽시다.” 그래서 둘이 합의를 해서 교회를 하나 세웠는데, 교인이 그 장로님 한 가정이니 목사님 월급도 혼자 드리지요, 목사님 아파트비 내드리지요, 자동차도 사드렸죠, 교회 경비도 혼자서 다 헌금하지요. 뭐, 자기 사업을 해서는 교회에다 다 쏟아 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목사님과 상의하고 제가 간판을 떼려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억울합니까? 헛수고 했습니다.” 막 우시는데, 제가 “그래, 왜 안됐습니까?”하고 물으니, “몰라요. 하여튼 안돼요. 목사님,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제 친구 목사를 좀 원망하는 것 같이 들렸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이 여기에 와서 헛수고라는 말을 10번도 더 썼는데 그게 왜 헛수고입니까? 장로가 성경도 안 읽어보셨습니까? 성경에도 ‘소자 중에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준 자는 결단코 네가 그 상을 잃지 않겠다.’했습니다. 왜 헛수고입니까? 지상의 교회는 불안전의 요소가 있는 것이 신학의 정의요, 있던 교회가 없어지기도 하고, 없던 교회가 새로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장로님께서 그 열심히 헌금하고 수고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내가 수고하고 내가 열매를 따먹으려고 하고 눈에 보이는 걸 좋아하지. ‘수고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간판 떼려면 떼십시오. 그래도 당신의 헌신한 것은 하나님의 기억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것을 헛수고라고 생각하는 신학의 기초가 지금 문제가 되는 겁니다. 어디서 장로가 되셨나요? 간판 떼세요. 그리고 다시는 교회 세우지 마세요. ‘ 이 교회는 내가 수고하고 내가 세운 교회다!’라고 생각하시는 것이면 다른 교회에 교인으로 그냥 나가세요. 간판 떼세요. 다음 주일부터 다른 교회 나가요! 우리 교회는 오지 마세요. 왜 헛수고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낭비적 성격이 있는 겁니다. 했으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그것이 나한테 복이 약속되는 겁니다. 헌금 좀 했다고 뭘 헛수고다 어쩠다 하고 떠드십니까?” 저한테 무척 야단맞고 “어휴, 정말 그러네.” “정말 그렇다니? 당신 같은 사람이 장로 되었기 때문에 그 교회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헛수고가 없습니다.
지금 보세요. 가룟 유다의 말대로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긴 것 어느 것이 더 유익했습니까? 이 사건은 성경에 남아서 길이길이 영원히 주님을 향한 마음 자세의 헌신에 대한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향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가룟 유다! 말참견 좀 그만해!” 이렇게 된 겁니다.
여러분이 판단해 보십시오. 마리아는 그때 그 일을 함으로 그 아름다움이 주님의 말씀대로 지금까지 남아 온전하게 빛이 나고, 가룟 유다는 그렇게 말함으로 그의 욕심과 어두움이 영원한 저주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바리새인과 시몬 막달라 마리아, 가룟 유다와 베다니 마리아! 왜 예수님이 이 마리아들을 칭찬하셨는가? 이런 진리가 있습니다. “마리아와 같이 주님을 향한 마음의 자세로 낭비적 성격이 있지만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서 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람만이 아름다운 헌신을 계속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모두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베다니 마리아가 했던 일에 예수님이 본 시각과 가룟 유다가 본 시각의 차이가 무엇을 말해주는가? 주님을 향해서는 어떤 마음으로 헌신을 해야 되는가? 오늘 말씀을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결정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향기를 내는 헌신
요 12:1-8 / 이재철 목사
예수님을 믿으면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헌신입니다.
헌신을 하면 자신에게는 기쁨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향기를 냅니다.
3절에 보면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이런 마리아를 보며 비난하였습니다.
가룟유다처럼 갈수록 악취가 나는 사람이 있고, 처음에는 잘 하다가 불평하는 마르다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향기를 내는 헌신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사랑을 낭비하고 허비할 줄 압니다. 사랑하려면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아낌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사랑을 예수님께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룟유다의 눈에는 허비와 낭비로 보였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위해 몸을 낭비하고 허비하셨습니다.
7-8절 말씀에 보면 마리아의 행동을 보며 예수님은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해서 지금 향유를 붓는 것이다. 말리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님께 살아계실 때 잘 하십시오. 제사 때 잘 차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향품을 발랐습니다.
막달라마리아도 돌아가신 후에 새벽에 향품을 바르려고 했지만 주님이 부활하셔서 바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살아 생전에 부었고 온 집안에 향기가 났습니다.
마가복음 14장 9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 어떻게 헌신 하면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할 수 있을까요?
① 먼저 말씀 받고, 은혜 받고 헌신하십시오.
누가복음 10장 39절에 보면 마리아는 먼저 주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헌신의 출발은 주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마르다는 예수님께 명령하였습니다. 결국 마르다는 불평을 하다가 악취 나는 헌신을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후의 계획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러한 주님의 계획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동안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았고,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귀한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해서 머리털로 발을 닦아줄 수 있었을까요?
처음에 주님의 발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자리에 앉아 말씀을 사모하고 받아들이십시오.
사람들 중에는 “마리아 형”도 있고 “마르다 형”도 있습니다.
마르다 형이 바람직하다면, 애찬 봉사는 누가 합니까?
애찬 봉사를 하더라도 향기 나는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말씀을 받은 다음에 봉사하면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향기 나는 헌신을 하려면 먼저 주님의 말씀 아래 있어야 합니다.
② 할 수 있을 때 헌신해야 합니다.
7-8절 말씀에 보면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항상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6일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 다음에 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입니다. 늙고, 병들고, 힘없고, 돈 없을 때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실 때(예를 들면 목자, 목녀로 섬겨야 할 때)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기도한 후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십니다. 순종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