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가 아름다운 이유
김균탁
자카르타의 아침
습도를 견디는 건 외국인들 뿐이었다
피부를 깜싼 습기가 익숙해
두건을 두르고 태평양을 건너고 싶었다
한국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적도의 아침이 익숙해질 때까지
잠들고 싶지 않았다
도마뱀의 꼬리처럼 능숙한 과거를
잊혀버린 과거로 바꿔 부르고 싶었다
바다에는 너무 많은 죽음이 살고
선산에는 더 많은 죽음이 숨을 쉬고 있었다
비행하는 아침
비행기를 타고 날지 못하는 새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나는 법을 잊어버렸다
추락은 시간 문제고 비행을 저지르던 습관이
바다 깊은 곳에서 헤엄칠 것 같았다
구름이 마치 파도처럼 일렁였고
구름 위에서 바다를 불렀다
가라앉은 과거가 떠올라 목을 조르는 꿈을 꾸었다
딱 일곱 시간의 비행이었지만
나의 비행은 더 길었다
자바의 아침
태평양에서 멀어지며 인도양이 가까워졌다
인도양에는 처음 흘린 눈물
첫은 언제나 황홀했지만
더 이상 겪을 첫은 남아있지 않았다
너를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나지 않아
처음 본 인도양에 침몰하고 싶었다
멀리서 이국적인 음악이 들렸다
경쾌한 리듬에 눈물이 흘렀다
울지 않는 새가 있다는 소문에
밀림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새에게 우는 법을 가르쳐 주고
서로의 발가락을 움켜쥐고
이 세상에 없는 울음을 울고 싶었다
울지 못한 아침들이 기억을 거슬러 마구 흘러내렸다
한국의 아침
적도에서 이루지 못한 잠들이 많아
하루종일 잠에 들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이 많아
이루어지지 않는 악몽을 꾸었다
행복해서 더 긴 악몽 속에는
늙은 아버지가 허리를 굽히고
튼실한 고구마를 뽑고 있었다
고지서처럼 쌓여 갚을 수 없을 만큼 흩어진 알뿌리로
눈물을 어루만져야만 했다
눈물이 묻은 만큼 흙이 떨어져 나갔지만
어린 아들처럼 울 수 없어
묵묵히 쌓여가는 빚을 빛처럼 눈에 넣었다
눈 부신 햇살이 적도의 건기처럼
안구 건조증을 내려놓고 세상을 떠났다
없는 아버지를 불러 엄마 곁에 앉혀두고
적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어느 사이 엄마도 없고
혼자 중얼거리는 법을 배웠다
다시 자카르타의 아침
적도는 정확한 시간을 두어 개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여러 개라 갚아야 할 빚이 적은 나라,
가난했지만 행복해 보였다
눈을 뜨면 지는 해처럼 다시 자카르타에서 깨어날 줄 알았다
잠들지 못한 꿈이 독사처럼 우글거려도
서서히 퍼지는 온기에 녹아내리고 싶었다
자카르타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고
침몰하고 있다는 풍문이 사실이 되어
자카르타 땅을 밟은 나는 낡은 어선의 선장이 되었다
만선을 꿈꾸던 늙은 아버지가 침몰한 흔적 위에
투명한 바다 같이 잠들고 싶었다
깨고 싶지 않은 꿈들이 너무 많아
자면서도 계속 울었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은 침몰하는 섬,
곧 사라질 자카르타와 함께
지겨운 이 별과 이별하고 싶었다
다시 자바의 아침
자바에 두고 온 여인이 있었다
히잡을 쓴 미혼모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통하지 않은 언어가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아들을 그녀 대신 꼭 안아주고 싶었다
더 나쁜 꿈을 꾸는 내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착한 여자를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바에 두고 온 마음이 적도의 우기처럼
울어버리기 전에 잊어야 할 여자,
긴 비가 오면 너의 소식이 궁금하다고
닿지 않을 편지를 빗방울 같이 보낼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편지를 짧지만 긴 호흡으로
오래 이어질 키스를 두고 왔다고
흩어져 부서진 문장을 낡은 전통처럼 다듬어 보낼 것이다
눈물이 번진 문장을 두어 개 실어 무거워진 편지를
자바의 아침처럼 날려 버릴 것이다
다시 한국의 아침
다시 한국의 아침이다
빌어먹을 아침,
두고 온 이별이 있어 무거운 아침이 안개 같이 핀다
그녀의 사연이 궁금하지만 참기로 한다
늙어버린 아침부터 쌓아놓은 빚을 갚으려 눈을 뜬다
한국에는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다
빛을 피해 음지를 수놓은 식물처럼
갚아도 가라앉지 않은 빚이 쏟아지는 빛보다 많다
아버지와 마주 앉아 아침을 먹고 싶어
아버지의 사진을 꺼낸다
소금기 가득 머문 숟가락 위로
햇살이 슬그머니 비친다
두고 온 그림자를 찾으려
다시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
그림자만 우기처럼 우는 아침,
길게 늘어진 새벽이 적도의 잎처럼 핀다
잎이 커서 입술에 닿고 싶은 것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가라앉는 적도의 수도와 함께 침몰하고 싶은
사랑이 하나 더 늘었다
말숙 씨 일대기
바다에 흘린 눈물은 보이지 않을 것 같아 팔십이 넘어서도 물질을 끊지 못한다는 말숙 씨는 그동안 삼킨 눈물이 성산포를 다 메우고도 파도처럼 흘러 넘실거릴 거라고 키보다 긴 한숨을 내쉬며 밥그릇에 담긴 막걸리를 약지로 휘휘 저어 마셨다. 어린 자식 뭍에 두고, 바다에 묻힌 남편 따라 바다 밑에 가라앉아 몇 번이나 죽을 때까지 숨을 참아보았지만, 또 모진 것이 목숨이라 눈앞에 어른거리는 젖먹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만 참아보자고 바닷속에 눈물을 담갔다. 모진 풍파에 욕설까지 비벼 저녁을 먹을 때면 아장아장 걷는 어린것의 재롱에 기쁨의 눈물도 흘렸지만, 삶이란 모난 것처럼 모서리가 닳아버린 밥상, 바다는 어른이 되지도 못한 어린 아들까지 구월의 태풍처럼 삼켜버렸다. 그날 이후 성산포에 흘린 눈물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눈물을 다 모으면 태평양을 메우고도 바다 건너 어느 섬마을에 넘실거리는 파도까지 채우지 않을까 얼큰하게 오른 홍조로 흥을 돋구듯 한탄도 했지만, 약지에 묻은 막걸리를 치마에 딱으며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더 많다고, 그런 이야기는 여기 물질하는 년들에게 수백 개씩은 있다고 밥 대신 막걸리를 마시며 막막한 숨을 미역 줄거리 같이 하늘거렸다. 남겨줄 곳 하나 없어도 억척같이 물질을 해온 말순 씨, 젊은 남편에 어린 자식까지 잡아먹은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건 뭍에서 흘린 눈물을 숨겨주는 바다 때문이라고 바다는 해녀들의 눈물로 매워진 뭍이라고 말숙 씨는 다 늦은 점심 대신 막걸리 한 통을 다 비우고 성산포 바닷속 깊은 곳으로 쌓아둔 눈물 숨기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