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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다(1)
옥합을 깨뜨려 주님게 드린 마리아
요 12:1-8 / 박기완 목사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딱 두 가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만찬 사건이고, 또 하나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린 사건입니다. ‘기념’이라는 것은 어떤... 매우 뜻 깊은 일을 잊지 않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일을 말하며 기념하라고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유월절 엿새 전’입니다(요12:1).
유월절 행사를 위해서 사방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오리쯤, 약 2Km정도 떨어진 베다니에 계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고 마르다의 삼남매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때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후로써(요11:53)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 현상금이 붙어있는 상태였습니다(요11:57).
따라서 잔치는 하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영 심상치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감지한 마리아는 오늘과 같은 기회가 있을 때, 즉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뭔가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표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 위에 향품을 올려 놓았습니다.
날씨가 매우 더운 지역이기 때문에 부패한 냄새를 없애기 위하여 사용했는데, 돈이 많은 사람들은 매우 값비싼 향유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이가 생각한 것은 자신이 그동안 소중하게 간직해 온 향유를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7절과 마가복음 14:8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 행동을 예수님을 위한 장례인 것으로 인정하신 것을 볼 때, 마리아가 어떤 의도로 옥합을 깨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렸는지.. 그 분명한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가져온 향유는 인도의 식물인 나드의 뿌리에서 추출한 특별한 수입품 향유 기름으로서 ‘지극히 비싼’ 순전한 나드 한 근이었습니다(요12:3).
계산에 밝은 가룟 유다가 이것을 보고 얼른 계산기가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이 귀한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은 족히 나갈 터인데... 왜 이것을 낭비하느냐?...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더 좋지 않았겠느냐?” 그랬습니다.
가룟 유다가 삼백 데나리온은 족히 나갈 수 있다고 평가한 것을 볼 때, 마리아가 드린 향유가 얼마나 귀하고 비싼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 장정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삼백 데나리온은 남자가 일년동안 벌어서 모은 돈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처녀들이 수 년에 걸쳐서 조금씩 구해서 옥합에 모아 놓았다가 결혼할 때가 되면 비싼 값에 팔아서 결혼 지참금으로 사용했던 아주 진귀한 향유였습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송두리째 예수님께 부었다는 것은 시집가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주님께 자기의 인생을 다 드린 헌신이었습니다.
자신이 아끼던 가장 소중한 것을 예수님께 내어 놓은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 아깝지 않습니까?...
가룟유다의 말처럼 낭비가 아닐까요?... 엄청난 손해요 헛된 수고가 아닙니까?...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 것일까요?.... 마리아가 과연 주님께 헌신을 표현할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마리아의 이 행동에 대해서 뭐라고 판단하였을까요?
마리아의 이 돌발적인 행동에 대하여 제자들이 즉각 반응을 보였습니다.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26:8절에 보면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그랬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가룟유다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제자들도 다 ‘분하여’ 했고, 마리아의 그 일을 ‘허비’ 라고 했습니다. 왜 낭비하느냐고 했습니다.
도둑 심보를 갖고 있었던 가룟 유다는 발을 동동구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 돈을 차라리 날 주지... 그러면 얼마나 필요 적절하게 잘 쓸텐데.... 차라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전부 ‘계산’하고 ‘효과’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오직 마리아만 그런 것들과는 무관했습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계산과는 거리가 멉니다. 경제적이냐 효과적이냐 와는 거리가 멉니다. 상관이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주님을 너무 너무 사랑했기에...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뭐라고 얘기하건, 뭐라고 판단하건, 뭐라고 비난하건...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특별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경제성’을 가장 우선시 합니다.
세상은 무엇을 하든지 ‘효과적인 것’을 선호합니다.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 경제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무엇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리석게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비싼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비판적이고, 분을 내며, 호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비싼 것을 왜 송두리째 낭비하느냐고 했습니다.
너무 비효율적인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 분을 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이 얼마든지 낭비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효과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너무 비효율적인 것이고 낭비로 생각됩니다. 너무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다른 좋은 방법이 있었을텐데 겨우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고 야단을 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것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위해 쏟아 붓는 헌신과 사랑의 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귀하게 보십니다.
사람들이 비난한다고 멈춰선 안됩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주님이 귀하게 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분을 내며 야단을 쳤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이 행동을 보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왜들 그러느냐?... 마리아가 행한 일은 너무 잘한 일이다. 마리아는 나의 미리 죽음을 알고 행한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의 이 일을 말하며 저를 기념하도록 해라!” 그러셨습니다.
마태복음 26:13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그랬습니다.
같은 말씀이 기록된 마가복음 14:8-9절에서는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그랬습니다.
마리아의 이 일이 얼마나 대단하였기에... 주님은 마리아를 크게 칭찬하시며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의 일을 말하게 하고 저를 기념하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을 통털어서 예수님이 무엇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은 성만찬과 마리아의 일... 두 가지 사건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마리아가 행한 일이 이처럼 기념될 만한 이유는... 마리아가 행한 일이 바로 신앙생활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일처럼 머리로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히려 낭비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쏟아 붓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은 돈이 아니고 효과나 효율이 아니고 관계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을 말씀하시고자 하십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면 3천만원~5천만원가량 되는 엄청난 값어치의 매우 소중한 나드 향유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관계가 아닙니까?... 주님과 나와의 관계...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관계... 이게 신앙생활이죠.
사랑하는데 무슨 돈을 계산합니까?... 사랑하는데 무슨 아까운게 있습니까?...
사랑하는데 무슨 낭비입니까?... 낭비면 어떻고 소비면 어떻습니까?....
마리아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주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오직 예수님이 살아계실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얼른 주님의 장사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밖에 없었습니다.
희생이니 봉사니 헌신이니... 그런 말도 사실은 사치입니다. 허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 죽으셨는데 무슨 희생입니까?... 무슨 봉사입니까?... 무슨 헌신입니까?... 주님께 비하면 내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리아는 주님과의 관계만 생각했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만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축복받은 감사행위
요 12:1-8 / 김홍도 목사
감사의 생활을 바로 하면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칭찬 듣고 출세도 할 수 있고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고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무례한 사람이 되고 남에게 불쾌감을 주고 다시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안 들게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가 쓴 난장이의 나라, 릴리푸션(Lillipution)에서는 “배은망덕”의 죄를 제일 큰 죄로 여겨 그 나라에서 함께 살지 못하게 공동의 적으로 삼도록 법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자기를 도와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해악을 끼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나 하나님께나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면 더 큰 축복을 받게 되고, 감사를 해야 할 때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사람도 괘씸히 여기고 또한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되고 주셨던 복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지키는 몇 가지 절기 가운데 “축복”과 관계된 절기는 “감사절”이라고 봅니다. 정성을 다해서 감사할 때 오는 한 해에도 하나님께서 은총의 나래 아래 보호해 주실 것이며 복된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최고로 감사할 줄 아는 여자인 마리아와 배은망덕하여 메시아이신 자기 주인을 팔아먹고 저주받은 가룟 유다가 나옵니다. 감사행위를 바로 해서 축복 받은 마리아의 이름은 이 세상에 엄청나게 많지만 이 세상에 자기 아들에게 가룟 유다의 이름을 붙여주는 부모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감사가 충만한 사람은 보나마나 은혜 충만한 사람이요, 믿음이 좋은 사람이요,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또 틀림없이 그와 그 후손이 복 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감사할 줄 모르고 항상 불평하기 좋아하고 원망하기 좋아하고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이 충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4장 2절에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라고 했습니다. 운전하다가 졸면 큰일 나는 것처럼 감사를 잊어버리면 영적으로 큰일 나게 됩니다.
무디 선생은 시편 103편 2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한 말씀을 읽고 문득 깨닫기를 “물론 그 모든 은혜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다만 얼마라도 잊지 말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기쁘게 하고 환영하며 잘 대접하는 베다니에 자주 들르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집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는 집인데 이 자매의 오빠가 바로 죽은 지 나흘이나 돼서 썩은 냄새가 났는데 예수님이 살려 준 그 집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과 마태복은 26장에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가 문둥병에 걸렸다가 예수님께 고침 받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가 옥합 깨뜨려 부은 사건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와 마르다가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마리아가 나드 향유가 가득 담긴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붓고 그 머리털로 닦아드렸습니다. 이 장면을 보고 있던 가룟 유다는 얼른 계산해 보더니 화를 내면서 본문 12장 5절에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기 때문에 일 년 동안 부지런히 벌어야 살까 말까한 값진 향유였습니다. 그 다음 절에 보면 가룟 유다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함이 아니라 제자들의 돈주머니를 맡아 관리하면서 돈을 훔쳐가던 사람이라 자기가 갖고 싶어서 한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척하는 가룟 유다를 책망하시면서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고 또 마리아는 칭찬하시고 축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26:13)라고 하셨습니다. 말씀 그대로 온 세상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마리아의 감사행위로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주님이 그렇게 기뻐하시고 축복하셨을까요?
①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요한복음 12장 7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바로 유월절 지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에 대비하여 적시에 나드 향유를 부어드린 것입니다. 때가 늦었으면 이렇게까지 주님을 기쁘시게 못했을 것입니다. 이 향유는 썩는 것을 막는 방부제 역할도 하고 냄새를 제거하는 효과도 있습니 다. 무엇이든지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성령의 감동이 오면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즉시 순종하고 행동을 나타내야 합니다.
