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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자동차 역사
01. 1482∼1800 자동차 시대의 막을 연 태엽자동차와 증기자동차
인류는 기원전 3200년 쯤 바퀴를 발명했고, 바퀴는 수레로, 수레는 자동차로 인간의 발을 대신하는 문영을 일궈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82년에 만든 태엽자동차가 인류 최초의 자동차, 그리고 1769년 니콜라 조세프 퀴뇨가 제임스 와트으 증기기관을 이용해 세바퀴 자동차를 만들면서 본격적인 “자동차 시대”의 막이 열리게 됐다.
▶ 1482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태엽 자동차 발명 ☞ 인류 최초의 인위적인 동력으로 만들어진 자동차는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82년경 만든 벽시계 태엽 자동차라는 것이 정설이다. 1482년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어느 날 벽시계에 태엽을 감아주다가 실수로 태엽을 감는 열쇠가 튕겨져 나와서 이마를 다치게 되었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다빈치는 태엽의 풀어지는 힘을 이용하여 오늘날 자동차의 기원이라 믿는 달리는 태엽자동차를 처음 만들었다.
▶ 1500 명나라 등옥함이 자명종 시계의 원리를 이용한 자행차(自行車) 제작
▶ 1599 시몬 스테빈(Simon Stevin), 풍력자동차 발명 ☞ 폴란드의 수학자 시몬 스테빈(Simon Stevin)은 직경이 1.5미터나 되는 큰 나무바퀴가 4개 달린 돛단수레를 만들어 28명을 태우고 바닷가에서 34km/h로 68km나 달렸다고 한다.
▶ 1630 이탈리아의 죠반니 브랑카, 터빈 원리(Turbine) 발견 ☞ 이탈리아의 죠반니브랑카는 보일러에서 노즐을 통해 분출되는 증기가 바퀴의 구멍 뚫린 틀을 불어 바퀴를 돌리는 메커니즘, 즉 기아에 의하여 작동한다는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증기터빈이다.
▶ 1665 프래들린 펠피스트 신부, 벨피스트의 증기차(Verbies's stream cart) ☞ 포르투갈의 선교자이자 천문학자인 프래들린 펠피스트 신부는 네 개의 바퀴를 가진 총길이 60cm의 증기 자동차와 같은 이상한 고안품을 만들었다. 벨피스트의 증기차는 고정된 다섯번째의 뒷바퀴에 의해 방향타를 잡고 빙글빙글 돌았으며, 이 에어리필러에 한번 급수한 것으로 약 한 시간을 달렸다. 펠피스트 신부의 증기차 실험이 이루어진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1665년에서 1680년 사이에 이루어 졌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 1673 네덜란드의 호이헨스는 프랑스에서 실린더내의 화약을 연소시키면서 동력을 얻는 화약엔진을 발명.
▶ 1680 포르투갈의 벨피스트는 증기를 이용해 1시간 정도 달릴 수 있는 증기 자동차와 유사한 것을 만들었다.
▶ 1690 물리학자 도나빠빵, 수증기에 의한 피스톤운동 ☞ 프랑스의 물리학자 도나빠빵에 의해 수증기를 이용해서 수직 실린더 내부의 피스톤을 움직이는 기계가 설계 되었다. 외부로부터 열을 가열하면 물이 팽창하여 증기가 되어 피스톤을 밀어 올리고 냉각하면 증기가 위축되어 내부의 기압이 낮아지고 여기에 중력이 가해져서 피스톤을 내리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 1693 토머스 서베리(Thomas Savery), 대기압식 증기기관 발명 ☞ 1693년 증기를 이용한 양수 펌프를 발명하여 1698년에 특허권을 얻었다. 이 펌프의 구조는 간단한 것으로 물을 빨아올리기 위한 기압과 물을 밀어내기 위한 증기압을 동시에 이용한 것이었다. 이 서베리 기관은 불완전하고 출력도 제한된 것이었으므로 1712년부터 뉴커먼 기관으로 대체되었지만 동력 기술사상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 1698 영국의 토머스 서베리가 증기의 팽창력과 대기 압력을 교대로 움직이는 증기엔진을 발명.
▶ 1712 토마스 뉴커먼(Thomas Newcomen), 뉴커먼식 증기기관 발명 ☞ 최초의 상업적인 증기기관이다. 뉴커먼 기관은 물을 가열하여 증기를 발생시켜 지하 100피트의 깊이에서 2.5톤의 물을 끌어 올리는데 약28kg의 석탄이 필요한 대기압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 1765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 발명 ☞ 와트(Watt)는 뉴커먼(Thomas Newcomen)의 기관을 회전식으로 바꾸는데 성공함으로써 증기기관을 완성하게 된다. 일량이나 힘의 단위인 와트(W)는 제임스 와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 1769 프랑스에서 니콜라 퀴뇨의 증기자동차 발명 ☞ 프랑스의 공병대위였던 니콜라스 죠셉 퀴뇨(Nicholas Joseph Cugnot)는 대포를 견인할 목적으로 3륜 증기자동차 2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무거운 보일러와 실린더 2개를 앞바퀴에 얹었던 그의 자동차는 속도가 겨우 시속 5km 정도였으며, 조향이 어렸웠을 뿐만 아니라 보일러도 15분마다 물을 보충해야 했으며, 브레이크 장치도 없어 결국 파리 교외의 언덕길에서 벽에 부딪혀 화재를 일으켰다고 한다. 자동차의 시초로서 기록된 퀴뇨의 자동차는 자동차 역사상 교통사고를 낸 제1호 자동차로도 기록 되어있다.
▶ 1771년 조셉 뇨노의 증기자동차용 라쳇트 기어 구동장치 발명하여 운반 자동차인 파르디에를 제작. C자형 강철 스프링이 장착된 코치형 마차가 유럽에 등장.
▶ 1776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는 볼턴과 함께 증기압 조정이 가능한 단일 작동 방식의 증기 엔진을 발명 ☞ 1780 증기기관 왕복운동을 시키는 증기기관을 권유하였고, 1781년 기관의 각 사이클 마다 유성 기어 장치를 고안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1782년 복동식 기관으로 특허를 받았다. 이 기관은 가동보와 피스톤을 단단히 연결하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그는 이 문제를 1784년 수평운동장치의 발명으로 해결했고, 그는 이것을 “내가 발명한 장치 중 가장 천재적이고 간단한 작품”이라고 서술했다. 4년 후 볼턴의 제안에 따라 기관의 속도를 자동제어하는 원심조속기의 활용과 1790년 발명한 압력계를 이용해 실제적인 와트 기관을 완성했다.
▶ 1781년 제임스 와트는 윌리엄 머독과 함께 유성기어 발명
▶ 1782년 제임스 와트는 원심 거버너를 사용하는 복동 증기엔진을 발명
▶ 1784 윌리암 머독(William Murdock), 3륜소형증기차 ☞ 영국의 제임스 와트 회사의 기술자였던 윌리암 머독은 구리로 만든 길이 48cm의 3륜 소형 증기차를 만들었다.
▶ 1788 영국인 로버트 포니스, 3륜 증기트랙터를 제작 ☞ 영국인 로버트 포니스는 3륜 증기트랙터를 제작하였다.
▶ 1790 미국의 하트리(Hartley), 압축공기의 힘으로 나아가는 차를 이론적으로 발표 ☞ 그 후에도 증기자동차에 대한 기술 연구는 유럽 각지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
02. 자동차 기술을 크게 진보시킨 휘발유자동차
1886년 고트리프 다임러와 칼 벤츠가 각각 휘발유자동차를 발명하면서, 자동차 기술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휘발유자동차는 무겁고 느린 증기자동차에 비해 빠른 엔진 멋진 스타일, 가벼운 차체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밖에도 1895년 앙드레 미쉐린이 자동차용 공기타아어를 발명하고 헨리 포드는 처음으로 2기통 자동차를 만드는 등 자동차 기술은 발전을 거듭했다.
▶ 1803년 프랑스의 필립 르봉 당베르상은 가스 공기 예비압축과 불꽃 점화에 의한 가스 엔진 발명
▶ 1803년 영국의 리챠드 트레비딕은 자동차용의 고압 증기 엔진을 개발 ☞ 사람이 많이 탈 수 있는 차를 만들어 13km/h의 속도로 런던시내에서 주행하였다. 이것은 동력장치를 이용한 최초의 택시였다
▶ 1805년 영국의 오버디어 엘리오트가 타원형 리프 스프링을 발명. 미국의 올리버 에반스가 수륙 양용 굴삭기 제작
▶ 1805년 스위스의 이작크 드 리바는 세계 최초로 4륜차용 전기 불꽃 엔진을 개발
▶ 1816년 게오르그 랑켄 스피켈과 루돌프 애커먼이 애커먼식 조향장치 발명
▶ 1821년 자동차용 기어 변속장치가 발명됨
▶ 1823년 영국의 골드 워즈거니 경이 증기엔진 버스(약 18km/h로 운행)를 발명
▶ 1824년 레오나르도 사디 카르노 카르노 기관(carnot heat engine) 이론 발표 ☞ 1820년대 프랑스의 N.L.S.카르노는 증기기관의 기본적 이론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열을 동력(일)으로 바꾸는 구조 일반을 고찰하였는데, 이것이 열기관이다. 열기관에 공급된 열로부터 얼마만큼의 일을 얻을 수 있는지를 생각할 때, 얻을 수 있는 일의 비율이 크면 클수록 그 기관은 쓸모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얻어지는 일과 공급되는 열의 비율을 효율이라 하며, 최대효율은 어떠한 경우에 얻어지는지를 조사할 수 있다. 카르노는 이와 같은 고찰을 진행하기 위하여 오늘날 카르노사이클(Carnot cycle)이라고 하는 이상적인 기구를 가상하였다.
카르노사이클은 각각 단계에서의 변화가 무한적으로 천천히 진행되어 한 바퀴 순환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서, 각 단계가 거의 평형상태에 있기 때문에 변화의 방향을 반대로 하여도 전혀 과정이 변하지 않는다. 즉, 변화의 방향을 반대로 해서 한 바퀴 돌리는 것도 가능한 기관(가역기관)이다. 처음 한 바퀴 돌릴 때 고온의 물체로부터 열을 받아, 외부에서 일을 하며, 저온의 물체로 열이 흘러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면, 역행과정은 저온의 물체로부터 열을 얻어내고, 고온의 물체에 열을 주어, 그 사이에 외부로부터 일을 받는 형태로 한 바퀴 순환한다.
이와 같은 카르노사이클을 생각하면 사실 그 효율은 사이클로 작동시키는 물질의 종류와는 관계 없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 효율(최대효율이 된다)은 두 물체의 온도만으로 결정된다(카르노의 원리). 카르노는 이것을 증명할 때, 영구기관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원리를 사용했다.
만일 2개의 카르노사이클의 효율이 동일하지 않다고 하면, 한쪽을 순방향으로, 다른 쪽을 역방향으로 작동하도록 하여 연결시켜서 얻는 일이 공급하는 일과 같아지도록 소거시키면, 외부에 아무 변화도 남기지 않고 고온의 물체로 열을 공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영구기관이다. 영구기관은 불가능하므로, 이것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2개의 카르노사이클의 효율은 동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카르노의 정리의 주요 내용이다.
이 내용은 그후 R.E.클라우지우스에 의해 정리되어 '저온의 물체로부터 고온의 물체로 열을 이동시키는 것 외에, 아무 변화도 남기지 않는 과정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형식으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열역학 제2법칙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825년 자동차용 유니버셜 조인트(universal joint)가 발명됨 ☞ 두 축이 비교적 떨어진 위치에 있는 경우나 두 축의 각도(편각)가 큰 경우에 이 두 축을 연결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축이음(커플링)의 일종이다. 자동차의 프로펠러 샤프트나 드라이브 샤프트 등의 연결부, 자동차의 스터어링 기구 등에 쓰인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827 프랑스 오네시포 페쾨르(Onesiphore Pecqueur, 1792~1852)가 증기기관용 차동기어(differential spider cage, 差動) 발명 ☞ 차가 모퉁이를 돌거나 울퉁불퉁한 길을 갈 때 기관의 동력을 1쌍의 구동바퀴에 서로 균등하게 분배하지만 두 바퀴의 기어축 중심이 서로 다른 축의 둘레를 회전하도록 한 기어장치이다. 직선도로에서는 두 바퀴가 같은 속도로 회전하지만, 모퉁이를 돌 때 구속이 없다면 바깥쪽 바퀴는 안쪽 바퀴보다 더 많이 진행하며 더 빨리 돈다.
자동차용 차동장치는 1827년 프랑스의 오네시포 페쾨르가 발명했다. 이것은 증기자동차에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19세기말 내연기관이 등장하자 널리 보급되었다. 페쾨르의 차동장치 구성요소는 그림에 나타나 있다. 전동장치의 동력은 구동축 피니언에 의해 우산형 링기어로 전달되는데, 이 둘은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뒤차축 하우징의 베어링으로 지지된다. 케이스는 뚜껑이 없는 상자 모양의 구조물인데, 링기어와 볼트로 고정되며 서로 마주보는 1쌍 또는 2쌍의 우산형 차동 피니언을 지지하는 베어링을 포함하고 있다. 각각의 차륜축은 차동 피니언과 맞물려 있는 차동 사이드기어에 부착되어 있다. 직선도로에서는 바퀴와 사이드기어가 동일한 속도로 회전하고, 차동 사이드기어와 피니언 간의 상대운동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들은 케이스ㆍ링기어와 함께 하나의 장치를 이루어 회전한다. 차량이 좌회전할 경우 오른쪽 바퀴가 왼쪽 바퀴보다 더 빨리 회전하며, 사이드기어와 피니언은 서로 상대적으로 회전한다. 링기어는 좌우 바퀴의 평균회전속도와 동일한 속도로 회전한다. 바퀴와 전동장치를 중간에서 잭으로 들어 올린 상태에서 기어를 중립에 놓고 한쪽 바퀴를 회전시키면, 다른 쪽 바퀴는 속도는 같지만 반대방향으로 회전하게 된다.
▶ 1828년 자동차용 디퍼렌셜 기어(differential gear, 差動裝置)가 발명되었으며 프랑스에서 증기엔진을 장착한 화물차와 견인차, 이륜차가 등장 ☞ 한 기어가 다른 기어의 주위를 회전하면서 동력을 전달하는 장치. 이것은 자동차 뒷차축의 중앙부에 장착되어, 자동차가 커브를 돌 때 양쪽 바퀴를 서로 다른 속도로 회전시켜 주행을 원활하게 한다.
▶ 1839 미국의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 고무의 열가류법(Vulcanization) 개발 고무 타이어 발명 ☞ 미국의 찰스 굿이어는 나다니엘 헤이워드(Nathaniel M. Hayward)가 고무에다 유황 성분을 첨가하면 좀 더 탄성이 좋아진다는 것을 것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디어를 사게 되었다. 즉, 유황처리법의 특허권을 매입하여 그 연구를 추진한 결과 장기간을 사용해도 탄력성을 잃지 않는 딱딱한 고무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1844년 굿이어는 열가류법으로 특허권을 얻었으나 오랫동안 특허권 침해 문제로 소송에 휘말렸다. 굿이어의 특허로 다른 사람들은 굉장히 돈을 많이 벌었지만 정작 그가 죽을 때 남긴 것은 200,000달러가 넘는 빚이었다.
▶ 1840년 영국에서 증기버스의 개발을 전면 중단
▶ 1845 영국 로버트 윌리엄 톰슨(Robert William Thomson), 직물로 만든 공기타이어 발명 ☞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공기압 타이어는 1845년영국의 성직자 로버트 윌리엄 톰슨 목사가 발명했다. 톰슨은 고무 코팅된 천으로 튜브를 만들어 겉을 가죽으로 싼 다음 공기를 주입한 타이어를 개발했다. 그러나 톰슨의 가죽 타이어는 승차감은 좋았지만 내구성이 떨어져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특허기간을 넘기고 말았다. 이후 1890년대까지 다시 쇠 바퀴와나무 바퀴에 통고무를 씌어 사용하는 시대가 이어졌다 1888년 봄, 스코틀랜드의 수의사 존 보이드는 자전거를 타고 놀던 아들이 딱딱한 바퀴 때문에 엉덩이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부드러운 고무튜브를 만든 뒤 공기를 주입하고 겉을 경화 고무로 둘러싼 타이어를 개발했다. 이듬해인 1889년 던롭의 공기압 타이어 특허권을 인수한 하베이 드 크로는 던롭 고무회사를 설립하고 자전거 타이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공기압타이어이다.
▶ 1848년 미국의 존스가 수퍼차저 발명 ☞ 수퍼차저는 원래 배기가스로 터빈을 돌리는 터보차저와 크랭크 풀리의 힘으로 터빈을 돌리는 기계식 수퍼차저를 통칭하는 말이었지만 근래 들어서는 후자만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인다. 공기가 희박한 고도에서 항공기 프로펠러 엔진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개발된 수퍼차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에 쓰였지만 본격적으로 그 성능을 뽐내기 시작한 것은 모터스포츠에서였다. 수퍼차저는 터보 랙이 없고 구조가 간단한 반면 엔진의 출력을 빼앗기 때문에 배기량이 큰 차에 주로 쓰인다.
▶ 1850년 철제차축이 발명 되었고, 영국의 코링은 차축 윤활장치를 발명. 납축전지 발명. 최초의 증기 장갑차 등장.
▶ 1853 이탈리아의 에우제니오 발산티(Eugenio Barsanti)와 펠리체 마테우치(Felice Matteucci)가 최초로 가스엔진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그러나 실제적인 설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1859 벨기에 에티엔느 르노와르(Jean Joseph Etienne Lenoir), 2행정 복동식(復動式) 가스엔진 내연기관 발명 ☞ 에티엔느 르노와르는 석탄가스와 공기의 혼합기체를 연소시키는데 성공함으로서 스팀엔진을 대체할 실용적인 엔진을 발명하였다. 석탄 가스와 공기의 혼합 기체가 수평 실린더의 양끝에서 교대로 공급되어 밧데리의 전기 불꽃이 그 연료를 점화한다. 그 결과로 발생하는 폭발이 피스톤을 좌우로 움직여 스파크가 붙은 큰 플라이 휠을 수직으로 회전시키는 2행정 엔진을 제작 하였다. 이 엔진은 18리터의 2마력의 출력을 내었다.
▶ 1861 독일 구스타프 슈미트(Gustav Schmidt), 압축효과 발견
▶ 1862 이탈리아 바르산티오 마테우치, 가스엔진 자동차 시작(試作)
▶ 1862 프랑스 알퐁스 드로샤(Alphonse de Rochas), 4행정 내연기관의 원리 고안 ☞ 알퐁스 드로샤는 4행정 내연기관의 원리를 개발하여 특허를 획득하였다. 지금의 로터리 엔진에 필적한 만한 대발명이었지만, 현물을 만드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만다. 그를 대신해 4사이클 가스엔진을 완성시킨 사람은 바로 독일의 니콜라우스 어거스트 오토였다.
▶ 1863년 프랑스의 장 조셉 에티앙르 르노와르가 슬라이딩 밸브를 사용한 복동식 가스 엔진을 발명
▶ 1865년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영국정부는 적기조례를 발표 ☞ 적기조례는 증기 엔진이 도로를 망가뜨리고 말을 놀라게 한다는 국민들의 반감으로 영국정부가 선포한 조례로 전방 50 야드 앞에서 기수가 주행하는 자동차와 같은 속도로 달려 주변 사람들에게 자동차가 오고 있음을 알리도록 의무화한 제도로 증기 엔진 차량은 최고 속도를 시내에서는 3.2 km/h, 시외에서는 6.4km/h로 제한하고 해가 지기 1시간 전부터 등불을 켜도록 의무화 했다. 길이와 중량의 한계를 엄격히 규제하였다.
▶ 1866년 루터 형제에 의해 회전 피스톤 컴프레서인 루터 수퍼차저 발명
▶ 1867년 고무로 된 타이어 발명 ▶ 자동차는 바퀴를 돌림으로써 달리고 또 바퀴의 방향을 틀어서 방향을 잡기 때문에 노면과의 마찰이 불가피하여 새로운 재질이 요구되었다. 솔리드 타이어는 1867년 영국의 R.W. 톰프슨이 실용화하였다. 톰프슨은 이미 1846년에 공기 타이어의 특허도 취득하였으나 실용화에 이르지 못하고 88년 영국의 J.B. 던롭이 공기 타이어를 재차 발명한 공기 타이어의 개발자가 되었다. 1895년, 프랑스의 앙드레 미슐랭에두아르 미슐랭 형제는, 사상 최초의 자동차 레이스인 파리-보르도-파리에서 그들이 만든 공기 타이어를 단 푸조를 몰아 자동차에 대한 응용과 보급에 크게 공헌하였다.
▶ 1868년 독일의 조셉라벨은 석유, 가솔린을 이용해 보일러를 가열시키는 최초의 증기자동차를 만들었다.
▶ 1872년 조지 베일리 브레이튼이 2스트로크 방식의 브레이튼 레디 엔진 발명 ☞ 리드밸브가 달린 흡기포트를 크랭크케이스에 직접 설치한 방식이다. 크랭크케이스 리드밸브 흡기, 또는 줄여서 케이스 리드식이라고도 부른다. 2스트로크 흡기방식의 원조가 바로 이것이며, 매우 단순한 구조가 특징이다. 옛날의 일부 자동차용 엔진에 이 방식이 많았다. 그러나 바이크용 엔진으로서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통풍저항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싶은 흡기포트에 리드밸브가 버티고 있으면 저항이 크다. 또한 리드밸브는 로터리밸브 4스트로크 엔진의 흡배기 밸브처럼 정확하게 작동하기가 어렵다.
▶ 1873 프랑스 아메제 볼레, 전륜독립현가(前輪獨立懸架)의 6인승 소형증기 자동차 개발
▶ 1873 독일의 니콜라우스 아우구스트 오토는 단기통 4스트로크 화염점화방식의 엔진을 개발
▶ 1875년 독일의 마이바하는 플롯기화기를 개발
▶ 1875 오스트리아 지크프리트 마르쿠스(Sigfried Marcus, 1831~1898), 2사이클 자주차(自走車) 제작 ☞ 지그프리트 마르쿠스는 오스트리아 메클렌부르크-슈베린(Mecklenburg
-Schwerin)의 말힌(Maching)에서 태어났으나 21세 때에 비엔나로 옮겨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활동했던 공학자이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기술개발에 관심을 두어 이미 20대 중반에 전보시스템을 개선하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이어 그는 점화장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870년경 그는 간단한 손수레에 내연엔진을 설치하여 액체연료를 기화시켜 기계를 움직이는 실험에 성공하였다. 자동차 가솔린 연료 내연엔진의 시초였다. 모라비아의 기계공장이 마르쿠스의 내연기관을 자동차에 장착하는 제품을 만들었다. 이를 ‘제1차 마르쿠스 자동차’라고 한다. 1883년 마르쿠스는 낮은 전압을 이용한 점화에 성공하여 독일 특허를 받았다. 이로부터 모든 엔진에 저전압 점화기가 이용되었다. 이를 ‘제2차 마르쿠스 자동차’라고 부른다. 제2차 자동차는 비엔나의 기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미국기계공학회(ASME)는 마르쿠스의 제2차 자동차를 세계 기계공학발전의 역사적 랜드마크로 지정하였다.
마르쿠스는 내연기관 점화기 등을 개발하여 16개국으로부터 131건의 특허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자동차에 대한 특허는 하나도 없다. 그는 자동차 개발에 직접 관여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내연기관의 점화기를 개발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마르쿠스야 말로 현대 내연기관 자동차의 선구자였다. 불행하게도 마르쿠스에 대한 연구결과 및 보고서 등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유태계통이었기 때문에 1930년대 중반에 나치가 그에 관한 모든 자료를 폐기했고 심지어 과학서적에서 그의 이름까지 삭제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독일 근대자동차 개발자의 리스트에서 마르쿠스의 이름은 삭제되고 대신 다임러나 벤츠의 이름이 들어갔다. 비엔나공과대학교 앞에 세워졌던 기념상도 철거되었다. 현재 설치되어 있는 기념상은 전쟁 후 다시 세운 것이다. 마르쿠스는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개신교였으므로 휘텔도르프(Hütteldorf)의 개신교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후 그의 유해는 중앙공동묘지의 저명인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 1876 독일 니콜라우스 어거스트 오토(Nikolaus August Otto), 4행정 내연기관 발명 ☞ 1866년 니콜라스 어거스트 오토가 피스톤 엔진에 대한 특허를 얻었다. 1872년 니콜라스 어거스트 오토는 엔지니어 에우겐 랑켄(Eugen Langen)과 함께 독일가스 엔진공장을 세우고 피스톤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장 매니저는 다임러를 세운 고트리브 다임러(Gotieb Daimler)였다. 1876년에 니콜라우스 오토(Nikolaus August Otto)는 4행정 내연기관을 발명하였다. 4행정 사이클은 프랑스의 공학자 알퐁스 보드 로샤가 1862년에 특허를 냈지만, 오토가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처음으로 기관을 만들었기 때문에 보통 ‘오토 사이클’로 알려져 있다. 신뢰성과 효율이 높고 비교적 조용했기 때문에 오토가 만든 기관은 즉시 성공했다. 그 뒤 10년 동안 3만 대 이상의 기관을 만들었지만, 1886년에 프랑스의 보드 로샤의 특허가 우선권을 인정받자 오토의 특허는 취소되었다.
▶ 1880 프랑스 카뮈 폴, 전기자동차 제작
▶ 1883 독일 고틀리프 다임러(Gottieb Daimler), 4사이클 가솔린 엔진 제작
▶ 1883년 프랑스의 알베르드 디옹은 주르주 뷔통과 함께 최고 60km/h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증기자동차를 제작
▶ 1884 프랑스 들라마르 드부트빌과 레옹 말랑댕, 가솔린 자동차 시작(試作)
▶ 1885 독일 고틀리프 다임러(Gottieb Daimler) 1기통, 250cc, 0.4마력, 최고시속 12km의 가솔린엔진 오토바이 제작
▶ 1885 4스트로크 엔진에 적용되는 코일점화방식 개발
▶ 1885년 독일의 로버트 보쉬사 설립되어 자석식 점화장치 생산
▶ 1886 독일 칼 벤츠(Karl Benz), 3륜 휘발유 자동차 발명 ☞ 칼 벤츠의 자동차는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로 기록되는데, 이는 다임러와 벤츠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가솔린 자동차를 완성하였으나 벤츠가 1897년 이미 가솔린 엔진을 제작한 바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칼 벤츠(Karl Benz)의 자동차를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885년 독일의 칼 벤츠(Karl Benz)는 가솔린 3륜 자동차를 발명하고 민하임에서 시운전을 하였으며, 그 다음해인 1886년 특허를 획득하였다. 이 차는 무게 250kg의 자전거타입 삼륜차로 200rpm에서 0.85마력의 힘을 내는 1기통 4엔진을 얹고 최고 시속 16km를 냈다. 첫해에 만든 두 대중 한 대는 뮌헨의 도이치 박물관에 아직도 달릴 수 있는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 1886 독일 고틀리프 다임러(Gottieb Daimler), 4륜 휘발유 자동차 발명 ☞ 독일의 고틀리프 다임러는 250cc 0.8마력의 가솔린엔진을 마차에 장착한 4륜 자동차를 발명하여 아내 엠마의 43번째 생일인 4월 26일에 이를 선물하였다. 생일날 아침 세계 최초의 휘발유자동차를 선물로 받은 엠마의 기쁨과 놀라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감격어린 눈물을 흘리며 남편에게 수없이 키스를 했다. 엠마야 말로 자동차를 선물로 받은 세계 최초의 여인이었다. 이 차의 앞쪽에는 핸들이 달린 차축, 뒤쪽에는 엔진과 벨트로 연결된 구동축, 의자밑에는 작은 자동차 엔진을 장착했다. 이대 이 자동차의 최고속도는 시속 16km였다. 굴뚝에서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증기자동차는 많이 보아왔지만 석탄을 때는 보일러도 굴뚝도 없는 마차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달려가는 모습은 괴변이 아닐 수가 없었다. 스프링, 냉각기, 클러치, 2단변속기, 차동기어 등 당시 감히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현대식 주행장치들을 원시적이지만 거의 다 갖춘 이 조그만 차야말로 앞으로 교통혁명을 일으킬 새 시대의 주인공이었다.
▶ 1888 영국 존 던롭(John Dunlop), 자전거용 공기타이어 발명 ☞ 1888년 2월 존 보이드 던롭은 미국의 찰스 굿이어가 1885년 발견한 라텍스와 유황혼합물에 의한 고무 생성원리를 이용 벨로시페드의 안장을 개발했으며 "던롭(Dunlop)"이라는 상표로 세상에 발표했다. 또한 같은 해 공기타이어 특허를 얻게 되었다. 1년뒤인 1889년 아일랜드 W. 흄(Hume)은 nr제자전거 휴머틱 박람회에서 최초로 공기 타이어가 장착된 벨로시페드 모델을 선보였고, 던롭은 더블린에 공기타이어 공장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던롭이라는 브랜드의 공기 타이어가 생산에 박차를 가하면서 평범한 수의사에서 세계적인 기업의 대표가 되었다. 1890년, 던롭의 공기 타이어 이용권을 따낸 주요 생산공장에서 “자전거(Bicycle)"란 명칭을 최초로 쓰기 시작했다.
▶ 1889 프랑스, 세계 최초의 자동차회사 파나르 르바소(Panhard Levassor)社 설립 ☞ 1889년 프랑스의 르네 파나르(Rene Panhard, 1841~1908)와 에밀 르바소(Emile Levassor, 1843~1897)가 함께 설립한 자동차 회사 '파나르 르바소(Panhard Levassor)'는 최초의 자동차 회사명이다. 당시 미망인이었던 르네 파나르는 죽은 남편의 유언에 따라 자동차 사업을 성취하고자 하였는데, 1889년 세계 최초의 가솔린엔진을 발명한 독일의 고트리브 다임러(Gottlieb Daimler)로부터 다임러 엔진을 얹은 자동차를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제작/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다.
어린 시절 중앙예술제조학교에서 만난 적이 있는 남편 친구이자 공구 제조업자였던 에밀 르바소와 힘을 합쳐 자동차 사업을 한 르네 파나르는 1889년 프랑스 파리에 자동차 공장 '파나르 르바소'를 설립하였고, 그러한 인연을 계기로 1889년 5월 동업자인 르바소와 재혼을 하였다.
1891년 르바소는 가솔린차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시스템 파나르'라는 구동설계를 1894년에 선보이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소비자의 편의성과 유행을 따르는 자동차 마케팅 기법의 시초가 되고 있다.
1891년 다임러 엔진을 중앙에 장착한 모터 스포츠카를 개발한 '파나르 르바소'는 1895년 최초의 자동차 경주인 파리~보르도 왕복 경주에서 우승하는 등 그 명성을 쌓았으나, 1896년 파리~마르세이유 경주에 참가해 큰 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부상을 입은 '에밀 르바소'는 1897년 4월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파나르 르바소'는 1903년 연간 1,000대 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1,500여명에 이르는 직원을 거느린 큰 기업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고, 이후 경영악화로 인해 1967년 프랑스의 '시트로엥'에 흡수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세계최초의 자동차회사 '파나르 르바소'는 현대 자동차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슬리브와 포핏식 밸브, 싱크로 매쉬 변속기, 유압브레이크, 독립 현가장치, 각종 특정 차, 공냉식 엔진 등을 개발하고 적용해 자동차 기술이 발전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 1889 프랑스 아르망 푸조(Armand Peugeot, 1849~1915), 푸조社 설립 ☞ 푸조의 역사는 푸조 가문이 1810년 철강 공장을 설립하면서 시작된다. 푸조 가문의 계승자였던 아르망 푸조는 184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871년부터 자전거를 제작했다. 그 후, 아르망 푸조는 자전거를 제작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1896년 푸조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다. 아르망 푸조는 자동차에 대한 열정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당시로는 혁신적인 기술들을 선보였다. 엔진을 앞쪽에 장착한 새로운 디자인의 자동차를 개발하였고, 1892년에는 휘발유 엔진을 장착하고 4개의 바퀴에 최초로 고무 타이어를 장착한 모델을 개발하기도 했다. 1912년에는 오늘날 가장 많이 사용되는 DOHC 엔진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다. 아르망 푸조는 자동차의 기술뿐만 아니라 사업적인 성공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푸조의 우수한 성능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자동차 경주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자동차 경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푸조 자동차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능과 품질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면서 조국을 위해 전사하게 된다.
▶ 1890 고틀리프 다임러(Gottieb Daimler, 1830~1900), 다임러(Daimler Motoren Gesellschaft)社 설립 ☞ 다임러는 슈트트가르트에서 기술교육을 받았으며, 그 뒤 독일의 여러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일하면서 기관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1872년 4행정 내연기관을 발명한 니콜라우스 오토의 회사에서 기술감독관이 되었으며, 1882년 동료 빌헬름 마이바흐와 함께 오토의 회사를 떠나 자신들의 기관제작소를 차렸다. 1885년 최초의 성공한 고속 내연기관 가운데 1개를 특허냈고, 가솔린을 연료로 사용하는 기화기를 개발했다. 1885년 그들이 초기에 개발한 가솔린 기관은 자전거에 달아 사용했으며(세계 최초의 오토바이?), 1886년 원래 말이 끌던 4륜마차를 1기통 기관으로 구동시켰고, 1887년에는 작은 배에 달아 사용했다. 1889년 처음부터 자동차로 설계한 4륜차에서 이들의 노력은 절정에 달했다. 상업성이 있는 이 차는 가벼운 관으로 이루어진 뼈대와 뒷부분에 장착된 기관, 벨트 구동 바퀴, 그리고 4단변속으로 구성되었다. 1890년 칸슈타트에 다임러자동차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899년에는 이 회사에서 메르세데스 자동차가 최초로 제작되었다.
▶ 1891 프랑스 앙드레 미슐렝(Andre Michelin), 공기를 넣은 자동차용 타이어 제작 ☞ 185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형인 앙드레 (Andre,1853 ~ 1931)와 함께 1888년 미쉐린타이어 회사를 설립하였다. 1894년 가을 자전거용 바퀴의 타이어를 만들어 판매하던 앙드레 미쉐린에게 한 영국인 청년이 공기식 고무 타이어를 고치게 되었다. 이때 미쉐린은 이것을 자동차에 응용하기로 착안하고 자전거 타이어를 본떠 탈착이 가능한 자동차 바퀴용 고무 타이어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1948년 자동차 타이어의 개척자인 미쉐린 타이어 회사가 지금 대중화 된 래디얼 타이어를 개발하게 되어 이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 1891 프랑스 에밀 르바소르(Emile Levassor,1841~1908), 엔진을 좌석의 아래쪽에서 앞으로 옮기고 클러치ㆍ변속기와 세로 일직선으로 배치한 근대적인 배치의 파나르에 르바소르(Panhard-Levassor)社 차를 제작
▶ 1892 독일 루돌프 디젤(Rudolf Diesel, 1858~1913), 압축점화의 디젤엔진 특허 취득 ☞ 디젤은 독일 출신으로 파리에서 피혁 가공업체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파리와 영국에서 생활하다 12세 때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 사는 백부의 양자가 되어 뮌헨고등공예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후 암모니아 냉동기의 발명가로 알려진 린데 박사가 파리에 세운 냉동기회사 지사장으로 취업했다. 1884년 무렵 디젤은 '증기기관의 증기 대신 가열한 암모니아 증기를 쓰면 열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암모니아는 냄새가 심하고 금속을 부식시키므로 공기를 이용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디젤이 고안한 엔진의 특징은 압축된 공기에 연료를 뿌리면 자연 착화가 일어난다는 것. 그러나 당시 기술로는 저절로 불이 붙을 만큼 공기를 압축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1893년 디젤은 팜플렛을 만들어 옆구리에 끼고 연구비를 지원해줄 큰 회사를 찾아다닌 끝에 아우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나중에 MAN사에 합병)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실용화에 성공할 경우 판매권을 양도한다는 조건이었다.
휘발유를 쓴 첫 시험은 폭발음과 함께 실패로 끝났고, 이후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려 가면서 연구에 매달려 1894년 2월 드디어 엔진을 개발하였으며,1895년 시운전에 성공하였다. 그는 이 열 엔진에 대한 특허를 얻었고, 그의 아내의 권유에 따라 엔진이름을 "디젤엔진"이라고 하였다. 이 엔진의 연료는 등유였으며 배기가스도 없고 연비도 휘발유보다 2배나 좋았다. 이 무렵 디젤은 MAN사의 계약을 깨고 다른 회사에도 자신의 기술을 쓰도록 허락했다. 이 때문에 1898년 뮌헨 만국박람회장에는 4개 회사가 디젤엔진을 전시됐다. 디젤엔진은 에너지 효율이 높은 경제형 엔진으로 알려지면서 유럽과 미국 사업가들이 몰려 광산공장, 선박, 기차, 건설장비, 트랙터용 엔진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루돌프 디젤은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솔린엔진과 증기엔진 제조업자들 간의 시기와 모함 중상모략 등이 심해졌으며, 회사 내 간부들의 재산을 둘러싼 암투, 부정, 부패 등으로 정신 착란증이 심해졌다. 그는 1913년 9월에 영국에 세워진 디젤엔진 공장의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선을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던 중 밤중에 실종되었고, 그로부터 2주후 핀란드의 작은 어선이 북해에 떠 있는 루돌프 디젤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디젤 엔진의 주인공인 디젤은 신기술이 활짝 꽃피는 것도 못보고 55세의 나이로 비명횡사 했지만, 그의 죽음은 타살인지, 자살인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일설에는 당시 군비확장에 여념이 없던 독일정부가 해전용 잠수함 U보트에 이 엔진을 쓸 계획이었기 때문에 적대국가인 영국에 기술이 넘어가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에 개의치 않았던 디젤을 비밀경찰로 하여금 암살했다는 얘기와 특허권 시비에 휘말려 괴로워하다 자살했다는 설 등이 전해질 뿐이다. 기술을 공개한 것에 대해서도 '돈벌이에 집착하지 않고 누구나 자신의 기술을 이용할 수 있게 한 참된 엔지니어'로 칭송되었다. 디젤엔진은 자동차용으로는 벤츠가 1922년 트럭에, 1936년 승용차(벤츠 260D)에 각각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 1893 독일 다임러(Daimler Motoren Gesellschaft)사, 벤투리와 노즐을 짝지운 근대적인 기화기 개발
▶ 1893 독일 벤츠(Mercedes☞Benz)사, 고무타이어를 장착한 빅토리아(Victoria)호 발매
▶ 1894 세계 최초의 자동차 경주 개최(파리-루앙) ☞ 최초의 자동차 경주대회 1894년 7월 세계 최초의 자동차 경주대회가 프랑스의 『프티 주르날』신문사의 주최로 파리-루앙(126km)에서 개최되었다. 총 102대 신청자중 두 번의 예선에서 81대가 탈락하고 21대만이 본선에 진출 했다. 7월22일 일요일 아침 8시 정각부터 30초 간격으로 파리의 포트마이요가를 출발하여 세느강변을 따라 루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예상 했던 것처럼 출발에서부터 해프닝이 벌어 졌는데, 어떤 프랑스의 증기차는 공원 블럭을 모조리 부수고 핸들이 고장나 잔디밭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어떤 차는 인도위에 진열된 식탁들을 넘어뜨리고 레스토랑 안으로, 어떤 차는 바퀴가 빠져 길가 던 마차를 들어 받는 등 전 코스의 4분의1도 못가서 도중하차하는 차들이 속출했다. 이 경주에서는 드디옹 백작이 운전한 드디옹-부통 증기자동차가 출발한 지 10시간47분만에 평균시속 11km 속도로 1착을 하였다. 그러나 뒤에 트레일러를 달고 달렸다는 이유로 대회 규칙을 위반했다고 해서 실격되고 말았다. 결국 다임러기관을 탑재하고, 2등으로 골인한 푸조와 파나르 르바소 차가 공동우승을 차지하며 5천 프랑을 나눠 가지게 되었다.
▶ 1895 프랑스에서 파리(Paris)-보르도(Bordeaux)간 세계 최초의 공식 자동차 경주(왕복 1200km) 개최되었다. 미국 최초의 자동차 레이스 개최(78km). 영국최초의 가솔린 자동차 부레마 등장. 프랑스의 미뤠린 형제는 파리-보르도간 레이스에서 자동차용 공기압 타이어(비드 타이어 내층부에 끈을 사용한 카커스 코드를 사용)를 시험.
