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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답사여행의 백미- 법륭사
담징이 신라에 머물고 있을 때,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문을 들은 일본은 사신을 보내 담징을 모셔왔다. 그러나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담징은 마음이 고구려에 가 있어 도무지 붓을 잡을 수 없었다. 어느날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를 물리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호류사로 돌아와 혼신의 힘을 다한 작품이 그 유명한 호류사 금당벽화다. 벽화는 경주의 석굴암과 중국의 용문석굴과 더불어 동양 3대 미술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담징의 작품의 논란이 분분하지만 애국심이 묻어나는 이야기는 잊을 수 없다. 담징의 벽화도 기대가 되지만 하나도 남지 않는 백제시대의 목조 건물은 어떤 모습인지 법륭사를 통해 정림사지와 왕궁리사지을 확인하고 싶었다. 동북아 고대 불교의 가람 건축의 결정체를 보면서 말이다.
오사카 도톤보리의 호텔에 여장을 풀고 밤에 조그만 선술집에서 술잔을 비우며 오사카의 밤을 자축했다 다음날 새벽부터 움직였다. 오사카에서 가장 복잡하고 인파로 북적거리는 도톤보리의 새벽은 적막하기만하다. 도톤보리강은 밤의 아우성을 모두 품고 묵묵히 흘러가고 있다. 느끼한 일본식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전철로 향한다.
술취한 사람의 모습은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마찬가지.^^
8자 모양의 야바포 건물을 지난다. 가운데 자이로드롭이 설치되어 있는데 한번 사고가 나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네.
난바역
오사카 난바(難波)는 이름만큼이나 복잡하다. 난 바를 지나는 지하철 역만 두 노선, JR난바역, 공항을 오가는 난카이 난바역까지 있어 미로같은 지하에서 헤메야 한다. 간신히 JR난바역을 찾았다. 나라행 기차는 15분 마다 한 대씩 있어 미리 예약할 필요도 없거니와 곳이 출발역인지라 앉아서 갈 수 있다.
출근시간대 오사카 사람들의 일상은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분주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아침부터 피곤이 지쳐보인다. 대신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는 우리와 달리 책과 신문을 열독하는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하늘 높이 치솟은 오사카의 빌딩숲에서 벗어나 시골의 초록풍경을 보니 마음이 편해진다. 오사카에서 호류지역까지는 30분, 기차삯은 450엔
역사는 경주역처럼 고풍스럽게 꾸며졌다. 합각지붕 3개를 이어 만든 계단이 인상적이다. 내부에 안내센터가있으니 이카루카 일대가 드려진 한국어 지도 한 장 얻을 수 있으니 놓치니 마라.
법륭사는 8시에 문을 연다. 이 개장시간에 맞춰 절을 찾는다면 아무 방해 받지 않고 백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500년의 유물과 교감하기 위해서는 서두르는 것이 좋다. 3~4시간을 법륭사에 할해하고 오후 일정은 다시 JR 기차를 타고, 10분 떨어진 나라 일대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동선 짜기도 좋고 교통편이 맞아 떨어진다. 단 이른아침에는역에서 호류지까지는 운행하는 버스가 다니지 않아 1.6km 는 걸어야 한다. 20여 분 동안 담장너머로 일본 가옥을 기웃거리는 맛도 그만이다.
자판기의 천국답게 술 자판기도 있다. 맥주와 정종을 판다.
호류지입구는 일본의 여느 절과는 달리 소나무가 도열하고 있다. 합천 해인사 솔숲과 보은 법주사 오리숲 처럼 울창하지 않지만 여느 일본 절과 달리 입구부터 우리네 절집 분위기가 풍겨 좋다. 산사의 진입로는 보일 듯 말 듯해야 제 맛인데 높은 난간에 길게 내뻗은 직선의 보행로가 눈에 거슬린다. 상큼한 솔향으로 마음의 때를 씻어내고 큼직하게 걸음으로 속내로 들어간다.
