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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5a 울산강의-창세기 20장
(강의:이근호 목사)
시간이 좀 덜 됐지만 지난 시간에 했던 것 복습하는 차원에서 다시 한번. 왜냐하면 한 달 지났으니까 기억이 안 날 테니까 다시 한번 해보면 이렇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한테는 얼마나 친밀하게 마음을 낮춰서 접근을 시도했는지, 아브라함한테 버터와 우유를 얻어 잡수시고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 음식을 잡수실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가까이, 경상도 말로 가차이 하죠. 아주 가차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연착륙이라 하지요. 비행기가 위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비행기가 연착륙, 납작하게 땅에 붙은 듯이 깔아서 아브라함에게 다가와서 일했는데. 그것은 이만큼 하나님 하는 일이 구체적이다 말이죠. 어느 정도로 구체적이냐 하면, 이것이 일상적인 일 속에 포함이 될 정도로 너무나도 구체적으로 하나님 일이 구체적으로 실시가 되죠.
아브라함과 사라가 평소에 자기가 식사한 것을 여호와 하나님과 두 보디가드 되는 두 천사에게 나누어줬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도에게 하나님이 베풀어주는 일이라 하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그 속에 구체적으로 섞여서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걸 흔히 약간 상투적인 말이 되겠습니다. 이걸 친밀성이라고 하죠. 지난 시간에 한 것을 복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친밀성을 가지고 일상적인 삶으로 들어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가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이것은 인간의 일이고 구분이 안 돼요. 사실은 따지고 보면 그전체가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이고 손으로 잡히는 하나님의 일상적인 일로써 우리에게 은혜를 이렇게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 아브라함이 이런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친구처럼 이렇게 만나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을 한다니까 아브라함에 거기에 대해서 심판하신 것에 대해서 평소에 일상적으로 사랑하는 이를 말리는 것처럼 말릴 때까지 한번 말려보는 겁니다. 그게 몇 번 기도합니까? 여덟 번 기도하죠.
말릴 때까지 말리는데 어떻게 말리느냐 하면, 의인 오십 명만 있으면, 사십 다섯 명만 있으면, 사십 명만 있으면, 서른 명만 있으면, 열 명만 있으면 이런 식으로 자꾸 단계를 낮추면서 너무나 하나님의 일이 일상적이니까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도 마치 우리가 장에 장 보러 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마음 잡숴야 벌이는 일이 아니라, 쉽게 터지면 쉽게 터져버릴 수 있는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그렇게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아브라함 조카 롯이 그 사실을 알고 자기 사위한테도 이야기하고, 딸에게도 이야기하고, 자기 아내에게도 이야기하고 하는 말이 그냥 보통 일상적인 이야기하듯이 하는 거예요. 빨리 이 성에서 빠져나가자. 불심판 떨어진단다. 단 절대로 빠져나갈 땐 뒤돌아보지 말고. 그렇게 보통 하듯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종교적으로 제사를 몇 번 드리고, 뭐 십일조를 드리고 이런 종교적인 교리가 아니라, 평소에 살아가는 그 삶 자체 속에 심판 당한다는 것도 그냥 삶 속에 묻혀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 일상적인 삶 따로 있고, 하나님의 심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항상 심판은 언제든지 아주 구체적으로 터질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이 마태복음 보면 이래 돼있지요. 사람들이 마지막 인자가 올 때까지라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지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 뒤에 하나 집어넣는다면 또 뭘 집어넣겠습니까? 인자가 오시고.
그러니까 인자가 오신다는 것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뭐 하고 오후에 가서 저녁 때 가족끼리 영화보고 그 다음에 인자가 오시고. 하는 것처럼 인자가 오신다는 것이 쉽게 포함될 수 있는 우리 너무나 구체적인 일상적인 일에 쉽게 섞여도 무방한, 섞여야 당연한 그러한 일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밑으로 깔고 일하신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 친밀성을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시간에 20장 이야기할 텐데 20장 들어가기 전에 먼저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약속을 앞에 던져놓고 그 앞에 던진 약속을 이루시는 그런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약속을 던져놓고 하는 거죠.
제가 어릴 때 했던 올캐바닥 하는 놀이 있죠. 알지요? 던져놓고 휙 돌아서 집고 하는 거 있잖아요. 올캐바닥. 먼저 기왓장 깨진 것 하나 이쁘게 동그랗게 갈아 던져놓고, 그걸 던져놓은 그 지점까지 가서 줍고 오잖아요. 하나님은 약속을 던져놓고 그걸 돼줍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에게 영생이 없느니라. 주께서 먼저 말씀 던져놓고 마지막에 뭡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노라. 이렇게 하잖아요.
그렇다면 다음 중 약속이 아닌 것은? 야, 이거 수능문제 같다. 다음 중 약속이 아닌 것은? 이게 창세기 20장하고 연관되어 하는 겁니다. 죽은 자를 살린다. 2번, 없는데서 있게 한다. 3번, 인간이 신이 된다. 다음 중 약속이 아닌 것은 몇 번입니까? 이거는 운전면허시험보다 더 쉽다. 몇 번 이겠어요? 다음 중 약속이 아닌 것은 3번이 되죠.
