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스바 2,3-3,13; 1코린 1,26-31; 마태 5,1-12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2023.1.29.; 이기우 신부
먼저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의 흐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스바니아 예언서의 말씀은 바빌론 유배 전후의 상황과 직결되어 있는데, 준엄한 하느님의 심판을 예언하고자 스바니아 예언자는 하느님을 섬기던 ‘이 땅의 겸손한 이들’에게 의로움을 찾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들은 ‘아나빔(anawim)’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아나빔들에게 요청한 의로움이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남은 자들’이란 바빌론 유배 시절에 앗시리아 군대가 왕과 신하들과 엘리트들은 모조리 학살해 버리고 자신들이 부려 먹을 만한 지식과 기술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로 끌고 갔지만, 그만한 지식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하던 더 가난한 이들을 남겨 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이들을 ‘암헤레츠(amharetz)’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섬기는 아나빔들이 겸손함과 의로움으로 더 가난했던 암하레츠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게 되면,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평온하게 살아가리라고 스바니야는 예언했던 것입니다.
또한 제2독서인 코린토 1서는, 부유하고 번창하던 고대 코린토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사도 바오로가 복음을 전했던 우선적인 대상은 교육 수준이 높지 않고 사회적 지위도 평범했던 가난한 이들이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스바니아 예언자가 권고했던 바에 따라서 코린토에서 만난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인데 사실 그의 이런 선교 사도직 활동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복음을 듣던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리라고 선언하셨던 아나빔, 즉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되도록 하셨던 모범을 계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나빔들이 자신들보다 더 가난하고, 또 가난해서 병고에 시달리고 정신적 장애까지도 지니기 일쑤였던 빈곤한 암하레츠들에게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복음을 선포하라고 요청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두 가지 부류의 가난한 이들, 즉 ‘마음이 가난한 이들’과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이 차지할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들이 스바니아 예언자 시절 구약시대에 살았던 ‘아나빔’과 ‘암하레츠’와 사회경제적으로 정확하게 대치됩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된 스바니아 예언서와 후속 실천을 알려준 코린토 전서와 함께 오늘 미사의 복음인 산상설교의 진복팔단을 이해하기 위해서 참고해야 할 상황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 마주치셨던 매우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복음서들이 보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정신적 장애가 아주 심한 경우에는 마귀까지 들려버린 경우도 보도에 나옵니다. 이러한 병고에 시달리고 장애로 고통받는 이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프거나 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일을 할 수 없어서 가난할 수밖에 없었거니와 또 그와 반대로 가난하기 때문에 쉽게 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 가난한 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백성들 위에서 정신적으로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바리사이들이었는데,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병들거나 마귀에 들린 이유는 그들 자신이나 또는 조상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하느님께로부터 벌을 받은 까닭이라고 간주했습니다. 따라서 질병도 장애도 모두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받은 벌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죄인으로 낙인찍혀서 더욱 정신적으로 주눅이 들었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채로 살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로 예루살렘에 살던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많이 배운 지식인들이었고 직업에 있어서도 기술자들이나 상공업자들이 많았으며 농부들보다 상대적으로 재산을 모을 기회가 많았으므로 갈릴래아의 비옥한 토지를 사서 소작을 주는 부재지주들이 많았습니다. 이렇듯 부유한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복음서에 언급된 사례들은 대표적으로 두 부류가 있습니다.
우선 부유한 부자 청년을 들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왔다는 이 젊은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나서 따르라.”(마르 10,21)는 말씀을 듣고는 실망하여 떠난 경우입니다.
그 다음에는 라자로와 함께 등장하는 부자를 들 수 있습니다(루카 16,19-31). 사치스럽고 부유한 생활을 즐기면서도 자신의 집 앞에서 구걸하던 가난한 라자로에게는 인색하게 눈감았던 그 부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준엄한 비유로 경고하셨는데, 바로 그 대목은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루카 16,14)에 대해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루카 21,1-4)을 칭찬하시는 대목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도 헌금을 많이 하는 부자들로 소개되었습니다.
이러한 부유한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날이 선 어조로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어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이고”,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으며”,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면서”,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는” 그들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당대에 의로움을 외치는 이들을 박해하여 또 다른 무덤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마태 23장).
