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농민들은 비범한 인물이 병을 치료하거나,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주거나, 집을 지어 주는 방식으로 선한 마술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혹은 폭풍우나 흉년을 불러오는 사악한 마술도 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중세 말, 신학자들은 사악한 마술이 악마와의 계약에 의해서 행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148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는 마녀로 추정되는 모든 사람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발본색원하라고 명령했으며, 이후 백여년 동안 마녀 사냥의 기세는 극에 달했다.
@@@@ 마녀의 기원
마녀탄압의 가장 오래된 예는 기원년전 1200년의 이집트에서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데모스테네스의 시대(BC 4세기)에 한 사람의 마녀가 처형되었고, 로마에서는 네로와 카라카라 황제에게 심하게 박해 받았으며 그리스도교에 개종한 직후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 AC 4세기)와 프랑크 왕구의 샤를르대제(AC 9세기)도 주술을 금지한 엄격한 법령을 선포하는 등 마녀와 그 주술에 대해 탄압과 박해를 가한 예는 드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과 박해는 마녀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는 반사회적인 범죄에 대한 것이었다.
마녀 선풍기 이전에는 마녀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고 탄압도 극히 미온적이었을 뿐 아니라 마녀에 대해 온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1300년을 경계로 하여 사태는 일변한다.
마녀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돌연 강경해진 것이다.
마녀 선풍은 13세기 무렵에 프랑스에서 불기 시작하여 결국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 즉 서유럽 전역을 황폐화시키고 17세기 말에 그 여파가 신대륙 아메리카에 퍼진 후 급속하게 진정되었다.
수만, 수십만의 마녀가 교살당하고, 혹은 교살당한 후에 불태워지고, 또는 살아있는 채로 불태워져 죽었다.
1590년에 독일을 여행했던 여행자는 적고 있다.
제네바에서는 3개월 동안 5백명(1513년),트 레이브즈(독일)에서는 7천명이 물태워진 탓에 두 개의 마을이 전멸되고, 다른 두 개 마을에서는 여자 2명만이 살아 남았을 뿐이다.(1580년).
작센에서는 하루사이에 1백 33명(1589년), 알사스의 마을 상 아라만에서는 1년 동안 2백명 이상(1596년), 라부르에서는 4개월 동안 6백명(1609년), 스트라스부르크에서는 5천명(1615∼55년), 뷔르츠부르크에거는 8백명, 밤베르크에서는 1천 5백 명..이러한 마녀선풍의 특이한 점은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을 표방한 르네상스의 최전성기에 휘몰아쳤다는 것, 이 선풍의 선두주자였 던 이들이 교황, 국왕, 귀족, 당대의 일류의 대학자, 재판관, 문화인이었다는 것, 마녀의 존재가 옛부터 존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국가 그리고 공적 권위와 권력들이 전국적인 조직망을 둘러침으로써 행해졌다는 것, 1600년을 절정하는 하는 전후 3, 4세기 동안에 한정된다는 것등이다.
마녀사냥은 1420년부터 1670년까지 거의 전 유럽에 걸쳐 이루어졌다.
14세기경에 이르면 이전의 신성불가침의 사회조직이 변회하고 있음을 알리는 조짐이 이미 여러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되었고 종교재판관들의 눈에는 부적이나 파는 나부랭이들로만 비쳐졌던 상인이라는 새로운 범주의 인간들이 영향력을 가지고 중요한 역할을 해내게 되었다.
이같은 움직임이 가속화되면서 세계는 서서히 공포속으로 빠져들었다.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고 우박과 결빙 홍수등 온갖 재해가 줄줄이 발생해서 수확된 작물들을 싹쓸어가버리는 바람에 끔직한 기근이 시작되었다.
굶주린 늑대들이 시골집 주위를 배회했고 쥐들이 들끓었으며 페스트나 나병처럼 무서운 전염병이 온나라를 휩슬었다. 설상가상으로 생식기능까지 손상되었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어갔고 여자들은 낙태를 했으며 남자들은 별안간 성 불구자가 되었고 간통사건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신께서 이 엄청난 불행의 책임을 질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사들조차 이런 질병들이 너무 심각하고 눈깜짝할 사이에 발생간 것으로 볼때 도저희 자연적인 것이라고는 볼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게다가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고해를 거부하는가하면 단식일도 지키지 않고 종교행렬에 참가하는 숫자도 점점 더 줄어들었으며 전통적인 기도를 올리고 성수를 뿌리는 대신에 마술로 병을 고치는 자들에게 몰려가는 것이었다.
사태는 악화되고 제상의 종말을 가까워졌으며 묵시록에서 예언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종교 재판관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외쳤다. 아, 알았다 !
그들은 악취나는 짐승이 바로 곁에 와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 짐승이 바로 거기 와 있었다.
이짐승은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를 거뒤기 위하여 손톱을 날카롭게 갈았다.
최후의 날이 오기 전에 가능한 많은 영혼을 타락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이 짐승은 버러 이번 전투의 결과를 음미하면서 물갈퀴 모양의 손을 문지르고 있었다. 이렇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한가지 명칭으로 요약되었다.
그 명칭은 <마술>이었다.