왜냐하면 인간이 신이 된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누가 이야기한 겁니까? 마귀가 이야기하죠. 그러면 문제를 이렇게 고치면 됩니다. 하나님이 약속이 아닌 것은 다른 말로 바꾸어서 마귀가 약속한 것은 다음 중 어느 것이냐? 1번, 2번, 3번. 그것도 3번이죠.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을 때 마귀가 뭐라고 했습니까? 니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니가 신처럼 된다.
그리고 4번 하나 넣을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의 지식을 안다. 이것도 하나님의 약속입니까, 약속 아닙니까? 약속 아니죠. 왜냐하면 선악과를 아는 지식은 창세기 3장에 보면 마귀가 약속한 거거든요. 네가 선악 간에 지식을 알아서 네가 신처럼 되리라.
그래서 만약에 어떤 사람이 우리가 신처럼 된다든지, 선악과에 약속에 대해서 안다고 하면 이거는 애초부터 여호와 입에서 나오지 않은 약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가 약속한 것만 성취하지, 자기가 약속하지 않은 것은 성취하질 못하는 분이에요.
첫 번째, 두 번째 이게 죽은 자를 살린다. 없는데서 있게 한다. 이게 심판인데 심판과 구원인데 결국 이걸 전부다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라 할 것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뭐냐? 천국 갈 사람은 천국 가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 보내는 그 약속, 그 약속을 여호와 하나님이 해내십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면 그 아브라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약속이 마치 담요 둘둘 감듯이 아브라함에게는 뭐가 둘둘 감겨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둘둘 감겨있거든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거기서 툭툭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신기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 툭툭 불거져 나오는 겁니다.
마치 뚱보가 작은 옷 입으면 한번 숨 쉴 때마다 단추 하나가 뜯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브라함 본인 그렇지 않고 싶은 아브라함 가는 곳마다 하나님 약속이 하나 툭툭 떨어지는 겁니다. 그 약속 중에 하나가 뭐냐? 창세기 19장 29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보세요. 롯을 엎으시는 가운데 내보내셨더라 하면, 앞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가 없더라면, 아, 롯이 본인 잘나서 그렇구나. 본인이 역시 결단력이 있어서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앞에 뭐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아브라함에서 나온 단추고, 아브라함에서 숨 쉴 때마다 툭툭 떨어져 나온 단추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영생을 얻지도 못할뿐더러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지옥 같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벗어났단 말이죠.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에게 저주한 자에게 저주를 내리고.
창세기 20장, 오늘 하게 되는데 미리 두 가지를 내용이 복잡하기 때문에 제가 울산 온 경험상 아하, 금요일 오후가 피곤하다. 피곤할 때는 복잡하게 이야기해선 안 되겠구나. 간추려서 하면서도 진도 팍팍 나가줘야 되겠다는 생각이 딱 들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0장을 하면서 20장, 21장을 한꺼번에 하는데 단추 두 개가 떨어져요.
단추 이야기 다시 해볼까요. 뚱보가 똥배가 나왔는데 옷을 작은 거 입으니까 한번 숨 쉴 때마다 옷이 작아서 단추가 툭툭 떨어져나가더란 말이죠. 아브라함이 숨 쉴 때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툭툭 떨어져나가는데 그 약속이 뭐라 했습니까?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는 약속이 툭툭 떨어져나가는 겁니다.
첫 번째가 뭐냐? 아비멜렉이란 추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비멜렉 추장이 왔을 때 아브라함이 살기 위해서 그때는 아브라함이 숨을 적게 쉰 거예요. 헥헥. 자기 딴에 조심스럽게 한 겁니다. 자기가 뭔가 크게 쉬면 말썽이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팍팍 터지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저 옆에 있는 여자는 제 누이동생이거든요. 그러니까 마음대로 갖고 싶으면 가지세요. 하고 성 상납을 한 겁니다. 요즘 말로. 미인계를 쓴 거죠. 미인계.
나이 보통 요새 오십 넘으면 미인계가 소원이라도 안 되는 나이죠. 미인계가 안 되는 나이 같으면 참, 인생 다 살았다. 이런 생각 들 정도로. 가을철인데 갑자기 허무를 느끼네요. 그런데 이상하게 사라가 나이 구십이 넘었어도 아직 그게 통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추장이 아브라함을 자기편으로 용납을 해줬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대 사는 사람들, 이 대목을 보면서 목사님, 이해가 안 됩니다. 왜요? 지금 우리나라 대전 살다 서울 가도 누구 이웃집에서 시비 거는 사람 없고, 부산 살다가 전라도 가도 니, 부산이가? 나, 전라돈데. 해서 시비 거는 사람 없는데. 아니 처음 본 사람, 이사 왔다고 해서 그렇게 성 상납을 해야 되고, 미인계를 써서 잘 봐달라고 살살 빌어야 될 이유가 뭐냐? 그게 이해가 안 됩니다. 이렇게 하는데
여러분, 옛날 시대는 농경시대라 합니다. 산업사회가 아니에요. 농경시대는 뭐로 구분되느냐 하면, 옥토와 척박한 땅이 구분됩니다. 구분되어서 개간된 땅과 그냥 미개간 된 땅이 구분되면서 개간된 땅은 하나님 복을 받아서 농사가 잘 되는 땅이고, 척박한 땅은 농사가 안 되는 땅입니다.
