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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1. 개요
"흔히들 해적의 생활 하면 낭만을 떠올립니다. 끝없는 항해, 보물을 찾아 떠나는 모험. 다시 생각해 보세요! 해적들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애를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범죄자였고, 따라서 어떤 항구에도 정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훔칠 뿐이었죠! 그들은 늘 무기를 달고 살았습니다. 혹시, 한 손이 없어져도 이걸로 대체했을 정도니까요!"
히스토리 채널, 밀리터리 Q&A
그런데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진짜 해적들은 신의도 법도 모르는 악당이다. 그들은 반지 하나를 빼앗기 위해 남의 손을 자를 수 있고, 강간과 약탈에 혈안이 되며, 불쌍한 뱃사람들을 상갑판 꼭대기에서 바다로 내던지면서 미친듯이 좋아하는 자들이다. (중략) 그러나 세월은 약이고 시간은 모든 상처를 치유한다. 할리우드의 영화쟁이들이 손을 대자 그들은 일약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고, 섬에 관광을 온 가족들에게 매력적이고 모험적인 삶의 본보기로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에서 발췌.
해적이란, 해적선을 타고 바다를 지나가는 배를 공격해 화물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쉽게 말해 바다 위의 강도(들). 산에는 산적, 풀밭에는 초적, 땅에는 도적, 말을 타면 마적, 강에서는 수적, 바다에는 해적이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해상 무역이 국가 간 경제활동의 주류를 차지하면서 해적들은 이를 방해하는 가장 큰 골칫거리로 떠올랐으며, 특히 세계 무역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17세기 이후부터는 도적들 중에서도 가장 악명과 인지도가 높은 집단이 되었다.
또한 해적들이 정부와 연줄이 닿는 경우 허가장을 받아 일종의 PMC로서 뛰거나 바르바리 해적들처럼 아예 관직을 얻어 사략선활동을 하기도 했다. 실존인물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오늘날 해군참모총장과 급이 같은 관직을 얻어냈다. 여기에 언급한 것이 아니더라도 여러가지 모종의 사유로 하나의 국가에서 해적에게 관직을 주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해적과 비슷한 의미로 수적(水賊)이 있다. 이쪽은 해적보다 범위가 조금 더 넓어서 바다 뿐만 아니라 강, 호수와 같은 민물에서도 활동하는 강도를 말한다.
해적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나 영화를 보면 해적의 모습이 다소 로망있고 화려하며 때로 재미있게 묘사되기에 좋아 보이지만, 이는 사실상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에 가깝다. 실제 과거 해적들의 인생을 보면 온갖 약탈과 인신매매, 피터지는 싸움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고, 여기에 더해서 동료끼리 배신을 하며 싸우거나 세력다툼으로 희생되어 비명횡사하는 경우도 흔했다. 또한 기술이 현대처럼 발전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항해 자체가 목숨을 담보로 해야되는 위험한 일이었다. 현대에 존재하는 갱단의 모습이 과거 해적의 모습과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2. 역사
2.1. 고대 ~ 중세 초기
해적이 언제부터 나타난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인류가 해상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나타났다고 추측하고 있다.
2.1.1. 바다 민족
고대 이집트 나일강 하구에서 징세관이 탄 배를 습격한 이들이 기록에 남은 가장 오래된 해적. 이들의 역사는 고대의 해양민족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해양민족들은 이집트를 습격하고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를 박살냈으며 히타이트까지 멸망시켜버리는 기염을 토하는 등 고대세계의 문명들의 흥망을 좌지우지 하였고, 결국 청동기 문명의 몰락을 불러일으켰다. 자세한 내용은 바다 민족으로.
2.1.2. 고대 그리스의 해적
주요 문명이 인접한 지중해와 에게 해에서는 일찍부터 해적들이 창궐했다. 온갖 문명이 번성했던 지역답게 상선들이 많이 지나다녀서 먹잇감이 많아 해적질하다 굶어죽을 일은 없었다. 당대에는 항해술의 한계로 연안항해가 기본이었는데 그리스 반도가 워낙에 다도해다 보니 적당한 섬들 사이에 숨어 기다리면 알아서 상선이 다가오니 해적질이 번창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보면 해적질하는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해적이 아닌 사람들도 해적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등 여러모로 해적질을 권장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3] 고대 그리스에서 얼마나 해적질이 성행했는지는 감히 신인 디오니소스를 노예로 팔아먹으려 든 해적들의 일화가 전해지는 걸 보면 된다. 신화에까지 나와 신을 모욕하려 들 정도라는 것. 이놈들은 결국 돌고래로 변해버린다.#[4]
페니키아인, 아시리아인 등 주요 문명들은 군함을 띄우고 초계하여 당연히 소탕하려고 애썼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해적들이 하도 많아서 약 2500년전에는 해적질 토벌과 해전이 구분되질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공격받으면 선전포고 없이 보복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도시국가들이 무질서한 해적질을 제어하려 들자 해적들은 이 관습을 악용해서 자기네 노략질을 이런 보복행위로 우겼다. BC 5세기 사모스 섬을 근거지로 활동한 폴리크라테스(Polycrates)가 유명한데 이 양반.. 사모스 섬을 통치하는 군주(참주)였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큰 규모인 40척의 상비함대를 이용해 그리스 본토나 이오니아 지방을 마구 털어먹는데 써먹었다. 이런 약탈을 통해 나중에는 갤리선을 100척 이상 늘리고 이오니아 지방의 패권을 장악했다.[5]
지중해의 해적들은 알렉산더 대왕때도 창궐해서 그가 기원전 330년에 해적들을 소탕하면서 한 무리를 붙잡아서 "왜 바다를 위태롭게 하느냐"고 묻자 해적의 우두머리 디오메데스(Diomedes)는 이렇게 받아쳤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 : 누가 너에게 바다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너의 것이 아닌것을 빼앗을 권리를 주었는가!
디오메데스 : 대왕이시여! 누가 당신에게 세계를 정복하여, 당신의 것이 아닌 것을 빼앗을 권리를 주었습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집트의 왕이 되고 페르시아의 왕이되라는 권능을 주었습니까? 저는 제 배를 사용했습니다. 폐하께서 온 세계를 어지럽게 하시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다만 저는 작은 배 한 척으로 그러기에 해적이라 불리고, 폐하께서는 큰 함대를 이끌고 그러기 때문에 황제라고 불리지요.
2.1.3. 고대 로마의 해적
로마 시대에도 해적들은 열심히 노략질했다. 이들은 노예와 훔친 화물을 로마인들에게 팔아서 초반에는 일종의 불편한 공생관계를 이루기도 했으나, 점차 로마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지중해의 해적들은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젊은 시절 해적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6]
공화정 말기로 들어서면서 군인들의 주력이던 자영농들이 몰락하여 해상으로 곡물수입을 해야 했는데, 이 곡물수입루트가 해적들에 위협받아 시민들이 굶어죽겠다고 들고일어나자 로마 공화정은 기원전 67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전 지중해를 소탕하게 시켰다. 그는 새로 통과한 반(反)해적법에 따라 예산 6천달렌트, 전함 500척과 로마군 12만명의 지휘권, 80킬로미터 주변의 시민들을 징집하여 지중해의 해적을 뿌리째 뽑을 권한을 받았는데, 너무 권한이 많다고 어마어마한 정치적 반대가 있었지만 끝내 통과되었다.[7] 그 정도로 당시 로마가 지중해 해적들을 아주 심각히 여겼다는 건 알 수 있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우선 전체 지중해를 13개 구역으로 나눠서 효율화를 꾀했는데, 이 막강한 권한으로 항복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고, 반항하거나 도망가는 자들의 해적기지를 찾아 봉쇄하고 해적선을 나포하거나 불태우고, 당시 해적소굴이던 현대 터키 남부해안인 살리시아 지역을 완전히 소탕하는 데 성공하여, 단 40여일만에 큰 무리를 거의 대부분의 해적을 섬멸하는 데 성공했고, 나머지 잔당의 발악도 제압하여 본래 임기인 3년이 아니라 겨우 3개월만에 지중해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폼페이우스가 토벌 임무를 끝내고 사망한 뒤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싸우기 위해 해적이 되었다. 그는 시칠리아 섬을 거점으로 이탈리아 해안을 약탈하고 성공적으로 봉쇄했으며,[8] 패할 때까지 자신을 '바다의 통치자'라고 불렀으나 결국 진압되고 죽었다. 지중해는 이렇게 로마의 대대적인 소탕으로 좀 잠잠해졌지만 페르시아 만은 아직도 안전하지 않아서 페르시아는 해적들과 끝없이 싸워야 했다. 일례로 샤푸르 왕은 '어깨의 제왕'이라 불렸는데, 자기가 붙잡은 해적의 어깨를 뚫어서 새끼줄로 꿰어버려서라고 한다.
로마시대 당시의 해적들의 주 약탈품은 사람(노예, 몸값 혹은 조직원), 포도주, 올리브유, 밀이었다. 로마는 수많은 정복전쟁을 통해 노예를 많이 확보한지라 해적들이 사람을 붙잡아 와서 노예로 파는 짓 역시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이들이 주로 활동한 해역은 해안선이 복잡한 마케도니아와 킬리키아 일대였다.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이 속한 아리우스 제독의 함대를 공격한것도 바로 마케도니아의 해적들이다.
2.1.4. 고대 동북아시아의 해적
동북아시아에서 유명한 해적이라면 왜구인데 무려 기원전 50년, 혁거세 거서간 재위 초의 신라가 왜구의 공격을 받았다. 특히나 동해안에 위치한 신라는 그 지리적 특성상 일본과 가까워 왜구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았다. 이들은 단순히 약탈만 한게 아니라 서라벌을 포위하기도 하는 등 신라의 안보에 심각한 문제라 신라에서는 왜국 정벌을 논의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중국의 경우 후한이 거의 멸망할 위기에 처해있을 때 각 지방 군벌들이 나라를 세우고 임금 노릇을 했을 때, 특히 중국 남부 일대는 해적들이 굉장히 활발히 활동했는데 백성들의 재산을 마구 빼앗아 치안이 개판인 상태가 되었다. 물론 한나라 왕실의 노력과 더불어 강동, 지금의 중국 양쯔강 하류 남부에 할거했던 강력한 군벌인 손강, 손견, 손정, 손책, 손권 등 손씨 가문의 맹활약으로 해적들을 소탕하였다.[9] 삼국지 덕후들이라면 흔히 들어봤을 감녕도 해적 출신이었다가 오나라 신하가 되어 벼슬을 한 사람이다.
다시 한반도와 일본으로 돌아와서 고대 대부분은 한반도계 국가가 왜구의 공격을 당하는 양상이었지만 고대 끝자락인 신라 말~후삼국 시대에는 반대가 되는데 왜냐면 이 때는 신라구가 맹위를 떨쳤기 때문이다. 신라구는 말 그대로 신라인 해적으로 신라구에 의한 피해가 너무 심각한 나머지 사이가 좋았던 신라와 일본의 우호 관계가 깨졌을 정도였다.