사람한테도 감사를 표현해야 할 때 놀지 말고 감사해야지 늦어서 괘씸하다고 욕할 대로 다 한 다음에 하면 별 효과가 없습니다. 시편 119편 60절에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열 문둥이를 고쳐주셨는데 겨우 한 명만 발길을 돌려 달려와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다른 9명도 제사장을 만나고, 그립던 가족을 만나고 난 후 천천히 인사할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섭섭해 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라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God First)을 항상 생각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② 계산을 초월한 감사였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오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면 그 일에 계산을 따지거나 하나님과 흥정을 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과감히 행동해야 주님이 감동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마리아는 비싼 나드 향유옥합을 몽땅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한두 방울만 뿌려도 온 방안에 향기가 가득할 터인데 몽땅 주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가룟 유다는 깜짝 놀라서 가난한 자를 핑계 대고 마리아를 책망했습니다. 적게 쳐도 300데나리온이 될 텐데 왜 허비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좋은 일 했다고, 가만 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뜻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계산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래야 계산을 초월한, 지각에 뛰어난 축복을 받습니다. 잠언 22장 1절에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라고 했고, 사무엘상 2장 30절에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라고 했습니다. 생각으로나 말로나 특히 물질로 하나님께 사랑과 존중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축복 하시지 않겠습니까?
미국의 백화점 완 와나메이커 씨는 십일조를 드림으로 큰 복을 받은 사람인데 중국선교를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중국에 보낸 돈이 어떻게 쓰여지나 보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어느 농촌에서 이상하게 밭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한쪽 멍에는 소가 메고 다른 쪽 멍에는 청년이 메고 소와 함께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와나메이커 씨는 그 아버지 되는 노인에게 무슨 연고인지를 물었습니다. 대답인즉 소 두 마리가 밭을 갈았는데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종탑을 세우는데 헌금할 돈이 없어서 소 한 마리를 팔아 헌금하고 그 대신 아들이 그 멍에를 메고 밭을 간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와나메이커는 “주님, 저 멍에를 제가 담당할 영광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그 가정을 크게 도왔다는 것입니다. 부자인 사람도 그런 감동을 받고 보상해 주었는데 우리 사랑의 하나님이 감동하시면 무엇인들 안 주시겠습니까?
미국의 부호 더글러스(W.L.Douglas)란 사람은 한때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당하는 중 마지막 1달러가 남았는데 주일예배 헌금 시간에 총 소유의 절반 50센트를 헌금했습니다. 다음날 구인광고를 보니까 그 회사까지 가는 기차표의 값이 1달러더랍니다. 후회하는 마음도 생겼지만 절반만 기차를 타고 남은 절반은 걸어갈 생각으로 50센트만큼 기차표를 사가지고 가다가 내렸습니다. 걸어가다가 보니까 사원모집 광고가 붙어 있어서 들어갔더니 좋은 회사였습니다. 지원서를 냈더니 합격이 되었고 많은 봉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구두회사로 큰 거부가 되었습니다. 불가능이 없으시고 섬세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③ 사랑의 감사를 드렸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틀림없지만 꼭 복을 받기 위해서만 헌금하고 감사한다면 놀부가 제비 다리 꺾어주고 싸매주는 것같이 되기가 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받은바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사랑하는 마 음으로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5절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라고 했으니 여자에게 자기 머리털은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알 수 있는데,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으면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겠습니까? 감사에 사랑이 어우러질 때 훌륭한 감사행위라고 봅니다.
④ 겸손한 감사행위를 드렸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대로 귀한 옥합을 깨뜨려 드릴 뿐 아니라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드렸다는 것은 자기를 끝까지 낮추고 겸손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많은 헌금을 드렸을지라도 그것을 늘 기억하거나 교만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또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비쳐(W.
H.Beecher)씨는 “교만은 감사를 죽여버린다. 교만한 자는 결코 자기가 소유한 만큼 소유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감사하거나 헌금한 다음에도 겸손을 잊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⑤ 최선을 다한 감사행위를 드렸습니다
마가복음 14장 8절에는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만큼 남김없이 예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정성을 달아보시는 분입니다. 물질의 양이 많아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질의 양은 적어도 더할 수 없으리만큼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정성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에는 정성이 더 무겁게 달립니다. 마리아는 비싼 옥합, 시집갈 밑천을 쏟아 부었을 뿐 아니라 여자들의 자존심인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이나 감사행위를 유심히 보십니다. 어려울 때 점수따기가 더 좋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3년 6개월 비가 안 오는 흉년 기간에 선지자 엘리야에게 자기와 아들이 마지막으로 식사하고 죽을 판인데 그것을 드렸습니다. 아마도 한 끼 더 먹고 죽으면 어떻고 한 끼 덜 먹고 죽으면 어떠냐 하는 생각을 했을 모릅니다.
예수님이 하루는 성전에서 헌금궤 가까이에서 모든 사람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가 그 날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고 칭찬하셨는데 액수는 동전 몇 개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액수로는 온 성도들 중에서 제일 적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정성은 제일 컸던 것입니다.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게 됩니다.
감사할 수 없을 때 감사하고, 십일조 할 수 있는 형편이 안 될 때 십일조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의 행동과 마음을 다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특별한 칭찬과 축복을 받았는데 그녀는 ①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시에 감사했고 ② 계산을 따지지 않고 감사했고 ③사랑의 동기에서 감사했으며 ④겸손히 감사했고 ⑤최선을 다한 감사를 했습니다.
지금 IMF 때보다 더 어려운 때입니다. 믿음이 위축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기적과 축복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곁의 사람들
요 12:1-8 / 이명식 목사
이스라엘의 큰 명절인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던 예수님은 인근의 베다니라 하는 마을에 머무시게 됩니다. 그곳에는 전에 예수님의 은혜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집이 있었고, 거기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잔치를 배경으로 예수 곁에 둘러선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 예수 곁에 서있는 다양한 교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 나사로가 등장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가 되는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의 히브리어 '엘르아살'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예수님을 통해서 부활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을 체험 한 이후 나사로는 주님을 위해 별다른 활동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한 여인은 예수가 메시야임을 알아보고는 물동이도 버려 두고 동네로 뛰어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였습니다. 또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고 변화되어 그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들보다 더 특별한 은혜를 받은 나사로라면 그에게서 더 특별한 헌신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병들어 죽고 무덤에 들어갔다가 3일 만에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면, 여기 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간증을 하거나, 주님을 위해서 앞장 서서 일하는 일군이 되었을 터인데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는 것이 이상하기까지 합니다. 혹시 성경이 그것을 기록해 두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이 됩니다.
오늘날도 이런 신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있습니다. 은사 체험도 있습니다. 어느 성도는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기도 하고, 어느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움을 이기고 형통함을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은혜 받을 때는 감격하였지만, 그 뒤에는 지속적인 감사나 충성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특별한 양 은근히 자기 자랑에 바쁩니다.
우리가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느냐도 중요하지만,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을 위해 얼마나 애쓰며 사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 중에 이런 모습은 없을까요? 과거 받은 은혜는 많지만, 주님께 드리는 충성이나 감사하는 생활에는 너무 인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그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주님을 높이는 삶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마르다가 등장합니다.
마르다는 무슨 일이든 앞장서는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도 좋아해서 오늘 주님을 위한 잔치에도 중심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 잔치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날이요, 특별히 자기 오빠를 살리신 주님께 감사하기 위한 잔치였습니다.
새벽부터 주방을 연신 들락거리면서 함께 수고하는 여인들에게 이 일 저 일을 부탁하고 관리하며 잔치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최상의 요리상을 만들어 주님의 일행을 대접할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손님을 치루려다 보니 일손이 부족하고, 생각만치 빨리 준비가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부터 마음에 차있던 잔치의 기쁨은 점점 사라지고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눅 10:40에 보면, 자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밑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따지듯이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아, 마르다여, 너무나 수고가 많군요.'라는 칭찬과 아울러 마리아에게 언니를 도우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칭찬커녕,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니라"는 책망조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앞장 서서 일하고 충성을 다합니다. 그분이 없으면 교회 일이 안될 정도로 너무나 귀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가장 조심할 일은 너무나 봉사하는 일에 몰두해서 말씀을 듣는 일에 등한히 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교사나 성가대일, 속회나 기관, 등의 일에 너무 바쁘다 보니, 막상 말씀을 듣는 시간에는 너무 피곤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자기중심적인 것이 되기 쉽고, 그 봉사 때문에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또 '나는 이렇게 열심히 충성하는 데 다른 성도들은 왜 놀기만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은근히 억울한 생각도 가지게 됩니다. 더 나아가 내가 하는 수고를 알아주기를 바라게 되고 맙니다.