솔숲이 끝나면 묵직한 남대문이 나타난다. 양 팔을 뻗은 듯한 베지색 토담이 무척 정겹게 보인다.
눈에 익은 가구 구조가 보인다. 주두, 첨자, 살미, 소로 등 우리네 가구 구조와 흡사하다. 배흘림 기둥에 꽃이 활짝 핀 듯한 화반까지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대문 사이로 중문과 오중탑과 중문이 보인다. 마치 액자를 두른 그림처럼 보이니 마구 엔톨핀이 돈다.
"호류사를 만나는 역사적 순간." 청소하는 아주머니는 마지막 남은 나의 오욕까지 쓸어 주는 것 같아 고해성사를 주는 신부처럼 보인다.
'이제 극락으로 가는 거야. '
중문까지는 단아한 토담벽이 일렬로 서 있어 마치 좌석에 끌린 듯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다가갈수록 중문과 5중탑은 점점 커지며 급기야 거인 앞에 선 것 처럼 위축된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별로 없어 오로지 작품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
첫 번째 계단 3개에 오르면 좌우로 길게 동선이 형성되어 있는데 동원과 서원 연결하는 보행로다. 다부지게 생긴 중문에 걸맞게 계단은 좌우로 폭이 넓다.
서원가람과 동원가람으로 나눠어져 있다. 물론 가람의 중심은 금당과 오중탑이 서 있는 서원이다. 동원은 몽전과 강원인 전법당이 있다.
백제의 건축 구조를 볼 수 있는 중문 단청 없이 짙은 나무색이 더욱 세련되 보인다. 아무 장식 없는 기단위에는 복층의 중문이 우직하게 서있다. 중문 자체가 인왕상 역할을 하는 것 처럼 믿음직스럽다. 제법 널찍한 계단 위에 오른다. 분명 이 길도 들어가야 하건만 매표소가 왼쪽에 자리 잡고 있어 데둘러 돌아가야만 했다.
강릉 객사문의 배흘림 기둥을 보는 듯하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일본 아스카, 나라시대 건축양식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건물이 안정감 있게 보이는 역할을 한다.
가구 구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금강역사상이다. 위압적이고 사실적인 표정을 지니고 있는데 크고 무서운 표정이 일본 일본 조각품의 특징이다. 잘 뜯어 보면 복근과 옷주름. 비장한 표정까지 꿈틀거리고 있다.
내부에서 바라본 중문의 모습, 다부지게 생겼다. 중문 자체가 국보이며 아스카 시대의 건물로 알려져 있다.학처럼 날아오를 듯한 처마는 없고 살짝 반전만 준 단아한 건물
가구 구조. 복잡하게 짜맞추었다. 내부 구조를 훤히 볼 수 있다.
일본 최초의 세계문화유산, 법륭사 55동의 건축물과 60여 점의 불상이 국보 또는 중요 문화재이며 조각, 경전, 불구 등 500여 점의 보물을 소장하고 있어 가히 일본 아스카 문화의 보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다. 입장료는 1000엔으로 1만원이 훌쩍 넘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곱씹다보면 수 백 배의 가치가 있음을 알 게 될 것이다.
금당과 5중탑의 가람배치 4면에 회랑이 둘러싸여 있으며 가운데 금당과 5중탑은 나란히 서 있다. 오중탑이 상승감 돋보인다면 금당은 넉넉한 품새가 자랑이다. 가요 '향수'를 부른 이동원과 박인수의 화음이랄까. 단청이 없어서인지 담백한 된장국 냄새가 난다.
