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식량’처럼 즐겨 먹다
역사는 문자를 가진 이들의 편에 의해 기록 된다. 말로 전하는 것은 기껏해봤자 신화나 설화 정도의 취급을 당한다. 조선시대의 기록은 대체로 한자로 기록되었다. 이 규경은 한자라는 문자를 다룰 줄 알았고 이 한자로 그 당시의 문물을 기록하였다. 그가 남긴 한자의 기록을 우리는 자연스레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애초에 ‘관목貫目’ 이라는 단어가 있었고 민중의 입말로 남아있는 과메기는 한자어 관목을 사투리로 읽은 것이라고 여긴다. 뒤집어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애초에 ‘과메기’ 라는 말이 있었고 이를 이규경이 한자로 기록하면서 그 음가가 비슷한 ‘관목貫目’ 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썼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청어든 꽁치든 눈을 꿰어 말리는 장면을 필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청어는 지구 북반구의 겨울이 있는 지역에서는 식량과 같은 생선이다. 겨울에 들면 산란기에 이른 청어가 뭍 가까이 붙고, 이를 잡아 염장과 건조를하여 두고두고 먹는다. 초겨울이면 한국인은 이웃에게 “김장 몇 포기 했냐” 묻듯 유럽의 어느 나라는 “청어 몇 마리 재웠냐” 고 묻는 인사말도 있다. 한 번에 많이 잡히는 생선은 어떤 식으로든 저장하여 먹게 되어 있다. 한반도에서도 상황이 비슷하였을 것이 다. 겨울이면 무한정 잡히는 청어를 어떤식으로든 보관하였을 것이다. 조선의 사정을 보면 소금은 귀하였다. 천일염 같은 것은 없었다. 개흙에 바닷물을 부어 소금기를 머금게 하고, 이 개흙을 모아다 바닷물이 드는 곳에 두어 염도가 높은 함수를 얻은 다음에 이를 끓여 소금을 얻었다. 소금이 귀하니 염장할 엄두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쉬운 게 건조이다. 겨울이니 건조 중에 상할 염려도 적다. 새끼줄로 엮어 바람 잘 부는 곳에 널어 말렸을 것이다. 이렇게 말린 청어는 산지인 동해안에서 한반도 각지로 흩어졌을 것이다.
삼대어족에 꼽히다
한반도에서의 근대적 어업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 어군을 쫓아 대형 그물을 놓는 방식의 어업이 일제에 의해 번창하게 되었다. 이때에 청어가 주요 어종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물론 주요 산지는 경북 포항이었다. 1934년 8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포항 청어’ 기사이다. ‘3대 어족의 하나’ 라는부제가 붙어있다. '매년 청어기(12~3월)가 되면 각지로부터 모여든 다수 어업자들은 출어하는데 각 어촌 부두에는 미명부터 남녀노소가 인산인해가 되어 왁자글 떠드는데 그것은 어젯밤 출어한 가족들의 입진入津을 기대하는 것인데, 풍어를 꿈꾸면서 환근歡近하는 광경은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별다른 정취의 재미있는 세계가 전개되고 청어 어선이 풍어입진豊漁入津하면 일시의 경기는 호전되어 번성 절정에 달하고 일반 경기를 청어훙풍이 좌우하는 것이다. (중략) 판로를 본다면 생산의 삼분의 이가 조선 내에서 소비되는 것은 물론이요 일본, 만주 방면에까지 수출되는 것인데 최근 성히 제조하는 청어신흠靑魚身欠 이란 것은 세계적 시장에서까지 호평을 받고 있다 한다.’ 과메기니 관목이니 하는 단어는 안보이고, 우리에게는 낯선 ‘청어신흠靑魚身欠’ 이 등장한다. 그당시 자료에는 ‘신흠身欠’ 이 곧잘 보인다. 신흠身欠은 일본어이다. ‘미가키’ 라 읽는다. 머리 떼고 내장 제거하여 말끔히 말렸다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손질한 청어를 ‘미가키니싱身欠きにしん’ 이라 한다. 일본에서도 청어가 잡힌다. 북해도 인근 바다가 주요 어장이다. 그러니 일본에서도 청어를 예부터 많이 먹었다. 미가키 니싱은 말린 청어이기는 한데 말린 다음에 양념을 가한 것이 한국의 청어 과메기와 다르다. 간장에 조려서 짜고 달며 감칠맛이 강하다. 보통은 딱딱하게 말려져있는 상태이며 이를 불려 요리를 한다. 묘한것이, 이 미가키니싱은 청어 산지의 특산물이 아니다. 교토의 특산물이다. 교토는 내륙이고 그러 니 청어가 없다. 산지에서 말린 청어를 받아다 양념 등 후가공을 교토에서 하여 이 지역의 특산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교토에 여행을 하면 반드시 맛보아야 하는 음식으로 니싱소바가 있다. 메밀국 수 위에 커다란 청어가 올려진다. 교토에서 니싱소바를 먹을 때면 일제강점기 일본에 수출하였다는 포항의 청어신흠靑魚身欠이 교토에 가장 많이 갔을것이라는 상상을 하곤 한다.