우리가 충성하는 일꾼이 되어야 하지만, 먼저 하나님 말씀 듣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누가 보든지 말든지, 칭찬하든, 아니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봉사를 하여야 시험이 들지 않고 오히려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해질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언니 마르다와는 달리 좀더 사색적이고 여성스러운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니 마르다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오히려 게을리 함으로,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계신 주님의 큰 고독과 아픔을 모르고 있었는데 비해,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십자가를 앞둔 주님의 고독과 아픔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조금이나마 위로해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큰 결단을 내리고는 가장 아끼는 나드 향유 한 근이 담긴 옥합을 깨고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그 향유는 대단히 비싼 것으로, 300 데나리온이나 되었습니다. 지금 돈으로 2,000 여만이나 되는 금액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귀한 것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는 자기 머리털로 발을 씻기어드렸습니다. 머리털로 발을 씻는 행위는 최고의 헌신과 존경을 나타내는 태도입니다. 특히 여인에게 있어서 머리털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대한 존경과 사랑, 그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우려와 눈물을 담은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발을 머리털로 씻기는 그 헌신적인 모습에 큰 감동과 아울러 큰 위로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마리아가 칭찬을 받은 것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희생도 감수하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4.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아래 붓는 것을 보고 분이 나서는 '세상에, 저렇게 비싼 것을 저런 식으로 못 쓰게 만들다니, 도대체 저 여자가 머리가 돌았나? 아니, 차라리 가난한 자들에게나 줄 것이지.'라고 비난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아무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돈을 많이 만져본 사람입니다. 더욱이 그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살림을 맡고 있는 회계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돈이 필요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헌금이 들어오면 그것을 받아 가지고 장부를 정리하고 돈주머니에 집어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지출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가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일부를 유용하기도 하였는데, 그래서 본문은 유다를 도적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유다의 생각에 이번 사건은 아쉬움이 남고 화가 나는 일이었습니다. 계산에 능한 그는 마리아가 그 옥합을 그대로 들고 와서 주님께 맡겼다면 주님은 그것을 회계를 맡고 있던 자신에게 넘겼을 것이고, 그것을 300 데나리온쯤에 팔아 경비도 쓰고, 자신의 몫도 제법 짭잘하게 챙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계 일을 맡기실 만큼 정직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신앙의 본질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소홀히 한 탓입니다. 항상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 맨 뒤에 앉아서 '오늘 저녁은 어느 식당에 가서 무엇을 먹을꼬? 잔금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왜 아리마대 요셉은 선교비를 보내지 않는가?' 등등 걱정에만 매이다 보니 돈에 매이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마다 십자가에서 돌아간다는 이야기나 떠난다는 이야기만 하는 것을 들으면서 자기도 실속을 차려야겠다는 얄팍한 생각으로 돈주머니에서 슬금슬금 착복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렸으나 어느 날부터는 점점 무디어지고 마침내는 돈독이 오르더니 예수님도 돈으로 보이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가룟 유다는 대단히 화가 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했으면 좋았을 것이
다'라는 말로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가난한 자를 생각해서 한 말을 결코 아닙니다. 그는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볼모로 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불과 며칠이 안되어 그는 드디어 자기의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자기 선생 되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넘겼던 것입니다. 은 삼십 하면 120데나리온 정도밖에 안 되는 돈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드린 향유 옥합의 액수의 반도 안 되는 미미한 액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기 중심, 자기 욕심을 따라 가다가는 가룟 유다처럼 양심의 화인 맞은 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자기 주장, 자기 이해타산을 따라 하지 말고 주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충성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느 선교사가 인도에서 선교 사역을 하던 중에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선교사님이 어느 날 갠지스 강가를 거닐다가 멀리서 두 아들을 데리고 강둑 걸어가는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인도에서 오랫동안 선교 사역을 하면서 얻은 직감으로 '아, 저 여자가 두 아이 중 하나, 아니면 둘 다 갠지스 강에 집어넣어서 신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그 부인을 붙들고 '제발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말라. 그건 아무 쓸데없는 일이다. 왜 아이를 희생시키려느냐?'하고 간곡히 만류했지만 그 여인은 완강했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아이들을 보니 한 아이는 아주 참하게 생긴 남자애였고, 또 한 아이는 몸이 불구인데다가 장님입니다. 그 여인에게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는 줄 알고 선교사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한참을 있다가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다시 강가로 나갔는데 아까 전의 그 여인이 한 아이만 데리고 강둑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오는 그들을 보았더니 잘 생기고 성한 아이는 없어지고 불구요 장님이 된 아이만 데리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 선교사님이 정색을 하며 '아니, 신에게 바치려면 불구에다 눈이 멀어 인생을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 아이를 바칠 것이지 왜 성한 아이를 바치셨나요?'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여인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미국에서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 인도에서 우리가 섬기는 신은 우리가 그에게 최선의 것을 드리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드리려면 두 아이 중 좋은 아이를 드려야지 어떻게 덜 좋은 아이를 드리겠습니까?' 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계산적일 때가 많습니다. 희생적인 일에는 너무 피하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주님 앞에 갈 때에 칭찬 받을 수 있도록 마리아처럼 철저한 말씀중심, 주님중심으로 우리 시간과 몸, 물질을 희생적으로 드리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옥합을 깨뜨리고도 행복한 사람
요 12:1-8 / 지태일 목사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칭찬하신 사람들이 몇 명 나옵니다.
1) 마8:5-13절에 보면 예수님께 나아와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구하며 "내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하는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주님은 칭찬하셨습니다.
2) 마15:21-28절을 보면 딸을 살려달라 애원하며 개같은 취급을 당하며 모진 거절을 견디어 내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대해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예수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3) 막12:41-44절을 보면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는 광경을 보시고 부자는 풍족한 중에 이부를 드렸으나 가난한 과부는 그가 가진 모두를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4) 그리고 예수님의 칭찬 사건 중에서도 가장 기뻐하시며 행복해 하신 사건이 오늘 본문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헌신 사건입니다. 복음이 전하는 곳에 이 여인의 행한 일도 전하여 기념하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었던 귀한 사건입니다.
오늘도 이 본문을 대할 때 우리가 생각나는 것은 2주전 주일학교 유치부 유년부 어린이들이 부른 특송할 때의 모습입니다. 나를 위해 험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주님 위해 자기의 귀한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신앙의 드림을 찬양했습니다.
역시 오늘 본문을 보면서도 이 마리아의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도 널리 전해지는 행복한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은혜의 잔치는 세 남매,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세 남매가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배설한데서 시작됩니다. 본문 2절에 언급된 것처럼 예수님을 위한 축제의 잔치였습니다. 요11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마련된 잔치였습니다. 또한 이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일주일 전이었으므로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준비 자리였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주님 발아래 부어드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씻어 드렸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말씀들을 보면 마리아는 한결같이 발 아래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듣기도 하고, 발 아래 앉아 병들어 죽게된 오라비 나사로를 위해 기도하는가 하면, 발 아래 앉아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붓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 주석가들은 마리아의 별명을 "발 아래 여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발 아래 여인! 이 얼마나 아름다운 호칭입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들이었던, 미켈란젤로나 렘브란트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한결같이 이 여인이 주님의 발아래 앉아 향유를 부어 드리는 그 모습을 그린 것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지극히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짖밟으려 했을 때 주님이야 말로 높임을 받으실 분이라고 자기 가진 향유 옥합을 깨뜨려 귀한 머리카락으로 주님을 높여드리는 이 여인의 모습을 아름답게 여기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엉뚱한 것에 우선적인 순위를 두며 달려갈 때 이 여인은 주님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에 두고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없고, 주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바로 그런 모습을 아름답게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런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더욱 알아 가시고 주님의 사랑을 더욱 충만하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1. 먼저 이 잔치 자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1) 주님과 함께 앉은 나사로입니다.
2절 하번절에 보면 나사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 예수님과 함께 앉았다는 기록합니다.
본문을 계속 읽어 내려가 보면 11절에 이 나사로가 살아서 앉아 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 많은 전도가 된 것 같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지금 지금 나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기쁨을, 구원을, 은혜와 주님 사랑하심을 나사로와 같이 나타내시기 바람니다.
2) 마르다입니다.
2절을 보면 “거기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마르다는 주님이 오실 때마다 주님을 위해 부지런히 음식을 장만하는 여인으로 나타납니다. 한때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가 철없이 자신의 일을 돕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마르다에게 그런 것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지사였습니다. 지금은 말없이 주님을 위해 힘든 일도 자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에 마르다 같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하여 기꺼이 일하는 헌신적인 사람들이 필요하고 요구되어집니다.
3) 오늘 본문에서 가장 절정적인 장면의 주인공은 역시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그 전에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 발 아래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했습니다.(눅10:39).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이번에는 예수님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나드라고 하는 향유가 가득 든 항아리를 한병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 나드라는 것은 본래 히말라야의 높은 산에서 나는 향료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이 향로는 너무 귀하고 또 비싸기 때문에 이 향료만 쓸 수 없어서 사람들은 다른 향료에 이 향료를 조금씩 섞어서 사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가지고 온 이 향유는 그렇게 섞은 향유가 아니고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이라고 했습니다.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이라고 하면 이 당시에 이것은 아주 비싼 물건입니다.