강당에서 바라본 금당과 오중탑 그리고 남대문. 맨 앞에 있는 것은 동롱이다. 가람배치는 이렇게 십자구조를 하고 있다. 고구려가 1금당 3탑 구조, 신라는 1금당 쌍탑이고, 백제는 1금당 1탑이다. 호류사는 백제가람과 방향만 다를뿐 1금당 1탑 구조는 동일하다. 2004년 호류사 발굴 조사를 했더니 현재의 동서가 아닌 남북의 모습인 약초가람이었다니하니 부여 정림사지와 같은 가람배치다. 당시 실력자인 쇼토쿠 태자는 백제 승려인 혜총을 스승으로 모셨고 백제 건축가를 불러 사찰을 세우도록 했다. 여러 법령을 제정하고 불교를 국가 통합의 근간으로 삼았다. 백제 이민자를 받아 들여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기도 했다.
백제의 목탑을 상상할 수 있는 오중탑 만약 백제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목탑 하나 쯤은 남지 않았을까? 하긴 전승국 신라도 남아 있는 목탑이 없으니 무슨 기대를 할까? 일본에 수많은 내전이 있었음에도 남아 잇는 목탑이 많다는 것이 너무나 부럽다. 그나마 남아 있는 백제석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 미륵사지석탑, 왕궁리오층탑이 전부다. 목탑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목탑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백제탑을 보고 싶다면 법륭사를 찾으라. 폐사지의 목탑자리에 바로 이 오중탑을 대입시키면 맞아 떨어질 것 같다. 부여의 백제문화단지에 가면 능산리사지를 복원해 놓았는데 바로 이 법륭사를 모델로 삼았다. 탑이 잘 보이는 곳을 옮겨 다니며 아예 자리를 잡고 오중탑을 뜯어 보며 감탄사를 연발해본다. .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오중탑으로 높이가 무려 31.5m다. 1400년 동안 딱 두차례 보수 공사만 했을 뿐, 원래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올라가면서 지붕은 10-9-8-7-6의 비율로 체감하기 때문에 하늘로 날아갈 듯 날렵하다. 상승감과 안정감이 엿보인다.
몸돌의 체감률은 우리 탑과 비슷해 정림사5층석탑과 왕궁리 5층석탑의 확대판으로 보면된다. 위로 올라갈수록폭은 점점 작아지는데 5층 지붕의 폭은 1층의 딱 반이다.
수막새는 백제의 막새처럼 잎새가 도톰하고 연밥이 큼직한 것이 자랑이다. 그래서 온화하고 유연하다는 평응 듣는다. 암막새는 당초문양이 새겨져 있다. 백제의 기와 제작 기술은 신라와 왜에 전해졌다고 하는데 와박사제도까지 두어 아스카 기와에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바로 이 기와를 보면 된다. 부연에 청동장식
부여박물관 와당
기단은 부석사 무량수전 기단처럼 장식이 없다. 동서남북 사방에 문이 있어 다양한 조각상을 볼 수 있다. 동쪽에는 유마거사와 문수보살과의 문답장면이, 서쪽에는 석가 사리의 분할장면, 남쪽은 미륵보살 설법 장면 북쪽으로 석가의 열반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북쪽은 오열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담고 있다.
도교의 이상향을 모습도 볼 수 있다.
2층 기단
상승감이 돋보이는 상륜부
중첩된 지붕
투박하게 생긴 배례석
담징의 벽화가 그려진 호류지 금당
중층구조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조건물로 쇼토쿠 태자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세워졌다.쇼토쿠는 나라에서 20km 떨어진 이곳에 궁궐을 짓고 원찰로 호류지를 세웠다. 화강암을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세운 목조건물로 1400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켰다는 것은 경이에 가깝다. 어찌보면 지구상 유일한 백제 건축양식이라 하겠다. 내부에는 불상과 벽화를 볼 수 있다.
