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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Hegel)이 말하였듯이, ‘최종적으로 만족되어야 할 것은 욕구(Bedarf; need)가 아니라, 의견(Meinung; opinion)이다.’ 어떠한 범위의 상상력에 대해서든 가장 멀리 영향을 끼치는 파워의 형태는 돈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지배하는 것이다.
- 홈즈 판사.
민주주의는 일종의 종교이다. 우리는 그 말이 분명 틀렸는지 인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믿음과 유토피아는 인간이성의 가장 고상한 연습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이성의 스파크를 일으키기 위해 불평불만분자의 초상 앞에서 숙명론적으로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 W. 제임스.
1. 고전적 실용주의의 발생
신대륙 미국에서 철학을 말하는 것과 미국적인 철학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후자의 의미에서 미국 철학의 역사는 불과 100년 남짓하다. 이는 남북전쟁이 끝나고 도시화,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미국이 공업국가로 변하는 시기에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태동한 미국적 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전쟁 이후 시대를 지배했던 철학의 흐름은 우리가 현재 ‘실용주의’라 부르는 낙관주의적인 사조였다. 어떤 면에서 실용주의는 이러한 미국의 역사성을 반영하고 있는 낡은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연안조사국의 측량조수로 잠시 일하다 밀포드(Milford)라는 보스톤 시 근교에서 오랫동안 칩거생활을 했던 찰스 퍼스(Charles S. Peirce, 1839-1914)가 시작한 일련의 철학에 실용주의라는 이름이 부여되었고, 이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에 의해서 대중화되었으며, 이후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에 의해서 20세기로 확장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실용주의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며, 어떤 태도로 그 문제를 접근해 들어가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발상은 19세기 말 유럽과 신대륙에서 발생한 가장 풍요롭고 독자적인 철학 사건들 가운데에 하나가 되었다. 유럽의 니체와 동시대 인물인 퍼스는 “관념을 명석하게 하는 방법(How to Make Our Ideas Clear”(1878)(Peirce. 1992, The Essential Peirce: Selected Philosophical Writings. eds. J. Houser & C. Kloesel.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24-141)이라는 논문에서 최초로 자신의 실용주의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그것은 이념들의 적용, 즉 실질적인 효과성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밝히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를 위해 그의 초기 추종자들인 제임스와 듀이는 일말의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합의를 추구함에 있어서 실용주의의 효과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러한 제임스의 철학적 준칙은 한 마디로 “진리는 작동하고 있는 것(Truth is what works)”이다. 그의 진리관은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에 있는 사물(a thing in the making)”을 중시한다. 작업과정에 있는 사물들의 영역을 끌어내려고 하는 초기실용주의 철학자들은 각자 독창적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자가 공유하는 실용주의 철학의 공통이념은 확실성과 불변의 방법을 세계에 대한 실험(experimentation)과 믿음으로 대신하려는 점이다. 즉 제작과정에 있는 사물들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을 ‘실험적으로’ 생각하는 것임과 동시에 세계에 대한 믿음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습관을 수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실험 안에 무엇이 존재하고 어떤 점이 좋은가에 있을 것이다. 실험주의의 기법으로서 실용주의는 과학적 실천들이 내포되어있는 철학적 함의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고 이러한 실험주의는 개념들이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에 종속’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실용주의는 바로 이것을 얻는 방식을 이룩하는 것이다. 제임스는 실용주의를 이러한 사실에 대한 실험실에서의 경험으로부터 각자 생활양식에서 조우하게 되는 개인적인 경험들로 이끌고자 하였다. 요컨대, 어떤 개념의 의미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반드시 숙고되어야할 점은 필수적으로 어떤 실천적인 결과물들이 그 개념의 진리성으로부터 유발될 수 있는가이다.