▶ 1895 미국 볼티모어에서 전기 자동차 시운전
▶ 1896년 영국정부는 적기조례를 폐지. 프랑스는 미니자동차이며 최초의 공기 주입 타이어를 장착한 보아추레트를 생산. 독일의 다이믈러와 바이마하가 가솔린 엔진을 사용한 최초의 트럭을 생산.
▶ 1897 미국 랜섬 올즈(Rensom E. Olds), 올즈모빌社 설립
▶ 1897년 독일 마이바하가 파이프 라디에이터 개발. 독일의 루돌프 디젤이 최초의 디젤엔진 개발
▶ 1897 미국 스탠리 형제, 스랜리(Stanley) 증기자동차회사 설립 ☞ 192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 증기자동차가 돌아다녔다. 포드의 기록에 도전한 것이 당시 한창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증기차였다. 스텐리 증기차 메이커인 로코모빌회사는 스텐리 로켓(Stanley Rocket)이라는 120짜리 보트형 증기차로 데이토나비치에서 시속 195.6km를 기록하여 200km에 육박했지만 주차길이가 규정치보다 짧아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스텐리 로켓의 드라이버인 마리오는 시속 260km에도 도전하기 위해서 첫 기록을 수립했던 1906년 가을 역시 데이토나비치에서 도전하다가 작은 바위를 들여받고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떨어지면서 산산히 부서져 끝나고 말았다. 이것이 증기차 도전의 마지막이었다.
▶ 1897 독일 보슈, 전기점화용 고압자석발전기(高壓磁石發電機) 개발에 성공
▶ 1898년 드 뒤옹 븨통사는 3륜 및 4륜 자동차를 개발하여 유럽의 자동차 열풍을 일으키는데 기여. 장트의 전기 자동차가 63.18km/h를 기록
▶ 1898 프랑스 르노 형제, 르노(Renault)社 설립, 루이 르노 프로펠러 샤프트와 베벨 기어식 차동 기어를 가진 근대적인 동력 전달 시스템 제작
▶ 1899년 프랑스 까뮈 제나찌(Camille Jenatgy), 세계 최초로 시속 100km 돌파 ☞ 4월 벨기에의 자동차 매니아였던 까뮈 제나찌(Camille Jenatgy)는 로켓모양의 전기 자동차(일명 라자메곤단트)를 완성하고 파리 교외의 앗세루 공터에서 당시 초고 시속 64km를 자랑하던 영국 귀족 사세로프 루바경의 전기 자동차와 스피드 대결을 벌였다. 루바경의 기록은 69kmduTsmsep 까뮈는 3km의 자갈길 코스에서 최고속도 103km를 기록하였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100km 돌파 기록이었다. 라자메곤단트란 카뮈가 그의 차에 붙인 별명인데 “결코 만족하지 않는 자동차”라는 뜻이라고 한다.
▶ 1899 미국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 디트로이트 자동차회사 설립 ☞ 1903년 헨리 포드(Henry Ford)와 그밖의 11명이 공동으로 출자하여 미시간주(州) 디트로이트에 설립하였다. 포드ㆍ재규어ㆍ링컨ㆍ볼보ㆍ애스턴마틴ㆍ머큐리ㆍ선더버드ㆍ팰콘ㆍ머스탱ㆍ매버릭 등의 브랜드로 유명하며, 포드 토러스(Ford Taurus)와 F시리즈 픽업(F-Series pickup)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외에 트랙터나 전자제품, 미사일 부품 따위의 군수물자도 생산하고 있다.
포드는 1913년 대량생산을 위해 포드시스템을 도입하여 1일 1,000대의 자동차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고, 1919년에는 법인으로 등록하였다. 1923년에는 연간 생산대수 167만 대로 미국 자동차의 반을 생산, 절정에 달하였으며, 1924년까지 총 1,500만 대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들어오면서, 제너럴모터스(GM), 1937년에는 다시 크라이슬러(Chrysler Corporation:지금의 다임러크라이슬러)에 뒤져 제3위로 처졌으며, 국유화설까지 나돌 정도로 경영이 악화되었다. 하지만 1945년 사장으로 취임한 헨리 포드의 손자 포드 2세가 1979년까지 활약하면서 적극적인 경영전략을 펼쳐 사세를 만회하였다. 마쓰다자동차의 지배주주이기도 하며, BMW의 랜드로버(Land Rover) 사업부문을 인수하였다.
헨리 포드는 미시간주(州) 웨인 출생. 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자동차 제작회사 포드의 창설자이다. 근대적 대량생산방식에 의하여 자동차를 대중화하였고 자동차시대를 개척하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기계에 흥미를 가져, 학업을 중단하고 15세 때 기계공이 되어 자동차 제작에 몰두하였다. 1899년까지 디트로이트에 있는 에디슨회사에서 기술책임자로 임하였으며, 경주용차 제작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1903년 동업자와 함께 자본금 10만 달러로 포드자동차 회사를 설립, 1908년 세계 최초의 양산(量産)대중차 T형 포드의 제작을 개시하였다.
1913년 조립 라인 방식에 의한 양산체제인 포드시스템을 확립하였으며 그 밖에 수많은 기술상의 새로운 토대와 계획ㆍ조직ㆍ관리에 있어서 합리적 경영방식을 도입하였다. 1914년에는 최저임금 일급(日給) 5달러, 1일 8시간 노동이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노동정책을 폈다. 그의 산업철학은 제품가격의 인하로 판매량을 확대하고, 생산효율을 높이고 생산을 증대하여 가격을 더욱 낮춘다는 단순한 것이었다.
포드 자동차회사는 T형 포드로 미국 최대의 자동차 제조업체가 되어, 1924년에는 시장의 거의 반을 차지하였으나, 강하고 편협한 그의 개성 탓으로 말년에는 경영에 파탄을 가져왔다. 1920년대 말에는 경쟁사인 제너럴모터스사(GM)에 수위를 빼앗기고, 노동조합운동에 반대를 계속하였으므로 경영이 악화되었다.
▶ 1899 이탈리아 지오바니 아넬리(Giovanni Agnelli), 피아트(Fiat)社 설립 ☞ 피아트 (Fabbrica Italiana Automobili Torino)는 피에몬테 주의 토리노에 기반을 둔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조업체, 엔진 제조업체, 금융, 산업 그룹이다. 피아트는 지오반니 아그넬리 (Giovanni Agnelli)를 포함하는 투자자들의 무리에 의해 1899년에 설립되었다.
이탈리아 최대의 가족 소유 회사이다. 본사는 토리노에 있다. 이 회사는 토리노의 숙련 노동자들과 지방기술학교 덕분에 다른 경쟁사들에 비해 일찍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오늘날 피아트사의 성공은 주로 두 사람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창설자인 지오반니 아그넬리가 그중 한 사람인데, 그의 가족이 아직까지도 많은 양의 회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회사 발전에 주역을 담당했다. 지오반니는 지적인 사회주의자로서 자동차 산업을 근로자에게 직업을 마련해주는 수단이며, 대중에게 운송수단을 제공하는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회주의와 산업주의의 특이한 결합은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의 초석이 되었다.
1910년경 피아트사는 이탈리아 최대의 회사로 성장했으며, 그 후로도 이러한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 이 회사의 발전에 있어서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바로 비토리오 발레타인데, 그는 대단히 유능한 경영자로서 회사의 일상적인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를 담당했다. 1979년 이 회사는 다양한 개별사업을 영위하고 있던 많은 자회사의 주식을 모회사의 주주들에게 배분함으로써 지주회사로 전환했다.
1986년 피아트사는 이탈리아의 스포츠카 제조회사로 재정난을 겪고 있던 알파로메오사를 인수했다. 오늘날 피아트사는 유럽과 해외 여러 나라에 조립공장과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거대한 다국적 기업이다. 이 회사의 대표적인 자동차 상품명에는 페라리와 란치아가 있다. 그밖에도 농사용구, 토목기계, 공작기계, 자동차, 항공 엔진 및 부품, 철도장비 등을 제조하며, 핵에너지와 생체공학분야에도 출자하고 있다. 피아트사는 세계 전역에서 자사제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2009년 기준으로, 피아트는 이탈리아의 가장 큰 자동차업체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6번째로 큰 자동차업체이다.
▶ 1899 미국, 로코모빌(Locomobile) 증기자동차회사 설립 ☞ 로코모빌은 1899년 스탠리 형제의 증기자동차를 기본으로 설립된 미국의 자동차 회사다. 로모모빌의 설립자는 당시 코스모폴리탄 잡지 발행인이었던 존 브리스벤 워커(John Brisben Walker)로 그는 1899년 스탠리 형제의 증기자동차 회사를 25만 달러에 사들였다. 1902년까지 브리지포트에서 약4,000대의 증기자동차를 생산했다. 증기자동차는 물을 채우고 한번에 약 32km를 운행할 수 있었고, 스피어링 휠은 자전거 혹은 경운기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증기자동차중에서 가장 우아했지만 다른 증기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내구성에 문제가 있어 크게 환영 받지 못했다.
증기자동차시대가 끝나고 있음을 직감한 로코모빌은 1902년부터 휘발유 엔진 개발에 나섰다. 1889년 설립되어 미국 최고의 전기 자동차 회사로 성장한 리커사의 앤드류 로렌스 리커가 첫 번재 로코모빌의 휘발유 엔진 자동차를 개발했다. 1902년 여름 로코모빌은 2실린더와 4실린더 휘발유 엔진 모델을 생산했다. 엔진 케이스와 기어 케이스는 망간과 구리 합금으로 만들었고 섀시는 철로 만들어 내구성이 좋고 속도도 빨라 로코모빌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이바지했다. 수제작으로 만들어 하루 4대 이상을 생산하지 않는 것이 로코모빌의 규칙일 정도로 뛰어난 품질을 고수했기 때문에 로코모빌의 차들은 값이 비싼편이었다. 직렬 4기통 16마력 휘발유 엔진을 얹고 1904년 등장한 5인승 토너우는 값이 4,500달러였고 1908년 선보인 60마력 엔진 2인승 40 런어바우트(40Runabout)는 4,750달러 였다. 지금 기준으로 비교할 때 약 10만 달러 이상의 높은 값이다. 로코모빌은 비싼 가격과 하루에 4대 이상 만들지 않는다는 전통 때문에 생산량이 한정되어 상업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포드에서 대량생산되는 모델 T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결국, 1922년 듀란트 모터스에 흡수되어 최고급 브랜드로 활약하다가 1929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1899년 벨기에인인 까뮈 제나지가 프랑스에서 전기 자동차로 105.88km/h의 속도를 기록
03. 1900∼1910 과학문명을 이끌게 된 자동차 산업
미국과 유럽에서는 “자동차 제조업”이라는 종합 기계산업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 수공업으로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르노, 씨트로앵, 벤츠, 푸조, 포드, 롤스 로이스, 아우디와 같은 세계적인 자동차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최초로 세계를 일주하는가 하면, 각종 경주에서 경쟁을 벌이며 보다 좋은 차를 만드는 데 힘써, 자동차산업은 20세기 과학문명을 이끌고 나가는 선두주자가 됐다.
▶ 1900 독일에서 번호판 정착이 의무화 됨.
▶ 1900년 마이바하가 허니컴 라디에이터 발명. 미국의 아메리카 모빌사에서 모빌 증기 자동차 생산. 미국의 대량 생산차로 랜섬 에리 올즈가 올즈모빌 커브드 대시를 생산 1904년까지 11,275대를 판매.
▶ 1900 미국 패커드(Packard)社, 수레채 대신 핸들 채택
▶ 1901 독일 다임러(Daimler)社, 둥근 핸들, 차축을 비켜서 커브한 프레임(Frame), 반타원판 용수철의 하체, 벌집모양의 라디에이터(Radiator)를 장착한 근대적인 메르세데스(Mercedes)차를 완성
▶ 1901 프랑스 르노(Renault)社, 지붕과 윈도 일체형 보디(Closed Body)의 차를 처음으로 생산했으며 엔진 보닛(Engine bonnet), 라디에이터 그릴(Radiator grill)을 조합한 디자인 채택
▶ 1901 미국 올즈모빌(Oldsmobile)社, ‘커브드 대시車’발표 425대 생산하여 사상 최초의 대량생산차가 됨 ☞ 랜섬 올즈(Ransom Eli Olds:1864~1950)가 1897년 미시간주(州) 랜싱에 설립한 미국 최초의 자동차 제조회사이다. 1899년에 올즈모빌의 소유권은 구리와 목재 사업가에게 넘어갔고 그의 지원으로 커브드 대시(Curved Dash)를 개발하여 1901년 선보였다. 커브드 대시는 4.5마력의 1.6ℓ 단기통 엔진을 얹은 최고시속 36km의 자동차였다. 당시 라디에이터그릴 밑에 있던 크랭크 핸들을 운전석 옆으로 옮겨 운전석에서 시동을 걸 수 있었다. 이 차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조립라인을 이용해 대량으로 생산된 차이다. 공장에 화재가 발생하여 설비소실로 생산이 어려워지자, 주요부품을 아웃소싱으로 조달하여 조립함으로써 대량생산을 시작하였다. 1903년에 미국 자동차판매량의 30%에 달하는 4천 대 이상을 판매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1904년 랜섬 올즈는 따로 REO자동차를 설립하며 올즈모빌을 떠났다.
1908년 올즈모빌은 뷰익, 캐딜락, 시보레 등과 함께 윌리엄 듀런트(William James Durant:1885~1981)가 설립한 제너럴모터스의 디비전으로 들어갔다. 이후 1920년 크롬 사용, 1940년 자동변속기 장착, 1974년 에어백 개발 등 자동차 기술진보에 기여하였다. 특히, 중형차 컷러스(Cutlass)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미국내 베스트셀러 자동차에 올랐다. 그러나 시보레와의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고 일본 자동차에 밀리면서 107년 동안 3천 520만 대의 생산기록을 남기고 2004년 자동차 제조현장에서 은퇴하였다. 올즈모빌은 1905년 'In My Merry Oldsmobile'에서 시작하여 1997년 '455 Rocket'에 이르기까지 다수 대중음악의 소재로도 쓰였다.
▶ 1902 네덜란드 스파이커(Spyker) 형제, 세계 최초의 4륜구동 승용차 제작 ☞ 자동차 휠에 항공기의 프로펠러가 달린 엠블럼을 사용하는 네덜란드의 슈퍼카 제조업체인 스파이커(Spyker)의 엠블럼에는 'Nulla Tenaciinvia Est Via(제압할 수 없는 길은 없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 문구는 과거에 사용하던 스파이커의 슬로건이다. 1902년 휘발유 엔진을 이용한 세계최초의 네바퀴굴림(4WD) 승용차를 생산한 '스파이커(Spyker)'는 '제이콥'과 '헨드릭 얀 스파이커' 형제에 의해 네덜란드 힐베르숨에 설립되었다.
미국에서 마차 제조기술을 배운 형제는 그 솜씨를 인정받게 되었고 입소문을 타고 결국 1898년 네덜란드 왕실의 마차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후 스파이커 형제는 파리-암스테르담 레이스를 보고 그것에 충격을 받아 벤츠엔진을 얹은 첫 레이싱용 자동차를 제작하였는데 이 모델은 당초 년간 500대를 양산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10대 만이 양산에 성공하여 대량생산의 실패라는 쓴잔을 맛보기도 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판매를 위해 1900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RAI 전시회에 차량을 선보인 스파이커 형제는 1902년까지 침체기에 있다가 벨기에 출신의 엔지니어인 '조세프 라비올레테'를 영입하고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조세프 라비올레테'를 영입한 첫해 세계최초의 6기통 엔진과 네바퀴굴림 방식을 도입한 스파이커의 자동차는 4륜구동 최초 브레이크를 달게 되었다. 이러한 획기적인 기술의 적용과 계속적인 사업의 확장으로 명차반열에 오르게 된 스파이커는 랠리참가를 위해 랠리카인 '스파이커 14/18 투레르'를 제작하여 1907년 베이징☞파리간 자동차 랠리에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 평판이 높아졌으나 이에 따른 엄청난 비용을 감수해야만 했던 스파이커는 이 때문에 재정적인 부담이 커지게 되었고, 악재가 겹쳐 스파이커는 동생인 헨드릭의 사망 등으로 결국 경영난을 겪게 되었고, 1908년 4월 파산에 이르게 되었다.
제이콥 얀 스파이커에 의해 다시 일어선 회사는 회사명을 바꾸게 되었고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전투기와 함께 네덜란드 왕실에 승용차를 납품하는 등 다시 제기에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판매가 급격히 떨어져 자금조달이 어려워지자 1925년 마이바흐 엔진을 얹은 고급차 C4를 마지막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자동차 업계에서 잊혀졌던 스파이커는 2000년 네덜란드의 '빅터 R 뮐러(Victor R. Muller)'에 의해 다시 설립되었는데 전에 사용하던 스파이커의 상표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기술력 또한 전과같이 어떠한 업체에도 뒤지지 않는 모델을 생산하였습니다.
▶ 1902 미국 헨리마틴 리랜드(Henry Martin Leland, 1843~1932), 캐딜락社 설립 ☞ 잉글랜드 출신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헨리 리랜드는 어려서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았다. 12살이 되던 1855년부터 정밀 가공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남북전쟁 중에는 병기 제작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24세가 되던 1867년에는 디트로이트에 기계 공장을 세우고 올즈모빌사에 부품을 납품했는데, 1/1000의 오차까지 잡아내는 정밀한 기어를 공급해 능력을 인정받고, 올즈모빌사로부터 엔진과 변속기 주문을 받아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러던 중 1901년 제작한 10.25마력 엔진을 올즈모빌사가 거부하는 일이 생기면서 부품 호환이 잘되는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듬해에 자금난을 겪고 있던 디트로이트자동차(Detroit Automobile Co. 헨리 포드 설립)를 인수해 캐딜락자동차(Cadillac Automobile Co.)를 설립한다. 1903년 2인승 1기통 10마력 엔진으로 시속 48km를 달리는 모델 A를 발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항상 염두했던 부품 호환성이 뛰어난 자동차 제작에 온 힘을 기울인다.
1908년 영국의 캐딜락 딜러인 프레드릭 바넷(Frederick Bannett)이 영국 황실자동차클럽에서 캐딜락 신차 3대를 분해하여 부품을 섞은 후 재조립해 800km를 쉬지 않고 달리는 데 성공하면서 캐딜락은 영국 황실(RAC:Royal Automobile Group)이 수여하는 토마스 드와 트로피(Tho mas Dewar Trophy)를 수상하는 쾌거를 올린다.
얼마 후 리랜드는 캐딜락을 GM의 대표 브랜드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윌리엄 듀런트(William Durant)에게 매각한다. 그러나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비행기 엔진 개발 문제로 듀런트와 의견 충돌이 일어나 GM을 떠나고 아들 윌프레드(Wilfred)와 함께 비행기 엔진 회사를 설립한다.
1919년에는 자동차 제작으로 업종을 바꾸고 회사 이름을 링컨(Lincoln Motor Co.)이라 정한다. 이듬해에 정식으로 링컨사를 설립하고 첫차인 링컨 V8(Lincoln V8)을 내놓지만 얼마 되지 않아 헨리 포드에게 이 회사를 매각한다. 말년에는 사회보장 제도나 시민 문제에 관심이 많아 디트로이트 시민 연맹(Detroit Citizen League)를 설립하고 수년간 회장직을 맡아 활동했다. 후에 이 공로로 미시건대학과 버몬트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1932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 1902 영국 프레드릭 란체스터(Frederick Lanchester), 디스크 브레이크(Disc brake) 발명 ☞ 원판 브레이크라고도 한다. 차바퀴와 함께 회전하는 디스크 양면에 패드를 압착한 뒤 마찰을 일으켜 제동력을 얻는다. 밀폐형 드럼브레이크의 경우,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마찰열로 드럼이 팽창하여 작동하지 않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주요 부품은 휠허브와 함께 회전하는 디스크, 디스크에 밀착되어 마찰력을 일으키는 패드, 유압이 작용하는 휠실린더, 휠실린더가 들어 있는 캘리퍼 따위로 이루어진다.
디스크가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방열성이 우수하여 반복적으로 사용해도 제동력이 떨어지지 않으며, 마찰계수의 변동에 따른 영향을 적게 받아 제동력이 안정적이다. 또 구조가 간단하여 패드 교환 등 점검ㆍ정비가 쉬운 것이 장점이다. 에 반하여 패드 면적이 작고 제한되어 있으므로 충분한 제동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높은 유압이 필요하며,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 빗물이나 진흙 등에 오염되기 쉬운 것이 단점이다.
초기에는 주로 레이싱카에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일반 승용차에 널리 보급되어 있다. 단, 주차(駐車) 브레이크로서의 기능은 약하기 때문에 앞바퀴에만 사용하고 뒷바퀴는 드럼브레이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 1902년 독일 보쉬사는 고전압 자석식 점화장치를 개발. 오토 율리우스 비르밤이 8마력의 아도라 자동차를 타고 최초로 알프스를 넘음.
▶ 1903 미국 올즈모빌(Oldsmobile)사, 최초로 스피드미터(Speed meter) 장착
▶ 1903 미국 헨리포드(Henry Ford, 1863~1947), 포드(Ford)社 설립 ☞ 미시간주(州) 웨인 출생. 자동차왕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자동차 제작회사 포드의 창설자이다. 근대적 대량생산방식에 의하여 자동차를 대중화하였고 자동차시대를 개척하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기계에 흥미를 가져, 학업을 중단하고 15세 때 기계공이 되어 자동차 제작에 몰두하였다. 1899년까지 디트로이트에 있는 에디슨회사에서 기술책임자로 임하였으며, 경주용차 제작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1903년 동업자와 함께 자본금 10만 달러로 포드자동차회사를 설립, 1908년 세계 최초의 양산(量産)대중차 T형 포드의 제작을 개시하였다.
1913년 조립 라인 방식에 의한 양산체제인 포드시스템을 확립하였으며 그 밖에 수많은 기술상의 새로운 토대와 계획ㆍ조직ㆍ관리에 있어서 합리적 경영방식을 도입하였다. 1914년에는 최저임금 일급(日給) 5달러, 1일 8시간 노동이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노동정책을 폈다. 그의 산업철학은 제품가격의 인하로 판매량을 확대하고, 생산효율을 높이고 생산을 증대하여 가격을 더욱 낮춘다는 단순한 것이었다.
포드자동차회사는 T형 포드로 미국 최대의 자동차 제조업체가 되어, 1924년에는 시장의 거의 반을 차지하였으나, 강하고 편협한 그의 개성 탓으로 말년에는 경영에 파탄을 가져왔다. 1920년대 말에는 경쟁사인 제너럴모터스사(GM)에 수위를 빼앗기고, 노동조합운동에 반대를 계속하였으므로 경영이 악화되었다.
▶ 1903 미국 굿이어(Goodyear)社 튜브 없는 타이어 개발 ☞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 1800~1860)는 미국의 발명가이다. 코네티컷 주의 뉴헤이븐에서 출생하였다. 고무 제조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와 발명으로 오늘날의 고무 공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금속 상사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나, 고무와 유황이 작용하여 굳은 고무를 만드는 것을 발견하였다(1834~1844). 1836년에는 질산에 의한 생고무 표면 처리 방법을 발명하였다. 이 방법은 고무 표면의 점착성 때문에 일어나는 불편을 없애 주었으며, 1844년에 특허를 얻었다. 1852년 에보나이트를 발명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기념한 타이어 (Tire)가 있다.
▶ 1903 미국 데이빗 뷰익(David D. Buick, 1854~1929), 뷰익社 설립 ☞ 오늘날 GM을 있게 한 첫번째 회사 뷰익社를 설립한 데이빗 던바 뷰익은 1854년 스코틀랜드 아브로스(Arbroath)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뷰익은 부모님을 따라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미시건州 디트로이트에 정착한 부모님 덕분에 1884년 배관설비 제작사를 차려 목욕통 같은 것을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다.
20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뷰익은 생애 처음으로 '자동차'라는 것을 보고 놀랐고 얼마 후 자동차를 샀다. 그리고는 1902년부터는 배관설비와 선박엔진을 만들던 자신의 뷰익 제조회사(Buick Manufacturing Co.)에서 자동차도 만들기로 결심했다. 1903년 기술자 월터 마(Walter L. Marr)의 도움으로 오버헤드 밸브형 2기통 엔진을 얹은 뷰익의 첫 자동차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자동차사업을 시작하면서 빌린 과도한 빚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다 회사의 투자가들에게 회사를 넘기게 된다. 뷰익으로부터 회사를 넘겨받은 제임스 화이팅(James Whiting)과 윌리엄 듀런트(William C. Durant)는 뷰익 제조회사(Buick Manufacturing Co.)와 플린트 왜건제작소(Flint Wagon Works)를 합병해 뷰익 자동차회사(Buick Motor Car Co.)를 설립한다. 투자가들의 리더십 아래 재조직된 뷰익社는 급속하게 생산량을 늘려 1908년에는 8천4백대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뷰익은 1906년 회사를 떠났으며 자동차 제작과는 관련이 없는 일을 하다 1929년 가난하게 생을 마감했다. 지금까지 1천 7백만대 이상의 자동차가 뷰익의 이름을 달고 생산되었지만, 실제로 그가 제작에 관여한 차는 고작 120대로 자동차업계에서는 불운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 1904 영국, 롤스 로이스(Rolls Royce)社 설립 ☞ 영국의 자존심 롤스로이스는 1904년 귀족 사업가인 찰스 롤스(Charles Rolls)와 엔지니어 출신 엔리 로이스(Frederick Henty Royce)에 의해 세워진다. 지금은 롤스로이스가 BMW에 인수되며 경영 합리화와 생산 증가로 일년에 6000대의 차를 만들고 있지만 아직도 한 대 생산하는데 10달이 걸리며 세게 3대 명차로 손꼽힌다. 1907년 당시 롤스로이스는 2만 4000km 레이스에 출전하여 완주하였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기계 예술’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차를 제조하면서 1915년부터는 항공기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하여 1949년 제트 엔진 개발, 1966년에는 브리스틀시드레를 매수하며 세계 제2위 항공 엔진 회사로까지 성장한다. 1980년 비커스(Vickers Ltd)에 합병된 후 현재는 BMW 그룹에 속해있다. 돈이 많아도 자격이 되지 않으면 팔지 않아 유동 자산이 3000만 달러가 넘는 고객에 우선권을 부여한다. dfpqltm 프레슬 리가 올스로이스에 문의를 하여 골드 스퍼를 사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에게도 고객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다며 판매를 거부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롤스로이스는 엘비스 프레슬 리가 돈도 많고 유명한 것은 알지만 골드 스퍼는 안 되고, 실퍼 스퍼 정도는 판매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었다. 이렇듯 값이 문제가 아니라 그 차를 타는 사람의 품격을 기준으로 판매를 하는 롤스로이스는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타사 브랜드들과 차별화가 된다. 팬텀(Phantom) 68,000만원~78,000만원, 팬텀 EWB(Phantom Extended Wheelbase), 팬텀 쿠페(Phantom Coupe), 팬텀 드롭헤드 쿠페(Phantom Drophead Coupe), 고스트(Ghost), 롤스로이스 200EX, Rolls Royce Continental GT, Rollex 101
▶ 1904년 오스트리아의 다임러 엔진사의 파울 다임러가 4륜 구동 장갑차를 개발
▶ 1905 미국 포드(Ford)社, 이그니션 키(Ignition key)가 달린 B형 발매
▶ 1906 미국 스탠리(Stanley)사, 증기자동차로 시속 195.72km 기록
▶ 1906 영국 롤스로이스(Rolls-Royce)社 실버 고스트(Silver Ghost) 생산 ☞ 영국의 고급자동차 및 항공기 엔진 제조회사로 1906년 맨체스터에서 수공(手工)으로 자동차를 만들고 있던 전기기사 F. H. 로이스와 런던의 귀족 출신 자동차 레이서인 C. S. 롤스의 사업 합병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견고하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차 안에서는 시계소리만 들리고 찻잔 위의 커피잔이 흔들리지 않는 자동차를 만들어 이름을 떨쳤다. 이처럼 부드럽고 안락감이 뛰어나 ‘달리는 별장’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엠블렘인 RR는 두 사람 성의 첫 자를 딴 것이다. 1915년 항공기 엔진의 생산을 개시하고 고급승용차를 제조하는 한편, 항공기 엔진 제조업체로서도 발전하였다. 1949년 제트엔진을 개발하였고, 1966년 영국의 브리스틀시드레를 매수하여 세계 제2위의 항공기 엔진회사로 성장하였으나, SST(초음속 여객기) 콩고드용(用) 엔진 개발비 등에 예상 외로 증대함으로써 경영난에 빠져 1971년 도산하였다.
영국정부는 국방 및 국제협력의 필요로 항공엔진 부분, 선박용ㆍ공업용 가스터빈 부분을 인수하여 정부기업 롤스로이스를 설립하게 되었고, 자동차 부분은 새 회사 롤스로이스모터스가 경영을 맡게 되었지만, 1980년 롤스로이스모터스도 비커스(Vickers Ltd.)에 흡수합병 되었다. 1987년 영국정부는 롤스로이스의 주식을 민간에 매각하여 민영화하였다. 창업자 롤스는 1910년 비행대회에 출전 중 도버해협에서 추락사하였고, 로이스는 귀족 작위를 받고 70세에 사망하였다.
세계 클래식 자동차 가운데 최고의 명차로 인정받는 실버고스트는 롤스로이스사가 설립된지 2년후인 1906년 탄생했다. 롤스로이스의 13번째 모델인 실버고스트는 이름 그대로 차체 외부를 은빛 알루미늄 플레이트로 씌우고 헤드라이트와 라디에이터그릴, 엠블렘 등도 모두 은빛 페인트로 치장했다. 여기에 엔진 소음마저 청진기를 들이대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다고 해서 ‘은빛유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성능 또한 놀랍다. 1906년에 이미 시속 100㎞로 달릴 수 있었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최초의 실버고스트가 80만㎞를 주행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은 자동차의 ‘내구연한’에 대한 상식마저 깨뜨리는 것이다. 가난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엔지니어가 된 헨리 로이스(Frederick Henry Royce)와 귀족 가문의 아들로 이튼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는 등 영국의 전형적 엘리트 코스를 밟은 찰스 롤스(Charles Stewart Rolls)가 공동으로 롤스로이스를 창업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1904년 레이서 겸 자동차 판매업자로 활동하던 롤스는 출력 10마력의 2기통 엔진을 장착한 로이스의 차를 테스트했는데, 이 차가 너무 만족스러웠던 롤스는 아예 로이스의 자동차 판매만 전담했고, 2년 뒤에는 아예 롤스로이스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롤스로이스는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이 4성장군이던 시절 그의 자동차 주문을 받고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판매를 거절했을 만큼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기도 했다. 1970년대 항공기 엔진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발목이 잡혀 1980년대 폭스바겐에 매각됐지만, 롤스로이스가 지금도 세계적 부호나 왕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도 그같은 자부심 때문이다.
▶ 1906 프랑스 르망(Le Mans)에서 최초의 서킷 레이스(Circuit race) 시작.
▶ 1907 폴 그레츠가 가게나우로 아프리카 횡당에 성공. 최초의 대륙 횡단 랠리(Rally) 자동차 경주 시작(파리-베이징)
▶ 1908 미국 포드모델 T(Ford Model T) 생산시작, 핸들 위치가 왼쪽으로 변화 ☞ 1920년대 미국의 도로는 포드 모델T로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8년 발표 당시 가격은 850달러, 1925년에는 250달러까지 가격을 내렸다. 모델T의 저렴한 가격과 내구성, 정비가 쉬운 단순한 엔진 구조는 자동차를 부의 상징이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이동 수단으로 만들었다. 모델T와 함께 자동차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첫 해에 6,870대, 다음 해에는 1만 대, 1927년 생산이 종료될 때까지 총 1천 5백만 대가 팔렸다.
가격이 저렴할 수 있었던 것은 포드가 도입한 새로운 생산 방식 때문이었다. 포드는 1910년부터 생산 라인에 컨베이어벨트를 도입해 생산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직렬 4기통 2,9 리터(ℓ) 엔진, 20마력, 최고 속도 68km/h의 성능을 가진 모델T는 시동을 걸기 어렵고 좌석이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었고, 생산비 절감을 위해 1914~1915년 사이에는 검정색만 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렴한 가격에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 1908 미국 윌이엄 듀런트(William C. Durant) 제너럴 모터스社(GM : General Motors Corporation) 설립 ☞ 미국에 기반을 둔 자동차 제조 기업으로 뷰익, 캐딜락, 쉐보레, GMC, 홀덴, 오펠, 복스홀를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자회사와 상표를 가지고 있으며, 과거에는 허머, 새턴, 사브, 폰티악 등의 브랜드도 가지고 있었다. 시보레와 GMC에서는 승용차 외에 트럭도 생산한다. 다른 상표인 AC델코, 앨리슨 트랜스미션, GM EMD(General Motors Electro-Motive Division) 등은 디젤-전기 기관차를 생산한다. 지엠은 또한 일본의 이스즈, 스바루, 스즈키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러시아의 아브토바즈와의 협력 벤처를 가지고 있다. 2003년 12월에는 1997년에 45 퍼센트의 지분을 확보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델타를 완전히 인수하여 자회사인 남아프리카 제너럴 모터스를 세웠다.
제너럴 모터스의 본사는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의 르네상스 센터에 있다. 제너럴 모터스는 340,000 명의 사원을 거느리고 있으며, 오랫동안 세계 최대의 자동차 제조 회사였다. 지엠은 2001년에 모두 8백 5십만 대의 자동차를 팔았다. 2002년에는 전 세계에 판매된 모든 차의 15 퍼센트를 팔았다. 지엠은 또한 1984년부터 뉴스 코퍼레이션, 다이렉트TV에 팔기 전인 1996년까지 일렉트로닉 데이터 시스템즈를 자회사로 두었고, 프리저데어를 1918년부터 1979년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제너럴 모터스는 최고경영자가 비상승계계획을 매년 이사회에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제너럴 모터스(GM)은 1908년 9월 16일 창립되었다. 당시 본사는 미국 미시간 주 플린트에 있었다. 뷰익의 지주회사 형태로 설립되었는데, 윌리엄 C. 듀런트(William C. Durant)가 소유주였다. 그 해 말 올즈모빌을 흡수합병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윌리엄 듀런트는 캐딜락, 엘모어, 오클랜드 오토모빌(훗날 이름은 폰티악) 및 기타 여러 브랜드를 도입하였다. 1909년, 제너럴 모터스(GM)은 오워소에 있었던 릴라이언스 모터 트럭 컴패니(Reliance Motor Truck Company)를 흡수합병하였으며, 훗날 GMC 트럭을 만드는 부문이 된, 폰티악에 있었던, 래피드 모터 비히클 컴패니(Rapid Motor Vehicle Company)를 흡수합병하였다. 1910년, 제너럴 모터스의 지배권은 윌리엄 듀런트에서 은행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신차의 판매가 부진하였고, 타회사 흡수합병을 위해 많은 자금을 차입한 까닭이었다. 몇 해 뒤, 윌리엄 듀런트는 쉐보레 자동차 회사를 차렸다. 그러고 난 뒤, 그는 시보레 회사를 통해 GM의 지분을 비밀리에 조금씩 매입하였다. 미국 기업역사상 가장 극적인 대리전 성격의 지분다툼 끝에 윌리엄 듀런트는 제너럴 모터스의 경영권을 되찾았다. 얼마 뒤, 윌리엄 듀런트는 신차 판매가 부진하자 자발적으로 제너럴 모터스(GM) 경영에서 물러났다. 알프레드 슬로언이 그의 후계자로 발탁되었다. 알프레드 슬로언은 세계대전 후 제너럴 모터스의 세계 시장 석권을 이루어냈다. 전례 없던 제너럴 모터스(GM)의 성장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절정을 이루었다.
▶ 1909 이탈리아 에토레 부가티(Ettore Bugatti, 1881~1947), 부가티(Bugatti)社 설립 ☞ 이탈리아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에토레 부가티는 예술적 환경을 중시한 부모의 배려로 어린 시절 프랑스로 거처를 옯긴다. 그는 프랑스에서 자동차 제작 기술을 익힌 뒤 1909년 알자스 몰샤임(Molsheim, Alsace)에 공장을 세우고 부가티의 이름으로 경주용 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부가티가 만든 타입 35(Type 35)는 1920년대 유럽의 자동차 경주를 휩쓸며 그 성능을 인정받았다. 뿐만 아니라 에토레 부가티는 예술가 집안의 후예답게 자동차 부품 하나에까지 예술성을 부여하고자 했고, 대표적으로 그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발굽 형태의 라디에이터 그릴은 이후 부가티 차의 상징이 되었다.
부가티가 만든 가장 유명한 모델로 1924년 생산된 타입 41(Type 41)이 있는데, '골든 부가티(Golden Bugatti)' 또는 '로열(La Royale)'이라고도 불린다. 타입 41은 전 세계적으로 단 6대만이 제작된 세계 최고의 예술성을 지닌 자동차로 1996년 1월 미국에서 열린 한 경매에 120억원대로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1920년대 경제공황에 부딪힌 부가티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 에토레 부가티는 1947년 숨을 거두었다. 결국 부가티사는 1956년에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한 이탈리아 사업가에 의해 '부가티 아우토모빌리(Bugatti Automobili SpA)'로 다시 태어나 EB110 같은 수퍼카를 생산하다가 1996년 다시 파산했다. 그러던 중 1998년 폴크스바겐(Volkswagen)이 '부가티'를 사들여 대형차 시장 개척의 선봉으로 삼으면서 지금까지 부가티 차를 생산하고 있다
04. 1910∼1920 많은 사람의 꿈을 이루어 준 포드 자동차
자동차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갖고 싶어했지만, 아무나 탈 수 없을 만큼 비싼 것이 흠이었다.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는 처음으로 “대량 생산 방식”을 도입, 서민용 자동차인 포드 T형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의 꿈을 이루어 주었다. 포드 T형은 당시 다른 자동차들이 1천 달러정도인데 비해 440달러에 판매됐는데, 1914년부터 1927년까지 무려 1천5백만 대가 생산됐다.
▶ 1910 프랑스 드 디옹 부통(De Dion Bouton), V형 8기통 엔진 완성 - 20세기 초 성공한 프랑스 자동차 제조회사로 손꼽히는 드 디옹 부통은 알베르 드 디옹(Albert de Dion)과 조르주 부통(Georges Bouton)이 함께 창설한 회사이다. 1882년에 증기자동차를 개발하였는데 1894년에 열린 파리-루앙 간 126km 자동차경주에서 평균 21km/h의 속도로 달려 1등으로 도착하였다. 하지만 승차감과 안정성 등 다른 평가 기준에서 뒤떨어져 푸조와 파나르 르바소의 가솔린 엔진 자동차에게 종합 우승을 넘겨주었다.
1895년에는 소형 가솔린 자동차 'Petit Voiture'를 개발하고 엔진과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드 디옹 부통의 엔진은 150여 개의 자동차회사에서 사용되었다. 1900년에는 400 대의 자동차와 3200 개의 엔진을 생산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 제조회사의 자리에 올랐으며, 1910년에 8기통(V8) 엔진을 최초로 대량생산하였다
▶ 1911 미국 인디애나폴리스(Indianapolis) 500마일 경주 시작 ☞ 이 도시는 포드가 처음으로 자동차를 만든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디애나폴리스 500마일레이스(약 800km)를 주파(走破)하는 자동차 스피드 경주가 매년 5월 30일 전사자 추도기념일에 개최된다.
▶ 1911 모나코(Monaco)에서 몬테카를로 랠리(Monte Carlo Rally) 시작 ☞ 프랑스 파리(Paris)에서 샤를 3세(CharlesⅢ)와 벨기에 귀족 앙투아네트 드 메로드 (Antoinette de Merode-Westerloo)사이에서 태어났다. 1889년 9월 10일 모나코 제10대 대공이 되었다. 1911년의 관광 증진을 위하여 몬테카를로 랠리(Monte Carlo Rally)를 창설하였다. 젊었을 때 스페인(Spain) 해군에서 복무했고 프랑스-프러시아 전쟁(Franco-Prussian War) 중에는 프랑스 해군에서 근무했다. 여기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Legion of Honor)을 받았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11 미국 캐딜락(Cadillac)社, 전기식 시동 모터 채택. 찰스 예일 나이트 더블 슬라이딩 컨트롤 밸브엔진(사일런트 엔진) 개발. 미국에서 밧데리 점화장치 생산.