중앙에는 금당의 상징인 석가삼존불이 자리하고 있다. 석가여래를 가운데 모시고 약사보살과 약왕보살을 협시불로 모셨다. 석가모니 뒤편으로 큼직한 광배를 가지고 있고 양 협시보살 역시 물방울 모양의 광배를 지니고 있다. 불상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쇼토쿠 태자를 기려 '안작지리(鞍作止利)'로 하여금 623년 불상을 제작케 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안작지리는 백제의 장인 이었으니 이 불상은 백제 기술의 집약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무릎 아래 치렁거리는 옷주름은 부여박물관의 납석여래좌상과 청양 도기좌대와 닮았다. 백제의 손맛이 현해탄을 건너간 것을 증명해주고도 남는다. 단 일본학자들은 다른 주장을 한다 얼굴이 가늘고 긴 얼굴은 백제의 얼굴이 아니라 중국인이나 서양인에 가깝다고 주장하면서 백제 전래설에 반대의견을 내고 있다.
고구려에서 도래한 담징이 그렸다는 금당벽화는 이렇게 화려한 채색벽화였다. 아미타 정토삼존불로 오른쪽에 최고의 걸작인 관음보살이 서 있다. 중국의 윈강석불, 경주 석굴암과 더불어 동양 최고의 3대 미술품의 하나로 손꼽힌다.
1949년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칙칙한 흑백으로 바뀌었다.
법륭사 금당에서는 완주 화암사의 하앙구조(툭 튀어나온 부재)를 볼 수 있다.
2층에는 난간이 자리하고 있다.
용이 기둥을 휘감아 돌고 있다.
익살스런 귀면이 보인다. '쎈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요괴는 이런 모습이 아닐까.무서운 인왕상을 보다가 그 해학적인 모습을 보니 반갑다.
모서리마다 재미난 동물이 조각되어 있는데 코끼리 같다. 나무결이 코끼리 가죽문양처럼 보인다.
털이 부시시한 사자는 활짝 웃고 있다.
아래 기둥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용. 비늘까지 섬세하게 새겨 넣었다. 용의 수염은 청동으로 말아 올렸다.
음양의 법칙일까. 다른 쪽 용은 하강하고 있다.
코가 오똑한 귀면 귀와와 부드러운 백제형 와당을 볼 수 있다.
근정전이나 불국사처럼 회랑은 건물의 격조를 높이는데 일조를 한다. 1400년전 모습 그대로이며 여백의 미가 자랑이다.'ㅁ'자 모양으로 경내를 감싸며 부속건물들을 연결하고 있다.
회랑의 매력은 16:9 크기의 창문에 있다.자연채광을 통해 회랑을 밝게 했고 자연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석등은 대나무 모양이 석등
9칸 구조의 법륭사 강당.양쪽 칸은 다소 넓고 벽으로 막힌 것이 특징. 내부에 아스카 시대의 청동불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 불상도 몇 점 보인다.
약사불로 우리네 불상을 닮았다.
구석구석 살펴보고 자리에 주저 앉고 백제의 폐사지도 더듬어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나머 볼 것도 많은데 그런 생각이 들자 서둘러 빠져 나왔다. 실루엣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좋다.
대보장전 가는 길에 성령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쇼토쿠 태자를 모시고 있다.
가마쿠라 시대 보물을 보관하던 창고로, 습기 때문에 기둥 위에 건물이 올라있다. 얼마나 보물이 많았으면 이런 창고만 무려 33동이나 있었다고 한다. 나라시대 스님이 식사했던 식당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 건물로 통하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유려한 지붕선
대보장원에는 호류사의 보물들로 가득차 있는데 거의 국보급 유물로 삼국시대 불상도 만날 수 있다.
상상을 초월한 보물도 많은 데 특히 옥충주자는 2563마리의 비단벌레의 날개를 붙여 만든 것으로 자개 빛깔이 난다. 그 많은 비단벌레의 일일이 날개를 뗀 것도 대단하지만 그걸 감쪽같이 붙인 것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하단은 부처가 전생에 배고픈 어미 호랑이에게 몸을 보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옥충기법은 삼국시대 금동투각장식에 이용된 기법으로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기에 한반도에서 건너 간 것으로 추정된다.
