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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 항일투쟁 거점 中 타이항산 가 보니]
한글 격문·의용군 주둔지 등 곳곳 독립운동 흔적
남북한 모두 외면... 중국 촌민들이 유적지 건사
中 공산당 항일투쟁사 일부로 스며드는 모습도
7일 중국 산시성 진중시 윈터우디촌에 있는 한 누각. 1940년대 초 이곳에 주둔했던 조선의용군이 쓴 강제병 끌려나온 동포들, 팔로군 있는 곧마당('곳마다'로 추정)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총을 하랄(하늘)로 향하여 쏘시오라는 항일 격문이 남아 있다. 쭤취안=조영빈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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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 上官(상관)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
7일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불리는 '타이항산' 자락의 한 시골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뜬금없이 '한글로 쓰인' 격문이 눈에 들어왔다. 현지 주민들이 남문(南門)으로 부르는 작은 누각의 각 벽면이 "强制兵(강제병) 끌려 나온 동포들,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총을 하랄(하늘)로 향해 쏘시오"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등 항일 투쟁을 호소하는 문구들로 채워져 있다. 타이항산 협곡으로 둘러싸여 외지인의 발길조차 뜸한 이 오지 산간에 누가, 언제, 무슨 사연으로 붓을 들어 일제에 맞선 항전을 호소한 것일까.
조선의용군 타이항산 일대 주요 활동. 그래픽=김문중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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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격문은 1941년부터 이듬해까지 타이항산에서 활동했던 독립군인 '조선의용군'이 남긴 것이다. 의용군은 중국에서 ‘타이항산의 별’로 불릴 만큼 추앙되고 있는 반면, 정작 남북한에선 비교적 생소한 이름이다. 한국에선 사회주의 계열 독립군이란 이유로, 북한에선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세력인 탓이다. 78번째 광복절을 앞두고 지난 6~8일 타이항산을 찾아 '분단 조국'이라는 현실 때문에 양측 모두로부터 소외된 의용군의 상흔을 되돌아봤다.
"왜놈 상관 쏴 죽이고... " 중 촌민들이 건사한 격문
7일 중국 산시성 쭤취안현에서 바라본 타이항산. 중국 수도 베이징 시산에서 허난성에 이르는 남북 길이 600㎞의 산맥으로 1940년대 초 조선인 항일 부대인 조선의용군이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곳이다. 쭤취안=조영빈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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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항산은 중국 수도 베이징 시산에서 허난성에 이르는 남북 길이 600㎞에 이르는 거대한 산맥이다. 서쪽의 산시성, 동쪽의 허베이성·산둥성을 가르는 기준선이 될 정도로 크다. 조선의용군 주둔지는 주로 산시성 남부와 허베이성 중남부에 집중돼 있고, 한글 격문이 남아 있는 이곳은 조선의용군의 마지막 주둔지인 산시성 쭤취안현의 윈터우디촌이다.
80년이 지난 글귀치고는 선명하게 유지되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판가이원(56) 촌장은 "10년 전쯤 마을 사람들이 흰색 페인트로 덧칠을 했다. 그 전에도 한 차례 덧칠을 했었다"고 말했다. "빗물에 씻겨 글씨가 점차 흐릿해지는 게 안타까웠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7일 중국 산시성 진중시 윈터우디촌의 한 누각 벽면에 왜놈 상관을 쏴 죽이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라는 격문이 써 있다. 1940년대 초 이곳에 주둔했던 항일 독립군인 조선의용군이 남긴 유적이다. 쭤취안=조영빈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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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은 이곳 타이항산에서 한때 300~500여 명까지 규모를 불렸다. 일본군 눈에 띄지 않아야 했기에 10~20명의 분대 단위로 부대를 쪼개어 최전선에서 △적 교란 △일본군 내 조선인 포섭 등의 활동을 했다. "조선의용대로 오라"는 격문은 일본 군복을 벗어던지고 의용대와 함께 싸우자는, 조선인들을 향한 '전향 호소'였다.