▶ 1911 미국 올즈모빌(Oldsmobile)사, 차체 앞에 안전을 위한 완충기(緩衝器:shock absorber) 장착
▶ 1911 독일 한스 니벨이 만든 브리첸 벤츠가 운전한 봅 바만이 228.1km/h를 돌파
▶ 1912 찰스 케터링(Charles Kettering, 1876~1958), 셀프스타터(전기식 자동시동기) 발명 ☞ 세계 최초로 전기시동기(Electric starter)를 발명해 자동차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1904년 금전등록기를 발명했고, 델코社(DELCO : Dayton Engineering Laboratories Company)를 설립해 자동차 전기장비를 설계했다. 1910년 전기시동기를 개발하여 1912년 캐딜락에 최초로 장착했다. 1916년 델코社가 제너널모터스(GM)의 전신인 유나이티드모터스의 자회사가 되어 1920~1947년 GM의 부사장 겸 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한편 1914년에는 데이턴-라이트항공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1차대전 중 프로펠러로 구동되는 유도 미사일을 개발하기도 했다. 또한 케터링은 자동차용 빨리 마르는 래커를 개발했고, 노킹 방지 연료와 가연(可鉛) 휘발유 개발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고속 2행정 사이클 디젤 기관과 회전식 고압축 자동차 기관도 개발했다. 뉴욕 암연구센터(Memorial Cancer Center)에 슬론-케터링 암연구소를 설립했고, 엽록소와 광합성 연구를 위한 C.F.케터링 재단도 설립했다.
▶ 1913 미국 포드(Ford)社, 미시간주 하일랜드 파크의 새 공장에서 컨베이어 시스템에 의한 대량생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의 꿈을 이루어 주었다. 포드 T형은 당시 다른 자동차들이 1천 달러 정도인 데 비해 440달러에 판매됐다.
▶ 1914 미국 오하이주의 클레브랜드(Cleveland)ㆍ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Detroit)에 세계 최초의 신호등 등장. 미국의 에드워드 고엔 버드는 자동차 강철바디를 생산
▶ 1916 수동식 와이퍼(Wiper) 등장 ☞ 정식 명칭은 Windshield Wiper이며, 사용이 불편해서 실제 실용화 되지 못했다.
▶ 1917 프랑스 시트로엥(Citroen)사, 현재의 것과 똑같은 강판(鋼板, Steel sheet) 프레스의 디스크 휠(Disk wheel) 채택.
▶ 1918 미국 더지社, 전부 강철제 차체의 대량생산 차 발표
▶ 1919 미국 3색 신호등 등장
▶ 1919 헨리 리랜드(Henry Leland), 링컨(Lincoln)社 설립 ☞ 캐딜락과 함께 미국의 프리미엄 세단 브랜드로 잘 알려진 링컨은 탄생부터 아이러니하다. 캐딜락을 설립한 헨리 리랜드(Henry Leland)가 세운 회사이기 때문이다. 리랜드는 당초 자동차 부품회사로 캐딜락을 설립해 운영해오다 윌리엄 듀란트와 함께 GM그룹을 설립했다. 이때부터 캐딜락을 럭셔리 브랜드로 운영해왔던 리랜드는 1차대전 당시에는 항공기 엔진 회사를 만들어 군수업체로 변신했으나, 듀란트와 경영방식에 차이를 보이면서 결국 캐딜락을 떠났다.
이후 리랜드는 1919년 자동차 엔진을 다시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0년 링컨 자동차 회사(Lincoln Moter Company)를 정식으로 설립했다. 회사 이름을 ‘링컨’으로 정한 것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에이브라험 링컨’이였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링컨을 설립한 리랜드는 1922년 GM그룹의 라이벌이었던 포드 자동차그룹에 럭셔리카 디비전으로 편입된다. 주문식 생산방식으로 운영됐기 때문에 재정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 1919 앙드레 시트로엥(Andre Citroen, 1878 ~1935), 시트로엥社 설립 ☞ 1919년 앙드레 시트로엥이 기어를 만드는 회사로 창립하여, 유럽 최초의 대량생산 제조업체가 되었다. 시트로엥의 엠블렘은 V자가 거꾸로 두 개 겹쳐져 있는 모양으로 더블 셰브런(Chevron, 갈매기)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당시 시트로엥에서 생산하던 기어으 톱니바퀴가 갈매기 모양이었는데 여기서 착안하여 엠블렘을 만들었다.
1921년 생산된 SCV는 프랑스의 ‘포드 모델 T'라고 일컫는다. 1934년의 11CV는 전륜구동(前輪驅動)ㆍ단체구조(單體構造)의 진보적인 자동차이며, 1957년까지 기본적으로 동일한 스타일을 유지하였다. 모두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의 산물이며, 독특하고 진보적인 형태와 기구(機構)로 되어 있다. 특히 시트로엥 BX-600은 일본의 《오토 매거진》지(誌)가 실시한 1983년도 인기투표에서 3위에 입상하였다. 1950~1960년에는 연간 20~30만 대, 1960년대에는 40-50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였으나 이후 경영난으로 인해 1976년 프랑스의 자동차업체인 푸조에 흡수되었다. 세계 80개국에 지사 및 현지 법인이 있으며 본사는 파리에 있다.
05. 1920∼1930 더욱 빠르고 더욱 안전하게
자동차 업체들은 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며 더욱 빠르고 안전한 자동차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속도가 빨라진 것은 물론이고, 생명을 보호하는 안전장치와 보호장비가 개발된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생산한 자동차의 성능을 시험해 보이기 위해 각종 자동차 경주에서 경쟁을 벌였는데, 세계를 열강하게 만든 이 경주들을 통해 자동차 산업과 기술은 더욱 발전했다.
▶ 1920 독일 다임러(Daimler)社, 수퍼차저(Supercharger) 채택 ☞ 엔진에 공기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보면 크게 자연흡기(N/A)엔진과 강제흡기(Charged)엔진으로 나뉘어진다. 강제흡기 방식에서도 크게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Super Chager이고, 다른 하나는 Turbo Charger 방식이다. Super Charger는 엔진의 구동력을 이용해서 회전력을 얻고 그 회전력을 통해 엔진으로 유입되는 공기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연료량 보정의 수반과 출력상승으로 이어진다.
▶ 1921 미국 듀센버그(Duesenberg) 최초로 4륜 유압 브레이크를 적용한 듀센버그(Duesenberg) 모델A 발표 ☞ 1930년대에는 누군가 듀센버그 차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당대 최고의 부를 누릭 있음을 의미했다. 듀센버그는 당시 유럽의 메르세데스 벤츠, 이스파노 수이자, 롤스로이스 등과 견줄 만한 미국의 최고급 럭셔리카였다.
듀센버그의 첫 차인 모델 A(Model A)는 1921년 프랑스 그랑프리와 1924, 1925년 인디 500경주 우승 경주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고, 1920년대 말 회사는 존폐의 위기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엔지니어인 프레드릭 듀센버그(Frederick Duesenberg)와 사업가인 E.L. 코드(Errett Lobban Cord)가 의기투합해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모델 J인데, 1929년 첫 선을 보이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E.L. 코드의 표현을 빌면 “세상에서 네 바퀴를 가진 것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었다. 트윈 오버헤드 캠샤프트, 32밸브의 6.8리터 직렬 8기통 엔진에서 뿜어 나오는 강력한 힘은 경주 경험과 프레드릭 듀센버그의 철저한 품질 완전주의 덕분에 가능했다. 당시 다른 차들에 비해 100마력이나 더 높은 265마력의 최대출력과 205km/h의 최고속도를 기록했다. 4륜 유압 브레이크에 앞, 뒤 리프 스프링을 갖춘 새시는 너무도 견고하여 새시 무게만 2통에 달했다.
▶ 1922년 유럽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오스틴 세븐을 생산시작 ☞ 1920년대 영국의 차들은 한결같이 덩치가 크고 운전이 힘든데다가 값이 비싸서 돈 있는 사람이 아니면 살 수가 없었다. 이러한 때 허버트 오스틴은 값싼 소형차 "오스틴 7"을 1921년에 내놓아 유럽의 자동차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차가 바로 미국의 포드 모델T와 필적 할 수 있는 영국의 포드 T형차였다. 오스턴7은 두 명의 어른과 세명의 아이들이 편히 탈 수 있는 넓은 실내와 획기적인 연료 절감을 할 수 있는 소형차였다. 엔진은 스태니 에지(Staney Edge)에 의해 설계되었다. 이차는 1939년까지 생산되어 전 세계로부터 인기를 모았고, 단번에 영국 서민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여 당시 영국 최대의 베스트셀러카가 되었다.
자동차의 대중화를 위해 태어난 오스틴7은 당시 엔진 출력으로 부과되던 자동차 세금제도에 따라 10마력의 힘에 해당하는 7파운드의 세금을 내 세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작고 튼튼하며 값싼 이 차는 A모양의 섀시와 아주 작은 747cc 4기통 엔진을 얹었다. 처음에 2인승이 나왔고 곧 '박스'라고 부르는 4인승 세단도 나왔다. 세븐은 튼튼하고 싼값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고 싶어했다. 또한 이차는 프랑스에서 "심카 로랑가르(Rosengart)", 독일에서는 "BHW 딕시(Dixi)", 미국에서는 "벤텀", 일본에서는 "닷선(Datsun)"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져 그야말로 월드카가 되었다.
▶ 1922 프랑스 시트로엥(Citroen)사, 855cc, 10마력의 라이트카의 5CV 발표, 소형대중차 붐을 일으킴 ☞ 시트로앵은 푸조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자동차 메이커이다. 시트로앵은 1919년에 설립된 회사로, 창립자 앙드레 시트로앵(Andre Citroen)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그는 타고난 매뉴팩처의 기질을 타고난 이었다. 산업사회를 제대로 이해해 앙드레 시트로앵은 당시 헨리 포드의 컨베이너 벨트 대량 생산방식을 도입해 하루에 5만 발의 포탄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렇게 성장한 시트로앵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포탄의 대량생산으로 때돈을 벌며, 자동차로 사업을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1923년에는 Type C "5CV"를 선보이며 포탄판매이후 또 한 번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시트로앵은 5CV의 성공은 유럽 자동차 시장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유럽의 부유층들은 자동차의 기동성과 편리성을 알게 되면서 마차를 버리기 시작해, 어쩌면 초대 모터 제네레이션을 이끌었다. 시트로앵 5CV의 인기는 당시 다른 자동차 메이커가 복제품을 만들어 팔 정도에 이르렀다. 오펠은 5CV을 그대로 배껴서 색깔만 바꿔 팔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5CV는 노란색으로 판매되어 시트롱(귤)이란 별명을 얻었고, 오펠이 만들었던 카피 모델은 초록색으로 라우프프로시(청개구리)라고 불렸다. 시트로앵은 이후 포드의 대량생산 방식을 도입하며 성장했다. 1948년에는 2CV, 1955년 파리모터쇼에서 파격적인 디자인을 한 DS를 선보이며 선전했다. 당시 선보였던 DS는 20세기부터 지금으로 이어지는 시트로앵 특유 보디 디자인의 모체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1922 이탈리아 빈센찌오 란치아(Vindenzo Lancia) 란치아사, 골조(Frame)을 쓰지 않는 모노코크 구조(Monocoque Body) 무개차(open wagon, 無蓋車) 람다(Lambda) 발표 ☞ 모노코크(Monocoque) : 모노코크는 바디와 프레임이 하나로 되어 있는 차량 구조로서, 일체구조, 단체구조, 유니트컨스트럭션, 유니타이즈드바디, 셀프서포팅바디, 프레임리스바디 등으로 부른다. 별도의 프레임 없이 바디 자체가 프레임 역할을 한다. 모노코크는 바디 자체를 견고하고 가벼운 상자형으로 만들어 그 위에 엔진이나 서스펜션, 변속기 등을 조립한다.
<장점> 1. 프레임 차량에 비해 중량이 가벼워 연비 효율이 좋다.
2. 실내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다.
3. 원가가 저렴하다.(부품수 감소, 중량절감)
4. 제조공정의 간소화로 자동화가 가능하고 따라서 생산성이 높다.
<단점> 1. 프레임 차량에 비해 강성이 약하다.(프레임 차량에 비해 사고 발생시 충격에 약해 승객안전에 불리하다. 그러나 충돌 시에 앞뒷쪽의 크럼블 존이 충격을 잘 흡수해주게 되면서 운전자의 공간을 잘 확보해 주기 때문에 안정성이 프레임 차량과 거의 동일해지고 있다.)
2. 플랫폼 변경시 초기비용이 많이 든다.(뼈대와 차체가 일체식이기 때문에 다른 차량을 제작시 다른 모노코크를 설계해야 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페이스리프트(외관만 살짝 수정하는 것)를 한다.)
3. 차체가 받는 힘을 고르게 분산하여 고른 강성을 유지하기 위한 설계기술이 필요하다.
4. 프레임 차량에 비해 차량의 노후화가 빠르게 진행된다.(장력이 약한 철판으로 바디를 만든 차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바디가 휘거나 비틀어질 수도 있다.)
▶ 1923 프랑스에서 최초의 “르망 24시간”경주 개최
▶ 1924 독일의 초소형차 몰모빌 생산. 독일의 MAN에서 디젤트럭 생산
▶ 1925 윌터 크라이슬러(Walter P. Chrysler, 1875~1946), 크라이슬러社 설립 ☞ 미국의 3대 자동차 회사중 하나인 크라이슬러는 1998년 독일으 자동차 회사인 다임러 벤츠와의 합병으로 또 하나의 거대 자동차 기업인 다임러 크라이슬러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이러한 크라이슬러는 1875년 4월 2일 미국 캔사즈주 시골에서 태어난 월터 크라이슬러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월터 크라이슬러는 18세 되던 해 철도수리공의 견습공으로 취직되면서 기차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으로 기계제작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기차를 수리하던 그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다양한 도구들을 만들어 뛰어난 손재주로 기계에 대한 재능을 발휘하였는데,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게 되어 아메리카 기관차 회사의 공장장이 되었다.
이후 뷰익(Buick)자동차 회사인 관리자가 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강철로 된 자동차 보디를 개발하고, 자동차 보디 전문 공급업체를 많이 사들이라고 제안하는 등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세우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1916년 뷰익의 사장겸 제너럴 모터스(GM)의 부사장이 되었다. 크라이슬러는 GM 전 공장의 생산관리를 맡기도 했는데, 뷰익을 제너럴 모터스(GM)에서 가장 부가가치 높은 메이커로 만들었다.
이러한 성공을 거두었던 월터 크라이슬러는 기업의 경영자이던 윌리엄 듀런트와 불화가 심해지자 1919년 회사를 떠나게 되었는데, 떠난 지 6개월이 지난 후 사정이 좋지 않았던 오버랜드 맥스웰 컴퍼니(Maxwell Company) 자동차 회사를 500만 달러에 인수하여 또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월터 크라이슬러는 ‘기업 의사(Company Doctor)'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오너로써 본격적인 경영을 하게된 크라이슬러는 자신만의 차를 만들고자 하였고 결국 1924년 뉴욕모터쇼를 통해 ‘크라이슬러 6(Chrysler Six)'를 출시하였다. 이 차량은 3,300cc의 6기통 엔진을 적용하였고 비교적 조용한 정숙성과 동시에 당시 다른 차량에서 볼 수 없었던 에어크리너, 교환할 수 있는 오일 필트, 4바퀴 유압브레이크 등이 많이 이들로부터 극찬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고급부품을 많이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값이 싼 것이 장점이었던 클라이슬러 6은 양산된 첫 해 32,000대나 팔리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925년 자신이 인수한 맥스웰을 자신으 이름인 ‘크라이슬러’로 바꾸게 된 월터 크라이슬러는 사업의 확정을 위해 더 많은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학 되었다. 이러한 성공으로 계속되자 사업을 보다 확장하기 위해 1928년 닷지 브라더스(Dodge Brothers), 플리머스, 데소토 등의 인숭 성공해 그 회사의 규모는 더욱 커지게 되어 미국내 제3의 자동차 생산업체가 되었다.
계속된 성공 가도를 달리던 크라이슬러는 1934년 최악의 실패작으로 불리는 ‘에어 플로우(Airflow)'로 인해 경영이 악화되었지만 다음에 출시한 최신 모델로 인해 크라이슬러는 파산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듯 미국 자동차 산업에 큰 이바지를 하고 성공을 누렸던 월터 크라이슬러는 1940년 8월 18일 6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크라이슬러는 월터가 죽음을 맞이한 후 계속적인 합병과 인수로 그 규모를 더욱 키우게 되었으며, 1960년 머슬 카(Muscle Car)의 붐이 일어나는 바람에 생산량과 판매가 급증하여 성장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융회사 부동산 회사를 설립하는 등 사업의 무분별한 확장과 오일 쇼크로 인한 경영악화로 1979년 프랑스 푸조를 매각하였고, 여러 차례 부도위기를 겪었으나 리 A. 아이아코카(Lee A. Iacocca)의 경영하에 1983년 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87년부터는 AMC의 인수로 지프 디비전을 더해 SUV와 미니밴 등 RV시장에서 강자로 부상하였으나, 1990년대 초 새차 개발을 소홀히 하고 항공기 메이케 인수 등 전과 같은 사업 확장으로 시장점유율과 매출이 큰 폭으로 하락하여 내수시장에서 신흥 일본 메이커인 혼다에게까지 밀리게 되어 점차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크라이슬러는 1998년 독일의 벤츠와 합병하였고 이후 새롭게 출범함 다임러 크라이슬러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그 영향력을 더욱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크라이슬러를 세운 크라이슬러의 삶은 가장 미국적이었고 미국의 자본주의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 1925 미국 듀센버그(Duesenberg)社, 4륜에 유효한 유압(油壓)브레이크 채택 ☞ 최고급 프레스티지카의 세계에서 듀센버그는 모델J와 SJ로 1930년대 자동차 황금시대에 큰 빛을 더했다. 프레드와 오거스트 듀센버그형제는 경주차 엔진으로 명성을 얻은뒤 1920년 1호차를 만들었다. 듀센버그는 17년간 1천대가 조금넘는 자동차를 만들었다.
대형 호화차의 황금시대인 193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빛났던 프레스티지카는 무엇이었을까? 전문가들은 듀센버그를 꼽는다. 1929년 데뷔한 듀센버그 J, 1932년에 수퍼차저를 더하면서 등장한 듀센버그SJ는 30년대 미국 프레스티지카의 챔피언이다.
1930년대 헐리우드 스타들에게는 두가지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 1927년 시작된 오스카상과 화려한 듀센버그였다. 당시 최고 스타였던 클라크 게이블, 게리쿠퍼, 그레타 가르보, 메이 웨스트 등이 모두 듀센버그 오너였다. 영화배우만이 아니였다. 이태리와 스페인왕 유고슬라비아 여왕, 루마니아 왕자등 여러나라의 왕과 왕족이 탔고, 신문왕 윌리엄 허스트, 사업가 하워드 휴즈도 듀센버그를 사랑했다.
명성과는 달리 듀센버그는 17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차를 만들었고 차종과 생산대수도 많지 않다. 프랑스 그랑프리 우승, 인디500 연승에 빛나는 경주차를 제외하면 1920년 선보인 A형과 1929년의 J, 1932년의 SJ 세가지이다. 그중 SJ는 J에 수퍼차저를 더한 모델이다. 대수도 A형 600대, J와SJ가 470대로 모두 1천대를 조금 넘는다.
듀센버그는 어린 나이로 1880년대 독일에서 미국 아이오와로 농업 이민온 프레드 듀센버그(Fred Duesenber, 1874~1932)와 오거스트(August Duesenber, 1876~1955)가 세우고 키운 메이커였다. 일찍이 기술을 익힌 듀센버그 형제는 19세기말 경기용 자전거 제작과 프레드의 잇따른 자전거경기 우승으로 유명해 졌다. 20세기가 되자 프레드 듀센버그는 위스콘신주의 램블러자동차에서 2기통 자동차를 만들었다. 이차가 힐클라임 레이스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것을 계기로 프레드는 경주차에 관심을 갖게 되고, 1920년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했다. 1913년에는 뉴저지주에 공장을 짓고 경주차 엔진과 선박엔진을 개발했다. 1차대전중에는 항공기 엔진도 만들었다. 속도기록에서도 좋은 성과를 얻은 듀센버그 형제는 경주차 엔진과 차체 제작에서 얻은 기술을 토대로 1920년 인디아나주 인디아나폴리스에서 듀센버그 자동차를 발족시키고 1호차 A형을 선보였다. 듀센버그 A형은 직렬 8기통 4천264cc 88마력 엔진을 얹었다. 미국차로는 처음으로 오버헤드 캠샤프트(OHC)를 썼고, 유압 브레이크등 첨단기술을 이용했다. 최고 시속은 136km. 당시로는 상당한 스피드였다. 이 차는 1926년까지 600대가 만들어 졌다.
경주차엔진에 자신이 있는 듀센버그형제는 1921년 프랑스 그랑프리에 출전해 우승했다. 미국차로는 첫 영예였다. 뒤이어 1924,25,27년 세 번에 걸쳐 인디500 레이스를 제패해 명성을 다졌다. 그러나 프레드와 오거스트는 기술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회사경영은 미숙했다. 20년대 중반 회사는 자금난을 겪게 되었다. 이때 손을 뻗은 이가 그 무렵 미국 비즈니스세계에 해성처럼 등장한 오번자동차의 사장 에레트 코드였다. 코드는 듀센버그형제의 뛰어난 기술과 듀센버그의 명성을 기초로 세계제일의 프레스티지카를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1926년 듀센버그를 합병했다. 코드는 듀센버그형제가 마음대로 새차를 개발할 수 있로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년뒤인 1928년 열린 뉴욕 오토살롱에서 베일을 벗은 호화차가 이들의 꿈이 담긴 듀센버그J다. 직렬8기통 엔진은 더블 오버헤드 캠샤프트(DOHC) 4밸브였다. DOHC는 그 무렵 경주차와 유럽의 일부 소량생산 스포츠카에 쓰던 메카니즘이었다. 화려한 스타일링과 내장을 갖춘 듀센버그J는 6,882cc 265마력 엔진으로 최고시속 186km를 냈다. 265마력은 16기통 엔진을 쓴 캐딜락 V16의 175마력, 이스파노 스이자의 220마력에 훨씬 앞서는 출력이었다. 듀센버그J는 1932년 수퍼차저를 더한 SJ로 발전했다. 최고출력은 320마력, 최고시속은 205km로 높아졌다.
1929년 경제공항이 시작되었으나 기본값 8천500달러에 코치빌더의 손을 거치면 2만달러 가까이 되는 듀센버그J는 큰 인기를 누렸다. 경제공항속에서도 왕족과 부호, 영화배우등은 좋은차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고, 벼락부자들은 듀센버그로 재력을 과시했다. 듀센버그 J와 SJ는 이름난 코치빌더들이 차체와 내장을 꾸미는 것이 원칙이었다. 머피, 르바론, 롤스턴등이 한 대 한 대 다르게 듀센버그를 꾸몄다. 1937년까지 모두 470대(그중 SJ는 36대)가 생산되었다. 뒤에 나온 SJ는 엔진룸에서 배기 매니폴드 넷을 차체 밖으로 끌어낸 디자인이었다. '최고'를 원하는 이들은 수퍼차저를 추가했고, 일부 오너는 치장으로 4개의 배기 매니폴드를 달아 남의 눈을 속이기도 했다.
인기차 듀센버그SJ에는 1937년 휠베이스가 짧은 SSJ 2대가 추가 되었다. 바로 클라크 게이블과 게리 쿠퍼의 차다. 미국에서 듀센버그의 인기는 롤즈로이스를 누르는 기세였다. 더 비싼차는 부가티 하나밖에 없었다. 세계 호화차 시장의 정상에 섰으나 듀센버그와 듀센버그 형제는 멀지 않아 비운을 맞이 하게 된다. 형 프레드는 SJ가 나온 얼마뒤, 머피가 마무리한 SJ 컨버터블을 시운전하다 흙탕길에서 추돌사고를 냈다. 교통사고의 충격에서는 회복 되었으나 2주일뒤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56세였다. 듀센버그의 기술책임자 자리는 아우 오거스트가 이었다.
듀센버그는 경제공항을 견뎌냈으나 30년대의 불경기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주원인은 모기업인 코드제국의 몰락에 있었다. 듀센버그는 1926년 에레트 코드의 도움으로 경영난을 넘기고 그의 지원으로 J와 SJ를 내놓아 명성을 얻었다. 코드는 자기성을 이름으로 쓴 코드자동차까지 창립했으나 불경기에 시달리면서 자동차에 대한 정열을 잃어갔다. 코드그룹이 1937년 도산함으로써 듀센버그도 차 만들기를 그쳤다. 2년뒤 유럽에서 2차대전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난 2년 뒤인 1947년, 오거스트 듀센버그는 듀센버그의 명성을 되살리려 애썼으나 헛수고로 끝난다. 세상이 크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오거스트는 79세이던 1955년 생을 마쳤다. 60년대 2세들이 또 다시 듀센버그 재건에 도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70년대에는 레프리카 회사가 SSJ 로드스터 10여대를 만들어 화제를 뿌렸다.
미국 호화차의 대명사인 듀센버그는 17년의 짧은 역사로 막을 내렸다. 듀센버그형제는 뛰어난 엔진 설계자, 경주차와 고성능차 제작자였으나 사업가로서의 수완은 없었다. 그들이 만든 470대의 J와 SJS는 현재 360대가 남아 듀센버그 신화의 산 증인이 되고 있다. 그 신화는 같은 계열인 오번, 코드와 묶여 미시간주 오번에 있는 오번 코드 듀센버그자동차박물관으로 되살아 났다. 세 메이커는 ACD로 약칭되며 해마다 9월 노동절 연휴에 'ACD 페스티벌'을 열어 듀센버그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달래 주고 있다.
▶ 1925 미국 스터츠(Stutz)社, 겹유리에 의한 안전 윈도우 스크린 채택 ☞ 1911년 탄생한 미국의 자동차 회사 스터츠(1911~1928)의 첫번째 자동차인 베어캣은 단 5주만에 제작되어 바로 인디애나폴리스에서 11위를 차지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6400cc의 큰배기량을 뿜어대는 베어캣은 스터츠 고유의 트랜스 액슬과 3단변속기, 원형 방풍유리등을 장착하고 있었다. 특히 이 차 고유의 모습 덕분에 당시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스포츠카로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회사가 20여년 만에 문을 닫는 바람에 큰 성장을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 1925 미국 시보레(Chevrolet)사, 승차감 향상을 위하여 저압(低壓)타이어 채택
▶ 1926 다임러(Daimler)와 벤츠(Benz)가 합병하여 다임러-벤츠(Daimler-Benz AG)社 설립 ☞ 1883년에 K.벤츠가 설립한 벤츠와 1890년 G.다임러가 설립한 다임러가 1926년에 합병하여 설립하였다. 1928년 당시 유명하였던 고성능차 메르세데스(Mercedes)-ssk를 생산하고, 1936년 세계 최초의 디젤승용차 메르세데스 260D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항공기 엔진과 전차를 생산하였고, 1950년대부터 1965년까지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업체를 흡수합병하거나 매각하여 사세를 확장하였다.
1969년 승용차 부문에 진출, 유럽 최대의 트럭ㆍ버스 제조업체가 되고, 1970~1980년대는 승용차 생산거점을 미국ㆍ남미ㆍ남아프리카 등지로 확대하였다. 1982년 이후 소형차 메르세데스 190의 판매를 시작, 종래의 중대형 승용차에서 소형으로 전환하는 등 변화하고 있다. 1998년 5월 미국 크라이슬러를 인수하기로 합의하였으며, 11월 미국 크라이슬러와 합병하여 다임러크라이슬러(DaimlerChrysler)가 되었고 2007년 크라이슬러를 매각한 후 다임러 AG가 되었다.
▶ 1926 미국 캐딜락(Cadillac) 자동차에 최초로 안전유리(Shatter-resistant glass)가 장착됨
▶ 1927 독일 오펠(Opel)社 로켓 자동차 "Rak Ⅱ" 발명, 시속 200km 기록 ☞ 1862년 1월 21일. 독일 중서부 헤센(Hessen)주의 러셀하임(Russelsheim)에 아담 오펠(Adam Opel, 1838~1895)이 재봉 기계 제조 회사를 설립하였다. 초기 오펠은 외양간엣 재붕 기계를 생산하였는데 완벽한 봉제 기계를 생산하던 오펠은 당시 크게 성공하였다. 사업이 빠르게 성장하자 1888년에는 외양간이었던 작업 공간에서 러셀하임의 넓은 건물로 이전하게 되었다. 성공에 힘입어 아담 오펠은 1886년 페니 파딩(Penny farthings)이라 알려져 있는 high wheel 자전거를 판매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게다가 오펠의 두 아들은 각종 자전거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함으로써 오펠이 제조한 페니 파딩(Penny farthings)이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리하여 오펠의 페니 파딩(Penny fathings)자전거의 생산은 곧 재봉 기계의 생산을 초과하기 시작했고 오펠이 사망한 1895년에 오펠사는 재봉 기계와 페니 파딩(Penny Farthings)자전거 시장에서 가장 앞선 선두주자였었다. 하지만 유럽으 자전거 시장이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면서 오펠에서 생산한 자전거으 판매량도 줄기 시작했다.
아담 오펠은 세상을 뜨기 전에 당시 전 세계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던 내연기관 자동차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1895년 오펠이 세상을 뜨자 그의 뜻을 이어받아 아담 오펠의 다섯 아들은 시대적 흐름을 따라 자동차 산업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리하여 1898년 오펠사는 작센 안할트(Saxony Anhalt)주에서 자물쇠 제조를 하고 있으면서 여러 해 동안 자동차를 만들었던 프리드리히 루츠만(Friedrich Lutzmann)과 자동차 제조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였다. 1899년 오펠사와 루추만은 오펠 자동차의 시초이자 오펠 1호차인 ‘오펠 특허차, 루츠만 시스템’(Opel Patent Motor Car, System Lutzmann)이라는 자동차를 만들었지만 완전히 망했고 자동차 제조 계약은 2년후인 1921년에 해지되고 말았다. 오펠은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이지만 유럽에서는 승용차와 미니버스, 소형 밴 등을 생산하는 인지도가 높은 제조사이다. 현제 오펠은 GM의 자회사지만 독립적인 경영을 하며 독자적인 차종을 개발하고 있다.
▶ 1927 미국 포드(Ford)社 모델 T 생산을 중단하고 모델 A 발표 ☞ 포드 모델 A는 모델 T의 후속 차종으로 4년 동안 450만 대가 팔린 차로 1928년 발표 당시 뉴욕에는 25만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때 헨리 포드(Henry Ford)는 모델 A를 만들기 위해 모델T의 생산을 중단하고 거의 일년동안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포드는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면서 1903년 처음 사용하였던 모델 A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였다. 모델 A는 20년 전에 디자인 되어 19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던 모델 T와 완전히 다른 차였다. 유선형 펜더와 실내장식은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였고, 외관 디자인은 1919년 사장이 된 헨리 포드의 아들 에셀(Edsel)이 감독하였다. 모델 A는 강력한 4기통 엔진과 3단 기어를 장착했고, 모델 T에 장착되어 거친 길에서도 잘 견디는 것으로 입증된 트랜스버스 일립틱 스프링(Transverse elliptic spring)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그러나 1928년에는 좀 더 좋은 승차감을 위하여 유압식 쇽 업소버(Hydraulic Shock-absorber)을 장착했다.
모델 A는 350달러에서 570달러 사이의 가격으로 판매되었는데, 저럼한 가격은 1928년 미국의 경제불황에서도 강점이 되었다. 포드는 1929년 최고 경쟁업체인 시보레(Chevrolet) 보다 40만대 이상 더 판매했고, 1930년에는 110만대로 시보레의 두 배를 판매했다. 모델 A의 인기에 기여한 또 하나으 장점은 보디의 선택 범위가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2도어, 4도어 세단(별칭 Tudor, Fordor)과 2인승, 5인승 쿠페와 컨버터블, 그리고 전설적인 목재 장식의 우디(Woodie)라 불린 스테이션 왜건이 있었다.
▶ 1927 영국 시그레이브 선빔 차로 시속 328km 기록 ☞ 1910년 드디어 미국의 자동차광 바니 올드필드가 1909년 독일의 벤츠사가 만든 4기통 200마력엔진의 브릿젠 벤츠를 몰고 1910년 데이토나비치에서 시속 211.8km를 올려 비로서 휘발유차가 200kmdml 벽을 돌파 가소린자동차가 주도권을 잡기시작했다. 이렇게 1910년까지 속독록의 왕좌는 전기에서 증기로, 다시 증기에서 가소린차가 마지막에는 빼앗아 1910년부터는 완전히 가솔린판도로 변해 경쟁이 치열하게 이어졌다.
다음 목표인 시속 300km도전에서는 영국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27년 영국의 귀족 핸리 시그레이브경(Sir Henry Segrave)이 영국 메이커인 선빔자동차가 만든 12기통 1000마력의 선빔으로 이해 3월 29일 미국 데이토나비치서 시속 300km를 돌파 327.98km를 기록했다. 1910년부터 속도기록장경기소는 미국 데이토나비치로 이동했다. 16km거리의 딱딱하면서 부드러운 모래사장과 수많은 휴양인파들을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시그레브경의 300km는 곧이어 400km라는 새로운 도전을 끌어 들였다. 그로부터 5년후인 1933년 과거 일곱 번이나 기록을 세웠던 영국의 말컴 캠벨의 아들인 도날드 캠밸(Donald Campbell)이 성공했다. 400km부터는 자동차엔진으로 불가능했다. 캠벨은 V형 12기통에 수퍼차저가 달린 36,500cc 급 2300마력의 롤스로이그 비행기엔진을 얹은 불루버드(Bluebird)를 만들어 테이토나비치에서 439.12km를 기록 캠벨가와 불루버드는 속도기록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 1929 미국 캐딜락(Cadillac), 싱크로매시 기어박스(Synchromesh Gearbox)를 세계 최초로 개발. ☞ 변속기 시프트레버 움직임에 따라 원하는 기어끼리 조합하는 방식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된다. 대표적인 것이 슬라이딩매시와 콘스탄트매시 그리고 콘스탄트매시를 발전시킨 싱크로매시다. 슬라이딩매시는 카운터 샤프트 상으 기어가 앞뒤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든 뒤 원하는 단수의 기어만을 서로 맞물려 돌아가게 하는 방식이다. 수동 변속기으 기본이랄 수 있지만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반면에 콘스탄트매시 방식은 경주차용 변속기의 주류를 이뤄왔다. 모든 단수의 기어가 맞물려 있는 대신 메인 샤프트와 기어가 헛돌게 만들어졌다.
변속은 메인 샤프트에 달린 ‘시프터’가 움직여 샤프트와 기어를 연결해 동력을 전달하는 원리다. 콘스탄트매시는 기어와 샤프트의 회전수 차이가 크면 매끄럽게 변속할 수 없기 때문에 드라이버가 더블 클러치로 회전수를 맞추어야 한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현재 승용차용 수동 변속기의 주류가 된 것이 싱크로매시 방식이다.
싱크로매시는 기본 구조가 콘스탄트매시와 비슷하지만 시프터와 기어 사이에 싱크로나이저링이 설치되어 있다. 마찰 클러치으 일종인 콘(꼬깔)형태의 싱크로나이저링은 기어와 샤프트의 회전수를 비슷하게 맞춰 변속동작으로 매끄럽게 만들어준다. 빠른 변속이 필요하지 않은 일부 트럭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자동차용 자동 변속기가 싱크로나이저 기구를 달고 있다.
싱크로나이저링 하나를 쓰는 워너 타입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고성능과 내구성을 요구하는 스포츠카에는 더블콘, 트리플콘 방식도 쓴다. 마쓰다 RX-7의 경우 급가속에 가장 많이 쓰이는 2, 3단에 더블콘 싱크로매시 기구를 달고 있다. 이밖에 워너 타입보다 구조를 단순화한 혼다와 고성능의 포르쉐 타입도 있다. 포르쉐 싱크로나이저는 드럼 브레이크에 가까운 대용량의 마찰 클러치를 이용해 강력한 싱크로 성능과 내구성을 자랑한다.
▶ 1929 미국 듀센버그(Duesenberg), 모델 J(Model J)발표 ☞ 프레드, 어거스트 듀센버그 형제는 자신들의 첫 차 모델A로 프랑스 그랑프리와 인디애나폴리스500 경주에서 우승했지만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당시 어번자동차 사장이던 코드가 이들을 후원하면서 듀센버그 모델 J(Duesenberg Model J)가 탄생했다. 직렬 8기통 6.8리터(ℓ) DOHC엔진에 265마력, 최고 속도 186km/h이다. 1932년 슈퍼 차저를 더한 모델 SJ가 추가되었다. 모델SJ의 최대 출력은 320마력, 최고 속도는 205km/h이다.
클라크 게이블, 게리 쿠퍼, 그레타 가르보 등 헐리우드 스타와 사업가 윌리엄 허스트, 하워드 휴즈 등이 듀센버그를 탔다. 유럽에도 50여 대가 수출되었는데 각국의 왕과 왕족이 고객이었다. 1930년대 듀센버그는 최고의 부자만이 가질 수 있는 프레스티지카의 대명사였다. 듀센버그의 차는 보디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코치빌더들이 차체와 내부를 꾸몄는데, 약 175가지의 보디가 만들어졌다. 듀센버그 코치빌더 중 유명한 사람으로 게리 쿠퍼와 클라크 게이블의 차를 만든 라 그랑이 있다. 대공황과 뒤이은 경기불황을 이기지 못하고 듀센버그는 1937년 문을 닫는다. 1937년까지 모델J는 모두 340대가 생산되었다.
▶ 1929 프랑스 부가티(Bugatti), 타입 41 르와이얄(Type 41 Royale)발표 ☞ 에토레 부가티(Ettore Bugatti, 1881~1947)가 알자스의 몰샤임에 세운 자동차 제조회사이다. 밀라노의 예술가문에서 태어난 부가티는 자전거 회사에서 3륜차를 디자인하다가 자동차 만들기에 나섰다. 1901년 밀라노 박람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프랑스자동차클럽의 'T2'상을 타며 창의성을 인정받은 그는 1909년 낡은 염색공장에 회사를 차렸다. 1911년 '타입 13'은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2위로 들어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푸조에 라이센스를 준 '타입 19'는 '베베(Bebe)'라는 이름으로 성공했다.
1921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타입 13'을 내보내 1위부터 4위까지 휩쓴데 이어, 1924년에 발표한 직렬 8기통의 '타입 35'는 2천 번 이상 레이스에서 우승하며 부가티를 스포츠카의 전설이 되게 하였다. 일련의 차들을 공유플랫폼으로 제조해 합리적인 가격에 내놓는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전체길이 6.7m의 12.7ℓ '타입 41'은 대공황으로 6 대밖에 생산하지 못했지만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다. 1987년 경매에 나온 1 대는 2분 만에 5백만 파운드에 팔렸고, 1929년산 중 1대는 1995년부터 한국에 있다.
1930년대 후반 '타입 57'을 디자인 한 아들 쟝(Jean)이 경영일선에 나섰다. 타입 57은 '아름다운 투어링카'로 손꼽혀 약 750 대가 팔렸고, 1937년과 1939년 르망 24시간 경주에서 우승하였다. 그러나 쟝은 1939년 시험 주행 중에 죽었다. 며칠 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1947년에 에토레도 죽으면서 부가티는 쇠락의 길에 들어섰고 1956년 공장문을 닫았다. 부가티는 모듈 엔지니어링 개발 등 자동차산업에 여러 공헌을 하였다. 예술혼이 깃든 7,900 대의 원조 부가티 중 다수가 아직 건재하며 사람들의 아낌을 받고 있다.
1998년 독일의 폭스바겐에 사용권이 인수된 후 부가티는 최고 시속 300km가 넘는 수퍼 스포츠카 'EB118'를 발표한 데 이어, 8ℓ 16기통 1천마력의 'EB16/4 베이론(Veyron)'을 개발하고, 2005년 5월 시속 400km 돌파하는 시험 주행에 성공하였다.
