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 사이에서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쪽은 대지주 집안, 어머니 쪽은 평양의 민족자본가 집안이었다. 이중섭이 아기였을 때, 12년 위인 형 이중석이 이른 나이에 결혼하였으므로 이중섭은 어머니와 형수의 보살핌을 함께 받으며 자랐다.
1920
5세 무렵, 이중섭이 날 때부터 앓던 아버지가 죽었다. 이 즈음부터 그리기와 만들기에 깊은 흥미를 나타냈다.
1923
8세. 마을 서당에서 배우다가 곧 평양 외가로 가서 종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고학년 때에는 그림 그리기에 상당한 수준을 나타내 학교에서 그림이라면 단연 그를 꼽을 정도였다. 6년 내내 한 반이었던 김병기네 집에 자주 가서 그의 아버지 김찬영의 화구와 미술서적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일본 유학 경력을 가진 이름난 유화가였던 김찬영은 1926년부터 1929년 무렵까지 활발했던 평양의 미술단체 삭성회를 이끌기도 했으므로 이중섭에게 자극과 영향을 준 바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1929
14세. 종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하숙 생활을 시작하였다. 미술부에 가입하였고 여기서 문학수를 만났다. 2학년 초 팔이 부러져 1년간 휴학했다.
1931
16세. 복학 직후, 도화와 영어를 담당하는 교사로 임용련이 부임해왔다. 그는 미술실을 확보하고, 아내에게 유화가인 백남순과 더불어 주말마다 학생들과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고 품평회를 열었다. 임용련은 이중섭의 그림을 수업 때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장래의 거장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중섭은 한글 자모로 구성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그림에 한자나 한글 이외의 다른 문자로 서명하는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를 즐겨 그리기 시작했으며, 두꺼운 한지에 먹물을 칠한 후 철필이나 펜촉으로 긁어내 흰 바탕이 드러나게 하는 실험적인 방식을 시도했다. 이후 이는 은박지 등으로 나타나서 이중섭 예술의 한 특장을 이루게 된다. 문학수가 동맹휴학 주동자로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1932
17세. 어머니와 형네 식구가 모든 가산을 정리하여 원산으로 옮겨갔다. 방학 때 원산 근처 바다에서 해수욕과 낚시를 즐겼고, 서양 고전음악 감상에 몰두하였다.
1934
19세. 1월, 낡은 학교 건물을 일본인 보험사의 보상금으로 재건할 계획을 세우고 불 지르기로 친구들과 모의하였다. 그러나 실행하지는 못하다가 그 중 한 명이 몰래 불을 질렀으며, 이중섭이 이를 뒤집어쓰기로 하고 임용련에게 고백하여 묵인을 받았다.
1935
20세. 졸업 기념 사진첩 장식을 맡아 했는데, 불덩어리가 조선 땅으로 날아드는 모습을 그려 물의가 일어나 졸업 기념 사진첩의 제작이 취소되었다. 졸업 후 미술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가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데이고쿠미술대학에 입학, 여기서 상급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쾌대를 알게 되었다. 스케이트를 타다가 크게 다쳐 요양에 들어갔다.
1936
21세. 복학을 포기하고 3년제의 전문 과정인 분카가쿠잉에 입학하였다. 이곳에는 김병기와 문학수가 먼저 입학해 있었다. 입학동기로는 홍준명, 안기풍, 이정규 등이 있었다. 이중섭의 그림에 대해 교수가 피카소의 모방이라 비판하자 이에 항의하기도 하는 등 갈등을 빚었다. 많은 학생이 모인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조선말 노래를 유창하게 불렀고, 작업으로 어질러진 하숙방에서도 난초를 키우는 정갈함이 있어 급우들의 찬탄을 받았다. 민족 차별 태도가 없었던 화가 쯔다 세이슈를 알게 되어 급속히 가까워졌다.
1938
23세. 5월, 일본 도쿄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미술가들이 창립한 단체인 지유비주쓰카교카이의 제2회 전람회에 3점의 <소묘>와 2점의 <작품>을 내 입선하였고 협회상을 받았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다키구치 슈조, 하세가와 사부로 등이 글을 통해 이중섭의 작품을 극찬하였다. 연말 또는 이듬해 초에 병으로 휴학하고 원산으로 돌아가서 휴향하였다.