옛날에는 지금은 농사를 안 지어도 공장에 다녀도 밥 먹고 사는 시대지만 옛날엔 농경시대라서 모든 사람의 의식주가 토지에서 다 나와요. 박경리의 [토지] 알죠. 근대화작업에서 한 가정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렸던 토지 아닙니까, 박경리의. 인간이 농경사회에서 산업화로. 토지 가봤잖아요. 저기 섬진강. 위에 가면 화개장터 있어요. 전라도라 화개장터~ 그게 바로 밑에 있어요. 아직도 삼천 원만 내면 관광터라 해서 영화세트처럼 다 만들어놨어요. 가보기도 했는데.
그 옥토 모든 의식주 모든 문제가 옥토에서 나온 거예요. 여기가 뭐냐? 일종이 산업화에요. 그 당시에 산업화에요. 이거 아니면 굶어죽어요. 그런데 여기에 뭐가 들어왔다? 이방인이 들어왔다 하면 세금을 내야 돼요. 어디 여기서 함부로 살아. 그래서 니는 여기서 뭐냐? 거의 노예 아닌 노예생활 해줘야부터 시작해서 얼추 십 년 고생해야 우리 최 씨 집안은 아니고, 어디서 근본은 모르겠지만 어디서 흘러온 박 씨 집안도 한 십 년 살았으니까 우리 토박이로 간주하노라. 이래 되면 이제 한 집안으로 인정해주죠.
그렇지 않고서는 이거는 어디서 어떤 도둑질이나 사고 일어나면 전부다 와서 가지고 튈 놈. 그냥 왔다가 근본도 모르는 게 와서 왔다가 그냥 가는 거예요. 근본도 모른다는 게 옛날 여자한테는 이거는 치명적인 그겁니다. 이게 어디서 너희 친정에 그따위 식으로 배웠나. 근본도 상놈 집안. 이러면 시집 살기 곤란해요. 상당히 난처합니다. 요새는 살아줘, 살아줘 빌지만 옛날에는 안 그랬다고요.
옛날에는 고부갈등이 없었던 이유가, 농경에 대한 아주 수준 높은 농업기술은 나이 많은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그 농사기술 꽉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농사일을 농업을 종사하는 하나의 노동자로써 여자가 시집을 왔기 때문에 그 회사에서는 농사짓는 회사에서 어려운 기술들을 배워야 사람 구실을 하는 시대기 때문에 고부간에 갈등이 있을 수가 없지요.
어이, 니는 밥해라. 예. 아 낳나? 아 낳고 난 뒤에 이틀이나 누워있고 빨리 일어나 밥 안 하나. 빨리. 모내기 하고. 아 낳고 이틀 뒤에 일어나서 밥해서. 옛날 시집 다 그래 살았다는 거예요. 아 안 낳아서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옛날엔 다 그랬데요. 저는 아 낳고 이틀 누워있으면 안 돼요. 일어나 또 그거 해야 돼요. 요새는 뭐 식구들 하면 되지만 옛날엔 그런 거 없어요.
농사짓고 밭은 그래 가는 게 아니지. 이게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게. 봐라. 내 하는 거 봐라. 나이 육십, 옛날 오십만 되도 시어머니니까 오십, 육십 된 시어머니가 서슬이 시퍼래서 함 봐라. 호미질 이렇게 하는 기다. 알겠나? 똑바로 해, 똑바로 해. 내가 육십 되면 내가 니 쌀뒤주에 금고열쇠를 니한테 맡기마. 열쇠가 뭐 요새는 맞추면 다 여는 건데. 그것도 굉장히 적선한 건줄 알고, 내가 육십 되면 너한테 넘기마.
그런 농경시대기 때문에 외부인이 왔다는 것은 이것은 거의 도둑놈내지는 강도 그런 취급받던 시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원래 자기 회사였던 곳은 어딥니까? 갈대아 우르 아닙니까. 자기 동네 따로 있어요. 그 동네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렀다고요? 강제로. 강제로 채플 들어가게 했죠. 세광고등학교 강제로 하듯이. 아브라함을 강제로 불러다가 나그네 길로 갈 곳도 모르는 낯선 길로 이방 땅으로 그걸 순회하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기댈 곳은 누구 밖에 없어요? 자연적으로. 전부다 땅주인이 다 있으니까. 여러분, 서울에 옛날, 지금도 그렇지만 총각이 되서 서울에 한번 가 보세요. 서울에 부산 같은데 서울에 가면 특히 부산 같은데 보면, 낮에는 모르는데 밤에 되면 저 높은 데까지 불빛이 반짝반짝 집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처음 총각 되서 취직해 보세요. 그 많은 집에 자기 집이 없다는 게 이거 설움, 집 없는 설움. 여러분, 다 겪어 봤는 줄 믿습니다. 그 집 없는 설움, 나그네 설움. [나그네 설움]이라 노래 있잖아요.
