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현(香峴)
박두진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 너머, 큰 산 그 너멋 산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長松) 들어섰고, 머루 다래 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억새풀 우거진 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만년(累巨萬年)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 직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 확 확 치밀어 오를 화염(火焰)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기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문장』 5호, 1939.6)
[어휘풀이]
-향현 : 향기로운 산
-아랫도리 : 허리 아랫부분, 여기에서는 허리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산
-다박솔 : 다복솔. 가지가 탐스럽고 소복하게 많이 퍼진 어린 소나무
-엉서리 : ‘벼랑’의 방언
-능구리 : 능구렁이
-누거만년 : 아주 어랜 세월
[작품해설]
이 시는 일제 말기의 극함 상황을 인종(忍從)으로 초극하며, 새로운 세계의 도래(到來)를 기다리는 뜨거운 열망이 표백(表白)된 작품으로 「해」와 시상 전개 방법이 매우 유사하다. 이 시의 산에는 ‘여우’·‘이리’ 등으로 대표되는 ‘악’[악마-파괴]의 표상과 ‘사슴’·‘토끼’ 등으로 대표되는 ‘선’[천사-평화]의 표상이 함께 등장한다. 이러한 산은 바로 선·악이 함께 뒤엉켜 존재하는 인간 세계이자 역사 발전의 장애 요인의 이미지로서 당시의 현실 상황을 상징한다.
화자는 숨 막히는 일제의 폭압 아래서, 첩첩한 산 너머 존재하는 광명(光明)의 세계를 보기 위하여 ‘둥둥 구름을 탄다’ 그가 구름 위에서 내려다본 산에서는 온갖 동식물이 뒤엉켜 생존을 위한 살벌한 살육(殺戮)을 벌이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당시 조국의 어지러운 현실 모습인 것이다. 그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개벽(開闢) 이래 오랜 세월 동안 그저 침묵하며 바라보고만 있는 산들은 아마도 지루할 대로 지루할 것이라고 화자는 생각한다. 화자는 산마루에서 ‘대변혁’-혁명을 상징하는 ‘확 확 치밀어 오를 화염’이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그리하여 죄다 불타 버린 그 산에 다시 풀나무와 짐승들이 하나 둘 모여 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선과 악, 약육강식(弱肉强食), 힘과 파괴로 얼룩진 투쟁의 역사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때 화자는, ‘핏내 잊은 여우 이리가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평화와 공존, 화해와 복락(福樂)의 이상 낙원이 달성될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작가소개]
박두진(朴斗鎭)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40년 『문장』에서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낙엽송(落葉頌)」, 「의(蟻)」, 「들국화」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56년 제4회 아세아 자유문학상 수상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1970년 3.1문화상 수상
1976년 예술원상 수상
1981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정년 퇴임
1984년 박두진 전집 간행
1989년 제1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1998년 사망
시집 : 『청록집』(1946), 『해』(1949), 『오도(午禱』(1953), 『거미와 성좌』(1962), 『인간밀림』 (1963), 『하얀날개』(1967), 『고산식물』(1973), 『사도행전』(1973), 『수석열전』(1973),
『속 수석열전』(1976), 『야생대(野生代)』(1981), 『에레미야의 노래』(1981), 『포옹무한』 (1981), 『박두진시집』(1983), 『박두진=한국현대시문학대계 20』(1983), 『박두진전집』 (1984), 『별들의 여름』(1986), 『그래도 해는 뜬다』(1986), 『돌과 사랑』(1987), 『일어 나는 바다』(1987), 『성고독』(1987), 『불사조의 노래』(1987), 『서한체(書翰體)』(1989), 『가시 면류관』(1989), 『빙벽을 깬다』(1990), 『폭양에 무릎 꿇고』(1995), 『숲에는 새 소리가』(1996), 『고향에 다시 갔더니』(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