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후 중국 조선족,중국 정착 과정에서의 슬픈 역사-1]
1945년 일본의 패망 직후 중국 동북지역에는 4개의 세력이 존재했다.장제스의 국민당 세력,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 세력, 일본이 패망하면서 살 길을 찾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던 일제 및 만주국 잔당, 이 지역에서 도적질을 하며 세력을 키웠던 토착비적(토비)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일본의 항복 직후부터 힘의 공백 상태에 있는 동북지역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이합집산하는 등 세력을 구축했다.
대부분의 일제 및 만주국 잔당과 토비들은 해방 직후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국민당정부를 지지해서 그 편에서 활동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북지역의 세력 판도는 국민당정부 세력과 공산당 세력으로 양분됐다.
국민당정부는 해방 전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던 중국 동북지역을 접수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은 물론 이 지역에 남아있던 일제 및 만주국 장당과 토비들을 대상으로 지하공작을 감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
중국공산당 역시 이 지역을 거점으로 중국에서 공산혁명을 도모하려는 목표 하에 동북지역으로의 진공을 서두르는 한편 이 지역에서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양자 간에는 힘의 충돌이 일어났고 이는 곧 국공내전으로 이어졌다. 국공내전의 판세는 자체의 역량보다 이 지역에 형성된 몇 가지 변수에 의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일제의 항복 직전 대일전 참전을 선언하고 동북지역에 진주한 소련군, 해방 후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위해 국민당정부를 지원한 미국, 그리고 연변지역에 거주하며 항일투쟁 시기부터 중국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조선인이 핵심적 변수였다. 대일전 참전 일주일 만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동북지역에서 일본군의 무장 해제 및 질서 유지에 나선 소련군은 해방이후 이념적 유대를 가지고 있는 중국공산당을 외면하고 국민당정부를 지지했다.
얄타회담에서의 밀약에 따라 해방 직전 국민당정부와 중소우호동맹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중국공산당을 외면하고 국민당정부의 편에 서게 된 것은 이 지역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누렸던 영향력을 회복하고 일제가 건설한 경제시설들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중국공산당을 과소평가했던 것도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미국 또한 동북아시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일제의 항복 전부터 중국 동북지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정세에 관여했다. 미국은 일차적으로 중국에 있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일전쟁 기간 동안 연합국의 일원으로 활동한 국민당정부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중국에 계속 주둔했다. 국민당정부가 동북지역에서 중국공산당과 대립하게 되자 국민당정부를 적극 지원하고 나셨다.
미국은 국민당정부가 전후에도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적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해방 초기 중국 동북지역의 정세는 국민당정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동북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공산혁명을 추진하려던 중국공산당의 전략은 크게 차질을 빚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세력도 상황을 반전시킬 새로운 카드가 있었다. 동북지역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던 조선인이 중국공산당 세력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고 나선 것이었다.여러가지 불리한 상황에 처한 중국공산당은 연변을 포함한 동북지역에 밀집해 살아가던 조선인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이곳을 중국의 공산혁명을 위한 동북근거지 구축의 발판으로 삼게 됐다.
참고서적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곽승지 지음, 인간사랑 출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