이 척박한 땅에 그러니까 이거는 빌어야지요. 손과 발로 빌어야 돼요. 상납을 해야 됩니다. 그 당시 시대가 그래요. 한번만 봐 주이소. 이뻐해 주이소. 갖다 바쳐야 돼요. 그것도 어중이떠중이 말고 제일 높은 사람, 누구 찾아가겠어요? 그 당시에 아비멜렉 아닙니까? 가서 상납했지요. 제 누이동생 하룻밤 어떻습니까? 조~치. 여자 마다 할 남자 어디 있어요. 좋지. 이렇게 해서 합궁을 하려 했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20장에 합궁을 하려 했는데 3절에 보니까 아내를 취했는데 아직 합궁까지 안 들어갔어요. 취했는데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라”
자, 보세요. 여호와는 어떤 게 있다고요? 죽는데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신다. 그래하지요.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본인은 인간적으로 살려고 애를 썼는데 그만 숨을 크게 한번 쉬니까 단추가 하나 툭 떨어져버렸어요. 그 단추가 무슨 단춥니까? 누구든지 아브라함 아내를 건드리는 놈은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받아 죽게 돼있다. 오늘밤에 니가 죽으리라. 꿈에 그런 꿈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 교인들이 각본을 하나 시나리오를 자꾸 상상하는 게 뭐냐 하면, 내가 교회 나오는데 남편이 교회 안 나온다. 그때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현몽하사 니 아내는 보통 여자가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니라. 다음주부터 교회 안 가면 니는 죽으리라. 뭐, 이런 계획들이 있어서 내, 니 핍박한 거 용서해줘. 나도 너로 인하여 구원받겠다. 해서 오게 되면 참, 그 교회가 얼마나 부흥되겠습니까?
왜 요새는 그런 식으로 일을 안 하시는가? 그건 딴 게 아니고 교회가 부흥되면 교만하기 때문에. 교회 부흥되면 교만해져서 안 돼요. 교회 부흥보다 더 좋은 게 천국인데 교회 부흥되면 매료되어서 되겠습니까? 핑계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죽으리라. 해서 심판, 저주. 저주부터 시작돼요. 아브라함 가는 곳에 저주가 쫙 깔린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저주가 딱 하니까 단추 하나가 뚝 떨어져나간 거죠.
할 때에 그때에 4절에 아비멜렉이 뭐라고 합니까?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이게 알리바이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저 남자 누구고? 당신 남편 아니요? 아닙니다. 제 오빱니다. 저 여자 당신 아내 아니요? 아닙니다. 제 누이동생입니다. 그러면 내가 저 여자를 새로운 아내로 맞이해도 되겠네. 그럼요. 되지요. 라고 이야기가 다 끝난 거예요. 그때는 지금 아브라함이 숨을 살짝 쉰 거예요. 하나님, 미안합니데이. 살라하니 별 수를 다 씁니다. 미안합니다. 이해해 주세요.
하나님이 그냥.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무슨 짓을 해도 그건 아브라함이 하는 짓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할 도리를 다 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이걸 믿어야 돼요. 하나님의 약속이 사람 때문에 방해받은 적 없습니다. 나의 실수나 나의 죄 때문에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실패로 끝난 적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게 없어요.
아브라함 보세요. 하는 족족 실수야, 실패야. 하는 족족 오류투성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해서 하나님 관계가 이제는 다 됐다. 이래 생각하면 안 되고, 함께 있다는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두고두고 평생을 다할 때까지 우리는 그 사랑과 그 변치 않는 약속을 두고두고 우리는 더 깊이깊이 새삼스럽게 새로 느껴야 돼요.
아하, 나는 하나님은 이 정도 수준으로 봤는데 그거보다 그 은혜가 더 크구나. 나는 이 정도 죄 졌으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가떨어질 때도 됐는데 세상에 이런 죄마저 용서되는구나. 이걸 앞으로 살아가면서 도대체 주님의 은혜를 무산시킬 죄를 내가 짓고자 해도 질 수 없는 입장이구나. 그걸 아셔야 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지어내서 죄를 지어도 그 죄가 주님의 용서하심을 무효로 돌릴 수 있는 죄는 우리는 그런 실력이 없어요. 그런 실력은 마귀한테 맡기시지, 우리한테는 그런 재주가 없어요. 우리는 아주 무능해요. 왜 무능하냐? 주의 은혜를 취소시킬 만한 죄를 못 짓는다는 점에서 아주 엄청 무능한 잡니다. 앞으로 그걸 기도제목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주여, 무능합니다. 죄져도 용서되는 이런 실력 밖에 안 되니, 이래 해야 돼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시 한번 자기의 위상, 입장을 새삼스럽다는 거죠. 제가 분명히 한 달 전에 이야기했어요. 이상하게 울산 오면 기억이 다 나요. 울산은 이상하게 인연이 어떤 인연인지 강의한 게 기억이 다 나요. 제가 분명히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도라는 것을 여러분 자체가 우습게 본다는 제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너무 우습게 봐요.
자기만 함께 있는 줄 알고 자기가 보기에 거울 보니까 시시해 보이죠. 그러니까 나는 시시하구나. 이래 생각하는데 함께 있는 하나님 때문에 여러분들이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 혼자 있으면 시시한 거 맞아요. 그런데 함께 하신 하나님은 절대 시시한 분이 아니에요. 다만 여러분들을 들어 쓰십니다. 어떻게 쓰시는가? 어떻게 해도 나는 내 힘으로 구원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못난이다. 나는 못난이~ 하는 노래 있잖아요. 옛날 노래. 밤도 달도, 하는 노래 있는데 못난이란 노래 있어요.
나는 못난이다. 어떤 경우라도 주님 아니면 해결 안 되는 나는 못난이다. 그걸 평생 동안 더 깊이 있게 느껴야 됩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단추가 떨어졌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 나무랐습니까? 9절에 보니까 막 따지지요. 20장 7절에. 이게 아니지. 6절에 봅시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 하지 않게 하였나니”
요즘에 왜 이렇게 꿈에 현몽으로 나타나지 않느냐 하면, 요즘의 계시는 무슨 계시냐 하면, 성경 문자 계시입니다. 성경의 문자를 통해서 다 계시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꿈을 통해서 계시해 버리면, 그 꿈은 성경의 부록으로 첨가해야 돼요. 이거 위험한 일입니다. 성경은 더하거나 빼거나 못해요.