▶ 1929 영국 보그졸(Borgsol)社, 싱크로메시式(synchromesh type) 변속기 채택 ☞
06. 1930∼1940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차들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이 식지 않는 많은 명차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히틀러가 타고 나찌 군대의 사열을 받았던 메르세데스 벤츠, 헐리우드의 톱스타들이 즐겨 탔던 듀센버그, 왕족이나 부호들이 애용한 롤스 로이스 같은 차들이 그 주인공, 이 명차들은 뛰어난 성능과 높은 품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신분과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 1930 미국 패커드(Packard)사, 오토초크 채택 ☞ 1899년 윌리엄 패커드(William Doud Packard:1861~1923)와 제임스 패커드(James Ward Packard:1863~1928) 형제가 설립하여 20세기 전반에 고급차로 명성을 누렸다. 이들은 1890년 전기회사를 설립, 운영했으나 윈튼(Winton)에서 이들을 영입했다.
1899년 2.4ℓ 단기통의 모델 A를 발표하고 록펠러에게 2대, 기존의 윈튼차 보유자들에게 5대 등 49대를 판매하여 처음부터 품질을 인정받았다. 1903년 패커드는 '올드 퍼시픽(Old Pacific)'을 내세워 샌프란시스코-뉴욕을 61일 만에 주파, 윈튼의 기록(64일)을 바꾸고, 이후 회사는 성장가도를 달렸다. 1907년경 패커드 형제는 회사를 헨리 조이(Henry Bourne Joy:1864~1936)에게 넘기고 전기사업으로 돌아갔다. 패커드전기는 1932년 제너럴모터스의 디비젼이 되고 현재 델파이패커드라는 세계적 자동차 배선회사가 되었다.
1910년대 초 전문경영인 맥컬리(Alvin Macauley)와 엔진디자이너 빈센트(Jesse G. Vincent)가 합류하면서 패커드는 도약하였다. 캐딜락의 V8 엔진에 맞서 1915년 세계최초로 V12 엔진을 개발해 내놓은 모델 트윈 식스(Twin-Six)는 이들의 작품이었다. 이 엔진은 부드럽고 조용하며 기존 6기통보다 짧고 가볍고 값쌌다. 1921년 백악관에 최초로 차로 입성한 하딩에게 선택되면서 패커드 브랜드는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이후 패커드는 피어리스ㆍ오번ㆍ코드ㆍ듀센버그 등 대부분의 고급차 제조사들이 넘지 못한 1930년대의 고비를 넘고, 1941년 중형차 가격의 클리퍼(Clipper)를 출시하여 7개월간 1만 6,600대를 팔았다. 그러나 클리퍼는 오늘날 패커드의 몰락을 당긴 차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때까지 포지셔닝해온 고급차시장에서 스텝다운하여 일시 성공하였지만 이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후 입지를 잃었다는 것이다. 패커드는 1954년 스튜드베이커와 합병하고 1958년에 무대에서 사라졌다.
▶ 1931 미국 자동차 생산 5천만대 돌파. 크라이슬러가 플로팅 파워 엔진지지장치 개발
▶ 1932 독일 아우디(Au야)의 전신인 아우토 유니언社(Auto Union AG)설립 ☞ 아우디(Audi)는 1932년 경제불황과 경쟁심화로 자동차업계 전체가 휘청거릴 때 독일 내 4개의 다른 자동차회사인 반더러(Wanderer), 호르히(Horch), 데카버(DKW), 아우디(Audi)와 통합하여 ‘아우토 유니온’을 만들었다. 아우디 엠블럼인 4개으 동그라미는 이 내 회사를 의미한다. 아우디의 역사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으로 공장이 완전파괴되기도 하였고 경영악화로 1956년 벤츠 산하에 들어갔다가 1964년 폴크스바겐 그룹에 통합되었다. 1969년 아우투 유니온에서 아우디(Audi)로 회사 명칭을 바꾸고 로터리 엔진으로 유명한 NSU와 합병하였다.
▶ 1932 미국 뷰익(Buick)社, 자동 클러치와 원격조정식 변속 레이버에 의한 2페탈의 간편한 운전방식 개발
▶ 1933 미국 제너럴모터즈(General Mortors)社, 충돌과 충격에 관한 과학적 실험 개시
▶ 1933 아돌프 히틀러, 프랑크푸르트-다름슈타트間 아우토반 착공 ☞ 정식 명칭은 라이히스 아우토반(Reichs Autobahn)이다. 도로의 너비는 18.5∼20m이고, 중앙에는 3.5∼5m 너비의 녹지대(중앙분리대)가 있다. 권장 속도 시속 130km라는 간판이 대부분 세워져 있고, 도시 권역이나 위험 지역의 경우에는 시속 100km라는 속도 제한 표지도 가끔 보인다.
1932년 쾰른과 본 사이를 왕래하는 최초의 아우토반이 완공된 지 6년 만에 모두 3,000km에 이르는 고속도로망이 확충되었다. 흔히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이 도로의 건설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13년부터 1921년까지 베를린에 실험적으로 건설된 아부스고속도로(Avus experimental highway),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북부의 호수들까지 연결시켜 놓은 130km 길이의 아우토스트라다 유료도로(autostrada tollway:1923년 완공)였다.
오늘날에는 총연장 1만 1000km에 이르며 통일된 국토의 대부분에 미치고 있다. 아우토반을 비롯한 기타 고속도로의 추가 건설 계획은 환경 문제를 이유로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다. 2000년대 들어서도 독일 북부 발트해(海) 연안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는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독일 동부 지역의 경제적 이익을 강조하는 사람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오스트리아에도 아우토반이 있다. 이곳에는 시속 130km의 속도 제한이 있고, 산악 지역의 경우에는 공기업에 의해 유료화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 1934 프랑스 시트로엥(Citroen)사, 모노코크 차체의 전륜구동(前輪驅動) 소형차인 7CV 발표 ☞ 앞바퀴에 엔진이 있으면서 앞바퀴를 굴려 차를 움직이는 FF 방식의 차는 우선 엔진에서 만들어진 동력을 굴림바퀴에 전달하는 구동축이 생략되어 차의 실내 공간이 넓어지는 장점이 있다. 구동축의 생략으로 차의 무게를 줄일 수 있어 연료의 소모도 줄일 수 있다. 네 바퀴에 각각 독립된 현가장치를 달아 뛰어난 승차감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FF 차는 엔진과 구동축의 하중이 모두 바퀴에 걸려 직선으로 나가려 힘이 크다. 따라서 직진 안정성이 뛰어나다. 그러나 앞바퀴가 차를 끌고 있을뿐 아니라 방향까지 정하기 때문에 노면이 고르지 못할 때에는 핸들 조작이 어려워지는 단점이 있다. 또한 조종장치와 굴림장치가 모두 앞쪽에 몰려 있다는 구조적인 복잡성도 결점이다.
현대적인 FF 차는 1934년 프랑스의 시트로엥 7CV 이며 대표적인 차로는 폴크스바겐 골프, 혼다 시빅 등이다. 석유파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FR 차를 고집하던 미국의 최초의 FF 차로 도산하기 일보 직전의 크라이슬러를 구해준 플리머드 홀라이즌의 출현 이후 캐딜락도 앞바퀴굴림을 택한 모델을 생산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생산하고 있는 대부분의 소형차도 앞바퀴굴림으로 1985년 3월에 데뷔한 현대자동차의 엑셀에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 1934 미국 크라이슬러(Chrysler)社, 플루드 커플링(유체 이음매)과 자동변속기 조합에 성공, 전자동의 간편한 운전 가능, 중형차의 공기 흐림이 쉽도록 유선형 에어플로우(Chrysler Airflow) 차체 발표 ☞ 1930년대 들어서는 디자인에도 눈을 돌려 당시로는 획기적인 스타일이었던 에어플로와 에어스트림을 발표했다. 이미 1927년부터 항공역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칼 브리어(Carl Breer)는 그 상상력의 결과로 1934년 에어 플로우(Airflow:기류)라는 새 모델을 선보였는데, 이 차는 풍동실험을 통해 공기저항을 최소한으로 줄인 유선형 모델로 다른 메이커들은 물론 향후 크라이슬러의 차량 개발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디자인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판매에 실패했고, 반면 고전적인 직선 보디에 적당히 굴곡을 넣은 에어스트림(35년)이 잘 팔렸다.
▶ 1935 미국 오클라마市(Oklahoma City)에 최초의 주차요금 미터기 등장
▶ 1936 독일 국민차 폴크스바겐(volkswagen) 승용차 개발 ☞ 1937년 5월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설립된 독일국민차 준비회사가 전신이며, 1938년 9월 폭스바겐 유한회사로 개칭하였다. 폭스바겐은 독일어로 '국민차'란 의미이며 딱정벌레형 폭스바겐의 원형은 명설계자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가 만들어냈다. 그는 이미 1936년 10월에 딱정벌레형 폭스바겐의 원형을 발표하였다. 니더작센주 볼프스부르크의 대공장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었으나 1945년 생산을 재개하였고, 미국에 상륙한 폭스바겐은 초기의 부진을 씻고 1959년 획기적인 대대적 광고로 판매에 호조를 기록하였다. 1960년 주식을 공개, 민영화하고, 1969년에는 아우디NSU아우토우니온을 산하에 두었다.
딱정벌레형은 기본적인 모델을 바꾸지 않은 채 1978년 1월 서독 본국에서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1927만 대나 생산되었고, 그 후속으로는 각종 후보차가 있었으나 결국 1974년 봄에 발표된 래빗으로 결정되었다. 폭스바겐은 전세계에 자회사를 두고 있으며 이들 공장에서는 승용차ㆍ미니버스ㆍ봉고 등 차량과 자동차부품도 생산하고 있다. 1990년 체코의 자동차회사인 슈코다(Škoda)를 인수하여 유럽 최대의 메이커가 되었다. 연간 평균 생산대수는 약 520만 대(독일 180만 대, 기타지역 340만 대)이고 고용규모는 총 30만 명(독일 15만 명, 기타지역 15만 명)이다. 본사는 볼프스부르크에 있다.
▶ 1936 독일 다임러-벤츠(Daimler-Benz AG)社, 최초의 양산 디젤 엔진 승용차 “모델 260D”발표 ☞ 메르세데스ㆍ벤츠의 역사는 자동차의 이노베이션(Innovation)의 역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이 260D는 자동차 역사에서 중요한 모델의 하나이다. 데뷔는 1936년, 75년전의 차로서 세계에서 처음으로 디젤 엔진을 탑재ㆍ시판한 승용차이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가장 발달했던 독일 공업력이 낳은 진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의 중형 메르세데스 230의 샤시에, 직렬 4기통 2.55리터 OHV45PS의 예연소실식 디젤 엔진을 탑재해 95km/h의 소고 스피드와 10.6km/L의 평균 연비를 실현했다. 보디는 표준으 세단 외에, 본격적인 풀만리무진(PULLMAN LiMOUSINE)에 긴 세단(독일에서는 세단을 리무지네로 말한다)과 택시용의 란도레도 제조되었다. 베를린 쇼로 데부해Tdf 때는, 택시 수요를 전망해 란도레(Landaulet, 오픈차중 운전석은 지붕이 있고 뒷좌석은 오픈되는 형식)보디차가 출품되었지만 실제로는 프라이빗 유즈에 이용하는 고객의 수요가 예상외로 많았다고 한다. 타입 230의 가솔린에 비해 가격은 11~16% 높았다. 260D는 1940년에 생산 중지되어, 새로운 디젤 승요차 170D가 나타난 것은 1949년이였다.
▶ 1936 이탈리아 피아트(Piatt)社, 570cc, 13마력의 소형차 토폴리노(Topolino) 발매 ☞ 500 토폴리노는 “일과 절약을 위한 작은 차”라는 컨셉트를 가진 차였다. 가장 작은 크기에 가장 넓은 실내공간을 가진 2인승 쿠페 스타일로 가벼운 섀시에 앞쪽은 독립 서스펜션을 썼고, 주철 실린더 블록과 경합금 실린터 헤드를 가진 760cc 13마력 짜리 4기통 수냉식 엔진에 4단 기어를 얹었으며 최고시속 85km를 냈다. 서스펜션은 유압식 쇼크 업소버와 리프 스프링을 썼고 뛰어난 유압식 브레이크와 다이렉트 스티어링의 조화는 운전을 안전하고 더욱 즐겁게 해주었다. 이 후 이차는 이탈리아 경차의 표준으로 불리며 90년대 친퀘첸토와 함께 이 나라를 대표하는 경차로 남아 있으며 1948년까지 생산되었다.
▶ 1938 폭스바겐(Volkswagen), 국민차 비틀 발표 ☞ 폭스바겐(Volkswagen) 비틀의 원형모델은 독일의 국민차로 쓰이기 위해 히틀러의 지시로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1875~1951)가 설계한 것이다. 그는 추운 북부 독일의 겨울에도 엔진이 얼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랭식의 2기통 엔진을 차체 뒤에 단 소형차 Kdf-Wagen을 1936년 10월에 완성한다. 그리고 Kdf의 타입(Type)1 모델이 1938년에 히틀러에게 보고되었다. 이 차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건설이 시작되지만, 1939년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그 계획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다.
타입1은 전쟁이 끝난 1945년 이후 민간용 차량으로 생산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 육군의 군용차량으로 개량되어 생산된다. 군용차량의 모델은 ‘타입 81 퀴벨바겐(Kübelwagen, bucket car)’과 ‘쉬빔 바겐(Schiwimwagen, amphibious)’이다. 초기 모델 퀴벨바겐은 지상에서의 작전 수행 능력은 뛰어났으나, 습지에서는 성능 한계를 보였다. 이를 보완하고자 수륙양용 차량으로 1940년에 쉬빔바겐을 개발한다. 폭스바겐 타입1은 전쟁 이후 민간용으로 생산되고 1949년에는 미국에도 수출된다. 미국에서 초기에는 고전했으나, 1959년에 대대적 광고로 판매가 크게 향상되었다. 타입 1은 기본적인 형태를 바꾸지 않은 채 1978년 1월 서독에서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1,927만 대가 생산되었고, 그 후 브라질과 멕시코 등의 공장에서 2002년까지 생산되었다.
오늘날 불리고 있는 ‘비틀(Beetle)’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968년 미국에서 타입1의 광고를 만들 때 일종의 애칭으로 딱정벌레라는 의미에서 ‘버그(Bug)’ 또는 ‘비틀(Beetle)’이라고 부르게 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명칭으로는 쓰이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비틀’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8년에 ‘뉴 비틀’을 발표하면서 이전의 모델 타입1을 ‘비틀’이라고 구분하면서부터이다.
▶ 1938 프랑스 미슐랭사, 레이디얼 타이어(Radial Tire) 발매 ☞ 레이디얼타이어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바이어스타이어(bias tire)가 있는데, 이는 타이어코드들이 진행방향에 비스듬하게 배치되어 있는 타이어를 말한다. 레이디얼타이어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대부분이 바이어스타이어였는데, 이 타이어는 방향 전환시에 반응이 늦고, 오랜 시간 주차했을 경우 타이어에 변형이 생겼으며, 노면 저항이 커서 마모가 쉽게 되어 타이어의 수명이 짧아지는 등 많은 단점이 있었다.
레이디얼타이어는 이런 단점들을 극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기술 수준 때문에 제작이 어려워서 발명된 후 한참 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1950년대에 이르러서 프랑스의 미슐랭(Michelin)사에 의해서 생산되기에 이르렀다.
레이디얼타이어가 널리 보급됨으로써 가져온 효과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노면과의 저항이 적어져 연료를 절약할 수 있는 동시에 타이어의 수명도 늘어날 수 있었다. 또한 도로와의 흡착성이 우수하여 고속주행시 좋고 조종의 안정성이나 코너링능력ㆍ제동능력ㆍ승차감 등도 향상되었다. 한편 레이디얼타이어의 보급은 그 동안 승차감이 좋지 않은 원인을 타이어에만 돌려왔던 자동차 제작사들에게 경종을 울려 자동차 구조의 연구와 발전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레이디얼타이어는 도로상태가 나쁜 곳에서는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비포장도로를 많이 달리는 차량 등에는 잘 쓰이지 않는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38 미국 올즈모빌(Oldsmobile)사, 토크 건버터가 달린 오토매틱 변속기(AT, Automatic Transmission) 채택 ☞ 기관의 회전력을 변속기에 전달하는 것으로 엔진이 회전하게 되면 컨버터 펌프도 회전하여 중앙부의 오일을 끄집어내어 날개사이로 방출된다. 펌프에서 방출된 오일이 터빈의 날개를 치게 되어서 터빈을 회전시키는 힘이 전달된다. 오일은 터빈의 날개를 친 후 날개 사이를 따라 나온 후 스테이터를 치게 되고 스테이터는 오일의 회전 방향을 펌프의 회전 방향과 같도록 바꾸어 주고 펌프를 치게 되어 터빈을 회전 시키는 오일의 힘이 증가하게 된다. 터빈으로 부터 흘러나와 스테이터 날개로 들어가는 오일의 힘은 스테이터를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 시키려 하지만 일방향(롤러)클러치가 이것을 방지하여 준다.
▶ 1939 미국 올즈모빌(Oldsmobile), 자동변속기차량 "Hydra-Matic drive" 장착차 생산개시
▶ 1939 이탈리아 엔초 페라리(Enzo Ferrari), 페라리社의 전신인 Auto Avio Construwioni 설립 ☞ 페라리(Ferrari)는 이탈리아 마라넬로에 본사를 둔 스포츠 자동차 제조회사이다. 1929년에 설립되어 엔초 페라리(Enzo Ferrari)가 스폰서 및 창업자로 있던 F1 레이싱팀인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바탕으로 1947년에 페라리 S.p.A(이탈리아어:Societa per Azioni, 영어:Joint stock company, 합자회사)로 법인 명칭을 바꾸고 자동차 제조회사로 등록됐다.
스쿠데리아 페라리팀은 엔초 페라리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설립한 F1 경주팀이었으며, 알파로메오의 자동차를 타고 F1에 출전했으나 후에 스폰서 및 계약 문제, 결함 문제 등으로 알파로메오 측과 사이가 벌어지며 1939년에는 직접 F1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Auto Avio Costruzioni Ferrari를 모데나에 설립하며 지금의 페라리 공장을 갖게 됐다.
페라리의 기원이 F1 레이싱팀에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 경주에 자주 참가해 많은 활약을 했고, 특히 1950년대와 1960년대, 그리고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포뮬라 원을 석권해 오면서, 포뮬라 원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레이싱팀 및 자동차 제조회사(레이싱팀의 스폰서)로 기록되고 있다. 페라리는 1960년대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결국 피아트에 인수되었다. 페라리의 유명한 자동차로는 F40, 엔초, 360 모데나 등이 있다.
07. 1940∼1950 자동차 기술을 한단계 끌어올린 전쟁
194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온 세계를 휩쓴 전쟁의 시기였다. 유럽에서는 대부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동차 생산이 중단되고 말았지만, 미국은 자동차에 군사용 기술을 적용시켜 큰 발전을 이룩했다. 1941년 미국 국방성의 요구를 받아 윌리스와 포드사가 만들어낸 네바퀴쿨림(4륜구동)지프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 1940 미국 패커드(Packard)社, 파워 윈도우와 쿨러 채택
▶ 1940 미국 크라이슬러社(Chrysler Corporation) 유압식 클러치 완성 ☞ 유압식 조작기구는 클러치 페달의 조작력을 가볍게 하기 위해 그림과 같이 마스터 실린터, 릴리스 실린터 및 연결 파이프로 구성되어 있다. 클러치 페달을 밝게 되면 마스터 실린터에 유압이 발생하고 이 유압은 파이프를 통해 릴리스 실린더에 압송된다. 릴리스 실린더는 이 유압에 의해 릴리스 레버를 밀게 되어 클러치의 작동이 이루어진다. 이 형식은 MPI 엔진이 탑재된 근래의 차량에서 이용되고 있는 형식이다. 케이블 식보다 클러치 페달을 밟는 힘 즉, 답력이 적게들고 장치의 내구성이 좋지만 그 구조가 복잡하다.
▶ 1940 미국 캐딜락(Cadillac)社, 실드빔식 헤드라이트와 스틱형 주차용 브레이크 채택 ☞ 헤드라이트의 기본 원리는 전구에서 나오는 빛을 오목한 반사경에 받아 평행 광선으로 해서 전방의 빛의 다발을 모아 멀리 비춰주는 것이다. 현재까지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인 이것은 전구 교환식이라고 불리운다. 실드빔식이라고 해서 헤드라이트 내부에 전구가 없이 바로 필라멘트가 있는 것도 있다. 이 방식은 반사경과 렌즈가 모두 유리로 되어 있는 것으로 전구 자체가 헤드라이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실드빔식은 전구 교환식의 단점 즉 반사경이 공기와 접촉해 녹스는 것과 대용량의 전구를 사용할 수 없는 점을 개선한 것이다.
▶ 1940 미국 아메리칸벤텀카社, 사륜구동(四輪驅動, Four wheel drive, 4wd)의 지프를 설계, 윌리스社 포드社 등에서 대량 생산됨 ☞ 자동차는 바퀴의 구동에 의해 진행된다.
이러한 구동 방식중에 대부분의 승용차에 적용되는 전륜구동방식과 후륜바퀴가 구동하는 후륜구동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륜구동형 차량은 선택적이거나 항시 네바퀴를 구동하는 차량을 사륜구동이라한다. 즉 자동차 구동방식 중 네 바퀴 모두에 동력이 전달되는 방식이다.
전륜구동(全輪驅動)으로 부르기도 하고, 줄여서 4WD로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인 자동차 추진방식인 이륜구동에 비하여, 추진력이 월등하므로 비포장도로와 같은 험로, 경사가 아주 급한 도로 및 노면이 미끄러운 도로를 주행할 때 탁월한 성능을 나타낸다. 주로 군용이나 험로 주행용 자동차에 장착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주행성 향상을 목적으로 고급 승용차에도 채택되고 있다.
엔진에서 나오는 동력은 트랜스퍼 케이스(transfer case)를 거쳐 앞뒤 바퀴에 배분 전달되며, 종류에 따라 일시 사륜구동방식과 상시 사륜구동방식으로 나뉜다. 일시 사륜구동방식은 사륜구동의 기본 방식으로, 한국산 사륜구동 자동차들은 대부분이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보통 때는 두 바퀴만으로 구동하다가 험로를 만났을 때에 선택적으로 사륜구동을 하는 방식으로, 사륜구동에 따른 에너지의 손실과 소음을 감소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상시 사륜구동방식은 언제나 사륜구동으로 하는 방식으로, 에너지소비 및 소음 등의 문제가 있으나, 구동력이 뛰어나 미끄러짐이 줄어들어 특히 굽은 길 등에서 차의 주행성이 향상된다. 사륜구동형 자동차의 효시는 1902년 폴란드의 스파이커(spijker) 형제가 만든 '스파이커(spyker) 4WD'이다. 이어 1908년 미국의 위스콘신에서 '베틀십'이라는 차량이 제작되었는데, 비포장 도로에서 뛰어난 성능을 발휘하였다. 1940년에는 미국의 아메리칸밴텀에 의해 개발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윌리스 오버랜드가 주생산자, 포드자동차가 부생산자가 되어 군용으로 66만 대를 생산하여, 세계 각지의 전선에 공급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때 제작된 차량이 최초의 사륜구동의 대표적인 모델인 지프(Jeep) 'MB'로, 제작번호 100000을 1호로 해서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1940년 아메리칸밴텀(American Bantam)에 의해 개발된 지프는 전후에는 건설ㆍ농업ㆍ레저용 등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보통 사륜구동을 지프(Jeep)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프는 사륜구동 차량에 속하는 다임러크라이슬러의 브랜드명일 뿐 같은 개념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6ㆍ25전쟁 때 군용으로 들어온 이래 1969년 신진자동차에서 최초로 민간용을 조립ㆍ생산하였고, 현재 쌍용자동차(주)ㆍ현대자동차(주)ㆍ기아자동차(주) 등에서 사륜구동형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다.
▶ 1941 윌리스-오버랜드(Willys-Overland)社, 군용 지프 생산 시작 ☞ 1908년 John North Willys는 Standard Wheel Company로 부터 Overland Automotive 사업부문을 매입한다. 이 회사는 1929년 미국 대공황기를 거치면서 파산, 1936년 Willys-Overland Motors, Inc.가 되었으며 운 좋게 1940년 총 36만대의 군용 지프를 생산하는 계약을 따낸다. 윌리스 지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대표적인 군용차량으로 자리잡고 그 뚜렷한 특징을 전투가 벌어졌던 전 세계 곳곳에 알리게 되었다.
1945년 최초의 민수용 버전인 Jeep CJ모델을 소개하였고 이후 CJ 응용모델을 개발하면서 'Jeep 브랜드'를 확고히 정립한다. 1953년 Kaiser가 회사를 매입한 후 Willys Motor Company로, 1963년 Kaiser-Jeep Corp.로 회사 이름이 바뀌었고 1965년까지 매우 다양한 CJ 계열 모델들을 개발, 판매한다. 1970년에는 AMC(American Motors Corporation)가 회사를 흡수하였고 1983년까지 약 61만대의 CJ5모델을 생산하였다. 이 AMC는 1987년 크라이슬러에 매각되었다.
'Jeep'이라는 명칭은 당시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만화 '뽀빠이(Popeye)'의 강아지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다재다능함이 군용 Jeep의 능력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셈이다. 아무튼, 윌리스 지프는 Jeep이라는 보통명사를 만들어냈고 우리나라 군용 지프였던 K-111의 원형 모델이었던 만큼, 자동차 역사에 있어 대단한 영향을 끼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 1942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민간용 승용차 생산 중단
▶ 1942 네덜란드 필립(Philips)사, 신형전구 개발, 헤드라이트의 감광(感光)이 가능해짐
▶ 1946 전세계 승용차 생산 재개
▶ 1946 프랑스 미쉐린(Michelin)社, 래디얼 타이어 실용화
▶ 1947 이탈리아 피닌파리나社, 플래시사이드(Flash side) 차체의 치시탈리아 쿠페를 발표, 근대차 디자인의 기초 형성 ☞ Battista Pkininfarina(1893~1966), Sergio Pinifarina(1926~ ) 자동차 디자인업체로 유명한 피닌파리나社는 아버지 바티스타 피닌파리나에 의해 1930년 설립되었다. 자동차 바디 제조업을 독립적인 산업으로 분리하며, 혁신적인 디자인의 차량 바디를 생산하였다. 1946년 뉴욕현대미술관에 Cisitalia를 선보였다. 자동차 디자인의 아름다움과 단순함을 가장 조화롭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2차 대전 이후 자동차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미술관에 영구 전시되어 있다.
1945년 알파로메오社의 스파이터를 디자인하였으며, 1950년대 페라리 미치 피아트의 디자인을 담당하며 수많은 명차를 생산하였다. 바티스타의 아들 세르지오 피니파리나는 바티스타의 사망 후 그룹 회장직을 임하고 있으며, 기술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여 실제 크기의 차량을 테스트할 수 있는 풍동시설을 갖추었다. 현재 연간 5만여 대의 차량을 생산하고 있고 Ferrai 이외에 Fiat, Lancia, Peugeot 등의 차량 디자인을 담당하며, 대우의 라세티 및 레조 등의 디자인에 참여하였다. 최초로 독립적 디자인 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기술과 미학의 조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피닌파리나의 디자인 포인트는 안전, 공기역학, 작은 차체, 넓은 실내공간으로 요약된다.
▶ 1947 프랑스 르노(Renault), 소형차 4CV 발표 ☞ 자동차산업이 발전하게 된 것은 롤스로이스, 캐딜락와 같은 고급차 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활수단을 제공한 대중적인 소형차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많은 소형차들이 연이어 출시되었으며 독일의 폭스바겐 비틀 외에도 이탈리아의 피아트 600,프랑스의 르노 4CV,영국의 미니처럼 생산대수 1백만대를 돌파한 차가 등장했다.
그중 4CV는 2차대전중 독일군의 파리 점령하에서 개발된 차다. 1942년 나온 최초의 프로토타입은 폭스바겐과 매우 비슷한 2도어였다. 파리 해방후 전쟁중 독일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국유화된 르노에서 4CV 개발이 계속되었는데,1945년의 세번째 프로토타입에서 최종 형태와 가까운 4도어로 변경되었다. 4CV는 개발 단계에서부터 전후 시기의 상황을 감안하여 자동차가 갖추어야 하는 조건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이전 차들과는 다른 수수한 디자인에 연비를 줄여야 하는 것과 더불어 어려운 상황이라 생산 비용까지 절감시켜야 했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르노는 4CV를 1946년 파리 모터쇼에 성공적으로 출품했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4CV는 폭스바겐의 소형차 비틀처럼 7백60cc의 배기량을 가진 수냉식 엔진을 차의 뒤쪽에 위치하게 설계했고 4단 기어를 장착하였다. 도어 글래스는 처음에는 앞뒤 슬라이드 방식이었으며 라디에이터 냉각 공기의 주입구는 리어 펜더의 앞부분에 있었다. 4CV의 성공으로 르노는 대량 생산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1947년 생산을 시작해서 1961년 단종되기까지 15년간 무려 1백15만대나 생산, 판매됐다.
▶ 1948 미국의 자동차생산 누계 1억대 돌파
▶ 1948 굿리치(Goodrich)社, 튜브리스 타이어(Tubeless Tire) 소개 ☞ 대개의 타이어는 도넛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안쪽의 둘레에 틈이 벌어져 있는데 이 틈을 림에 조립함으로써 내부의 공기 공간을 확보한다. 림은 바퀴의 중심 부분인 휠디스크(wheel disc) 중에서 타이어와 직접 접하는 바깥쪽 부분을 말하는데, 이는 금속의 면으로 되어있어 기본적으로 공기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히 닫힌 공간이 생겼다고 해서 바로 튜브의 역할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우선 타이어의 주재료인 타이어코드와 각종 고무류는 공기가 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공기 누출을 방지하기 위해 통기성이 낮은 특수 고무를 타이어의 안쪽에 입히는데, 이것을 '이너라이너(inner liner)'라고 한다. 이너라이너가 사실상의 튜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휠디스크의 림과 타이어의 비드(타이어 중에서 림에 직접 접하게 되는 끝부분) 사이에서 공기의 유출이 있으면 안되기 때문에, 이 부분이 확실하게 밀봉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비드 부분을 조여주고 튼튼히 해주는 비드와이어(bead wire)를 넣고, 이 부분에 타이어코드의 끝을 감아서 타이어 전체가 림에 안정적으로 밀착되도록 한다.
튜브가 터지면 타이어의 공기압이 급격히 떨어졌던 기존의 튜브타이어와는 달리, 튜블리스타이어는 못 같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서 구멍이 생겨도 이너라이너가 상처 구멍을 어느 정도 막아서 급격한 공기의 누출을 막아준다. 동시에 타이어의 중량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튜블리스타이어는 1903년 미국의 굿리치(Goodrich)사에 의해 발명되었으며, 타이어 기술의 발달과 함께 1940년대 중반 이후에 들어서야 양산되었다. 현재는 대부분의 승용차 타이어에 적용되고 있으며, 일부 자전거에도 사용되고 있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48 프랑스의 국민차 시트로엥(Citroen) 2CV 등장 ☞ 시트로엥 2CV는 독일의 비틀, 영국으 오스틴7, 이탈리아의 피아트 500, 미국으 포드 T 모델과 함께 프랑스의 대중화를 이끌었으며, 프랑스 드골 대통령이 쫗아하던 차로서 그 성능과 멋을 공인받기에 충분했다. 경제적이며 굴러가는 프랑스의 예술품이라 불린 만큼 그 멋 또한 뛰어난 2CV는 잔디 깎는 기계에서 가지고 온 2기통 375cc 8마력 수평대향식 엔진을 얹었다. 이후 602cc 엔진을 탑제하면서 더욱 인기를 끌었다. 1948년 파리살롱에 2CV가 발표되자 즉시 빅히트를 쳤으며, 프랑스 서민의 발로써 나아가 세계인의 가슴속에 남는 명차로 40여 년 동안 생산되어 왔다.
▶ 1948 스웨덴 사브(Saab Automobile AB), 승용차 생산 시작 ☞ 제너럴모터스(GM)가 독일의 오펠(Opel AG)과 영국의 복스홀(Vauxhall Motors Limited)에 이어 유럽에서 인수한 3번째 자동차업체로, 1937년 스웨덴 공군의 항공기제작회사로서 설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 항공기 엔지니어들이 사브 원형인 사브 92001을 최초로 만들었다. 1953년 사브 93을 생산하고 1956년 최초의 스포츠카인 사브 소넷을 선보였다. 1969년 트럭제조업체인 스카니아바비스와 사브스카니아그룹(Saab-Scania Group)으로 합병하였다. 1990년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와 인베스터(Investor AB)가 지분을 50 대 50으로 소유하면서 사브스카니아그룹에서 분리되었으며 2000년 1월 제너럴모터스가 사브의 나머지 지분 50%까지 모두 소유하게 되었다. 세계 유명자동차 가운데 규모가 작고, 화려하거나 멋있지는 않으나 안전성과 독특한 개성을 내세우는 사브는 외형이 항공기 날개의 옆면과 비슷하여 다른 차와 쉽게 구분된다. 소량 주문생산 방식으로 제작하며, 볼보와 함께 고급승용차시장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1999년 12만 8000 대의 차를 생산하여 50여 개국에서 판매하였으며 주요시장은 미국, 영국, 스웨덴, 독일, 이탈리아 등이다. 스웨덴과 핀란드에 2개의 완성차공장이 있고 엔진공장은 쇠데르텔리에, 트랜스미션공장은 괴텐버그에 있으며 전세계에서 1만여 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한국에는 1998년 10월 1일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호주, 스위스 다음으로 지사인 사브오토모빌코리아를 설립하였으며 제너럴모터스가 사브를 인수함에 따라 2000년 8월 1일 GM오토월드가 되었다. 전세계에 지사 12개소가 있고 본사는 스웨덴 남서부의 엘브스보리주(州) 트롤헤탄(Trollhattan)에 있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49 독일 다임러-벤츠(Daimler-Benz Aktiengesellschaft)사, 충격을 흡수하는 안전차체로 특허 취득
08. 1950∼1960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 꽃핀 소형 국민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는 전쟁으로 폐허가 돼버렸다. 심한 불황에 빠진 유럽 각국은 경제성이 높은 국민차를 개발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독일의 폴크스바겐 비틀, 영국의 모리스 미니, 프랑스의 노4CV 같은 차가 이때 만들어졌다. 특히 포르쉐 박사는 1954년, 전쟁 전 히틀러가 제시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폴크스바겐 비틀 개량형을 만들어 냈는데, 20년 동안 1천 9백만 대를 생산, 국민차의 지표를 세웠다.
▶ 1950 포르쉐(Porsche)社, 첫 번째 양산차인 356 출신 ☞ 폭스바겐 비틀을 만든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아들 페리 포르쉐가 설계했다. 1948년과 1949년 제네바 자동차쇼에서 첫 선을 보였고, 1950년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폭스바겐 비틀의 1.3리터(ℓ) 수평 대향 4기통 엔진을 썼고 실내 장식 역시 비틀과 유사했다. 경주용차에 주로 쓰이는 스페이스 프레임을 사용했으며 1950년 모델의 최대 출력은 40마력이었다.
미국 시장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1954년 1.5리터 엔진을 장착한 오픈카 356 스피드스터를 내놓았다. 이어 1955년 356A, 1962년 하드톱 스타일의 356B 등 지속적인 모델 개발이 이루어졌다. 포르쉐 356 스피드스터는 영화배우 제임스 딘이 즐겨 탔으며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 타고 있었던 차도 이것이다. 포르쉐 356은 17년간 7만7천 여 대가 생산되었고 1965년 단종되었다. 후속 모델은 포르쉐 911이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50 로버(Rover)社, 가스터빈 자동차(Gas Turbine Automobil) 실용화(240km/h) ☞ 처음에는 대형 트럭과 같은 것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연구용 ㆍ경주용 등 특수용도 개발되어 극히 일부에서만 사용된다. 일반 자동차로 실용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선 고급 내열재료를 사용하는 점에서 값이 비싸고, 회전수나 출력을 세밀하게 조정하기가 어려우며, 높은 가스 배기음을 소음(消音)하기 어려운 점 등이다. 미국의 포드사나 제너럴 모터스사에서 대형 트레일러 트럭에 시험적으로 채용하였고, 영국의 로버가 내구(耐久) 레이스용으로 사용한 예가 있으나 연구용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51 미국 크라이슬러社(Chrysler Corporation), 유압식 파워 스티어링(power steering system)) 채택 ☞ 유압식 파워 스티어링(HPS)은 파워스티어링 조작시에 엔진과 연결된 벨트에 의해 작동되는 오일펌프가 스티어링 칼럼에 유압을 공급하여 핸들의 조작으로 발생하는 부하를 줄여줄음로써 저속과 고속에서 핸들 조작에 도움을 주는 장치입니다. 즉, 오일펌프에서 생성된 유압을 이용하여 스티어링 기어를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엔진과 벨트로 연결되는 HPS는 오일펌프에 의하여 발생하는 부하로 인하여 연료소모율이 증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하로 인하여 차량개발과정에서 엔진의 안정성(부하로 인한 RPM의 출렁임, 시동꺼짐 등을 예방)을 유지하는데, 엔지니어의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유압식 파워스티어링에 의해 발생하는 부하를 견디기 위해 엔진은 더 많은 운동을 하게 되고, 이러한 이유로 연료의 소모가 증가 하게 됩니다. 유압식 파워스티어링은 운전자의 핸들 조작에는 아주 유용하지만, 연비에는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 1951 프랑스 미슐랭(Michelin)社, 스틸 벨트를 넣은 레이디얼 타이어의 특허 취득
▶ 1951 독일 페릭스 방켈, 로터리 엔진의 원리 확립 ☞ 로터리 밸브 발명가였던 독일으 펠릭스 반켈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벤츠와 BMW에서 수석 엔지니어로 일했다. 종전 후 반켈은 자신의 엔지니어링 회사를 51년에 설립하고 자동차용 로터리엔진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57년 2월, 반켈은 그의 첫 프로토타입 로터리엔진 테스트를 실시했다. 우선 이 세로운 엔진이 지닌 장점은 최소형 고출력 겹 엔진이라는 것이었다.
NSU는 시험용 차로 2기통 로터리엔진을 뒤에 얹은 쿠페인 ‘반켈 스파이터’를 만들어 6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를 통해 데뷔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498cc 배기량으로 64마력이라는 최고의 출력을 기록했다. 반켈 스파이더는 작은 배기량의 엔진으로 시속 151km 쉽게 넘어서는 가속성능을 자랑했다. 이어 NSU는 최초의 시판용 세단인 ‘RO 80' 4도어 세단을 67년 내놓았다. 995cc 짜리 트윈 로터리 반켈 엔진을 얹은 RO 80은 배기량 1천 990cc, 최고출력 115마력의 성능을 낸다. 게다가 이 대 벌써 차체를 알루미늄 합금판으로 만들어 무개가 1천 210kg로 엄청 가벼워 최고 시속은 180km에 이르렀고 운전성도 최상이었다. 게다가 RO 80은 ‘67년 유럽 베스트 카’에 뽑혀 앞선 기술을 인정받았다. NSU는 그동안 로터리 엔진 차 개발에 투입한 막대한 자금 때문에 열악한 재정 상태에도 불구하고 RO 80은 76년까지 생산되었다. 그리고 6년 뒤 NSU는 폭스바겐 그룹으로 넘어가 아우디에 합쳐졌다.
로터리 엔진은 다른 어느 엔진과 다르게 피스톤운동이 아니다. 왕복운동이 아닌 회전운동이란 뜻으로 그로 인해 왕복을 회전으로 바꿀필요도 없고 그만큼 손실이 적고 고회전에 유리하다. 그리고 폭발할 때 힘이 직접 회전에 전달되기 때문에 힘도 좋아진다. 예로 마쯔타 RX8의 엔진 1300cc로 238마력을 낸다. 무엇보다 좋은건 작고 가벼운 엔진이 엄청난 출력을 발산한다는 점이다. 단점으로 접촉면적이 넓어서 금방 달아 압력이 세어나가기 때문에 내구성과 연비가 떨어진다.