누각 옆에 2019년 세워진 자그마한 비석도 있었다. 여기에는 "70여 년의 비바람을 거쳤으나 현지 정부와 마을 주민들, 한중 각계 벗들의 관심하에 지금까지 잘 보전되었다. 영구토록 기억하기 위해 글을 새긴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엔 중국 지방정부가 건립한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과 윈터우디촌위원회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국 촌부들이 조선의용군 유적지를 건사하고 있는 셈이다.
7일 찾아간 중국 산시성 쭤취안현 윈터우디촌에 있는 한 가옥(왼쪽) 모습. 조선의용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마을 보수 공사 중 쓰러진 나무가 가옥 담벼락을 덮쳐 자칫 무너질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쭤취안=조영빈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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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옮겨 의용군 10여 명이 숙식을 해결했던 가옥을 찾았다. 바로 옆에 있는 길이 5m 정도의 나무가 가옥 담벼락 한 면을 덮친 채 누워 있었다. 판 촌장은 지난해 마을 보수 작업 도중 쓰러진 나무라며 "상급 지방정부에 (보수를) 요청해 놓은 상태"라고 했다. 한국 정부나 민간단체의 수리 요청이나 협조 의사가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국 기관 사람들이 이곳을 찾은 일 자체가 없다. 보수해 달라는 요청도 없었다"고 답했다.
'사회주의 세력' '김일성 정적' 이유로 남북 모두 홀대
1938년 10월 13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열린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식에서 대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조선의용대는 1942년 창설된 조선의용군의 전신이다. 자료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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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은 1938년 10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조선의용대'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영화 '암살'에서 재조명된 김원봉(조승우 분) 선생을 중심으로 창설된 이 조직은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 선봉에 섰다. 하지만 의용대 내에선 국민당의 항일 의지에 대한 회의감이 점차 커졌다. 이에 김원봉 선생 등을 제외한 대원의 80% 이상이 1941년 7월 중국공산당 산하 팔로군 주둔지인 타이항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조선의용군 주요 역사 및 타이항산 일대 주요 활동. 그래픽=김문중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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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정비한 이들은 팔로군과의 연대를 강화해 가면서 활동했다. 그리고 다시, 1942년 7월 '조선의용군'으로 재개편하며 조선의용대와는 사실상 결별했다. 국민당 파트너에서 중국공산당의 항일 투쟁 파트너로 재탄생한 셈이다. 일제 패망 후 조선의용군 대부분은 북한으로 건너갔고, 1950년 한국전쟁에선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의 역사가 남한에서 제대로 된 평가도 없이 등한시됐던 이유다.
8일 조선의용군 유적지가 있는 중국 허베이성 스자좡시 후자좡촌의 한 주민이 취재진에게 유적지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있다. 스자좡=조영빈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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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계열이라 해서 북한에서 대접을 받은 것도 아니다. 1953년 휴전 후 조선의용군은 '연안파'라는 정치 세력을 형성했으나, 1956년 김일성에 의해 대다수가 숙청됐다. '김일성 신화'로 도배된 북한 내 항일 역사에 조선의용군이 설 자리는 없었다. 타이항산에 남은 조선의용군 유적지 관리가 오롯이 중국인들 손에만 맡겨지게 된 배경엔 이처럼 '남북 모두의 외면'이 있었던 것이다.
의용군 주둔지에 中 공산당기... 중국 항일 역사로 오인 우려
8일 중국 허베이성 스자좡시 후자좡촌에 위치한 조선의용군 주둔지 내부. 조선의용군 대원이었던 김학철 선생의 활약을 기린 '김학철 기념관' 안에 '중국공산당기'가 걸려 있다. 스자좡=조영빈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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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조선의용군 역사가 '중국공산당의 역사'로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는 점이다. 8일 찾은 허베이성 스위안스현의 후자좡촌. 팔로군 병력 없이 조선의용군 단독으로 치른 최대 전투인 '후자좡 전투'(1941년 12월)가 치러진 지역이자, 의용군 29명이 머물렀던 곳이다.
마을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조선의용군 전적지 옛터'라는 한글 현판이 걸린 중국 전통 가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각 방마다 '주방' '집무실' '숙소' 같은 팻말이 걸려 있었다.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물을 길었던 가옥 내 우물도 잘 보존돼 있었다. 한눈에 봐도 유지·관리에 꽤나 신경 쓴 티가 났다.