못난 아내가 성경말씀 이야기하거든 그걸 주의 말씀으로 들어야 됩니다. 비록 그 아내가 무슨 뜻으로 잘못 풀이하더라도 성경말씀만큼은 하나님 말씀이에요. 성경말씀 만큼은. 그러니까 꿈으로 나타나서 계시한다 하는 이런 것은 계시하더라도 그 내용이 성경과 합한 내용이어야 하죠.
그러니까 평소에 우리는 늘 성경말씀을 계속 생각하면 그것이 계속해서 계시를 생각하는 중이다. 이래 생각하면 됩니다. 길에 가다가도 차를 타다가도 성경말씀이 불쑥불쑥 솟아나면 하나님이 계시 준 걸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니가 좁은 길로 가야지. 니가 외롭다고 그러지 마라. 원래 외로운 길이야. 좁은 길은 찾는 자가 적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일부러 생각난다고 나는 게 아닙니다. 불쑥해서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아, 맞아. 찾는 이가 적지. 그런데 내가 이것을 슬퍼했을까? 이런 생각 드는 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옛날처럼 꿈에 나타나서 하나님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 안 해 주느냐? 여기 보면 여기나오는 것이 곧 성경으로 삽입되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이야기라고 보면 됩니다.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지금 내가 아비멜렉이고, 오늘 꿈에 하나님께서 그리고 내가 자는 밤에 남편이 옆에서 성경을 읽어 줄 때 그 성경 읽는 말씀이 나는 아비멜렉이라면 꿈속에 나타나서 주신 말씀과 똑같은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 말입니다.
내가 만약에 남편이 잠을 푹 자고 아내가 꾸벅꾸벅 졸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기 계심이요. 아니고, 연속극 재미있어라. 그 다음에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할 때 가만히 꿈속에 들어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기 계심이라.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위로를 받을 거임이요. 이게 하나님 계시다 이 말입니다. 추가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야. 맞아, 맞아. 상한 심령이지~ 상한 심령이지. 하나님께서 돈 푼이나 갖다 주면 좋아 한 줄 알았더니만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돈이 아니고 내 상한 심령이지. 아, 이걸 왜 몰랐을꼬. 성경에 있는 내용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계시가 오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아브라함은 단추가 터졌어요. 단추가 터져서 그때부터 7절에 보세요. 다같이 한번 봅시다.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아라”
참, 하나님의 방식이 무슨 방식이라 했습니다. 약속의 방식이라 했지요. 하나님의 약속은 뭐라 했습니까? 다시 복습합시다. 하나님 약속은 뭐라 했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것, 이거죠. 그러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게 약속이니까 약속이 없을 때 이미 우리가 죽은 자에 해당됩니까, 산 자에 해당됩니까? 우리가 살았다 하지만 사실은 죽은 자에 해당되는 거예요.
만약에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이 왔기 때문에 망정이지 살았지, 그렇지 않고 만약에 다른 나그네가 지나와서 아내 속이고 제 아내지만 제 누이동생입니다. 속였으면 얼마든지 아비멜렉은 알았어요. 당신 누이동생하고 하룻밤 지내지. 하고 하룻밤 지냈을 거예요. 그러면 그게 뭐가 됩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짓이 되는 거예요.
지금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 복음 모르는 사람들 자기는 내가 뭐 잘못됐나? 교회 몰라. 절에 다녀. 이래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죽은 자에요. 언제 자기가 죽은 자인 걸 아느냐 하면, 살린다는 소식이 들어올 때 비로소 죽은 자가 확인되는 겁니다.
어이, 김 아무개. 당신은 예수님 아니면 당신 죽어. 라고 할 때 그때 마음이 열리고 곧이들을 때 아하, 그동안 내가 바보처럼 살았군요. 참, 죽은 자가 살았군요. 비로소 확인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뭐냐? 나는 죽을 놈이다. 이게 성도에요. 성도가 아니면 죽을 놈이라는 말 하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글을 썼지요. 이단의 첫 출발점이라고 썼지요. 이유 없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은 이단이다. 이유 없이 무조건 죄인이에요. 그렇게 된 이유를 대라. 이유 안 대면 오늘 죽는다. 이유를 대라.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무조건 우리가 사니까 말을 뒤집어서보자 말이죠.
십자가 피로 무조건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십자가 피가 오지 않으면 우리는 뭐한 사람이다? 무조건 죽은 자, 증명되잖아요. 이것보다 확실한 증명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니가 산상설교로도 살지 못하고, 물 위를 걸어도 살지 못하고, 오병이어로도 살지 못하고, 내 살과 내 피가 아니면 니는 죽어. 이 말은 뭔 뜻입니까? 이미 우린 죽은 인간인데 예수님의 피가 오니까 피로 용서받으니까 우린 살았다 이 말입니다.
지난 수요일 날 어제 아래 수요일 날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수요일 날 교인들이 피곤해 하는 것 같아서 쉽게 예를 들었는데. 호박죽 끊일 때 호박 속을 다 긁어내지요. 그리고 고추 튀김할 때 고추 속 매운 것 다 들어내고 거기에 잡채하고 고기 다져서 거기다가 넣어서 튀김에 하면 맛있잖아요. 깻잎해도 맛있고 고추해도 맛있잖아요.