가롯 유다가 환산해 보니까 약 300데니라온 정도 한다고 했습니다. 이 당시 노동자가 하루 일했을 때 받을 수 있는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 300데나리온 이라고 하면 일반 노동자의 일년 년봉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 사람의 노동자가 한 푼도 쓰지 않고 일년을 꼬박 모아야 하는 그런 큰 돈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마리아의 혼수 준비물로 물려준 마리아의 전 재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으로 따진다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한 10만원을 일당으로 한다면 약 3000만원 정도는 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싼 향유를 들고 나온 마리아가 갑자기 이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리고 이 모든 향유를 전부 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쏟아 부어버렸습니다.(막14:3)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으며 찔꿈 찔끔 한방울 한방울 떨어뜨리며 생색을 내지 아니했습니다. 한방울씩 흐르는 향유병 주둥이를 아예 깨뜨려 송두리째 부어 드렸습니다. 지금 이 마리아는 얼마나 많은 기름을 부었는지 기름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서부터 흘러내려서 발끝까지 적셨습니다. 온 집에 향유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워낙 비싸고 향기가 좋으니 조금씩 부으면서 아끼고 병도 아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헌신이 마지막이요 영원한 기회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몽땅 부어 나의 모든 것이 그분에게 드려지기를 원했습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마리아의 신앙, 이런 믿음, 이런 주님 사랑, 이런 헌신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람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머리를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귀중한 손님이 와서 극진하게 대접을 할 때는 반드시 그 발을 씻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손님의 발을 씻기는 것은 주인이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보다 낮은 사람, 그 집의 하인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하인이 아닌데 자신이 나서서 주님의 발을 씻어 드렸고, 그것도 자기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어 드렸다고 했습니다. 머리는 사람의 맨 위에 있는 소중한 부분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머리털을 “여인의 면류관”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고전11:15절을 보면 "긴 머리는 여자의 영광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자 분들이 자기 머리에 얼마나 신경을 씁니까? 그런데 그런 머리카락가지고 남의 발을 씻길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지금 그 영광의 머리카락으로 인간의 가장 하찮은 자리에 있는 발을 씻고 있습니다. 자신의 머리털을 걸레삼아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고 있습니다. 내게 가장 영광스러운 것도 주님께는 가장 천한 것일 수 밖에 없는데 뭘 아까와 하겠느냐는 태도입니다.
가룟 유다와 일부 제자들이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를 향해 분을 내며 비판했을 때 예수님은 마리아의 옥합 깨뜨린 사건을 높이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14:6-9)
주님은 외히려 마리아의 사랑과 눈물의 봉헌을 칭찬하시고 기뻐하시고 기념비적인 신앙으로 칭찬하셨습니다.
4) 그런데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도 비판을 서슴치 않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인 가롯 유다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름들 가운데 가장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이름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가롯 유다'를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가장 위대한 성자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그 기회를 오히려 저주스러운 인생으로 바꾸어버린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가롯 유다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난 주 오후에 찬양의 말씀을 나누면서 유다가 얼마나 귀한 이름이요 복인가를 나눈 것처럼 '유다'라는 이름은 참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이지만, 지난 2000년 동안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들에게 '가롯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준 부모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유다'라는 이름은 야곱의 12명의 아들 가운데 레아가 낳은 4번째 아들인 '유다'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이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 왕이 이 유다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다 지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를 주시다는 약속도 있었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양'입니다. 찬양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 그리고 이스라엘 구속사의 핵심에 위치해 있는 아름다운 이름이 유다였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과 구약의 중간 시대에 그리스 알렉산더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민족을 구출하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독립투사 가운데 '유다 마카비우스' 가족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투쟁이 독립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유다 마카비우스'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굉장히 존경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때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길 판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어 나라를 구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 것처럼, 또 일제시대 때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한국의 잔다르크' 류관순 열사를 존경하는 것처럼, 아니 그들은 우리가 이순신 장군이나 류관순 열사를 존경하는 것 그 이상으로 유대인들을 유다 마카비우스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많은 부모들이 유다 마카비우스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자녀들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많이 지어주었습니다.
아마도 가롯 유다의 부모들도 자기들의 사랑하는 아들이 일평생 하나님을 찬양하며 유다 마카비우스처럼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큰 뜻에서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이런 부모님의 간절한 바램을 저버리고, 가장 아름다운 이름 가운데 하나인 '유다'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가롯 유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름을 듣기조차 싫어합니다. 가롯 유다는 '배신자'를 대표하는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과 5절을 보면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롯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얼핏보면 가롯 유다야 말로 굉장한 인도주의자처럼 보입니다. 그는 서민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에 정통해 보이기도 하고 사회정의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민중의 대변자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속아 넘어 갔습니다. 가롯 유다의 말이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고 대단히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 사용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을 돕자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롯유다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라 저는 도적이라 했습니다.
사탄은 오늘날도 가롯 유다와 같은 논리로 교회를 혼란시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에겐 몇 가지 결정적인 잘못이 있었습니다.
1) 첫째 마리아의 숭고한 주님에 대한 사랑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평가를 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그 사랑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사에 타산적이었습니다. 신앙이나 사랑을 손익의 문제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2) 둘째 유다는 그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그 동기를 6절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를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롯 유다의 속셈은 개인의 소욕,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그러다가 나중에는 급기야 비명에 비참하게 죽어간 인물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약1:5)
3) 가롯 유다의 세번째 잘못은 언행의 모순입니다. 만일 그토록 가롯 유다가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유다 자신이 뭔가를 했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말만 그럴 듯 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는 자기네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신앙이나 영적인 문제들을 너무 쉽게 비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집 건너 늘어나는 술집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하면서 교회 십자가가 너무 많다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이는 분명 교회의 전도를 막고 구원의 힘을 약화시켜 보려는 악한 사탄의 대변인들입니다.
2. 진정한 사랑은 낭비하는 것 같으나 행복합니다.
향유를 낭비한 마리아야 말로 예수를 알고 사랑을 알고 복음을 알고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의 저녁 식탁을 위해 추운 날 시장바닥을 뒤지는 아내의 정성을 누가 낭비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까?
고후12:15절에 보면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낭비하셨습니다. 사랑엔 낭비가 있고 손해가 따릅니다. 사랑은 논리로 따질 문제도 아니고 손익을 계산할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빼앗기는 것입니다. 바치는 것입니다. 손해보고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뭔가를 잃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 뭔가를 빼앗겨 본 경험이 없는 사람, 인생이나 젊음을, 시간이나 재물을, 눈물이나 땀을, 그 무언가를 낭비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낭비는 낭비할수록 행복한 사랑입니다.
마리아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신앙의 초급단계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때 행복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단계가 중급 고급으로 고상해지면 고상해질수록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행복합니다. 하나님께 내 재능, 내 시간, 내 물질, 내 은사 드릴 때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해 합니다. 마리아의 신앙이 그랬습니다. 낭비할수록 그녀는 행복한 사랑이었습니다.
철없는 어린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받아서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면서 행복해 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닐 때는 내가 얻은 구원이 귀하고 내가 누리는 축복이 귀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고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주님이 귀하고 성령의 임재속에 살아감이 귀합니다.
기도의 초기 단계도 보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 달라는 기도를 많이 드립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보다 남을 위한 기도가 늘어 남니다. 이제 흘리는 눈물, 기도 모두가 점차적으로 하나님 중심이 되고, 교회중심이 되고 성도들 중심이 되고 하나님 영광 중심이 됩니다.
낮은 단계의 예배는 내가 받은 감동과 은혜만 생각합니다. 아니면 내가 받을 은혜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예배에 임재하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합니다. 나를 하나님께 더 많이 더 깊이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물질의 가치가 아니라 그 헌금을 받으시는 주님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리아를 보시기 바람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해도 내가 무엇을 드려도 나를 깨고 나를 송두리째 쏟아 부어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낭비할수록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3. 낭비할 줄 아는 사랑이 교회를 세워 나갑니다.
낭비할수록 드릴수록 행복했던 사랑! 그것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이해 타산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전부를 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따라 사람의 몸으로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종의 모습으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의 대속물로 주기까지, 십자가위에서 마지막 피 한방울 까지 우리 위해 흘려 주신 그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향해 우리가 해야할 사랑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옥합들은 깨어지고 부셔져야 그 향기를 드러냄니다.
주님 앞에 내 시간을 드려야 되는데 세상 일이 분주하고 분주해서 이것을 짜르지 않고서는 시간에 피를 내지 않고서는 주님을 섬길 수 없고 예배할 수 없고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때 그 시간이 송두리째 깨어질수록 그 시간은 향유 옥합을 깨서 내 주변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진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의 사랑과 헌신엔 감동과 향기가 없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경제적으로 손해가 있었지만 믿음으로 이겼다고 좋아하는 분이 있었는데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손해라는 의식조차 들지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 바로 예수님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사랑은 옥합이 깨어지므로 시작이 되었고 완성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의 옥합이 무엇입니까? 그 옥합을 감추어 두고 다른 껍데기들은 사랑하겠다 말하지 마시기 바람니다.
낭비할수록 행복한 사랑!
그것은 우리 주님의 사랑이었고 주님을 향한 오늘 우리의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뭔가를 잃어 보고 바쳐 보고 빼앗겨 본 경험이 있습니까? 손해 보고도 좋은 사랑을 아십니까? 낭비하고도 기쁜 사랑을 맛 보셨습니까?