1940
25세. 복학한 직후 2년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랑에 빠졌다. 10월, 경성에서 개최된 제4회 지유텐에서 <서 있는 소>, <망월>, <소의 머리>, <산의 풍경>을 출품했다. 화가 김환기와 진환이 글을 통해 극찬하였다. 이 무렵부터 자주 개성박물관에 들러 연구와 스케치에 몰두하였다. 이런 노력은 이듬해 창립전을 치루는 조선미술가협회의 준비를 위해 이 무렵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이쾌대와 그의 형 이여성의 직간접적 영향 탓으로 보인다.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졸업하고 연구생 과정으로 계속 학교에 다녔다.
1941
26세. 3월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미술가들이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였는데 도쿄에서 개최된 그 창립전에 <연못이 있는 풍경>등을 출품하였다. 4월, 제5회 지유텐에 <망월>, <소와 여인>을 출품함으로써 김환기와 문학수, 유영국에 이어 회우에 추대되었고 이마이 한자부로 등에게 격찬을 받았다. 5월에는 경성에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였다. 늦여름부터 초가을 사이 일본에서 돌아와 원산에서 지냈다. 본격적으로 엽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이 해에만 90점 가까이 그려 보냈다. 이 엽서 그림 그리기는 1943년까지 계속된다. 9월부터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의 주소 면에 자신의 이름을 "소탑(素塔-흰 탑)이라고 썼다. 어린이 그림을 연구하였는데 이런 흔적은 엽서 그림의 원시주의적 화풍과 재료로 드러난다.
1942
27세. 4월, 제6회 지유텐에서 회우로서 <소와 아이>, <봄>, <소묘>, <목동>, <지일(遲日-더딘하루)>을 출품하였다. 5월, 경성에서 열린 제2회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였다. 일본에 공부하기 위해 와 있던 시인 지망생 양명문과 니혼대학 종교학과 학생이던 구상을 알게 되었다. 애인의 모습을 담은 염필화 <여인>을 그렸으며, 여기에 "대향(大鄕)"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1943
28세. 3월, 제7회 지유텐에 이대향이라는 이름으로 5점의 <소묘>와 <망월>, <소와 소녀>, <여인> 등을 출품하였다. 출품작 <망월>로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였다. 5월에 경성에서 세번째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이 시기를 전후해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와 원산에 머물면서 작업에 몰두하였다. 원산에 돌아온 후 수년 동안 같은 방을 사용했던 조카 이영진의 증언에 따르면 이중섭은 여러 해에 걸쳐 두고두고 손질하면서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런 작업태도는 월남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944
29세. 제4회 소품전에서 출품한 것으로 보이나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에서 잠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해 말 평양 체신회관에서 김병기, 문학수, 황염수, 윤중식, 이호련, 황염수 등과 6인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회 출품작 가운데는 소 그림이 많았다고 한다.
1945
30세. 4월, 마사코가 배를 타고 천신만고 끝에 경성을 거쳐 원산으로 왔다. 5월, 결혼하고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었다. 원산 광석동에 집을 마련했으나 곧 소련의 폭격으로 교외에 있는 과수원으로 이사했고 그 직후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10월,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해방기념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다듬어오던 연필화 <세 사람>과 <소년>을 들고 갔으나 늦어서 출품하지 못하였다. 이 그림들은 곧 인천에서 개최된 전람회에 출품하였다. 이 무렵 최재덕과 함께 지금의 미도파백화점 지하실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을 소재로 벽화를 그렸는데, 밑그림은 이중섭이 맡아 그렸다. 명동의 술집에서 친구가 여러 사람에게 뭇매질을 당하자 그것을 막느라 싸우다가 그곳을 순찰 중이던 미군 헌병에게 방망이로 맞아 머리가 터졌다. 벽화 제작 사례로 받은 돈으로 많은 골동품들을 사서 원산으로 돌아갔다. 그때 구입한 작은 불상은 늘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등잔은 원산에서 살던 내내 불 밝히는 데 사용하며 애지중지했다. 평양에 갈 때마다 서예가이자 수집가로 이름 높은 김광업 등으로부터 우리 문화재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1946
31세. 2월 조선예술동맹 산하의 미술동맹 원산지부 회화부원이 되었다. 또한 조선미술협회를 탈퇴했던 사람들로 구성된 조선조형예술동맹에 가입하였다. 이 모임에서 단상에 올라가 발언 중인 길진섭의 따귀를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5월에 열린 회원전에 출품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1주일 만에 사직하였으며, 이 무렵 화가 지망생 김인호와 인연을 맺었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었으며, 이때 아이의 관에 복숭아를 쥔 어린이를 그린 연필화 여러 점을 넣었다.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잠시 했고,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그렸다.
