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자(李聖子)
이성자(李聖子, 음력 1918년 10월 4일, 1918년 6월 3일 ~ 2009년 3월 8일)는 대한민국의 화가이다.
생애
전라남도 광양시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진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현 진주여고)를 졸업했다. 1951년 프랑스로 건너가,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들어가 유화, 목판화 비롯, 70년대 이후의 도자기 등 모든 조형작품에 동양적 향취와 이미지를 담은 방대한 규모로 꾸준히 제작, 한국적 사상과 시정을 프랑스 미술계의 흐름 속에 합류시키는 대표적인 본보기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는 물론 세계전역에 걸쳐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혀온 원로이다. 이성자에게는 항시 두 명의 예술가가 공존하였다. 어린 시절의 숲을 되찾기 위하여 나무 판을 조각하는 판화가가 있는가 하면 구체적인 감성을 가지고 작업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하여 색을 쓰는 화가가 있다. 바르 주 투레트에서 사망했다.
진주시 충무공동 혁신도시에 이성자 미술관을 개관하였다.
평가
파리 시립 미술관장이었던 J.라세뉴는 이성자를 “이성자씨는 자신의 동양적인 유산에서 나온 오묘한 성격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양미술의 흐름 속에 용기 있게 합류하는 본보기”라고 하여 파리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동양의 예술가로 평했으며, ‘동녘의 대사 (ambassadrice de l'aube)’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세계적인 프랑스의 문학가인 미쉘·뷔또르는 이성자를 “프랑스의 문화와 인정(人情) 세태(世態)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깊숙한 시골의 야생의 들꽃들을 비롯한 프랑스의 자연에 대해서도 가장 정통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인이다.”라고 평했으며, 서정주는 역으로 “이성자는 어느 나라에 가서 얼마를 살건 간에 자기 조국 한국의 전통의 정신적인 장점과 그 끈기와 또 처녀적인 순수성을 언제나 잘 아울러 간직하고 있는 신화(神話)적인 화가다”라고 평했다.
가족
동생 이한필
아들 신용석
이성자李聖子 Seundja Rhee [1918년 ~2009년]
개설
1918년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나 경상남도 하동으로 이사하여 김해, 창녕, 진주에서 성장하였다. 1935년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현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1938년 일본의 짓센여자대학(實踐女子大學)을 졸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이성자는 1951년 가족들과 헤어진 뒤 파리로 건너가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였다. 1953년 파리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에 입학하여 회화와 조각을 배웠다. 이후 자연스럽게 추상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파리에 머물고 있던 박영선(朴泳善), 남관(南寬), 권옥연(權玉淵), 김흥수(金興洙), 이응노(李應魯), 김환기(金煥基) 등의 한국 화가들과도 교류하였다.
1956년 프랑스 오베르뉴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1958년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1965년 처음으로 한국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75년에는 김환기, 남관, 이응노와 함께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1981년에는 프랑스와 한국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고, 이후 한국에서 1985년 현대화랑,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1995년 조선일보사, 1998년 예술의전당 등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2001년에는 재불 50주년을 기념한 전시가 프랑스에서 열렸다.
1951년 프랑스에 건너간 이후 평생 프랑스에서 살았던 이성자는 1992년 남프랑스의 투레트에 ‘은하수(Rivière Argent)’라는 작업실을 지었고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2009년에 타계하였다.
이성자는 구상과 추상이 어우러진 초창기 작업을 거쳐 1960년대 이후 생명의 근원, 음과 양의 세계 등을 기하학적인 상징물로 표현하였고, 한국을 방문하면서 비행기에서 본 시베리아 극지의 풍경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말년에는 인간과 우주의 존재론적 성찰을 주제로 작업하였다.
이성자의 작품은 여성과 대지, 동양과 서양, 지구와 시간, 예술과 우주 등의 주제를 서정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파리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또 도자기, 태피스트리, 모자이크, 시화집 등 다방면에 걸친 예술작품을 남겼다.
상훈과 추모
1991년 프랑스 정부 문화예술공로훈장(Chevalier)을 수상하였고, 2002년에는 프랑스 정부 문화예술공로훈장(Officier)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2009년에는 프랑스의 BNP 파리바그룹(BNP Paribas)이 후원하는 한불문화상과 대한민국 문화관광부가 수여하는 문화훈장을 받았다.
2008년 고향 진주에 작품 300여 점이 기증되었고, 2011년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작고 2주기를 맞아 유작전이 개최되었다.
이성자 화백 프랑스 화실 '은하수', 프랑스 문화유산 등재
인투아이(INTO-AI)·김도윤 기자
기사 업데이트 2024.10.04 16:33
프랑스 문화부 '주목할 만한 현대 건축물' 지정
한국적 요소와 현대적 디자인 조합된 건축물
인천투데이=인투아이(INTO-AI)·김도윤 기자│한국 여성 추상화가인 이성자 화백의 프랑스 화실 '은하수'가 올해 프랑스 정부 문화유산으로 올해 5월 선정됐다. 프랑스 문화부는 100년 미만 건축물 중 가치 있는 건물을 대상으로 '주목할 만한 현대 건축물'을 지정한다.
