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9일 부활 제3주일(이민의 날)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
(루가 24,35-48)
He took bread,
said the blessing,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With that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유다 백성에게, 그들이 무지한 탓으로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배척하였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이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바쳐지셨기 때문에, 의로우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제2독서). 복음도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말씀에 따라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 이제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선포되어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회개, 화해, 속죄’는 주로 사순 시기에 어울리는 듯한 단어이지만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자의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는 본기도의 내용에서 부활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와 이 세상의 악에 대한 어두운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동안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의인들, 그리고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 안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뜻밖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 고난을 포기하시거나 거부하셨더라면 그것이 오히려 인간의 죄악에 대한 패배였을 것입니다.
고난의 잔을 끝까지 받아들이신 그분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온갖 조롱과 박해를 묵묵히 받아들이신 그분은 참임금이셨고, 승리자셨고, 메시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사도 3,18).
영광스럽게 돌아가신 그분 덕분에 이제는 ‘그분의 이름으로’ 회개와 용서가 선포됩니다. 우리가 부활의 기쁨과 평화와 생명에 참여하려면 먼저 회개하여 그분의 용서를 받고 동시에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렇게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 그분 생명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진리와 평화를 선물하신 주님! 알렐루야
-박재식 신부-
오늘은 새벽 4시에 잠이 깼습니다. 달력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교우 여러분께 용서를 청해야 할 듯합니다. 성주간과 부활의 기쁨에 푹 빠져서 부활 체험을 한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습니다.
부활 시기에 가장 멋지고 활력이 넘치며 흥미진진한 사도행전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부활 시기 동안 철저하게 사도행전을 읽고 묵상하시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내용이 많고 오늘날의 교회와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저자는 3000명의 세례사건을 통해(사도 2,41)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와 레위인들과 함께 3000명을 죽인 사건을 대비시킵니다(탈출 32,27). 또한,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을 묘사하면서 네 가지 사실을 나열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이방 지역에서 온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기득권자인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홀대를 당한다고 불만을 제기하자, 사도들은 일곱 봉사자를 선출하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의 봉사에만 전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곱 봉사자를 선출할 때 한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찾아내십시오”라는 말입니다. 돈 많고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 학문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찾지 않았고, 신자들이 후보자를 찾은 것입니다.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사목회장과 장로를 선출한 후 얼마나 많은 분열이 생기고 있습니까? 올바른 지도자의 선출을 생각해봅니다.
오늘은 4·19혁명 기념일입니다. 진실을 통해 평화의 기쁨을 나누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처럼 눈을 뜨고 세상에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승만은 조선 왕조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과거 시험에 11번 낙방한 후 한문학을 포기하고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공부했습니다.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해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합니다.
미국 교포사회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승만에게 독립운동가 전명운이 일제의 한국강점을 찬양한 스티븐슨을 저격한 사건(1908년) 재판의 통역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리스도인(개신교 신자)으로서 살인자를 도울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하와이로 이주한 뒤에는 무장독립군 양성을 주도하고 있던 박용만과 갈등을 빚어 교포사회를 분열시켰고, ‘파리강화회의’(1919~1920) 참석이 좌절되자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통치 청원서’를 보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승만은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 하지 않소?”라며 비판했습니다.
대통령에 선출된 후에는 1948년 10월에 선포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반대 입장을 보이다가 6ㆍ6 반민특위 습격 사건과 국회 프락치 사건을 통해 친일파들에게 자유를 줬습니다. 6ㆍ25가 터지자 한강 다리 폭파를 지시했고, 이로 인해 30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1951년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경남 거창의 양민 700여 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또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수만에서 수십만의 국민이 학살됐습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20만 명 이상이 기아와 추위로 죽임을 당한 처참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원인은 부정부패를 일삼은 군인과 정치인들이 방위군에게 지급할 식량ㆍ피복비 등을 착복했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부정선거 등 많은 죄가 있는 사람에게 ‘건국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울분이 납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긍심을 갖고 살고 싶습니다.
국가와 민족에게 정성을 다하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가 됐으면 합니다. 교회도 지식이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닌 진실과 화해를 선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존경받는 공동체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지도 않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평화와 진실의 눈을 선물하셨습니다. 이번 주에는 논과 밭으로 나갈 생각입니다. 서툰 솜씨지만 신자들의 일손을 거들 것입니다. 함께 일하며 진리와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렵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장현우 신부-
고작 사흘 전, 제자들은 스승과 축제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이 만찬이 스승과의 마지막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경비병들이 들이닥쳤고, 스승은 붙들려갔습니다. 이러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결국 스승마저 버리고 도망쳐 숨었습니다. 결국 스승은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처참한 모습으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제자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유다인들의 광기가 사그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희망을 잃고, 삶의 의미마저 상실한 채, 그렇게 사흘을 숨죽이며, 잠 한숨 못 자고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이제는 스승의 시신마저 사라졌습니다.“이제 모든 것이 끝장났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 사이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시며, 당신의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주님의 이 평화는 단순히 박해의 위협과 삶의 고통을 제거해주는 평화가 아닌,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는, 온갖 걱정과 두려움을 떨쳐주는 평화입니다. 세상의 유혹과 박해조차도, 어떠한 세상의 권력도 깨뜨릴 수 없는 평화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의 베드로 사도도 이러한 주님의 평화 속에 있기에, 거침없이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자신들을 고발하고 죽이려 드는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더 당당하게 소리치며,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권력과 폭력에 굴하지 않는 영혼의 자유로움, 세상의 논리와 인간적 계산에서 벗어난 마음의 평화, 이것이 주님의 평화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아파하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희망을 잃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들의 삶 한가운데로 다가오십니다. 젖먹이가 엄마 품 안에서는 아무것도 무서울 것 없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 있기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육체는 비록 세상으로부터 박해받을지라도, 그 마음만은 주님 안에서 평화롭습니다. 세상에 대한 어떠한 걱정도 벗어버린 채, 오로지 주님과 함께 있다는 즐거움, 주님께서 내 편이 되어 주시고, 나의 위로와 희망이 되어 주신다는 기쁨이, 우리를 참평화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평화를 빌어 주십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박철현신부-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인사는 “평화가 너희와함께!”라는 말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필
요한 것이 마음의 평화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다른 인사말을 생각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평화!’
