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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는 남편이 죽고 나서 주몽을 만나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시조모로 화려하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만약 주몽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름 없는 과부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겠지만 주몽과의 만남으로 세기의 연인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지지 기반이 약했던 주몽에게 철저히 지지 세력이 되어줌으로써 찬란한 고구려의 건국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주몽은 고구려를 세워 왕위에 오른 후 북부여에 남겨두고 왔던 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음으로써 소서노를 배신하게 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한반도의 한강 유역으로 가서 백제를 건설하게 된다. 이로써 한 여인이 고구려와 백제라는 두 거대 제국을 건국하는 주도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소서노는 찬란한 민족사의 백제와 고구려의 건국의 어머니로서 역사에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소서노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을 단결시키고 치밀한 전략으로 고구려를 세운 인물로 우리 민족 최초의 국모(國母)로 칭송하는 경우도 있다. 민족사의 찬란히 빛나는 고구려와 백제(반도부여) 건국의 실질적인 주도자라고 할 수 있고, 연인이자 숙명적 라이벌인 주몽과의 만남과 이별은 어떤 드라마도 만들어 내지 못할 ‘세기의 사랑과 배신’일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서노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면 과연 소서노는 실제로는 어떤 인물일까?
주몽과 소서노, 그 허깨비 사랑
드라마에서 ‘주몽’과 소서노의 사랑은 세기의 사랑인 것은 분명한 듯한데 문제는 ‘주몽’과 소서노의 사랑이 과연 있었던 것인가를 묻게되면 일은 복잡해진다. 즉 소서노는 실존인물이라고 볼 수 있지만 주몽은 태조 왕건과 같은 구체적인 실존인물로 보기 어려운데다 설령 주몽이 실존인물이라고 해도 소서노의 활동연대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이들의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이승에서는 애당초 서로 만날 수가 없는 사람들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소서노와 주몽의 사랑을 증명하는 문건들이 거의 없는데다 그것도 주로 『삼국사기』의「백제본기」에 국한되어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한(漢)나라 이후 역사학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특정한 사건들을 고증하거나 검증하는 것은 시기만 알면 크게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가 없다. 사서들이 서로 겹쳐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여러 사서에 그 기록들이 나타나는 수가 많고 하나의 사서 안에서도 본기와 열전으로 나눠져 있어서 같은 인물에 대해서 다양한 분석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양국의 건국에 깊이 관여했다는 분의 기록이 「백제본기」에만 나타난다는 것은 의문스러운 일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와 「백제 본기」의 주몽에 대한 시각이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백제 본기」에서는 소서노의 역할을지나치게 강조 하는데 반하여 「고구려 본기」에서의 주몽은 누구의 도움 없이 자수성가한 인물로 묘사되어있다. 「백제 본기」에서 말하는 식의 데릴사위 형태는 아니다. 즉 주몽은 졸본천에서 궁실을 지을 여유가 없어 단지 비류수 강가에 초가(草家)를 짓고 거기에 살면서 나라를 고구려라 하였다고 한다. 「백제 본기」대로 한다면 주몽(건국시조)과 소서노(부여 왕후)의 결합은 국가지대사(國家之大事)인데 이 중요한 사건이 「고구려 본기」에는 나오지 않고 「백제 본기」의 내용 중 일부를 이설(異說)이라고 하여 간략히 소개한 정도[28자]에 불과하다.
그러면 「백제 본기」는 어떨까? 소서노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나있는 거의 유일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태는 해부루의 후손으로 북부여에서 졸본으로 와 연타발의 따님인 소서노(召西奴)와 결혼하여 불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가 세상을 떠나 과부가 되었는데 부여에서 주몽이 졸본으로 와서 소서노와 결혼하였다. 소서노는 주몽을 도와 새 나라인 고구려를 세우는데 공을 컸으므로 주몽은 아내인 소서노를 매우 사랑함은 물론이요 우태의 후손인 불류(비류)와 온조도 극진히 사랑하였다. 그런데 주몽임금이 부여에 계실 때 낳은 유류(儒留 : 유리)가 찾아오자 불류와 온조는 많은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백제를 세웠다.(『三國史記』「百濟本紀 」)”
이상이 「백제 본기」의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타발이나 소서노가 누군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소서노나 연타발에 대한 이야기는 신뢰할만한 다른 역사서에는 일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여러 기록들을 토대로 보면 연타발과 소서노 이야기에 가장 근접한 기록으로 매우 일관성있게 여러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록은 ‘부여의 왕 또는 부여의 왕자가 공손도(公孫度 : ? ~ 204)의 딸과 결혼하여 요동 만주 일대에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내용이다.