1947
32세. 연초에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응향(凝香)』에 실린 시와 표지화에 인민성과 당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맹렬하게 비판받았다. 6월, 친구인 오장환의 시집 『나사는 곳』에 속표지 그림을 그렸다. 8월, 평양에서 열린 해방기념미술전람회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은 나는 어린이>를 냈다. 이 작품에 대해 소련인 평론가 나탐이 극찬하였다. 아들 태현이 태어났다.
1948
33세. 2월, 이 무렵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한 친구 오장환을 만났다. 이 해 또는 이듬해에 평양에 이어 원산에 온 소련의 미술가와 평론가 3인이 이중섭의 그림을 보고 천재이기 때문에 "인민의 적"이라고 비판하였다. 당시 그의 그림은 성난 소와 닭, 까마귀들을 굵은 선과 속도감 있는 필치로 그린 것이었다. 이후 이러한 압력을 피해 소련식 사회주의 사실주의풍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949
34세. 봄에 둘째 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하였다. 이 무렵 박수근과 자주 교유하였다.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 소 주인에게 도둑으로 몰려 고발당하기도 하였다.
1950
35세. 6월,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었다. 10월, 미국군의 대거 개입으로 전세가 바뀌면서, 집이 폭격으로 부서져 가까운 친척집으로 피신하였다.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다. 12월 초 중국군의 대거 개입으로 다시 바뀐 전세와 미국군의 원자탄 투하 위협에 따라 어머니와 나머지 가족들을 두고 부인, 두 아들, 조카 영진과 함께 피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다 만 작품 1점만을 가지고 후퇴하는 국군의 화물선을 타고 3일 걸려 부산에 다다랐다. 곧 피난민 수용소에 가게 되었고, 신상 조사 후 외부 출입이 허용되면서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을 하였다. 이 때 널빤지를 훔친 껌팔이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헌병을 말리다가 헌병들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큰 상처를 입었다.
1951
36세. 봄에 악화된 전세에 따른 당국의 종용으로 가족과 제주도로 건너갔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했는데, <피난민과 첫눈>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 것이다. 변두리의 작은 방을 제공받아 살기 시작하였는데, 적은 양의 배급과 고구마 그리고 바닷가에 나가 잡아온 게로 연명하였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평온한 눈빛을 지닌 소를 목격하고 다시 소 그리기에 열중하였다. 특히 이웃에 있는 잘생긴 소에 반하여 이를 열심히 그렸다. 또한 후일 벽화를 그리겠다며 갖가지 조개껍데기를 채집하기도 했다. 9월에 부산에서 열린 전시미술전(또는 월남미술가전)에 출품하였다. 서귀포에서 그린 것으로는 유화 <서귀포의 환상>, 그리고 두 점의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바닷가의 아이들>이 있다. 배를 태워준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하나 이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12월 무렵 다시 부산으로 옮겨가 오산학교 후배를 만나 범일동에 있는 귀한동포를 위한 판잣집을 얻게 되었다.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원조금이 왔다. 이 무렵 이곳 풍경을 그린 것이 <범일동 풍경>이다.