2.1.5.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의 해적
전근대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에서도 이슬람의 전래 이전부터 해적질이 매우 기승을 부렸으며, 주된 노예 공급원 중 하나였다.[10] 해적 국가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질좋은 향신료가 많이 생산되었으며, 차나 종이, 비단, 도자기 등의 중국산 특산품들이 유럽 및 중동으로 수출되는 중개무역지 역할을 했으므로, 이 지역 자체가 원체 막대한 부로 흥청거리던 곳이기도 하고, 값비싼 상품이나 이를 매매하기 위해 조달한 금 등의 귀금속도 많이 오갔다. 당연히 이곳은 예로부터 이런 고급 상품이나 노예들을 탐하는 해적들이 기승을 부리기엔 최적지였다. 15세기에도 정화의 대원정을 방해하려다가 명나라 해군에 의해 토벌당한 한족 해적인 진조의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18세기 말에는 청나라에 투항한 해적 여두목인 정일수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의 군인이자 모험가인 제임스 브룩이 브루나이 왕실의 의뢰를 받아 현지의 말레이인 해적을 토벌하면서, 오늘날의 말레이시아 사라왁 주의 기원이 된 사라왁 왕국[11]의 건국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인도 아대륙도 동남아시아의 바로 옆인데다 중동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라는 점때문에 해적들이 들끓는 건 매한가지였다. 16세기에도 이 지역을 탐험하던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가 이끄는 포르투갈 해군 함대가 인도인 해적들과 혈투를 벌인 기록이 있으며, 인도 동부 지역의 불가촉천민이나 수드라 출신 주민들의 기원으로 고대 시대에 동남아시아에서 넘어와서 노략질을 하던 문다인계 해적들이 정착하거나 체포되어 노예로 부려지던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되기도 한다.[12]
2.1.6. 바이킹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초기(약 5~6세기)에는 색슨족 해적들이, 8~9세기부터는 바이킹들이 유럽을 헤집고 다녔다. 색슨 족들은 서로마 제국 말기부터 이미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지방을 털고 다녀서 영국 동부해안을 요새화해야 했고, 서로마 멸망 이후 세워진 나라들의 지도자들도 해안 방어에 골머리를 앓았다.
바이킹들의 배는 잘 알려진 대로 평평하고 가벼워서 강을 거슬러올라가 내륙까지 노략질하고 다녔다. 동유럽은 각종 강을 거슬러 올라갔으며, 서유럽도 예외는 아니라서 내륙의 온갖 도시들은 물론 심지어 파리(!)가 공격당하기도 했다. 이 바이킹들이 제일 노린 표적은 수도원이었지만[13] 그 외에도 해변 마을도 당연히 약탈했다. 수도원은 보통 육상으로부터의 약탈에 대비해서 접근로가 한정되어 있는 강변이나 해안가, 혹은 섬에 지었는데, 이 때문에 반대로 바다로부터 오는 적에게는 되려 맛집이 된 셈이다. 바이킹의 침공은 2~300년간이나 계속되다가, 이들이 정착에 성공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11세기 이후로 잠잠해지게 된다.
2.1.7. 북해, 발트해의 해적
바이킹 침략이 잠잠해진 11세기 이후, 다시 북/서유럽 바다는 해적들로 소란스러워졌다. 중세 초 암흑기에서 벗어나 중세 전성기에 들어가서 서유럽의 산업이 회복되기 시작하여 국제교역이 재개되었는데, 해상 교역로를 다니는 상선들을 노리고 북해 및 발트해에서 해적들이 약탈하여 상인들이 골머리를 앓았다. 그 유명한 한자동맹의 기원이 해적행위를 억제하기 위해 결성된 뤼베크&함부르크의 해상동맹일 지경. 독일 해적들은 비틀 형제단이라 불리는 동맹을 결성해 한자동맹을 공격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 당시 해적들은 선조인 바이킹마냥 지중해와 러시아 내륙까지 쳐들어가기까지 했다. 전쟁이 흔해지면서 당시 봉건영주들이 한몫 하기위해 약탈을 묵인했고 포메른 공작 바르님 6세나 덴마크 왕위에서 폐위당한 에리크 7세[14] 등 군주가 스스로 해적질을 하는 사태까지 이르렀고, 선주들이 손해를 참다 못해 군주들에게 적선나포권을 요구하면서, 이는 사략선의 기원이 되었다.
중세 후기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해적들은 금방 붙잡힐 유럽 근해에서 벗어나 신대륙에서 본격적으로 날뛰게 된다.
2.2. 중세 후기 ~ 근세 초기
2.2.1. 지중해 기독교도 해적
이들(무슬림 노예 노잡이)은 휴식조차 제대로 취할 수 없었다. 1.2m×3m짜리 방 하나에 7명씩 넣어졌기 때문이다.
몰타의 기독교도 해적 갤리선에 대한 어느 프랑스 장교의 증언
이놈들은 겉으로만 십자가 행진을 하는 코르세어들이다.
1588년 베니치아 관리들의 몰타해적들에 대한 촌평
13세기에 이르자 레반트에서 쫓겨난 구호기사단은 중앙집권체제여서 수도가 털린 후 정신을 못 차리는 동로마의 영토인 로도스 섬을 점령하여 로도스 기사단으로 개명하고는 이슬람 해적들이 하던 짓을 똑같이 하였다. 이슬람 선박을 공격해 물건을 다 털어버리고 선원은 노예 노잡이로 부리는 식. 여전히 기사단이 돈과 선박, 병력을 댔으나 후기로 가면서 장삿속이 끼어들었다. 당연히 12세기 이후 동지중해를 석권한 베네치아와 연관이 깊을 수 밖에 없었으나 베네치아는 어디까지나 장사꾼 근성(원래 이집트로 가게 되어있던 4차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플로 돌려버린 것도 이집트와의 통상조약에 불침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대의를 중시하는 구호기사단과는 마찰이 잦았다. 1522년, 오스만 제국이 로도스 섬을 점령하자 구호기사단은 서쪽으로 쫓겨나 1530년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에게서 몰타를 하사받았고 그 댓가로 몰타의 매를 조공품으로 받았다. 카를5세는 이들이 오스만을 견제할 의도로 섬을 줬지만, 배은망덕하게도 이들은 베네치아 상선까지 털어댔다. 이유는 간단한데 베네치아가 유일하게 오스만과 협약을 맺어 바르바리한테 공격당하지 않았고, 그래서 약탈할 전리품이 많았기 때문. 여러차례 교황으로부터 베네치아 선박을 그만 좀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기사단장과 평의회는 어마어마한 전리품 덕에 이를 깔끔히 무시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베네치아 관리들이 경멸적인 평을 내린 건 이유가 있고, '기사단'이라는 명예로운 호칭 대신 해적이라 불리는건 그만한 행적 때문이다. 오스만이 몰타에 몇 번이나 포위공격을 가한 건 이들의 해적질이 상당한 이유를 차지한다.
1561년 3월 15일에는 '성 스테파노 기사단 (Order of Saint Stephen) 이 창설되었는데, 이들은 구호 기사단보다 한발 더 나아가 이슬람 상선 약탈뿐만 아니라 레반트 지역에 상륙해 지상 약탈까지 벌였다. 토스카나 공국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고. 이들의 해적질이 극에 달했던 16세기 말엽과 17세기 초반에는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 근교에까지 나타나서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로 배를 타고 가는 순례자들을 몽땅 납치하여 서유럽으로 끌고 와 노예로 팔아버리는 짓을 자주 벌였고, 그래서 오스만 제국 정부에서는 스테파노 기사단의 해적질로 인한 치안 불안이 매우 심해지는 바람에 한 때는 메카로의 성지 순례 자체를 금지시키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밑의 바르바리 해적처럼 이들의 전성기도 영원히 가지 못했다. 오스만의 1565년 유명한 몰타 대포위를 견뎌낸 뒤, 1650년대 이후 신항로 개척 등으로 점차 쇠퇴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점령하는 1798년까지 구호기사단이 몰타를 장악했으나 예전의 해적소굴 역할은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16세기 초에서 17초 무렵, 현재 동유럽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에게 쫓겨난 크로아티아인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 우스코크(Uskok)라는 해적이 되어 오스만 제국 해안 지역을 상대로 무자비한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던 일도 있었다.#
2.2.2. 바르바리 해적
무슬림 해적 하면 떠오르는 해적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북아프리카 연안에서 지방 영주들과 결탁해서 수익을 나눠먹는 경우가 많았기에 유럽인으로 치면 사략꾼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아무튼 이들은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 시기에 창궐했으며, 갤리선을 타고 유럽의 무역선들을 공격해 선원들의 소지품을 몽땅 털고 노예로 팔았다.[15] 노예로 팔린 그리스도교도들을 신부들이 건너가 몸값을 흥정해서 돈 주고 사오는 경우도 많았으며, 심지어 유럽 기독교도 일부는 자발적으로 바르바리 패거리에 들어가거나, 어선이나 상선에서 일하다 약탈 희생자가 되어 억지로 해적질을 시작했다가 재능을 발휘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케이스가 있다. 전자는 영국 출신의 프란시스 바니 경이 있고, 후자로는 알바니아 해안 출신의 '무라트 라이스',[16] 이탈리아 어부의 아들로서 붙잡혀 노예 노잡이가 되었다가 선장까지 된 구 이름 '조반니 디오니지', 개명 후 알제의 수석장관 자리까지 오른 '울루지 알리가 있다.
이 바르바리 해적들은 다른 유럽 해적과 달리 길어야 6~7주만 바다로 나갔다고 한다. 노예와 병사들을 하도 많이 싣고 다녀서 식량이 금방 바닥났기 때문이다. 유명 인물 가운데에는 바르바로사 형제. 즉 바바 우르지와 하이르 앗 딘 (유럽식 발음 '하이레딘'으로도 유명) 이 있는데, 형인 우르지는 일개 해적단 두목을 넘어 북서부 아프리카 해안지대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 '알제의 술탄' 까지 자칭할 정도로 광대한 세력을 자랑했다. 그러다가 스페인 세력을 경계하여 오스만 제국의 신하가 되었다가 후에 스페인의 토벌대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전사. 그리고 형의 뒤를 이은 하이르 앗 딘은 지중해를 오스만의 앞마당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혁혁한 전과를 세워, 해적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오스만의 정규 해군 총사령관(Derya Bey[17])에까지 올랐다. 오늘날까지도 '터키 해군의 아버지'로서 숭앙받을 정도.
15세기에 이르러 지중해 무역이 번창하면서 북아프리카 해안에 거점을 둔 바르바리 해적들 역시 더욱 번창했다. 이들은 지브롤터 해협부터 팔레스타인 근해, 심지어 유럽의 북쪽 변방인 아이슬란드까지 휩쓸고 다니며 선박들과 해안 마을들을 습격해 인신매매와 약탈을 일삼았다. 해군의 전통이 없는 오스만 제국은 이들을 적절히 지원하며 국력을 늘려나갔고, 기독교 국가들과 전쟁이 벌어지면 정규 해군으로 써먹기도 했다.