1993년 완공된 이 화백의 화실 '은하수'는 프랑스 남동부 '투레트 쉬르 루' 마을에 있다. 이 화백 작품의 상징인 음양을 표현한 반원 건물 2개로 구성됐다. 건물 사이로 시냇물이 흐르고 징검다리가 놓여 있어 한국 시골 마을을 연상케 한다.
191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난 이 화백은 인천의 첫 의학박사인 신태범 박사와 1938년 결혼했다. 그런데, 신 박사와 이혼 뒤 1951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고 이후 미술 공부를 시작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2009년 별세 전까지 회화, 판화, 공예 등 작품 1만4000여점을 남겼다. 한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유명한 1세대 재불 화가로, 프랑스 예술문화훈장도 받았다.
프랑스 문화부와 지방정부 심사위원회는 3년간 심사를 진행해 '은하수'를 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들은 화실과 주거공간의 결합된 독특한 구조, 한국적 요소와 현대적 디자인의 조합, 동양적 아름다움 등을 높이 평가했다.
화실은 이 화백이 생전 사용했던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프랑스 정부는 앞으로 '은하수'로 가는 길 안내문 설치, 홍보 활동, 건물 보존을 위한 지원을 할 예정이다.
이성자 화백의 전 남편, 인천 첫 의학박사 신태범
한편, 이 화백의 전 남편인 신 박사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는데, 1912년 서울에서 태어나 6살이 되던 해 한국 군함 '광제호' 함장인 부친을 따라 인천으로 이사오면서 인천과 연을 맺었다.
신 박사는 1942년 의학박사 학위 취득 후 인천 중구 중앙동에 외과 의원을 개업했고 의료 활동 외에도 인천시체육회장, 인천·경기 교육위원 등을 역임했다. 향토사학자로서 '인천 한 세기', '개항후의 인천풍경' 등을 저술하기도 했다.
한국의 미술인 - 이성자
2017.08.09.
글 - 이지윤 (고양문화재단 큐레이터)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이성자
한 폭의 좋은 그림은 피곤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청소해 준다.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겠다 싶은 그림 앞에서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이성자는 그 그림의 의미를 찾기 보다 그 아름다움에 감동을 느끼는데 초점을 두라고 전한다.
이성자는 1918년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나 군수인 아버지를 따라 김해, 창녕, 진주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보통학교 시절부터 이미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미술뿐 아니라 빅토르 위고, 모파상, 발자크 등 서양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이성자는 일본 동경 시부야에 있는 짓센여자대학에 입학한다. 당시에는 소수 여성에게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던 시절이었다. 졸업 후 한국에 돌아 온 이성자는 부모가 정한 혼처로 결혼을 하지만 첫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고 다시 세 아이를 낳는 사이 남편과의 불화로 결국 헤어지게 된다.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이성자에게 프랑스 파리로 가는 기회가 생겼고, 그것은 그녀에게 마지막 탈출구이자 한 줄기 희망과 같은 길이었다. 1951년 홀로 파리로 건너가 일본에서 공부한 경험을 살려 의상디자인학교를 다녔는데, 디자인학교 선생은 이성자가 회화에 재능이 있다고 확신하여 1953년에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서 회화와 조각을 공부하도록 도왔다. 하지만 한국에서 정규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고 미술계가 인정하는 경력과 연고가 없다는 이유로 이성자는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한국 남성 작가들에게 화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설움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자의 열정만큼은 누구도 꺽을 수 없었고, 5년만에 파리의 중진급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면서 본격적인 파리의 화가로 활동하다 15년이 지나서야 한국에 다시 돌아와 귀국전시회를 열었다. 이성자는 유화와 목판화에 특유의 한국성을 담은 개성적 표현으로 한국보다 파리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다. 지금도 남프랑스 산간마을에는 이성자의 아틀리에가 남아있는데, 이 아틀리에는 1997년 이 화백이 설계하고 지역건축가 크리스토프 프티콜로가 지은 작업실이다. 그의 그림뿐만 아니라 작업실에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한국적 미감이 듬뿍 베어있음을 알 수 있다. 말년의 작품은 고향의 산을 떠올리며 색동의 띠와 반원형 등 기하학적 이미지에 자신만의 세계를 담았다. 은하수의 별들처럼 뿌려진 반짝이는 색 점들이 환상적이다.
이성자,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1월 4, 90',
1990, 캔버스에 아크릴릭, 150x150cm
이성자, '투레트의 밤 8월 2, 79', 1979,
캔버스에 아크릴릭, 150x150cm
이성자,
Nous T'ouvrons Nos Villages(너에게 우리들의 마을 문을 열어주마)
1967, Oil on canvas, 55.5 x 32.8 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