제임스와 비슷한 맥락에서 퍼스는 실용주의를 “어려운 단어들과 추상적인 개념들의 의미를 확실히 하는 방법”이라 정의한다(Peirce 2008, 『퍼스의 기호학』. 김동식 ․ 이유선 옮김. 서울: 나남, 412). 즉 어떤 탐구과정도 탐구를 행하고 결과를 평가하기 위한 일련의 기본규칙들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실용주의자들은 구조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며 경험, 언어 및 탐구의 상호주관적이며 사회적이고 공동적인 차원들에 우선권을 부여한다. 로티와 함께 신실용주의를 대표하고 있는 나의 스승 번스타인(Richard J. Bernstein)이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실용주의는 어떤 원칙적 주장들로 이루어져있거나 어떤 통일된 방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번스타인의 이러한 정의는 젊어서 헤겔을 많이 읽었던 듀이의 영향이 크다. 듀이는 자신의 실용주의 독트린에서 모든 것을 시간화하고(temporalize) 아무 것도 고정된(fixed) 채로 내버려 두려 하지 않았으며 헤겔을 따라 철학은 자신의 시대를 사상으로 포착하는 데 충실하였다. 그에게 있어 시간화의 대가는 우연성(contingency)이었다. 아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모든 실용주의는 이러한 우연성에서 시작한다. 그가 자신의 정치철학에서 늘 주목했던 민주주의 역시 어떤 정부형식이나 사회적 편의주의가 아니라 생활의 형식, 즉 수단과 목적으로서의 경험과정을 전적으로 믿는 유일한 생활형식이다.
2. 실용주의의 에토스
위에서 간단히 살펴본 고전적 실용주의자들, 즉 퍼스, 제임스, 듀이의 사상들은 서로 상충하는 철학적 기질과 그들을 사로잡은 상이한 문제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번스타인은 이 전통을 독특한, 때로는 경쟁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대화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실용주의 사상가들은 자유롭게 서로 다른 탐구와 경험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전통철학과 근대철학을 지배해 온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이분법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또한 모든 과학주의, 즉 과학만이 정당한 지식을 규정해주고 있다는 신념에 반대하면서 한편으로 철학적 반성은 과학적 발전과 실천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고 굳게 믿었다. 필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번스타인이 제시하고 있는 방식으로 실용주의 에토스를 아래의 다섯 가지 상호관련 된 근본 주제들로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Bernstein 2001, 「프래그머티즘, 다원주의, 그리고 부상자의 치유(1988)」, Menand, Louis ed. (2001). 『프래그머티즘의 길잡이』. 김동식 ․ 박우석 ․ 이유선 옮김. 서울: 철학과 현실사, 502).
첫째, 실용주의 사상가들이 취하고 있는 에토스는 반근본주의이다. 지난 세기말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주장했던 것과 다를 바 없이 실용주의 사상가들 역시 철학의 영역에서 보편주의, 본질주의, 존재론적 실재주의, 거대담론 등의 요소들을 거부한다. 신실용주의자인 로티(Richard Rorty)는 근본주의를 ‘신의 눈으로 본 관점’이라 표현하였다. 서구의 근대사상과 계몽사상은 이러한 신적인 근본주의와 유사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는 것이 과학이며 그 배후에 인간 이성의 힘이 있다. 특히 근본주의, 보편주의, 본질주의 등의 포기를 주장하고 있는 신실용주의적 인식론은 종종 철학에서 시각주의 또는 상대주의로 전개된다. 마찬가지로 신실용주의는 윤리학에서는 상대주의 또는 허무주의로 이행되기도 한다. 확고한 기초 없이 또는 그것에 대한 희망조차도 없이 올바른 행태에 대한 어떤 영구적인 표준도 제시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리적인 판단은 영원한 진리와 제휴될 수 없으며 윤리적 평가는 취미의 문제에 지나지 않게 된다. 번스타인에 의하면, 모든 실용주의 사상가들은 약간씩 다른 형태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둘째, 이러한 근본주의에 대한 실용주의적 대안은 철저한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이다. 근본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특정형태의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기 쉽다. 하지만 근본주의에 대한 실용주의자들의 대안은 “우리가 선입견을 가진 탐구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고 결코 모든 것을 일거에 문제 삼을 수 없다하더라도 이후의 해석과 비판에 열려있지 않은 신념이나 테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Bernstein 2001, 505)이다. 퍼스에 따르면,
철학은 그 방법에 있어서 주의 깊게 살피는 데 회부될 수 있는 오직 확실한 전제들로부터 진행해 나아가고 오히려 어떤 논점이 결정적이라는 것보다는 그 논점들의 다층성과 다양성을 신뢰하는 범위 내에서 성공적인 과학들을 모방해야 한다. 철학의 추론은 가장 약한 고리보다 강할 것이 없는 하나의 사슬을 형성해서는 안 되고 그 추론들이 충분히 많고 서로 긴밀히 관련되어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 하나하나의 올들이 아무리 약할지라도 그것이 서로 엮여 굵은 밧줄을 형성해야 한다(Peirce 2008, 106 일부 수정번역).