여러분의 귀한 삶이 주님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되시기 바람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들, 하늘을 감동시킬 줄 아는 사람들, 성도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들, 주의 종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주님을 감동시킨 마리아! 낭비하고도 행복할 수 있었던 사랑이었습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했던 그 아름다운 감동들이 이 교회와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 나누어지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이 듣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든지 깨뜨려지고 부서져서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그런 교회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람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옥합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내 시간을 깨지 못하지는 않는지? 아직도 내 물질을 깨뜨리지 못하지는 않은지? 네 몸뚱아리가 그렇게 소중합니까? 언젠가는 무너지고 깨어질 육신의 장막, 이 땅에서 사라질 그 몸뚱아리 주님 위해 한번 깨뜨리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조금 내 몸이 아프고 힘들어도, 피곤해도 너무 위하지 말고 주님위해 한번 깨뜨리시기 바람니다.
내가 주신 은사와 재능들을 혼자 끌어안고 쩔쩔매지 말고 그저 육신 먹고 사는 일에만 분주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깨뜨릴 수 있기를 바람니다. 마리아처럼 낭비할수록 깨뜨릴수록 행복하고 기쁜 주님의 사랑의 비밀을 함께 배우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를 이루는 교회
요 12:1-8 / 서정호 목사
하인스 워드가 한국서 자랐다면?
미국 최대의 프로풋볼 스타가 된 하인스 워드의 신화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한국계 혼혈아인 하인스 워드(미국)가 6일 열린 북미프로미식축구리그(NFL) 슈퍼볼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최우수선수(MVP)가 되면서 세계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워드의 성공신화를 소개하면서 어머니 김영희 씨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히 보도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성실과 정직, 사랑을 배웠다고 말하는 하인스의 효성과 김 씨의 헌신적인 모성애에 세계인들은 감동하고 있습니다. 역경을 겪으면서도 하인스에게“1등이 되기보다 겸손하고 감사하라”고 가르친 김 씨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하인스는“어머니는 나의 인생과 함께 한 사람”“어머니는 자신의 삶의 주요 요소”“어머니는 먼 한국에서 이곳 미국으로 와서, 정부 지원도 받지 못하고, 가족도 없는 이곳에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에게 옷을 입히고 나를 키웠다”고 말했고 또한 그의 어머니 김영희 씨는“아들아, 올라갈 땐 내리막 생각해야지”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땅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혼혈로 태어나 이산가족이 되어 아빠와 엄마 집을 두루 거치며 자란 그가 어떻게 4년간 260여억 원을 받는 스타로 변신했을까요? 그의 사례는 또한 인종 문제에 대한 미국 사회의 포용력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건강성과 개방성입니다. 지금도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이 같은 성공 스토리쯤은 만들어 낼 역량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한번 자문할 것이 있습니다.“그가 만일 한국에서 컸어도 이렇게 환히 자랄 수 있었을까?” 다양한 인간들의 환경과 인격과 개성과 은사들이 모여서 아름답고 웅장한 인간세계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노라면 분명히 주인공이 있고, 또 조연급, 또는 단역 등의 연기자들, 엑스트라들도 있습니다. 연극이나 영화들은 본래 인간사회를 축소해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사회라는 곳은 언제나 그 중심인물이 있고, 그를 보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특이한 공동체입니다. 이 안에는 그 출신부터 성장 배경, 취향, 재능들이 다르고, 은혜 체험의 경험들이 각각 다른 이들이 모여서 교회의 몸이신 주님과 한 지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은 다양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조화와 연합의 행복
교회 안에는 다양한 분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다양한 개성과 직업,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생각들을 가진 분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런 다양함 속에서 하나를 이루어 평화롭고 행복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영암교회의 모든 가족들은 생각도, 모습도 다르지만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구원공동체이면서, 같이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박수치고,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연합은 힘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교회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조화입니다. 다양한 개성, 다양한 모습 속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마치 각자의 소리는 다르지만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 가는 합창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자기의 소리가 크게 나면 합창은 망치는 것이며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의 소리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내 한마디의 말과 행동 때문에 화평하고,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고, 깨기도 합니다. 화목의 사람이 모여 행복을 만들어내는 곳이 교회입니다.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려면 잘 협력해야 합니다. 협력이 잘 되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협력하면 힘이 납니다. 서로의 행복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협력하지 않으면 작은 일에도 피곤하고 짜증납니다. 사랑과 수고는 협력할 때 더욱 가치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서로 앞장서서, 같이 힘을 합쳐서 봉사를 해야 합니다. 교회가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될 때에, 복음전도가 가능하게 되고 아름다운 향기를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조화와 연합의 결과는 행복입니다. 이런 조화가 있는 교회, 연합에 앞장서는 교회, 그래서 행복한 우리 영암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오고 있음을 아셨지만 베다니로 다시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련해 준 만찬의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받았던 그 가족은 정성을 다해 예수님을 대접했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하는 동안, 예수님의 지위에 어울리는 존경과 감사는 마리아를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마리아는 500ml의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그분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소중한 향유였지만 마리아는 감히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지 못하고 그분의 발에 물처럼 붓고, 수건 대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자신을 종보다 더 낮추어 예수님을 섬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존귀하신 분인지 알았던 마리아의 행동은 존귀하신 주님께 어울리는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값진 향유를 예수님께 사용한 것을 부적절한 용도에 허비한 것으로 간주했는데 그에게는 마리아와는 달리 예수님의 존귀함에 대한 깨달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가장 고귀한 분에게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정말 소중하게 보인 것은 그 향유와 향유의 값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 생각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그는 가난한 자를 구제한 일도 없고, 그런 일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준 돈조차 횡령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로와 같이 열심히 은혜 받는 사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표 격이 되는 사람은 나사로입니다. 왜냐하면 삼남매 중에 그가 제일 연장자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위해 베푼 이 잔치는 그를 살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잔치의 동기를 제공해 준 사람은 나사로인데 그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죽을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살아나는 것도 감격스러울 것인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았으니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그런 때에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은 하나도 지나칠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살았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죽음도 굴복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는 이 은혜 때문에, 죽음에서 살려주신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날도 나사로는 예수님 곁에 앉은 자 중에 있다고 했는데 그 시간도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것을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기운이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는데 나사로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체험으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 집안의 이야기인데 등장인물이 제일 큰오빠 나사로, 다음이 마르다, 막내는 마리아입니다. 그들은 각기 체험도 다르고, 신앙 생활하는 모습도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교회 안에는 나사로와 같은 체험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고, 마리아와 같은 헌신적인 이들도 있고, 마르다처럼 일에 묻혀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살기가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의 말을 들으면 온몸이 오싹해집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생기 있는 말이 있는데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기운이 있는데 살리는 기운입니다. 그 기운에 살아난 나사로가 지금 그 기운을 쬐고 앉아 있습니다. "예수 곁에 앉은 자 중에 있다"는 말은 그분의 곁에서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특징 중에 하나가 말씀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시간 중에 거의 절반을 말씀을 증거하는 이유도 말씀의 능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져 내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와 함께 앉은 자중에 있더라"는 이 간단한 문장은, "이제는 은혜를 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봉사도 기쁨이 되고, 헌신도 있지만 은혜 없이 매일 교회만 쫓아다니면 전부 짐이 될 뿐 기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인물이 나사로가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은 이 교회의 한 중심에 들어와, 주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자리가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우선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취해 있어야 합니다.
마르다와 같은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지금 이 잔치는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있었으니 도와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예수님 곁에 앉아서 설교를 듣는 나사로가 그를 도와주겠습니까? 당연히 마르다의 몫이었습니다. 지금 마르다는 예수님뿐 아니라, 마리아, 나사로 그리고 거기 있는 다른 제자들, 또는 다른 손님들, 심지어 가룟 유다의 몫까지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수고 때문에 다른 빛나는 일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눅10장에 보면 마르다가 길 가시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을 했습니다. 아마 오늘 이 집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모신 마르다는, 정신없이 음식을 장만하고 집안을 치우면서, 도저히 바빠서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동생을 좀 보내서 일을 도와주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고, 오히려 자기 곁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두둔하셨습니다.
눅10:41절에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은 섬김 자체가 아니라 일에 대한 지나친 염려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일꾼이었습니다. 일하는 이들의 장점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은혜 받을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이 일꾼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일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까딱하면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동안 수고한 것이 다 쏟아지고 맙니다. 주님은 아무 말씀 안 하셔도 그 사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누가 무엇을 했고, 어떤 수고를 했는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내 혼자 이렇게 고생하는 것, 어느 누가 알아주기나 하나?" 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알아주는 인간이 없어도 하늘에는 알아주는 분이 계십니다. 사실은 목회자들도 압니다.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거의 대부분 다 압니다.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고 느낌으로 압니다. 얼굴을 보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압니다. 말하는 것을 들으면 압니다. 그런데 주님이 모르시겠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일꾼이 되기 힘들거든 협조자라도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일꾼이 많아야 합니다. 교회에 말꾼이 많으면 자꾸 기우뚱거립니다. 구경꾼이 많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훼방꾼이 많으면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일꾼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므로 모두 일꾼 되시기 바랍니다. 그날의 아름다운 사건 밑바닥에는 마르다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그날 마리아의 헌신도 마르다가 일하는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 이런 일꾼이 필요합니다. 교회에는 이런 이들이 있어야 부흥됩니다. 여기서 일꾼이란 주님을 위해서 땀 흘리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전도할 일꾼, 기도할 일꾼도 필요하고, 봉사하고 가르칠 일꾼도 필요하고, 헌금할 일꾼도 필요합니다.