해적질을 해야 할 시간에 해전을 벌이라는 것은 일견 손해로 보이지만, 별로 그렇지 않았던 것이 일단 전쟁이 매일같이 벌어지지는 않는 데다가 해군 역할을 해 주는 조건으로 오스만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총독 직함을 받아 각자의 본거지를 무단 점거한 세력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페인을 비롯해 지중해에 이해 관계가 걸린 국가가 토벌대를 보내도 오스만 정부가 즉시 지원군을 보내는 것은 물론 설령 본거지가 함락당해도 군대를 보내 탈환해주었다.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기독교 국가들은 잠정적인 정복 대상 내지 적국이었는데 해적들이 평소 약탈해서 피해를 입히는 게 싫을 턱이 없었다. 그랬기에 해적질만 잘 하면(?) 해적단의 운영 방식이라든가 편제 등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해적들 입장에서도 손해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알제의 술탄' 을 칭했다가 스스로 술탄을 접고 오스만의 신하로 들어갔던 바바 우르지가 있다.
끝없이 번영할 것 같던 이들 바르바리 해적들은 유럽국가들이 견디다 못해 베네치아처럼 협정을 맺어 안전을 보장하거나, 레판토 해전에서처럼 무력으로 제압하면서 1650년대 이후로는 수그러들게 된다. 결정적으로 신항로가 개척되면서 상선 자체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몰락하였다. 일부 떼거리가 19세기까지 존재했지만 끝내 전성기 시절의 영광은 되찾지 못했다. 최후의 바르바리 해적들은 19세기 유럽 열강들이 알제에 포격을 가하고 14년 뒤에 프랑스가 점령까지 하면서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된다.
2.2.3. 스페인 대해의 해적
신항로 개척과 스페인 제국의 아즈텍, 잉카 정복 이후 해적들의 눈길은 소위 스페인 대해라 불리는 곳으로 쏠리게 되었다. 스페인 대해란 스페인이 정복한 카리브해의 섬들과 멕시코만까지를 일컫는 말로, 각종 귀금속을 싣고 본토로 향하는 스페인의 선박들은 해적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물론 스페인도 모르지는 않아서 이들이 자주 쓴 갈레온 범선은 선원만 200명에 포가 최대 60문까지 장착되어 있었지만 느렸기에 직접 교전을 피하고 장거리 머스킷 저격으로 하나하나 쓰러뜨리는 재빠른 해적선들을 대처할 수가 없었고, 100척에 이르는 대규모 선단을 이뤄서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 특히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이러한 스페인의 선박들을 습격해서 쏠쏠한 수입을 얻었는데 그 뒤에는 엘리자베스 1세의 묵인이 있었고 결국 이는 무적함대의 영국침공을 부르는 한 요소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드레이크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그냥 보물선만 턴 것이 아니라 신대륙의 스페인 식민지들도 직접 쳐들어가기도 했다. 산토도밍고를 덮치기도 했으며, 콜롬비아 지방도 공격했다.
참고로 가장 먼저 스페인 보물을 약탈한 사람들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의 배들인데,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특명으로 북대서양 해안을 탐험하고 1524년에 뉴욕까지 도달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탐험가 조반니 다 베라차노가 그 주인공.
2.2.4. 위그노 해적
땅을 경작하는 농민은 없었다. 다만 모험을 좋아하는 신사, 무모한 병사, 불만을 품은 상인뿐이며 모두 진기함을 열망하고 한탕을 잡으려는 꿈에 부풀었다.
-드 콜리니가 포트 캐롤라인 식민지에 대해 한 말.
신대륙에서 보물을 싣고 오는 보물선을 약탈하기 시작한 건 바로 프랑스 신교도, 즉 위그노 해적들이었다. 1523년 스페인과 프랑스가 전쟁 중일 때 '장 플로랭'이라는 사략선장은 스페인 해안에서 신대륙으로부터 보물을 싣고 오는 스페인선박 3척과 교전해 나포에 성공했는데, 어마어마한 보물을 보고 고무된 그는 다시 사략질에 나섰으나 스페인에 잡혀 해적으로 처형당했다. 프랑스 국왕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시하고 자신도 한몫 챙기기 위해 스페인 선박과 스페인의 신세계 정착지에 대한 공격을 재가하여 태평양에서 스페인 선박과 식민지에 대한 끝없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장 플로랭이 죽자 프랑스 사략선원들은 스페인 대해의 항구를 공격해 보복했다. 푸에르토리코는 보물창고인데 요새도 없었고 하상(河床)에 위치해 취약하여 자주 공격당했다. 이후 프랑스 해적들은 아바나 항구를 급습했으며, 1544년 프랑스 해적의 카르타헤나 공격으로 습격자들은 약탈과 초토화로 한몫 챙겼다. 이후 프랑수아 르 클레, 르 클레의 부관 자크 드 소레 등이 잔인한 공격으로 악명을 높였다.
1550~60년대 말까지 위그노 해적들은 그 악명을 유감없이 떨쳤다. 위그노들은 끝임없이 스페인 대해를 공격했고, 지속적인 신교 탄압 때문에 망명한 신교도들은 플로리다에 개척지를 세웠지만 정착해서 안정화하는 게 아니라 보물을 노리는 자들뿐이었다. 계속된 습격에 진저리난 스페인은 결국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페드로 데 메넨데스 데 아빌레스'를 파견하였고, 그가 1565년 소부대와 함께 위그노 개척지인 포트 캐롤라인을 함락하여 포로로 잡은 프랑스 개신교도를 모조리 처형하고 나서야 위그노 해적들은 종말을 고했다. 대량 처형 후 만들어진 무덤에 데 메넨데스가 세운 게시물이 이들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나는 프랑스 인이 아니라 이단자들에게 이렇게 했노라.
2.2.5. 영국의 해적
대영제국의 건국 과정에서 영국은 많은 해적들을 대거 배출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해군 제독으로 특채될 정도로 사략선 성향이 강한 해적이었다. 그 밖에도 윌리엄 키드, 에드워드 티치, 스티드 보넷, 에드워드 잉글랜드, 찰스 베인, 헨리 모건 등등 먼훗날까지 이름을 날린 영국 해적들도 많았다.
이들의 활동범위는 사실상 전세계 거의 대부분으로, 가까이에는 이베리아 반도 해변부터 시작해서 인도양 근처와 멀게는 카리브 해 일대까지 가리지도 않고 거칠 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조선까지 집적거렸는데, 선조와 광해군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물론 두번 모두 조선 수군에 의해 격퇴당했다. 선조 시기의 사례는 지봉유설에 실려있다.조선을 침입한 영국 해적선. 다만 광해군 시기의 일은 네덜란드 선박이었을 수도 있다. (흥양 해전 문서 참고.)
물론 이들의 말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나 헨리 모건,[18] 헨리 에이버리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비참했는데 특히 윌리엄 키드는 죽은 후 친척들이 끌어내려 묻는 걸 막기 위해 강철 형틀에 넣어져서 교수형을 당했고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죽고 나서도 꽤 오랜 기간동안 일벌백계의 용도로 교수대에 매달려 있었다.
웃기게도 일본 해적과 교전을 벌인 적이 있다.
2.2.6. 버커니어
영국의 제임스 1세가 1601년 자국의 적국선박 나포 허가장을 거둬들이면서 사략선들이 물러간 자리를 버커니어들이 차지했다. 초창기 버커니어들은 프랑스 개척민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돼지와 소를 사냥[19]해서 고기, 지방, 가죽을 지나가던 배에 팔고 살았는데, 맨 처음 거점은 히스파니올라 섬이었으며, 스페인인들이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핑계로 공격해서 동물들을 없애버리자 주변 섬으로 흩어지면서 형제단으로 뭉쳐서 에스파냐 배들을 공격했고, 여기에 죄수, 무법자, 도망노예가 합세해서 수를 불렸다.
시대상 사람 목숨이 하찮게 여겨진 걸 감안해도 당대에도 잔인한 포로고문과 살해로 악명 높았는데, 일례로 프랑스 출신의 프란시스 로요네는 포로를 잡으면 고문하다가 토막내서 죽였고, 로크 브라질리아노는 스페인인 농부를 산채로 불로 구워 죽였다고 한다. 특히 로요네의 경우는 산 채로 포로의 심장을 꺼내서 다른 포로의 입에 처넣었다고 한다. 기반이 무법자인지라 이들을 통솔한 해적 두목들은 잔혹한 규율로 질서를 잡아야 했다.
이 버커니어 출신 중 유명한 해적으로는 자메이카의 총독까지 오른 헨리 모건이 있다.
2.3. 근세 후기
2.3.1. 카리브해의 해적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해적들이다. 서양권에서 '해적'하면 보편적으로 이 카리브의 해적들을 지칭한다.
특히 이들의 활동이 절정에 다다랐던 시기를 해적의 황금기(Golden Age of Piracy)라고 칭하는데, 보통 1690년부터 1730년대까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유명한 해적들이 실제로 날뛴 시기는 1714~1722년 정도로 채 10년도 되지 않는다.
이들의 주 약탈대상은 유럽-아메리카 항로의 상선 혹은 서아프리카에서 카리브해로 노역을 팔아다 거기서 술(주로 럼주)과 설탕을 실어 유럽으로 돌아가는 이른바 노예 삼각무역 상선들이었다. 이 시기를 다룬 수많은 해적 픽션들이 보물선을 노린 것마냥 묘사되나, 실제로는 일상 무역선을 노리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보물선도 아니고 화물선을 털었음에도 먹고살 수 있던 건 이들이 털어댄 화물을 농장주 등 민간인들에게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즉 장물을 민간인들 입장에서 싸게 사들일 수 있어서 분명히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토벌하기는커녕 공생관계가 형성된 것. 해적질로 인한 보험료 상승이 있었지만 이 이득이 훨씬 많아서 감당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 시기 민간 항구나 민간인들이라고 무조건 해적들을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이들이 에스파냐의 공격을 막아주는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검은 수염의 경우 노스캐롤라이나에선 환영받았는데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선 인질극을 벌이기도 했다. 1718년에 항구를 봉쇄해서 시의원 한 명과 네 살짜리 자식을 인질로 잡았는데 약품 한 상자와 바꿨다고 한다. 해적들은 음식과 일용품이 부족했기 때문.
카리브 해의 해적들은 해적의 황금기라는 말에 걸맞게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그 세력이 얼마나 컸던지 바하마 나소(Nassau)를 근거지로 한 해적 공화국이 세워졌을 정도. 이 해적 공화국은 1706년에 형성되어 약 10년 정도 존속하다 1718년 영국 해군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 시대의 유명한 해적으로 검은 수염(Blackbeard)이라 불린 에드워드 티치, 막대한 보물을 실제로 파묻었을 거라고 관심의 대상이 된 캡틴 키드 등이 있다. 당시 해적들이 활개칠 수 있었던 데는 크게 3가지가 이유가 있다. 우선 이전에 바다를 주름잡던 버캐니어들이 쇠퇴하고 자메이카에서 반해적법이 신설되며 자메이카의 해적 활동이 힘들어졌고, 해적들은 카리브해를 떠나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노예선을 노리거나 하술하듯 아예 인도양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또한, 영국에서의 전쟁으로 사략질 할 기회가 늘어났다. 영란전쟁, 영불전쟁 등의 전쟁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적국의 함선을 합법적으로 털 수 있는 기회가 엄청나게 늘어났고, 이는 낮은 리스크로 한탕할 기회가 많아졌다는 걸 뜻한다. 마지막으로, 1714년의 평화가 아메리카의 항해 공동체를 몰락시켰다. 해적들은 평생을 약탈과 바닷일만 하면서 살아가다보니 합법적인 농업에 종사하거나 엄격한 규율이 많은 상선 선원이나 해군으로 일하는 데 익숙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실업자가 되든가, 푼돈 받아가면서 상선 선원이 되거나 혹독한 규율에 시달리며 해군이 될 바에 잡혀죽을 위험이 있을망정 훨씬 자유롭고 운 좋으면 일확천금으로 대박치는 것도 가능한 해적질을 계속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다 이 지역의 정치적 상황도 한몫 했는데, 당시 북미와 카리브해 모두 강력한 정부가 없었고 식민지 총독들까지도 해적들의 장물로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해적 활동을 묵인하기도 했다.