1952
37세. 2월,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에 가입하였다. 3월, 종군화가단에 대한미협과 공동으로 개최한 3.1절 경축미술전에 출품하였다. 이 무렵 부인이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고 아이들이 병드는 등 곤란이 계속되었으므로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여름에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그후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지내다가 유화가 박고석의 집에서 3개월 가량을 지냈다. 연필 스케치를 무수히 했으나 거의 불쏘시개가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친구 한묵이 의뢰 받은 노래극의 공연에 필요한 무대장치와 의상, 소도구 만들기 등의 일을 도우며 남포동에서 지냈다. 또 영도에 있는 대한경질도기주식회사에 다니던 친구 황염수의 소개로 그 회사 작업대에서 두 달 동안 미술대학생 김서봉과 함께 지냈다. 10월부터 주간으로 발행되던 『문학예술』에 삽화를 그렸다. 12월, 미국 아시안 소사이어티 재단으로부터 그림 재료를 제공받아 작업한 것이 손응성, 한묵, 박고석, 이봉상 들과 전람회를 통해 발표하였다. 이 무렵 또는 이듬해 초, 일본에 있던 부인이 이중섭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 일본서적을 보내 팔았으나 책값을 떼이고 큰 손해를 보았다. 또 일본에 밀항하여 갔다가 체포된 이중섭의 친구가 부인에게 보증금과 여비를 빌리고는 이를 돌려주지 않아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연말 무렵 일본으로 가기 위해 애쓰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위해 김광균과 구상, 일본의 지인들이 애를 썼다. 처가에서도 주위의 고관 등에게 부탁하는 등 이중섭의 일본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53
38세. 5월 말 신사실파에 가입했으며, 그 세번째 동인전에 2점의 <굴뚝>을 출품하였다가 당국의 조사를 받고 철거당했다. 7월 말, 오래 애쓴 끝에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이때, 늘 지니고 다니던 불상과 태양상의 부상으로 받은 팔레트, 그리고 70매 가량의 은박지 그림들을 부인에게 맡겼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가기 위해 애썼으나 좌절되었다. 이 무렵부터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림을 동봉하기 시작하였다. 8월 휴전이 성립되면서 정부가 서울로 돌아갔다. 이중섭의 고미술에 대한 안목을 신뢰한 통영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교육책임자인 유강렬의 권유로 통영으로 갔다. 이곳 졸업생으로 화가를 지망하던 이성운과 한 방에서 지내며 제작에 몰두, <달과 까마귀>, <떠받으려는 소>,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흰 소>, <부부> 등 여러 작품을 완성하였다.
1954
39세. 봄에 이성운과 통영 일대를 다니면서 풍경화 제작에 몰두하였다. <푸른 언덕>, <충렬사 풍경>,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 등을 그렸다. 5월 무렵, 유강렬, 장윤성, 전혁림과 4인전을 열었으며, 양성소에 분규가 생겨 곧 통영을 떠났다. 화가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로 갔다가 대구를 거쳐 서울로 올라갔다. 초여름 무렵 서울로 가 여러 곳을 전전하였으며, 6월 한국전쟁 발발 4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3점의 <소>, <닭>, <달과 까마귀>를 내서 호평을 받았다. 7월에 원산 사람 정치열이 누상동에 있는 집을 제공해주었으므로 여기서 개인전을 열 계획으로 제작에 몰두하였다. 이 집에서 대표작 <도원>, <길 떠나는 가족>등을 그렸다. 연말에 집이 팔리자 이종사촌 이광석 집으로 옮겨 전시회 마무리에 몰두하였다.
1955
40세. 1월 18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유화 41점, 연필화 1점, 은박지 그림을 비롯한 소묘 10여 점을 냈다. 일반의 호평과는 달리 몇몇 평자들에게서는 시대착오적이라는 평이 나오기도 했으며, 출품작 중의 은박지 그림이 외설스럽다 하여 당국에 의해 철거되는 등 물의가 일어났다. 전시 기간 내내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등 무리를 했고, 전시가 끝난 후에는 그림 값도 제대로 못 받는 등 아내의 빚을 갚아보려는 애초의 목적을 전혀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곧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대구역 앞의 여관과 칠곡의 최태응 집을 전전하며 제작을 계속해 5월에 대구 미국문화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으며, 실망과 분노의 감정에다 영양 부족까지 겹쳐 극도로 쇄약해졌다. 당시 미국문화원의 책임자 맥타가트가 이 전시회에 출품한 은박지 그림 3점을 미국 뉴욕 모던아트뮤지엄에 기증하였다. 왜관의 구상 집에서 요양하였으며, 이 무렵 단란한 구상의 가족을 부러운 듯 쳐다보는 자신이 등장하는 <구상네 가족>과 <성당 부근>등을 그렸다. 대구로 올 때부터 노이로제 환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여관의 손님 신발을 모두 거두어 씻기도 하고, 청소를 하기도 하는 등 보상 행위에 몰두하여 친구들로부터 정신병자라는 말을 들었다. 7월, 한 달 동안 대구 성가병원 정신과에 입원하였고, 자신이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연필로 사실적인 <자화상>을 그렸다. 8월 말경 서울의 이광석 집에 머무르게 되었으나 이광석이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면서 친구들이 수도육군병원 정신과에 입원시켰다. 그후 성베드로병원으로 옮겼고 늦가을에 퇴원해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극심한 황달 증세를 나타냈다.