현실의 우리에게도 참으로 절실한 말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에는 온갖 쓰레기를 품고 있는 휴지통처럼 우리도 겉으로는 평화
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갖가지 갈등과 혼란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
은 아닌지요? 그래서 늘 평화를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시지만 정작 기뻐하고 환호해야 할 제자들은 오히려 너무도 두렵고 무서워 마치 유령을
보는 줄로 착각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평화와 인간이 받아들이는 평화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평화는 무서움과두려움, 혼란이 깡그리 사라지는 그런 평화가 아
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정도의 효력을 지닌 평
화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혼란에빠집니다.
이런 차이를 예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것일까요?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사람
들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에 한 발자국 더가까이 이르도록 도와주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직접 음식을 드심으로써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는 사람들에게 혼란과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도피하거나 외면해서 얻을 수 있는 평화가 아니라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어쩌면 두렵고 혼란스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
로 그 순간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는순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목격자들의 업적
-이기정신부-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이를 목격한 분들의 증인역할을 생각해 봅니다.그들의 역할이 세상에 끼친 바를 생각해 보면 감탄이 절로 납니다.서력기원, 구원, 평화, 용서, 평등, 희생, 사랑 등의 새 지평이 열렸습니다.
이에 국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끼친 영향 무시 못 합니다.그리고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류사에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는 점.더구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류가족사상까지 펼친 걸 보면 더 그래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24,46~48)”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박영식신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 축구팀에 속한 선수요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씨와 함께 금세기 최고 선수다. 호날두는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해 자수성가했다. 그가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서 세계 최고 축구선수가 되었는지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너무나 가난한 집에서 굶주리며 도망치고 또 도망쳐도 결국 가난이 나를 잡아먹었다. 나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나는 너무 두려웠다. 형은 마약중독자요 늘 마약에 취해 삶의 의욕도 잃어버렸다. 가난한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는 분은 청소부 일을 하는 우리 어머니이셨다. 나는 청소부 일을 하는 어머니가 너무 부끄러웠다. 어느 날 빈민가 놀이터에서 혼자 흙을 가지고 장난을 치던 나에게 저 멀리서 축구를 하는 동네 친구들이 보였다. 나는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나를 축구팀에 끼어주지 않는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우연히 날아온 축구공을 찼을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희열을 느꼈다. ‘어머니, 저도 축구가 하고 싶어요. 축구팀에 보내주세요.’ 어머니는 철없는 아들의 부탁에 당황했다. 우리 가정 형편으로는 비싼 축구비용을 감당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당신 아들의 꿈을 무시하지 않고 나를 데리고 이 팀, 저 팀을 알아보러 다니셨다. 나는 겨우 저렴한 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패스 한번 받지 못했다. 조명이 꺼지고 모두가 돌아간 뒤에 혼자 남아 축구공을 닦아야 했다. 나는 낡은 축구화를 수선해서 축구를 하고 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심장이 정상인보다 두 배나 빠르게 뛰는 질병이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앞으로 축구선수가 될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다행히 수술을 받고 재활치료를 하면 정상인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이 좋아질 수 있다는 진단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너무나 가난하여 비싼 수술비를 지불 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와 형은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마약을 끊고 취직했다. 마침내 일 년 뒤 온 가족이 모은 돈으로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이었다. 나는 재활을 마친 뒤 더욱더 열심히 훈련을 계속했다. 동료들이 나에게 공을 건네주지 않아도 좋았다. 나는 행복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꿈속에서 그리던 축구장에 처음 올라가 시합에 나가게 되었다. 수많은 관중과 응원자들, 유명 축구팀을 발굴하려는 이들이 경기장을 꽉 매우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축구장! 나는 이 무대에서 죽을 각오로 뛰고 또 뛰었다. ‘심장이 터져도 좋다.’ 그렇게 나의 첫 시합이 끝났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자기를 다른 리그 축구팀 감독이라고 하며 나를 이적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몸에 소름이 돋고, 전율을 느꼈다. 나에게 전화를 건 분은 세계 최고 구단 중 하나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 감독님이었다. 전화가 끝나자 나는 바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흐느끼며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더 이상 청소부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되요.’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없이 수화기를 잡고 울고 계셨다.”
이처럼 구멍이 숭숭 난 축구화, 외톨이, 심장병을 가진 소년이 세계 최고 선수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축구 선수들 중에서 재산이 제일 많다. 전 재산이 2,191억 원이요 연봉이 250억 원이다. 2위가 리오넬 메씨이고, 그의 전 재산은 2,161억 원이다. 호날두는 축구 선수 중 몸값이 제일 높다. 그가 해마다 기부하는 금액은 우리나라 사람 5천만이 한 해 기부하는 금액을 넘는다. 공익을 위한 광고는 조금의 돈도 받지 않고 촬영하게 하고 소말리아에 300억 원을 기부하고,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수술비 전액을 지원하고, 현재 아동질병 퇴치와 아동구호 운동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호날두는 운동선수들이 흔히 하는 문신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가 문신을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기 위함이란다. 문신을 하면 1년쯤 헌혈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날두의 가장 멋진 문신은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며 자리 잡은 자국’이라 하겠다.