이것이 예수님께서 마주하셨던 역설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던 부유한 소수 바리사이들이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가난한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있으면서 자신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치유와 구마의 기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니까, 헤로데 당원들과 야합하여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려 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예수님께서도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는데, 이들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질병을 앓고 있거나 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집은 물론 직업도 영위하고 있었고 가족들도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 주위에는 아프거나 장애를 지닌 가난한 이들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비슷하게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는 그러나 부유하지는 않은 이들도 많이 모여 들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너희의 것”(마태 5,3)이라는 말씀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루카 6,20)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전자의 가난한 이들이 구약시대의 아나빔 같이 ‘마음이 가난한 이들’로 불리었다면 후자의 가난한 이들은 암하레츠처럼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부유했지만 겸손함과 의로움을 잊어버린 바리사이들을 본받지 말고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청을 받고 있는 우리가 서구적 가치와 부유함을 추구하는 중산층 의식에만 머물고 있다면 우리가 추구하려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 백인들이 선진적 가치로 내세우는 것들은 다섯 가지 형용사로 간추려집니다. 첫째로 서구적이며, 둘째로 교육 수준이 높고, 셋째 산업화의 혜택을 누리며, 넷째 부유하고, 다섯째 민주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영어 철자의 약자를 붙여서 WEIRD(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Domocratic)라고 합니다. 지구촌 문명을 주도해 온 이들의 도구 내지 무기는 지식과 기술, 부와 민주주의라는 것인데, 이를 종합하여 지구상 선진국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서구적 가치의 대명사를 그들은 개신교 신앙으로 손꼽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자신들이 내세우는 그리스도 신앙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신론적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 역사에서도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회적 진화론을 부지불식간에 신봉해 왔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들의 이익과 패권을 추구해 왔던 것인데 자신들이 주도했던 서구 물질문명으로는 인류 평화가 언제나 달성될지 요원하고 지구의 기후위기는 엄습하고 있는 가운데 스스로 한계에 이르렀음을 깨달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더구나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식민지배를 해 보지도 않았던 대한민국이 자신들처럼 선진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에 있어서는 자신들도 해 보지 못한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최근의 한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착잡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당황스런 시선으로부터 2천 년 전 예수님 시절의 바리사이들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던 ‘바리사이들의 누룩’(마르 8,15)이란 나누지 않는 부와 재산이었고, 이와 함께 경고하셨던 ‘헤로데의 누룩’이란 겸손함과 의로움 대신에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며 착취하는 폭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셨던 바는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마태 6,24)는 것과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되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것’(마르 12,30)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암하레츠와 같이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우리가 아나빔과 같이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복음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누룩을 합친 듯 처신해 온 WEIRD 집단의 누룩도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약속하셨던 참된 행복을 차지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의롭고 겸손한 아나빔처럼 암하레츠를 향한 시선을 놓지 말아야겠습니다. 개신교 국가가 부유하지 않느냐는 개신교도들의 말들 속에서 풍족하였지만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했던 바리사이들의 모습도 떠올려 봅니다.
w-e-i-r-d을 붙이면 ‘이상한’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weird가 됩니다. WEIRD 집단 역시 그렇습니다.
@이기우 그렇네요. 물질적 풍요만을 구원의 모든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느낍니다.
연중4주일이며 해외원조주일인 오늘
새벽미사의 복음 강론은
피정할 때의 강론을 넘가하는 의미 있는 강론 이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PPT영상으로 그림까지 첨부해서 강론해 주시는 신부님의 명강론!!!
강론을 들으면서
주님께 이 시간을 배려 해 주심에 깊이 감사 드렸습니다.
스바니아1독서와
고린토1서의 2독서와
복음과 절충하여 가난한이들에대한 복음
아나빔과 암하레츠 즉 겸손과 의로움으로 더 가난했던자들을
떠올리며
신앙인으로서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서구의 문명이 가져온 5가지키워드인 WEIRD도 결국 지구의 온난화와 위기상황에서 잘못됨을 판명함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음도 생활안에서 절실히 깨닫고 있답니다.
오래전에 터기에 있는 에페소골짜기 성모님께서 요한과 함께사시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검소하고 소박하고 사신 흔적을 보고 삶의 방향을 바꾸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상기됩니다.
교회안에서도
바리사이같은 모습은 아닌지 깊이 성찰하며
아나빕과 암하레츠의 삶을 살도록 간청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바리사이즘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일은 예수님의 처신을 본받는 일과 통합니다. 그 당시 바리사이들은 대중으로부터 존경받던 인사들이었습니다. WEIRD 집단의 가치를 부러워해서 안달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도 많듯이 말이지요. 그 집단에서 최고로 치는 'Ivy League' 즉 미국 일류 대학들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Harvard 대학은 본시 미국에 정착한 유다인들이 랍비를 지망하려는 젊은이들이 무식하지 않도록 설립한 현대판 율법 학교입니다. Prinston, Yale, M.I.T. 대학도 마찬가지들입니다. 그들 집단의 내재된 합의 이데올로기는 백인의 주도권, 개신교의 번영, 이익과 패권의 유지에 예외가 없습니다. 그들이 주도하는 미국 백인사회의 주류가 한반도를 140여 년 동안 지배하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마치 조선 총독부가 패망하여 도망가면서도 조선인들 속에 친일파를 심어 놓았으니 조선인들은 향후 백 년 동안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던 마지막 총독의 장담처럼, 이 WEIRD 집단 역시 한국인들 속에 자신들의 가치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학위와 명예를 주어서 한국 내 여론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바리사이의 누룩입니다.
그래서도 우리가 예수님의 신성을 제대로 알아보고 배워야 합니다. 이 땅의 천주교 선각자들이 오묘한 섭리로 그 신성을 깨닫고 목숨 바쳐 교회를 세운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 선비들이나 민중 출신의 신자들이 참으로 오랜 만에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하느님의 선하신 섭리에 이끌려 문명과 문화를 세웠었음을 천주교 교리에 반영해 놓은 일도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지요. 이러한 민족의 정통성과 교회의 주체성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WEIRD 집단이 내세우는 서구적 가치가 보여주는 위선의 백미는 자신들이 식민지로 침탈하여 마구 자원을 착취하거나 노예로 팔아먹었던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의 자치권을 무시한 나머지 국경선을 함부로 그어 놓는 바람에 내전이 잦아지고 난민이 발생하면, 그 난민을 적으로 간주하듯이 외면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 2000년에 대희년을 맞이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지난 세기들에 식민모국이었던 유럽 여러 나라들이 옛 식민지였던 아프리카를 비롯한 가난한 나라들에 과도하게 빌려준 외채의 이자가 원금보다 더 늘어나서 만성적인 빈곤의 원인이 된 상황에서 '외채 탕감'을 호소하셨으나, 어느 한 나라도 이에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또 지난 3년 간 전 인류를 괴롭힌 코로나 펜데믹 위기에서도 지구촌 어느 한 곳에서도 코로나가 없어지지 않는 한 누구도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에게 백신을 나누어주자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서도 그들은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의로움은 물론 겸손함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리더십을 존경하기 어려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