퍼스가 위에서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지식은 오류가능하고(fallible), 그 지식이 적용될 때 수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주장은 테스트와 비판에 열려있지 않으면 안 된다. 실용주의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실재에 대한 지식은 표준, 규범 및 어떤 문제에 적용된 주요규칙들이 직접적인 과정에서 선택되고 검증되며 수정된다. 그것은 이전 탐구공동체의 산물이라는 사회적 숙고의 과정에서 구성된다. 요컨대, 실용주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철학은 그 자체로 오류가능하며 그래서 잠정적이고 해석적이며 언제나 수정될 수밖에 없다.
셋째, 모든 철학이 오류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한, 실재에 대한 개념들의 기원을 드러내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이 개념이 어떤 과학자 공동체 개념과 긴밀하게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실재(reality)는 공동체의 궁극적인 결정에 의존하며”(Peirce 1992, 54; 2008, 152), 이러한 공동체에 토대하여 자신의 기호학적 인식론을 수립한다. “의사-초월론적 철학 기능(a pseudo-transcendental philosophical function)”을 떠맡고 있는 그의 공동체 이념은 모든 추론 과정의 배후로 작용한다. 예컨대 훈련이 되어있고 공정한 학자가 어떤 이론을 세심하게 검토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모든 사람은 그 이론에 대해서 의심을 품어야할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에는 사실상 과학자 공동체의 탐구가 진리로 수렴되리라는 낙관적인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Peirce 2008, 472). 이처럼 실용주의자들은 자아의 사회적 성격과 실천적인 상호주관성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의식의 철학과 주체성의 철학을 해체하고자 하였으며 그들 역시 포스트모던 사상과 다를 바 없이 주체의 탈중심화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탐구공동체 내에서 실재를 발견하는 일은 그 공동체의 실천이 합의의 지배를 받아야함을 의미한다(Peirce 2008, 148). 이것은 사실적 주장이나 도덕적 주장을 판단하기 위한 어떤 표준들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태와 무관한 표준들이 아니라 특정한 프로젝트에 관여하거나 또는 그것으로부터 방관자적 위치에 서서 공동체 내에서 논의된 표준들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반근본주의, 오류가능주의, 비판적공동체의 필요성은 모든 실용주의 전통이 중요시하는 철저한 우연성과 기회에 대한 민감성의 이슈로 이끈다. 우연성과 기회는 철학에서 언제나 문제였다. 실용주의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우연성은 단순히 인간의 무지에 대한 지표가 아니라 우주의 일반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번스타인에 의하면, “우리는 언제나 위험하기도 하고 비극과 기원의 원천이기도 한 열린 우주 안에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우연성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실용주의자들이 그렇게 많은 강조를 하고 있는 이유이다”(Bernstein 2001, 507f.).
마지막으로 모든 실용주의 전통에서 중요시하는 다원성(plurality)의 문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전적 실용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다원주의는 본래 근본적인 경험주의이다. 번스타인에 따르면, “다원주의자”라는 말은 다원주의가 영구적인 세계 형식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적용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직접 체험하는 살아 있는 세계는 다원주의적이다.