호날두는 어머니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고 따르는 천주교신자다. 호날두가 묵주목걸이를 차고 있는 사진이 많다. 천주교 신자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천주성자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시라고 선포한 제자들의 복음을 믿고 따라 부활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믿음의 눈을 떠야 부활신앙에 다다를 수 있었다. 믿음은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복음선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따를 수 있다. 간접적으로는, 우리는 복음을 실천하는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따르기도 한다. 성령의 힘에 사로잡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거나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부활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사명감을 깨닫는다. 이런 뜻에서 호날두는 자기가 만난 예수님이 자기의 연봉을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을 위해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받들고 존중해야 하는 이는 강자나 인기 있는 운동선수나 가수나 배우가 아니라 헐벗고 굶주리고 병고 시달리는 약자들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물질만능주의와 인간중심주의로 하느님의 절대주권을 무시하는 무신론적인 현대세계를 하느님께 종속시킬 사명을 그리스도께 받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지상 생명과 수명과 재물과 권력이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주어진 방법임을 삶으로 드러내야 하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한없는 기쁨과 행복과 부활의 생명을 주신다.
세월호 침몰로 삼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생매장된 지 일 년이 지났다. 그러나 정부는 그 동안 안전 불감증에서 깨어나 침몰원인을 찾아내어 고칠 생각을 하기는커녕 더 깊이, 더 광범위하게 정경유착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언론인들은 돈과 권력의 하수인이 된지 오래다.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 썩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성 싶다.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정치인들과 기업인들과 공직자들이 돈에 미쳐 정의와 법을 짓밟는 상황을 근본적으로 시정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임금님이심을 증언하는 사람들은 부정부패와 범죄의 온상인 우리나라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부활믿음에 반대되고 이 믿음을 파괴하는 것은 탐욕과 권력욕이다. 이 둘에 집착하는 국민들의 나라는 범죄의 온상이요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재물과 권력에 집착하지 말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선용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닮고 그분의 부활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
“물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만방자해지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기고 썩는 냄새가 나며, 그의 인생이 한없이 슬퍼진다.”(채근담 후편).
“부유한 채로 죽는 것은 인간의 치욕이다.”(카네기)
“부란 분뇨와 같아서 그것이 축적되면 악취를 내고, 널리 퍼뜨리면 땅을 비옥하게 한다.”(톨스토이)
“부자의 가장 큰 행복은 자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 브뤼예르)
“가난해도 족함을 알면 백만장자가 부럽지 않지만, 아무리 부자라 한들 가난뱅이가 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만 한다면, 엄동설한 같이 쓸쓸하기 그지없다.”(윌리엄 셰익스피어)
존경받는 부자는 적시적소에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이고,
가장 건강한 사람은 늘 웃는 사람이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제자들은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며,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각 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를 한두 가지씩 전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발현 정황(情況)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각 복음서가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이 모든 사람 앞에서 확인된 객관적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듯이, 부활하신 예수님도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부활과 발현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실망하여 각자 갈릴래아의 고향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입니다. 부활하신 분이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발현하지 않았으면, 그들이 다시 모여들지도,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계기가 그들 각자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믿던 바를 전하기 위해 기록한 문서입니다. 각 공동체가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이야기 양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사건을 기록하는 방식과는 다릅니다. 현대인은 과거의 사실을 정확하게 재생(再生)하여 보도합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 안에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담아서 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서들에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초기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복음서들 안에서 우리는 그들의 믿음을 알아듣고, 우리도 그 믿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발현 이야기에서도 우리가 알아들을 것은 부활하신 분에 대해 초기 신앙인들이 갖고 있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분을 확인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 하고 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부활을 믿게 된 것은 한 순간에 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살과 뼈를 가지고 살아계실 때, 그분의 삶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기쁨이었지만, 또한 믿어지지 않는,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믿음은 곧 새로운 자각(自覺)과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신앙에 대해 새롭게 자각합니다.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과거 이스라엘의 신앙 문서들을 새롭게 읽고, 새롭게 이해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세의 체험에 충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왜곡된 유대교 안에서 그것을 시정하는 노력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한 노력이었고, 또한 그들의 운명이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살과 뼈는 죽어도 하느님이 그분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모세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무작정 지키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함께 살아 계시도록 살기 위한 지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 지키기에 정신을 빼앗겨,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나무는 보아도 숲을 보지 못한 격입니다. 예언자들은 그 잘못 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외친 분들입니다. 각 예언자가 처한 사회적 상황은 달랐습니다. 그러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되찾아야 한다는 외침이라는 점에서 예언자들의 부르짖음은 공통됩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인간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에도 반발하였습니다. 시편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여러 상황에서 체험하고, 그 체험을 노래한 문서입니다. 오늘 복음이 구약성서의 문서들 중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이 세 가지를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그 문서들이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깨닫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초기 신앙인들은 새로운 실천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은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민족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라고 요약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이 영접하고, 그분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율법에 얽매여, 지키고 바치는 일에 열중하면, 성취감은 있어도, 하느님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분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십니다. 용서는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는 하느님이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생명을 미워하고 죽입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용서라고 요약한 것은 예수님이 믿고 가르친 하느님은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생명을 아끼고, 용서하며, 보살피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하는’ 회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회개는 고행이나 보속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해 사람이 돌아서는 행위입니다. 선하신 하느님, 용서하고 보살피시는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에게로 시선을 돌려 우리도 그분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을 실천하겠다고 마음 다짐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처형한 유대교 지도자들과도, 빌라도와도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사랑하고 용서하며 죽어 가신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도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여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
바다를 항해하던 여객선이 심한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객선에 타고 있던 겁 많은 어떤 여자 승객이 선장에게 달려가서 안전에 대해 물었습니다.
