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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和會(종교간 화합을 위한 모임) 會報
푸른 들 소리 [제 13권 20호](통권 235호)(2011년 12월 1일)
“無友不如己者 (무우불여기자)”
--- 코리아에서 온 천사 이야기 ---
장기홍
내가 죽더라도 민족이 살아 있으면 그 속에 내가 산다. 이와 같이 사람은 소속이 문제가 된다. 특히 여성은 소속에 민감하다. 어느 집안의 주부가 되고 어느 가정의 어머니가 되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사회봉사에 힘쓰시는 강 모 여사의 대담을 들었다. 52세 미혼인 그녀는 형제 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는데 자기는 아직도 부모 아래 있으면서 걱정을 끼치고 있어 불효라고 말했다.
실은 그의 소속은 어느 봉사단체이고 그 회원으로서 국내 국외에서 오래 봉사활동을 해왔다. 소록도에 가서 나병환자와도 오래 지났고, 에디오피아 말을 공부하여 거기 가서는 에이즈환자들을 돌보았다. 귀국해서는 재소자들을 돌보는 일에 종사하다가 이제 네팔 말을 배워가지고 네팔로 떠난다고 한다.
라디오 대담이어서 직접 얼굴을 볼 수는 없었으나 그녀는 시종 행복의 웃음을 지으면서 대담을 했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선행을 하는 것이 그리도 행복하다는 뜻이다. 네팔, 에디오피아 같은 낯선 나라 말을 곧 잘 하는데, 이미도 기쁜 마음으로 어학을 하면 능률이 나는가 보다. 그녀는 종교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여인들은 자기를 ‘천사’라 불렀다 한다. 옛날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천사노릇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한국의 노처녀가 우리만 못한 나라에 가서 천사 노릇을 한다. 인도에서 일했던 테레사 수녀는 가톨릭 교회를 배경으로 파견되어 예수의 사랑을 실천했는데 강여사는 무조건 봉사생활이 좋고 기뻐서 하는 것 같다. 테레사 수녀보다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싶었다.
나는 대담을 들으며 ‘사람은 천차만별이다’ ‘심성은 저렇게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강여사 같은 분은 선(善)의 화신으로 태어난 것 같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를 성녀(聖女)리 부르겠다. 악이 넘치는 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 준 그 대담이 고마웠다.
나는 엊그제 우리 목요 모임 때 논어에 있는 공자의 말씀 “무(無)우(友)불(不)여(如)기(己)자(者)”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 말은 보통은 “자기만 못하면 친구를 사귀지 말라”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자기 몸 같이 여기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번역했다. 공자 쯤 되면 “이웃을 자기 같이 여기라”고 가르치셨을 것 같다. 예수는 사랑에 관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가르쳤다. 예수나 공자가 대등한 위인이라 생각할 때, 위의 공자 말씀은 “친구를 자기 몸 같이 여기라”라는 뜻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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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여사 같은 사람은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여기는 사람이다. 대담자가 “강성생은 그러다가 에이즈에 걸리면 어떻하느냐”고 물었다. “ 죽는 거지요 뭐!”하고 대답했다. 대담자가 “죽어서 되느냐? 살아서 봉사활동을 많아 해야지요!” 하니까 “에이즈는 감염 경로가 빤하기 때문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옛날에는 서양 선교사가 소록도에 와서 문둥병자와 함께 기거하면 돌보아주었는데 지금은 한국의 국력이 외국으로 뻗친다.
나는 강여사 같은 타고난 사람의 존재가 신기하게 느껴진다. 사람은 모두 이기적으로 태어나는데 별종이 있다니! 그녀를 통한 선(善)의 신비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과학자나 철학자로서의 나의 감상법이다.
다시 생각한다. 어떻게 그녀는 선 쪽으로 개발이 되었고 개조가 되었을까? 신통하고도 신비스러운 일이다. 알 수 없는 것이 이 세계요 인간이요 생명의 세계이다.