『北史』에는 “동명의 후손 구태(仇台)는 어질고 신의가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우고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얻어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처음에 백(百) 집의 사람을 거느리고 강을 건넌[濟] 까닭에 백제(百濟)라 한다. (『北史』卷94 「百濟」).”고 적고 있다.
『수서(隋書)』의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두 기록 모두 부여왕의 후손인 구태(仇台)가 공손도의 딸과 결혼하여 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있다.
문제는 그 시기가 AD 2세기말~3세기 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구태라는 분은 누구인가?
『삼국사기』와 『후한서』에는 AD 120년을 전후로 하여 고구려왕이 마한과 예맥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尉仇台)가 군사 2만을 이끌고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격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大祖大王 ; 『後漢書』卷115). 이 기록들에서 나오는 위구태가 바로 구태인 듯 보이지만 활동 시기가 맞지 않아서, 위구태는 (구태와는 분명 관계가 있는 사람이지만) 구태는 아니다. 부여계의 왕 이름들은 비슷한 경우가 많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2권 백제는 없었다 참고).
그런데 진수의 『삼국지』와 『북사』의 기록을 보면 공손도는 구태와 함께 동으로는 고구려를 치고 서로는 오환을 공격하여 요동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AD 190년경에는 이들은 중원으로 진출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려고 하고 있다(『三國志』「魏書」公孫度傳). 이 때 한나라는 동탁(董卓 : ? ~192)의 집권 시기였다. 『삼국지』에 따르면 당시 구태의 후손 가운데 권력자는 울구태(蔚仇台)라고 한다. 따라서 이 울구태라는 분이 공손도의 따님과 결혼하는 구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태 또는 구태는 다른 왕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이름으로 사용할 때는 울구태가 정확하다. 물론 민족 시조 가운데 한 분의 휘(諱)를 함부로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정확한 성을 알기가 어려우므로 ‘부여왕 울구태’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로 이 분이 백제(반도부여 또는 남부여)의 시조이다.
부여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한 책이 없어서 부여왕의 계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삼국지』(부여전)나 『후한서』(부여전), 『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토대로 보면 부여왕은 위구태(尉仇台) - 부태(夫台) - 울구태(蔚仇台) 등의 순서로 왕위가 승계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조조(曹操 : 155~220 : 위나라 무제)의 집권기(후한 헌제)에는 부여왕이 요동에 속하기를 요구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이 기록은 『후한서』나 『삼국지』에 그대로 나오고 있다. 『삼국지』에는 “부여왕 울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복속되었고 당시 구려(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했는데 공손도는 부여가 두 적 가운데 위치하므로 종실(宗室)의 딸을 울구태에게 시집보냈다(『三國志』「魏書」東夷傳).” 라고 한다.
이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결국 구태는 바로 부여왕(扶餘王) 울구태(蔚仇台)이며 소서노의 부군(夫君)이 되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이 분은 현직 부여왕이자 백제의 건국시조이다. 그런데 드라마 ‘주몽’에서는 일 개 상단의 행수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중원 천하를 제패하려고 했던 공손도를 약삭바른 장사꾼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공손도라고 하니 독자들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사실은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한 인물이다. 바로 나관중『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로 공손강(公孫康)의 아버지요 공손연(公孫淵 : ?~238)의 할아버지인 인물이다. 공손강은 관도대전(200)에서 대패한 원소(袁紹 : ?~202)의 아들 원희(袁熙 : ?~207)와 원상(袁尙 : ?~207)이 피신해왔을 때 이들의 목을 베어(207) 조조에게 보낸 그 사람이다.