“선장님! 우리가 지금 큰 위험에 처한 것인가요?”
그러자 선장은 이 여자 승객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천주교인임을 알았기에 미소를 띠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걱정 마세요, 부인. 우리는 결국 하느님의 손 안에 있으니까요.”
이 말을 들은 그녀는 겁에 질렸는지 하얗게 얼굴이 변하면서 말합니다.
“오!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요?”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 과연 나쁜 상황일까요? 선장은 이 승객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손 안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 부인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나쁜 상황이 아닙니다. 아니 매 순간 하느님의 손 안에 있음을 깨닫고, 그 사실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가장 좋은 상황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요즘에 우리들은 아름다운 꽃이 피는 좋은 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전인 추운 겨울에도 이 꽃이 거리에 만발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점점 추워지면서 잎사귀가 떨어져나갔고 그래서 수액이 완전히 빠져버린 메마르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무에서 다시 꽃이 피리라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추운 겨울만 지나고 따뜻한 봄이 되면 꽃이 피리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음을 확신하며 산다면 어렵고 힘든 상황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뒤, 회개와 죄의 용서를 선포하라고 명하시며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손 안에 있음이 가장 행복한 자리임을 세상에 알리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자리가 행복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나쁜 상황이 아니라, 가장 좋은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가장 좋은 상황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좋은 밤만을 찾다가 좋은 낮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네덜란드 속담).
결코 모자라지 않단다(지장홍, ‘사랑이 사람을 밀고 간다’ 중에서)
한 엄마가 유치원 학부모회에 참석했다. 선생님은 엄마에게 다가와 하소연했다.
“아이가 한시도 가만있지 못해요. 책상에 3분도 앉아 있지 못하니 원.”
집으로 가는 길에 엄마는 마음이 착잡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눈물이 흐를 뻔했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널 칭찬했어. 원래는 1분도 책상에 앉아 있지 못하던 네가 지금은 3분이나 앉아 있잖니?”
그날 저녁, 아들은 처음으로 반찬 투정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엄마가 먹여주지 않아도 반찬을 흘리지 않았다.
1년 뒤 엄마는 다시 초등학교 학부모회에 참석했다.
“이번 수학 시험에서 아드님이 50명 중 49등을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아들은 어머니가 무슨 얘기를 할까 몹시 불안해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아들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너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으시더구나. 넌 결코 모자라지 않아. 조금만 집중하면 네 짝꿍보다 잘할 수 있다고 하셨거든.”
그러자 내내 어두웠던 아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튿날 아들은 평소보다 더 일찍 등교했다.
엄마는 중학교 학부모회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늘 아들을 격려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아들은 편지와 함께 명문 대학 합격 통지서를 건네며 울먹였다.
“엄마, 사실은 제가 똑똑한 아이가 아니라는 걸 어릴 때부터 알았어요.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저를....”
아들을 보던 엄마의 눈에 그동안의 슬픔과 기쁨이 스쳐 갔다. 손에 쥔 편지 위로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 인간 각자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요?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다투고 싸우는 모습에 또한 비교하고 무시하면서 인정하지 않는 모습에 얼마나 한심하게 느끼실까요? 우리의 눈으로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들 각자는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괜히 도토리 키 재기 식의 관점으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맙시다.
< 죽음을 품은 삶 >
-전삼용신부-
전에 어떤 자매가 남자친구와 자주 헤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실은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워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관심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면 재빨리 다른 남자와 소개팅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헤어짐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헤어지기 전에 다른 사람과의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남자는 그 여자에게 관심이 줄어든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지례짐작으로 헤어짐을 두려워하여 다른 남자를 먼저 만났던 것입니다. 남자를 만날 때도 여자는 헤어짐이 두려워 자신과 같이 훌륭한 사람을 만나는 것을 고맙게 여기라면 남자를 깔보기도 하고, 때로는 헤어지지 않게 준비도 안 된 남자에게 빨리 결혼해버리자는 식으로 괴롭혀 왔었습니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모습에 지쳐 있다가 여자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관심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되면 확실히 돌아서버리게 됩니다.