그런 착한 여자는 아이를 많이 낳아 지구상에 선이 넘치도록 시집을 보내야 하리라고도 생각해본다. 그러나 반대로 그녀 같은 사람은 독신이게 마련이니 선의 씨가 마를 것도 같다. 그러나 선은 면면히 이어진다. 그런 것이 다 신비스러운 일이다.
위안부 문제의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강병조
20여 년 전 일본종군위안부 몇 사람을 대구 자택 아파트에서 면담한 일이 있다. 필자의 영어 선생님이신 허규병 선생님께서 위안부문제를 영어 소설로 쓰기 위하여 필자와 함께 갔던 것이다. 면담 내용은 영어 소설로 나오지는 못 했으나, 위안부문제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는 그 때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이팔청춘 한국 어린 처녀들을 공장에 취직시켜 돈 벌게 해준다고 속여서 대리고 갔다. 그 후의 스토리는 우리들이 들어서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문제는 해방이 되고 이들이 고향으로, 집으로, 부모를 찾아 돌아왔을 때 발생하였다. 반가워서 부모님에게 큰 절을 올려도, 부모님은 차갑게 대하였다. “더러운 년, 화냥년, 매춘부 같은 년”하는 눈초리로 인사도 받지 않고 돌아앉았다.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꾹 참으며 집을 뛰쳐나왔다. 집 뒤 산에 올라가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는 조그마한 보따리를 다시 들고 정처 없이 걸었다.
식모살이, 음식 점 주방일, 농사 일 등 닥치는 대로 악착같이 하면서 목숨을 이어갔다. 과거를 숨기고 살 수 밖에 없었다. 과거를 이야기 하면 모두 이상한 눈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고국이 나를 버렸고, 부모 친척이 나를 버렸구나 생각하며 생존을 위해서 죽기 살기로 일했다. 결혼도 못하고 혼자 살다가 병만 얻었다.
세월이 흘러 나라가 좀 살게 되니, 어쩐 일인지 나라에서 수소문하여 아파트를 지어서 위안부들을 같이 살게 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정을 이해하는 몇 몇 뜻있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벗이 되어주고 우리들의 억울함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제일 바라는 것은 일본 나라로부터 배상금을 많이 받아내는 것이 아니다. 일본 나라로부터 위안부 제도를 만든 것을 사과 받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더러운 년, 화냥년, 매춘부 같은 년, 양깔보 같은 년”하는 주위의 시선이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었나. 못 살아서 부모 형제 호강 좀 시켜 줄려고, 심청이 같은 심정으로 돈 벌러 간 죄, 일본의 속내를 몰랐던 죄밖에 없다. 일본의 속내를 알았던 한국의 위정자가 있었다면 왜 우리들을 말리지 않았는가! 우리들은 역사의 희생물이다. 우리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것이 우리들이 제일 바라는 것이다.
위안부나 화냥년(환향녀, 還鄕女)은 개인의 잘 못은 없다. 위정자들이 정치를 잘못한 것이 문제였다. 조선조 말 대원군, 고종, 그리고 대신들이 정치를 잘했으면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겠는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면 왜 위안부가 생겼겠는가?
조선조 중기 인조 임금도 정치를 잘했으면 왜 병자호란(1636년)을 겪었겠는가? 병자호란이 없었으면 왜 화냥년이 생겼겠는가? 청의 대군에 밀린 조선군은 남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만에 항복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청군들은 철군하면서 상당히 많은 조선인들을 끌고 갔다. 대부분 부녀자들로서, 그 수가 무려 50만 명이나 되었다. 나라에 돈이 없어, 각 가정에서 돈을 주고 데려왔다. 이들 환향녀(還鄕女)들은 몸을 버려왔다고 멸시를 받았다. 또 돌아올 때 이미 임신을 한 경우가 많아, 거기서 낳은 자식을 호(胡)로 즉 오랑케 자식이라 하여 사회에서 냉대했다. 환향녀나 호로자식은 멸시의 대상이 아닌 국가의 피해자들 이었다. 임금은 도망가고, 남자들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결국 나약한 여성들만 끌려가서 청군들의 노리개가 되어 처참한 노예생활을 하다 돌아왔는데, 권력 있고 돈 있어 끌려가지 않았던 양반 귀족들은 그들을 괄시하고 멸시만 했지 보살펴 주질 않았다.