2.3.2. 인도양의 해적
신대륙의 먹잇감들이 줄어들자 해적들은 먼저 아프리카 해안으로 건너가 노예선과[20] 상아, 황금을 노리다가 결국 인도양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보물선단과 동인도 회사의 상선들을 탐내서인데, 마다가스카르는 해적들의 소굴로 악명 높았다. 왜냐하면 이 시기 마다가스카르는 아직 식민지가 아니었고, 항로 중간에서 물과 식량을 보급하는 기착지라서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상선이 매우 많았던 데다가 수에즈 운하가 없던 당시의 유럽의 희망봉을 돌아가는 인도항로와 홍해로 가는 이슬람교도의 순례항로를 덮치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유명한 윌리엄 키드도 원래는 이 인도양의 해적 그 중에서도 헨리 에이버리를 붙잡으라는 임무를 받았다. 동인도 회사의 상선을 붙잡아서 약탈할 때 향신료는 크고 팔기 어려워서 그냥 내버렸는데, 하도 많이 버려서 1720년의 마다가스카르 해변은 후추와 정향이 무릎 높이까지 깔려 있었다[21]고 표현할 만큼 폐기된 향신료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일종의 공기업인 동인도 회사를 공격하고 주요 고객이던 인도 무역까지 무너뜨리자 영국에서는 이제 국가적으로 해적 소탕에 나서게 되었다.
유럽 해적들도 유명하지만, 상선 노리는 건 유럽인만이 아니어서 아랍인이나 인도인 해적도 이 당시 극성을 부렸다. 몰락하는 무굴제국의 쇠퇴를 틈타서 유럽에서 인도로 오는 동인도회사 상선을 잡아다 약탈하는[22] 앙그리아 가문의 칸호지 앙그리아같은 케이스도 있었다. 이들 해적 가문은 무려 반세기 동안이나 동인도회사의 토벌을 격퇴하면서 번영을 누려, 지금도 인도 현지에서는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2.3.3. 미국의 해적
식민지 시절에도 이미 카리브해의 25%가 북미 출신일 정도로 해적들이 많았고, 독립 후에도 해적질은 계속되었다. 미국 해군은 함대가 34척밖에 없었지만 그의 13배에 달하는 미국 사략선들이 영국의 무역로를 무너뜨려 그 위력을 과시했고, 1812년 미영전쟁이 터지자 또 사략선들을 쓰기도 했다. 이 사략선들은 쌀, 소금같은 화물도 빼앗았지만 상아와 황금도 약탈했다. 이 시기 볼티모어가 사략선 건조로 유명했다. 일부 해적선들은 몰래 노예거래를 일삼기도 했으며, 몇몇은 막대한 사회적 책임(?)과 군공 덕분에 사면되기도 했다. 한때 뉴올리언스 고용의 10%를 책임지고 도시방어를 한 공으로 사면장을 받았으나 해적질이 더 좋아서 거부하고 나갔다가 행방불명된 장 라피트 형제가 대표적.
그러나 미영전쟁이 끝나고 1820년대 이후, 노예무역이 불법화되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급격히 사라졌다. 1820~30년대, 플로리다 해안을 비롯해 당시 아직 미 영토가 아니던 카리브해 서쪽 해안지대와 멕시코 변경에 소굴이 들끓어 소규모 해적이 존재했으나 미 동해안과 카리브해에 미국이 초계함을 띄우고 해적소굴을 소탕하면서 금방 소멸된다. 이런 잡다한 해적은 중남미 해적으로 계승된다.
미국의 해적 중 유명인물로 존 폴 존스,[23] 장 라피트, 조너던 해러든이 있다.
2.4. 근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 혁명이 전개되자 바다에서도 증기선, 철갑선같은 선박이 등장하는 등 근대화되기 시작하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부터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정치적으로 안정된 상황이 지속된 유럽에서는 섬이 많아 해안선이 복잡한 영국과 지중해 부근을 제외하면 이전에 비해 활발한 활동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최후의 범선 상선이 1930년대까지 있을 만큼 대다수의 민간 선박은 여전히 클리퍼와 윈드재머같은 범선 위주였으며, 아직 발전이 한창 진행중인 아메리카 대륙과 서구 열강들의 놀이터로 전락한 아시아는 치안 공백이 발생하며 이러한 곳에서의 해적활동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남중국해, 동남아시아 연안, 미국 동부, 영국 근해, 지중해, 카리브해 등지에서는 여전히 해적행위가 빈번히 일어났는데, 대서양에선 장 라피트, 페드로 길버트 등의 해적들이 멕시코와 미국 동부를 약탈했고, 남중국해에선 십오자(十五仔/Shap-ng-tsai), 서아보(徐亞保/Chui A-poo), 장보자 등이 악명을 떨쳤다.
한편으로는 유럽과 미국을 위협하는 해적들이 대다수 토벌되면서 그 위험성을 사람들이 잊기 시작하고 자유로움만이 부각되자 근대 문학작가들의 손에서 모험가 또는 악당으로서의 해적의 이미지가 정립되기 시작하는데,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에서 등장하는 롱 존 실버, 제임스 매슈 베리의 피터 팬에 등장하는 후크 선장 등이 대표적이다.
2.4.1. 중국의 해적
근대에 악명을 떨친 해적들은 주로 남중국해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청나라가 아편 전쟁 등 지속된 서구 열강들의 침탈로 쇠락하면서 민생이 불안정해지고, 치안 공백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범죄의 길로 빠지는 것을 통제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청나라가 매우 거대한 나라다 보니 해적질도 그에 걸맞은 규모를 자랑했다는 것으로, 남중국해의 해적들은 적게는 수십~수백 척, 많게는 천여 척에 이르는 정크선을 소유하여 말 그대로 해적함대를 이끌었다. 이들은 당시 상하이, 홍콩 등을 드나들던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상선들을 습격하며 영국 해군의 골머리를 썩혔다. 때문에 19세기 내내 영국은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단독이든 청 해군과 합동이든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이런 중국 해적들은 청나라가 국가 막장 테크를 타는 걸 틈타서, 인근의 조선이나 일본으로 가던 청나라 상선들을 약탈하거나,[24] 외국 선박을 사칭해서 밀무역을 하기도 해서 정치적 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예로 아편 전쟁 시즌 2를 찍으면서 청나라의 패배로 결말을 맺은 애로호 사건도 청나라 조정이 파견한 관리들이 중국 해적들이 영국 상선으로 행세하며 밀무역하던 것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서 벌어진 일이었다.
2.4.2. 쇠퇴
인도 무역로가 위협받아 반해적 여론이 들끓고, 최후의 사략선 전성시대인 '사략선 시대'(프랑스 혁명~미영전쟁기)가 끝나자 더 이상 해운 강국들은 사략선이라는 명목으로 해적을 이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도리어 해적들은 국고 손해만 일으키고 국가 이미지만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쓰레기로 인식하기 시작했다.[25] 따라서 강력한 해적토벌용 함선을 건조해서 악명 높은 해적 떼거리를 토벌하기 시작했다. 또 기술 발전도 한몫 했는데 증기선과 철갑함이 개발되고 이를 각국 해군에서 적극적으로 채용하면서 전투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범선에 의존하는 해적들이 많다보니 악명높은 해적들은 대부분 19세기 중반쯤 되면 씨가 말랐으며, 결정적으로 사략선을 금지하는 파리선언이 발효되면서 치명타를 입었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 적어도 유럽과 북미 출신 해적들은 거의 토벌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거의 모든 대륙과 바다는 물론 심지어는 하늘까지 전쟁터가 되었던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대부분의 국가에선 해적이 사실상 소멸하였다.
2.5. 현대의 해적
항공기의 출현 및 레이더나 무선 통신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해적이 실존하기 힘들 것 같으나, 현대에도 해적은 존재한다. 사실 이전과 비하자면 기술의 발달로 '항공 수송'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비중만 조금 줄어들었다 뿐이지, 여전히 해운이 항운보다 압도적으로 싸게 먹히기 때문에 해상 수송은 아직까지도 절대적인 중요성을 자랑한다. 현대 사회가 이룩한 부와 물질의 총량증가를 생각하면 현대 사회에서 해상 수송은 과거보다 훨씬 중요해졌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물론 항공도 하이재킹이라는 해적질 비스무리한 것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항공기 특성상 범죄자 의지대로의 통제도 선박보다 어렵고 공항과 기내의 보안도 더욱 삼엄하기 때문에 대부분 단발성에 그치며 해적처럼 지속적이고 조직화된 전문적 활동을 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아직 항공기는 해적 정도의 점조직이 운용하기에는 매우 비싸고 구매 조건도 까다롭다. 대형 여객기 같은 경우는 만에 하나 빼앗아온다 한들 당연히 정부가 통제하는 활주로에 내릴 수도 없으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적의 화력과 기동성도 기술 발전에 따라 개선되어, 현대의 해적들은 고속 보트에 AK-47이나 RPG-7 등의 화기, 그리고 GPS 등 항법장비와 현대식 무선통신기 등으로 무장하고 기습공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해적질을 하고 있다. 이러면 대형 상선이라도 쉽게 점거당하기 때문에 여전히 해볼 만한 수법. 오히려 현대 상선들은 최소한의 무장을 했던 근세와 달리 무장이 없다시피 하기에 더 쉬운 측면도 있다.
상선이 무장하면 최소한 총기류를 싣고 있다는 의미인데, 그렇게 되면 외국 항구로 입항하기 까다로워지고 외교적인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또 무장한 상선을 통해서 위험한 총기나 무기를 밀수할 수도 있는 등 단순히 얼마 남지 않은 해적을 잡겠다고 상선에 무장을 하면 훨씬 더 큰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테러리스트들 때문에 민항기에 플레어나 레이저를 달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이런 방어용 무장들 조차 위의 외교, 안전 문제 때문에 제대로 도입되지 않고 있다.
특히 해적들이 있을 줄 알면서도 들어가야만 하는 아라비아 만이나 말라카 해협 등의 지역은 지금도 해적들이 들끓고 있다. 특히 말라카 해협은 중동의 석유와 동아시아 국가의 무역상품이 반드시 지나갈 수밖에 없는 요충지로 언제나 상선들이 바글바글한 곳이다. 따라서 이들을 노리는 해적들도 바글바글.
