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210
5월1일[부활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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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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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qxLCumf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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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의 부모는 새로운 세상에 들어와서 무작정 먹어서 ‘돼지’가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치히로는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습니다. 그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그냥 돈으로 내기만 하면 되는 줄 압니다.
치히로는 부모가 돼지가 되어버리니 자기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이름을 잊어버립니다. 그러자 몸이 조금씩 투명해집니다.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치히로는 자기 이름을 되찾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돼지가 된 부모를 되돌리기 위해서. 이것이 일의 중요성입니다.
오늘은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목수’라는 직업으로 소개됩니다. 그가 목수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일해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부양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요셉에게 일이란 것이 예수님과 성모님에게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일에는 항상 ‘양식’이 따릅니다. 양식을 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일하셨습니다. 부활 대축일 미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왜 일하려고 하셨을까요? 성체를 영했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줍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아담은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했어야 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고 먹는 과일은 선악과가 됩니다. 죄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데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라고 말하며 일과 먹는 것을 연관시킵니다. 바오로에겐 먹는 목적이 생존이 아니라 일인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뜻이 됩니다.
왜 먹는 것과 일이 직결될까요? 양식 안에는 사명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튜브에 엄마들이 호주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을 위해 평소에 먹던 음식을 준비해서 몰래카메라로 식당에서 음식을 대접했을 때 자녀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어머니의 음식은 피가 서려 있습니다. 그 피가 양식이 되게 합니다. 양식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합당한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돼지가 되는 것입니다. 음식은 정체성을 주고 정체성은 사명을 줍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면서도 일에 대한 부담이 없는 이유는 성체를 양식이 아니라 음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가 봉헌금을 냈으니 당연히 먹어도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봉헌은 내가 받은 것에 대해 내가 드릴 수 있는 감사이지, 그것이 성체의 값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느끼기만 하면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성체에서 말씀하실 때, “그럼 제가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성체는 당연히 일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 이 단계까지 오지 못하느냐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드리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제대로 영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식의 목적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에 뉴스에 경찰관이 불이 난 집에 홀로 계신 할머니를 구한 일이 나왔습니다. 마치 가족과 사회에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부끄러워져 합당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받은 것에 보답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주어지는 양식은 물론이요, 시간과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에너지입니다. 이것을 먹고 마시고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양심이 그 사회에 속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먹으면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다가갈 힘을 얻기 위해 준비하는 존재들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양식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이것에 감사하다면 그 열매를 맺어야 당연합니다. 주인이 맡긴 달란트(재능, 기회, 은총 = 일종의 '양식')를 가지고 수동적으로 있거나 숨겨둔 종과 달리, 이를 활용하여 '일하고' 이윤을 남긴 종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그분의 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할 책임(사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받은 것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일'을 강조합니다.
양식은 ‘어머니의 도시락’과 같습니다. 어머니는 도시락을 왜 싸 주는 것입니까? 공부하라고 싸 주시는 것입니다. 도시락을 통해 자신이 어머니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이 정체성이 없다면 부모의 자녀의 자격을 잃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자녀입니다. 각 공동체에서 주어지는 양식이 있고, 그 양식에 합당한 일이 있습니다. 이 둘을 거부하면, 먹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모를 수 있고, 더 나아가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일하지 않아도 돼지처럼 그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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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한인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있는 것을 찾으며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비교하는 사람은 없는 것을 찾으면서 불평한다고 합니다. 본당의 전례에서 신부님의 따듯한 배려와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연도 할 때도 신부님은 직접 선창하면서 교우들이 연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성모 신심 미사에도, 성 시간에도 신부님은 교우들이 묵상할 수 있도록 성가를 선곡해서 들려주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렇게 정성을 다하니, 하느님께서 많은 봉사자를 보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는 말하지 마라" 그러자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도들은 말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실제로 감옥에도 갇히고, 매도 맞고, 심지어는 목숨의 위협까지 받으면서도, 복음을 선포하러 다시 나섭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들의 마음속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진실, 그리고 그분이 정말 생명의 주님이라는 확신입니다. 그 진리를 경험하고 나니까, 세상의 권위나 명령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이런 모습은 교회 안에서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있습니다. 그는 아테네 법정에 서서, 사람들이 왜 자꾸 철학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신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악한 삶보다 죽는 것을 택하겠다.” 결국 그는 국가가 정한 법과 체제에 맞서 양심과 진리를 따르는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한 사람, 마르틴 루터도 있습니다. 그는 중세 교회의 권위 앞에서, 잘못된 신학과 부패한 관행을 지적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를 도우소서.” 그의 이 말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자신의 양심에 충실히 하고자 했던 외침이었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입니다. 히틀러의 독재 앞에서 교회가 침묵하거나 순응할 때, 그는 신학자로서 이렇게 말합니다. "침묵은 동조다. 교회는 불의 앞에 말해야 한다." 그는 결국 감옥에 갇히고, 교수형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은 지금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양심의 목소리로 살아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진리와 진실을 찾으려는 이들을 통해서 인류의 가슴에 묻혀있던 양심을 깨우쳐 주십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단이 내려진 적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을 파면한 판결이 있습니다. 당시 재판관은 "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파면하지 않으면서 얻는 이익보다 크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통치권자의 권위보다 헌법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 결정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지만, 국민을 위한, 정의를 위한,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이 두 장면은 시대도, 배경도 다르지만 하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진리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는가?"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침묵을 강요받을 수도 있고, 때로는 눈치 보지 않고 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도들처럼,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바라셨고, 그래서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들 예수의 말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욕망, 시기, 질투, 불신, 분노, 원망의 삶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신뢰한다면, 함께 나눈다면,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바로 이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어두움 앞에서 진리를 외면하지 않고, 양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말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의 양심이 깨어 있을 때, 세상은 희망을 봅니다. 오늘도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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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나누신 대화(요한 3,1-21 참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시는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아드님이십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태양’과 같은 분이신데, 오늘 복음은 그 큰 빛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이들일까요?