대부분 이런 자매는 어렸을 때 집에 혼자 남겨져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었거나 혹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던 기억들을 무의식중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버려지는 것이 두렵고 그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 만나는 사람을 괴롭히고 그래서 진짜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면 먼저 이별하는 법부터 배워야합니다. 이별하여도 아무렇지도 않을 때 상대를 괴롭히지 않고 온전한 성인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남녀 간의 만남에서처럼, 삶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황창연 신부님의 강연 중 신학생 아들을 둔 글라라라는 자매의 사례가 나옵니다. 글라라 자매는 암이 뼈까지 전이되어 6개월 선고를 받았지만 군대 간 아들이 서품을 받는 것을 꼭 보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4년을 살기는 했지만 끝내 아들의 서품을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황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병원에 찾아갔을 때 글라라 자매는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전과는 다르게 빨리 죽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글라라 자매가 죽었다가 아들의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었을 때는 굉장히 아름다운 꽃길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아나니 생의 고통을 고스란히 다시 느끼게 된 것입니다. 보통 죽어서 하늘나라의 맛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다시 이 세상의 삶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남겨진 사람들만 슬퍼하는 것이지 정작 몸을 빠져나온 영혼은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기 때문에 슬프지 않다는 증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죽었다가 돌아와서의 삶은 죽기를 원치 않으면서 이 세상에 매여 살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아들의 서품을 하늘나라에서도 볼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 삶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의 삶이 진정 두려움 없는 삶인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갔다 온 성지순례 계획을 세울 때 시나이산을 제외하게 된 이유는 한국 순례자 한 분이 시나이산 올라가다가 낙타와 함께 절벽으로 떨어져 사망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여행사에서는 낙타로 시나이산 올라가는 프로그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낙타타고 올라갔던 기억이 나무 좋아서 시나이산 가려고 했던 것인데 모두가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고 하니 아예 가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낙타들은 항상 절벽 끝으로 걷습니다. 그래서 낙타를 처음 탄 사람은 낙타가 절벽으로 굴러 떨어질까 봐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낙타에게 자신을 맡기고 하늘의 별들을 보며 순례를 즐깁니다. 낙타에서 굴러 떨어진 그 분은 두려운 나머지 낙타의 목을 꽉 껴안았고 낙타가 중심을 잃어 함께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살아있을 때도 영향을 미쳐서 온전히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스키를 배울 때 타는 법부터 가르치지 않습니다. 넘어지는 법부터 가르칩니다. 넘어지는 것이 두려우면 그 두려움 때문에 엉덩이가 뒤로 쏠려 진짜로 크게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아야 몸을 앞으로 내어던져 체중이 뒤로 쏠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넘어질 줄 모르는 아이는 걸을 줄도 모릅니다. 아이는 넘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아야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을 연습합니다. 노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두려우면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어 모든 걷는 근육들이 퇴화하게 됩니다. 삶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우면 삶에서도 이 걱정 저 걱정 하다가 사는 건지 죽은 건지 모르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껴안을 수 없으면 삶도 껴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평생 불로초만 찾아다녔던 사람들은 그 시간을 즐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몰라보았던 것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처음 가발을 쓰신 날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진짜 아줌마로 불렀습니다. 예상하지 못하면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이라 소리 지르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도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그분의 죽음을 껴안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 머물렀던 것처럼, 지하의 땅 속에서 사흘 간 머무시다가 부활하셔야 하는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모두가 도망을 쳤고 또 죽기를 장담하던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분을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활을 이해하려면 죽음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라는 기록을 이해시켜주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통과의례라는 것을 깨닫게 된 후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부활을 믿으려면 먼저 죽음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죽음과 부활의 연속입니다.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입니다. 팽창과 수축의 연속입니다. 하나 됨과 쪼개짐의 연속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증언합니다. 하느님 삼위일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를 떠나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습니다. 막달레나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지려고 할 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려고 하니 잡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를 만나려면 상대를 떠나보낼 준비까지 해야 합니다. 이별이 두려워 내 사람이 되라고 잡고만 있으려고 하다보면 지금 있는 사람은 금방 지쳐버릴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삶 또한 죽음과 떼려야 뗄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기 위해 죽으시는 것이고, 죽으시기 위해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온전히 살아가려면 죽음을 품어야 하고, 온전히 시작하려면 마지막을 품어야 하고, 온전한 만남을 위해서는 이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죽음처럼 보이는 것도 언젠가는 다시 부활하여 내 앞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치 쇠가 풀무 불에 달구어져야만 망치와 맞닿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불에만 있어도 안 되고 망치만 맞아도 안 됩니다. 이 관계의 역동성, 삶과 죽음의 역동성을 이해하면 죽음을 끌어안으셨던 그리스도는 영원한 삶을 누리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죽음이 우리가 결코 두려워해야 하고 멀리해야 할 무엇이 아니고 애인처럼 꼭 껴안고 살아야 할 과정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부활 제3주일이고, 4월 19일입니다. 국민이 주체가 되어 나라의 권력을 바꾼 날입니다. 국가는 막대한 권력을 지녔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지키지 못하면 처벌할 수도 있습니다.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 세금을 징수하고,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합니다. 4월 19일은 국가란 국민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 날입니다. 부당한 국가의 권력은 마땅히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날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이 무모하게 보이지만 거대한 국가 권력을 향해서 힘찬 목소리를 낸 국민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모진 고문을 온 몸으로 이겨낸 민주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0여 년 전, 자유를 향한 처절한 외침이 있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이 있었고, 박 종철, 이 한열이라는 젊은이들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4월 19일을 지내면서, 자유를 위해서, 민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분들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나는 자유라는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지금 제가 사제로서 사목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100년 가까이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길을 바꾸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길은 아무도 간 적이 없는 좁고 험난한 길일 수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동안 누렸던 안락과 기쁨을 포기하고 고난과 슬픔을 각오해야 하는 길일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삶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이 이제 주인도 없는 길잡이도 없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주인이 그렇게 허망하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던 그 길을 다시 선택했습니다. 그 길은 끝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길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간 길과는 다르기도 합니다.
그 길의 선택의 기준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그 길이 진실한가를 따진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그 길이 선한가를 따진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그 길을 지금 꼭 선택해야 하는가를 따진다고 합니다. 오늘의 제 2독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길 합니다.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자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 선택의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 길을 사도들이 걸어갔습니다. 그 길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걸어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부활 3주일에 바로 그 길을 걸어가도록 해야겠습니다.