일단 세계는 다원주의이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처럼 세계의 통일은 어느 무리의 통일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한층 높은 사고는 처음의 조야한 형태에서 통일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주로 이루어져 있다. 최초 경험이 낳는 것보다 더 큰 통일을 요청하면서 우리 역시 그 이상을 발견한다. 그러나 통일을 향하여 멋지게 나아가도 절대적 통일은 여전히 발견되지 않고 남아 있으며, 여전히 ‘한계개념’으로 남는다. …… 바로 마지막까지도 철학자들이 세계를 논의할 때 구분해야 하는 다양한 “관점”들이 있다. 한 지점에서 내적으로 분명한 것이 다른 지점에서는 그저 그런 외연과 데이터로 남아 있다. 부정적인 것, 비논리적인 것은 완전히 소멸되는 법이 없다. (운명, 우연, 자유, 자발성, 악마, 뭐라고 부르든) 어떤 것은 아무리 뛰어난 철학자라고 하더라도 ‘당신의’ 관점으로부터 여전히 잘못되고, 타자적이며, 외부적이며,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James 2008, 『실용주의』. 정해창 편역. 서울: 아카넷, 202).
제임스의 다원주의적이고 근본적인 경험주의는 영국의 흄이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인상과 관념의 대립을 가정하고 있지 않다. 그에게 있어서 우리가 실제 세계에서 끊임없이 경험하는 것은 그저 관계, 연결, 이행들이다. 이 주장은 상이한 얼개 틀, 어휘, 패러다임이 통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서로 관련됨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제임스의 전통적인 경험관 비판은 훨씬 더 급진적이다. 그는 근대 인식론에서 은신처를 마련했던 의식-내용의 구분 또는 주관-객관의 구분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다원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제임스의 경험주의는 평생에 걸쳐 대결했던 다양한 절대주의와 일원론과 대비 또는 반작용의 결과로 발전했다.
우리는 다원주의에 관한 제임스의 이러한 논의에서 강력한 윤리적 관심을 감지할 수 있다. 번스타인이 적절히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제임스는 우리가 매우 빈번하게 참으로 우리와 다른 것에 대해 맹목적이고 무심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종교, 민족, 인종, 성차의 불관용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 차이를 이해하려하기보다 그것을 경멸하고 비난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다른 삶의 경험자 관점에서 세계가 어떻게 느끼고 보는지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관점, 다른 삶 스타일, 다른 지평을 높게 평가하기 위해 우리의 이해와 동정심을 확장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관점을 이해하려고 중대한 노력을 기울일 때 우리는 그저 그 관점을 받아들여 비판적 판단을 중지할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는 이러한 다원주의를 번스타인을 따라서 참여적 다원주의(engaged pluralism)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의 다원주의는 연약하고 감상적이지 않다. 그의 다원주의는 다른 관점과 다른 비전의 비판적 개입을 요구한다. 그것은 참여적인 다원주의다. 통약 불가능한 준거 틀과 패러다임을 말하는 상대주의의 그림과는 반대로 제임스의 다원주의는 결합지점까지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서로 비판적으로 관여할 수 있게 된다(Bernstein 2009, “The Ethical Consequences of William James's Pragmatic Pluralism.” 2009 세계석학초청 집중강좌, 한국학 중앙연구원, 13).
제임스 이후 거의 모든 실용주의자들은 실천적 담론의 영역 안에서 관점들의 다원주의를 인정하고 있다. 참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다원론은 결코 이상적인 목적의 상태도, 과정이론도 권력의 균형이론도 될 수 없다. 다만 그것은 여러 다른 사람들이 문제의 상황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다른 것들을 가지고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실천적인 영역일 뿐이다.