그들은 마치, 해가 떠올라 세상이 환한데도 창문에 커튼을 치고 방에 들어앉아 어둠을 쫓는다고 촛불을 켜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오랜 장마 뒤에 뜨거운 태양이 떠올라 대지를 산뜻하게 덥힐 때 창문을 활짝 열어 햇볕을 쬐는 대신, 문을 닫아걸고 굳이 보일러를 돌리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제힘으로만, 제 잘난 것으로만 살 수 없는데도 자신의 부족함과 가난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 버티는 꼴이지요. 빛 앞에서 방어하고 저항하며, 자기 혼자서도 잘해 왔노라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그 미약한 힘자랑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련합니다. 넘실거리는 은총의 바다를 앞에 두고 겨우 쫄쫄 흐르는 실개천인 자신을 뽐내며 하느님 앞에서 위세를 부리는 격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이를 두고 ‘어리석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악하다’고 말합니다(3,19-20 참조). 그들은 생명을 보지 못하며,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3,36 참조). 이는 윤리적인 평가가 아닙니다. 영적인 평가입니다. 윤리적으로는 다른 이들보다 나은 점이 있지만, 자신은 충분하다며 더 받아들이고 배우고 변화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한 분 말고는 아무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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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31-38: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위에서 오신 분이시다. 모든 이가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드님을 공경해야 한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 5,23)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32절) 그분은 보고 들어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었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품에서 완전한 상태로 나오셨기 때문에 당신 안에 이미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참되고 거짓은 전혀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따르려 하지 않는다.
신앙인은 말씀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그분을 닮아간다. 위에서 오신 분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는 진리가 하느님께 가깝고 소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34절) 아드님이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하느님께서 말씀을 품으셨고, 아드님을 낳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낳으셨으며 아드님을 통하여 시간을 창조하셨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아버지의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하신다. 이 아드님은 성령을 온전히 지니고 계시며, 친히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는 그분께 성령을 주십사고 청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35절) 여기서 모든 것이란 아들이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당신과 같은 존재이시므로 또 다른 당신을 보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유일한 말씀이시자 지혜이신 그분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을 영원으로부터 가지고 계시다. 단지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것이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6절) 우리의 믿음은 착한 생활과 행동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36절)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는 것은 치유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분을 믿고 따른다면 하느님의 분노가 떠나고 생명이 온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8) 이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잘 따라 그분을 닮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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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노동은 ‘사랑’이고, ‘선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1)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노동은 ‘사랑’이고, ‘선한 일’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선한 일도 아니고, 사랑도 없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노동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노동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벨탑을 쌓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창세 11,1-9)
벽돌을 구워 내고, 그 벽돌로 성읍을 세우고 탑을 쌓는 일은, 겉으로만 보면 분명히 ‘노동’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이었고, 그래서 ‘악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셨고, 그 일을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인간들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바벨탑을 쌓는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공동선도 없고, 이기심과 탐욕만으로 하는 일들은 ‘선한 노동’이 아니라 ‘죄’입니다>
2)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나자렛 사람들의 말과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라는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는가?”라는 반응을 보였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육체노동을 천시했고, 목수의 아들이며 목수라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진짜로 천한 사람은 특정 직업을 천시하고 업신여기는 자신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농부’로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1-2) 하느님을 ‘농부’로(노동자로) 표현하신 것은, 노동의 신성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3) 하느님이 농부시라면, 하느님의 인류 구원사업은 농사를 짓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심판’을 ‘추수’로 표현하고, ‘구원받는 것’을 ‘열매 맺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도 다 하느님의 농사에 연결됩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농사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추수의 기쁨은, 농부이며 노동자이신 하느님의 기쁨이기도 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4)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야고 5,7-8.10-11ㄱ) 신앙생활은, 추수 때의 기쁨만을 생각하면서 여름 동안 논과 밭에서 묵묵히 고생하는 농부의 생활과 많이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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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닮은 사람>
마태오 13,54-58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하느님 닮은 사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
일하시는 하느님
닮은
일하는 사람
이루시는 하느님
닮은
이루는 사람
돌보시는 하느님
닮은
돌보는 사람
베푸시는 하느님
닮은
베푸는 사람
섬기시는 하느님
닮은
섬기는 사람
살리시는 하느님
닮은
살리는 사람
일하시는 하느님
닮은