대부분의 경우 공손씨는 한족(漢族) 계열로 보고 있으며 연나라 왕실을 구성한 가문이기 때문에 드라마 ‘주몽’에서 공손도를 일개 상단으로 묘사한 것은 작가의 중대한 실수이자 앞으로 뒷감당하기가 매우 힘든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소서노와 주몽의 결혼이라는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우리는 상당한 혼란에 빠진다. 이 기록상에 나타난 등장인물 가운데 존재가 확인되는 사람은 AD 2세기 인물인 우태(울구태)와 소서노인데 소서노와 주몽의 사랑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고구려의 건국 연대가 AD 2세기 후반 ~ AD 3세기 초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고구려는 3세기 쯤에 이르면 이미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중원의 강력한 지배자인 위나라와 일전을 겨룰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세력 변화 과정을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보면 이 점을 확연히 알 수 있다.
『한서(漢書)』에는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징발하여 오랑캐들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고구려인들이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고구려인들을 강박하자 그들은 오히려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 …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오히려 피살되었다(『漢書』卷99 「王莽傳」始國四年).” 라는 기록이 있어 고구려가 이미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 때가 BC 1세기말이다. 또 같은 기록에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로 예맥을 사용하고 있다.
『후한서』에는 “(AD 118년) 고구려 왕이 마한과 예맥 등의 기병을 이끌고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왕은 왕자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후한(後漢)의 주군 군사들과 함께 고구려 군을 격퇴하였다(『後漢書』卷115).”라고 하는데 이 기록은 그대로 『삼국사기』에 나타나고 있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大祖大王). 고구려가 강력한 세력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AD 238년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가 공손강․공손연를 정벌할 당시 고구려는 사마의․관구검의 위나라 군대와 공조하여 공손씨(연나라)를 멸망시켰다. 238년 당시 공손강(공손도의 아들)․공손연 부자와 그의 혈족 대부분 참수당했다.
연나라가 멸망한 후 고구려는 신속히 요동으로 진출하여 자주 위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AD 242년 고구려 동천왕은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하여 위나라와 대치하고 한반도 남부지역도 경략한다. 이것이 결국 위나라 - 고구려의 요동전쟁(AD 246)으로 나타난 것이다. 고구려는 한때 수도가 함락당하는 국가적 위기에 처했으나 밀우, 유옥구, 유유 등의 영웅적인 투쟁으로 한족(漢族)의 위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수도를 탈환하였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東川王).
당시 위나라 군대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을 가진 국가라고 할 수 있는데 고구려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굳건히 대치함으로서 한족(漢族)의 침략으로부터 요동과 만주를 보호했던 것이다.
이를 보면 무작정 주몽과 소서노의 사랑 이야기에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과 소서노가 사랑에 빠질 시기에 고구려는 이미 강성한 국가로 세계 최강 수준의 군대와도 일전을 겨룰 정도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AD 2세기는 후한 시대로 이 때만 해도 역사학이나 사관의 기록체제가 매우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엄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후로 편찬된 사서들의 신뢰도는 매우 높아졌다고 봐야한다. 그렇다면 결국 고구려의 건국은 기원전(BC)에 이루어졌을 터인데 소서노의 활약 시기는 AD 2세기 후반~3세기가 되어 소서노가 주몽을 사랑하고 싶어도 도저히 만날 수도 없는 상태가 된다. 마치 양귀비(楊貴妃)가 이순신 장군을 사랑할 수 없는 것 처럼.
소서노, 다시 평범한 여인으로
진수의 『삼국지』에 따르면, 공손도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① 공손연(公孫延) … ② 공손도(公孫度 : ?~204) … ③ 공손강(公孫康) … 공손공(公孫恭) … ④ 공손연(公孫淵 : ?~238)
그러면 공손도의 가계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 요동 반도를 장악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당시 요동반도의 지배자인 공손역(公孫□)과 공손도의 아버지 공손연이 종씨(宗氏)라는 데 있다. 공손역과 공손연은 동성(同姓)이지만 직계 가족 관계에 있지는 않았다. 공손연(公孫延)은 세력가(勢力家)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도망다니는 신세였다. ([주] □은 王 + 或)
공손역의 아들 이름은 공손표(公孫豹)로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공손도(公孫度)의 어릴 때 이름이 공손표(公孫豹)였기 때문에 공손역은 공손도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했다고 한다(『三國志』「魏書」公孫度傳). 즉 공손도는 공손역의 양아들인 셈인데 공손역의 후광으로 높은 벼슬에 오르고 후일에 요동태수가 된다. 그런데 공손도가 요동태수가 되는 시기는 동탁(董卓 : ?~192)의 집권 시기에 해당한다. 즉 AD 190년을 전후로 공손도(公孫度)는 요동반도를 장악하고 『삼국지』의 영웅이자 위(魏)나라 무제(武帝) 조조(曹操)는 그를 무위장군(武威將軍)에 임명하지만 요동반도는 중국의 중앙정부와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정부에 가까운 상태였다.