그 예를 들면서 우리의 죄를 다 말갛게 씻기시면, 이사야에 나옵니다. 우리의 죄를 말갛게 씻기시면, 씻기시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죠. 거기다가 예수님의 자기가 성경 이룬 그 의를 다져서 잡채에다 버무려서 양파에다 빨간 무에다 이렇게 해서 고기 다져서 우리 속에다 채워 넣는 겁니다.
채워 넣는데 아브라함은 지가 어떤 인간인지 자기도 몰랐었어요. 내 아내 받으소서. 그저 나그넨데 하룻밤 잠 재워주시면 제 아내 받으소서. 이럴 뿐이지 내가 남을 살릴 그런 쨉이 되나. 자기도 자기에 대해서 그만큼 중요한 가치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걸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깨닫게 하죠. 그는 선지자다. 참, 그래서 선지자라 했으니까 앞으로 여러분들은 최 선지자, 박 선지자, 선지자 불러도 괜찮아요.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제가 감이 됩니까? 선지자 감이 됩니까? 우리가 스스로 겸손을 가장한 그렇게 우리는 사양하지요. 오후예배 기도하라하니까 도망가 버리고. 제가 오후예배 기도할 감이 됩니까 하고 도망가 버리니 참. 요새 우리교회 맨 날 오후예배 내가 기도해요. 다 도망가 버려서. 감이 안 된다.
여러분이 살고 죽이고 못합니다. 여러분 입에서 나오는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살고 죽이고 합니다. 나도 사는데 당신도 삽니다. 이 말이거든요. 나 똑똑합니다. 이게 아닙니다. 나 같은 인간 사는데 당신 같은 인간삽니다. 예수의 피로. 그 이야기는 할 수 있잖아요. 나 똑똑하거든. 성경 많이 알거든. 이거 아니에요.
거기에 이제 그렇게 하니까 아비멜렉이 아침에 일어나서 신부를 부르고 두려워서 불러다가 따지지요. 9절에 보세요. 어찌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가 무슨 죄를 범했는지 니가 와서 큰 죄에 빠질 뻔 하였구나. 책임져라. 어떻게 할래? 하니까 10절부터 나오는 게 아브라함이 변명 아닌 변명을 합니다.
종교가 다르니까 이거는 이복동생 맞는데요. 하나님께서 12, 3절.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집을 떠날 때 니가 좀 위태하다 싶으면 니가 오라비라 해서 버텨라.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이카거든요. 그러니까 도대체 두 말 중에서 누가 맞습니까? 대질심문을 해야 될 판인데.
그래서 신학자들은 둘 다 맞다 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일부러 아브라함을 친밀성을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많을 걸 요구하지 않아요. 니 성질대로 해라. 책임은 내가 진다. 지 성질대로 하니까 비겁한 것 성질밖에 더 나옵니까. 비겁합니다. 비겁하든 말든 간에 지는 용기가 그것 밖에 안 되니까 하고, 나머지 뒤치다꺼리는 누가 다하고? 하나님이 다하고. 그게 우리 인생 아닙니까? 그게 우리 인생이거든요.
그게 동행이라는 거예요. 동행하는데 같이 얼추 비슷하게 동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는 너무 위대한 분하고 너무 초라한 나하고 동행하는 거예요.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과연 그 집안에 아비멜렉 집안에 전부다 여자들이 임신을 못해요. 여기 임신을 못했다는 것은 신학자들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니, 합궁을 할 뻔 했던 시기에 언젠데 보통 임신되느냐, 안 되느냐 확인하는 기간이 보통 오 개월 아닙니까? 최소한 오 개월. 정확한 건 십 개월 애 낳아봐야 알겠지만 한 오 개월 되면 배부른 것, 배가 똥배처럼 올라온 것 보면 알잖아요.
배보면 아는데 임신 못하는 걸 어떻게 아느냐? 오 개월 동안 유숙했느냐 그 문젠데. 일단 월경이 없고, 뭔가 모든 그 집안의 여자가 동일하게 아기 낳는 그러한 흔적을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것. 않았고 이미 하나님께 얻어맞은 기억이 있어서 그것이 그 마을에 유포가 된 상태에서 각자 자기 집에 돌아가서 자기 아내 모습을 보니까 자기 아내가 이미 아기 못 낳는 여자가 갑자기 돌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았겠지요.
그래서 여기 18절에 보면, “여종을 치료하서 생산케 했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그러니까 이미, 벌써 이런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모든 태를 닫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주니까 열렸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그럼 앞으로 아브라함 가는 곳마다 다 여자들이 불임여성이 되느냐? 그게 아니고 그때그때마다 아브라함이 숨을 한번 크게 쉬면 단추가 툭툭 떨어져 나가요. 자기가 원하지 않는데. 단추 툭 떨어져 떼구르르 떨어진 그 단추 하나가 뭐냐? 여호와는 뭐라고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여호와는 어떤 하나님이라 했습니까? 던져진 약속만 다시 주워서 성취하시는 분, 그게 여호와에요. 약속 아닌 것은 일체 손도 안 대고, 그런 걸 찾지도 않고, 그런 걸 묻지도 않고 약속한 것만 다시 살리는데 그 약속이 뭐라 했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거예요.