마리아 같은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
마리아는 막내였는데 그는 상당히 귀한 향유였던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머리털로 향유가 흐르는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자기의 머리털로 씻었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여성의 머리카락을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여성의 머리카락은 여성의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공석에서 머리를 풀어 내리는 것은 유대인 풍속에서 큰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런 것을 돌아볼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여성의 머리카락은 여성의 영광인데 그것으로써 발을 씻는 수건으로 대용했다니 그 여자의 희생심이 얼마나 큽니까?
"순전한 나드"라는 말이 나옵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향유입니다. 한 근이라고 했는데 다른 성경에는 한 옥합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부피로 따지면 한 옥합이고, 무게로 보면 한 근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옥합에 담아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뜨렸다"고 했고, 마가복음에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에게도 물론 최선이었지만, 예수님도 일생 동안 그렇게 진지한 헌신을 받아 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친히 "이 세상에 복음이 증거 되는 어느 곳에도 이 여인의 행한 일을 기록하여 전하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부었지만, 그것은 예수님에게 일생 동안 잊혀 지지 않는 감동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제 일 주일 후면 예수님은 죽으십니다. 그래서 시비하는 유다에게 "가만 두어라! 가난한 사람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막14장에는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밀 준비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드린 향유는 결국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소중한 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하나님 앞에 수고하는 것이, 때로는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주님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헌신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도움을 주어야 할 사람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지만, 지금 주님의 교회가 당하고 있는 절실한 어떤 문제는, 이 기회가 지나가면 다시는 그런 일에 드리고 싶어도 드릴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기회, 헌신의 기회, 충성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아무 때에나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는 이런 저런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좀 하는데 일은 안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은 좀 하는데 기도는 안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전도를 안 합니다. 다 잘하는데 헌금을 안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비난이 아니라, 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다양한 사람들의 모든 충성을 다 받으십니다. 교회는 한 가지 일만 잘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물질로 예수님께 봉사했다면 마르다는 몸으로 헌신 봉사한 것입니다. 봉사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서 각기 다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를 놓고 누구의 봉사가 더 훌륭한가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은혜 받으려고 앞에 앉는 사람도 필요하고, 그들이 밥 먹도록 준비하는 이들도 필요합니다. 받은 은혜를 물질로 섬기는 이들도 필요하고,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도 필요합니다. 가르치는 일이나 찬양으로 봉사하는 이들도 필요로 합니다. 청소하는 이들, 모든 교인들이 질서있고 은혜롭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안내하는 분들, 차량부, 새가족부에서, 각각의 사역의 현장에서 수고하고 헌신하는 분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보이는 곳에서 수고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숨은 봉사자들이 모여 3중주, 4중주, 5중주, 나아가서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를 이루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낭비나 소비가 아닌 헌신자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모든 것을 낭비하거나 소비하거나 헌신을 합니다. 낭비는 필요하지 않는데 사용하는 것이고 소비는 필요하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헌신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혹은 예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낭비나 소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헌신은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만이 가능합니다. 주님은 시대를 초월하여 헌신자를 찾고 계십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몸값으로 세우신 교회마다 마리아 같은 헌신자를 필요로 합니다. 자원적 헌신 자, 최선의 헌신 자, 어떤 것도 아까워하지 않는 자, 비방을 이기는 헌신자, 시험을 이기는 헌신자, 순수한 헌신자,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는 헌신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예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또한 예수님의 종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나의 언어와 감정을 통해 드러나는 나의 가치관과 관심사들은 무엇인지? 내가 예수님보다 더 소중한 것처럼 반응하는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의 중심에 주님을 가장 먼저 모시고, 향유 옥합을 드린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가장 우선순위를 두는 신실한 주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감사
요 12:1-8 / 한대근 목사
오늘 우리는 값비싼 나드 향유를 예수님께 드린 마리아의 행위를 통해 참된 감사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배울 수 있습니다.
감사는 은혜의 자리로부터 시작됩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자신의 삶을 주님과의 관계 속에 두고 살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마리아의 진정한 감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언제나 바빴고, 너무 많은 일로 피곤에 지친 나머지 마리아를 보며 짜증을 냈습니다(눅10:39). 마르다의 마음에는 감사가 자리 잡을 틈이 없었습니다. 너무 피곤하고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편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메말라버리면 짜증이 납니다. 불평이 생깁니다. 삶이 피곤하고 지겹게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힘겹고 어려운 삶의 상황가운데서도 은혜를 받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심령이 충만해야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참된 감사는 계산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감사를 기쁘게 받으신 것은 그것이 값비싼 것이어서가 아니라 계산되지 않은 진실함이 담겨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향유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향유 옥합을 단순히 300데나리온의 물질적 가치로 환산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돈으로 환산하면 그 가치가 사라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마리아의 주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마리아가 받은 은혜가 그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점점 황폐해지는 이유는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려는 심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일에 계산이 앞서고, 물질적 가치로 모든 것들을 평가하려는 풍토는 진정한 감사를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 뒤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계산 되지 않은 순수함으로 드리는 감사만이 주님이 받으십니다. 또한 그런 감사가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감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마리아는 그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린 것이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셨고, 마리아에게 가치 있는 인생이 되었다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행위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헌신의 모델로, 감사의 모델로 그 이름과 행위가 들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두드러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을 받게 된 것은 그가 작은 것을 받았을 때에도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일지라도 감사하는 사람은 이미 큰 것을 예비해두고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로 미래를 예비할 줄 아는 사람이 가치 있는 인생으로 쓰임을 받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인생은 하나님이 두드러지게 하셔서 축복하시고,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는 신앙의 척도만이 아니라 인생의 윤활유요 행복의 촉진제입니다. 감사로 호흡하는 인생이 되어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에 쓰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다가 버리지 못한 것들
요한복음 12:1-6, 시편 119:36-37 / 안효관 목사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름들 가운데 가장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이름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가롯 유다'를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단테(Dante Alighieri)는 그의 책 유명한 『신곡(神曲 La Divina Comedia)』 '지옥편'에서 가롯 유다가 마왕 루시퍼와 함께 지옥의 가장 낮은 곳에 내려가 지옥에서조차 금하고 있는 혹독한 벌을 받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가장 위대한 성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그 기회를 오히려 저주스러운 인생으로 바꾸어버린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가롯 유다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참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이지만, 지난 2000년 동안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들에게 '가롯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준 부모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야곱의 12명의 아들 가운데 4번째 아들인 '유다'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이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 왕이 이 유다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다 지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를 주시겠다는 약속도 있었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양'입니다. 찬양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 그리고 이스라엘 구속사의 핵심에 위치해 있는 아름다운 이름이 유다였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과 구약의 중간 시대에 헬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민족을 구출하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독립투사 가운데 '유다 마카비우스' 가족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투쟁이 독립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유다 마카비우스'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굉장히 존경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때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길 판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어 나라를 구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 것처럼, 또 일제시대 때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한국의 잔다르크' 류관순 열사를 존경하는 것처럼, 아니 그들은 우리가 이순신 장군이나 류관순 열사를 존경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다 마카비우스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많은 부모들이 유다 마카비우스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자녀들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많이 지어주었습니다.
아마도 가롯 유다의 부모들도 자기들의 사랑하는 아들이 일평생 하나님을 찬양하며 유다 마카비우스처럼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이런 부모님의 간절한 바램을 저버리고, 가장 아름다운 이름 가운데 하나인 '유다'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가롯 유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름을 듣기조차 싫어합니다. 가롯 유다는 '배신자'를 대표하는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고트발트(Norman Gottwald)라는 신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언제든지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롯 유가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듣기에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분명한 것은 가롯 유다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함으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가롯 유다처럼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면 가롯 유다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가롯 유다가 버리지 못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가롯 유다가 버리지 못한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심으로 가롯 유다와 같은 실패한 인생을 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축복을 받아 누리는 복된 생애를 사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면 가롯 유다로 하여금 실패한 인생이 되도록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을 버리지 못해서 가롯 유다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까?
첫 번째로 가롯 유다는 탐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로 출발했을 때만 해도 그는 정직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서 가장 유능한 사람이 가롯 유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능한 사람이, 가장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그 가롯 유다가 탐심을 버리지 못해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서 가롯 유다가 돈주머니를 맡은 회계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회계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가롯 유다가 아닌 마태입니다. 마태는 세리 출신이기 때문에 돈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전문가였습니다. 그런데도 가롯 유다가 돈주머니를 맡았다는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재정을 관리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3년 동안 돈주머니를 맡으면서 가롯 유다의 마음 속에 탐욕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회계역할을 맡았는데, 돈을 맡으면서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유다가 돈에 대한 욕심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바로 전이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유월절 엿새 전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엿새 전에'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커다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잔치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잔치였습니다. 얼마 전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남동생인 나사로를 죽은 지 4일만에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는데, 그 때에는 예수님께 감사하다는 말도 건넬 수가 없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렸다는 소문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들려지자, 그들은 곧 예수님 죽이기 위해서 체포 명령을 내렸고, 예수님은 급히 빈들로 몸을 피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난 후에 유월절이 가까워오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도중에 나사로의 집에 들리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집에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으니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래서 큰 잔치를 열었던 것입니다.
