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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 때 ‘관부연락선’ 3등실…생계 위해 온가족 일본행
회갑을 맞은 필자의 부친 박봉관옹(왼쪽)과 모친 김소순 여사. 사진 박태준 전 국무총리
나는 1927년 9월 28일(음력) 경남 동래군(현 부산시 기장) 장안면 임랑리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대문을 나서면 하얀 백사장과 파란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오른편으로는 좌천강이란 자그마한 개천이 달음산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바다로 흘러드는 갯마을이었다.
당시 우리 마을의 공동어장 소유권은 일본인에게 넘어가 있었다. 일본은 조선의 토지에 근대적 소유관계를 도입하면서 수많은 조선 농민의 경작권을 빼앗았다. 어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우리 마을에선 일본인 어장 주인을 상대할 사람이 필요했다. 내 백부가 뽑혔다. 백부는 일본어는 못 했지만 한학에 밝아 필담(筆談)으로 일본인을 상대했다. 그러면서 차츰 일본어를 익히게 됐고, 생계 수단을 찾아 일본으로 떠났다. 홑몸으로 현해탄을 건너간 백부는 아버지를 일본으로 불렀고, 아버지는 33년 가을 어머니와 나를 불렀다.
만 여섯 살의 내가 최초로 목격한 어마어마한 문명이 ‘관부(關釜)연락선’이었다. 그 거대한 문명은 ‘중세의 갯마을’에서 갓 나온 아이에게 멀미의 기억을 남겼다. 관부연락선 3등실. 나보다 어머니가 더 고생했던 것 같다.
나중에 기업인이 돼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선배를 만나 관부연락선의 멀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선배도 와세다대로 유학 가면서 관부연락선 3등실에 탔는데, 멀미를 못 견뎌 1등실을 기웃거리다가 일본 형사로부터 난생처음 모진 모욕을 당했다고 했다. 그때 이 선배는 나라 없는 설움을 새삼 통감했으며, 그 사건이 인생 분발의 큰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아다미 철도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신은 한학에 밝은 편이긴 해도 세계 정세를 통찰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인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식들에게 공부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은 강렬했다. 당신은 나를 일본 육사나 학병에 안 보내려고 몹시 애를 썼다. 그리고 일본이 패전해 조국이 독립하면 무조건 귀향한다는 생각도 확고했다.
“내가 죽어도 너는 꼭 살린다” 나의 아버지
한국전쟁 전 청년장교 때 나는 아버지의 등에 업혀 서울적십자병원을 나선 적이 있었다. 늑막염이 지독했으나 가난한 나라의 의사는 주사로 물만 빼줬다. 그래서 병가를 얻었던 것이다.
“내가 죽어도 너는 꼭 살린다.”
등에 업힌 맏아들에게 한 이 말씀이 새록새록 살아온다. 고향집에서 어머니가 닭과 지네를 함께 넣고 고아냈다. 나는 한 달 만에 거뜬히 귀대했다.
관부연락선에 오르면서 꼭 잡았던 어머니의 손을 내가 다시 쥔 것은 58년 초겨울이었다. 나는 당시 연대장으로 포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오두막 같은 관사를 찾아온 당신의 열 손가락이 다 갈라져 있었다. 거친 논일·밭일의 흔적이었다. 안타까워 하는 맏며느리 앞에서 당신은 무심코 “미제 반창고가 좋다는데”라고 했다. 나는 부대에서 미제 반창고 한 통을 타냈다. 나 스스로 영내 부식과 물건의 반출행위를 국가에 대한 도둑질로 규정해 엄한 규율을 세웠던 시절이었다. 관사에 따로 배치되는 지프까지 거절했던 ‘호랑이 연대장’의 원칙은 그렇게 어머니의 갈라진 손마디에 딱 한 번 무너졌다.
아버지는 81년에 돌아가셨다. 영일만의 기적을 지켜본 뒤였다. 어머니는 94년에 떠나셨다. 그러나 정치 격랑에 휘말려 일본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던 중이어서 임종도 못 지켰다.
일본군 장교 ‘무한대의 야만적 횡포’를 보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의 필자는 유도 2단이었다. 사진 박태준 전 국무총리
1944년 초여름 나는 이야마에서 중학교 5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요새로 치면 고3이었다. 우리 집이 아다미에서 이야마로 옮긴 것은 아버지의 일터 때문이었다. 이번엔 댐공사 현장이었다.
당시는 전시체제라 군복에 일본도를 찬 장교가 학교에 나와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도 누런 제복의 일본군 장교가 있었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눈매가 칼끝 같은 그는 만주 정복과 중국 침략전쟁의 무용담을 늘어놓곤 했다.
“이틀이나 사흘씩 휴가 받았을 때는 그 땅의 모든 것이 내 것이었다.”
잔뜩 거드름이 묻은 그의 말씨와 묘한 웃음. 나는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그의 자랑에는 ‘무한대의 야만적 횡포’를 담은 듯했다. 그 땅의 모든 것을 차지해 봤다는 그의 결론은 항상 똑같았다.
“너희도 출전해 승리하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다. 모두 나와 같은 길을 걷게 되길 촉구한다.”
그 무시무시한 장교가 어느 날 나를 불렀다. 학생 개개인의 진로 문제를 놓고 상담을 벌일 때여서 나는 긴장했다.
“너는 육사로 가라. 육사는 가장 영예로운 황군이 되는 길이다.” 그가 다짜고짜 나에게 일본 육사로 가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궁리를 해두고 있었다.
“육사는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해군사관학교에 가겠다고 하면 허락하실 겁니다.”
장교가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끓고 있었다. 내 꾀가 들킨 것이었다. 조선인 학생이 해사에 들어가는 길은 원천 봉쇄돼 있었다. 내가 아는 이 정보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나는 그를 골려먹은 죄로 톡톡히 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