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사탕
주택들이 빌딩 숲 사이로 삐죽이 비집고 서있다. 정현의 집 거실에서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다. 여름이 지나가면 그의 마음은 가을바람을 타고는 한다.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수화기를 집어 든다. 변화하는 세상에 잠깐 유행하고 있는 텔레마케팅 전화였다.
“사장님! 부동산 정보를 알려드리려 합니다.”
크리스털 잔을 부딪히는 것 같은 여인의 음성이 정현을 호기심에 빠뜨렸다.
“어디 좋은 곳이 있습니까?”
정현에게 장난기가 발동했다.
“네, 중부내륙지역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좋은 곳이 있습니다. 관광단지와 산업단지가 함께 들어 설 발전 전망이 있는 지역입니다.”
“정치를 잘 해야 땅도 잘 팔릴 터인데... 지금 같아선 어디 부동산에 투자 할 수 있겠습니까?”
“네, 이제 나라가 발전하는 과정이니까 정치도 경제도 곧 좋아 질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서 미리 투자하시는 것이 사장님께 유리 할 것입니다. 저는 김 은숙입니다. 사장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목소리가 이지적(理智的)이면서도 아름답습니다. 나는 수호지(水湖志)에 나오는 무대(武大)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분이 멋있는 사람인가요?”
“아니요, 멋있는 사람은 그의 아우 무송(武松)입니다. 무대(武大)는 그 소설에 추남으로 그려진 사람이지요. 좀 모자란다 싶은 사람을 무대 같다고 하지요.”
“사장님 말씀이 젊잖으신 걸 들으니 너무 겸손하신 것 같으십니다.”
“은숙씨, 목소리 예쁘니까 노래 한번 해보세요.”
불러 보라는 노래를 넉살 좋게 척척 받아 넘겨 부른다. 정현은 그 여인의 노래 소리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당신은 노래를 타고 넘기는 기교가 맛이 있구려.”
자신도 모르게 당신이란 말이 튀어나와 정현은 흠칫 놀랐다. 인연이란 묘한 것이어서 은숙과 정현 사이는 이렇게 수화기에 이끌려 서로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은숙은 처음 통화하는 정현에게 어린 피난시절 부산에서 자란이야기부터 늘어놓기 시작했다. 1.4후퇴 때 부모를 여의고 고아생활을 하다 고모님 손에서 소녀시절을 보냈단다. 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은 정현에게는 어린 시절 고생했을 그녀가 더욱 측은하게 느껴졌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정현은 그 여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고객을 모시고 오래요. 사장님, 저 한번 만나줘요.”
“무대 같은 사람을 만나서 무얼 하게요?”
“제가 공주병 들린 미인이잖아요!”
“무대와 공주라... 어울릴까요?”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도 있잖아요.”
“그럼 만나서 실망하지 말아요.”
지하철 신촌역 7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 여인을 상상하며 정현은 계단을 걸어 오르고 있었다. 출구 밖에서 등을 보이고 서있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은숙임에 틀림없는 듯 했다. 그녀가 돌아서자 손을 흔들어 보이며 걸어 올라갔다. 그녀도 한 번에 알아보고 짧게 손을 들어 보였다. 사람들 틈에서 둘이는 그렇게 쉽게 알아 볼 수가 있었다.
“반갑습니다. 최 정현입니다.”
“안녕하세요. 와 주셨군요.”
“이쪽이 식당가가 아닌 듯합니다. 반대편으로 가시죠.”
“저도 이곳이 처음이라서 잘 모릅니다.”
그녀는 남의 눈에 뜨이지 않을 조용한 곳을 만날 장소로 정했으리라. 다시 지하도를 건너서 식당가 쪽으로 둘이서 걸었다. 정현은 화식(和食)집을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에게는 한식집이 더 좋은 모양이었다. 가까운 한식집 이층으로 자리를 하고 마주 앉게 되었다. 전화에서는 그렇게 말을 잘하던 그녀는 자꾸만 얼굴을 떨구며 시골처녀처럼 수줍음을 탔다.
“어떻습니까? 처음만나니까 생소하시죠?”
“예, 목소리 주인공과 선생님이 안 맞는 것 같아요.”
수화기로만 만나다 처음 얼굴을 마주하니 그럴 법도 했다. 정현 역시 전화상의 그 여인과 앞에 있는 은숙이 동일인일까 하는 혼란에 빠졌다. 그 여인의 얼굴에서 예쁜 모습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빨리 친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지고 온 젊은 시절 사진을 정현에게 내어 밀었다. 지성적이며 날씬하고 예쁜 모습이 흑백사진에서 배어나오고 있었다. 지금은 네모난 얼굴에 동그란 눈동자가 옛 모습을 많이 닮아 있었다.
“역시 미인이시네요,”
“선생님도 젊은 시절에는 미남이셨겠네요.”
상상속의 남성을 현실에 맞추자니 억지 칭찬이 나왔을 법도 했다. 술잔을 부딪히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둘 사이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취기가 돌아 불그레한 그 여인의 얼굴이 정현에게는 아름답게만 보였다.
만나면 노래방 가자던 전화 약속을 떠 올렸다.
“이번에는 은숙씨 노래를 들을 차례입니다.”
“근처에 노래방이 있을 거예요.”
식당을 나와 둘이서 노래방을 찾아 나섰다. 대낮에 문을 연 노래방 하나를 어렵사리 찾을 수 있었다.
70년대 통기타 가수들 노래하며 멋들어진 가곡들을 그녀 특유의 음색으로 불러 제켰다. 정현은 잘 부르지 못하는 자신의 노래에 주눅이 들고 말았다.
“과연 성가대원 자격이 있으십니다.”
“뭘요, 선생님도 잘 부르시는데요.”
정현이 부르는 노래의 불안한 순간들을 모두 다 알면서도 그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주 서서 마이크를 들고 있는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둘이는 손이라도 잡아야 한다고 상상만을 했었다.
노래방을 나서는 그 여인은 소녀처럼 행복해 하고 있었다.
어느덧 둘이는 처음 만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둘이는 같이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둘 사이를 오고 갔다.
“은숙씨, 우리 또 만나요.”
“네, 전화 할게요.”
손 흔들며 서로는 군중들 속으로 멀어져 갔다.
계 속
첫댓글 정암님! 현대식 인스턴트 같은 사랑이 시작될 것 갔습니다. 잔뜩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