한참 잔치가 벌어지고 있을 때에 언니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는 자기의 머리털로 그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당시 여인들은 결혼 자금으로 향유를 모았습니다. 은행제도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돈을 모아둘 곳이 없어서 향유를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결혼할 때에 그 향유를 팔아서 결혼자금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도 제법 많이 모아두었습니다. 최소한 300데나리온 어치는 되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라면 노동자가 300일 동안 일해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1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2-3000만원 어치는 될 것입니다. 그렇게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동생을 살려주신 것이 너무너무 감사해서 돈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주님의 발에 부어드린 것입니다.
온 방에는 향유냄새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마리아의 그런 아름다운 마음과 방안에 가득한 향유냄새로 인해서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바로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는 마리아를 보면서 이렇게 책망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왜 이 비싼 향유를 그렇게 허비하느냐? 이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왜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느냐?' 지금 그렇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라." 가롯 유다는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누군가가 예수님께 돈을 갖다 주면, 돈주머니를 맡고 있던 가룟 유다가 그 돈을 뒤로 빼돌렸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가 주님 발에 부어서 허비하고 있는 300데나리온 어치의 향유가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것을 허비하지 않고 예수님께 헌금이라고 드렸다면 그건 전부 내껀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러고서야 어찌 주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믿고 맡겨주셨으면 정직하고 책임감 있게 직분을 감당해야지,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이용해서 자기의 호주머니나 채우려고 하는 그 마음으로 어떻게 제자가 될 수 있습니까?
물론 돈을 맡다 보면 욕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돈을 보면 욕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욕심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하지요. 욕심이 난다고 욕심대로 행동하고 욕심에 이끌려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만일 가롯 유다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욕심이 생겼을 때 빨리 정신을 차리고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욕심을 잠재워야지요. 만일 욕심을 이길 자신이 없다면 돈주머니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지요. 자기만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세리였던 마태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그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롯 유다는 그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탐욕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탐욕의 노예가 된 가롯 유다는 결국 스승인 예수님까지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가롯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당시 은 30은 노예의 값이었습니다. 여자 노예는 은 15개였고, 남자 노예는 은 30개에 살 수 있었습니다.
탐욕에 노예가 된 가롯 유다는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닌 자기의 스승을 노예의 값으로 팔아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여러분, 탐욕에 눈이 멀면 돈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보일 뿐입니다. 돈이 인생의 주인이 되면 그 사람은 인생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보지 못합니다. 돈이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돈보다 가족의 사랑의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돈에 눈이 머니까,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고 부부가 이혼을 합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쫓겨나 돈을 벌어오지 않는다고 아내가 도망치기도 합니다. 심지어 남편을 거리로 내쫓은 일도 많았습니다. 지난날 우리나라가 IMF를 겪으면서 그런 일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가정은 그 돈으로 살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돈보다 신용이 더 중요합니다. 우정이 더 중요하고 인간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탐욕이 눈을 가리우니까 이웃도 보이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수십 년 간 쌓아온 신뢰관계가 하루 아침에 깨어지고 맙니다. 돈 때문에 피를 나눈 형제도 원수가 됩니다.
돈보다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돈과 하나님을 어찌 바꿔치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돈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이고 뭐고 돈 앞에서 꼼짝하지 못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물론 돈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돈을 제일로 아는 탐욕과 욕심이 문제입니다. 탐욕이 없이 돈을 대한다면 돈은 얼마든지 선한 일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생활이 어려운 학생에게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는 그런 돈이라면, 그 돈으로 한 사람을 훌륭한 인물로 키울 수도 있습니다.
돈은 잘 쓰면 우리 자신에게와 하나님 나라에 아주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러나 잘못 쓰면 돈처럼 악한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돈을 대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돈에 욕심을 부리고 탐욕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격도 파괴됩니다. 신앙도 포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롯 유다처럼 실패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꼭 탐욕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의지로 버릴 수 없을 때에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버릴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롯 유다와 같은 실패한 인생, 가장 수치스러운 인생을 살지 않고, 내게 주신 재물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가롯 유다는 자기의 야망을 버리지 못해서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에 가롯 유다의 마음에는 커다란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런 야망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를 빼고는 모두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남쪽 유다지역 출신입니다. 당시 남쪽 유다 지역과 북쪽 갈릴리 지역은 '하늘과 땅'으로 구별할 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북쪽 갈릴리에서 살고 있는 나다나엘 조차도 북쪽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어찌 훌륭한 사람이 나올 수 있느냐고 말할 정도로 북쪽 갈릴리는 남쪽 사람들에게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서울의 강남과 강북의 차이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지역 차별이 이스라엘의 유다 지역과 갈릴리 지역의 갈등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서울의 강남과 강북의 차이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모르시지요? 저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서울에 가서 예전에 함께 교회를 섬겼던 목사님 몇 분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분 가운데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남에 있는 한 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하고 있을 때, 평일에 청년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약속 장소를 정하는데, 강남의 압구정동이나 신사동 같은 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강북에 있는 어떤 곳에서 만나기로 하면, 강남에 사는 청년들은 꼭 공동묘지에서 만나기로 한 것처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서울인데도 강남에 사는 청년들은 강북에 가는 것을 마치 저 아프리카 어느 후진국으로 유배되어는 가는 것마냥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매스컴에서 '강남 강남'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도 그런 지역차별이 있었습니다. 남쪽 유다와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그런 지역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쪽 지방 출신인 가롯 유다가 북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수님을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야망을 품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남쪽 지방에 가셔서 제자를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가롯 유다는 제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야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의 야망은 예수님께서 메시야가 되셔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고, 이스라엘 안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우신다면 당연히 자신도 큰 자리 하나쯤은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다른 제자들보다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남쪽 출신이기 때문에 지역적 문화적 배경이 좋습니다. 갈릴리 촌놈들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배우지 못해서 무식한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배울 만큼 배운 사람입니다. 또 예수님으로부터 능력도 인정받았고 신임도 얻었습니다. 그래서 재정전문가인 마태를 제치고 자신이 돈주머니를 관리하는 직임을 맡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께서 정권을 잡으시면 가장 먼저 예수님께 발탁될 사람은 자신이었습니다. 그런 야망을 가지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런 야망이 있었기 때문에 힘들고 외로워도 3년을 참았습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진 않지만, 가롯 유다는 상당히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다른 제자들은 모두 북쪽 갈릴리 출신인데 자기만 비갈릴리인 남쪽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심한 지방색 때문에 오는 갈등과 소외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갈등과 소외감도 참아냈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겠다는 꿈 때문입니다.
그런데 3년 동안 따라다녀 본 결과 이 예수님을 통해서는 더 이상 자신의 야망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꿈꾸는 그런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능력을 보면 분명 예수님께서는 메시야가 될 능력이 있으신데도, 예수님은 굳이 그런 길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자기의 야망을 충족시켜줄 어떤 비젼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종교 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실 뿐입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롯 유다의 마음은 철렁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내가 바라던 것은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가져보았습니다.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되실 것이란 기대를 해 볼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 굴복하는 힘없는 헤롯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만들어 낼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주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과 말씀들을 종합해 볼 때 역시 자신의 야망을 이룰 수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영특한 자신의 머리로 세상 돌아가는 상황과 예수님의 말씀들을 종합해서 판단해볼 때, 예수님 편에 서는 것보다 세상 권력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 있다가는 자신의 생명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기 살 길을 찾기로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우리 안에 어떤 야망이 있습니까? 꿈과 야망을 갖는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교회에 갖고 계시는 비젼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야망을 빨리 버려야 합니다. 혹 지금 가지고 있는 내 꿈과 야망이 신앙적이기 않고 세상적인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것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뜻과 배치되는 나의 야망이 포기되지 않으면, 그 자리가 주님을 배신하고 버리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내 야망을 이루겠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신앙을 통해서 내 야망을 이루겠다는 생각도 버려야 하고, 기도가 내 야망을 이루어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빨리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꿈은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야망은 교회를 통해 이루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는 거룩한 야망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바라기는 우리 모든 믿음의 식구들은 가롯 유다처럼 탐욕과 야망을 버리지 못해 실패한 인생을 답습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가심으로 주님께 칭찬 받는 아름답고 복된 생애를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감동 창조의 삶
요 12:1-3 / 이정익 목사
새해 첫 주일 아침입니다. 새해에는 새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기도와 새 꿈들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새해에는 오늘 읽은 말씀으로 한해의 삶의 지침으로 삼고 신앙의 기초로 삼고자 합니다. 본문은 읽을 때마다 감동을 주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읽으면 진정한 헌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마르다의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주목할 내용이 있습니다. 이 주목할 내용들이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 할 내용들입니다.