오늘날에는 해운이 번창한 말라카 해협과 남중국해 일대에서 해적들이 자주 출몰하곤 하며, 악명 높은 소말리아 근해 역시 해적들이 날뛰는 지역이다. 말라카 해협의 해적은 싱가포르 해군이 엔듀런스급 상륙함 갑판에 MLRS들을 방열해 놓고 해적 기지를 그냥 쓸어버린 적도 있을 만큼 골칫거리였으며 2000년대 초반까지도 한국 상선이나 원양어선들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국내 취재진이 동남아 현지를 취재해봤더니 '실종'된 선박들이 버젓이 중고선박 매물로 나돌고 있었을 정도다. 나이지리아 근처 기니만 해적 역시 상당히 날뛰고 있다.#
그 수는 적지만 하와이 등 태평양의 유명 관광지에서는 폴리네시아계의 태평양 해적도 꾸준히 활동하여 골칫거리다. 이들의 목표는 경비 사각지대에 들어선 관광객의 요트다. 미 해군이나 해안경비대가 코앞에 있는 연안 해적인데다가 주로 부유한 관광객이 요트 승객이니만큼 굳이 몸값을 요구하기보다는 현장에서 바로 장신구 등 관광객이 소지한 귀중품이라거나 고급 주류, 장식품 등 요트에 실린 고가의 화물을 강도질하거나 아예 요트 자체를 탈취하는 간 큰 짓을 벌이기도 한다. 항해 기술이 없는 관광객이 현지에서 항해사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 위장한 해적을 고용한다면 그대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직행. 필요하면 일부러 저항하는 척 하다가 부상을 입는 자해까지 하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철저히 하기때문에 적발이 굉장히 어렵다고. 고래 관찰 등을 이유로 먼 바다까지 나온 유람선도 항로가 뻔하기 때문에 보안이 취약한 작은 유람선을 나포하여 관광객의 금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태평양 망망대해에서 원양어선은 해적 대비가 없다시피하여 위치만 정확하면 아주 쉬운 목표가 되는데, 선원의 금품이나 몸값보다는 주로 장비나 아예 선박 자체를 노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2010년대 중후반 들어서 경기가 악화되면서 카리브해 지역에서도 해적들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과거와 달리 미 해군의 힘이 워낙 세서 함부로 미국 영해에서 해적질을 했다간 바다의 거름이 될 테니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의 여러 섬들을 근거지로 마약 밀거래나 관광객을 상대로 한 강도질 정도로 연명하는 중.
2023년 12월 경부터는 예멘의 최고정치위원회 소속 군벌 후티 소속 대원들이 민간 선박을 납치하는 해적질을 벌이고 있다.
2.5.1. 소말리아의 해적
각국의 해양세력으로부터 체포되는 소말리아 해적들.
위에서부터 영국 해군, 미국 해안경비대, 영국 해병대, 대한민국 해군에게 항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21세기 들어서 역시 해적질로 가장 유명한 곳은 소말리아. 완전 헬게이트가 열린 상황이다. 일단 이들의 거점인 소말리아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라서 처벌을 받지 않고,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려면 싫든 좋든 배들이 이 지역을 지나가야만 하는 까닭에 해적이 들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선들도 무장한 보안요원을 싣고 간다든지 하였으나 무장 상선은 입항을 허가하지 않는 항구들이 많아서 간단한 총기로 무장하지도 못하는 비무장 상선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궁여지책으로 물대포 등의 비살상 방어장치를 배에 설치하기도 하지만 해적들을 막기에는 역부족. 결국 해적들의 위협이 점점 커지면서 일반 상선은 이들에 대적하기가 힘들어졌고, 아예 소말리아 해적들이 들끓는 소말리아 해역을 피해 수에즈 운하를 통하지 않고 다른 방면을 통해서 지나가는 배들도 늘어났다고 한다. 예를 들면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기 전처럼 희망봉을 돌아서 간다던가...
대한민국에서도 아덴만 여명 작전의 발단이 된 삼호 주얼리 호를 납치한 세력으로 유명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계속되는 해적질에 열받은 각국이 자기들의 해군 원정함대를 끌고 토벌과 구조작전을 벌이는 단계에 이르렀고, 연합해군이 꾸준히 소탕작전을 벌인 덕에 2017년 경부터 해적의 공격사례가 크게 감소하기 시작해 2019년 이후로는 소말리아 해적들의 공격 건수가 0에 수렴할 정도로 안정화되었다.
2.5.2. 기니만 해적과 현재진행형인 해적들
그런데 문제는 희망봉을 넘어가는 길목에도 아프리카 해역 등에 해적이 존재한다는 점. 해양수산부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2020년 3분기까지 동아프리카의 모잠비크와 서아프리카의 기니만, 동남아시아의 싱가포르 해협과 필리핀의 마닐라만 부근, 남아메리카의 페루# 등 전세계 해적 빈도 수가 2019년도 대비 약 11%나 증가했다고 한다. 특히 기니 옆 기니만에서 활동하는 기니만 해적들이 악명 높은데, 2021년 1분기 동안 발생한 해적 공격들 중 무려 43%가 이들의 소행이었다고 한다.# 기니만 해적들은 원래 2011년 즈음부터 존재해왔으나,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묻혀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가 소말리아 해적이 소멸하면서 아프리카 해협의 새로운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다만 기니만 해적들은 2021년 초기까지는 악명을 떨쳤지만 역시 각국의 해군에 의해 그 세력이 많이 위축되었으며, 이들 외에 해적들의 습격이 현재진행형인 지역으로 특히 싱가포르의 말라카 해협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말라카 해협은 파나마, 수에즈에 이어 통행하는 선박 수가 많고 세계에서 3번째로 국제 선박 운송량에 크게 영향을 주는 곳이라고 할 만큼 선박업의 요충지라 볼 수 있으며, 해적들의 공격에 그만큼 민감하게 반응하는 장소들 중 하나이다.
2.6. 동아시아의 해적
지금껏 주로 유럽 쪽의 해적을 설명했지만, 동아시아라고 해서 해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대표적인 해적은 왜구. 고대부터 빈번히 신라를 침략해 약탈하고 고려 말과 조선 시대에 이르는 긴 시간동안 한반도와 중국 남부 해안지방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 당시 해적들은 대부분 왜(일본)지방의 해적이었지만, 중국에서 기원한 해적도 있으며 통일신라의 해적인 신라구[26]는 수시로 대마도나 혼슈에 상륙해 활약하여 일본의 여러 기록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여진족 위주의 해적인 도이도 있었다.[27] 규모가 큰 해적들은 수십 수백척씩 선단을 이끌고 호령했다. 특히 명말 청초의 혼란기에는 명나라의 쇠퇴 + 일본의 전국시대 + 서양의 대항해시대가 폭발적으로 맞물리면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였다. 명나라 시기에 해적들 중에서는 리마홍이라는 인물이 중국 남부를 약탈하다가 스페인령 필리핀의 루손 섬을 약탈하다 벌어진 두 차례의 마닐라 전투도 유명하다. 또한 해적왕 정지룡 같은 인물은 타이완을 정복한 아들 정성공의 기반을 마련해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청이 대만을 정복하고, 동아시아 국가들이 쇄국 정책을 펼친 이후에는 기세가 주춤해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서양과의 교역이 커지며 다시 중국의 해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청나라 해군도 반정부 성향의 중국 해적들과의 교전에서 연패를 면치 못했다고 한다. 이 중국 해적들은 광둥의 해변 마을을 습격해서 여러 마을을 파괴하고 수천 명의 주민들을 살육하고 노예로 잡아가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남중국해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정일수가 있는데, 이 사람의 선단이 영국, 포르투갈 등 당대의 해양 강국들의 해군력을 능가했다고 한다. 그녀의 선단은 무력이 아니라 황제가 사면제의를 내놓는 등 정치공작을 통해서야 겨우 해산되었다. 청나라도 못 억누른 막대한 선단을 자랑하는 이들 중국 해적들은 청나라의 요청을 받은 서양 열강들이 나서서 185~60년대에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갈아버리고 나서야 겨우 잠잠해졌다.
허나, 남중국해와 위의 말라카 해협은 여전히 해적소굴이다.
1704~1705년 무렵 숙종실록을 보면 장비호(張飛虎)라는 청나라 해적이 10여 만 명의 무리에 수백 척의 선단을 거느리며 청나라에 맞섰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2.6.1. 한국사의 해적
한국 역사에도 해적들이 등장한다. 고대 한국에서 처음 등장한 해적들은 오늘날 만주 및 연해주 일대에 분포했던 읍루족들이었다. 이들은 활을 잘 다루는 수렵 민족이었는데, 배를 타는 솜씨도 꽤 좋아서 뱃길을 통해 북옥저 일대를 약탈하고 다녔다. 그래서 옥저인들은 아예 약탈이 심한 여름에는 해안가를 떠나 산골짜기에 거주하다가, 겨울이 되어 해안가가 얼어붙어 읍루족들이 배를 몰기 어려워지면 다시 해안가로 내려와서 살곤 했다고 한다. 그 외에 신라의 경우에는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비문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수차례 왜인들의 약탈에 시달렸다.[28]
이후 통일신라 말 ~ 후삼국시대는 당나라의 해적들과 신라구들이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기승을 부렸다. 중국 당나라의 해적들은 하대에 접어들어 신라가 무너져가는 틈을 타 신라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팔기도 하였다. 신라의 장보고는 이러한 해적들을 토벌하고 동북아 일대의 교역권을 장악하여 강력한 해상 세력가로 성장하였다. 한편 신라구는 나말여초 후삼국시대의 혼란기를 틈타 한반도에서 기승을 부린 해적 집단으로, 일본 측 기록에서 따르면 일본의 규슈와 쓰시마섬 등을 약탈하였다. 한국 측 기록에도 드라마 태조 왕건 덕에 "수달"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능창 등 후삼국시대의 근해 해적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후삼국시대 이후에는 고려에 편입되었다.
고려 전기에는 나라가 어느정도 평정되면서 한반도 내에서의 해적 행위는 거의 근절된 듯 하지만,[29] 여진족들이 배를 타고 고려의 동해안 연안을 약탈했다. 심지어 우산국은 여진족 해적의 침공으로 멸망당하기도 했을 정도.#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까지는 왜구들이 한반도의 해안가를 위협했다. 왜구는 고려말까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기승을 부렸으며,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조선 초까지 이어졌다. 이에 고려와 조선은 해군력을 키우고 무기개발에 힘써 왜구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다. 덕분에 조선의 해군력은 연안 전력으로만 봤을 때는 당대 최고 수준을 유지했다. 주력선인 맹선의 경우 원해로도 나아가는게 가능해, 버마, 타이에서 사신이 방문했을때 왜구로부터 보호를 요청해 일정거리까지 호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맹선은 함대함 포격전에 취약했고, 명종 기에 판옥선이 개발되면서 빠르게 포격전 중심의 판옥선으로 교체되었다.