자, 그러면 같은 맥락에서 같은 뜻인데 그 약속이 하나 더 나옵니다. 어디 나오느냐? 창세기 21장에 나옵니다. 그 약속이 뭐냐? 아까 약속은 죽은 태를 살렸다. 아비멜렉의 모든 가문에 속한 그 식구에 속한 모든 여자들이 태가 닫혔는데 죽은 태를 살렸다. 죽음에서 살렸다. 이게 약속이라면, 창세기 21장 나오는 건 뭐냐 하면, 분류입니다. 저주 받은 자와 복 받은 자를 분류시키는 약속을 시행합니다.
그럼 저주받은 자가 누구겠습니까? 창세기 21장에서 누구겠어요? 거기에 어떤 여자가 살고 있었지요. 그 여자는 여종이었습니다. 이름은 하갈이었습니다. 하갈이란 맞습니까? 맞지요. 하갈이란 여자가 살고 있었어요. 그 여자가 전에도 가출을 했었습니다. 언제 가출했습니까? 창세기 16장에 보면 가출했었지요. 해서 그땐 때가 안 됐어요. 가출하니까 다시 집에 돌아가라 해서 집에 도로 왔었습니다. 구박이 심해서.
돌아왔는데 이번에 애가 또 하갈이 그렇게 구박을 받게 된 이유가, 하갈은 애굽 여잔데, 그 아브라함의 소생이 있었지요. 이름이 뭡니까? 이스마엘이지요. 이스마엘이란 아기를 낳았는데 그 이스마엘은 저주받아야 돼요.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왜 저주받아야 되느냐 하면, 축복 안 받기 때문에 그냥 저주받게 돼요. 축복의 여집합이라. 축복 빼놓고 나머지 사람. 축복 사람을 선택했다는 말은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저주받을 사람이 돼버리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약속방식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은 뭐냐? 죽은 자를 살리는 것. 또 하나의 약속은 뭐냐? 저주받을 자와 복 받을 자를 분류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이 뭐냐 하면, 분류 당할 때 축복인 줄 압니다. 하나님, 왜 나로 하여금 좁은 길로 가게 합니까? 딴 사람은 넓은 길로 가잖아. 아이쿠, 그렇구나. 난 몰랐었네. 분류한다는 자체가 축복이에요.
왜 저는 이렇게 좁은 길로 왜 심난한 인생길 가게 합니까? 그게 좁은 길이야. 아이쿠나, 맞구나. 좁은 길, 영생의 길이구나. 이렇게 분류 당했다는 자체가 그게 축복이에요. 더 이상 축복 찾지 마세요. 틀린 대우를 받을 때 축복입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과 사라의 관계죠.
근데 여기 이제 또 단추 하나 툭 떨어졌어요. 무슨 단추냐? 여자 쪽에서 문제가 있어요. 본처가 되는 사라가 자식이 없고, 하갈은 자기 여종인데 자식이 있다 이 말이죠. 이게 뭔가 불균형처럼 느껴진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래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남자하고 연애를 했는데 그 남자하고 연애를 해서 집안의 우리 어른들께 소개시켜드리려고 인사드리려고, 내가 이 남자하고 오래 동안 사귀었으니까 올 가을에 결혼시켜 주세요. 하고 허락받으려고 왔는데 오는 그 자리에서 누구하고 눈이 맞았느냐 하면 처제하고 눈이 맞았다 이 말이죠. 아침 드라마 나오는 이야기하고 비슷하죠. 처제하고 눈이 맞았을 때 눈이 맞아 아까지 낳았다 이 말이죠. 그럴 때 그걸 보고 가만두고 있는 언니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종용히 불러다가 아하고 보내겠지요.
그러니까 제가 아까 강의 첫 시간에 뭐라 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밀착돼있다. 너무나 일상적이다. 왜 일상적이냐? 너무 구체적이다. 왜냐? 그래야 우리의 본심이 우리의 습관 된 본능들이 가감 없이 조금도 누락이 없이 우리의 성질 그대로 다 깔끔하게 도화지에다 마치 토하듯이 우리의 속에 있는 것이 하얀 도화지에 그대로 다 토해놓게 하시는 겁니다.
그 뒷감당 누구 하십니까? 주께서 다 하셨습니다. 이미 다 하셨습니다. 걱정마시고 토해 놓는 것도 못합니까? 캑캑, 다 토해 놓게 되면 분명히 이것은 질투심이에요. 옛날 유교에 칠거지악이 중에 질투가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게 질투라 하는 것은 어떤 때 질투하느냐 하면, 사람한테 관심이 있고 상대방을 사랑할 때면 질투가 생겨요. 남 같으면 질투 안 합니다.
질투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왜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왜 다른 여자 사랑하느냐, 다른 남자를 사랑하느냐? 이게 질투 아닙니까?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이거 질투 아닙니까? 질투라는 건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데 세상에 옛날 조선시대 얼마나 남자들이 횡포가 심한지 질투한다고 해서 그 본처 되는 왕비를 축출하잖아요. 누가? 왕의 남자가. 그것도 건방지게 내시가. 뭐 없는 게. 나, 그 드라마 안 보는데 대충 그렇습니까? 왕의 남자. 그런 대목 나와요? 난 나오리라고 생각되는데. 왕후가 질투한다고 왕이 나무라고 그런 대목 없습니까? 없는 모양이네. 하여튼 내가 지금 지어낸 모양인데. 하여튼 아마 있을 걸. 찾아보면.