가옥 내부에는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으로 알려진 김학철 선생의 활약을 기린 '김학철 기념관'도 있었다. 김학철 선생은 후자좡 전투 당시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붙잡혔다.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해방 뒤 옌볜에서 줄곧 작가로 활동했다. 김일성은 물론,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의 독재에 반대하다 고초를 겪기도 했다.
8일 중국 허베이성 스자좡시의 후자좡촌의 한 가옥 안에 있는 우물. 1940년대 초 이 가옥에 주둔했던 조선의용군 29명의 식수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스자좡=조영빈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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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기념관 한가운데 걸린 대형 '중국공산당기'가 눈에 띄었다. 자칫 조선의용군 역사가 중국공산당 항일 투쟁사의 한 토막쯤으로 오인될 수 있겠다는 걱정이 밀려왔다. 실제 가옥 안에는 공산당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홍색 애국주의 교육기지'라는 현판도 달려 있었다. 관리인에게 "태극기도 함께 걸어 놓는 건 어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한국 측 요청도 없는데 우리 마음대로 걸 순 없는 것 아니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중국 영토인 탓에 타이항산 독립군 유적지 관리에 한국 정부가 직접 관여할 방법은 많지 않다. 국가보훈부는 "독립기념관을 통해 민간단체와의 협의를 거쳐 중국 내 독립군 유적지를 관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조선의용군 유적지가 남아 있는 지역 관계자들은 "한국 정부 사람들이 유적지를 찾거나 보수·관리 요청을 한 전례가 매우 드물다"고 입을 모았다. 조선의용군 행적을 다룬 사적지에 중국공산당기가 걸렸는지도 모를 정도로 '관심 밖'이란 얘기다.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의용군 유적지를 보기 위해 후자좡촌을 찾은 중국인 우모(41)씨에게 "조선인 독립군 유적지를 방문한 이유가 뭐냐"라고 물었다. 공산당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우씨는 "한국과 관련된 곳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항일 투쟁 역사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에 관심을 두는 건 당연하다"고 답했다.
"지금은 분단됐지만 당시엔 같은 조선인 아니었나"
8일 방문한 중국 산시성 쭤취안현 상우촌에 위치한 사찰 훙푸사의 전경. 1940년대 초 조선의용군 수십 명이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항일 전투 활동을 벌였다. 쭤취안=조영빈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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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을 돌려 조선의용군의 첫 주둔지로 알려진 산시성 쭤취안현의 상우촌으로 향했다. 훙푸사라는 사찰을 베이스캠프로 삼은 의용대원 수십 명이 주둔했던 곳이다. 쓰다 만 건축 자재들이 절 주변에 뒹굴고 있었으나, 절간 입구에 걸린 '조선의용군 전적지 구지'라는 팻말만큼은 말끔했다.
상우촌 주민이자 이 지역 당서기를 지낸 쥐셴중(71)씨를 자택에서 만났다. 쥐 전 당서기는 "마을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조선의용군 유적지들을 청소한다"고 했다. "일본에 맞서 중국과 함께 싸운 이들의 흔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조선(북한) 사람은 아예 이곳을 찾지 않고, 드문드문 이어지던 한국인의 발길조차 최근 끊겼다"며 정말 오랜만에 한국 사람이 방문한 것이라고 했다.
8일 중국 산시성 쭤취안현 상우촌 자택에서 만난 쥐셴중 전 당서기가 조선의용군의 활약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조선의용군 역사는 중국 땅의 역사지만 한국의 역사이기도 한데, 한국이 조선의용군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쭤취안=조영빈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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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을 앞둔 9일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왕정국가로 되돌아가려는 것도 아니었고, 공산 전체주의 국가가 되려는 건 더욱 아니었다"며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고 말했다. 조선의용군의 항일 투쟁을 독립운동사에서 배제한 언급이었다.
이와 대비되는 쥐 전 당서기의 한마디는 계속 귓가를 맴돈다. "지금이야 남북으로 갈렸지만, 당시엔 다 같은 조선인 아니었나. 한국이 조선의용군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광복절 78주년을 맞는 지금도, 조선의용군 역사는 '한국의 역사' 속에 들어오지 못한 채 타이항산 일대만을 떠돌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