뿐만 아니라 명-청 교체기 때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군과 명나라 유민들이 사실상 해적 행위를 하여 조선의 골치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조선 시대에도 꽤나 오랫동안 해적들이 활동했었다. 1487년 11월 19일자 <성종실록>을 보면, 평안도 의주 출신의 조선인 이말건(李末巾)이 중국 요동으로 도망쳐서 해적이 되었으며#, 1704년 5월 5일자 <숙종실록>에서 제주도의 바다에 무려 50여 척이나 되는 빠른 배들이 나타나 관군의 함대를 포위하고 돌과 화살을 비처럼 쏘아대어 관군이 크게 다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현대에 들어서도 중국의 불법어선들이 동/서해를 가리지 않고 수자원을 마구잡이로 남획하는것도 모자라 한국 어선, 해경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 이들을 비유적으로 해적 취급하기도 한다.
3. 해적이 되는 이유
사실 미디어의 영향으로 졸리 로저를 깃발에 그리고 바다를 떠도는 '전업 해적'의 이미지가 매우 강하지만, 사실 전업 해적은 거의 없다고 봐야할 정도로 대부분의 경우는 겸업을 했다. 근세까지의 바다는 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었고, 상황에 따라 군인, 해적, 상인을 넘나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방금까지 상인이던 이들이 근처 배가 힘이 약하다 싶으면 해적으로 돌변했고, 항구로 상륙하면 바다에서 털었던 물품을 상인으로써 평화롭게 매각하는 일은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이런 이들이 국가에 징병되면 그대로 해군이 된 것이었다. 물론 너무 악명이 높아져 현상금이라도 걸리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보통은 자신이 국적을 둘 나라만 적대하지 않고 있으면 다른 나라들의 배나 도시는 털어도 대부분 별 탈이 없었다. 심지어 군주가 그것을 직접하거나 장려하기도 했으며, 이것은 고대부터 중세, 근세까지 전부 마찬가지였다. 사략선의 개념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때문에 '하층민이 대부분인 뱃사람들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어도 한탕 해보고 싶은 마음에 선상 반란 일으키고 해적이 되었다' 는 식의 '전업 해적'의 케이스는 매우 드물며, 이런 종류의 진짜 순수 무법자 전업 해적들이 활발히 활동한 것은 위 근세 후기 카리브해 해적 파트에서 서술했듯 1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의 경우, 그 유명한 헤르메스 신이 도둑과 상인과 나그네의 신인 것에서부터 드러나듯 저 셋은 실제로 경계가 모호했고 그것은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그리스의 강력한 아테네 함대는 평소에는 상인 겸 해적으로 활동하다가 전쟁이 나면 징집된 이들이었다.
용병 항목의 중세 파트에서 서술하듯 용병이 일이 없을 때는 산적이 되는 일이 흔했고 용병을 따지고보면 힘 좀 쓴다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것이듯, 반대로 해군도 일이 없을 때는 해적이 되었고 바다에서 좀 싸운다는 어중이떠중이들을 고용한 것이 곧 해군이었다. 1305년 부터 활동한 존 크레비(John Crabbe)는 플랑드르 출신이었는데, 처음에는 영국 배들을 털다가 스코틀랜드와 영국이 전쟁이 나자 스코틀랜드에 고용되어 해군이 되었고, 전쟁 상황이 영국에 유리해지자 줄을 갈아타서 다시 스코틀랜드를 털고 영국에 고용되어 해군이 되었다.
심지어 이탈리아 일대는 도시국가의 지도자가 직접 이런 행위를 하기도 했다. 알라마노 다 코스타(Alamanno da Costa)는 제노바 출신 상인이었는데 피사 공화국을 털어대다가 얻은 무구와 병사와 재보로 시라쿠사 백작까지 오른 이다. 또한 몰타 역시 그곳의 군주들은 해적질을 해대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구호 기사단 역시 로도스 섬에 있을 적 이슬람에 대해 엄청난 해적 행위를 해댔다. 구호 기사단 망한 뒤 몰타를 내어준 건 해적질을 앞으로도 계속하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30]
근세에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해 영국의 제해권을 빼앗아온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는 해적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 해적이 약탈해서 상납한 귀중품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제독으로 임명했다. 이런 사략선은 근세에 무수히 많았다. 유럽에게 악명 높았던 바르바리 해적 역시 그냥 해적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영주나 군주들이 해군으로 임명한 이들이었으며, 나중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각자의 본거지를 영지라는 형태로 보장받고 총독이 된 자들이었다. 대항해시대로 칭해지는 시대에 유명한 해적들이 무수히 나오는데, 찾아보면 거의 다 사략선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거나 원래는 상인이었던 사람이 많다.
일본의 왜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중앙 정부인 조정에서 공인한 것은 아니었어도, 적어도 번의 영주들이 운용한 정규군인 경우가 많았다. 시마즈, 쇼니 가문이 특히 유명했다.
4. 해적의 약탈품들
해적이 몰락한 19세기 이후로 나온 픽션의 영향으로 많은 이들이 해적들이 금은보화만 노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해적들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털었다.
금, 은, 금은화, 보석 등: 말 그대로 대박.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출발한 보물선이나,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 사치품을 실은 동인도 회사 상선을 한번 제대로 잡으면 떼돈을 벌 수 있었다.
선박 그 자체: 의외라 할 수 있으나 예나 지금이나 선박은 더럽게 비싼 몸이다. 일반 해적이라면 자기를 반기는 우호적인 항구에나 가야 처분할 수 있지만, 사략선은 나포한 적선을 그대로 자국 항구로 가져와 팔아치우면 큰 수익을 가져올 수 있었다. 19세기에 증기선과 철갑선이 나오기 전까지는 민간선박이나 군함이나 별 차이가 없었기에, 설계만 괜찮다면 얼마든지 나포한 배를 적절히 개조해서 자기가 써먹을 수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포선박을 자기 기함으로 써먹은 유명 해적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사략꾼과 해적들이 졸리 로저 등 협박과 기만술로 전투를 가급적 피해서 항복을 받아내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가 파손될수록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31]
승객의 소지품: 승객의 돈이나 반지, 귀걸이, 코담배갑 등의 귀중품들. 나포한 배의 화물이 시원찮으면 승객의 물건이라도 털어야 했다. 사략선원들은 원칙적으로 영업이 끝나고 귀향해서 결산할 때 노획품을 나눠야 했지만, 이런 자잘한 잡동사니들은 예외였기에 최대한 털어먹으려고 혈안이었다고 한다.
돛과 밧줄: 범선 시대의 선원이라면 누구나 돛과 밧줄을 고쳐쓸 줄 알았지만 해적들은 그냥 새 것을 뺏어 쓰는 걸 더 좋아했다. 당연히도 이런 걸 약탈품으로 대체하는게 직접 부품을 조달해서 고치는 것보다 싸게 먹혔기 때문이다. 바솔로뮤 로버츠와 그 일당이 킹솔로몬 호를 붙잡았을 때 짐은 모조리 바다에 버리고 밧줄과 돛만 훔쳐갔다고 한다.
사람: 인신매매가 흔하던 과거에 사람도 그 예외가 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제국 시대에도 붙잡은 사람을 노예로 파는 짓이 성행했고, 바이킹들은 기독교 신자를 붙잡아 가서 노예(스랄)로 부렸다. 바르바리 해적들 같은 경우 기독교 국가들의 사람들을 수없이 잡아가는 통에, 헌금을 모아 몸값으로 지불하고 붙잡혀간 사람들을 되찾아 오는 구출기사단이나 구출 수도회 등이 창설되기도 했을 정도였으며, 흑인 노예 무역이 성행하던 17, 8세기에는 해적들이 나포한 노예선을 붙잡아 인질로 삼거나 아예 해적들이 노예상이 되기도 했다.[32] 반대로 노예상이 해적이 될 때도 있는데 그 예시가 바솔로뮤 로버츠이다.
의약품: 열악한 당시 의학과 위생 때문에 약을 모아놓은 찬장 같은 것은 탐나는 약탈품이었다. 검은 수염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의회 의원 하나와 그의 네 살박이 아들을 인질로 잡고 약품 한 상자와 바꾸었다.
도둑놈들이 약품만큼 탐낸 물건은 없었다. 놈들은 모두 천연두를 앓고 있었다.
1720년대 한 해적에 당한 희생자의 증언
술, 커피, 차, 향신료 등: 19세기 이전 커피와 차는 매우 비싼 사치품이라서[33] 역시 인기 있는 약탈품이었지만, 해적들은 포도주나 브랜디 등의 술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오직 바솔로뮤 로버츠만이 술보다 차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향신료는 해적들이 약탈해봤자 정상적인 루트로는 팔 수가 없어서, 상술했듯 약탈한 향신료를 그냥 폐기처분한 경우도 많았다.
항해일지, 지도첩, 항해 도구: 소나와 GPS가 없던 과거에 함부로 해안에 배를 댔다가는 좌초되기 십상이었으므로 측량한 해안을 기록한 지도첩은 해적이라면 필수품이었다. 제대로 된 항해 도구들도 매복에 필요했으므로 약탈 대상이 되었다.
권총 등 무기 및 화약: 해적질에 필요했기에 당연히 좋아한 약탈품들이었으며, 특히 보석으로 장식한 도검이나 정밀하게 만들어 상류층에 팔기 위해 만든 고품질 무기는 비싸게 팔아치울 수 있어서 선호되었다.
5. 해적의 구분
서구권 해적은 버캐니(프랑스 식으로 부카니에(boucanier). '부랑자'라는 뜻도 있다고 함), 파이러츠, 커세어(프랑스 식으로는 코르세르(corsaire)) 등으로 불리며 각기 다른 점이 있다.
'파이러츠(Pirates)' 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사략선들이 사략선 면허기간이 중지되자 해적이 된 것으로, 카리브해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일부는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활동범위를 넓히기도 했다.
'사략선(Privateer)' 은 자국 정부에 선박나포허가장인 "사략면장"을 발급받아 이를 기반으로 사략질을 해대던 자들로, 원래는 상당한 제한이 있었으나 대부분이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후기에는 장삿속이 끼어들면서 사략선장들이 이익 내려는 압력에 시달렸기에 아무 상선이나 약탈해서 해적취급받는 일이 많았다.