▶ 1952 존 헤트릭(John Hetrik), 최초의 에어백 특허 취득
▶ 1953 세계 자동차 생산대수 연간 1천만대 돌파
▶ 1954 독일 펠릭스 방켈, 방켈 로터리엔진 개발 ☞ 회전형 내연기관. 피스톤의 왕복운동을 회전운동으로 전환시키는 기구 대신 연소가스의 폭발로 피스톤을 직접 회전시키는 기관이다. 왕복기관의 실린더에 상당하는 로터하우징의 내면 모양은 에피트로코이드 곡선으로 되어 있으며, 이 속에 삼각형 모양의 로터가 있다. 로터와 하우징 사이에 3개의 공간이 구성되고, 이들 공간은 로터의 회전에 따라 회전방향으로 주기적으로 용적을 변화시키면서 회전한다. 흡기구ㆍ배기구ㆍ점화플러그가 있는 대선에 밸브는 없고, 흡입ㆍ압축ㆍ폭발팽창ㆍ배기의 4행정을 독립적ㆍ순차적으로 거친다. 로터가 1회전하는 동안 각 행정은 3회씩 과정을 거치며, 이 사이에 편심축은 3회전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편심축의 1회전에 대해 1회의 폭발ㆍ팽창 행정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로터리엔진은 왕복기관의 2사이클 기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1955 한국 최초 시발(始發) 자동차 생산 ☞ ‘시발’이라는 이름의 자동차가 생산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8월의 일이다. 한국전쟁은 미군을 통해 들어온 군용 차량들은 물론이고, 그 이전까지 여러 경로로 이 땅에 들어와 운행되고 있던 많은 자동차들을 파괴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파괴된 자동차들의 부품을 활용하여 운행 가능한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자동차 재생 산업이 활기를 띠었다. 시발자동차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1900년대 초 고종황제를 위한 포드 자동차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50여년 만에 국산 최초의 자동차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최초의 자동차는 을지로 천막 안에서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시발자동차에는 4기통 1323cc 엔진이 탑재되었는데, 그 엔진은 일본에서 엔진을 공부하고 돌아온 김영삼이 제작하였다.
시발자동차의 판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산업박람회였다. 이승만 정부는 1955년 10월 1일부터 12월 21일까지 광복 10주년을 기념해 창경원에서 산업박람회를 개최하였다. 이 박람회에는 시발자동차를 포함하여 총 40,739점의 물품이 출품되었는데, 박람회 폐막식에서 시발자동차는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이 자동차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당시 상공부장관에게 매주 시발자동차의 제조 및 판매 상황을 보고하도록 지시했을 정도였다. 산업박람회를 계기로 시발자동차를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최무성 형제는 이렇게 몰려든 구매 희망자들의 계약금으로 주물공장을 인수하여 양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로서 시발1호를 만들어냈던 조그마한 천막공장은 ‘국제차량공업사’라는 이름의 그럴듯한 자동차 회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 1956 미국 포드(Ford) 자동차에 최초의 2점식 안전벨트가 장착됨
▶ 1957 독일 벤츠(Mercedes-Benz)社, 300SL에 최초로 기계식 연료분사(instrument type fuel injection)방식 채택 ☞ 기계식 연료분사는 흡입된 공기으 양에 맞도록 연료의 양을 측정해 분사하는 전과정을 기계식으로 처리하는 장치이다.
메르세데스 벤츠(Mercedes-Benz)의 300SL은 1954년의 뉴욕 오토쇼에 처음 등장했다. 이 차는 갈매기 날개처럼 열리는 독특한 걸윙 도어(gull-wing door)가 특징인 2인승 쿠페다. 메르세데스 벤츠(Mercedes-Benz)의 300SL은 1954년의 뉴욕 오토쇼에 처음 등장했다. 이 차는 갈매기 날개처럼 열리는 독특한 걸윙도어(gull-wing door)가 특징인 2인승 쿠페다. 쿠페 등장 몇 년 후에 지붕이 없는 로드스터(roadster) 모델이 등장한다. 이름의 SL은 독일어 Sport Leicht의 약자로 영어로는 Sport Light, 즉 가벼운 스포츠카라는 의미였다. 이것은 차체가 스페이스 프레임(space frame) 구조로 만들어져 스포츠카에 필요한 높은 차체 강성을 확보하면서도 무게는 적어서, 고속주행 성능에 유리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구조의 차체와 직접연료분사방식의 엔진을 탑재해서 최고 속도가 260km/h에 이르는 등 300SL은 당시에 가장 빠른 양산 승용차였다.
300SL은 독일의 기능주의 디자인 개념을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기에 미국의 테일 핀 스타일처럼 인위적인 장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역학적인 차체 디자인을 위해 차량구조를 바꾸는 적극적인 디자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 예로 휠아치 위쪽에 눈썹 형태의 블리스터를 만들어 공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했다. 또 후드를 낮추기 위해 엔진을 왼쪽으로 50도 기울여 탑재했다. 이것은 아름다운 형태를 위해 하드웨어의 구조를 바꾸는 적극적인 방법을 취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벤츠 SL에서는 하드웨어의 제약조건을 디자인적으로 해결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차체를 이루는 스페이스 프레임(space frame) 구조는 별도의 사다리 형태의 프레임이 없어서 객실 바닥과 차체의 높이를 낮추어 공기저항계수를 낮출 수 있으나, 상대적으로 문턱(door scuff) 높아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를 극복하고자 지붕까지 열리는 걸 윙(gull-wing) 도어를 채택한 것이다. 300SL의 걸 윙 도어는 구조적인 제약을 새로운 디자인적 해결책으로 제시하면서 새로운 감성의 차체 디자인을 만들어낸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능적 디자인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1959 영국 모리스(BMC)社, 성인 4명이 넉넉하게 승차할 수 있는 소형차 미니(Moriss Mini) 생산 시작 ☞ 미니(Mini)는 브리티쉬 모터 코퍼레이션(The British Motor Corporation, BMC)에서 1959년부터 2000년까지 생산한 소형 자동차이다. 2001년 출시한 뉴 미니가 대신할 때까지 영국에서 생산한 자동차 중에 가장 인기가 많았다. 미니는 196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자 소형 전륜구동 모델로 자동차 역사의 한 세대를 장식했다.미니는 폴크스바겐 비틀과 함께 북미에서 많은 인기를 모았다.
미니의 독특한 3도어 스타일은 BMC의 Alec Issigonis경이 디자인했다. 미니는 영국의 Longbridge와 Cowley 공장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시드니에 위치한 Victoria Park / Zetland 공장에서 생산 되었다. 나중에 스페인, 벨기에, 칠레, 이탈리아, 포르투갈, 남아프리카 공화국, 우르과이, 베네수엘라,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생산되었다. 미니는 마크 I(Mark I)이란 모델로 시작해서 마크 II(Mark II), 클럽맨(Clubman), 마크 III(Mark III)로 업그레이드 되어 출시되었다. 이런 다양한 종류의 모델들은 고급 모델(estate car), 픽업 트럭(pickup truck), 밴(van), 그리고 마차 형태의 jeep 형태의 미니 모크(Mini Moke) 등을 포함한다. 미니 쿠퍼(Mini Cooper)와 쿠퍼 S(Cooper "S")는 스포츠 버전으로 몬테 카를로 랠리(Monte Carlo Rally)에서 3번 우승하는 등 경주용 차량으로 성공을 거뒀다. 미니는 오스틴 앤 모리스(Austin and Morris) 브랜드로 출시되었다가 1969년 독자적인 모델로 바뀌었다
▶ 1959 세계 자동차 등록대수 1억대 돌파
09. 1960∼1970 크고 강력한 고급 승용차 시대
땅이 넓고 자원이 풍부한 데다가 전쟁으로 부흥을 이룩한 미국이 세계 최대으 자동차 시장으로 떠올랐다.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은 크고 강하고 화려한 미국식 자동차를 만들어 내는 데 열을 올렸다. 특히 전투기 날개 모양을 본따 만든‘테일 핀 스타일’캐딜락은 롤스 로이스, 메르세데스 벤츠 리무진과 함께 세계 3대 고급차로 명성을 날렸다.
▶ 1960 미국 알루미늄 엔진 생산 ☞ 포르쉐 993 카레라(Porsche 993 Carrera)는 964의 대체 모델로 911 탄생 30주년을 기념해 1993년 프랑크푸르트 자동차쇼에서 선보였다. 카레라4, 터보, S, 4S 등의 모델이 있으며 한정모델로 1995년의 RS, 1998년 GT2가 있다. 911 계열에서 마지막으로 공랭식 엔진을 쓴 차다. 총 5,978대가 생산되었다.
공랭식 엔진을 쓴 마지막 모델이기 때문에 많은 포르쉐 매니아들이 993을 카레라의 마지막 모델로 여긴다. 1997에 나온 후속 모델 996부터는 수랭식 엔진이 사용되었다. 964에 비해 더 유연하고 부드러운 곡선이 도입되었다. 외형은 포르쉐 959와 닮았으며 스타일링은 토니 해터가 맡았다. 구조적인 면에서도 진보가 이루어졌다. 섀시는 충돌에 강하도록 개량되었고 엔진을 알루미늄으로 만들어 차체 무게를 줄였다. 후드를 열고 운행할 때는 후면 창에 후드를 넣을 수 있도록 설계 되었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60 미국 크라이슬러社(Chrysler Corporation), 앞뒤 라이트의 비상점멸(非常點滅) 시스템 발표
▶ 1961 영국 재규어 E-타입 제네바 모터쇼서 데뷔 ☞ E 타입이라는 이름이 붙은 재규어의 새로운 스포츠카는 1961년 제네바 모터쇼를 통해 데뷔했다. 길고 둥근 보디 스타일과 균형 잡힌 컨버터블, 라디에이터 그릴 대신 달려있는 에어 인테이크와 곡선미가 뛰어난 휠하우스 등 모든 부분에서 재규어 스포츠카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에어로 다이내믹 스타일과 바퀴 위쪽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 E 타입의 보디는 항공기 디자이너 출신인 말콤 세이어의 작품이지만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는 재규어 설립자 윌리엄 라이온즈의 취향이다. 이차는 로드스터와 쿠페형의 두 가지 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E 타입의 운전석은 르망 24시간 레이스에 출전하기보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어울릴 정도로 마무리가 뛰어났다. 3.8ℓ 265마력 XK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240km를 내는 E 타입은 스타일 뿐 아니라 성능 면에서도 D 타입의 뒤를 잇는 차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모노코크 보디와 독립식 서스펜션은 D 타입보다 한 단계 진보한 부분이다. 새로운 서스펜션 덕분에 핸들링까지 강화된 E 타입은 레이스에서 페라리 250 GT와 경쟁했다. 재규어의 입장에서 E 타입의 서스펜션은 1948년 개발했던 XK 엔진만큼 중요하다. 분리 가능한 E 타입의 서스펜션은 엔진처럼 다른 모델에도 얼마든지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차는 1964년에는 4,235cc(시리즈 I, II), 1970년에는 V12 실린더 276마력의 시리즈 III 가 소개되었으며 1961년부터 1975년까지 72,500대가 생산되었다.
▶ 1963 이탈리아 페루치오 람보르기니(Ferrucio Lamborghini), 람보르기니社 설립 ☞ 그는 1916년 4월 28일의 페라라(Ferrara) 근교의 Renazzo di Cento에서 태어났다. 그의 엔진기관에 대한 열정은 그에게 볼로그나(Bologna)에서 기계공학을 공부시켰다. 그리고 그 이후 2차 세계대전동안 그는 로데스(Rhodes)에서 이탈리아군의 차량 사령부에서 정비사로서 근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농업기계로 변환되었던 군 차량들을 구입하기 시작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3년 직후인 1949년부터는 람보르기니 트렉터 공장에서 자신의 트렉터들을 설계,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트랙터 공장은 견인서비스를 함께 제공함으로써 인기가 높았으며 그의 트랙터사업은 번창했다. 또 그는 피아트 토폴리노를 개조하여 1948년에 1000마일 레이스에 출전하기도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차는 사고로 전파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람보르기니는 농업기계 제작에서 호화 스포츠카 제작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는데 왜 그가 그렇게 마음을 바꾸게 되었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가 페라리 제작자인 엔초 페라리에 자극 받았을 것으로 추측해 볼 뿐이다. 언젠가 람보르기니가 페라리 새차에 대해 소음이 심한 기어박스에 대해 불평을 하자 페라리는 "당신은 트렉터들에 매달리고, 나는 스포츠카 제작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라며 트랙터를 제작하는 사람이 스포츠카에 대해서 뭘 알겠느냐는 투로 잘라 말해 버렸다. 람보르기니는 거기에서 자신도 스포츠카를 직접 제작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며, 이후 황소 같은 뚝심으로 페라리의 스포츠카에 대적할 만한 차를 만드는데 전력하였다.
그 후 람보르기니는 스포츠카의 제작뿐만 아니라 히터와 공기조절 시스템과 헬리콥터의 디자인 등 공학의 다양한 분야로 관심을 뻗쳤으며,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오늘날까지도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헬리콥터를 제작하려는 그의 시도들은 정부에 의해 강요되는 복잡한 관료주의적 통제 때문에 방해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 안토니오(Antonio)는 자동차사업에 관심이 없었으며 그래서 그는 은퇴를 심사숙고하기 시작했으며, 1973년에 그는 모든 그의 회사를 매각하고 은퇴하여 이탈리아 엄브리아(Umbria)주에 있던 그의 포도동산에서 그의 남은여생을 멋진 와인 생산에 바쳤다. 그의 사유지 '라 프로리타(La Florita)'에 있는 거대한 저택은 테니스 코트와 람보르기니 차를 전시하는 박물관과 올림픽 규격의 수영장으로 둘러싸여져 있고, 람보르기니는 '미우라의 피'로 모든 이들에게 알려진 'Colli Del Transiment'라는 적포도주를 생산하였다. 그는 1993년 2월 20일 7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 1963 미국 캘리포니아州,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 첫 실시
▶ 1963 독일 포르쉐 911(Porsche 911) 출시 ☞ 포르쉐 356의 계승자로서 좀 더 크고 파워풀한 모델을 만들려는 노력은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마침내 196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911은 공개되었다. 포르쉐 내부의 규칙에 따라 901모델로 개발된 911은 푸조의 명명법특허(XOX라는 방식의 숫자표기법)에 걸려 901로 발표하지 못하고 911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양산형 모델이 아닌 레이싱모델은 전통대로 904, 906, 908 등의 명칭을 부여한다)
1964년부터 생산된 911 초기모델은 130마력에 6실린터의 공랭식 1600cc 박서엔진을 후방배치한 후륜구동 모델로 매우 작은 후방좌석을 갖춘 2+2g 형식의 좌석배치를 갖고 있다. 1965년에는 356모델의 생산이 종료되면서 356에서 사용하던 4기통엔진을 올린 저가형의 911을 개발하여 912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시작한다.
▶ 1963 독일 NSU社, 로터리엔진을 탑재한 2인승 소형 스포츠카 발표 ☞ RX-7은 가장 발달된 형태의 로타리엔진이 장착된 차량으로 50만대가 생산되어 80%가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독일의 펠릭스 방켈이 디자인하여 1962년 NSU의 프린츠(Prinz)라는 스포츠 쿠페에 최초로 탑재된 로타리엔진에 관심을 보였던 수많은 회사들 중에서 1961년 일본 마쯔다의 모회사인 토요코교(Toyo Kogyo)가 NSU와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했다. 이 초기 엔진은 연소실 벽의 마모가 불규칙하고 연료소비가 아주 크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쯔다 기술진은 1962년 후반 이런 단점을 보완한 트윈 로터 엔진을 개발하여 시험하였다. 그리고 시험용으로 쓰리 로터, 포로터 엔진도 만들었다. 1965년에는 트윈 로터 엔진을 장착한 시작차 생산 준비에 들어가 1966년 60 코스모(Cosmo) 스포츠 쿠페가 일본의 마쯔다 고객들에게 제공되어 시운전을 하였다.
▶ 1964 미국 포드 머스탱(Ford Mustang) 출시 ☞ 1960년대는 자유와 젊음에 대한 추구, 개인주의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포드자동차가 이 시기에 내놓은 머스탱은 선택 옵션이 다양해서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가족차가 아닌 나만의 차를 찾는 젊은이들은 긴 보닛과 짧은 트렁크, 꼭 맞는 실내에 취향에 따라 다양한 사양을 선택할 수 있는 머스탱에 열광했다.
1964년 뉴욕 월드페어 박람회에서 처음 선보인 뒤 첫 해에 41만 대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인기에 힘입어 1967년 컨버터블 스타일, 1968년에는 패스트백 쿠페가 차례로 등장했다. 현재까지 계속 새로운 모델이 개발되고 있다. 머스탱은 2.8리터(ℓ) 6기통 엔진에 101마력, 최고 속도는 175km/h이다. 휠베이스는 당시 가장 짧았던 팔콘보다 380mm 짧은 2,740mm이다. 이후 4.2리터 164마력과 4.7리터 270마력 등 다양한 사양이 추가되었다. 머스탱은 유럽과는 달리 최고 속도나 출력보다 배기량과 가속도, 토크를 중요시하는 미국식 스포츠카의 전형적인 예다. 괴력을 지닌 차라는 뜻에서 머슬카라고 불린다. 시보레 코르벳, 셸비 코브라와 함께 가장 미국적인 차로 꼽힌다. 숀 코넬리가 제임스 본드로 분한 《007 썬더볼》에서 1965년형 머스탱 컨버터블이 등장한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64 독일 폭스바겐(Volkswagen)社, 아우디(Audi) 인수 ☞ 1937년 5월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설립된 독일국민차 준비회사가 전신이며, 1938년 9월 폭스바겐 유한회사로 개칭하였다. 폭스바겐은 독일어로 '국민차'란 의미이며 딱정벌레형 폭스바겐의 원형은 명설계자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가 만들어냈다. 그는 이미 1936년 10월에 딱정벌레형 폭스바겐의 원형을 발표하였다. 니더작센주 볼프스부르크의 대공장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었으나 1945년 생산을 재개하였고, 미국에 상륙한 폭스바겐은 초기의 부진을 씻고 1959년 획기적인 대대적 광고로 판매에 호조를 기록하였다. 1960년 주식을 공개, 민영화하고, 1969년에는 아우디NSU 아우토우니온을 산하에 두었다. 딱정벌레형은 기본적인 모델을 바꾸지 않은 채 1978년 1월 서독 본국에서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1927만 대나 생산되었고, 그 후속으로는 각종 후보차가 있었으나 결국 1974년 봄에 발표된 래빗으로 결정되었다. 폭스바겐은 전세계에 자회사를 두고 있으며 이들 공장에서는 승용차ㆍ미니버스ㆍ봉고 등 차량과 자동차부품도 생산하고 있다.
1899년 아우구스트 호르히(August Horch:1868~1951)가 설립한 호르히를 비롯하여, 데카베, 아우디, 반더러 4개사(社)가 대공황 후 미국 자동차의 유럽 진출에 대응하고자 1932년 하나로 모여 아우토우니온(Auto Union)이 되었다. 1958년 다임러벤츠 산하로 들어갔다가 1964년 폭스바겐에 인수되고, 1969년 NSU를 합병한 독일의 자동차 제조회사이다.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경주에 너무 몰입한다'는 이유로 1909년 호르히의 사장에서 축출되었다. 그가 따로 다시 세운 자동차 제조사가 바로 아우디이며, 자신의 성(姓) 'horch(들어라)!'의 라틴어 어원 'Audi'에서 이름을 따왔다. 합병회사의 명칭이 '아우디'로 바뀐 것은 1985년이다. '기술을 통한 진보'를 표방하는 아우디는 자동차 역사에 상당한 족적을 새겨왔다. 1901년의 첫 번째 호르히자동차는 수평대향 엔진에 또 하나의 작은 피스톤이 크랭크축의 진동을 흡수하고 경합금제 크랭크케이스를 사용한 것이었다. 1921년에는 아우디가 좌측핸들을 선보였고, 데카베는 1931년 전륜구동 승용차를 내놓았다. 1980년에는 풀타임 사륜구동 승용차 아우디 콰트로(Quattro'를 발표하였다. 이미 1910년대에 오스트리아 알핀레이스 연속제패로 'Alpensieger(알프스의 승자)'라는 별명을 얻고, 1937년에 레이싱카로 시속 400km를 일반고속도로에서 돌파하였던 아우디는 콰트로로 1980년대 모터스포츠의 각종 타이틀을 휩쓸었다. 아우디는 1938년에 충돌전복 테스트 시스템을 갖추는 등 안전에서도 선구적이어서 견고한 고품격 자동차로 명성을 쌓았다. 아우디의 라인업은 2004년 오토위크지에서 '미국의 최고급승용차'로 선정된 335마력의 V8 프리미엄세단 A8을 비롯하여, 세단 A6과 A4, 쿠페 TT, 그리고 SUV 올로드콰트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에서는 100% 투자법인인 아우디코리아를 통해 2004년 5월부터 공식 판매되고 있다.
▶ 1965 미국 크레그 브리드러브(Craig Breedlove), 제트 자동차로 시속 967km 달성
▶ 1966 영국 최초의 사륜구동 승용차 젠슨 FF 출시 ☞ 스바루 Leone은 대량생산 승용차로는 최초로 사륜구동을 적용한 차다. 1966년 영국의 Jensen에서 만든 'Jensen FF' 역시 사륜구동이지만 6리터 엔진에 320대만 생산해서 사륜구동 승용차의 원조는 스바루로 알려져 있다. 1.4리터, 1.6리터 엔진에 2도어, 4도어, 5도어는 물론 2도어 픽업까지 만들어졌다. 구동계통도 다양해서 전륜구동방식을 기본으로 사륜구동 옵션을 넣었다
▶ 1967 독일 NSU社, 2로터(Rotor) 로터리엔진을 탑재한 세단 Ro80 발표 ☞ 로터리 밸브 발명가였던 독일의 펠릭스 반켈의 로터리엔진 자동차 생산을 결심한 NSU는 이탈리아의 디자인 거장 베르토네에게 디자인을 부탁했다. 베르토네가 디자인한 가볍고 날렵한 스포츠카인 스파이더는 반켈의 독특한 로터리엔진을 얹기 위해서 NSU에서 필요한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반켈 스파이더는 6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를 통해 처음 데뷔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498cc 배기량으로 64마력이라는 최고의 출력을 기록했다. 반켈 스파이더는 작은 배기량의 엔진으로 시속 151km를 쉽게 넘어서는 가속성능을 자랑했다. NSU는 스파이더에 이어 67년 4도어 세단인 ‘RO 80’을 내놓았다. 995cc짜리 트윈 로터리 반켈 엔진을 얹은 RO 80은 배기량 1천990c, 최고출력 115마력의 성능을 냈다. 이 때 벌써 차체를 알루미늄 합금판으로 만들어 무개가 1천210kg로 엄청 가벼워 최고시속은 180km에 이르렀고 운전성도 최상이었다. 게다가 RO 80은 `67년 유럽 베스트 카’에 뽑혀 앞선 기술을 인정받았다.
▶ 1968 경인고속도로 개통 ☞ 서울과 인천 사이에 급증하는 수송수요에 대비하여 건설된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이다. 정식 이름은 '서울∼인천간 고속국도'로 서울과 인천을 잇는 길이 29.5km, 너비 20.4m인 4차선 도로이다. 1967년 5월 27일에 공사를 시작해 1968년 12월 21일 개통됐다. 주행속도는 최고시속 고속버스 ·승용차 100 km, 일반버스 ·화물차가 80 km이고, 최저시속은 전차량을 50km로 제한하고 있다.
▶ 1969 독일 벤츠社, 전자식 연료분사 방식 적용 ☞ 보통 공기 흡입량과 엔진의 회전수에 따라 분사량과 분사시기를 정한다. 기존의 기화기(carburetor)를 대체하여 개발된 방식으로 고성능 엔진에만 적용되어 쓰이다가, 현재는 대부분의 엔진에 쓰이고 있다. 일반 기화기는 피스톤이 하강하면서 실린더 안에 생기는 공기 흡입력을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혼합기를 만드는 반면, 전자식 연료분사는 인젝터(injector)로 직접 혼합기를 만들어 연소실에 보낸다.
작동 순서는 먼저 흡입되는 공기의 양을 센서가 계량하면, 컴퓨터가 그 공기의 양과 엔진 상태에 맞는 연료를 계산한 뒤 분사량을 정하고, 준비해 둔 연료에 일정한 압력을 가하여 전자 분사노즐로 분사한다. 엔진이나 차량의 특징, 주행 상태 등에 맞게 정확하고 세밀하게 혼합기의 비율 및 상태를 조절하므로 완전 연소가 가능하고, 그 만큼 배기가스의 오염도도 낮다. 제조사에 따라 EGI, EFI, ECI, ECGI 등으로 부른다. 이 기술의 진보 덕분에 린번과 직접분사(GDI) 등의 저연비엔진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69 이탈리아 페라리(Ferrari), 피아트 그룹의 일원이 됨 ☞ 엔초 페라리는 1920년대 알파 로메오의 레이서로 활동하다가, 1929년에 자신이 직접 스쿠데리아 페라리(Scuderia Ferrari)라는 팀을 창설하였고, 이것이 페라리의 전신이다. 페라리의 엠블렘에서 볼 수 있는 'SF'는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머리글자에서 온 것이다. 팀에서 레이스에 참가하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아들 알프레도 페라리(별명 디노)가 태어난 1932년까지만 활약하고 그만두었다.
1939년 알파(ALFA)가 자신의 레이싱팀 스쿠데리아를 흡수하고 자신을 내쫓으려는 의도를 알아챈 페라리는 알파와 결별했다. 이후 페라리는 자동차를 설계, 생산하기 시작하여 1940년에 티포 815(Tipo 815)를 완성했다. 1947년에는 최초로 페라리라는 이름을 달고 티포 125S가 생산되었다. 페라리는 스쿠데리아의 자금 조달을 위해 마지못해 차를 생산했지만, 뛰어난 성능으로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1956년에 아들 알프레도가 24살에 지병으로 죽자, 알프레도를 끔찍히 여겼던 페라리는 그 이후에 나온 자신의 모든 V6 엔진 차종에 알프레도의 별명인 '디노'란 이름을 붙였다. 모데나시(市) 교외에 소규모 공장을 가지고, 초고성능이며 값이 비싼 스포츠카를 소량생산(연간 생산 1,000대 미만)하는 한편, 스포츠카의 각종 경기에 고성능차를 참가시키고 있다. 세계 자동차경주사상 가장 많은 승리를 획득한 차종으로서, 이탈리아 자동차계의 지보적 존재이다. 1969년에 피아트사(社)의 산하로 들어갔다. / 네이버 백과사전
이탈리아 최대의 기업으로 자동차 외에도 농업기계, 철도차량, 선박기관, 항공기, 원자력, 우주개발, 제철, 비철금속, 고무, 석유, 건설에 이르기까지 다각경영을 하는 콘체른이다. 이탈리아 자동차 생산의 80%를 독점하고 이탈리아 군대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무기생산에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완전한 민간기업이다.
1899년 7월 11일 지오반니 아그넬리(Giovanni Agnelli)를 중심으로 하는 피에몬테주(州) 토리노의 귀족ㆍ부호 9명이 설립하였으며, 1906년 회사명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하였다. ‘Fiat’는 ‘토리노의 이탈리아 자동차회사(Fabbrica Italiana Automobili Torino)’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자동차회사로서는 드물게 풍부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순조로운 발전을 계속, 중소기업을 차례로 매수ㆍ합병하여 1979년 지주회사가 되었다. 승용차의 아우트비앙키ㆍ란치아ㆍ페라리, 트럭의 OM 등 각사를 산하에 두고 있다.
전세계 61개국에 지사가 있으며 모두 22만 3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다(외국에 11만 1000명). 또 생산공장이 242개(외국 167개), 연구소 및 개발센터가 131개(외국 61개)나 있으며 전 생산의 46%가 이탈리아 외에서 이루어진다. 조직은 자동차, 농업ㆍ건설기계, 상업용 운반기, 야금제품, 항공, 출판 및 홍보, 보험 등 모두 10개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2000년 3월 미국의 세계적 자동차회사인 제너럴모터스(GM)와 자동차 구매, 엔진개발, 자동차 금융 등에 관한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였다. 본사는 토리노에 있다. / 네이버 백과사전
10. 1970∼1980 경제적인 앞바퀴굴림차
1970년대는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수출 금지 조치로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 세계경제를 뒤흔든 시기였다. 자동차산업, 특히 미국의 대형 자동차산업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는 경제적인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최대의 과제로 등장했다. 유럽과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은 이미 개발된 소형차들을 연료 절약형으로 개선하고, 실내공간을 넓히는 한편 생산원가를 줄일 수 있는 앞바퀴굴림차(전륜구동)를 만들어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석권했다.
▶ 1970 미국 블루 플레임(Blue Flame)호, 시속 1,001km 돌파 ☞ 1970년 전직 배달 운전수이던 미국인 게리 게이블리치는 로켓 엔진을 장착한 블루 플레임을 타고 유타 주에 있는 보네빌 소금평야에서 시속 1,001km를 기록했다.
▶ 1970 영국 로버社, 풀타임 4륜구동차 레인지 로버(Range Rover)발표 ☞ 레인지로버는 자동차 역사에 SUV라는 새로운 장르를 연 차다. 레인지로버의 가장 두드러진 면모는 유행을 이끌어간 고급스런 디자인과 뛰어난 성능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레인지로버는 최고의 오프로드 주행 능력과 단단한 스타일이 어울린 차였다. 1970년 레인지로버가 나왔을 때 영국의 언론은 ‘도시 근교 사파리용 차(Suburban Safari Car)’라고 불렀는데 이전까지 없었던 이 새로운 명칭은 오늘날의 SUV(Sport Utility Vihicles)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레인지로버의 스타일은 유행의 최첨단을 달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로버를 세운 모리스와 스펜서 윌크스 형제는 설문조사를 통해 랜드로버 오너의 75%가 일상적인 용도와 함께 레저용으로 차를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곧 새로운 차의 개발에 들어갔지만 형편없는 프로토타입에 실망한 나머지 계획을 보류했다. 그러나 60년대 초반 우아한 3리터급 세단과 스포츠성을 가미한 로버 2000이 개발, 소개되면서 이 프로젝트는 부활하게 된다.
레인지로버 프로젝트는 로버 디자이너였던 스펜 킹(Spen King)과 고든 배시포드(Gordon Bashford)에게 맡겨졌고 이들의 첫 번째 작업은 랜드로버의 단점을 보완해 일반도로 주행에도 적합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레인지로버는 이전 랜드로버의 단점이었던 너무 작고 느리며 딱딱한 느낌을 개선해 빠른 속도와 편안하고 넓은 공간으로 장거리 여행에도 불편이 없었다. 이를 위해 로버는 GM의 V8 3.5X 엔진을 썼다. 당시 GM은 낮은 비용으로 엔진룸 벽을 정밀하게 다듬는 획기적인 엔진 개발기술을 갖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소규모 메이커였던 로버로서는 이 엔진의 사용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개발팀은 여성운전자들이 운전 도중 필요에 따라 두바퀴굴림에서 네바퀴굴림 방식으로 바꾸는 것을 혼란스러워한다는 점에 착안해 그래함 밴녹(Graham Bannock)에 의해 처음 제안한‘풀타임 네바퀴굴림’방식을 선택했다. 성능뿐 아니라 스타일도 개선되었다. 박스 섹션 래더 프레임 샤시(Box section ladder frame chassis)를 적용하였으며, 압연강의 외장에 경량 알루미늄 아웃 패널로 마감된 세련된 보디는 지난 95년의 모델 체인지에 이어 96년 단종될 때까지 20년 이상 변함 없는 인기를 얻었다. 80년대가 되자 레인지로버는 어떤 럭셔리카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고급스러워졌으며 완전히 다른 시장분야를 개척했다. 1981년에는 4도어 모델이 추가 되었다.
▶ 1970 미국, ESV(Experimental Safety Vehicle, 실험안전차) 개획 발표 ☞ 자동차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사고 발생시의 피해를 경감시키며, 충돌 후의 사고를 유발하지 않도록 특별히 의도적으로 제작된 자동차를 가리킨다. 현재 시판되고 있는 자동차는 안전기준(미국) ㆍ보안기준(한국)에 의하여 일정한 안전대책의 의무가 부과되어 있다. 그러나 자동차가 보급된 여러 나라에서는 최근 도로의 혼잡에 따른 접촉사고, 고속 주행시의 인사사고(人事事故)가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보다 완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한 안전자동차의 시작(試作)과 연구가 추진되고 있다.
안전자동차의 개발은 미국이 가장 앞섰으며, 1967년 뉴욕 주정부가 발표한 안전(승용)자동차의 구상은 안전자동차에 대한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서 각국의 주목을 끌었다. 그 후, 미국 운수성의 지도하에 실험안전자동차(experimental safety vehicle : ESV, 安全自動車)의 개발이 미국의 유력한 자동차 제조회사 등의 협력하에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71 영국 롤스로이스 파산 후 일부 국영화 ☞ 영국 자동차 품질의 상징인 롤스로이스사(社)가 `커다란 국가적 비극`이란 정치적인 표현처럼 1971년 2월 4일 파산 선고를 받았다. 록히드 항공사의 새로운 트라이스타 여객기를 위한 제트엔진 개발로 큰 손실을 입었다고 회사는 발표했다. 영국정부는 롤스로이스사의 제트엔진 사업은 영국과 프랑스 간의 콩코드 초음속 정기 여객기를 위한 엔진의 개발을 포함한 거대한 국제적 계획와 국가 방위를 위한 것이라고 재빨리 발표했다. 이 회사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항공기 생산으로 자동차 부분은 롤스로이스사 총 매출액의 5%만을 차지하고 있어 파산으로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자동차인 롤스로이스 자동차 생산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롤스로이스사의 엔진은 영국의 군 및 상업용 항공기 대부분에 장착하고 있으며 롤스로이스사는 록히드사에 공급할 새로운 제트엔진 생산계약을 너무 낮은 가격으로 체결하여 몰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 1971 미국 안전벨트 착용 의무화
▶ 1972 독일 폴크스바겐社 , 비틀의 생산누계가 1,500만 7,033대가 되어 T형 포드의 기록 갱신 ☞ 독일 폴크스바겐사에서 나치시절 설계, 생산해온 딱정벌레 모양의 자동차. 흔히 '딱정벌레차'로 불리는 폴크스바겐(volkswagen)社의 자동차 비틀(beetle)은 1934년 대중이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자동차를 만들어 내라는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히틀러는 유능한 자동차 제작자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셰(1875∼1952)에게 ""어른 두 명과 어린이 세 명이 탈 수 있는 차, 연료 1리터로 14.5km 이상을 달릴 수 있으며, 정비가 쉬운 차, 그리고 차 값은 1천 마르크 이하인 차""를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포르셰는 1938년 둥글둥글한 디자인의 딱정벌레 모양의 비틀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의 몰락으로 비틀이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한 것은 1948년이었으며, 이후 메커니즘과 편의성은 끊임없이 개선했지만 외형은 거의 유지한채 단종될 때까지 2천만대 이상이 생산되었다. 비틀은 나치 독일에서 설계되었기 때문에 한때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탁월한 경제성과 품질로 독일의 국민차로 칭송받았으며, 2차 대전 종전 이후 서독 경제기적의 상징이 되었다. 비틀은 1978년 유럽에서의 생산은 중단되었으며, 폴크스바겐사는 1998년 비틀의 현대판인 '뉴비틀'을 내놓았으나 비틀의 매니아층을 위해 멕시코의 푸에블라 공장에서 원형 비틀을 하루 평균 50여대가량 생산돼 왔다. 그러나 2003년 7월 폴크스바겐은 비틀 원형모델을 멕시코 푸에블라 공장에서 단종한다고 밝혔다.
▶ 1973 제1차 석유파동(oil-shock, 石油波動)으로 소형차 생산 확산 ☞ 1973년 10월 6일부터 시작된 중동전쟁(아랍이스라엘분쟁)이 10월 17일부터 석유전쟁으로 비화하여 세계의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불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1971년부터 OPEC는 석유이권(石油利權) 수입의 인상을 추진해 오던 중, 1973년 10월 16일 페르시아만(灣)의 6개 석유수출국들은 OPEC(석유수출국기구) 회의에서 원유고시가격을 17% 인상하여 종전의 원유 1배럴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17일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발표함으로서, 중동전쟁에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결정으로 인하여 서방세계에서는 '에너지 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OPEC의 페르시아만 산유국들은 다시 1974년 1월 1일을 기해 배럴당 5.119달러에서 11.651달러로 인상하였다. 석유에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서방세계의 경제는 석유부족으로 인한 제품생산의 부족과 제품가격의 상승으로 세계적인 불황과 인플레이션을 만연시켰다. 이 결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선진국 및 후진국을 막론하고 경제성장의 둔화를 가져왔다. 외교면에서는 서방세계로 하여금 이제까지의 친(親)이스라엘에서 친아랍 중동정책으로 기울게 하였으며, 한편 OPEC는 국제석유자본(Oil Major)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자원민족주의(resource nationalism)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73 미국 올즈모빌(Oldsmobile) 토로나도(Toronado)에 최초로 에어백 옵션 등장 ☞ 자동차 안전기술의 발전으로 안전벨트와 더불어 대표적인 보호장치로 각광받는 것이 에어백(Air bag) 시스템이다. 에어백 시스템은 감지 시스템과 에어백 모듈로 이루어져 있다. 감지 시스템은 센서, 배터리, 진단장치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에어백 모듈은 에어백, 작동기체 팽창장치로 구성된다. 센서에 의해 충돌이 감지되면 자동기체장치가 폭발하게 되며, 폭발가스로 인해 공기주머니가 순간적으로 부풀게 됩니다. 이러한 작동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는데 약 0.05초라는 극히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다.
이러한 에어백 시스템은 1952년 존 W.해트릭(John W. Hatrick)에 의해 최초로 발명되었다. 그 후 1967년 앨런 브리드(Allen Breed)에 의해 보다 발전된 형태로 변형된 에어백이 선보였다. 이는 미국 소비자 보호운동가이자 대선후보로도 출마했던 '랄프 네이더(Ralph Nader, 1934~)'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프린스턴ㆍ하버드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던 랄프 네이더는 직접 개발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자동차 사고의 급증에 따라 인명피해가 늘게 되자 안전벨트 착용의 의무화를 법으로 제정하도록 노력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1965년 GM(제너럴모터스)의 결함차를 고발, '어떤 속도로도 위험'이란 책을 저술하며 유명해졌습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1966년 마침내 안전에 대한 법률이 국회의 승인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차량의 증가로 인해 교통사고는 더욱 잦아졌다. 그러나 포드, 크라이슬러, 제너럴 모터스 등의 메이저급 회사들은 이런 사태를 그냥 방치할 뿐이었다. 안전띠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가 증가하자 그 이유를 찾던 전문가들은 정면 충돌시 얼굴, 가슴이 핸들에 부딪혀 사망하는 경우가 많은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얼굴과 가슴을 보호할 안전장치 개발이 시급하게 되었고 결국, 미국의 무명 자동차 부품업체가 대기업과 공동으로 연구하여 1971년 본격적으로 자동차에 적용할 에어백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이렇게 개발된 에어백은 인체의 충격을 줄일 수 있는 공기튜브를 이용했는데, 질소가스를 주입하여 빠른 팽창을 돕도록 하였습니다. 에어백은 최초 시판당시에는 '안전띠 보조용 승차자 보호장치(SRS: Supplemental Restraint System Air-bag)'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점차 판매가 늘면서 무명의 회사는 'SRS 에어백'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 후 1976년 에어백의 특허에 대한 독점권을 대형 자동차 제조사들에게 넘겨주며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생산되는 에어백은 생산 메이커와는 상관없이 'SRS 에어백'으로 불리고 있는데, 대표적 생산기업으로는 미국 델파이가 있다.
에어백 시스템은 차량에 충격이 가해졌을 때 승객 보호성능이 매우 우수하기 때문에 현재 대부분의 차량에 장착됩니다. 하지만 최초 생산 당시 에어백은 옵션으로 적용되어 비싼 가격으로 인해 대중화에 실패하였습니다. 그 후 1981년 독일의 자동차 메이커인 벤츠, BMW, 안전의 대명사로 불리던 볼보 등이 장착하면서 대중화에 성공하였습니다. 현재는 운전석뿐만 아니라 조수석, 뒷좌석, 측면 등 다양한 곳에 설치가 가능하도록 하여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에어백 시스템이 1994년 현대자동차의 뉴그랜저를 통해 처음으로 선보였습니다.