6.25 사변 후 못살던 시절, 가족을 먹여 살리고 동생을 교육시키려고 자기 희생의 정신으로, 외국 군인에게 몸을 팔았던 여자들을 우리들은 “양깔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남편은 나라를 위해 전쟁에 나가 전사를 하고, 애들은 밥 달라고 조르는데, 줄 밥은 없다. 가진 것이라곤 성한 몸밖에 없어 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그런 직업을 택한 여자들을 우리들은 “양깔보”라고 침을 밷았다. 친일파 후손들은 일제시대나 해방 후에도 잘 먹고 잘 살아 여자들이 몸을 팔 필요가 없었다.
역시 약 20여 년 전 외국을 여행하다가 재일교포 교수 한 분을 알게 되었다. 그 분과 이야기하다가 위안부 문제가 나왔다. 그 교수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은 한국을 침략했고 식민지배를 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조선이 원해서 잠시 다스려 주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일청구권 문제(김종필-오히라 메모)는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들에게 “이웃 한국이 못 사니 무상원조 3억불, 유상 원조 2억불의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는 것뿐이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배 하면서 한국민을 괴롭히고, 문화제를 약탈하고, 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게 하지 않아서, 거기에 대한 죄값으로 돈을 지불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교수는, 정식으로 침략에 대한 대가를 다시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의 2중 플레이에 속아서 김-오히라 메모를 <한일 청구권>으로 인식하여 일을 처리하고 있다. 일본이 국제 관계에서 맺은 <한일 청구권>을 인정해달라고 주장하려면 자국 국민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자국 국민을 속인 외교문서는 사기다. 자국 국민이 모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배 하였으며, 그 죄값으로 무상 3억불, 유상 2억불을 지불했구나”하는 사실을 알도록 하여야 한다.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니까, 일본 극우파들은 해괴 망칙한 주장을 하며 역사 왜곡의 교과서를 발행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하여 큰 소리 쳐야 한다. “대외적인 문서가 대내적인 문서와 다르면 그 문서는 효력이 없다”고
<한일기본 조약>은 1965년 6월 22일 조인되었다. 내용은 크게 4가지이다.
3. 경제 협력 협정: 이 협정은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이다. 이 협정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일본은 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2중적인 자세를 보였는데, 한국에 대해서는 이로서 전쟁전의 역사를 청산하는 배상금의 성격임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일본 대내적으로는 경제협력의 일환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일본은 정식적인 침략에 대한 사과와 배상 없이 청구권 문제를 종결하였다고 주장한다. 오늘 날 까지도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개인적 피해에 대한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어떠한가?
진상규명은 요구하되 일본측에 정부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 개인이 요구하는 배상문제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종군 위안부 문제가 심각한 한일갈등 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꺼리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3월 “위안부 피해자는 한국정부가 도울 것이며, 일본 정부에게 물질적 보상청구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2011년 8월 30일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날이다.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외교교섭이나 중재에 나서지 않는 것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헌법재판소가 내린 날이기 때문이다.
2011년 9월 15일, 일본군 성노예(종군위안부) 피해자 이용수(83)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외쳤다. “불쌍한 할매들 하나씩 아파서 죽을 때 정부는 뭐 하다가 인제 와서 일본하고 협의하나? 배상금은 다 죽고 나서 무덤에 줄 건가요.” “1992년부터 19년 동안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열었는데, 그 동안 정부는 뭘 했습니까? 기어이 재판을 하고서야 우리들의 마음을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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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 시 항 : 2011년 12월 모임
1木 모임 -- 2011년 12월 1일 (목) 19시
3木 모임 -- 2011년 12월 15일 (목) 19시
장소: 경북대학교병원 606병동 7층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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