미스 백제. 백제관음상
한동안 나를 얼어 붙게 만든 작품은 바로 백제 관음상. 원래 사진을 찍을 수 없지만 카메라에 담지 않고서는 그 감동을 오래 간직할 수 없을 것 같아 몰래 사진을 찍었다. 백제 관음상이란 이름처럼 일본학자들도 백제에서 넘어온 명작임을 인정하고 있다.백제왕이 쇼코쿠 태자에게 보낸 선물로 추측이 된는데 단순한 불상이 아니라 1400년전 백제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어 의미있다. 우선 늘씬한 8등신의 몸매로 수려한 얼굴형이어서 '동양의 비너스'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하늘하늘한 천의를 입고 있어 8등신의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깨축에 있는 하늘거리는 천의 자락은 졸졸 물이 흐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팔등을 거쳐 다리를 더듬어 연꽃 위에 살포시 얹은 천의자락의 곡선미가 탄성을 내지르게 한다.
투조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길죽한 얼굴에 가느다란 눈웃음 오똑한 코가 일품이며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지고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미소보다 훨씬 세련되었다고 할까. 직각을 한 손은 손바닥을 펴고 있다. 왼손은 엄지와 검지로 비스듬한 정병을 살며시 쥐고 있다. 허벅지에 정병이 붙어 있지만 눈여겨 보지 않으면알아차리기기 힘들다. 이 정병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 하나에 생명력을 담고 있다. 이것이 이 불상의 하이라이트라 하겠다. 침을 꿀꺽 삼키며 정병잡을 손가락에 한동한 시선을 고정시켰다. 매끈한 팔목에는 세련된 팔찌를 차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몸매가 유연하게 내려오고 맨 발은 연꽃 위에 서 있다. 물방울 모양의 광배 한가운데에 큼직한 연꽃이 보이며 백제인의 너른 마음을 닮은 것 꽃님이 여유롭다. 광배는 길죽한 대나무로 연결되어 있어 자연미를 더해준다.
휴게소에서는 따끈한 차를 무료로 마실 수 있다. 다다미 의자가 놓여 있어 일본 전통차 마시기에 좋다.
수학여행지로 인기가 높은데 가이드 선생이 직접 인솔하면서 대화식으로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원가람의 중심인 몽전. 팔각형 목조 건축물인 몽전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8개의 잎사귀를 가진 연꽃 형상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쇼코쿠 태자의 모습을 조각한 구세관음상이 모셔져 있는데 1년에 두 번 개방된다.
쇼코쿠 태자
동대문을 지나면 동원가람이 나온다. 이곳 종각은 고구려의 창고인 부경을 닮았다. 몽전(夢殿).어떤 좋은 꿈을 꾸었기에 이런 멋진 이름을 지었을까.
전법당 건물은 측면은 수덕사의 옆모습을 닮았다.
몽전의 회랑
가람을 감싸고 있는 토담이 참 맘에 든다. 오랜 역사를 차곡차곡 쌓은 느낌이랄까.
불국사 청운교 앞처럼 이곳은 수학여행 사진 찍는 포인트다.
역까지는 시내버스 탑승 . 나라교통 마크가 사슴이다.
호류지역에서 나라역까지는 10분. 자리도 널널하네. 거기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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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퇴색된 법륭사의 금당벽화와 백제의 관음상이 내내 지 눈길을 잡네요, 즐감했습니다~~ ^^*
다녀오긴 했는데 다시 설명을 읽으니 새삼 공부가 됩니다
백제인의 기술이 집약되어 있는 법륭사의 전각들을 보면서 감동이 차오릅니다.
옥충주자의 아름다운 자개색과 정밀한 세공 솜씨가 정말 놀랍고 백제 관음상의 늘씬한 자태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네요.
일본 여행을 간다면 꼭 들러보고 싶은 곳이 되었습니다. 대장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