▶ 1974 대기환경법 강화로 촉매변환장치(Catalytic Converter) 등장 ☞ Environmental Science & Technology지 9월 1일자에 기재된 논문에 의하면 유해 오염물질 배출을 줄이기 위해 차량에 설치된 촉매 변환기가 또 다른 오염물질인 암모니아를 다량 발생시킨다고 한다. 이 논문 외에도 대기 중에 존재하는 암모니아의 주요 발생원을 촉매 변화기에 둔 또 다른 연구 논문이 8월 20일에 개최될 미국화학회 220회 회의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암모니아는 대기 중에서 미세 입자상 물질의 형성에 일정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 미국환경보호청은 인간의 건강을 해치는 미세 입자상 물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대학 Robert Harley 교수팀은 자동차의 배기가스에서 예상외로 암모니아 농도가 높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그 원인의 대부분이 촉매변환기에 있음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엔진 성능이 적정상태로 유지되지 못할 경우도 암모니아가 형성된다. Harley의 설명에 따르면 너무 성능이 좋은 촉매변환기가 문제 발생의 원인이라고 하는데 배기가스중의 질소산화물이 너무 많이 감소될 때 복잡한 화학반응이 일어나 암모니아가 촉매변환기에서 발생되며 이것이 배기관을 통해서 대기 중으로 방출된다고 한다.
연구진들은 8일간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고속도로의 한 지점에서 통과하는 차량 6만대의 배기가스중의 암모니아와 다른 가스 성분들을 측정하였다. 측정결과 보통 자동차들은 100마일 주행시 티스푼 하나 정도인 0.28온스의 암모니아를 방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신형 촉매변환기가 장착되어 있는 자동차의 경우 이전에 조사된 것과 비교할 때 탄화수소, 일산화탄소, 기타 유해가스가 50%정도 더 저감 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들이 지적하고 있는 사항은 이번에 측정 대상이 된 차량들은 이전에 조사된 차량들 보다 더 많이 저유황 가솔린을 사용하고 최신형의 촉매변환기가 장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Harley 실험실의 대학원생인 Andrew Kean은 촉매변환기가 자동차에서 발생되는 대기오염물질을 상당량 제거하고 있으나 불행하게도 이번 연구 결과로 볼 때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가 예상치 못한 두 번째 문제 발생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촉매변환기는 백금과 로듐 혹은 팔라듐 금속이 세라믹에 코팅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배기가스가 이 장치를 통과하게 되면 탄화수소, 일산화탄소, 질소산화물 등은 무해한 성분으로 바뀌게 된다. Kean은 촉매변환기가 사용되지 않을 경우 암모니아 배출은 줄어들 것으로 확신하고 있으며 비록 촉매변환기가 대기오염물질을 줄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나 대기 중 암모니아 농도를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촉매변환기는 1981년에 처음으로 도입되어 현재는 승용차와 경량 트럭의 기본 장착 품목이 되었다. 암모니아의 발생 원으로는 동물의 배설물, 비료, 슬러지 처리 시설 등이 있다. 이전 조사에 따르면 디젤 자동차의 경우는 암모니아 발생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연구는 캘리포니아 대학 운송 센터와 Bay area Air Quality Management District의 재정 지원하에 이루어 졌다.
▶ 1975 무연휘발유(Gasolin, 無鉛揮發油) 등장 ☞ 납(Pb) 성분이 함유되지 않은 휘발유를 말한다. 휘발유는 무연휘발유와 유연휘발유로 나뉘어져 있었다. 자동차용 휘발유에는 옥탄가를 높여서 엔진의 이상폭발을 막기 위해 4에틸연 등을 소량 첨가하고 있으나 이 때문에 배출가스에도 연화합물이 포함되어 납중독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휘발유 성분중에서 옥탄가가 낮은 노멀헥산 등을 빼고 벤젠, 톨루엔 등의 방향족 탄화수소를 늘려서 옥탄가를 높여, 4에틸연의 첨가량을 되도록 적게 한다. 이것을 무연휘발유 또는 무연화휘발유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방향족 탄화수소가 광화학 스모그의 원흉이 될 가능성이 높아 대기오염 방지의 근본대책은 못된다.
▶ 1976 경부고속도로 개통 ☞ 해방 직후에 우리나라의 도로는 총 2만 4,031km였다. 그나마 5,263km의 국도 가운데 포장된 도로는 746.4km에 불과했다. 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들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도로의 시작이었고 이어진 6.25를 거치면서 그마저도 황폐해져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당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12시간이 꼬박 걸리는 거리였으니 이런 때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목표인 서울과 부산을 5시간 내로 달릴 수 있는 길을 건설하는 것은 공사의 적합성을 떠나 실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경부고속도로는 총 429억 원이 투입돼 2년 5개월 만에 완공됐다. 놀라운 속도였다. 시공에 16개 업체를 비롯해 3개 건설공병단까지 참여해 마치 군사작전처럼 진행된 사업이었고 연인원 892만 8,000명과 165만 대의 장비가 투입된 대형 사업이었으며 77명의 숭고한 희생자를 낳기도 한 사업이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순전히 우리 기술로 다른 나라에서 만든 고속도로에 비하면 훨씬 싼 값에 가장 빨리 완공하였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꼽힌 경부고속도로 충북 옥천구간은 평균 1.6km마다 터널을 뚫거나 다리를 세워야 하는 최대의 난공사 구간이었다. 하루 종일 수백 명이 노력을 해도 불과 30cm밖에 뚫지 못하는 공사는 작업자들이 공사를 포기하고 달아날 만큼 힘든 지역이었다. 결국 1970년 6월 27일 당재터널(지금의 옥천터널) 공사를 끝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됐고 올해로 40년을 맞는다.
경부고속도로는 전 구간이 완공된 1970년에 총 368만 9,000 대의 차량이 이용했다. 꾸준히 늘어난 이용량은 1985년에 3천 400만 대를 넘기면서 10배의 통행량이 됐고 지금은 완공 당시의 100배가 넘는 3억 4,000만 대가 도로를 이용하고 있다.
고속도로 완공은 무수한 이야기와 사건을 남겼다. 그중에 고속도로 중앙 지점에 만들어진 두 개의 비석은 당시를 되돌아보게 한다. 하행선 금강휴게소에는 고속도로 공사에 피를 흘려 목숨을 바친 77명의 ‘산업전사’에 대한 위령비가 놓여있다. 위령비에는 ‘세상에 금옥보다 더 고귀한 것은 인간이 가진 피와 땀이다. ~중략~ 그들은 실로 조국 근대화를 향한 민족 행진의 산업전사요, 자손만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여러 상황을 종합했을 때 16년 걸린다는 공사를 2년 5개월 만에 끝냈으니 경부고속도로는 이후로 부실과 보강의 문제에 시달렸다. 당초 계획한 24m의 노폭을 22.4m로 줄였다. 비용과 기간을 줄이기 위해 중앙분리대를 비롯한 안전시설을 갖추지 못해 차후 대형사고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개통 1년 만에는 전 노선에 대한 덧씌우기 공사가 착수됐다. 야당의 한 국회의원은 “경부고속도로가 누워 있으니 망정이지 서 있었다면 벌써 와우아파트처럼 무너졌을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개통 후 10년간의 유지보수비용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을 넘는 수준이었으니 초고속 건설의 후유증은 실로 만만치 않았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꼬박 10년이 지난 1980년 7월 7일 언론들은 이른바 ‘10년의 경제효과’를 분석해냈다.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효용성에 대한 회의와 막대한 재정부담으로 해서 건설 초기 상당한 비판도 없지 않았던 이 고속도로가 10년이 지난 오늘 명실상부한 국가산업과 국민생활의 대동맥으로 그 중요성이 인식되게 되었음은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고 동아일보는 ‘산업 대동맥 10년’이란 기사에서 ‘건설 초기 그 타당성 여부를 두고 국내는 물론 외국기술진들마저 회의를 보여 상당한 논란을 벌였으나 10년이 지난 지금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어색할 지경이다.’라고 말했다.
초기 10년간 경부고속도로는 26.9%의 여객수송 증가를 이뤘고 수송인 거리에서는 35.2%의 증가를 가져왔다. 화물 수송은 16배가 증가했다. 개통 당시 50%가 넘었던 승용차의 비율이 10년이 지난 시점에선 화물차 위주로 확대됐다. 또한 서울 인근 지역의 발전과 함께 유통조직의 변화를 가져왔다.
40년 전 경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엔 총 25개 노선, 2천 922km의 고속도로가 건설됐다.(2005.12.31기준)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도로는 국가 대동맥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고 이제는 북한을 넘어 중국,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아시안 하이웨이를 바라보고 있다.
▶ 1976 독일 폭스바겐社, 소형차 골프(Volkswagen Golf) 출시 ☞ 74년 5월에는 골프에 가로배치형 엔진을 장착하는데 성공,현대적인 전륜구동 시스템을 기술적으로 완성했다. 당시 처음 선보인 골프는 통칭 "골프 I"이라고 불린다. 골프라는 이름은 스포츠의 골프가 아니라 멕시코만에서 부는 바람,걸프 스트림에서 따온 것이다.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죠르제토 쥬지아로가 바디 디자인을 담당했으며 엔진은 알루미늄제 1.5리터 SOHC를 탑재했다. 바디라인이 직선이어서 곡선인 비틀과 큰 대조를 이룬다.
골프의 위력은 대단했다. 70년대 발생한 두 차례의 석유파동은 소형차의 인기를 급부상시켰고 초대모델 골프 은 22개월만에 50만대 생산을 기록했다. 7개월 후에는 1백만대를 돌파했다. 76년에는 스포티모델 GTI, 77년에는 구성부품의 90% 이상을 가솔린엔진과 공유한 디젤엔진 모델이 출시됐다. 골프모델은 이렇게 83년 생산이 종료되기까지 5백만대를 돌파했다. 기존 비틀을 대체하는 소형차를 만들고자 했던 폭스바겐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 1977 영국 에드 파제리니(Ed Passerini), 최초의 솔라카 블루버드(Solar Car Bluebird) 제작 13km/h 주행
▶ 1977 일본, 자동차 생산에 로봇 사용
▶ 1978 독일 폴크스바겐 비틀 생산중지 ☞ 1930년대, 나치 독일의 수장 히틀러는 이런 공약을 내세운다. “모든 독일 국림이 1인당 1대의 국민차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하겠다.” 당시에는 자동차는 부자들의 전유물이었기에, 독일 국민들이 이 탈콤한 공약에 속아 넘어간 것은 당연했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히틀러는 당대의 최고 기술자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세를 포섭, 개발을 진행케 한다. 뒤어어 ‘국민차’라는 뜻의 ‘폴크스바켄’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그가 만든 규정은 이렇다.
튼튼하고 장기간 큰 수리를 필요로 하지 않고, 유지비가 저렴할 것.
일반적인 가정으 어른 2명과 아이 3명이 승차 가능할 것.
순항속도 100km/h 이상
7리터의 연료로 100km 주행이 가능할(=리터당 연비가 14.3km이상) 것.
공랭식 엔진의 채용.
유선형 보디의 채용도 요망되며 값은 1,000마르크 이하일 것.
당시 같은 독일 회사의 오펠이 내놓은 Opel-P4(1935)도 1,450마르크의 값임을 감안하면 매우 어려운 개발이었다. 계약을 맺고 나서 2년 후의 1936년에 간신히 프로토 타입 2대의 제작이 완료, 1937년에는 합계 30대의 프로토 타입이 다임러-벤츠사에서 제작되었다. 나치스 친위대(SS) 대원으로부터 운전 면허 보유자들이 선발되었고, 이들은 차량을 운전하면서 프로토타입의 약점을 밝혀내며, 점차 개선해 나간다.
엔진은 공랭식에 수평대향 1.1L엔진을 사용한다. 그리고 RR레이아웃이었다. 이는 후에 스포츠카 메이커 포르쉐의 기술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후에 1951년에는 디젤엔진을 달았는데, 제로백이 무려 1분이었다고 한다. 포르쉐는 미국을 방문해 대량생산으 노하우를 얻기 위해서 포드 등 대기업 자동차 메이커 각사의 공장과 현장의 생산체제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시찰했다. 이때에는 자동차 양산의 시조와도 말할 수 있는 헨리포드와도 만나게 된다. 포드는 독일에서의 자동차 생산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포르쉐가 보여준 폴크스바겐의 설계 건셉에 대해서는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 해 1938년에는 최종 프로토 타입 VW38가 완성돼, 지금까지 잘 알려진 폴크스바겐의 외형이 결정되었다. 동년 5월에는 공장이 완공되었고, 준공식에서 히틀러 입회아래, 포르쉐에 의해서 프로토 타입의 세단과 카브리오레의 첫차가 굴러나왔다. 매우 기분이 좋았고, 칭찬과 국민차보급으 연설을 한 히틀러는 그 자리에서 생산형의 차명을 『KdF-Wagen(환희 역행단의 차)』라고 명명한다. 이렇게 해 KdF의 대량생산 준비가 진행되게 되었다. KdF의 판매에 임해서는 국민은 쿠폰권에 의한 적립으로 KdF 구입비용을 저축해, 만액에 이른 사람에게 차를 인도한다고 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이 결과, KdF-Wagen 제조 공장은 군용 사양의 큐 벨 웨겐이나 슈빔워겐을 주로 생산하게 되었다. 약간수의 KdF-Wagen도 군용차 양으로서 이용되었다. 이 공장에서는 전쟁 포로나 수용소 수용자가 가혹한 노동에 종사 당했다. 물론 연합국의 대폭격때, 공장은 초토화가 되었다.
그러다가 패전 후, 1945년부터 생산을 재개한다. 그리고 원래 오펠사 간부였던 하인리히 노르트호가 사장으로 취임해, 1950년대부터 그의 수완 덕분에 큰 성공을 이어나가게 된다. 당연히 전후 서독경제의 부흥을 이끌었다. 마치 이웃 프랑스의 르노 4CV처럼 말이다. 1938년부터 생산이 시작되어 2003년에 멕시코에서 생산을 마칠 때까지, 2152만 9464대가 생산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량 3위에 오르기도 했다. (1위는 도요타 카롤라, 2위는 폴크스바겐으 골프) 독일에서는 이미 1978년에 생산이 중지되었지만, 여전히 스타일이 매니아들의 사랑을 맏았다. 그래서 폴크스바겐측에서도 멕시코 공장에서 FF방식에 수냉식 엔진을 쓴 ‘뉴비틀’을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 2010년에 생산을 중지한다고 한다. 비틀이라는 차명은 1960년대에 폴크스바겐에서 미국시장을 노리기 위해 붙였던 이름이 시초였다고 한다.
▶ 1979 영국에서 캐털리틱 컨버터(자동차 배기 가스의 유해성분을 무해화하는 장치) 발명 ☞ 컨버터는 배기가스의 성분을 바꾸어주는 장치를 말한다. 정식용어는 캐털리틱 컨버터(catalytic converter)이고 우리말로는 촉매장치다. 불완전 연소가스인 탄화수소(HC), 일산화탄소(CO)를 완전연소시키고, 질소산화물(NOX)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실린더에서 완전연소되지 못한 배기가스가 저절로 완전연소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컨버터 속에는 완전연소를 돕기 위한 촉매가 들어 있다. 그래서 촉매장치라는 말이 생겼다. 촉매로 주로 쓰이는 백금(platinum)과 팔라듐(palladium)은 탄화수소와 일산화탄소를 연소시키고, 로듐(rhodium)은 산화질소에서 산소와 질소를 분리시킨다. 한번에 탄화수소, 일산화탄소, 산화질소를 없앤다는 뜻으로 삼원(three-way)촉매장치라고 한다. 백금이라는 소재만 보아도 촉매장치가 꽤 비쌀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차값의 2∼3% 정도다. 자동차란 게 원래 비싼 제품이긴 하지만 배기가스를 줄이는데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드는 셈이다.
컨버터는 벌집 모양의 구조로 되어 있다. 모세관 같은 작은 통로를 다발로 묶어 놓은 모양이다. 컨버터에 도달한 연소가스는 이 수만 개의 작은 통로를 통해 컨버터를 통과한다. 연소가스가 지나는 통로는 육각형처럼 생겼고, 육각형 통로가 다발로 묶여 있어서 앞에서 보면 벌집 모양이다. 배기가스가 지나가는 통로가 이 벌집 모양 구조물 때문에 좁아지지 않도록, 컨버터의 전체 단면적은 배기파이프보다 크게 설계된다. 컨버터의 덩치가 커지는 이유다. 이밖에도 배기가 원활히 이루어지려면 통로의 벽이 얇아도 견고한 구조를 지니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벌집구조가 이런 상황에 가장 맞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기 시스템의 끝은 차체 뒤쪽에 둔다. 따라서 엔진이 앞에 있는 프론트 엔진(front engine)방식에서 배기 시스템은 앞의 엔진룸에서 차체 뒤로 길게 뻗게 된다. 엔진의 배기 매니폴드에 파이프로 이어진 컨버터는 운전자와 동승자의 무릎과 무릎 사이쯤에 놓이는 것이 보통이다.
▶ 1979 독일 아우디(Audi)社, 상시 4륜구동의 스포츠카 발표, 전세계적으로 4륜구동 승용차 개발이 활발해짐
▶ 1979 미국 제너럴모터즈社, 대량생산의 FF(전륜구동)화의 제1탄으로 시보레 사이테이션(Chevrolet Citation X카) 발표 ☞ MSNBC는 미 자동차 사업을 몰락으로 이끈 자동차 모델 10선(Ten cars that brought down Detroit)을 선정했다. GM이 시보레 베가(Chevrolet Vega), 캐딜락 시마론(Cadillac Cimarron). 폰티악 애즈텍(Pontiac Aztek), 시보레 사이테이션(Chevrolet Citation) 등 가장 많은 모델을 불명예스러운 리스트에 올렸다. 이 밖에 크라이슬러의 닷지 에어리스 (Dodge Aries), 크라이슬러 TC(Chrysler TC by Maserati) , 지프 체로키(Jeep Cherokee), 포드사는 포드 익스플로러(Ford Explorer)와 토러스(Taurus) 두 모델이 선정 됐다.
11. 1980∼1990 세계가 함께 만들고 함께 타는 월드카
석유파동 뒤 세계경제가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자동차업계는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동차 역사를 주도해 온 선진국의 자동차회사들은 노동력이 싸고 풍부한 개발도상국으로 생산공장을 옮겼다. 결국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이 값싼 노동력과 결합해 생산원가를 낮추고 더 넓은 지역에 자동차를 팔 수 있게 됐다. 세계가 함께 만들고 함께 타는 '월드카’시대에 들어서게 된 것다.
▶ 1980 독일 4륜구동 승용차 아우디 콰트로 출시 ☞ 콰트로(라틴어: Quattro)는 아우디에서 개발한 4륜구동 시스템을 말한다. 콰트로 시스템은 1980년 아우디 콰트로에 처음 채택되었고, 이 후 아우디에서 생산하는 많은 모델에 채택되었다.
▶ 1982 프랑스 뮐루즈 국립자동차박물관(Musee National de l’Automobile; Collection Schlumpf) 개관 ☞ 이곳에는 차고에 있는 것을 포함하여 총 500대의 자동차를 전시하고 있다. 직물공장을 경영하던 슈럼프(Schlumpf) 형제들이 1964년부터 뮐루즈의 한 제분소에서 자동차를 수집한 것이 박물관의 시초였다. 슈럼프 형제들이 경영난에 어려움을 겪자 1981년 국립자동차박물관협회에서 이곳을 사들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였다. 전시장에는 1900년대의 골목을 재현해 놓았는데, 특히 파리의 알렉산드르 3세교에 있는 가로등을 그대로 복제해 놓았다. 레이싱카, 스포츠카, 고급차를 비롯하여 에토르 부가티가 만든 120종의 자동차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에토르 부가티가 소장하였던 '부가티 Type 41 루아이얄(Royale)'과 '나폴레옹 쿠페(Napoleon Coupe)'이다. 이 가운데 루아이얄은 전세계에 6대밖에 없는 희귀 앤티크 차종이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84 미국 1990년까지 모든 신차에 에어백, 자동안전벨트 장착 의무화
▶ 1985 세계 최초의 솔라카 경주 'Tour de Sol' 스위스에서 개최
▶ 1986 독일 배기가스 정화를 위해 무연(無鉛) 가솔린 발매됨
▶ 1989 미국 태양 자동차 시속 78km/h 달성
▶ 1989 미국 포드社, 영국의 재규어社 인수
▶ 1989 미국 네바다州에 국립자동차박물관(National Automobile Museum) 개관 ☞ 리노(Reno)에 트러키 강(Truckee River) 남쪽에 자리 잡은 자동차 박물관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생산된 여러 자동차를 전시한다. 대부분 자동차는 카지노 소유주였던 윌리엄 해라(William F. Harrah)가 수집한 것이어서 '해라 컬렉션(The Harrah Collectio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꼽히는 자동차 박물관이다.
1978년, 해라가 사망하고 1980년, 홀리데이 주식회사(Holiday Corporation)가 해라가 소유하던 호텔, 카지노와 이미 유명한 자동차 컬렉션을 사들였다. 1981년, 컬렉션을 관리할 비영리 독립 기관이 설립되었고, 홀리데이 사는 175개 자동차와 연구 도서관 등을 기부하였다.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기업자선 행위로 기록되었다.
네 개 갤러리에 200여 대 자동차가 연도별로 전시되어 있다. 경주용 차와 비포장도로 경주용 차 등도 포함된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존 웨인(John Wayne) 등 유명 인사가 소유한 자동차가 있으며, 타이타닉(Titanic),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 등 유명 영화에 소품으로 쓰였던 차도 보유한다. 페라리(Ferrari), 재규어(Jaguar),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 포르셰(Porsche), 롤스로이스(Rolls-Royce) 등 브랜드도 다양하다. / 네이버 백과사전
12. 1990∼2000 컴퓨터 발달로 똑똑한 자동차 등장
인류가 컴퓨터를 만든 이후,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해서, 자동차 역시 컴퓨터 덕분에 상상을 초월하는 진보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른바 인공지능 자동차. 안전장치가 자동화된 것은 물론, 컴퓨터가 알아서 달리는 무인주행 네비게이션 장치, 고장을 알아서 판단하는 시스템도 개발됐다.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우리는 인간 중심의 다양한 자동차, 보다 안전하고 편리한 자동차 환경을 누릴 수 있게 됐다.
▶ 1990 미국 캘리포니아州, 무공해차(Zero Emission Vehicle)규정 발표
▶ 1990 이탈리아 람보르기니社, 디아블로(Lamborghini Diablo) 발표 ☞ 카운타크 후속 모델로 1985년 개발에 착수했으나 경영난으로 지체되다, 1987년 크라이슬러에 인수된 뒤에 완성되었다. 1990년 1월 몬테카를로에서 선보인 양산차는 V12 5.7리터(ℓ) 엔진에 492마력, 최고 속도 325km/h, 정지 상태에서 100km 가속에 걸리는 시간은 4.1초의 성능을 자랑했다.
악마라는 이름을 가진 이 차는 힘과 속도에서 경쟁 상대가 없을 정도다. 황소의 힘을 상징하는 람보르기니의 엠블럼이 제격이다. 이탈리아 디자이너 간디니의 디자인을 크라이슬러가 다시 다듬었는데 원래의 직선적인 디자인에 부드러운 곡선이 많이 가미되었다. 이 때문에 간디니 특유의 카리스마가 떨어진다는 평도 있지만 넓고 낮은 앞머리와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는 유선형의 디자인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느껴진다. 공기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한 디자인으로 차체의 공기저항계수는 0.31이다. 디아블로에는 VT, VT로드스터, SV 3종류가 있다. GTR 버전은 1999년 3월 제네바 오토살롱에서 처음 선보였는데 V12 6.0리터(ℓ) 엔진, 최대 출력 575마력, 최고 속도 338km/h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차답게 영화에도 여러 차례 출연했다. 《덤앤더머》, 《히갓게임》, 《식스티세컨즈》, 《엑시트 운즈》, 《이탈리안잡》 등에서 볼 수 있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92 자동차 생산대수 연간 5천만대 돌파
▶ 1994 스웨덴 볼보社(Volvo Aktiebolaget) 세계 최초로 측면 에어백(side air bag) 장착 ☞ 운전석 에어백과 작동 원리는 같으며 측면충돌을 감지하는 센서가 차량 좌우측 에어백 내부에 내장되어 있다. 사이드 에어백은 운전석과 조수석 시트 안에 장착되어 있으며, 차량에 충돌이 감지되면 운전석 에어백과 동시에 펼쳐진다. 두개의 사이드 에어백의 측면충돌감지센서가 동시에 작동될 때 에어백이 펼쳐지며 한곳의 신호만으로는 펼쳐지지 않는다. 측면충돌시 탑승자를 보호할 목적으로 설치한 에어백이지만, 정면충돌과 경사충돌 때도 영향을 준다. 차량 출고 때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으며, 옵션으로 뒷 좌석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 네이버 백과사전
▶ 1995 이탈리아 페라리(Ferrari), 50주년 기념 모델 F50 발표
▶ 1995 삼성자동차 창립
▶ 1996 한국 자동차 생산 세계 5위
▶ 1997 한국 자동차 등록대수 1천만대 돌파
▶ 1997 영국 롤스로이스 Thrust SSC(Super Sonic Car), 세계 최초로 음속 돌파 ☞ Thrust SSC는 항공기 제트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1,227.986km/h를 기록했다. 전장 16.5m, 폭 3.7m, 중량은 10.5톤에 달하는 거체였지만 이론상 최고속도는 시속 1370km, 0-160km 가속에 4초라는 어마어마한 속도측정용 기계다. 연료소비량은 초당 18.2L, 연비로 따지면 대중18m/L에 해당한다. 11만 마력짜리 롤스로이스 터보펜 엔진을 두 개 장착한 Thrust SSC는 미국 네바다 Black Rock Desert에서 1,227.986km/h를 기록했다.
▶ 1998 독일의 다임러-벤츠(Daimler-Benz)와 미국 크라이슬러(Chrysler) 합병
▶ 1998 독일 폭스바겐(Volkswagen)社, 영국의 롤스로이스(Rolls-Royce)와 프랑스의 부가티(Bugatti) 인수
▶ 1998 영국 멕라렌 F1 시속 386.7km 양산 로드카 최고속도를 경신 ☞ 스페셜 카 맥라렌 F1은 F1의 명문인 맥라렌팀이 최첨단 F1 기술과 경험을 투입해 제작한 양산형 수퍼카이다. 최고의 경주용 자동차 디자이너인 고든 머레이(Gordon Murray)와 8명의 스탭들은 1990년 3월, 맥라렌 F1 개발에 착수했으며 1992년 5월, 모나코 그랑프리 전야제에서 최초로 발표되었다. 맥라렌 F1은 최첨단 소재와 공기역학이 적용된 슈퍼카이다. 차체 높이가 114cm로 경주용차처럼 낮고, 고속에서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에어로다이나믹 스타일을 적용하였다. 차체와 섀시는 탄소섬유와 알루미늄을 사용해 고강성의 차체는 물론, 무게를 줄여 공차중량은 1,140kg에 불과하다.
맥라렌 F1의 실내 특징은 운전석이 가운데 위치한다는 것이다. 중앙에서 운전을 하고 양옆에 두명이 앉을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운전석을 중앙에 배치한 것은 운전에 가장 적합한 시야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F1은 주문한 고객이 공장을 직접 방문하여 시트와 핸들, 페달 등을 자신의 체형에 맞춰 제작하게 된다. 계기판은 시인성이 뛰어나도록 액정 디스플레이를 사용해 간결하게 배치하였고 400km/h까지 표기된 스피드미터는 이 차의 성능을 말해준다. 맥라렌 F1의 실내 특징은 운전석이 가운데 위치한다는 것이다. 중앙에서 운전을 하고 양옆에 두명이 앉을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운전석을 중앙에 배치한 것은 운전에 가장 적합한 시야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F1은 주문한 고객이 공장을 직접 방문하여 시트와 핸들, 페달 등을 자신의 체형에 맞춰 제작하게 된다. 계기판은 시인성이 뛰어나도록 액정 디스플레이를 사용해 간결하게 배치하였고 400km/h까지 표기된 스피드미터는 이 차의 성능을 말해준다.
변속기는 미국의 트랙션 프로덕츠가 개발한 수동 6단 기어를 장착하고 서스펜션은 앞,뒤 모두 더블 위시본 방식을 채택하였다. 타이어는 굿이어가 특별 제작한 이글타이어로 235/45ZR17(앞), 315/45ZR17(뒤) 사이즈를 장착하고 휠은 OZ레이싱을 장착하였다. 맥라렌 F1은 엔진사양과 옵션에 따른 세부모델도 출시하였으며 모델별 최대출력은 F1 627마력, 맥라렌 F1 LM 668마력, 맥라렌 F1 GT 627마력이고 레이싱카인 F1 GTR은 636마력이다. 맥라렌 F1은 총 300대 한정 생산 예정이었으나 시판 당시 63만 5천파운드(10억 5천만원)라는 비싼 가격과 소비자들의 수요가 줄어 100여대만 생산된채 아쉽게도 단종되었다. 부품 하나하나마다 멕라렌 F1만의 기술력과 고유성으로 만들어진 이 차는 20세기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진정한 슈퍼카라 할 것입니다.
13. 2000년대 환경을 생각하는 자동차로
자동차는 한 세기 동안 인간의 발 노릇을 하며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하지만 에너지를 마구 쓰는 바람에 에너지 자원이 고갈되고 대기를 크게 오염시켜 지구를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이제 21세기에는 수소나 전기, 천연가스와 같은 대체에너지를 이용해 환경오염을 줄여나갈 뿐 아니라, 더욱 인간적인 자동차, 그리고 첨단과학을 동원해 더욱 편리한 기능을 갖춘 자동차가 우리 앞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 2002 미국 포드社 100주년 기념모델 New GT40 발표 ☞ Ford GT는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s)로 불리는 왕년으 명경주차 GT40의 컨셉트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탄생된 모델이다 1966년 르망24시에서 1, 2, 3등을 휩쓸면서 우승한 이후, 무려 4년간 르망 24시 경주를 휩쓸었던 “GT40"의 활약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가슴 뭉클한 모델이다. 포드자동차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야심차게 제작한 New GT40(양산 명 Ford GT)는 60년대 전설 속 레이싱카의 21세기형 버전이다. 양산형 모델은 알루미늄으로 스페이스 프레임과 차체를 구성했고, 부분적으로 강화 플라스틱을 사용했다. 특히 보네트에 카본 파이버 재질을 사용해 경량화를 이룬 것이 특징이다. 앞뒤 무게배분은 43:57로 맞추었다. 개발팀은 오랜 검토 끝에 GT40 컨셉트카의 디자인을 GT 양산차에 그대로 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보네트와 연료 캡에 달린 금속 걸쇠, 뒤 엔진커버, 그리고 앞 유리 아래에 달린 대형 에어덕트 등이 양산차에 그대로 쓰였다.
그 결과 왼관은 60년대 GT40의 낮은 차체와 힘이 넘치는 스타일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바탕은 원색을 사용하고 앞뒤로 검정색 스트라이프를 넣은 오리지널 도장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왼관상 가장 독특한 부분을 헤드램프 또한 광학섬유와 HID 빔을 조합하여 제작했지만 이미지는 과거 그 시대의 것과 아주 흡사하다. V85.4리터 엔진이 수퍼차저와 어울려 만드는 힘은 500마력에 달하며 시속 320km 정도는 가볍게 낼 수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엔진은 투명커버로 덮혀 있어 엔진룸을 시원스럽게 들여다볼수 있다. 인테리어는 최근 유행하는 첨단 장비를 갖추기보다는 성능을 높이는데 더 중점을 둔 전통적인 스포츠카 만들기으 원칙에 충실한 구성으로 드라이빙에 직접적으로 불필요한 액세러리는 최대한 자제되어 있다. 역사, 전통, 성능, 가치 등 어떤 기준으로 평가해보아도 뒤처지지 않는 명스포츠카이나, 안타깝게도 포드의 실적악화에 따른 비용절감책의 하나로 2006년 말까지만 생산되고 단종되었다.
▶ 2002 폭스바겐(Volkswagen) 볼프스부르그 공장, 21,517,415대째 골프(Golf) 생산
Ⅲ. 자동차에 대한 모든 것
1. 자동차란?
한국의 도로교통법 및 도로운송차량법에서는 자동차를 '원동기를 사용하여 궤도 또는 가선(架線)에 의하지 아니하고 운전되는 차', '원동기에 의하여 육상에서 이동할 목적으로 제작한 용구'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두 바퀴ㆍ세 바퀴ㆍ네 바퀴 또는 그 이상을 가진 것이나, 가솔린ㆍ디젤의 내연기관 외에 증기기관ㆍ전동기ㆍ가스터빈 등의 원동기를 원동력으로 하는 것 등이 모두 자동차에 포함된다. 그러나 트롤리 버스는 가선에 의해 주행하므로 자동차에 포함되지 않는다.
오늘날 널리사용되고 있는 내연기관 자동차는 19세기 말에 증기자동차의 뒤를 이어 실용화되었다. 자동차의 보급률은 1990년대 들어 미국이 1.4인당 1대로 최고이고, 다음이 서유럽 여러 나라의 평균 3인당 1대이며, 한국의 경우 1996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1995한국 사회지표'에 의하면, 승용차 보유율은 1980년 153명당 1대에서 1994년에는 8.6명당 1대꼴로 나타나 선진국 수준을 보였다. 자동차는 사람 및 물자의 교류와 정보의 교환을일대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필요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세계 주요 공업국에서는 각종의 1차공업 산품의 사용률이 가장 많은 자동차 산업을 최대의 기간산업으로 육성하고 있고, 또 자동차산업은 각국의 경제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무역에서도 자동차는 큰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2. 작동원리
1) 기관
일반적으로 자동차에 사용되는 것은 내연기관이며, 이것은 작동방식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2행정사이클 기관이다. 이것은 크랭크축의 1회전마다 폭발이 일어나서 비교적 출력이 크고 회전이 원활하기는 하나, 저속회전에서는 배기ㆍ흡기가 완전히 행해지지 않아 회전이 불안정하고 비교적 경제성이 낮은 점 등의 문제가 있다. 더욱이 대형 기관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의 승용차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2륜차에는 아직도 상당히 사용되며, 대형 디젤기관에서도 2행정사이클 기관을 사용하고 있다. 그 둘째는 4행정사이클기관이다.이것은 자동차용으로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2회전마다 1회의 폭발이 일어나기 때문에 회전력의 균일을 기하고, 진동방지를 위해 2, 4, 6, 8, 12기통 등과 같이 실린더수를 늘려야 하나, 저속회전이 비교적 안정되고, 또 연료 경제면에서 2행정사이클 기관보다 유리하다.
특히 소형차에서는 크기와 가격 때문에 2기통으로 하나, 배기량 2,000 cc 정도까지의소형차에서는 4기통, 4,000 cc 정도까지의 중형차에서는 6기통, 그 이상의 대형차에서는 8기통을 사용하고 있다. 일부의 고성능 스포츠카나 경주용 자동차에서는 3,000 cc 정도에서 12기통으로 한 것도 있다. 한국에서는 2,000 cc 정도면 고급차에 속하며, 6기통을 사용하는 것도 있다. 4기통이나 6기통에는 실린더를 1열로 세운 직렬형(直列型)이 많으며, 각 기통의 점화순서에 의해서 평형을이루도록 되어 있다. 8기통인 경우 직렬로 하면 기관 자체가 길어져서 크랭크축의 강성(剛性)이 약해지고 객실의 공간도 좁아지기 때문에 4기통씩 V자로 대치시키고 하나의 크랭크축을 사용하는 V형 8기통 즉 V8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밖에 2기통 이상의 기관에서 반 수씩을 수평으로 대치시킨 수평대향형(水平對向型)도 있다. 기관은 적합한 시기에 혼합기를 흡입하고 적합한 시기에 연소가스를 배출하는 밸브 장치를 필요로 한다.
밸브는 실린더 헤드에 있는 연소실(燃燒室)에 설치되어 있으며, 크랭크축의 1/2의 속도로 회전하는 캠축에 의해서 열리고 스프링의 힘으로 닫힌다. 보통의 기관에서는 캠축을 실린더 블록 옆면의 낮은 쪽에 두고 긴 푸시 로드(push rod)로 로커 암(rocker arm)을 밀어서 밸브를 연다. 이 방식을 오버헤드 밸브식(overhead valve type:OHV)이라 한다. 이 방식은 기관이 고속회전을 하게 되면 푸시 로드의 관성 때문에 밸브의 개폐가 불확실하게 되어 매분 6000회전 이상은 무리이고, 배기량 1ℓ당 70 hp 이상을 얻기도 어렵다. 따라서 캠축을 실린더 헤드에 설치하고 직접 캠축으로 밸브를 개폐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오버헤드 캠축식(overhead camshaft type:OHC)이라고 한다.
오버헤드 캠축식은 구조가 복잡하여 가격이 비싸지고 정비하기도 어려우나, 기관의 회전속도를 올릴 수 있고 1ℓ당의 출력도 높일 수 있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셋째는 로터리 기관(rotary engine)이다. 이것은 회전만으로 출력을 낼 수 있는 기관이며, 51년경 독일의 F.방켈에 의해 원리가 완성되었으며, 독일의 NSU회사가 1960년경 공업화에 성공, 1963년부터 소형 스포츠카에 탑재하여 판매하였다. 그 후 세계의 여러 제조회사가 NSU 방켈의 특허권하에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일본 마즈다 자동차 등이 자동차에 탑재하였으나, 그 원리는 누에고치 모양의 실린더 안을 피스톤에 상당하는 삼각형 로터(rotor)가 편심(偏心)되어 회전하며, 로터와 실린더 사이에 생기는 공간의 부피 변화에 의하여 흡입ㆍ압축ㆍ연소ㆍ배기를 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왕복운동 부분이 없어 출력의 손실이 적고, 1ℓ당 100∼120 hp의 출력도 무리 없이 낼 수 있으며, 회전이 원활하다.
또, 1기통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흡ㆍ배기는 2행정사이클 기관처럼 실린더 벽에 뚫은 구멍으로 하기 때문에 4행정사이클 기관과 같은 복잡한 밸브기구(機構)가 필요하지 않고, 구조도 간단하고 부품수도 적어 고장이 날 가능성이 적다. 또 내연기관은 그 사용연료에 따라 가솔린기관ㆍ디젤기관으로 나누어지며, 2행정사이클 기관과 4행정사이클 기관이 있다. 승용차는 고성능이고 소음과 진동이 적은 가솔린기관을 주로 사용하며, 트럭이나 버스에서는 디젤기관을 주로 사용한다. 단, 승용차에서도 독일의 메르체데스 벤츠가 1936년부터 디젤기관을 사용하고 있다. 저공해(低公害), 에너지 절약의 면에서 디젤 승용차의 보급이 진행되고 있으나, 승용차로서의 몇 가지 문제점은 있다.
LPG기관은 기화기(氣化器)의 일부가 다를 뿐 다른 것은 근본적으로 가솔린기관과 마찬가지이다. 기화기는 분무(噴霧)의 원리를 이용하여 가솔린을 안개화[霧化]하여 혼합기를 만드는 것이지만, 이 기화기 대신 펌프로 가솔린을 실린더의 흡입구 쪽으로압송, 안개 모양으로 분사하는 연료분사방식(燃料噴射方式)을 사용하는 것도 있다. 출력이 약간 증가되고 저속회전 범위에서도 안정하며, 배출가스 대책면에서도 유리하여 점차 많이 사용되고 있다. 기화기와 연료분사의 어느 것이든 흡입관의 일부에 스로틀 밸브(throttle valve)가 있어 운전석의 가속 페달과 연동하며, 가속 페달을 밟으면 밸브가 열려서 공기의 유량(流量)이 증가하여 회전속도와 출력이 모두증가한다.