그건 뭐냐 하면, 여자가 한 집에서 질투해버리면, 가정질서가 무너지니까 가정질서를 위해서 질투하지 마라. 질투하면 칠거지악에 속한다 이래 되거든요. 그런데 이거는 인간의 본성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이라 하는 것은 질투하게 돼있고 미워하게 돼 있잖아요. 인간의 본성을 털어놨다 말이죠. 질투하니까 아브라함이 고민이 되니까 그때 하나님이 하는 말이 아브라함아, 네 마누라 말이 옳다. 그 말 들으라. 내어 쫓으라. 쫓아버렸어요.
이게 바로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아브라함이 둘둘 감고 있는 약속이라는 담요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뭐냐? 분류시키는 거예요. 구원받지 못한 자를 내쫓아버립니다.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핍박해서 내쫓아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보면 성경에 21장에 봅시다. 10절에 보면,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사라가 이야기하니까 근심을 했죠. 11절에 깊이 근심을 하니까 12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이렇게 됩니다.
이미 아들은 있고 21장에 초반부에 이삭을 낳았거든요. 애 둘 다 키울 수는 없고 이미 애를 하나 생기게 해놓고 한 쪽이 복이라고 잡은 순간, 한 쪽은 자동적으로 내어 쫓아야 될 저주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 애가 교회를 안 다니는데 내어 쫓아야 됩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자식은 아무리 교회에서 하나님이 와서 쫓아도 안 쫓습니다. 왜? 내 새끼고 내 자식이니까. 이게 도화지에 토해놓는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러니까 본성대로 하시고 쫓아내고 아니고는 내 소관이 아니고, 누구 소관입니까? 분류는? 분류는 하나님 소관입니다.
여러분들이 목회자들이 그런 걸 느끼는데. 목회자들이 그렇게 심방을 자주 가고 기도도 남보다 곱빼기로 많이 해주고 했던 교인이 교회를 안 나올 때 그 상처,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시시한 교인 같으면 오든 안 오든 니 마음대로 하세요. 하겠지만 그렇게 정성을 드리고 신경을 많이 썼던 교인이 삐져서 안 나오면 가슴 아파요.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아픈 거예요. 왜냐하면 도화지로써 자기 본성이니까. 그 사람을 분류하고 안 하고는 그거는 하나님 소관이지 목사가 이제는 나오지 마라. 이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 두 달 뒤에 나와도 아이고, 반갑습니다. 또 이래 나와야 되는 게 목사의 심정이에요. 내가 그렇게 나오라고 해도 안 나오더니, 그래. 이제 사업 슬슬 망해가구만. 이래 하면 안 된다니까.
분류하는 것은 우리 소관 아니에요. 에이, 저주받아라. 저주받아라 소리하면 안 됩니다. 물론 저주받으라는 소리가 우리의 본성인 줄 모르겠지만 그런 소리 해봐야 먹히지도 않고요. 분류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시고, 우리가 분류하는 대목이 아니니까. 우리는 그냥 본성 따라 교회 안 나오는 자식도 내 새끼고, 나오는 자식도 내 새끼고. 아들 키워보세요. 딸 키우는 거 하고 비교도 안 됩니다. 속 썩이는 게 많다니까. 속 썩여도 내 자식이고 내가 감싸야 되고 내가 책임져야 되고. 그게 우리의 본성인데.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냥 예수 믿고 본성대로 사세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거 보세요. 사라가 신학을 공부했습니까, 사라가 성경 언약을 생각했습니까? 그냥 짜증나서 에라이, 쫓아내버려라. 여보. 뭐하노? 내 새끼 생겼다. 저 새끼 꼴보기 싫다. 쫓아내라.
이미 전처의 아들이 있고, 후처로 그 자식의 엄마는 죽고 홀아비인데 아이들과 함께 있는 집안에 어떤 여자가 그 남자하고 사랑을 해서 후처로 들어가면 이미 자기 전처의 아들이 있습니다. 그 자식을 아무리 이뻐하고 지 배에서 나온 새끼보다 세 배, 네 배 더 해줘도 마음속에는 미워요. 마음속으로는 밉게 돼있습니다. 밉다하는 걸 알기 때문에 그걸 감추기 위해서 곱빼기로 하지만 미운 것은 미운 거예요. 싫은 건 싫은 거예요.
그러나 만약에 지가 낳은 새끼가 없다하면 마치 지 자식처럼 할 건데. 하지만 어느 날 여보. 나도 내 새끼 낳고 싶어. 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임신이 시작된 순간부터 밉기 시작해요. 행여나 내 애를 저 애가 남의 애가, 애 놓기 전에는 우리 애 다 내 자식이라 하지만 막상 지 새끼 보니까 내 새끼라는 게 있기 때문에 저 자식은 저 새끼가 돼버리죠. 내 새끼가 아니고 저 새끼가 돼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언니 애인이 생기면 그렇게 언니 애인이 좋아 보이고 하더라도 만약에 자기 애인이 생겨버리면 언니 애인은 애인도 아니죠. 머슴아에요. 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게 우리가 토해놓는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사용하시되 아브라함 아무리 행한 것도 없고, 아무 노력한 것도 없고,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는 값없이 주는 은혜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게 오늘날 가는 코스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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