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3월 16일 (월)
아, 오늘 저녁 (집회를 인도하는데) 나는 괴롭다.
나의 등에는 땀이 흐르지 않았다. 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지 않았다.
땀 없슴, 눈물 없슴, 이는 나에게 괴로운 일이다.
땀에 젖음, 눈물에 어리움, 이는 나의 기쁨이요 만족이다.
육이 편하여 나는 기쁘지 못한 자로다. 십자가의 고통을 당함이 나의 영광이요 복이오 기쁨이로다.
새벽 두 시에 숙소로 돌아왔다.
이곳을 떠나 그냥 가버리고 말까, 떠남이 성령의 뜻일까?
그냥 참고 있음이 성령의 뜻일까?
오- 주여 나에게 지시하여 주옵소서. 나는 내일까지 기다리고 싶은 마음 있사오나.
이용도목사님의 고백을 통하여 제가 그 동안 얼마나 말씀을 안일하게 전하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등에 땀이 흐르지 않으면서도,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많은 설교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저 자신에 대하여 간절하지도 애통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은혜받았다는 말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제게는 아직 이런 간절함과 열정, 애통함과 눈물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하기 힘든 일 셋이 있는데
미운 자에게 정 주는 일, 싫은 자를 받아주는 일,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 중 셋째가 제일 어렵답니다.
여류 문인 플로렌스 바클레이는 어머니가 들려준 자신의 이야기를 수필에 소개하였습니다.
사순절 중인 어느 주일, 목사님이 처참한 십자가 형에 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회중석에서 훌쩍 훌쩍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와 함께 앉아있는 일곱 살 난 플로렌스였습니다.
“왜 울어! 쉿 조용히 해!”
엄마가 껴안아도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소녀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엄마, 그 사람들이 왜 예수님께 그런 못쓸 짓을 했어요?”
처음엔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교인들이 숙연해지고 여기저기서 작은 기도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철없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습관화된 예배자들과 십자가 불감증에 걸린 신자들을 각성시킨 것입니다.
바클레이는 이 이야기를 가끔 회상하면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반성하였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담은 라멘집]에서 주방 일을 배우는 탈북민 한 분이 요리를 배우게 된 동기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북한 땅에 두고 온 자녀들에게 음식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요리를 배운 가는 것입니다. 그 소원을 이루기까지 당신의 목숨을 이곳에 걸었다고 울면서 고백하였습니다.
라면 하나를 끓여도 눈물이 있으면 감동이 있습니다.
“우는 자가 복이 있다”(눅6:21)고 하신 예수님은 슬픔 당한 가정에서 눈물에 동참하셨고(요11:35) 전쟁에 휘말릴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눅19:41).
그 눈물에는 진정한 사랑이 깃들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생명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눈물이 말랐다면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대설교가였던 프레데릭 부크너 목사의 설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당신은 언제 울어보았습니까? 무슨 눈물이었든 당신이 울었던 그 순간이 자신에게 정직했고 오래 동안 잊어버렸던 당신의 뿌리를 어루만진 순간이었습니다. 그 밑바닥 뿌리에서만 당신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설교자에게서 넘치는 기쁨과 애통하는 눈물이 있을 때, 교인들 사이에 자발적인 기도 모임과 전도와 봉사 모임이 일어날 때, 그 교회 공동체는 부흥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습니다.
의무 이상의 섬기려는 마음, 넘치는 기쁨과 애통하는 눈물이 있으면 심령에 부흥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