예수님이 내 집에 오신 은혜
예루살렘 근교에 베다니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그 집에는 마르다 나사로 마리아 3남매가 살고 있습니다. 그 집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집은 예수님이 오고 가시며 부담 없이 쉬어가시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도 이 집을 방문하셨던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집은 참 복을 받는 가정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가정, 이 정도면 가장 이상적인 가정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이 삶이 최대의 영광의 삶입니다. 주님이 찾아오시는 가정, 우리들이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입니까. 이것이 최상의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한 해 동안 주님이 함께 하시고 찾아오시는 그런 가정의 삶이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가정은 집이 좋아야 반드시 좋은 가정은 아닙니다. 집이 커야 좋은 가정도 아닙니다. 집은 초막이든 궁궐이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그 집에 주님이 오시고 임재하시고 찾아오시는 가정이라야 복된 가정입니다. 그래서 가정에는 경건이 있고 성스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오시고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도 주님이 함께 하시고 임재하실 수 있는 그런 가정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향유를 부음
그 집에 주님이 오셔서 함께하고 감사하고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때 성경을 보면 마리아가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 기름을 붓는 일이 의미가 큽니다. 당시에는 왕의 대관식 때 그리고 제사장이 임직식 때에 기름이 부어졌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성령이 임하시는 모습을 기름이 부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었을 때 시체가 썩지 않도록 방부제로 향유 기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여기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당시 왕에게, 제사장에게 붓는 그런 심정으로 부었을 것입니다. 시편133편을 보면 “기름이 아론의 수염에 흘러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 모습이 가장 성스럽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상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모습은 가장 복되고 성스럽고 가장 극적인 헌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쏟아 한꺼번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아주 만족해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의 전적인 헌신의 마음과 생각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이 전적인 헌신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헌신하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여인이 그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기다렸고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고 있었겠습니까. 새해는 우리들이 이렇게 진솔하게 주님께 마음과 정신과 뜻을 쏟아 붓는 헌신이 있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 성경을 조용히 음미해 보면 아주 신기한 모습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 여인이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향유가 든 옥합은 쏟아 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옥합은 거꾸로 들어도 향유가 쏟아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향유든 향수든 고가의 향품은 병의 몸통은 크지만 병 입구는 작습니다. 그래서 내용물이 잘 쏟아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보면 향유병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송두리째 부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향유를 머리로 닦아냈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향유병을 깨부수었다는 말은 자신을 깨부수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행동을 보면 그 여인이 향유를 쏟아 붓는데 조금도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향유 값이 얼마입니까. 그 향유 값만도 300데나리온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300데나리온이면 노동자의 일 년 품삯입니다. 오늘 돈으로 환산하면 수천만 원 상당입니다. 그 고가품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 깨서 쏟아 부었다는 것은 전혀 아낌이나 주저함 없이 쏟아 부었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하는 데는 때로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감동을 창조할 때는 이런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큰 헌금을 해야 할 때는 이런 망설임이 따르게 되는데 그때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새해에는 마음을 흔쾌하게 송두리째 쏟아 붓는 신앙생활을 한번 해 보십시다. 헌신도 주저하지 말고 100% 마음을 흔쾌하게 쏟아서 헌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맡은 일을 위해서도 마지못해 하느라고 피곤해 하지 말고 아주 흔쾌하게 일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11조 생활도 아주 흔쾌한 마음으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봉헌의 삶은 주저하고 미적거리면 그 의미가 반감됩니다. 헌신도 봉헌도 11조도 아주 흔쾌하게 해 보십시오. 그리고 한 해 동안 나의 삶에, 나의 신앙에, 나의 진로에, 나의 영적생활이 어떻게 변화하고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한번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틀림없이 나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주어질 것입니다. 무엇인가 씨를 심어놓고 이것이 어떻게 자라는가, 어떤 꽃이 피고 어떤 열매가 맺힐 것인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생활도 행복한 삶입니다. 악을 심어놓고 어떤 결과가 주어질 것인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지만 선을 심어놓고 어떤 선의 열매가 맺힐 것인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록펠러라는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평범한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록펠러를 어려서부터 시장에 데리고 다니며 시장의 원리를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려서부터 근검절약하는 삶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록펠러가 6살 때 어머니가 용돈으로 처음 20센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2센트를 떼어 11조를 드리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록펠러는 평생 11조를 드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록펠러 를 11조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록펠러가 후에 미국의 석유 95%를 점유하는 사업가로 성공해서 오늘의 부자 빌 게이츠보다 3배나 더 많은 인류 역사 이래 가장 많이 돈을 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에 사업이 커지면서 11조만 담당하는 직원이 4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24개 대학을 설립하고 4,928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런 삶의 열매들은 어느 날 우연하게 만들어지고 우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 않고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배후를 들추어 보면 한결같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록펠러의 성공 뒤에는 그런 사연이 들어 있습니다.
새해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흔쾌하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회사에서도 그렇게 흡족한 마음으로 일을 해 보십시오. 사업도 그렇게 최선을 다 하는 심정으로 한번 일해 보십시오. 그리고 신앙생활도 그렇게 한번 해 보십시오. 11조의 삶도 주저하지 말고 아주 흔쾌하게 한번 해 보십시오. 그리고 한해를 다 보내고 지나온 한해를 면밀하게 한번 결산해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거기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해를 살아갈 때 값비싼 향유를 송두리째 병을 깨서 예수의 발에 붓는 이 여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진정한 헌신, 진정한 봉헌, 진정한 수고의 삶에는 이런 행복이 주어집니다.
향유 냄새
본문을 보면 마리아가 향유 병을 깨서 예수님의 발에 부으니 “방에 향기가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향유 병을 송두리째 깨서 부었으니 방에 그 향기가 얼마나 진동했겠습니까. 그날 온방에 향기뿐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도 향기가 만발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향기 나는 삶입니다. 향기는 나를 깰 때 나타납니다. 나를 부술 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향기는 버려야 풍깁니다. 뿌려야 나타납니다. 쏟아야 나타나고 깨야 나타납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도 병속에 그냥 놔두면 향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출이 없고 희생이 없고 헌신이 없으면 향기도 없습니다. 이 여인이 향유 병을 깨부숴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으니 그 방에 향기가 얼마나 강하게 나타났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 지식이 사용되지 않고 내 속에 그대로 감추어 있으면 아무 향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게 아무리 좋은 재능이 있어도 나만을 위해서 사용되고 내안에만 감추어 있으면 그 좋은 재능도 아무런 향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향유 병을 깨부수어서 쏟아 부을 때 온방에 향기가 퍼졌습니다. 신앙생활은 나를 송두리째 깨부숴서 드리는 삶입니다. 그것이 헌신이고 순종이고 드리는 삶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자신을 아주 부수는 심정으로 뜨겁게 헌신의 삶을 한번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세상에 이런 진한 향기를 충만하게 뿜어내는 삶을 살아보려고 힘써 보십시오. 이것이 감동을 창조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한해를 살고 년말 쯤 되어서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고 나의 삶에 어떤 열매들이 열렸는가를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에 참 소중한 변화와 열매들이 열린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족해하시는 예수
성경을 보면 이 여인이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발에 부을 때 가룟 유다가 왜 값비싼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허비하느냐 하고 비난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유다는 참 당돌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 면전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자기가 언제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습니까.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항상 이런 이유를 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자기는 하지도 않으면서 남들이 하는 일을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 가룟유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예수님은 아주 만족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유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를 가만히 두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그 여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유다에게 핀잔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그 여인의 행동을 보고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서 상당히 기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면 됩니다.
또 12절을 보면 “그가 나의 장례를 준비하였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여인의 헌신이 단순한 헌신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견하고 미리 죽음을 예비한 헌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이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마리아가 그날 예수님이 며칠 있으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알고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날 마리아의 옥합을 깨트리는 일이 결국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장례를 위한 행동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마리아의 행동이 얼마나 기념비적인 행동입니까. 제자들 특히 가룟 유다는 왜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않고 허비하느냐 하고 딴죽을 걸었지만 마리아는 적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견하고 절호의 기회에 예수님께 봉헌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흔쾌하게 헌신하다 보니까 그 헌신이 단순한 헌신이 아니고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결과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는 죽은 시체를 미라를 만들어 굴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체가 부패하지 않도록 몰약도 넣었고 방부제로 이 향유를 넣었습니다. 이 여인이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다 보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예비하고 준비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복입니다.
우리의 헌신, 봉헌, 예배, 수고는 모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할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감동도 줄 수도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 모처럼 시름을 잊고 마음껏 기뻐하게 하는 헌신을 하였습니다. 새해에는 이런 헌신의 삶으로 여러분 자신이 행복하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이 세상에 감동을 주는 그런 삶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명예로움
인생에서는 이 명예라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이 여인의 행동은 2천 년 전에 있었던 행동인데 오늘 우리들에게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도 성경을 통해서 말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영광입니다. 사람은 명예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일생이고 명예이고 인격입니다. 사람은 죽어도 행한 일은 오래 남습니다. 이 여인은 2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그의 헌신의 내용이 오늘까지 전파되고 있습니다.
새해에 무슨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아무리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 해도 헌신이 없고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계획이 없으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새해 여러분의 계획 속에는 헌신의 계획으로 가득 차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계획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기원합니다. 그때 우리 주님이 그 꿈을 이루시고 그 계획을 소중하게 이루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감동 창조를 우리 생활 속에서, 가정 안에서, 일터에서, 교회 안에서, 동네에서, 직장에서 충만하게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작가 정채봉이 쓴 “첫 마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시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일과표를 짜던 그 마음으로 공부한다면, 사랑하는 친구가 처음 눈이 마주치던 날의 그 떨림으로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손님을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를 다닌다면, 너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는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그 때가 언제이든 늘 새로운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질 것입니다.” 한해를 이런 새로운 마음으로 감동을 창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