'버커니어(Buccaneer)' 는 프랑스계 개척민들이 주축이 된 해적으로 북미 식민지에 근거지를 갖고 있었고, 원래는 강에서 활동하던 수적이었으나 활동 범위가 바다로 확대된 것. 이들은 주로 정글에서 돼지를 사냥하며 현지 인디오들한테서 비법을 전수받은 Boucan이라는 이름의 훈제고기 보존방식을 지켜왔는데 이 이름에서 버카니어가 나오게 되었다. 이들은 또한 총신이 긴 라이플로 저격을 잘 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고. 사략선이 해적화된 파이러츠와는 달리 기반이 되는 배가 없었기에 이들의 초반 전략은 작은 배나 뗏목을 가지고 해안가 연안에 정박한 상선에 몰래 다가가서 저격병들이 선장이나 갑판장 키잡이 등 간부들을 쏘는 동안 다른 동료들이 기어올라가서 희생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키에다 쐐기를 꽂고서 생존한 선원들한테서 항복위협을 받아내어 배를 무력화 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점점 더 좋은 배를 탈취해나간 뒤에 바다의 버카니어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
'커세어(Corsair)' 는 지중해에서 활동한 알제리, 모로코, 리비아 등지의 이슬람계 해적으로 이슬람 왕조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전시에는 오스만 제국 등의 이슬람 왕조 해군의 주축이 되었다. 이슬람 해적만이 아니라 똑같이 이슬람 선박을 습격하는 성 요한 기사단(몰타 기사단)과 같은 기독교도 해적도 커세어라고 불렀다. 미 해군 전투기 F4U(2차대전), A-7(현대) 및 프로토스 제공함선 커세어의 유래. 프랑스 사략꾼, 특히 생말로 등 브르타뉴 해안 출신으로서 주로 영국선박을 털던 해적/사략꾼들도 똑같이 Corsair라 부르며 지중해 무슬림 해적들과 구분하기 위해 French Corsair라 부른다.영문 위키백과
'왜구(わこう)' 는 전기/후기 왜구로 나뉘며 일반적으로 일본에 근거지를 둔 해적들을 가리킨다. 전기 왜구는 당시 혼란에 빠졌던 한반도와 중국에서 군사력을 키워 토벌과 격퇴에 성공하고 무역으로 당근과 채찍 정책을 펼쳐 잠잠해졌으나, 후기 왜구는 명나라의 해금정책으로 살길이 없어진 중국인들이 대거 가담하기도 하였다.
버캐니어와 파이러츠는 배 위에서 당대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평등사회를 이뤘고 인종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약탈 행위 후 공정한 분배를 하고 선장을 투표로 임명/교체하는 등 민주적인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커세어는 선장 자신이 이슬람의 토호였고[34], 부하들을 거의 노예 다루듯이 다뤘다고 한다. 또 이들은 수입의 일정 부분을 자신을 후원하는 이슬람 왕조에게 바치는 일종의 사략선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동아시아의 해적은 대부분 왜구였다. 왜구의 악명이 워낙 높아서 중국인 해적 등이 스스로 왜구로 위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왜구가 아닌 해적 중에도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친 경우가 있는데, 일단 신라 말에 국가 혼란 속에서 등장한 신라구가 있었고, 또한 고려시대에는 여진족이 해적질을 많이 해 울릉도 등지는 완전히 초토화되었다고 한다.(여진구)
동아시아에서 왜구 이외의 해적이라 하면 단연 베트남/중국 계열 해적. 베트남~중국 광동성 국경의 치안 공백지역에 거주하며 열심히 양국의 민간인과 상인들을 약탈했던 부류로 특히 베트남 남북조를 통일한 떠이선 당은 이 해적들을 이용하여 청나라를 견제하기도 했다. 그러다 청나라에서 해적들에게 해적 행위를 관두는 조건으로 신변과 재산 보장 및 관직을 수여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참고로 얘들이 동료를 모으는 방식은 다름아닌 동성애였다고 한다.
6. 민주적(?)인 모습들
1. 누구나 중요한 사건에 대한 투표권이 있으며 아울러 신선한 식량이나 독한 술을 똑같이 나눠 가질 권리가 있다.[35]
2. 아무도 돈내기 카드 놀이나 주사위 놀이를 해서는 안 된다.
3. 저녁 8시면 모든 등불을 끈다.
4. 머스킷 총, 권총 및 단검은 항상 깨끗하게 유지하고 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간수한다.
5. 여자나 아이를 배에 태우지 않는다.
6. 전투 중에 배를 떠나면 죽이거나 무인도에 버린다.
찰스 존슨이 해적에 관해 쓴 18세기에 쓴 책에 소개된 해적의 규율 예시
위험하고 거칠며 아무 규율없이 제멋대로인 생활을 한 무법자 이미지가 강하지만, 놀랍게도 집단 내의 규율은 꽤나 엄격하고 현대 기준으로 봐도 민주적이었다. 이런 것들을 해적의 규율(Pirate Code)이라고 불렀다. 세부적인 내용은 해적선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엄격하고 민주적인 규율을 강조하였으며, 배라는 특성상 다른 나라 선박에도 적용되었다.
민주주의 지수만 놓고보면 21세기 기준으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많은 해적들이 일종의 민주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한 번 선장이 된다고 해서 죽거나 은퇴할 때까지 직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선장처럼 선원들도 당연히 난폭하고 거칠었으므로 재깍재깍 말 잘 들을 거란 보장은 없었기에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파워로 억누르던가, 존경심을 받을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던가, 그도 아니면 선원들한테 인기가 많아야 선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선원들과 의견차이가 보이는 식으로(예로 항로결정을 하는데 선원여론과 선장의견이 다른다든지) 선원들 인망을 잃으면? 선장이 찍어누르고 독재하는게 아니라 부하들이 불신임 투표로 해임해버린 뒤 선거로 선장을 새로 뽑는다. 바솔로뮤 샤프가 1680년에 해적선장이 된 것도 이런 투표제도에 의한 것이다. 항로를 못 결정하면 역시 투표로 결정했다. 투표권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36] 선원을 받을 땐 국적도 신분도 인종도 가리지 않았다.[37] 카리브 해의 해적 선장들은 도망노예도 받아들여[38] 당당한 선원으로 대접해 줬다고 한다. 심지어 바솔로뮤 로버츠 떼거리는 붙잡혀 재판을 받을 당시에 백인 187명, 흑인이 75명으로 무려 1/3이 흑인이었다고 한다. 이 흑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재판으로 다시 노예가 되어 팔려나갔다.
또한 먹잇감을 발견해서도 선장은 그저 습격제안을 할 수 있을 뿐 최종결정은 혼자 못하고 선원 투표를 해야 했으며, 그 외에도 매체에서 보이는 독불장군식 리더십은커녕 해적선장의 권한은 의외로 높지 않았다. 오히려 수틀리면 선상반란을 당해 보트 타고 쫓겨나든가 재수없으면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해적은 배당금이 모이면 배를 떠날 수 있게 되는데, 장물 분배도 정해진 배당에 따랐다. 일반 선원을 기준으로 봤을 때 선장은 2.5배, 선의는 1.25배, 목수는 0.75배를 받았고 아이는 0.5배를 받았다고 한다.[39] 계급에 따라서도 받는 배당금이 다르다. 규칙 또한 엄격하여 취침 시간은 정확히 지켜야 되며 밤늦게 술 마시고 싶으면 갑판에서 불도 켜지 말고 혼자 마셔야 된다. 다른 것보다도 여자는 배에 절대 있을 수 없으며, 배에서 발견되면 여자를 데려온 선원은 사형이다. 현대에 알려진 여성 해적들은 해적질 중간에 여자임이 드러난 것이다.[40] 매체에서 꼭 나오는 여자 해적은 실제 역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셈이다.
배당금이 모이면 배를 떠난다는 점은 현실의 화류계 종사자들과도 비슷하다. 다만 화류계 종사자들도 돈이 모이면 화류계를 떠난다고 하지만 그렇게 떠나는 경우는 소수인데다, 그마저도 상당수는 모아둔 돈이 거덜나거나 새로운 삶에 적응을 못한다던지, 혹은 나이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을 못했다던지, 심지어 단골과의 몸정 등의 이유로 다시 화류계로 돌아오는 일이 많은데 해적들의 경우도 배를 떠날수 있을만큼 배당금이 모이는 경우는 소수였던데다, 배당금이 많아도 해적소탕의 일환으로 식민지 총독이나 모국의 중앙정부가 사면장을 뿌리지 않는 이상은 고향에 돌아올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형벌에 대한 규정도 세세하게 있어서 당시 흔했던 결투도 정해진 무기와 방식으로만 벌여야 했고, 분쟁 방지를 위해 사적으로 싸우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으며, 중대사항은 처형이나 중형을 내려 해결하였는데, 해적 창작물에서 흔히 나오는 '뱃가에 널빤지를 늘어뜨려 걸어가게 하기'는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그저 허구일 뿐이지만 무인도에 버려두기는 실존하던 형벌이었다. 보통 권총 한 자루, 화약 한 통, 물 한통 정도만 가지고 내려야 했으며 배가 떠나면 남겨진 해적은 알아서 먹고살면서 버티다가 배가 지나가면 구출신호를 보내 얻어타는 것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이 무인도 형벌을 실제로 받고 살아남은 사람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 그 유명한 로빈슨 크루소이다.
사실 17-18세기의 해적들은 그 당시 기준으로 어마어마한 복지와 보험, 보상으로 유명했다. 전투중 신체의 일부를 잃었을 경우 얼마를 보상해주는 가에 대한 규율까지도 세세히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신체를 잃은 선원은 은퇴를 하든지 자기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해적선에 머물며 동등한 배당금을 받았다.
이렇게 혁신적인 규율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그 당시 뱃사람들이 겪었던 열악한 대우와 처분에 있었다. 해군이나 사략선에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할 경우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버려졌으며 그렇게 길거리에서 구걸하다 죽어가는 동료들을 너무나도 많이 봐왔던 것. 여기에 더해 한 번 해적으로 찍힌 이상 다시는 문명세계를 밟지 못할 운명까지 더해져 결국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게 되었다.
두 번째이자 좀 더 현실적인 이유로는 선장에게 뒷배가 없기 때문이다. 당대 해군 수병들의 대우는 해적선원들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는 수준이었지만, 대우가 기분 나쁘다고 선상 반란을 일으켰다가는 99.9% 확률로[41] 본국의 추적대에게 잡혀 목이 매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해적의 경우는 선장이 쫓겨나면 그걸로 끝이다. 결국 상대적으로 부족한 권위를 메꾸기 위해서라도 선원들에게 좀 더 나은 대우를 약속해야만 했고, 이에 따라 자율적으로 지키게 된 해적의 규율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이들만의 고유의 사회가 등장하면서 나소의 대규모 무허가 항구와 마다가스카의 '리베테리아'라는 해적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7. 해적의 생활
해적들의 선상생활은 당시 상선 선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의 주식은 다름아닌 삶은 바다거북. 주 표적인 보물선들이 열대~아열대지방 식민지에서 출항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주변에 헤엄치는 바다거북들을 잡아다 선창에 보관하다 삶아먹었으며, 당시 필수품이던 단단한 비스킷도 먹었다. 식료품 충당은 희생자 약탈이나 아예 주변 땅에 상륙해서 야생 염소나 닭 등을 실어서 해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야생 조류를 몽둥이로 때려잡거나[42] 그물, 총 등으로 잡아서 먹고, 당연하지만 낚시나 그물로 물고기를 잡아서 먹기도 했다. 특히 고기잡이는 동시대의 해군들이나 무역상들과 달리 매우 자주했으며, 약탈 활동이 없을 때는 고기잡이를 많이했다. 물고기를 잡으면 당장 전원이 먹을 일부 생선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염장해서 보관했는데, 갓 잡은 신선한 생선은 선장이나 간부 해적들보다도 병이나 부상 특히 괴혈병으로 누운 환자들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술은 주로 과실주를 마셨다. 또한 당시의 해군들, 무역상들과 마찬가지로 쉽비스킷과 염장고기, 염장 치즈, 염장 버터, 말린 콩을 끓인 스프도 먹었다. 여기에 바다거북과 생선, 과일을 담근 술이 추가된 것. 화재 문제로 담배는 파이프나 시가가 아니라 씹는 담배를 허용하는 해적선이 많았다. 그 외에 항해 사이사이에 돛을 정비하는 등 약탈을 안할 때는 지루한 생활이 이어졌으므로 서로 시비붙고 싸울 때가 많았다. 위의 '해적의 규율'에서 사적분쟁을 금지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던 것이다.