1956
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다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봄에 청량리뇌병원 무료입원실에 입원했다가 원장 최신해에 의해 정신 이상이 아니라 극심한 간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즉시 퇴원하였다. 그후 상태가 극심히 나빠져 서대문 적십자병원 내과에 입원하였다. 입원한 지 한 달 가량 지난 후인 9월 6일 숨을 거두다. 3일 뒤 이 사실을 안 친구들이 장례를 치루었다. 화장된 뼈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다른 일부는 일본에 살던 부인에게 전해져 그 집 뜰에 모셔졌다.
1957
이중섭을 따르던 조각가 차근호가 새긴 묘비가 망우리 무덤에 세워졌다.
1965
친구 김병기에 의하여 약전이 씌어졌다.
1971
홍익대 대학원생 조정자에 의하여 광범위한 조사를 거친 석사학위 논문이 발표되었다.
1972
서울 현대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유작전과 작품집이 출판되었다.
1973
시인이자 문필가인 고은에 의해 조카와 주변 인사들의 증언을 취재한 평전이 월간지의 연재를 거쳐 출판되었다. 그후 이를 토대로 하여 영화와 연극, 텔레비전 드라마 등이 만들어졌다.
1978
정부수립 30주년을 기념하여 문화훈장이 수여되었다.
1979
4월, 부인이 간직하던 엽서 그림과 은박지 그림 등 모두 200점 가까운 작품이 서울 미도파 백화점 화랑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1980
부인과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와 동봉한 그림을 엮은 서간집이 출판되었다.
1986
30주기를 맞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1997
서귀포 살던 집이 당시 서귀포 시장 오광협의 노력으로 발견되었고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또한 이중섭이 피난 당시 거주했던 서귀동 512번지 일대 360m 거리를 "이중섭거리"라고 명명했다.
1999
문화관광부가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것을 기념하여 이중섭전을 서울 현대화랑에서 개최하였다. 연필화 <자화상>이 처음으로 전시를 통해 소개되었다.
이중섭.......편지
나의 귀엽고 소중한 남덕군,
당신의 편지 무척 기다리고 있던 중 3월 3일자 편지 겨우 받았소.
당신의 불안한 처지 매일 밤 나쁜 꿈에 시달리며 식은땀에 흠뻑 젖은 당신을 생각하고 대향은 남덕군에게 그리고 어머님에게 정말 미안하고 면목이 없소.
3월 4일에 낸 내 편지에 부탁한......(새로운 서류 각각 한통씩) 그걸 받으면 당신에게 전화하고 열흘 이내에 부산을 떠나겠소.
더 빠를는지도 모르겠소.
얼마 안 있어 만나게 되오......
이제부터는 애처, 애아를 위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길이 여러 가지 있으니까 염려하지 말고 나쁜 꿈과 식은 땀에 시달리지 않도록 충분한 섭생을 하시오.
지금까지 나는 온갖 고생을 해왔소.
사경을 넘어 분명히 아직도 대향은 살아남아 있으니까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만난다는 희망과, 생생하고 새로운 생명을 내포한 '믿을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지시하고, 행동하는 회화를 그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참고 견뎌왔던 것이오.
지금부터는 진지하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의 생활 안전과 대향의 예술 완성을 위해서 오직 최선을 다할 작정이니 나의 귀엽고 참된, 나의 내심의 주인 남덕군, 대향을 굳게 믿고 마음 편하게 밝고 힘찬 장차의 일만을 생각하면서 매일매일을 행복하게 지내주시오.