발화점(發火點)이 높은 가솔린의 혼합기는 일일이 점화하지 않으면 연소하지 않으므로 연소실에 점화 플러그를 둔다. 점화 플러그는 약 0.5 mm의 간극을 둔 2개의전극 사이에 1만 V 정도의 고압 전류로 불꽃이 튀게 하는 것이며, 고압전류는 축전지의 12 V(드물게는 6 V)의 전류로부터 유도코일에 의해 발생되어 배전기(配電器)를 통하여 적합한 순서로 각 실린더의 점화 플러그에 전달된다. 디젤기관은 고압ㆍ고온의 공기 속에 경유(輕油)를 분사하면 자연착화되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며, 따라서 분사 펌프와 분사 노즐은 필요하나, 기화기나 점화장치는 필요하지 않다. 또 공기를 보다 더 압축해야 하기 때문에 기관 자체도 견고하게 제조된다. 이에 따라 중량이 커지고 고가(高價)이며, 자연착화 때문에 소음과 진동도커진다. 배기량 1ℓ당의 출력도 20∼25 hp(2행정사이클 기관에서도 35 hp 전후)으로 낮다. 그러나 디젤기관은 연료소비율이 낮고 가솔린보다 경유의 값이 싸기 때문에 매우 경제적이다. 또 저속에서의 토크(torque)가 크므로 대형 자동차에 적합하다.
배출가스 속의 유해(有害) 가스량도 가솔린의 경우보다 적다. 가솔린ㆍ디젤기관 등 모든 기관에는 냉각과 윤활(潤滑)이 필요하다. 기관은 실린더 내에서 연소를 일으키고 마찰열도 높기 때문에 외부에서 냉각해야 한다. 냉각장치에서 가장 간단한 것으로는 실린더 바깥쪽에 다수의 냉각핀(cooling fin)을 두고 외기(外氣)로 냉각하는 자연공랭식과, 송풍기로 냉각공기를 보내어 냉각하는 강제공랭식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음이 많다는 이유 등으로 경자동차 및 소형자동차의 일부와 2륜차 등에만 사용된다. 일반적인 것은 수랭식(水冷式)이며, 실린더 주위에 물재킷(water jacket)을 두고 물펌프에 의해 순환되는 냉각수로 냉각시킨다. 열을 받은 냉각수는 가는 파이프와 핀으로 된 라디에이터 속을 통과할 때 외기에 의해 냉각되어 다시 기관에 압송된다.
작동 중에 냉각수는 수온조절기(서모스탯)에 의해 항상 80 ℃ 전후로 유지된다. 미리부동액(不凍液)을 넣고 밀폐된 라디에이터를 사용하는 것도 있다. 기관은 실린더와 피스톤을 비롯하여 마찰부분이 많으며, 이러한 곳의 마멸이나 과열을 방지하기 위하여 윤활유를 펌프로 압송하여 각 마찰부분에 보낸다. 윤활유는 점차 소비되므로 정기적으로 보급하고, 일정 기간을 두고 전부를 갈아넣어야 한다. 기관은 처음에 다른 힘으로 회전시켜야 시동되므로 축전지로부터의 전력으로 회전되는 시동전동기(始動電動機)를 둔다. 운전석의 점화 스위치를 ON으로 하고 다시 더 돌리면 시동전동기가 작동되고, 기관이 시동되면 자동적으로 기어 물림이 빠져 분리된다. 자동차의 축전지는 점화장치ㆍ시동장치ㆍ각종 등화ㆍ라디오ㆍ라이터 등의 각종 자동장치에 전력(電力)을 공급하므로 전력의 소비가 많다. 때문에 기관에 의해 구동되는 발전기(發電機)를 두고 주행 중에 충전하도록 한다.
저속회전에서도 충전효과가 큰 교류발전기도 많이 사용된다. 기관의 성능을 표시하는방식에는 마력(hp)과 토크(kgm)가 있다. 마력은 그 기관이 할 수 있는 일의 능률을 나타내고, 토크는 절대적인 회전력을 나타낸다. 따라서 마력은 자동차의 속도를 좌우하고, 토크는 가속력이나 등판능력과 관계가 있다. 마력이 커도 토크가 작으면 기관의 융통성이 낮고 끈질기지 못하기 때문에 혼잡한 시가지 등에서 사용하기가 어렵다. 보통의 자동차에서는 출력이나 토크가 모두 낮은 회전속도 범위에서 큰 쪽이사용되기 때문에 최고출력ㆍ최대토크 모두 그것이 발생되는 회전속도(매분 회전수:rpm)를 병기한다.
2) 기관설치위치와 구동방식
일반적인 것은 차체의 앞쪽에 기관을 설치하고 뒷바퀴를 구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소형차나 대형버스에서는 실내공간을 넓히기 위해 뒤쪽에 기관을 두고 뒷바퀴를 구동하는 리어엔진 방식의 것도 있다. 세계적으로 중형차나 소형차에 보급된 앞기관ㆍ앞바퀴 구동차는 기관을 앞쪽에 설치하고 앞바퀴를 구동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뒷바퀴를 구동하면서 앞바퀴로 조향(操向)하는 불합리를 없앤 것으로, 그 생각은 오래 전에 비롯되었으나 조향바퀴에 동력을 전달하기 위한 구조가 복잡하고 고장나기 쉬우며 고가가 되는 문제, 또 가속페달을 밟고 있을 때와 놓았을 때에 조향감각에 차이가 생기는 등의 결함이 있어 일부의 특수차에만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기술 발달로 그 결함이 제거되어 소형 대중차에도 보급되었다. 이것의 장점은 조향바퀴를 구동하므로 젖었거나, 언 노면(路面), 눈 위, 전차 선로 등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고 안전성이 높다.
기관ㆍ변속기ㆍ종감속장치 등이 자동차 앞쪽에 콤팩트하게 들어차있고, 또 긴 추진축이 필요하지 않아 바닥면을 낮고 평평하게 할 수 있어 실내공간이 넓어진다.
3) 동력전달장치
동력전달장치는 기관의 출력을 구동바퀴에 전달하는 장치이며, 보통 기관 →클러치 → 변속기 → 추진축(앞기관 뒷바퀴 구동의 경우) → 종감속장치 및 차동기어장치 → 차축 → 구동바퀴의 순서로 전달된다. 클러치는 마찰판과 압력판으로 되어 있다. 보통 스프링의 힘으로 압착하여 동력을 전달하게 되어 있으며, 운전석의 클러치 페달을 밟으면 마찰판과 압력판의 접속이 떨어져 동력이 전달되지 않게 된다. 클러치는 수동식인 기어변속기의 변속을 할 때, 짧은 시간 동안 관성운전을 할 때 등에 사용한다. 기관은일정한 속도로 운전할 때 큰 출력을 내는데, 자동차는 그 속도를 저속에서부터 고속까지 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기어를 조합하여 회전속도와 힘이 변화하도록 한 것이 변속기(變速機)이다. 기관의 출력이 큰 대형 자동차에는 전진(前進) 3단, 후진(後進)1단의 것이 많고, 기관의 출력이 비교적 작은 소형차에는 전진 4~5단, 후진 1단의 것이 많으며, 스포츠카에는 전진 5단 이상, 후진 1단의 것도 있다.
서로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 2개의 기어를 물리려면 주속도를 같게 해야 하는데, 과거에는 더블 클러치라고 하는 복잡한 조작을 필요로 하였으나, 오늘날의 변속기는 물리려는 2개의 기어 속도를 미리동기(同期)시키는 싱크로메시 기구(機構)를 갖추게 되어 그러한 어려움은 줄었다.
변속기의 조작기구에는 변속레버를 조향기 등에 설치한 컬럼 시프트(column shift)와 바닥면에 설치한 플로어 시프트(floor shift)가 있는데, 전자는 조작하기가 비교적 간편하여 보통의 실용차에 많이 사용되고, 후자는 보다 신속ㆍ확실하게 조작할 수 있어 고성능의 스포츠카나 소형 승용차에 많이 사용된다. 또 복잡한 시가지 등에서는 변속조작이 번잡하므로 이러한 변속조작을 기계가 대신하도록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자동변속기(自動變速機)라고 한다. 자동변속기차인 경우 운전석에 클러치 페달이 없고, 조작 레버에는 L(저속)ㆍD(전진)ㆍN(중립)ㆍR(후진)ㆍP(주차) 등의 선택표지가 있다. N으로 하고 기관을 시동한 다음 D로 하고 가속 페달을 밟으면 원활하게 출발하여 자동적으로 최고속도까지 가속된다.
구성은 토크변환기와 자동적으로 조작되는 2∼4단의 유성(遊星)기어 변속장치, 차속과 기관의 부하(負荷) 및 운전자의 변속위치의 선택을 입력(入力)으로 하여 변속기를 제어하는 제어장치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자동변속기는 수동변속기에 비해 효율이 약간 낮아서 최고속도ㆍ가속능력ㆍ연료소비율등이 약간 저하된다. 추진축을 통하여 뒤쪽으로 전달된 회전동력은 종감속기어장치에서 차축으로 전해지고 동시에 최종적으로 감속된다. 종감속 기어장치의 기어비의 대소는 고속형ㆍ저속형 등 자동차의 속도성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종감속 기어장치에는 차동기어장치가 일체(一體)로 설치되어 있다. 자동차가 커브를 돌 때에는 안쪽 바퀴보다 바깥쪽 바퀴가 더 빨리 회전해야 하는데, 차동기어장치가 작동하여 자동적으로 속도차가 생기게 한다.
4) 현가장치와 타이어
차체와 차축 사이를 연결하고 노면으로부터의 충격이나 진동을 흡수하여 승차감을좋게 하며, 또 차체와 기관 등을 보호하는 장치를 현가장치(懸架裝置:suspension system)라고 한다. 즉, 도로의 요철(凹凸)에 관계없이 자동차를 안전하게 주행시키기위한 구실을 하는 중요한 장치이다. 옛날의 승용차에는 앞뒤 모두 하나로 된 차축의 양쪽에 바퀴를 설치한 형식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적어도 앞바퀴만은 좌우가 별개의 차축으로 구성된 독립현가(獨立懸架)로 되어 있고, 차에 따라서는 뒤쪽도 독립현가로된 것이 있다. 독립현가의 목적은 바퀴와 차축의 중량을 가볍게 하여 노면에 잘 추종(접지성)시켜 승차감을 향상시키고, 또 노면상태에 관계없이 차체가 수평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현가장치는 스프링ㆍ완충기(緩衝器:shock absorber)ㆍ스태빌라이저 등의 구성부품으로 되어 있다.
스프링에는 판스프링ㆍ코일스프링ㆍ토션 바 등의 금속제가 있고, 이 밖에 고무스프링ㆍ공기스프링 등이 있다. 유럽의 차에는 고무나 기체스프링과 유압(油壓)을 조합하여 좋지 않은 길에서도 수평을 유지하게 하는 것, 유압을 이용하여 하중의 다소에 관계없이 차 높이를 자동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하게 하는 것, 좋지 않은 길에서 차 높이를 높게 유지하는 것 등이 있다. 스프링은 일단 운동을 받으면 필요 없이 계속 진동하므로, 오일이 작은 구멍을 통과할 때의 저항으로 진동을 흡수하도록 만든 완충기를 병용한다. 스태빌라이저는 독립현가의 차가 선회할 때 생기기 쉬운 롤링을 방지하는 기능을 한다. 스포츠카나 경주용 자동차의 스프링 ㆍ완충기는 상대적으로 강도가 높은 것으로 되어 있다. 타이어는 접지성을 높이고 승차감이 향상되도록 하기 위해 점점 두꺼워지는 경향이 있으며, 속에 독립된 튜브가없고 쉽게 펑크나지 않는 튜블리스 타이어가 대부분 사용된다. 또 최근에는 대부분 레이디얼 타이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타이어는 이전의 타이어의 플라이 코드가 바이어스로(기울게) 되어 있는 데 비해 회전 방향과 직각으로 되어 있다. 레이디얼 타이어는 승차감은 조금 딱딱한 기분을 주나, 고속으로 선회할 때 안전성이 높고 내구성(耐久性)도 우수하다.
5) 조향장치
조향장치(steering system)는 자동차의 주행방향을 바꾸는 장치로서, 조향핸들(steering wheel)의 회전을 기어장치로써 직선운동으로 바꾸어 조향바퀴의 방향을 바꾸어 행하게 되어 있다. 기어장치의 비(比)는 보통 실용차에서는 10∼25:1 정도이나, 스포츠카에서는 15:1 전후로 비교적 작다. 실용차에서는 조향핸들의 오른쪽 극한에서 왼쪽 극한까지의 회전수가 4회 이상이지만, 스포츠카에서는 평균 3회, 적은 것은 2.5회 정도이고, 손목을 약간 움직일 정도에서도 강하게 반응하는 것이 있다. 중량급의 트럭이나 버스, 또 최근에는 많은 승용차에서 조향핸들의 조향력이 경감되는 유압식 동력조향장치(動力操向裝置)를 사용하기도 한다. 2개의 조향바퀴는 완전히 직립ㆍ평행으로 장치되어 있지 않고 앞에서 보았을 때 바퀴의 위쪽이 조금 넓게 되어 있고(캠버), 조향할 때 바퀴의 회전중심축이 되는 킹 핀은 뒤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캐스터), 또 차를 위에서 보면 조향바퀴의 앞부분이 조금 좁게 되어 있다(toe in). 이것들을 앞바퀴 얼라인먼트라 하며, 주행할 때 차의 직진성(直進性)을 돕고, 커브를 돈 후에 복원력(復元力)을 주며, 적은 힘으로 핸들을조작할 수 있게 하고, 또 타이어의 편마멸(偏磨滅)을 방지한다. 조향성을 나타내는 방법에 최소회전반지름이 있는데, 평탄한 노면에서 조향핸들을 극한까지 돌리고 저속으로 주행했을 때 바깥쪽 바퀴의 궤적(軌跡)의 타이어 중심선에서 측정한 지름의1/2로 나타낸다. 따라서 차체(車體)는 폭이 더 크므로 최소회전반지름의 2배가 되는 폭의 도로에서는 조향핸들을 재조작하지 않고서는 U턴을 할 수 없게 된다.
6) 브레이크장치
브레이크장치는 주행 중인 자동차의 속도를 감속하거나 정지시키는 장치이며, 자동차의 고속성에 비추어 매우 중요한 것이다. 브레이크는 운전석에 있는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면 마스터 실린더에서 발생된 유압이 가는 튜브를 통해서 각 바퀴에 있는 휠실린더에 전달되어 작동한다. 브레이크장치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바퀴와 함께 회전하는 드럼의 안쪽에서 슈가 휠 실린더에 의해 드럼에 압착되어, 마찰을 일으켜 브레이크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는 드럼 브레이크이다. 이 형식은 브레이크를 여러 번 반복 사용하면 마찰열 때문에 드럼이 팽창하여 나중에는 작용하지 않게 된다. 이 결함을 없애기 위해 디스크 브레이크가 고안되었는데, 이것은 바퀴와 함께 회전하는 디스크를 양쪽에서 패드로 압착하여 마찰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디스크가 공기 속에 회전하여 열을 발산하므로 여러 번 사용해도 기능이 낮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주차(駐車) 브레이크로서의 기능은 약하기 때문에 중요한 앞바퀴만을 디스크로 하고, 뒷바퀴는 드럼으로 한 차가 많다.
디스크 브레이크는 처음에는 경주용 자동차에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승용차에 널리 보급되고 있다. 대형트럭이나 버스, 대형 승용차, 고성능차 등에는 브레이크 기능을 향상시키는 한편, 페달을 밟는 힘을 줄이기 위해 기관의 흡기다기관(吸氣多岐管)의 음압(陰壓)을 이용하는 등의 배력장치(培力裝置)를 비치한 것도 있는데, 이러한 것을 서보 브레이크(servo brake) 또는 동력 브레이크라고 한다. 브레이크 회로는 종래에는 1계통으로 되어 있어 회로 파이프의 한 곳이라도 파손되면 전체 브레이크가 작용하지 않게 되어 위험하므로, 근래에는 회로를 앞바퀴용과 뒷바퀴용으로 나누어 2계통으로 한 브레이크(2중회로 브레이크)가 사용된다. 미국의 안전기준이나 국제 스포츠법전의 부칙 J항은 이와 같은 이중 브레이크를 요구하고 있다. 자동차에는 이 밖에 주로 뒷바퀴에 작용하도록 된 주차 브레이크도 장치되어 있으며, 계기판 아래나 바닥 위에 있는 레버를 잡아당겨 기계적으로 작동시킨다. 주차 브레이크는 주브레이크가 작용하지 않을 때 비상 브레이크로도 사용된다. 최근에는 제동시 바퀴가 지면에서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이를감지하여 브레이크를 풀어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ABS(antilocking brake system)가 사용된다.
7) 차체
차체(body)는 그 속에 사람이나 화물을 수용하는 중요한 부분이며, 승용차의경우 우수한 거주성(居住性)과 안전성ㆍ편리성 등이 요구된다. 구조적으로는 독립된 프레임에 기관ㆍ현가장치 등을 설치하여 섀시(chassis)를 조립한 다음, 그 위에 완성된 차체를 장착하는 방식이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 방식은 무거워지는 데 비해 강도(强度)가 커지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차체 자체를 충분한 강도를 가지는 상자로 만들고, 거기에 직접 기관이나 현가장치를 설치하는 단체구조(單體構造) 또는 일체구조(一體構造)를 사용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미국에서처럼 한 차가 각종 차체를 가져야 하는 형식에서는 아직 독립 프레임을 사용하고 있다. 스포츠카에도 독립된 프레임이 있는 것이 많다. 최근에는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차체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경향이며, 특히 신차(新車)에서는 차실(車室) 부분을 매우 견고하게 하고, 앞뒤는 약간 유연한 구조로 하여 충돌사고 등에서 충격이 흡수되도록 하고 있다.
안전성에 대한배려는 차실내에서도 강력하게 요구되며, 특히 엄격한 안전기준으로 규제된 미국차는이 점에서 앞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차실 내는 모두 부드러운 쿠션(크래시패드 등)으로 싸여 금속제의 것으로서 노출된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계기판의 스위치류도 깊이 들어가 있거나 머리부분이 평평하게 되어 있어 부딪혀도 다치지 않는다. 선바이저(sunvisor)는 연한 패드로 되어 있고 후사경(後寫鏡)은 충격이 가해지면 바닥으로 떨어져이마를 다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안전띠(safety belt)는 앞뒤의 모든 좌석에 부착되어 있다. 충돌사고 등에서 운전자가 조향핸들에 가슴을 다치는 예가 많으므로 강한 충격이 가해지면 줄어드는 조향축(collapsible steering column)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충돌시 조향핸들에서 풍선이 부풀어올라 탑승자를 보호하는 에어백(air bag)이 사용되는데, 미국에서는 이미 이 장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유럽과 일본 및한국에서의 안전대책은 조금 늦었지만, 점차 확장해가고 있다. 승용차의 각종 액세서리도 충실해지고 있는데, 시계ㆍ라디오ㆍ라이터ㆍ스테레오 테이프 플레이어ㆍCD플레이어ㆍ에어컨디셔너 등이 장치되어 있다. 또한 앞뒤, 좌우의 창문을 버튼 하나로 상하 작동시키는 전동(電動) 또는 유압식 파워 윈도(power window), 운전석에 앉은 채로 모든 문의 고정 및 해제를 할 수 있는 파워 도어 록(power door lock) 및 좌석의 앞뒤ㆍ상하ㆍ앞뒤 경사 등의 위치조절을 스위치 하나로 행하게 된 파워 시트(power seat) 등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 자동차의 형태(styling)는 실용성ㆍ거주성ㆍ성능ㆍ경제성ㆍ내구성ㆍ가격 등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소이며, 판매에서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현재 세계의 카 스타일링을 좌우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3대 제조회사의 디자인 부분과 이탈리아의 차체 디자인 전문회사들이다.특히 후자는 유럽과 일본, 한국의 승용차 차체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으며, 매년 유럽의 가을 자동차 쇼에 출품되는 실험적이면서도 전위적(前衛的)인 커스텀카(custom car)는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3. 발달과정
인류가 굴대로부터 바퀴를 발명한 것은 약 6,000년 전이다. 그것을 사람의 힘이나짐승의 힘으로 굴린 시대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으며, 자체의 힘으로 달리는 수레는 항상 인간의 꿈이었다. 예를 들면, R.베이컨은 1250년 “어느 날엔가 말이나 그밖의 동물에 의하지 않고 자체의 힘으로 달리는 차가 생기게 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15∼16세기의 대예술가이며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도면까지 그렸던 만능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스프링의 힘으로 달리는 3륜의 자주차(自走車)의 도면을 그렸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1569년 네덜란드인 S.스테핀이 돛에 바람을 받아 주행하는 풍력(風力) 자동차를 만들어, 28명을 태우고 시속 34km로 달렸는데, 현재와 같이 고도한 범주기술(帆走技術)이 없었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는 달리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1680년에는 대과학자 I.뉴턴이 증기를 뒤쪽으로 분출시켜 그 반동으로 달리는 추력(推力) 자주차를 계획하였으나, 실물을 제작하지는 못하였다. 본래의 의미의 자동차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에 증기기관이 실용화된 후이며, 특히 1770년 프랑스의 N.J.퀴뇨가 제작한 증기자동차는 역사상 처음으로 기계의 힘에 의해 주행한 차로서 유명하다. 당시 퀴뇨는 프랑스군의 공병 대위였으며, 포차(砲車)를 견인할 목적으로 대소 2대의 증기자동차를 시작(試作)하였다. 이 증기자동차는 앞바퀴 하나만을 구동하는 3륜차였으며, 중량이 크고 보일러의 용량이 작았기 때문에 그 속도가 겨우 사람이 걷는 정도인 시속 5km였다.
또 보일러도 15분마다 물을 보충해야 했으며, 앞바퀴 하중(荷重)이 너무 커서 조향(操向)하기가 어려웠고, 브레이크도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때문에 대형의 것은 파리 교외에서 시운전 중 언덕길에서 세우지 못하고 벽에 부딪쳐 화재를 일으켰다. 퀴뇨의 시도는 프랑스 혁명에 의해서 중지되었으나, 그 후에도 유럽 각지에서 증기자동차의 연구가 계속되었다. 그 중 영국의 R.트레비식이 1801년 완성한 증기자동차는 상당히 실용적인 것이었으며, 그 2년 후에 제작한 지름 3.8m의 거대한 구동바퀴를 갖춘 4륜차는 런던 시내에서 시속 13km로 주행하는 데 성공하였다. 1826∼1836년에는 W.핸목이 만든 10대의 증기자동차(버스)가 런던 시내와 첼트넘 간에서 정기 운행하여, 사상 최초로 실용화된 자동차가 되었다.
이 정기버스는 22인승에 평균 속도는 16∼23 km/h였다. 이렇게 하여 증기자동차가그 실용의 영역을 넓혀감에 따라 1865년에, “1대의 자동차에 3인의 운전수를 태운다, 그 중 1명은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등을 가지고 60km 앞을 달려야 한다, 최고속도를 6.4km/h 이하로 하고, 시가지에서는 3.2km/h한다, 증기를 방출하지 않는다” 등을 정한 ‘붉은 깃발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어 영국의 자동차 발전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것은 마차를 끄는 말이 자동차에 놀라서 폭주하여 위험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자동차가 상당히 보급된 1896년까지 존속되었다.
증기자동차는 유럽 대륙이나 미국에서도 제작되었지만, 보일러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자동차의 성능이 낮고, 불을 때서 증기가 발생하여 주행이 가능하게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등의 결함이 있어, 개인용의 소형 자동차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증기기관은 영국 등에서 대형 트럭이나 중량물 견인용 트랙터 등으로 1920년대 중반까지 사용되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보다 소형이고 강력하며 간편한 원동기를 계속 추구하였다.
19세기 중반에 전기자동차가 출현하였으나, 이것도 축전지가 무겁고 항속거리가 짧으며, 충전에 장시간을 요하는 등의 결점이 있었다. 그래도 구조가 간단하고 내구성(耐久性)이 크며 운전하기가 쉬운 점 등이 있어 주로 여성용으로 미국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 소량 생산되었다. 자동차의 본격적인 발전은 내연기관의 발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연기관에 대한 발상은 상당히 오래 되었으며, 네덜란드의 C.호이겐스가 1680년에 화약의 폭발에 의해 작동되는 기관을 설계하였다고 한다.
1860년에는 프랑스의 J.E.르누아르가 석탄가스를 원시적인 점화장치로 연소시키는 기관을 만들었고, 3년 후에는 액체연료로 작동되는 기관을 마차에 탑재하고 주행하는 데 성공하였다. 1868년 오스트리아의 S.마르쿠스가, 1884년 이탈리아의 E.베르나르디가 내연기관을 탑재한 자동차를 만들었다. 한편, 1862년 프랑스에서는 A.B.로사가 사이클 기관의 원리를 발견하였으며, 1876년 독일의 N.오토가 처음으로 이 원리에 따른 4행정사이클 기관을 완성하였다.
오토 내연기관연구소의 젊은 기사였던 G.다임러가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가볍고 강력한 기관을 완성하고, 1885년 이것을 목제의 2륜차에 탑재하여 사상 최초의 2륜차를 시작하여, 각각 특허를 얻었다. 또 K.벤츠도 독자적으로 2행정사이클 가솔린기관을 완성, 다임러와 같은 해인 1885년에 3륜차를 제작하고 다음해에 특허를 얻었다. 다임러와 벤츠 두 사람은 사상 처음으로 실용적인 가솔린기관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업화한 점에서 획기적이었으며, 두 사람은 자동차의 아버지라고 일컫는다.
그후 이 두 회사는 서로 좋은 경쟁상대로 발전하였으며, 1926년 합병하여 회사명을 다임러-벤츠, 차의 명칭을 메르세데스 벤츠(Mercedes-Benz)로 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이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자동차 제조회사이다. 프랑스에서는 파나르-르바소르(Panhard-Levassor)회사가 다임러 기관의 제작권을 얻어 자동차의 생산을 개시하였는데, 앞쪽에 기관을 설치하고, 동력을 클러치 → 변속기 → 뒷바퀴로 직선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처음으로 갖추었다.
또한 1900년 다임러가 발표한 최초의 메르세데스차는 벌집 모양의 라디에이터, 둥근 핸들, 반타원형 스프링 등을 사용하여 현재에 이르는 자동차의 근본적인 형태를 확립하였다. 여기에는 물론 자동기어 장치(1827년 프랑스의 O.페쿠르), 변속기(1832년 영국의 W.H.제임스), 공기타이어(1845년 R.W.톰프슨) 및 그 밖의 발명도 크게 공헌하였다. 1887년 영국의 J.버틀러가 3륜 가솔린차의 시작에 성공하였고, 1889년에는 독일의 마이바흐, 프랑스의 푸조, 이탈리아의 비안키 등이 자동차의 생산을 개시하였다. 좀 늦은 1893년에 미국에서도 C.두리에이와 F.두리에이 형제가 미국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를 완성하고, 2년 후에 생산ㆍ판매를 시작하였다. 1894년에는 프랑스의 《프티 주르날》 신문사의 주최로 파리-루앙 간 126km 구간에서 자동차경주가 열려, 드 디옹 백작이 운전한 드 디옹 부통 증기자동차가 6시간 걸려 평균 21km/h의 속도로 1착을 하였다.
그러나 엄정한 판정 결과 다임러 기관을 탑재한 푸조와 파나르가 승리를 나누어 가지게 되어 가솔린 자동차의 우위가 입증되었다. 후에 드 디옹 부통도 가솔린 자동차로 전향하였다. 유럽에서는 처음에 자동차는 귀족이나 일부 대부호만이 가졌으나,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일반에 널리 보급되었다. R.E.올스는 1901년 유명한 올즈모빌을 425대 제작하여 세계 최초의 자동차 양산 제조업체가 되었다. 그러나 1908년 H.포드가 발표한 T형 포드는 간결하고 신뢰성이 높은 설계와 새로운 합금강의 사용으로 견고할 뿐 아니라, 양산방식 때문에 그 값이 저렴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첫해에 6,850대, 그 다음해에는 1만 대를 판매하였다. 1913년에 포드는 급증하는 수요에 맞추기 위해 자동차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컨베이어 라인에 의한 작업방식을 채택하였고, 최전성기였던 1925년에는 연간 199만 950대를 생산하였다.
그 결과 1927년에는 최염가형 로드스터의 값이 260불이었다. 그러면서도 품질이 나쁘지 않았고, 대량구입에 의한 우수한 원자재, 대량생산에 의한 균일한 공작 등으로 10배 이상이 되는 비싼 차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회사가 충분한 이익을 올려, 근로자에게 그 당시의 평균의 배가 되는 일급 5달러를 주고, 신규 구입자에게는 수표로 50달러씩 되돌려 주기도 하였다(1914). T형 포드는 미국 외에 영국ㆍ독일에서도 생산되고 세계 각지에서 조립되었으며, 1908년 10월 1일의 첫 출고부터 1927년 5월 26일 생산 중지일까지의 18년 반 사이에 1500만 7033대를 생산하였다. 통칭 ‘딱정벌레’라고 하는 폴크스바겐이 1972년, 1945년 만에 이 기록을 갱신하였으나 여기에는 27년의 시간이 필요하였다(종전 후의 무의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T형 포드는 그 전성기에 전세계 자동차 보유량의 68%를 차지하고 있었다. T형 포드의 성공은 유럽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의 A.시트로앵은 포드에서 배운 방식으로 유럽에서 처음으로 대량생산을 개시하였으며, 1922년 독일의 오펠(Opel)사는 5CV차를 양산하여 유럽의 대중에게 제공하였다. 이탈리아에서도 1919년에 피아트(Fiat)사가 501형을 양산하였고, 영국에서는 1922년에 H.오스틴이 유명한 오스틴 세븐을 발표하여 자동차의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30년에는 전세계를 휩쓴 대공황으로 전근대적인 일품제작(一品製作)의 고급차는거의 소멸하고, 자동차는 모두 대중차 양산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사이에 기구상(機構上) 개량ㆍ진보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차체(body)는 1900년대에 이르러 마차의 형태를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그 후에도 포장마차형의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상자형 대중차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말에 이르러서이다. 1930년대에는 전부 강판으로 된 상자형 차체의 양산이 시작되었으며, 특히 1934년부터는 유선화(流線化)가 진행되었다. 1940년 이후에는 차체의 높이가 더 낮아지고 길이도 길어지고 폭이 넓어졌으며, 스텝이 차체에 포함되고, 객실이 더욱 넓어졌다.
Ⅳ. 자동차(自動車 Automobile)
1. 요약
가스휘발유경유 등의 연료를 내연기관의 동력원(動力源)으로 하여 자력으로 달리게 만든 차. 사람ㆍ화물을 운반하거나 각종 작업을 수행하는 기계의 총칭으로, ① 자동차관리법(2 ①): 원동기에 의해 육상에서 이동할 목적으로 제작한 용구 ② 도로교통법(2 ⑭): 철길 또는 가설된 선에 의하지 않고 원동기를 사용하여 운전되는 차(견인되는 자동차도 자동차의 일부로 보나, 원동기장치 자전거는 제외) ③ 공업규격: 원동기와 조향장치 등을 갖추고 이를 이용하여 노상을 주행할 수 있는 차량 등으로 정의된다.
인류가 바퀴를 만들어 낸 뒤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는 탈것>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그러나 18세기 말 증기기관을 동력원으로 시도하였던 것을 자동차의 첫 등장으로 하여, 산업의 한 분야로 자리잡고 대중화의 길로 접어들게 된 20세기 초까지 불과 1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자동차는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여 생활 속에 없어서는 안 될 수단으로 인간의 독특한 문화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의 경우 1991년 현재 총인구수 약 4300만 명에 자동차 보유대수 424만여 대로, 10명에 1대꼴의 보유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추세는 세계적인 것으로 이에 따른 배기가스에 의한 대기오염, 교통사고 및 교통체증, 엄청난 연료 수요로 인한 자원고갈 등이 해결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미국ㆍ독일ㆍ일본에 이어 환경오염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는 배출하지 않으면서 무한자원인 수소를 원료로 사용하는 <수소자동차>가 개발되었지만, 그 실용화를 위해서는 보다 활발한 연구와 충분한 투자가 필요한 실정이다.
1) 고안(考案)의 시대
교통ㆍ운수 수단으로서 자동차의 가장 큰 특징은 바퀴로 도로를 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바퀴를 굴려 물건을 옮기는 방법은 썰매처럼 끄는 식에 비해 무거운 것을 적은 힘으로 옮길 수 있고 가속ㆍ제동ㆍ선회(旋回) 등의 운동을 조절하기 쉬우며 노면과 닿는 부분의 내마모성(耐磨耗性)에도 유리하다. 자동차의 역학적 원리를 결정짓는 바퀴를 중심으로 자동차의 기원을 생각해 보면 BC 3000년 무렵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즉 무거운 것을 옮기는 데 사용했던 <굴림대>를 발전시켜 바퀴와 축(軸)을 조합하고, 축력(畜力)을 동력으로 한 우마차가 등장하였다. 축력이나 인력이 아닌 인공의 동력으로 바퀴를 구동(驅動)시켜 달리는 <자행차(自行車)>의 시초는 그보다 훨씬 뒤인 1480년 무렵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스케치로 남긴 태엽장치의 마찰력을 응용한 자주차(自走車)였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I. 뉴턴이 증기를 분사(噴射)하여 그 반동으로 달리는 차를 구상했다는 기록이 있고, 1668년 무렵 벨기에의 F. 페르비스트가 증기를 날개모양의 바퀴에 분사하여 동력을 발생시키는 충동식(衝動式) 증기터빈의 모형차를 제작하였다. 이것들은 도면이나 모형으로써 근대 자동차의 정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사람이 타고 달리는 차로는 18세기에 등장한 증기자동차가 그 시초였다.
2) 실용화의 시대
1769년 프랑스의 N.J. 퀴뇨가 3륜증기자동차를 제작, 처음으로 사람이 조종하여 달리는 데 성공하였다. 육군 공병이던 그는 무거운 대포를 전쟁터까지 운반하기 위해 앞바퀴 앞부분에 설치된 커다란 구리 보일러에 장작을 지펴서 증기를 만들고 이를 2개의 실린더로 이끌어 교대로 피스톤을 작동시켜 앞쪽의 구동바퀴에 동력을 전달할 수 있는 구조를 고안하였다. 그러나 앞바퀴에 보일러나 실린더 등 모든 중량이 쏠려 있어 방향조절이 어려워 실험도중 벽에 충돌, 대파되었으나 시속 3.5㎞의 속도로 1㎞정도를 이동하여 실용화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듬해 그 2호차가 만들어져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자동차로 파리국립기술공예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19세기에는 증기자동차의 발달무대가 영국으로 옮겨져 증기기관의 급속한 기술발달과 함께 본격적인 실용화단계에 들어갔다. 1801년 R. 트레비식이 여러 사람을 태우고 증기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데 성공하였고 1825년에는 G. 거니와 W. 핸콕의 승합증기버스가 등장하였다. 1830년대에 들어서 W. 처치의 50인승 대형버스가 런던∼버밍엄 사이 약 180㎞를 운행하는 등 <말 없는 마차>로 불리던 증기자동차는 황금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증기버스가 교통수단으로 자리잡게 되자 보일러 폭발사고, 매연발생과 불티가 날리는 등 안전ㆍ공해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마차업계와의 이해대립은 정치문제로까지 발전하였다. 1865년 자동차의 교통규제를 목적으로 한 적기법(赤旗法)이 제정되어 1896년 폐지될 때까지 영국에서의 자동차 발달은 위축되었고 그 중심은 프랑스ㆍ독일ㆍ미국 등지로 옮겨졌다. 한편 증기자동차와 함께 초기에는 전기자동차도 성행하였는데 명확하지는 않으나 R. 데이비드슨이 만든 4륜트럭을 최초로 본다. 1880년대에는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전기자동차가 제작되었고 미국에서는 T.A. 에디슨과 H. 포드의 연구개발로 1890년 무렵부터 급속히 보급되었다. 그뒤 약 20년 동안 증기자동차와 경쟁하였는데 1899년에는 프랑스의 자메ㆍ콩탕트호(號)가 시속 105㎞라는 최고속도를 기록하여 전기자동차의 우위성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실용화를 보인 증기자동차는 안전성ㆍ급수(給水) 등의 문제와 출발하는 데 필요한 증기압력을 얻어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드러났고 또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성행한 전기자동차는 1회의 충전으로 달릴 수 있는 거리가 짧고 무거운 축전지를 많이 실어야 하기 때문에 차내 공간이 좁아지는 등의 단점이 부각되어 가솔린자동차에 그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3) 기술개발의 시대
내연기관(內燃機關)의 이론을 확립한 독일의 N.A. 오토는, 1876년 가연성(可燃性) 가스를 연료로 하는 불꽃점화 가스기관을 개량하여 피스톤과 크랭크를 조합, 4사이클 작동방식의 내연기관 실용화에 성공하였다. 오토의 기관을 개량한 G. 다임러는 열 튜브방식으로 가솔린엔진을 만들어 1885년 가솔린엔진 2륜차를 완성하였는데 같은 해 K.F. 벤츠도 가솔린엔진 3륜차를 완성, 이듬해 공개 시운전을 하였다. 이들은 오늘날의 자동차 원형이 되었다. 현재 다임러벤츠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다임러의 2륜차는, 하나의 실린더를 가진 수냉(水冷) 4사이클에 배기량 2700㏄ 전후, 출력 약 0.5마력, 최고 회전수 약 600rpm의 엔진을 목제 프레임에 수직으로 싣고 시속 12㎞ 정도의 속도로 6㎞ 가량 달렸다고 한다. 벤츠의 3륜차는 1기통 576㏄, 약 0.7마력, 약 300rpm의 4사이클엔진을 수평으로 실어 시속 약 15㎞의 속도를 냈다. 4륜가솔린자동차는 1886년 다임러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엔진은 460㏄, 1.1마력, 650rpm으로 최고속도는 15㎞였다. 차체는 마차를 그대로 이용하나 높이가 높고, 십자봉을 돌리면 앞바퀴가 차축과 함께 움직이도록 한 스티어링(조향장치), 작고 둥근 핸들을 돌리면 나뭇조각이 바퀴를 누르는 구조의 브레이크 등이 설치되어 있다. 그 뒤 엔진의 출력을 높이기 위한 배기량의 증대가 시도되어 1900년대 초에는 배기량 6000㏄의 엔진도 나타나게 되었다. 자동차의 발달은 이 가솔린엔진의 성능향상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차체나 각종 장치의 발명ㆍ개량도 간과할 수 없다. 스티어링장치는 1878년 A. 보레에 의해 바퀴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링크가 고안되고 그. 뒤 다시 좌우 바퀴의 꺾인 각이 바뀌도록 개량됨으로써 조정성을 높였으며 그 기본구조는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차동(差動)장치는 모두 1827년에 고안되었고 기어식 변속기는 1898년부터 사용되었으며 둥근 스티어링휠(핸들)의 등장은 1900년 무렵부터였다. 한편 공기를 넣은 타이어는 1887년 J.B. 던롭이 자전거용으로 처음 고안하였는네 자동차에도 이용, 조정성ㆍ안정성ㆍ승차감 등이 획기적으로 향상되고 고속주행도 가능해졌다. 1890년에는 코일날개를 쓴 방식과 4륜독립현가방식 등의 현가장치(懸架裝置)가 나타났고 1910년대에는 기계식 4륜브레이크방식이 고안되었으며 도난방지의 이그니션키(점화키), 셀프스타터ㆍ와이퍼ㆍ브레이크등ㆍ백미러 등도 개발되었다. 1920년대에는 연료계(燃料計)ㆍ히터ㆍ라디오 등도 부착되었고 유압(油壓) 브레이크장비도 이때부터 장착되었다. 이처럼 엔진과 차체관계의 기본적 기술발달은 유럽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에 급속히 진전되었고 패션감각에 따른 스타일도 중요시하게 되었다. 쾌적한 조건들을 구비하게 된 자동차는 드디어 대량생산과 대중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4) 공업화ㆍ대중화의 시대
다임러와 벤츠가 가솔린자동차를 성공적으로 개발한 뒤 각국에서 가솔린엔진을 장착한 자동차개발이 줄을 이었으며, 미국의 경우도 증기자동차 제작자들이 1910년까지 모두 가솔린자동차로 전환하였다. 20세기가 되면서 자동차회사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대부분 수공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자금부담으로 쉽게 도산하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가솔린엔진류와 같은 기계를 직접 제조ㆍ운영하거나 재능있는 기술자와 능숙한 경영자가 동업을 한 경우는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는 곳이 많다. 그 중 미국 포드사의 사장 포드는 자동차생산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1908년 T형 포드를 발표하고, 이듬해에는 일관 작업배치(Assembly Line) 생산방식을 도입, 생산가격을 낮추는 데 성공하였다. 값싸고 튼튼한 차를 만들고자 했던 그는 A형에서 B형, C형…의 순서로 시작(試作) 모델을 연이어 만들어내던 중 20번째에 만족할 만한 자동차를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T형 포드로, 튼튼하여 고장이 적고 운전이 쉬우며 불필요한 장식을 생략한 기능본위의 가솔린자동차였다. 특히 어셈블리 라인은 규격화한 부품을 컨베이어 위에 올려놓고 작업자 옆을 지나가게 하면서 조립하는 생산방식으로 대량생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첫해 6850대를 생산하였고 1913년에는 10만대, 신형차가 발표된 1927년까지 1500만대라는 놀라운 생산량을 기록하였다. 가격도 초기에는 960달러이던 것을 1924년 무렵에는 290달러로 내리는 등 T형 포드는 자동차 대중화의 길을 연 주역이었다. 유럽에서도 값싼 수입차 포드에 밀려 점차 생산의 공업화ㆍ대량화를 위한 개편이 단행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자동차공업이 그 나라의 경제에 영향을 줄 만큼 발전하였으며 자동차는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는 안전ㆍ대기오염 문제가 대두되어 그에 대한 대책기술 확립이 요청되었고 1973년 석유파동을 계기로 연료의 경제성에 대한 기술개발도 진척되었다. 이처럼 자동차의 대중화는 자동차에 대한 재평가를 하게 하고 사회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이상적인 자동차의 상태가 기획ㆍ설계에 반영되도록 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컴퓨터로 대표되는 전자기술과 신소재 활용 등에 관한 기술이 연구되고 있다. 즉 엔진ㆍ브레이크ㆍ현가장치ㆍ스티어링ㆍ에어컨디셔너 등 각 서브시스템이 주행조건이나 환경조건에 맞춰 최적성능을 자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지능자동차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5) 한국의 자동차 역사
한국에 최초로 도입된 자동차는 1903년 고종이 미국공관을 통해 들여온 포드승용차로 전한다. 자동차는 도입 초기에는 극소수 특수층의 전유물로, 1917년까지만 해도 60여 대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매를 주로 하는 자동차상회가 등장, 도입이 활성화되면서 3년 사이에 800여 대로 증가하였다. 1917년 10월 처음 한강 인도교 가설로 도로사정이 개선된 것도 증가의 중요한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편 1912년 영업용승용차와 노선버스가 처음 운행되기 시작하였으며 택시라는 형태는 1920년대 중반부터 운행되었다. 버스운행은 도로신설 및 교통량 증가와 함께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1917년에 업자가 10명이던 것이 5년 뒤에는 154명으로 늘어났다. 초기에는 35명 정원의 승합자동차가 1928년 버스로 바뀌었고 1940년대에 이르러 50명을 태우는 대형버스가 등장하였다. 1926년부터는 화물자동차영업도 활성화되었으나 일제의 전쟁준비를 위한 소비억제정책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자동차산업이 시작되었는데 자동차산업 1세대인 최무성(崔茂盛)ㆍ김창원(金昌源)ㆍ하동환(河東煥) 등이 드럼통을 잘라 차체를 만들고 미군 지프의 엔진을 얹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자동차를 만들어냈다. 1957년 최무성이 미군이 쓰던 지프의 부품과 4기통엔진을 조립한 국산차 1호 <시발(始發)>을 생산하여 전국에 택시로 공급하였고 1962년 박노정(朴魯禎)이 세운 <새나라> 자동차 공장은 일본 회사의 중간분해부품을 들여와 조립, 판매하였다. 5ㆍ16 직후 <자동차공업발전법>이 만들어져 자동차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자동차의 국내수요도 늘어나 1979년 제2차석유파동 전까지 신진ㆍ현대ㆍ아시아ㆍ기아 등의 회사들이 호황을 누렸다. 1975년 현대가 만들어낸 <포니>는 한국을 세계 15번째 자동차생산국가로 부상시켰다. 10년 뒤에는 앞바퀴구동형의 <포니엑셀>을 처음으로 미국에 수출하였고 1990년대에는 고속성장을 거듭하였다. 1998년 284만 3000여대의 자동차를 생산, 세계 7위 생산국에 올랐으며 그중 151만대를 수출했다. 기술개발도 진전되어 국산 가솔린엔진이 제작되고 있으며 무인(無人)ㆍ알콜ㆍ수소 자동차 등도 연구, 개발되고 있다.