내 조각배 위로 예수님께서 올라오시기를
-양승국신부-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나 두렵고 떨려서 머리카락이 온통 곤두서고 등골이 오싹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어린 시절 밤길을 홀로 걷다가 공동묘지 앞을 지나 갈 때라든지 폐가 속에서 한 걸인이 갑자기 튀어나올 때 모골이 송연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예수님에 앞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배를 타고 먼저 떠난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밤바다, 거센 바람, 높은 풍랑으로 갈팡질팡 힘겨워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마침 그때 스승님께서 물위를 걸어 다가오셨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라도 딱 두려움에 떨 조건입니다. 제자들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습니다.
스승님을 보고 반가워하기는커녕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아직도 제자들이 갈 길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직도 제자들의 내면에는 스승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님이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하늘과 바다마저 주재하시는 능력의 하느님이시라는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보편적인 이치와 상식을 훨씬 능가하는 초월자이심을 제자들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스승님의 출현 앞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 안에 들어있는 제 모습을 바라봅니다. 때로 저 역시 하느님이 신뢰의 대상이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때로 하느님은 아직도 너무 먼 당신, 너무 막연한 대상입니다. 저 역시 제자들 이상으로 통과해야 할 관문이 많이 남아있는가봅니다.
예수님을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인데, 예수님 안에 자비와 인내로 충만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현존해계시는데, 하느님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아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신데...
하느님은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힘겹게 살아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두려움을 떨치고 힘차게 일어서기를 바라십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이 세상, 때로 호의적이지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안심 속에 살아갈 것을 바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인생이란 이 작은 우리 각자의 조각배 위로 예수님께서 올라오시는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밤바다를 항해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높은 파도 앞에, 휘몰아치는 세속의 광풍 앞에, 칠흑처럼 어두운 인생의 긴 터널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분노로 가득 찬 무서운 얼굴이 아니라 인자함과 따뜻함으로 가득 찬 사랑의 얼굴로 우리가 타고 있는 조각배 위로 올라오십니다. 환한 웃음과 함께 당신 자비의 두 팔을 활짝 벌리시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마침내 한없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복음 6장 20절)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 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야서 41장 10절)
"평화가 너희와 함께!“
-손을 잡아 주십시오-
-이수철신부-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복음에서와 똑같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부활 제3주일 미사를 통해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나의 에피소드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수도원 정문을 통과해 오다 보면 십자로 중앙, 단풍나무 아래,
예수부활상 밑 커다란 바위 판위에 글자를 보았을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어제 복음에서 새벽 어둠 중에 호수위를 걸어오시며
풍랑에 시달리던 배안의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원래 제가 원했던 예수부활상 아래 돌판에 성구에 쓰여질 성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러나 수도형제들이 모여 의논하여 투표한 결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로 결정되었습니다.
두 말씀 모두 두렵고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감로수(甘露水)같은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인 '평화의 빛'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우리 모두 이 부활 제3주일 거룩한 미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평화를 선물 받습니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베드로의 강력한 권고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의 선물이 자연스럽게 우리를 회개에로 이끕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게 회개입니다.
믿는 이들의 우선적 출발점이 회개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게 하는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한 마음의 병, 무지(無知)의 치유요 자기발견입니다.
주님은 사도 베드로를 통해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알게 모르게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지음으로
생명의 영도자인 주님을 죽이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가 무지한 탓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에 최고의 특효약이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앎과 생명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하는 본기도문이 참 아름답고 은혜로워 전문을 그대로 다시 나눕니다.
"아버지,
저희 죄를 씻어 주신 성자의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 주셨으니,
저희가 마음을 열어 참으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기도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 주시는 동시에,
마음을 열어 참으로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게 해 주시는 미사은총입니다.
회개를 통한 '깨달음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이 또한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입니다.
다음 복음의 묘사가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다.‘
닫힌 마음을 열어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성령입니다.
새삼 '회개의 여정'은 '깨달음의 여정'임을 깨닫게 합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깨달음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지혜에 이르지 않으면
많은 지식들은 쓰레기더미에 불과할 뿐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깨달음의 은총이 '무지의 병'을 치유하여
우리를 더욱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모시켜줍니다.
회개할 때 주님을 알게 되고 저절로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나는 주님을 안다."하면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참 두렵고 무서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진리가 있습니까?
회개가 없는 삶은 진리가 없는 거짓된 삶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진리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함으로
진리와 사랑이, 겸손과 지혜가 그 마음을 가득 채움으로 '참 나'의 실현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내적부요의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죄를 짓더라도 회개에 주저하지 마십시오.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새삼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변호자 예수님과의 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끊임없이 회개를 통해 죄를 용서 받음으로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입니다.
하여 평생성사인 성체성사와 고백성사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 회개하고 죄를 용서 받음으로 주님과의 우정이 회복되고 깊어지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주님 앞에 갈 때, 지니고 갈 것도 바로 주님과 우정의 관계 하나뿐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은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몸소 찾아주셔서 평화를 선사하시며
의심스럽거든 손과 발을 만져 보라 말씀하십니다.
이어 주님은 분명 제자들의 손도 잡아주셨을 것입니다.
어제 읽은 기사가 생각납니다.
세월호 참사이후 진상 규명을 위해 애쓰는 어느 희생자의 25세 언니 자매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지난 1년 사람의 끝을, 세상의 밑바닥을 한꺼번에 다 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아직도 손을 내밀고 있어요.