나의 소중하고 귀여운 사람이여!
참 화공인 중섭 대향 구촌을 마음으로 열심히 기다리고 있어주시오.
나의 소중한 보배, 발가락군을 소중하게 아껴주시오......
중섭 대향 구촌
- 1953년 3월 중순 무렵의 편지에서
나의 귀중하고 귀여운 남덕군,
4월 13일에 부친 편지 받았는지요?
조금은 속 태우지 않고 안심하고 있는지......
원산, 부산, 제주도까지 헤매면서 온갖 죽을 고비를 넘어온 대향과 남덕의 애정은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게 단련되어 현재 태현, 태성이는 점점 늠름하게 자라나는 것이 아니겠소?
더욱더 시야를 넓혀 유유히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의 새로운 회화예술을 완성해 가겠소.
이제부터는 가난쯤은 두려워 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생의 한복판을 매진해갑시다.
나는 언제나 생각하오.
나의 귀여운 남덕군은 화공 대향에게는 꼭 알맞은, 참으로 훌륭하고 멋진 아내라고.
이토록 들어맞는 귀엽고 참된 여인을 하늘은 대향에게 잘도 베풀어주었다고.
화공 대향은 실로 귀여운 남덕을 어떤 방법으로 사랑해야만이 남덕의 아름다운 마음에 대향의 애정이 가득히 넘칠는지 지금도 열심히 생각하고 있다오.
나의 품안에 포옥 안기는 자그마하고 귀여운 단 한 사람의 나의 아내여, 안심하고 나를 믿고 기다려봐주오.
우리들 부부보다 강하고, 참으로 건강한 부부는 달리 또 없을 게요.
대향은 남덕이를 믿고, 남덕이는 대향을 또한 믿고 있지 않소?
세상이 이처럼 분명한 사실이 또 어디 있겠소.
나는 지금 남덕이를 포옹하고 나의 큰 가슴을 울렁이고 있소.
어떤 일이 우리들 네 가족 앞에 부딪치더라도 조금도 염려할 것은 없소.
진실하고 귀여운 나의 남덕군,
대향은 게으른 사내 같지만 유유히 강해가고 있소.
화공 대향은 자신만만이오.
대향은 반드시 남덕을 행복하게 해보이겠소.
그대들에게로 갈 패스포드에 쓰기 위해 3, 4일 전에 찍은 사진이오.
보고 있으면 조용하고 여유 있고 자신에 넘치는 모습이라고 생각지 않소?
이 사진에 몇 번이고 입맞추어주오.
태현이, 태성이에게도 보여주구려.
어머님께도 한 장 드리고 곧 답장을 주오.
소중한 발가락군이여,
당신의 깜박이는 귀여운 눈이며, 나의 커다란 손가락 등에 대하여 많이 써보내주기 바라오.
대향의 머리 속과 가슴에는 귀여운 남덕군의 일로 꽉차 있소.
당신을 힘껏 포옹하고 몇 번이고 입맞추오.
그럼 건강하오.
중섭 대향 구촌
- 1953년 4월 중순의 편지에서
나의 가장 사랑하는 남덕군,
그동안도 건강한가요?
덕분으로 일주일쯤 전에 무사히 서울에 닿았소.
6월 25일부터의 대한미술협회와 국방부 주최의 미전에 세점(10호 크기의)을 출품했소.ㆍㆍㆍ
아고리의 작품 세점이 제법 좋은 평판인 것 같소,
첫날에 아고리의 작품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 한 점은 이미 매약(買約)이 되었다오.
미국 사람(미국의 예일대학 교수)이 아고리군의 작품을 칭찬하면서, 자기가 모든 비용을 내어 줄 테니 뉴욕으로 작품을 가지고 와 개인전을 하라고 권해줍디다.
2,3일 후 찾아가서 약속을 할 생각이오.
이번에 낸 작품이 평판이 아주 좋았으니까 서울에서의 소품전도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친구들은 자기들 일처럼 기뻐하면서 하루 빨리 소품전 제작을 시작하라고 권해줍디다.
일주일 후에는 친구가 방 한 칸을 빌려 준대요.
쌀값도 당해준다는 얘깁니다.