2. 분류
자동차관리법시행규칙 제2조에 따라 자동차를 구분해 보면 〔표 1〕과 같다. 〔표 2〕는 승용차만을 분류한 것으로 차체형식을 기준으로하였다. 그 밖에 엔진 위치에 따라 앞기관차(front engine car)ㆍ뒷기관차(rear engine car)ㆍ바닥밑기관차(under floor engine car)ㆍ쌍기관차(twin engine car;앞ㆍ뒤 모두 장치)ㆍ옆기관차(side engine car)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1) 자동차의 제원
자동차의 전반적인 치수, 무게, 기계적인 구조, 성능 등을 일정한 기준에 의거하여 수치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ISO(국제표준규격)나 SAE(미국자동차기술협회규격) 또는 각국의 공업규격으로 그 기재방법이 자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① 길이(overall length) : 자동차의 앞에서 뒷부분까지의 최대 측정길이로 범퍼와 후미 등을 포함한다.
나비(overall width) : 자동차 문을 닫은 상태에서 길이와 직각으로 측정했을 때의 최대나비로 양 옆의 백미러는 포함하지 않는다.
높이(overrall height) : 지면으로부터 가장 높은 부분까지의 측정높이이며, 공차상태를 원칙으로 한다.
축거(wheel base) : 앞차축과 뒷차축의 중심 사이의 거리이다.
윤거(tread) : 좌우 타이어 접지면의 중심선 사이의 거리이다.
최저지상고(ground clearance) : 공차상태에서 차체의 가장 낮은 부분과 접지면 사이의 높이를 말한다.
최소회전반경(turning radius) : 자동차가 최대의 조향각으로 선회할 때 중심선과 바깥쪽 바퀴가 그리는 가장 작은 곡선의 반지름을 가리킨다.
실내크기 : 자동차의 내부공간을 길이ㆍ나비ㆍ높이로 표시한다.
차량중량(vehicle weight) : 공차상태의 중량으로, 연료ㆍ윤활유ㆍ냉각수 등을 포함한 움직일 수 있는 상태를 기준으로 하며 운전자ㆍ스페어타이어는 제외한다. 총중량은 정원승차와 최대 적재 때의 차량을 포함한 전체 무게를 말한다.
최고속도(maximum speed) : 정원승차와 최대 적재 상태에서 평탄한 노면을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속도이다.
등판능력(maximum gradeability) : 정원승차와 최대 적재 상태에서 1단 기어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경사를 가리키며 sin로 표시한다.
배기량(displacement) : 기관 실린더 내의 흡입 또는 배기된 혼합기의 부피로, 엔진 크기를 보여주는 일반적인 척도가 된다. 배기량은 실린더의 단면적×스트로크의 길이×실린더의 수로 계산한다.
연료소비율(fuel consumption) : 연료 1 주행할 수 있는 ㎞수를 말한다.
2) 자동차의 구조와 기능
차체 : 차체는 자동차의 골격을 이루는 것으로 승차공간이나 화물의 공간을 구성하는 동시에 엔진과 운전장치, 보조기기류(補助器機類) 등 모든 부품이 적절히 장착되어 노면에서 가해지는 외력(外力)을 분산해 받아들이고, 충돌시에는 충돌력을 흡수해 승차인원을 보호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구조적으로는 독립된 프레임에 기관ㆍ현가장치 등을 설치하여 섀시를 조립한 다음, 그 위에 완성된 차체를 장착하는 방식이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 방식은 무게가 많이 나가는데 비해 강도가 크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차체 자체를 충분한 강도를 가지는 하나의 상자로 만들어 직접 기관이나 현가장치를 설치하는 단체(單體)구조 또는 일체(一體)구조를 채용하는 것이 많다. 프레임 부착구조는 고무틀을 사이에 끼워 엔진이나 차체를 프레임과 결합시키기 때문에 진동과 소음의 절연(絶緣)이 쉬워 대형 고급차에도 채용되고 있다. 프레임은 X형과 사닥다리형이 많으나, 프레임만으로 강성(剛性)을 확보하려고 하면 중량이 늘어나므로 차체와 결합함으로써 소정의 강도를 얻을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경우가 많다. 일체구조(유닛컨스트럭션이라고도 한다)는 차체가 프레임기능을 하는 구조여서 프레임 대신에 차체바닥면, 차의 옆면을 구성하는 사이드 멤버 및 카울(cowl;앞 유리와 계기판을 포함한 부분) 주변에서 강도를 분담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에는 지붕과 기둥 등 각 구성부품을 부착한 부착점도 일체로 용접된다. 일체구조는 프레임 부착 구조에 비해 경량화가 가능하고 강성도 높일 수 있으며 전체의 높이를 낮출 수 있고 실내 공간을 넓힐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전체가 일체화된 용접 구조로 되어 있어서 구동계(驅動系)와 현가장치로부터 진동ㆍ소음이 직접 전달되기 쉽고, 차체가 공명(共鳴)상자로 되어 있어 이를 증폭시키는 경우도 있다. 또 대형차에 사용할 경우에는 바닥면의 강도 향상을 위하여 보강 부품이 필요해지므로 중량 경감의 목적이 상쇄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중ㆍ소형차에 많이 채용되고, 최근에는 강도가 높은 고장력(高張力) 강판이나 고분자 재료 등 신소재를 사용하여 경량화에 성공하고 있다.
엔진 : 주행에 필요한 동력을 공급하는 것이 엔진이다. 자동차의 원동기(原動機)는 전기ㆍ증기ㆍ원자력까지 생각할 수 있으나, 내연기관 자동차가 압도적으로 많고 극히 일부에서 축전지식 전기자동차를 볼 수 있다. 일반적인 내연기관은 작동원리에 따라 2사이클ㆍ4사이클ㆍ로터리 등 3종류로 분류되고, 사용 연료에 따라 가솔린엔진과 디젤엔진으로 나누어진다. 오늘날 대부분의 승용차용 엔진은 4사이클 가솔린엔진이고 일부 4사이클 디젤엔진이 사용되고 있다.
▶ 4사이클엔진 - 2000㏄ 정도까지의 소형차에는 직렬4기통이 표준이지만, 최근의 경(輕)자동차나 1000㏄급 대중차에서는 직렬3기통을 채용하기도 한다. 2000㏄급 이상에서는 콤팩트한 V형 6기통이 늘어나는 경향이며, 이 밖에 V형 8기통ㆍV형 12기통ㆍ수평대향(水平對向) 4기통ㆍ수평대향 6기통ㆍ수평대향 12기통 등도 사용되고 있다. 배기량이 같다면 기통수가 많은 쪽이 1개씩의 피스톤ㆍ콘로드(커넥팅 로드) 등의 관성질량(慣性質量)이 작고 회전이 많아져서 출력도 높아지지만, 반면에 구조는 복잡해지고 비용이 많이 들게 된다.
▶ 밸브기구 - 4사이클엔진은 배기를 끝내고 피스톤이 내려갈 때에 흡기밸브를 열고 흡기하며, 압축(상승)ㆍ연소(하강)가 끝나고 피스톤이 상승할 때에 배기밸브를 열고 배기해야만 한다. 이 흡기밸브와 배기밸브는 크랭크샤프트(crankshaft)의 절반 속도로 회전하는 캠샤프트(偏心輪軸)로 여닫지만, 캠샤프트를 실린더블록 옆의 비교적 낮은 위치에 두고 기다란 푸시로드(pushrod)와 로커암(지레)으로 작동시키는 방식을 일반적으로 OHV(overhead valve)라 한다. 실용본위의 자동차에서는 OHV로 충분하지만, 회전수를 늘려 출력을 높이고자 하면 푸시로드의 관성 때문에 밸브의 작동이 불확실해진다. 그래서 캠샤프트를 실린더헤드 위의 높은 위치에 두고 직접적으로 밸브를 작동시키도록 한 것이 OHC(overhead camshaft engine)이다. OHC에도 1개의 캠샤프트로 양쪽 밸브를 작동시키는 SOHC(single OHC)와 2개의 캠샤프트로 흡기밸브와 배기밸브를 각각 작동시키는 DOHC(double OHC;트윈캠이라고도 한다)가 있다. DOHC에서는 연소실을 연소효율이 좋은 반구형으로 할 수 있고 흡기ㆍ배기효과도 높일 수 있다. OHVㆍSOHCㆍDOHC의 순서로 고회전이 가능해서 출력은 높아지지만 구조가 복잡하고 가격도 비싸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DOHC는 경주용자동차나 일부 고성능 스포츠카에만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고성능 모델의 대중차에도 쓰이고 있다.
▶ 로터리엔진 - 4사이클과 함께 오늘날 승용차에 쓰이고 있는 것이 로터리엔진이다. 1951년 무렵 독일의 F. 방켈이 회전식 펌프에서 힌트를 얻어 그 원리를 확립했으며 1960년 독일의 NSU사에 의해 제품화되어 2∼3대의 자동차에 사용했으나 소기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뒤 일본의 마쓰다[松田(송전)]가 독자적 기술로 실용화에 성공, 고성능 모델과 경주용 자동차에 장착하였으나 능률이 높아 연료소비가 커지는 등의 단점이 드러났다. 한편 로터리엔진에도 터보부착이나 디젤ㆍ터보디젤 등의 가능성이 있다.
▶ 카뷰레이션 - 가장 일반적인 것은 분무의 원리를 응용한 기화기(카뷰레터)이지만 최근에는 가솔린을 펌프로 가압하여 노즐로부터 분사하는 연료분사(fuel injectjon)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연료분사에서는 가솔린의 무화(霧化)가 좋기 때문에 출력과 토크가 향상되며 가솔린의 분사량이 미세하게 조절될 수 있으므로 배출가스가 깨끗해지고 연료소비율도 향상된다. 최근에는 분사량을 마이크로컴퓨터로 더욱 정밀하게 조절하는 EFI(전자제어연료분사;EGI라고도 한다)도 보급되어 있다. 이는 액셀러레이터 작동ㆍ엔진회전ㆍ차속(車速)ㆍ기온 등을 감응신호장치(sensor)로 감지하고 컴퓨터로 계산하여 분사량을 시시각각 수정하는 시스템이다. 마찬가지로 카뷰레터를 전자적으로 조절하는 EFC(전자제어기화기)도 있다. 점화계통에는 트랜지스터를 사용하여 불꽃을 강하게 한 것, 점화시기 조절에 마이크로컴퓨터를 사용한 것, 연료분사와 점화계의 전자제어를 일원화한 것 등도 있다. 엔진이나 그 보조기기류에는 여러 가지의 신소재 응용이 진행되고 있는데 가까운 장래에 보급되리라 생각되는 것에는 세라믹엔진과 플라스틱엔진이 있다. 세라믹엔진은 무기(無機) 재료의 분말과 결합재를 틀에 넣어 고온ㆍ고압에서 구워 만든 세라믹의 피스톤이나 실린더 등을 이용한 엔진으로, 현재 엔진에 사용되고 있는 알루미늄 합금이나 철에 비해 열팽창률과 열전도율이 매우 낮기 때문에 냉각할 필요가 없고, 자기윤활성(自己潤滑性)을 지니는 특징이 있다. 보통의 엔진은 30% 정도의 냉각 손실이 있지만 냉각이 필요 없는 세라믹엔진은 그만큼의 효율 향상이 기대된다.
▶ 디젤엔진 - 폭발압력이 높으므로 토크가 강하고 연료소비가 적으며 연료가 저렴하므로 경제적이다. 반면에 진동과 소음이 크고 고회전을 얻을 수 없으며 각 부분을 튼튼히 만들어야 하므로 무겁다. 따라서 대형트력과 버스에 한정, 사용되었으며 그 뒤 개량하여 최근에는 승용차에도 사용되고 있다. 대형차용은 실린더 안으로 연료를 직접 분사하는 효율 높은 직접분사식이 늘어나고 있는데 승용차는 소음이 적은 예연소실(豫燃燒室)을 사용하고 있다. 디젤승용차는 가솔린차에 비하여 출발속도가 느리고 최고속도도 높지 않지만 최근에는 터보를 채용함으로써 가솔린차 수준의 성능을 지니는 것도 나타나고 있다.
▶ 터보차저(turbo charger)와 슈퍼차저(super charger) - 가솔린엔진ㆍ디젤엔진을 불문하고 최근 보급이 두드러지게 향상된 것이 터보차저이다. 이는 대기로 배출되는 배기가스의 압력으로 터빈을 돌리고 그 힘으로 펌프를 작동시켜서 엔진이 저절로 빨아들이는 흡입기를 적극적으로 밀어넣어 높은 폭발압력을 얻는 것이다. 엔진에 따라 다르지만 출력은 대개 30∼50% 정도 향상된다. 말하자면 폐물을 이용하는 에너지절약장치이지만 현실적으로 저속에서는 거의 효과가 없으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도 배기압력이 높아져서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등의 약점이 있다. 그 때문에 차츰 적용범위가 좁혀져 고성능 자동차에만 한정시키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터보 대신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수퍼차저이다. 펌프를 엔진으로 직접 구동하므로 저속에서도 효과가 있으며 이른바 터보래그와 같은 효력의 지체가 없다. 원래 기압이 낮은 고공(高空)을 고속으로 날아가는 전투기용으로 발명된 것이었는데 1920년대 초기부터 제2차세계대전 때까지는 경주용 자동차나 고성능 스포츠카에 널리 사용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유연 고옥탄가가솔린의 보급 등으로 쓰이지 않게 되었으나 무연(無鉛)가솔린을 사용하면서 다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 출력과 토크 - 엔진의 성능을 나타내는 방법에는 출력과 토크(torque;회전력)의 2가지가 있다. 출력은 일정시간 내에 할 수 있는 일의 능률을 나타내므로 출력이 클수록 빨리 달릴 수 있고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수도 있다. 한편 토크는 절대적인 회전력이므로 토크가 강하면 출발이 빠르고 등판능력(登坂能力)이 뛰어나며, 항상 최대토크를 발생하는 회전으로 엔진을 유지하면 강한 가속력과 최량의 연료소비율을 얻을 수 있다. 고성능자동차에 태커미터(tachometer;엔진회전계)가 장치된 것은 엔진의 무리한 회전을 방지하는 동시에 항상 엔진을 최대토크발생 회전역(回轉域)으로 유지함으로써 출발을 빠르게 하고 연료소비를 줄이려는 데 있다.
동력 전달 장치 : 엔진에서 발생한 동력은 클러치를 지나 변속기(트랜스미션)에서 증감(增減)되어 추진축에 전달되고, 다시 최종 감속기에서 감속된 뒤 차동장치를 거쳐 구동 바퀴로 전달된다. 클러치의 역할은 출발시에 부드러운 가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변속기의 변속단(變速段)을 바꿀 때에 동력을 단속(斷續)하는 것 등이다. 변속기는 고속회전 저(低)토크형에서 특히 저회전 때의 토크가 부족한 자동차용엔진을, 감속비를 바꾸어줌으로써 여러 가지 주행조건에 적합하게 하는 것이고, 또 역회전을 할 수 없는 내연기관을 이용하는 자동차에 후퇴기능을 가져오는 역할도 한다. 변속기는 기계구조적으로 기어식과 자동식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기어식 변속기는 평행한 2축 사이에 있는 크기가 다른 여러 기어의 물림을 바꾸어서 토크 변환을 하는 것으로, 변속단수는 전진 3∼5단, 후진 1단이 많이 사용되며, 최고속도ㆍ등판성능ㆍ가속성능ㆍ연료소비율 등을 고려하여 최적의 변속비가 선택된다. 일반적으로 자동변속기는 토크 컨버터와 행성 기어 장치를 사용한 보조 변속기로 구성된다. 최근에는 전자제어자동변속기가 사용되고 있으며 마찰 전동을 이용한 기계식 무단(無段)변속기도 개발되었다. 최종 감속기에는 감속 기어와 차동장치가 일체로 조립되어 있다. 엔진이 세로로 설치된 경우 구동력의 전달방향을 직각으로 바꿀 필요가 있기 때문에 감속장치에는 헬리컬 베벨 기어(helical bevel gear) 및 하이포이드 기어(hypoid gear)가 사용되고, 엔진이 가로로 설치된 경우에는 입력축과 출력축이 평행이 되기 때문에 헬리컬 기어가 사용된다. 자동차가 선회운동이나 진로를 변경할 때는 안쪽보다는 바깥쪽 바퀴가 많이 돌아야 하는데, 차동장치는 이 좌우 바퀴의 회전차(回轉差)를 만회하면서 바퀴에 균등한 구동력을 전달하여 타이어 슬립을 방지, 원활한 운동을 가능하게 한다. 구동 장치의 배치에는 앞기관 뒷바퀴 구동방식ㆍ앞기관 앞바퀴 구동방식ㆍ뒷기관 뒷바퀴 구동방식ㆍ미드십(midship)방식의 4가지 방식이 있다.
▶ 앞기관 뒷바퀴 구동방식 - 엔진을 차체 앞부분에 설치하여 뒷바퀴를 구동하는 것으로 FR방식이라고도 한다. 중ㆍ대형 승용차나 트럭 등에 많이 채용된다.
▶ 앞기관 앞바퀴 구동방식 - 앞부분에 엔진을 설치하여 앞바퀴를 구동하는 것으로 FF방식이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중ㆍ소형 승용차에 사용되고 있다. 추진축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실내 공간을 넓게 취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 뒷기관 뒷바퀴 구동방식 - 뒷부분에 엔진을 설치하여 뒷바퀴를 구동하는 것으로 RR방식이라고도 한다. 전에는 경자동차 등에 채용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버스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이다.
▶ 미드십(midship)방식 - 뒷차축 앞쪽에 엔진을 설치하여 뒷바퀴를 구동하는 것으로 뒷부분 좌석에 엔진이 설치되기 때문에 앞좌석에 2명이 승차하게 된다. 중량물인 엔진을 차체의 중심부 가까이에 설치할 수 있기 때문에 핸들조작에 대한 차량의 반응이 빨라 경주용 자동차와 고급 스포츠카 등에 채용된다. 이 밖에 4바퀴 모두에 구동력을 전달하는 형식은 4륜구동, 통칭 4WD(4-wheel-drive)라고 하는데 험한 도로의 답파성(踏破性)을 주목적으로 한 것과 고속주행시의 조종성ㆍ안정성을 주안점으로 하는 것 등으로 나누어진다.
▶ 브레이크 장치 - 자동차를 안전하게 마음먹은 대로 운전하기 위해서는 정지 또는 감속에 뛰어난 제동능력이 있는 브레이크 장치가 필요하다. 브레이크는 안정된 효력과 함께 고장의 우려가 없고 사람이 제어하기 쉬운 것이 바람직하다. 브레이크에는 주행시에 보통 사용하는 상용(常用)브레이크와 주차브레이크가 있다. 주차브레이크는 핸드브레이크라고도 하며 전선을 통해서 힘을 전달, 앞바퀴 또는 뒷바퀴에 직접제동력을 작용시키는 것으로, 래칫(ratchet;회전축의 역전을 막기 위한 장치)에 의해 그 힘을 보호ㆍ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상용브레이크는 운전석에 있는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면 마스터실린더에서 발생된 유압이 가는 튜브를 통해서 각 바퀴에 달린 휠실린더에 전달됨으로써 작동한다. 상용브레이크는 구조에 따라 내부 확장식과 디스크식으로 나뉜다. 내부 확장식 브레이크는 차바퀴와 일체로 회전하는 드럼 안쪽에서 라이닝이 붙은 브레이크슈(제동자)를 눌러 운동에너지를 열에너지로 변환, 제동하는 것이다. 주차브레이크를 일체로 조립하는 것이 비교적 간단하다는 이유로 과거에는 뒷바퀴에 많이 채용되었지만, 고속주행의 기회가 많은 오늘날에는 사용이 감소하고 있다. 디스크식 브레이크는 차바퀴와 함께 회전하는 원판모양의 브레이크 디스크를 양쪽에서 제동패드로 압착, 이때의 마찰력으로 제동을 거는 것이다. 원래 항공기용으로 개발되어 자동차에는 경주용 자동차와 스포츠카에 일부 채용되었으나, 브레이크 디스크나 패드를 누르는 작용을 하는 캘리퍼(caliper)가 외부로 노출되어 있어 냉각성이 높고, 고속에서의 연속사용에도 견딜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오늘날은 대부분의 차량 앞바퀴에 채용되고 있다. 또한 제동능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앞뒷바퀴 모두 디스크 브레이크를 장비하는 차종이 증가하고 있다. 디스크 브레이크는 유압 상승에 대한 제동력이 거의 직선적으로 증가해 조작감이 좋지만, 제동력 자체는 내부 확장식 브레이크에 비해 작기 때문에 대형차에는 브레이크 페달의 밟는 힘을 배로 증가시키는 서보(servo;培力) 장치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엔진의 흡기압을 이용해 대기압과의 차압(差壓)으로 작동시키는 진공 서보 브레이크가 일반적이지만, 최근에는 브레이크의 배력 장치와 파워 스티어링(동력조향장치)을 일체의 시스템으로 하여 파워 스티어링용 오일 펌프에서 얻은 유압을 공용하는 것이 개발되어 주로 대형차량에 실용화되고 있다. 브레이크는 안전 운행에 가장 중요한 장치의 하나이므로 만일의 고장에 대비하기 위해, 유압을 발생시키는 마스터실린더에 독립된 2개의 압력실을 갖춘 탠덤마스터실린더와, 2계통식 배관의 2중 안전 브레이크 메커니즘이 채용되고 있다. 오늘날 일부 고성능차에 사용되는 것으로 ABS(anti-skid brake system)가 있다. 한쪽이 젖었거나 얼어 있는 길에서 고속주행중에 급브레이크를 걸면, 그쪽 바퀴가 로크(회전이 멈춤)하여 활주하고 반대쪽만이 작용하기 때문에 옆으로 미끄러져 길에서 벗어나거나 마주 오는 차 또는 후속차와 충돌할 위험성이 높다. 이런 경우에 ABS는 바퀴의 로크를 검지(檢知)하여 컴퓨터로 좌우의 유압을 조절해서 똑바로 정지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조향(操向) 장치 : 앞바퀴를 움직여 방향을 바꾸는 장치를 스티어링장치 또는 조향장치라고한다. 스티어링휠(핸들)의 회전은 스티어링 기어 박스에서 감속되어 피트먼암(pitman arm)의 요동으로 변환되며 피트먼암 운동은 릴레이로드(relay rod)에 의해 좌우 직선운동으로 바뀌고, 타이로드(tie rod)에 의해 좌우 바퀴의 너클암(knuckle arm)에 전달되어 바퀴가 조향작용을 한다. 스티어링기어에는 볼 스크루(ball screw)식과 래크 피니언식의 2가지가 있다. 볼 스크루식은 리서큘레이팅볼식(볼순환식)이라고도 하는데, 조향축의 회전에 볼을 매개로 하여 너트의 직선운동으로 바꾸고 너트의 바깥쪽에 설치된 톱니모양으로 피트먼암을 요동시키는 것이다. 볼을 이용하여 힘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마찰이 적고, 기계 효율을 높일 수 있어 중ㆍ대형차에 많이 채용되고 있다. 래크피니언식은 직선모양의 기어인 래크를 사용하여 조향축 가장자리에서 피니언의 회전을 직선운동으로 변환하는 형식이다. 강성이 높고 래크 자체를 링크(link)의 구성요소로도 겸용하기 때문에 부품수가 줄고 간소하게 완성할 수 있어 스포츠카와 중ㆍ소형차에 자주 사용된다. 파워스티어링 장치는 엔진에 의해 오일 펌프를 구동하고 그 유압을 이용해 조향 조작을 경쾌하고 신속히 하는 것인데, 이때의 유압은 파워실린더 내에서 피스톤의 양쪽으로 작용하게 되므로 노면으로부터 받는 충격을 흡수하여 조종의 안정성도 얻을 수 있다. 자동차가 선회할 때는 〔그림 8〕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스티어링휠을 돌리면 그 운동은 스티어링기어, 피트먼암, 릴레이로드, 타이로드, 스티어링암을 거쳐 바퀴로 전달되어 방향을 바꾸게 된다. 조향휠을 오른쪽으로 r만큼 돌리면 앞바퀴 스핀들은 각각 만큼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r/를 회전각비(回轉角比)라고 하며, 이 값은 10∼30 정도가 보통이다. 좌우 앞바퀴 스핀들의 중심선의 연장선은 뒷차축 중심선의 연장선상의 한 점 O에서 교차하고, 각 바퀴는 O를 중심으로 하여 각각의 반지름으로 선회한다. 자동차가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선회할 때, 앞바퀴의 바깥쪽 바퀴가 그리는 반지름을 회전반지름이라 하고, 조향각을 최대로 하였을 때의 회전반지름을 최소 회전 반지름이라 한다. 〔그림 10〕에서 최소 회전 반지름을 R이라 하면, 로 표시된다. 여기서 L은 휠 베이스, 는 바깥쪽 앞바퀴의 최대 조향각, k는 킹핀(kingpin) 중심과 타이어 중심 사이의 거리이다. 이것을 아커만의 원리 또는 아커만 장토의 원리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전 조향각에 걸쳐서 이 관계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또 주행중의 직진성과 조향 후의 되돌리기, 조향력을 적절히 하기 위해, 앞바퀴에는 캐스터각ㆍ캔버각(camber 角)ㆍ킹핀 경사각ㆍ토 인(toe-in)이 부여되어 있고, 이것을 앞바퀴의 얼라인먼트 또는 앞바퀴의 정열(整列)이라고 한다.
현가장치 : 차체 중량을 지지(支持)하고 고르지 않은 노면에 의한 상하진동을 완화하여 승차감을 좋게 한다. 또한 불규칙한 진동을 제어하여 접지성을 높이고 주행성능을 좋게 하는 역할도 한다. 구동력과 제어력 및 선회력을 적절하게 노면에 전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이를 위해 여러 가지 현가장치 형식이 개발되어 왔으나, 현재는 몇 가지 기본형식으로 종합되고 있다. 앞바퀴의 현가장치로는 더블 위시본형과 스트럿형 중 1가지를 채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블 위시본형은 차체로부터 2개의 요동하는 암을 가로방향으로 내달아 바퀴를 지지하는 형식으로, 암의 부착각도와 길이를 바꿈에 따라 희망하는 주행성능을 비교적 용이하게 얻을 수 있다. 그 때문에 경주용 자동차에는 앞바퀴뿐만 아니라 뒷바퀴에도 사용하고 승용차에서는 중ㆍ대형차에 채용하는 예가 많다. 스트럿형은 완충기(shock absorber)를 내장한 관(스트럿)을 현가장치 링크의 일부에 이용하고 있는 형식이다. 제조 오차를 보정(補正)하는 조정이 필요없어 구조도 간소하여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등의 이점이 있어 중ㆍ소형차에 많이 채용되고 있다. 뒷바퀴에는 트레일링 암형, 세미 트레일링 암형, 스트럿형, 차축형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트레일링 암형은 바퀴의 앞쪽에 암의 요동축을 차체 중심선과 직각이 되도록 설치한 것으로, 구조가 간단하고 공간을 차지하지 않아서 소형 FF차에 많다. 암의 요동축이 차체 중심선에 대해 경사져 있는 것을 세미트레일링 암형이라고 하는데, 조종특성을 매우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어 중ㆍ대형 FR차에 많다. 차축형은 좌우의 차축을 결합해 일체화하고 그것을 차체에 지지하는 방식으로, 코일 스프링을 사용한 링크식은 중ㆍ대형 FR차에, 판스프링을 이용한 것은 대형 트럭의 앞바퀴에 채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승차감과 조종성ㆍ안정성을 모두 고려하여 차속과 스티어링의 조향각속도 등을 검출해 완충기의 감쇠력(減衰力)을 제어하는 전자제어 현가장치도 등장하고 있다.
보조기기류ㆍ장비품 : 보조기기류로는 조명장치, 계기류(計器類), 스위치류, 와이퍼 및 와셔(washer), 경음기 등이 있다. 장비품으로는 냉난방 장치, 카 라디오, 카 스테레오 외에 시트 벨트와 에어백 등의 승객 보호장치가 있다. 자동차의 기능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조작하기 쉬워야 하고 승차감 향상과 안전성 확보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기술이 발달하여 편리하고 쾌적한 승차감을 얻기 위한 고도의 서브 시스템이 장착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대부분은 새로운 재료나 전자기술 등의 도입으로 기기(機器)의 능력ㆍ용량ㆍ정밀도의 향상을 도모한 것이다. 예를 들면 빗방울을 감지하는 센서가 달린 자동 와이퍼ㆍ마이크로 컴퓨터가 내장되어 실내온도를 자동으로 제어하는 오토 에어컨디셔너, 설정한 주행속도를 유지하는 자동 속도제어 장치, 안전성과 공기저항 등을 고려하여 고속주행시에 차높이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장치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또한 레이더를 이용한 자동 브레이크, 교통정보나 긴급재해 정보를 운전자에게 알려주는 자동차 통신 시스템 등도 중요시되고 있으며 그 밖에도 다양한 기술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3) 자동차 성능과 기술
자동차의 성능은 다음과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주행성능 : 힘있고 부드럽게 가속하여 운전자의 의도대로 주행할 수 있거나 감속ㆍ정지 능력이 뛰어난 것
② 쾌적성 : 승객에게 기분좋은 승차감 및 공간이 확보되어 있는 것
③ 경제성 : 신뢰성ㆍ내구성이 좋고 보수ㆍ정비가 용이하며 연료 소비가 적은 것
④ 상품성 : 기능과 아름다움이 조화된 스타일링이나 실내디자인, 카스테레오 등을 갖추고 있는 것
⑤ 안전성 : 사고 예방대책과 만일의 사고에 대비하여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사고 후에는 피해가 커지지 않도록 하는 것
⑥ 저공해성 : 사회적으로도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공해를 최소화하는 것.
이들 성능은 자동차의 사용목적, 사용자의 가치관, 사회적인 환경조건 등에 따라서 그 중요도가 결정된다.
4) 주행성능
동력성능ㆍ제동성능ㆍ조종성ㆍ안정성이 포함된다. 동력성능으로서는 가속성, 최고속도, 등판능력이 중요하다. 엔진의 출력이 크고 차량의 중량이 작을수록, 그리고 구름 저항과 공기저항이 작은 차량일수록 뛰어난 동력성능을 가지며 동력전달 장치의 감속비도 이들 성능을 특징짓는다. 동력성능을 결정짓는 동시에 그 수준을 간편하게 얻을 수 있는 마력하중(馬力荷重;1마력 당의 차량 중량)은 그 수치가 작을수록 좋으며 최근에는 15㎏f/마력(실측량가) 정도의 자동차가 많다. 제동성능을 특징짓는 것으로는 제동거리, 급제동시에 진로를 유지하기 위한 방향안정성, 빈번한 브레이크 조작에 의한 효과의 저하 및 효과의 회복을 나타내는 내마모성 등이 있다. 또 실제로 위험을 느끼고 나서 자동차가 정지하기까지의 정지거리는, 브레이크가 작동하고 나서 정지하기까지의 제동거리와 브레이크가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하기까지 나아가는 공주(空走)거리의 합이고, 공주거리를 산출할 때의 운전자 반응시간은 일반적으로 0.7초 정도로 하는 경우가 많다. 조종성ㆍ안정성은 최소 회전반경, 중고속 선회성능, 고속직진성, 장애물 회피성능, 횡풍(橫風) 안정성, 조향력 특성 등이 중요하다. 이들은 역학적인 검토ㆍ평가도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운전자인 사람의 평가에 의해 결정되는 성질이기 때문에 사람과 자동차 시스템의 관점에서 검토가 이루어진다.
① 안정성 : 자동차교통의 안전은 대책기술(engineering), 유효한 교육(education), 규제(enforcement) 등의 3가지로 이루어지며 이것을 3E라고 한다. 안전 대책기술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예방안전(1차안전대책),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 피해를 최소한으로 그치게 하는 사고시 안전(2차안전대책), 충돌이나 전복된 뒤의 화재방지와 탈출, 구출을 용이하게 하는 사후 안전(3차안전대책)으로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 예방안전은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예를 들면 제동장치의 브레이크 유압계통을 2계통으로 하여 만일의 사고에 대비하는 2중안전 브레이크 메커니즘, 이상시의 경보시스템, 긴급제동시나 미끄러운 노면에서 제동할 때에 진로를 자동적으로 유지하는 앤티로크 브레이크 시스템 등이 있다. 2차안전대책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시트 벨트가 있는데 그 착용 효과는 매우 크다.
저공해성 : 자동차의 배기가스에는 엔진에서 배출되는 가스, 연소실에서 크랭크실 안으로 새어 나오는 블로바이(blow-by)가스, 기화기와 연료탱크에서 나오는 증발가스 등 3가지가 있다. 배기가스 감소 대책으로서는 기화기의 개량, 흡기예열이나 연료분사방식의 채용, 연료실형상의 개량, 컴퓨터에 의한 점화시기 제어 등을 포함하는 엔진 개량방식 및 이들과 각종 배기가스 정화장치의 조합방식, 연소방식을 바꾼 엔진의 채용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주로 압축행정 중에 크랭크실로 새어나와 고인 블로바이가스를 대기 중에 방출되지 않도록 하는 블로바이가스 환원장치와 탄산수소를 많이 포함한 연료증기를 대기 중에 방출하지 않도록 하는 연료증발제어장치가 있다. 1970년대 이후부터는 새로운 동력에 의한 저공해차의 개발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전기자동차, 가스터빈 차의 시제품이 만들어지고, 수소엔진 등 새로운 엔진에 대한 연구도 진전을 보았다. 자동차에 의한 소음은 엔진에서의 연소ㆍ배기ㆍ기계소음, 주행에 의해 발생하는 동력전달계의 기계소음, 타이어소음, 고속주행시의 바람소리 등이다.
저연료소비율 : 1973년 석유파동을 계기로 연료소비율을 악화시키지 않는 배기가스 대책기술의 개발이 적극적으로 추진된 결과, 상당한 수준까지 진전되었다. 최근에는 플라스틱 등의 고분자 재료나 복합재료를 이용하여 차량의 중량을 줄임으로써 연료소비율을 낮추고 있다.
5) 사람과 자동차 시스템
자동차는 사람이 운전함으로써 움직일 수 있다. 자동차 시스템의 중추인 운전자는 각종 정보의 인식ㆍ판단ㆍ조작이라는 일련의 정보처리를 하고 있다. 그것은 진로 목표에 대해 주로 차량의 추종상황을 시각적으로 받아들여 조작에 의한 압각(壓覺)과 가속도 감각ㆍ청각 등에 의해 수정을 하면서, 진로의 어긋남을 회복하는 운전, 진로를 설정하여 예측하면서 제어를 진행하는 운전, 경험에 의해 축적되어 있는 제어를 반사적으로 행하는 운전 등의 조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 운전시에는 그 시스템이 갖는 본래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외부적 어려움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극복하는 적절한 정보처리가 항상 필요하다. 이와 같은 운전자의 제어 부담에 대한 개선과 실수를 보충하기 위해서 제어의 일부를 차량 쪽에서 담당하도록 하는 등 사람과 자동차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미 이와 같은 발상에 기초한 신자동차 기술이 컴퓨터의 발달과 정보처리 기술의 도움으로 진행되고 있다.
6) 자동차의 전자기술화
전자기술은 정밀도 및 신뢰성의 제고와 더불어 다기능성을 가져오고 부가가치를 높여, 자동차 성능 향상에 그치지 않고 신기능을 실현하는 서브시스템이나 부품의 개발을 가능하게 하므로 그 추이가 주목된다. 엔진의 배기가스 제어와 에너지 절약 기술외에 고효율의 동력 전달 시스템, 운전하기 편리한 스티어링 시스템, 승차감과 조정성, 안정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현가 제어 장치, 노면상태에 맞춰 기능하는 최적 제동 시스템 등도 고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