꽁치가 청어를 대신하다
광복 즈음 우리나라 근해에 청어가 사라졌다. 1971년 잠시 풍어를 보였을 뿐 현재까지도 청어는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청어 말리는 일도 사라졌다. 그러다 갑자기 꽁치 과메기가 등장하였다. 구룡 포 사람들은 1960년대부터 꽁치 과메기를 먹었다고 하고, 죽도시장 사람들도 그 즈음일 것이라고만 할 뿐 정확하게 고증하는 이는 없다. 꽁치도 청어만큼 겨울의 포항에서 많이 잡혔던 생선이다. 그러니 1960대의 발명품으로 볼 것은 아니다. 말린 청어도 먹고 말린 꽁치도 먹다가 말린 청어가 잘 안보이게 되자 말린 꽁치가 더 돋 보이게 된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 맞다.
그 내력이 어떻든 요즘은 과메기하면 다들 말린 꽁치로 여긴다. 가끔 청어 과메기가 나오기도 하는데 꽁치 과메기보다 맛없다며 인기가 없다.
과메기(여기서부터 과메기는 꽁치 과메기만을 뜻한다)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11월 중순부터 날씨가 풀리는 설날 전후까지 말리는 것이 ‘원칙’ 이다. 과메기의 맛을 보면, 단순히 꽁치를 말린 것은 아니다. 밤낮의 일교차에 의해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보름 정도 숙성한 음식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보통의 경우 지방질이나 단백질은 공기중에 장기간 두면 산패를 하게 되는데, 꽁치는 껍질이 막처럼 살을 싸고 있어 산패 없이 숙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잘 숙성된 과메기는 꽁치의 기름내가 맑고 살코기는 씹을수록 고소하다. 약간 물컹한듯 하지만 부드럽게 입안에서 풀리는 맛이 있다.
1990년대 말부터 ‘변종’ 과메기가 등장을 하였다. 꽁치를 반으로 갈라 말린 과메기이다. 이렇게 말리면 사나흘이면 먹을 수 있는데, 먹기 간편하고 식감이 쫀득하다는 장점이 있어 요즘은 이 ‘변종’ 과메기가 대세이다. 이 두 종류의 과메기를 구별하여 통으로 말린 것은 ‘통말이’ , 반으로 갈라 말린것은 ‘짜배기’, ‘ 배지기’ 등으로 부른다. 2000년대 들면서 과메기는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을 하여 없어 못 파는 물건이 되었다. 그러면서 꽁치를 해풍에 자연건조 하는 것이 아니라 건조기로 하루 만에 말린 과메기도 등장하였다. 시장에서 이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꽁치 과메기가 포항의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이다. 그 즈음에 죽도시장과 구룡포, 죽천 등지에 대규모 덕장이 들어섰다. 통나무로 4단 내지 5단의 건조대를 짓고 한 두름에 20마리씩 묶어 건다. 짜배기는 가느다란 가로대에 꼬리 부문만 붙인 꽁치를 한마리씩 건다. 최근에는 ‘발과메기’ 라는 신제품이 등장하였는데 짜배기를 발에 널어 말린 것을 말한다. 이렇게 말리면 과메기에 맛을 내는 첨가물을 바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녹차며 복분자, 홍삼 등을 발라 건조한다.
겨울이면 죽도시장과 구룡포시장에는 ‘과메기 파시’ 가 열린다. 가게마다 과메기를 내고 시식을 할 수 있게 해놓았다. 가게 앞에 진열 되어 있는 과메기는 대부분 짜배기이며 통말이는 뒤에 걸린다. ‘통말이’ 는 포항의 과메기 마니아들이나 먹는 음식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청어 과메기도 가끔 보인다. 과메기가 원래는 청어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소문이 번지면서 과메기의 ‘오리진Origin’ 을 먹으려는 소비자들이 생긴 덕이다.
첫댓글 걸려있는 괴메기가
군침을 돌게 허는디
워쪈대유
아다롱님 책임지셔유
저 요즘 과메기 매일 먹고 있어요 처음 먹어 보는데 건강에 참 좋은것 같아요 포항에 사는 향기님께서 지난번에 과메기 내용을 올렸더니 보내주셔서 처음 접했는데 먹어져서 이곳에서 구해 먹고 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