사람들 한테, 잡아 달라고."
어느 심리상담가의 위 자매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조언도 생각납니다.
"심리치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누군가 함께 있어준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같이 아파하고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아파할 때 손을 내밀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는 주님이요,
우리 역시 손을 내밀어 아파하는 이웃의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의 손을 잡아주시고 평화와 더불어 기쁨을 선사하심으로
우리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해 주십니다.
또 우리 모두 당신 부활의 증인이 되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삶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주님, 파스카 신비로 새롭게 하신 주님의 백성인 저희가
육신의 부활로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돌판에 새겨 기억하라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아니 그 허물과 잘못을 없애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크신 사랑을 가슴에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옛말에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두지 말고 혹 새기려면 모래에 새기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돌 판에 새겨 잊지 마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빨리 잊고,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되씹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최선을 다해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당신을 내 맡기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구세주라고 생각했건만 어찌 힘없이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가? 그를 피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언제 어느 때 그 불똥이 튈지를 모르는 상황인 만큼 제자들도 도망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과거의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두려움을 넘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오히려 다시 살아난 당신을 유령을 보는 줄로 알고 놀라며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손과 발을 만져 보라 하시고, 음식을 잡수시며 무뎌진 마음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기까지 그분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제자들이 왜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봤을까요?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무엇으로 마음이 단단히 굳어져 있으면 아직까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힘이요, 능력이 되어야 하는데 아는 것이 오히려 병입니다.
주님께서는 허물은 기억하지 않으시고 한결 같은 사랑으로 변함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55,8.9)하신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 우리를 평화와 사랑에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베푼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여 돌 판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분이 행한 방법으로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되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랑은 평화를 얻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오늘 회개하면 죄를 용서 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하고 또 전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회개는 허물을 기억하지 않는 “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결실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십자가 옆의 두 도둑 중 하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하고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십자가 위에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응답을 얻었습니다. 옛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께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제발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기억하고 남의 허물은 잊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의학, 신학, 법학, 수학, 천문학등 다양하게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성직자로서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을 따라 그의 묘지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나는 바오로가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오른쪽 강도에게 주신 용서(구원)를 원할 뿐입니다. "
우리가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님 앞에서의 용서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위한 용서를 얻어야 하고 또 그 전에 용서해야 합니다. 누구의 허물을 기억하기 전에 주님 앞에 나 자신의 흠 없는 삶을 봉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자비를 청해야겠습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으로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저 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주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두려움에서 평화로
-인영균신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신 예수님은 오늘 열 한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십니다. 열 한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전한 부활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아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이 그들을 잠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이는 긍정적인 두려움입니다. 다른 말로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참으로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두려움은 어두운 것으로서 사람을 위축하게 만듭니다. 기를 못피게 만듭니다. 그 자체로 감옥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 앞에 나타나자 무서워 떨며 유령을 보는 줄로 여겼습니다. 무서움 속에 갇히면 자연히 의심을 품습니다. 신뢰하지 못합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 화장실(푸세식?)은 집 뒤 밖에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정말 무서워서 아무리 배가 아파도 화장실에 가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만큼 두려움과 무서움은 사람을 마비시킵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두려울 때 무서울 때 우리의 첫 반응은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 갇혀 내면의 눈을 감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건네신 첫 말마디는 “평화”입니다. “여러분에게 평화!” 얼마나 놀라운 첫 말씀입니까?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주님은 아셨습니다. 바로 평화가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두려움에서 해방된 사람은 평화의 사람이 됩니다. 평화는 열림이며 살림이며 소통의 다른 말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똑바로 보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부활의 진실을 보게하려고 예수님은 당신 죽음과 부활에 관해 제자들을 가르쳐주십니다.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등 성경 전반에 걸쳐 당신에 관해 이야기한 것을 조목조목 설명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깨닫습니다. 진리에 눈을 뜹니다. 진리에 눈을 뜨니 부활하신 주님의 참 모습을 똑바로 보게 됩니다. 두려움에 감겼던 눈이 열린 것입니다. 부활하신 분과 함께 있음이 바로 평화였습니다.
우리 일상 삶이 살아 있는 성경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있는 성경인 우리 삶 안에서 주님에 관해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를 깨닫고 두려움에서 평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살아 계시는 주님의 손과 발을 만져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들의 일상생활에 뛰어들어 그들과 거리를 좁히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인간의 삶을 끌어안고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집시다!”(복음의 기쁨 24).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 안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 손으로 어루만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대체 어디서 만나서, 우리 손으로 직접 만지고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습니까? 우리와 함께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서 보고 만질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 울고 있는 이들 안에서, 지금 고통받고 있는 이들 안에서, 지금 길거리에 앉아있는 이들 안에서 주님을 만지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도 우리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보여주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만남에서 평화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수도원에서는 식사를 할 때 말을 하지 않습니다. 독서를 들으며 식사합니다. 요즘 듣는 책이 ‘금요일엔 돌아오렴’이란 책입니다. 240일간 세월호 가족이 남긴 육성 기록입니다. 세월호 가족 중 승희 엄마 이야기를 들을 때 제 마음은 먹먹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돌아보면 참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까 싶은데, 솔직히 여기까지 우리 힘만으론 못 왔어요. 도와준 사람들 덕분에 온 거지. 사실 나는 내 살기 바빠 봉사하러 다닌 적도 없어요. 근데 진도에서부터 도와준 시민들이 많았어요. 내가 승희 찾으려고 거기 있을 때 자원봉사자들이 먹을 걸 챙겨줬는데 아무것도 못 먹었죠. 새끼가 물 속에 있는데 그걸 먹으면 네가 엄나냐 그런 자책도 들고, 물도 잘 못 삼키겠고. 근데 오일짼가 육일짼가, 진도 할머니들이 집에서 만든 식혜를 가져와 돌아다니면서 주는데, 처음에는 안 먹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할머니들이 막 우시는 거예요. 애 찾으려면 먹으라고, 그래야 산다고, 잘못되면 안되니 한모금이라도 먹으라고. 할머니들이 우리 걱정하면서 막 우시니까 한모금 넘겼는데 그게 사고 나고 처음 먹은 음식이에요. 한 모금 넘기면서 나도 울고, 할머니들도 울고...”