다시 없는 나의 남덕군,
태현이, 태성이를 위해서, 대제작(표현)을 위해서, 힘껏 버터겠소.
기어코 승리를 할 테니까 기대하고 그 때까지 안정에 유의하고 하루 빨리 기운을 내어 주시오.
아고리군의 평판이 좋다는 걸 어머니께도 전해주구려.
- 1954년 7월 4일의 편지
나의 소중한 최애의 남덕군,
그후 건강 상태는 어떠한가요?
며칠 전에 보낸 편지는 받았으리라 믿소.
대한미술협회전에 출품한 세 작품은 가장 좋은 평판을 받고 있소.
한국, 동아, 조선 세 신문에 아고리군의 작품이 최고 수준이란 호평이 실려 있소.
오는 두 시경 소품전의 작품 제작을 위해 친구의 집 이층으로 이사를 하오.
서울은 방 얻기가 힘들어 지금까지 고생을 했소 만 ......
요행히 친구가 널찍한 자기 이층 방을 그냥 빌려 준다기에 오늘 이사를 하오.
이번 이사를 하고 나면 꼬박꼬박 편지를 내리다.
아무 것도 걱정 말고 정양에만 힘을 쓰면서 기다려 주구려. ......
그럼 내일 신문과 사진과 자세한 것을 써서 보내리다.
- 1954년 7월 11일의 편지
....... 오늘이 7월 13일이오.
영진군과 함께 친구가 빌려 주는 밝고 조용하고 제작에 는 안성맞춤인 훌륭한 집 이층으로 이사를 하오.
기뻐해주구려.
내일부터는 혼자서 서울에선 최초의 소품전을 위한 제작에 들어가오.
그립고 가장 사랑하는 남덕군,
진심을 다해서 한없는 응원을 부탁하오.
'아고리군, 힘을 내라'고.
내일 다시 이사간 새 제작 방에서 기운 넘치는 편지를 쓰겠소.
아무 걱정 말고 안정에 유의해서 하루 발리 건강을 회복해 주시오.......
당신의 건강 상태도 자세하게 알려 주시오.
발가락군, 태현, 태성, 남덕군에게 긴 뽀뽀를 보냅니다.
서울 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166의 10 이중섭 선생
위에 쓴 주소로 답장을 보내 주시오.
ㅈㅜㅇㅅㅓㅂ
한순간도 그대 곁에 있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군요.
나의 소중한 특등으로 귀여운 남덕.
그 후에 더위를 견뎌 내면서 어느 정도 건강해지셨어요?
태현이와 태성이도 더위에 지치지 않고 잘 놀고 있는지요.
나의 감격인 그들의 하나하나의 동작을 내 눈으로 보고 싶소.
하나하나를 뜨거운 마음으로 표현하고 싶소.
하루 빨리 만나고 싶어서 못 견디겠소.
아빠도 팬티까지 벗어 던지고 일에 열중하고 있소.
아침저녁 언제나 집 뒤의 바위산, 풀덤불 있는 맑은 물에 몸을 씻고 바위산 마루에 혼자 올라가 ...... 밝은 달을 향해 ...... 당신과 아이들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훌륭한 표현을 다짐했소.
당신과 아이들 생각으로 가슴이 조여서 어제 저녁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오.
당신과 아이들이 정말 보고 싶소.
당신과 아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 보고 싶다, 보고 싶다를 되풀이 하기만 할 뿐 속절없이 소중한 세월만 보내고 있지 뭡니까.
왜 우리는 이토록 무능력한가요?
나의 생명이요 힘의 샘, 기쁨의 샘인 더없이 아름다운 남덕군, 더욱더욱 힘을 내어 서로 만나는 성과를 기약하고 버티어 갑시다.
우리들 서로의 지성이 오래잖아 이루어져 하나로 맺어질 때까지 좌절하지 말고 노력하십시다. ......
여러분들의 협력을 성과 있도록 힘써 주시오.
하루 빨리 소중한 당신과 아이들 곁에서 단 1년 만이라도 제작을 할 수 있다면 ......
발표할 자신이 넘쳐 날 지경이오.
발표한 대가를 울궈 내기로는 만만이오.