일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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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마무리하는 부분입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요한 복음 3장의 끝에서 예수님의 신원을 둘러싼 논쟁을 정리하여 설명합니다. 하늘과 땅, 증언의 수용과 거부,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자(순종하지 않는 자)의 대조는 예수님의 우위성과 신적 기원을 두는 예수님 증언의 절대성을 강조하려고 사용됩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시는 분”이시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져야 하는 하느님의 계시자이십니다.(3,13-14 참조)
예수님께서는 유일하게 하느님을 직접 만나셨기 때문에 당신께서 직접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관계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표현으로 강조되는데, 앞서 요한 복음 3장 16-17절은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이로 소개합니다.
외아드님의 파견은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에게서 성령을 받으시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증언하시는 것이 참된 이유는 ‘하느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두 가지 다른 반응으로 끝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만,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는 구원과 심판,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한 가지씩 선택하도록 요청받습니다.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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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증언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시지만 우리처럼 사람이 되셨기에 당신께서 몸소 하느님 아버지와 나누신 친교를 우리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 예수님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오늘 복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와 마치실 때 삼위일체 하느님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카 복음 3장 21절-22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오 복음 28장 19절)
예수님께서 증언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바로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요한 1서 4장 16절 참조).
사랑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주는 이는 받는 이를 필요로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주시는 분이신 아버지께서 사랑을 주시려면 이를 받으실 아드님께서 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주시고자 하실 때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아드님 손에 내주십니다. 그러면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다시 아버지께 온전히 내어 드리십니다. 순수한 영이신 아버지와 아드님께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히 내어 주시고 또 온전히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아드님 안에 계시고, 아드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계시어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 일치가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그 아드님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생명을 거부하여 죽음의 어둠 속에 머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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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삼위 하느님의 관계성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요한 3,34)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신 성자 예수님은 보내신 분의 뜻을 아시고 그분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의 말로써 스스로의 영광을 들어높이시지 않으시고 오로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아버지의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바로 아버지의 말씀이시지요.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그런 아드님을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모든 것"에는 그야말로 다 들어 있습니다. 권한과 소유를 포함해 성령까지 주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를 잇는 사랑이고, 사랑의 유대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에게 주실 가장 크고 중요한 존재는 바로 당신 자신이십니다. 사랑하는 존재 사이에서는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증여가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온전한 자기 증여가 아드님을 향해 일어납니다. 성부 하느님은 성자 예수님과 하나이시고 또 성령과 더불어 한 분이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1)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당신들끼리의 완전한 사랑 안에 취해 계시지 않고 우리를 그 관계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하느님은 스스로의 충만함에 고립되어 계시지 않고 우리에게 당신을 열어젖히신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음으로써 삼위 하느님의 관계 안에 참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삼위 하느님과 누리는 지고의 행복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참여하는 우리가 해야 할 실천적 몫이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감사하게도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경우에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없지 않지요. 오늘 독서 대목에서 이스라엘의 최고 의회 구성원들과 사도들이 맞닥뜨린 대립이 좋은 예가 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는지 명백합니다. 비록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많은 것을, 생명까지 잃는다 해도 순종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이처럼 성 삼위 하느님 안에 참여하는 우리의 믿음은 구체적인 선택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누구에게 순종하느냐에 따라 우리 존재와 방향성은 크게 달라지지요.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사도 5,32)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성령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게 "한량없이 주신 성령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그 성령의 현존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을 모신 그분의 사람임을 증언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아드님의 증인이시고, 우리가 참여한 사랑의 관계의 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삶은 우리에게 무수히 선택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누구를, 무엇을, 어떤 방식을, 언제, 어디를 선택할지 우리는 매순간 고민하고 움직이지요.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순종하는 이는 자기 잇속이나 안위, 편리 등의 세속적 가치를 넘어서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느님의 뜻에 제 뜻을 합치는 사람입니다. 제게 해가 돌아올지라도 그렇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기회들 안에서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어 선택하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작고 소박해 보여도 그 안에 구원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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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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