3. 한국의 창조적 실용주의
2007년 12월 29일 가진 ‘이명박 정부의 국정철학과 국정운영기조’에 대한 제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첫 워크숍에서 박형준 위원은 “이명박 정부의 철학은 21세기 자유주의와 실용주의: 새로운 공동체주의를 향한 포용적 자유주의/성장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실사구시 정신”을 요지로 하는 기조발제를 하였다. 이에 대한 토론 과정에서 “자기창조적인 신실용주의”의 문제가 거론되었으며 이러한 실용주의에 대한 해석은 곧 “정부의 역할 규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2008, 226 참조). 그 이후 제1차 국정과제보고회의(2008.01.13)에서도 박 위원은 세계에서 인정받는 고품격 국가를 지향하는 국정철학으로 “화합적 자유주의(Harmonious Liberalism)”를 그리고 그 행동규범으로 “창조적 실용주의(Creative Pragmatism)”를 제시했다(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2008, 411). 이 무렵을 전후로 한 언론 보도를 미루어 보아 이명박 대통령 측근들은 대체로 실용주의를 ‘이념이나 탁상공론보다 경험이나 실천역량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날 세계화와 지식정보화 시대를 맞이해 자유주의 대 사회주의, 시장주의 대 국가주의, 보수주의 대 진보주의 등 종래의 대결 패러다임은 그 의미가 약화되었다. 이제 이념과 지역의 벽을 넘어서는 실용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실용주의는 서양의 실용주의(Pragmatism) 철학과 조선왕조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앞세운 실학사상을 통합한 것으로 관념과 이념보다 경험적 실증을 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실용주의에 창조성을 덧입힌 것이 ‘창조적 실용주의’이다. 창조적 실용주의는 철학이나 원칙이라기보다 구체적인 정책실행 등에 있어서 요구되는 행동규범(Code of Conduct)이다. 행동규범으로서의 창조적 실용주의는 다음의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모든 정책과 주장은 객관적인 사실과 자료에 기초해야 하며 실질적인 성과를 산출해야한다. 둘째, 모든 정책과 주장은 논리적인 일관성과 함께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 적합성을 지녀야 한다. 셋째, 모든 정책과 주장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과학적인 실험이나 사유실험에 의해 검토되고 비판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변화하는 현실의 맥락 속에서 계속해서 재조정하고 재설정하며, 목표에 이르는 수단의 객관성과 효율성을 항상 새롭게 모색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다섯째, 문제를 복합적인 체계 속에서 입체적으로 보면서 그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추진 중에 있는 정책이라 할지라도 문제점이 나타나면 지체 없이 수정/보완하는 점진주의적 자세가 요구된다(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2008, 411, 37).
이러한 규정은 전체적으로 도구적 실용주의보다는 과학적 실용주의의 도정에 더욱 가까워 보인다. 실용주의적 헌신의 핵심은 물론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과학적인 방법론일 것이다. 영속적으로 의심의 태도를 견지하고 공동 노력의 맥락에 실험을 위치시키며 작용적인 진리관이 결과를 낳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최상의 과학 정신을 견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용주의 정부가 일반적인 이론을 우리의 현실에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피하면서 창조적으로 나아갈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현실의 문제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입각하여 새롭게 정식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적 실용주의에서 창조성은 바로 우리가 당면한 상황을 창조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실용주의 행정가가 어떤 상황에 대한 어떤 모호성에 직면했을 발생하는 문제점은 그 자체로 ‘고뇌적(agonistic)’이다. 즉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 행정 관료는 ‘위반(transgression)’의 행위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몰려왔을 때 연방재난관리청(FEMA) 소속의 더글라스 도안(Douglas Doan)은 아이의 이유식, 기저귀 및 생수를 구하려는 주방위군의 ‘약탈’에 관한 월마트 사장으로부터 걸려온 항의 전화를 처리해야 했다. 그는 월마트 사장에게 그러한 생필품들이 계속 빠져나가도록 두고 이에 대한 보상을 확실히 해주겠노라는 도발적인 결정을 내렸다(challenged). 그의 상사는 칭찬 대신에 감사를 그의 사무실에 보내 법적대응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대해 도안은 단 세 줄의 진술서를 써냈다. “나는 그 결정을 내렸다. …… 나는 다시라도 그 결정을 내릴 것이다. 대통령은 나의 행동에 동의할 것이다.” 그는 몇몇 더 많은 사건을 처리한 후에 연방재난관리청을 사임했다(Stivers. 2008, Governance in Dark Times: Practical Philosophy for Public Space. Washington, D.C.: Georgetown University Press, 148).
이처럼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의 통제범위를 넘어선 사안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상황에서 행정 관료는 공식적인 명령계통에 의해서 어떤 사안에 대한 독자적인 결정이 방해를 받게 된다. 이 경우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공직서비스는 어떤 반성과 판단을 요구하는데, 그 근거는 법의 자구(字句)가 아니라 법정신을 분별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관료들의 윤리적 딜레마가 있을 것이다.