뭍에서는 일반 선원들과 조금 달랐다. 항구에 자주 못 들어갔기에 이들은 한번 항구에 들어오면 돈을 어마어마하게 뿌렸다. 이 때문에 편견과 달리 많은 항구는 해적들을 반겼다. 적대국 선박들을 공격해서 간접적으로 보호해주기도 했기 때문. 그러나 악명이 높아지면 항구들도 받아주기 꺼렸기 때문에 일부 일당들은 정말 픽션에서 나오는 것처럼 자기들만 아는 무인도나 소굴에 모여 약탈을 자축하거나, 배를 끌어올려 성능을 떨어뜨리는 따개비 제거 등 청소도 사이사이 하기도 했다. 선상에선 안전 문제로(정말 음주운전 문제라든가, 술먹고 싸우다든가 등등) 제한적으로 마시던 술을 뭍에선 그럴 걱정이 없으니 많은 해적들이 육지에선 인사불성 수준으로 어마어마하게 포도주, 맥주, 브랜디 등을 퍼마셨다. 어떤 해적은 아예 커다란 포도주 한 통을 사서 길에다 놓고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아서 같이 마시자고, 안마시면 권총으로 쏴죽이겠다고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
8. 현실은 시궁창
창작물에서와는 달리 실제 해적들의 생활은 당연히 낭만적이지도 않고 해적들의 성격도 절대로 창작물에서 나오는 대로 멋지고 시원시원한 성격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잔인하고 극악무도하다. 이는 느와르장르의 마피아나 범죄조직도 마찬가지. 원양어업 등의 직종에 발을 담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당장 먼 바다에서 좁은 배를 타고 언제 육지를 밟을지 기약을 알 수 없는 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고역이다. 게다가 무풍지대에 빠지기라도 하면 상선을 얼마나 많이 털어서 금은보화를 챙겼건 망망대해 한 가운데서 굶어죽기도 일쑤이고, 사략선 등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43] 각국 정부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해적을 소탕하려고 하기에 위험도도 높았다.[44]
더군다나 해적이 된 이들은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잡히면 처형[45]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잡히지 않더라도 해적끼리의 싸움이나 침몰 같은 사고 등으로 죽는 경우가 많아 평균 수명은 30대를 넘기지 못했다. 게다가 이들은 극히 운 좋은 소수를 빼면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무역선의 화물, 심지어는 고기잡이 배를 털기까지 했었다. 심지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도 많았는데 보물이 많을 줄 알고 털었던 배가 빈 껍데기뿐이 없어서 그 배를 털려고 사용한 화약값도 못 건지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거기에다가 윌리엄 키드의 경우는 사략 허가도 가지고 있었고, 살기 위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치 상황이 묘하게 꼬여서 후원자들한테 버려지고 결국 교수형당하기도 했다. 현시창의 대표적인 예.
그나마 풍요롭고 명예로운 삶을 살다 간 해적의 예는 헨리 모건, 프랜시스 드레이크 정도가 있고, 그나마 이 드레이크도 열병으로 5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게다가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잉글랜드 정부가 인정한 사략꾼이자 동시에 해군 장성이기도 했다. 그러니 인정을 받지못한 해적의 수명은 말할 필요가 없다. 깔끔하게 은퇴해서 죽은 유명한 해적의 예는 '존 보웬'이 유일하지만 이 사람도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바르바리 해적 중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해군 지휘관으로서 성공적으로 은퇴한 사례가 많지만, 가장 유명한 인물은 하이르 앗 딘이다. 오스만 제국의 해군 총사령관(데르야 베이) 겸 북아프리카 대총독 겸 로도스 총독 겸 에우보이아 총독 겸 키오스 총독 겸...... 등등 여러 관직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으며, 죽을 때는 문상객으로 집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터키 해군의 아버지' 로서 국가적인 추앙을 받고 있기도 하고. 그러나 자기 자신은 천수를 누렸지만, 형과 동생들이 스페인이나 성 요한 기사단 등과 싸우다 전사하는 등의 아픔을 겪었으니 삶이 마냥 장밋빛이었다고만은 볼 수 없겠다. 그밖에도 동아시아에서 정일수가 깔끔하게 항복해서 오래오래 잘 살았다.
특히나 바다 한가운데서 식량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땐 가죽제품을 삶아먹거나 하며 처절하게 보냈으며, 심할 경우엔 인육을 먹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46] 18~19세기에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해양법이란 없었고, "Law of the Sea"는 뱃사람들간의 관습법이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뱃사람들이 "우리끼리 일 처리할때는 이렇게 하자!"하는 규격화되지 않은 암묵적인 동의인 것이다. 또한 "인육을 먹어도 살인으로 처벌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사하거나 병사한, 즉 자연사한 시체의 인육을 먹어도 긴급피난상 살인으로 처벌받지 않는 것이다. 만약 같이 굶고 있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동료 여행자나 뱃사람을 살해하고 그 인육을 먹은 경우 여전히 살인죄로 기소가 되고 해당하는 벌을 받았으며, 해적들의 무법자적 성향을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들이 처벌받는 이유는 동료를 먹을 목적으로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당장 해적들이 누군가가 아사하기를 기다리거나 자발적으로 날 먹으시오 하고 나서지는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다시 말하지만 식인 자체가 처벌대상인 것은 아니다.
8.1. 현행법상의 해적
해적은 인류의 공적이므로, 1982년 해양법에 관한 국제연합 협약(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일명 유엔해양법협약)도 제7부(공해) 제1절 총칙에서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다. 특기할 것은, 선박뿐만 아니라 항공기에 관해서도 해적이 문제된다는 것.
제100조 (해적행위 진압을 위한 협력의무) 모든 국가는 공해나 국가 관할권 밖의 어떠한 곳에서라도 해적행위를 진압하는데 최대한 협력한다.
제101조 (해적행위의 정의) 해적행위라 함은 다음 행위를 말한다.
(a) 민간선박 또는 민간항공기의 승무원이나 승객이 사적 목적으로 다음에 대하여 범하는 불법적 폭력행위, 억류 또는 약탈 행위
(i) 공해상의 다른 선박이나 항공기 또는 그 선박이나 항공기내의 사람이나 재산
(ii) 국가 관할권에 속하지 아니하는 곳에 있는 선박·항공기·사람이나 재산
(b) 어느 선박 또는 항공기가 해적선 또는 해적항공기가 되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자발적으로 그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
(c) (a) 와 (b)에 규정된 행위를 교사하거나 고의적으로 방조하는 모든 행위
제102조 (승무원이 반란을 일으킨 군함·정부선박·정부항공기에 의한 해적행위) 승무원이 반란을 일으켜 그 지배하에 있는 군함·정부선박·정부항공기가 제101조에 정의된 해적행위를 하는 경우, 그러한 행위는 민간선박 또는 민간항공기에 의한 행위로 본다.
제103조 (해적선·해적항공기의 정의) 선박 또는 항공기를 실효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자가 제101조에 언급된 어느 한 행위를 목적으로 그 선박이나 항공기를 사용하려는 경우, 그 선박 또는 항공기는 해적선이나 해적항공기로 본다. 선박이나 항공기가 이러한 행위를 위하여 사용된 경우로서 그 선박이나 항공기가 그러한 행위에 대해 책임있는 자의 지배하에 있는 한 또한 같다.
제104조 (해적선·해적항공기의 국적 보유 또는 상실) 선박 또는 항공기가 해적선 또는 해적항공기가 된 경우에도 그 국적을 보유할 수 있다. 국적의 보유나 상실은 그 국적을 부여한 국가의 법률에 의하여 결정된다.
제105조 (해적선·해적항공기의 나포) 모든 국가는 공해 또는 국가 관할권 밖의 어떠한 곳에서라도, 해적선·해적항공기 또는 해적행위에 의하여 탈취되어 해적의 지배하에 있는 선박·항공기를 나포하고, 그 선박과 항공기내에 있는 사람을 체포하고, 재산을 압수할 수 있다. 나포를 행한 국가의 법원은 부과될 형벌을 결정하며, 선의의 제3자의 권리를 존중할 것을 조건으로 그 선박·항공기 또는 재산에 대하여 취할 조치를 결정할 수 있다.
제106조 (충분한 근거없는 나포에 따르는 책임) 해적행위의 혐의가 있는 선박이나 항공기의 나포가 충분한 근거가 없이 행하여진 경우, 나포를 행한 국가는 그 선박이나 항공기의 국적국에 대하여 나포로 인하여 발생한 손실 또는 손해에 대한 책임을 진다.
제107조 (해적행위를 이유로 나포할 권한이 있는 선박과 항공기) 해적행위를 이유로 한 나포는 군함·군용항공기 또는 정부업무를 수행중인 것으로 명백히 표시되고 식별이 가능하며 그러한 권한이 부여된 그 밖의 선박이나 항공기만이 행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형법에서 해상강도죄를 규정하고 있고, '국제항해선박 등에 대한 해적행위 피해예방에 관한 법률'이라는 법률도 있다.
마션의 주인공 마크 와트니는 위 협약 101조를 근거로 들면서 화성에는 법률적으로는 해사법이 적용되는 공해상이고, 무전이 끊긴 탓에 법적 절차를 밟을 수 없는 상황에서 화성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합중국 소재의 비군사 기구, 즉 우주개발기구인 NASA의 우주선을 탈취하는 일이 된 만큼 스스로를 인류 역사상 최초의 우주 해적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물론 나사도 와트니의 계획을 알고 그에 맞춰서 구조계획을 준비하고는 있었지만 와트니가 거기에 탑승하도록 허가하는 절차가 정상적으로 불가능했을 뿐이며, 그래서 마크는 "금발수염 해적선장"이라고 NASA에 보내는 위성사진 메시지에 개드립을 쳐놔서 NASA 오퍼레이터들과 전 세계인을 뿜게 만들었다.
물론 진지하게 따지자면 와트니가 군 소속이면(동료인 마르티네즈는 소령 계급, 그리고 리더였던 루이스는 중령이지만 와트니는 불명) 위급한 상황에서 최고위 장교(당연하지만 화성에서는 와트니보다 높은 장교가 없으니...)의 판단으로 징발했다 치면 되지만 나사의 공식 발표에서 박사로 호칭되는 걸 보면 군인이 애초에 아니거나 전역한 듯, 그래서 해적이 맞다. 물론 이마저도 우주선을 탈취해서 화성을 탈출하는 것이 당시의 유일한 탈출 방법이었던 걸 생각하면 긴급피난으로 판단하여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해적행위로 처벌받을 일은 없다고 봐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