오늘 부활하신 주님은 여기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당황합니까? 어찌하여 의심을 품습니까? 내 손과 발을 보시오. 바로 나요. 나를 만지고 살펴보시오. 그대들에게 평화!” 아멘.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24,47-48)
-오상선신부-
부활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사건은
잘못된 일이었음을 드러내 줍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암묵적으로 동조했던 모든 이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사도들은 설파합니다.
세월호 참사로 수많은 아이들을
죽게 만든 사건은
비단 선박회사나 해경이나 선원들만이 아니라
이제 그냥 덮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청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부활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무조건 기뻐해야할 일은 아닙니다.
정말로 무죄한 이들이
억울하게 죽게 해서는 안된다고
뼈저리게 느끼고
보속하고 회개한 사람만이
이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의 증인이듯이
우리 모두도
세월호 죽음과 부활 사건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은 세월호 사건을 직접 목격한
목격증인들입니다.
이제 그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책임있는 행동을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활은
나에게 참 기쁨이 될 수 없으니까요.
오늘 세월호를 인양하여
사건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이제 아이들이 부활의 길로 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그리고 제발 책임있는 이들이
회개할 수 있는 은총도
구합시다.
유령인가? 땅 위의 신앙인인가?
-기경호신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은 사람의 수만큼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어떤 이들은 땅에 발을 딛고 하늘만 쳐다보며 살아간다.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을 꿈꾸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하늘에 마음을 두되 땅에서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늘 복음에서 길을 찾아보자! 루카 복음 전체의 결론에 해당하는 오늘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발현’ 이야기와 더불어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할 증인임을 말해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24,37). ‘유령’은 정신 또는 영혼을 가리키는 말로서, 루카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하셨던 바로 그 몸 그대로 지금 실제로 살아 계시므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말해 주려고 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살과 뼈가 있음을 보여주시고(24,39) 또 제자들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심으로써 당신의 부활하신 분의 몸이 곧 사도들이 십자가상에서 보았던 고통을 당하신 몸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부활 이전의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같은 분이시며,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지는 구원사건임을 말해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을 때 가르치고 행하셨던 그 모든 것과 십자가 신비를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봐야 함을 확인시켜주시면서, 성경을 깨닫도록 마음을 열어주셨다(24,44-45).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체험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의 회개를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는 일’(24,47-48)이다. 부활의 신비는 제자들의 복음선포 사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해 ‘죄의 회개’의 선포란 바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다. 이는 부활의 신비를 어떻게 바라보고 부활하신 분의 삶에 어떻게 참여하느냐 하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저 먼 하늘’이나 ‘초월의 신비’ 속에 유령처럼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죽음 전과 후가 다름없이 실제로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 안에서 나의 생각의 전환, 행동의 개선을 이루어나가는 것, 바로 그것이 ‘죄의 회개’의 증거일 터이다.
어떻게 '유령'이 아니라 실제로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땅’(세상)에 살면서 땅을 보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며 그릇된 영신주의나 신비 속으로 도피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현실의 고통, 사회적 불의, 정치권력과 기업가들의 부정부패, 인간 존엄성의 말살 앞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죽으시어 부활하신 것처럼 ‘하늘’을 품고 ‘땅’에서 그 사랑을 노래하고 그 사랑이 현실화되도록 죽어야 한다. 나 자신의 건강과 유익을 앞세우고, 자기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는 온갖 정성을 다 쏟으면서도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고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신앙의 이름으로 국가수호를 표방하며, 입으로는 세상과 교회를 비판하는데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실천은 하지 않는 모습이 곧, ‘유령’을 찾고 있는 거짓 신앙, 신앙의 탈을 쓴 연극이 아니고 무엇일까? 나는 ‘땅’에 발을 딛고 멍하니 하늘만 보며 살아가는 ‘유령’인가? 아니면 ‘하늘의 뜨거운 사랑’을 품고 땅위에서 더불어 고민하고 아파하는 세상 속의 부활한 신앙인인가?
-한상우신부-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생명의 순간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얼굴을 닦으며
거울에 비친
오늘의 제 얼굴을
바라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볼 수 있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따뜻한
밥 한 그릇에
감사드립니다.
먹어야
생명입니다.
믿음과 사랑을
받아 먹어야
우리의 영적생명도
자랄 수 있습니다.
생명의 향기는
살과 뼈를 지닌
우리들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가야 할
유일한 이유는
하느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생명을
인정하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생명의 방문객이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까운 것에서
부활의 기쁨을
나누십니다.
부활이란
살아나신 주님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부활의 방문을 통해
부활의 기쁜소식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용서와 회개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는
진심으로 믿고
사는지를 다시
묻게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 얼굴은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얼굴을 닦으며
다시금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주님의 말씀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