바로 이 공손도의 따님을 소서노라고 봐야한다. 따라서 소서노는 민족적 계열이 다소 불분명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한족(漢族)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소서노가 활약할 수 있는 시기도 길게 잡아도 AD 170년~220년 정도로 봐야한다. 당시 연나라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중앙정부(후한, 위)와의 갈등과 쥬신족(한반도 및 동북방유목민)들의 압박을 견뎌야 했다. 그런데 부여도 이와 유사한 처지로 강력한 신흥 세력인 고구려의 위협과 주변의 압박에 대해서도 방어하지 않으면 안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것이 결국 한족(漢族)과의 결혼동맹으로 나타난 것이고 당시 부여왕 울구태(구태 또는 우태)는 연왕의 딸(소서노)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울구태는 백제(반도부여)의 실질적인 건국시조이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2권 백제는 없었다 참고).
그러니까 소서노는 연왕(燕王)의 따님으로 고구려와는 전혀 무관한 인물이고 부여의 부흥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소서노를 홍보하는 ‘주몽’ 제작팀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담대함을 가졌으나 약소국의 백성이기에 죽음보다 아픈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생동안 사랑했던 연인의 아내가 될 수 없었지만 그를 정상으로 끌어올리는 가장 지혜롭고 든든한 조력자의 위치에 선다. 사랑을 아끼지 않았지만 사랑이 전부는 아니었던 한민족 역사가 기억하는 최초의 여왕”이라는 표현은 사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소서노는 그저 한족(漢族) 귀족가문의 평범한 규수로 부여왕과 정략 결혼한 것일 뿐이다.
소서노가 평범한 한족 여성에 불과하다고 말하면 이 드라마의 매니아들은 경악할 지도 모르겠으나 실제의 기록들을 면밀히 조사해 보면 그런 결론에 도달한다. 즉 백제의 시조로 추정되는 우태에 관한 기록은 많지만, 소서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소서노는 한족(漢族)의 여인인데다 그 당시는 요동의 정치적 격변기로서 만약 소서노가 약간이라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요동 만주 지역의 역사책에 기록이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당시의 일을 기록한 진수의 『삼국지』에는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에 대해서도 상당히 상세히 기록한 사료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소서노는 공손도 가문의 사람이므로 그녀가 요동과 만주, 한반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공손씨의 열전에 충분히 나와있었을 것이다.
공손도의 가계는 위나라의 명장이자 제갈량(諸葛亮)의 라이벌이었던 사마의(司馬懿)에 의해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운명을 맞이하기 때문에 그녀가 어떤 역할을 했다면 분명히 역사의 기록에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소서노는 우리가 과장되게 아는 것과는 달리 평범한 한족 여성으로 부여왕과 정략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기록을 찾기 어렵다. 소서노는 귀족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지만 결국 요동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친족 전체가 몰살당했던 불행한 여인이었다. 아마 울구태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교살(絞殺) 당하는 슬픈 운명의 여인이었을 것이고 울구태로 인하여 오히려 생명을 건진 한족의 여인이었을 뿐이다.
결국 주몽은 소서노를 만날 수도 없거니와 설령 만났다하더라도 서로 2백년 이상의 시간적 격차가 있어서 그들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허깨비 사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드라마 ‘주몽’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아니면 ‘역사의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 거리지는 않을지 주목된다.
결론적으로 드라마 ‘주몽’은 위대한 백제(반도부여)의 시조를 일 개 상단의 행수로 격하시키고 평범한 한족의 여성에 불과한 인물을 위대한 국모로 둔갑시킴으로써 우리 민족사에 중대한 역사적 왜곡을 초래할 수도 있다. 물론 고대사 영역은 인기가 없어서 연구자들도 별로 없기 때문에 작가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 고대사의 영역을 드라마로 만드는 시도는 참으로 권장할만한 것이지만 좀더 철저한 고증을 통해서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