나의 오직 하나의 소중한 당신만은 내 자신, 강력한 제작 의욕을 진심으로 믿고 확신하고 있겠지요.
당신만은 아고리군을 기대하고 모든 정성을 다해주리라 믿소.
나의 가장 사랑하는, 귀여운 당신 ......
'선은 재빨리' 란 속담을 잊지 말고 우리 네 가족만이 사랑하고 지켜 나갈 소중한 시간을 아끼고 지켜 나갑시다.
자, 힘껏 힘껏 서로 껴안읍시다.
내 따뜻한 뽀뽀를 받아 주시오.
강하게 강하게 껴안아 우리들의 소중한 아름답고 건강한 시간을 지키십시다.
큰 표현을 합시다.
꼭 한 주일에 한 번씩은 편지 주시오.
ㅈㅜㅇㅅㅓㅂ
내 마음을 끝없이 행복으로 채워 주는 오직 하나의 천사, 나의 남덕군, 내가 최고로 사랑하는 남덕군.
지난해 8월에 당신과 태현이와 아고리군 셋이서 히로시마로부터 도쿄로 가서 꿈과 같은 닷새 동안을 보내고 온 일을 지금 생각하고 있소. ......
뭐니뭐니해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소.
빨리 서류를 갖추어서 보내도록 정원진 소령님에게 협력을 빌어 ......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성과를 얻도록 해주시오.
어머님에게도 잘 부탁을 드려서 ......
여러분의 도움으로 ...... 성과를 거두도록 해주시오.
오늘로 1년째가 됩니다.
1년 또 1년, 이렇게 헤어져서 긴 세월을 보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함께 있지 않아 선 안되오.
당신과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서 얼마나 마음이 들어 있는가를 생각해보구려.
힘을 내주시오.
꼭 확실한 성과를 거두도록 하시오.
답장 기다리오.
세상에서 제일로 상냥하고(?) 나의 소중한 사람, 나의 멋진 기쁨이며 한없이 귀여운 나의 남덕군.
따스한 마음이 가득 담긴 9월 9일자 편지 고마웠소.
내 편지와 그림을 그토록 기뻐해줘서 ......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 꽉차 있소.
책방의 돈 문제는 아고리가 떠날 때는 완전히 해결이 될 테니 염려 마시오.
태현이의 공부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을 쓰지 말아요.
아빠가 가면 ...... 꼭 공부에 재미를 붙이도록 지도를 해줄 테니까 ...... 남의 집 아이는 아빠가 지도를 해주는데 ...... 싶어 너무 성급하게 무리를 하면 소중한 당신의 몸만 해치게 되오.
즐겁고 밝게 그리고 천천히 한 가지씩 노는 것보다 아빠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울 테니 ...... 그 때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싫증이 나지 않도록 지도해주구려.
학교 공부란 생활해가는데 있어서 약간만이 필요할 따름이오.
전부가 아니잖소?
당신과 나의 소중하고 믿음직한 두 아이들은 반드시 훌륭한 정신을 갖고 인생을 살아갈 가장 훌륭한 자식들이라고 믿고 있소.
무엇보다 귀여운 마음의 아내 남덕군, 더욱더 밝고 마음 편히 모든 일을 처신해주기 바라오.
당신을 가장 행복한 천사로 만들어 보겠소.
안정을 지켜서 어서어서 건강을 되찾아 주오.
아빠는 당신과 두 아이들을 가슴 가득 채우고 더욱더 힘을 내어 열심히 제작하고 있소.
이제 한고비만 참으면 되오.
바짝 힘을 냅시다.
아빠 중섭
나의 상냥한 사람이여 / 한가위 달을 / 혼자 쳐다보며 /
당신들을 가슴 하나 가득 / 품고 있소.
한없이 억센 포옹 또 포옹과 열렬한 뽀뽀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받아 주시오.
발가락군에게도 뽀뽀 전해주오.
첫댓글 야~~~! 정말 좋은 자료다!
오이씨, 내가 할말 다 하네.
주문만하면 뭐든 다 해결되는 이곳은 지상의 낙원 무언가가 그리워지고 마음이 허전할땐 이곳을 방문하세요 여기엔만 오면 우린 금방 마음의 여유와 사랑을 만땅으로 채워짐을 느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