창조적 실용주의에서 행정행위는 다분히 과학적 방법에 따른 예측의 문제가 아니라 고뇌에 따른 창조의 사안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정부의 법령과 권력에 의한 통제는 다분히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실용주의 정치철학자, 맥스와이트가 “실용주의 정부는 지배할 수 없으며 독재적일 수 없다(A pragmatic government could not dominate and become tyrannical)”(McSwite. 1996, Postmodernism, Public Administration, and the Public Interest. In G. L. Wamsley & J. F. Wolf (eds.). Refounding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198-224. Thousand Oaks, CA: Sage, 135)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창조적 실용주의를 국정기조로 하는 이명박 정부의 미덕은 스티버스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미지의 것에 직면하여 갖게 되는 용기, 결단 그리고 희망의 형식”(Stivers. 2008, 138)을 갖추는 것이 될 것이다. 즉 개개인의 창조성은 모든 “소망들이” 역동적인 전체 안에서 통합될 때 가장 온전하게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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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글의 결론부는 마치 예지계에서 울리는 공허한 외침 같다는... ㅎㅎ 어쩌면 현정부가 과연 초기의의 소위 '창조적 실용주의'를 기억이나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제목을 좀 더 '정치적으로' 밀고 나가시지 그랬습니까?
모든 조직은 관리를 필요로 하겠지요? 우리나라의 정부 조직을 관리함에 있어서 '창조적 실용주의'보다 더욱 매력적인 캐치프레이즈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은 자신의 소임을 다한 셈이지요. 문제는 실용이니 녹색이니 하는 "이념체계(ideograph)"가 조직에 선행하여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나저나 조금 더 '정치적인' 제목이 뭔가요? ^^
답변 감사합니다. ^^ 제 마지막 코멘트는 제목'을' 정치적으로 쓰시면 좋겠다는 것이 아니라, 제목의 정치적 함축을 본문에서 좀 더 밀고 나가셨으면 좋을 뻔 했다는 뜻이었습니다. ^^
잘 지적하셨습니다. 사실 이 글은 정부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구체적인 정책을 창조적 실용주의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논문의 전반부에 속합니다. 구체적으로 실용주의 정책을 도입한 분들과 관련된 웃지못할 일화도 들었습니다만 여기에서 말씀드리기에 조금 꺼려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잘 읽었슴니다 글 도입 부문은 좀 어려웠지만 간만에 철학 공부를 하였슴니다 헌데 타이틀에 비해서 글 말미가 내용이 추상적이고 빈약한 것 같아 많이 아쉬웠네요...건필 바랍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글이 어렵네요 인용을 줄이고 쉽게 쓸 순 없을까요? 물론 제가 공부를 해서 수준을 맞추는 것도 필요하지만.
처음 실용주의에 대한 도입부터 대통령 인수위원회의 창조적 실용주의에 대한 행동규범까지만 소개했어도 독자들이 아! 행동규범하고 실제 정부의 추진방식이 너무 다르구나 라고 느꼈을 겁니다. 거기에 무슨 철학적 근거가 더 필요합니까? 이미 행동규범- 규범이란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 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데? 그지점 이후에서 왠지 김이 빠지는 느낌입니다. 다행히 이 글이 전반부에 지나지 않다고 하시기에 후반부를 기대해 봅니다.
아래향, 칠월에, 지그프리드/ 비판적인 코멘트 고맙습니다. 원래 이 글의 취지는 첨단의료과학 복합단지 선정과정을 현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중도 창조적 실용주의의 맥락에서 부정적인 사례의 대표적인 경우로 분석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창조적 실용주의를 국정이념으로 제시한 분들을 위시하여 그 누구도 이러한 실용주의적인 요소를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타포로서 이 이념은 벌써 자신의 몫을 톡톡히 해냈다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실용주의가 어떻고가 아니라 "중도 창조적 실용주의"니 "녹색성장"이니 하는 구호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념체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아이온님 말씀대로 완성된 글이 아닌한 무슨 지적이 가능하겠습니까? 현재 올려진 글을 완성된 글로 가정하고 올린 비판이었으며 후반부까지 완성된 후에 다시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때 다시 꼼꼼히 읽어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