이 250여년동안 서로 다른 조류와 사상, 인물들이 연이어 나타났지만 마녀를 불에 태우는 이국기만은 온갖 장애를 헤쳐가면서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종교재판소가 설치되고 200여년이 지난 뒤에야 마녀사냥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탄압조치는 거의 500여년간 계속된 셈이다.
@@@@ 중세유럽의 마녀재판의 시작과 전개
원래 마녀는 마녀사냥이 있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마녀라기보다는 주술을 행하는 여자를 말하는 정도였다.
이들은 "신비적 직관에다가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병자를 고치거나 여성의 다산을 돕는다거나 또는 반대로 낙태를 시키는 일"을 하였다.
이것을 사람들의 일상요구에 응하여 존재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주술사들이 마녀로 낙인찍히고 이단으로 핍박받기 시작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때부터 마녀를 판별하는 지표와 기준이 생겨나고 이들을 집단적인 섹트로서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14세기를 대표하는 이단심문과 '베르나르 키'는 부부의 불화를 초래하고, 미래를 예언하며, 병을 고치는 자를 주의하라고 촉구하였다.
그 후 교황은 마녀를 최악의 이단으로 처벌하는 것을 이단 심문관에게 허가하는 한편 많은 신학자, 악마학자는 마녀에 대한 공통의 특징, 그 식별방법들을 연구하게 된다.
그 결과 14세기말에는 일종의 마녀교로서 마녀라는 집단의 존재가 자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15세기까지 마녀의 소추는 극히 경미하였다.
그러나 1500년경을 경계로 하여 전유럽에 전염병과 같이 마녀의 체포, 재판, 소추가 퍼졌다. 처참을 극한 마녀재판이 유럽을 휩쓸었다.
1484년에는 '마녀소추지침'(Malleus Maleficarum)이 간행되었다.
전자에는 교황이 아직 다수의 마녀가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추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그 3년 후에 퀘른 대학의 신학교사이자 이단재판관의 저작으로 간행된 '마녀소추지침'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마녀가 되는 학설을 망라하고, 마법의 역사를 서술하며 다시 마녀를 발견하고 추적하는 방법을 설명하며 나아가 마녀가 실재하는 이유를 상세하게 연구한 세 권의 서적이다.
이 책은 1869년도에 이미 29판이 출판될 정도로 베스트 셀러였다.
이 책은 점차 그림이 가미되고 나중에는 독일어로 번역이 되기도 하였다.
점차 마녀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절대적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마녀의 본질을 논하는 허다한 서적이 간행되고, 저명한 법률가가 악마에게 혼을 파는 계약의 성질을 연구하며, 당시의 형법이 마법사를 엄벌에 처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로써 마녀의 실재에 대한 믿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마녀를 적발, 추궁하는 것은 관리와 주민의 신성한 의무이기조차 하였다.
이것이 전에 없던 마녀의 박해시대가 열린 큰 배경이었다.
마녀재판이 극성에 이른 것은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말 사이였다.
기록에 나타나는 마녀처단의 경과와 사례를 몇 가지 보자.
1582년 바이에른 어느 백작의 한 작은 영지에서 한 명의 마녀가 체포되었다.
이 마녀의 체포에 이러 연속으로 48명이 마녀로 낙인찍혀 화형 당하였다.
1587년 도릴 지방의 약 200여 촌락에부터 15887년부터 이후 7년간 368의 마녀가 적발되어 화형 당하였다.
1590년 남독일의 소도시 네르도링켄에서 시장의 제안에 의하여 시의회는 거리를 나돌아 다니는 마녀를 철저히 일소하도록 결의하였다.
이후 3년간 32명의 마녀가 화형 또는 참수되었다.
1590년 소도시 에링켄에서 65명의 마녀가 처형되었고 1597년부터 1676년까지 197명의 마녀가 화형 당하였다.
소소크만텔 (승정령)에서는 1639년에2,428명, 1654년에는 102명이 처형되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 영토가 된 스타이엘마르크 지방에서 1564년부터 1748년까지 1,849명이 소추되어 1,16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나노수 지방에서는 1629년부터 이후 4년간 2255인이 마녀로 소추되었고 뷔르튄겐 지방에서는 1633년 이후 3년간 11명이 처형되었으며 제롯부르크에서는 1679년에 97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튜링겐 숲에 인접한 게오르겐탈이라고 하는 인구 4천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에서 1652년에서부터 1700년 간 64회의 마녀재판이 실시되었다.
반베르크 승정령에서는 1627년 이후 4년간 화형 당한 마녀가 285명이었고 그 이후 30년에 걸쳐 이 재판소에 계류된 마녀재판은 900건을 넘었다.
이 승정령의 인구는 겨우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
뷰르스부르크 승정령에서는 1623년부터 1631년간 화형 당한 마녀가 900명에 달하였다.
1627년부터 이후 년간 29회의 재판에서 화형 당한 157명의 희생자를 보면 잡다한 연령과 계급, 직업의 사람들이 혼재해 있었다.
시의회 의원, 고급관리 등의 부인, 시의회의원의 처자, 그 지방의 가장 아름다운 자녀 그룹, 8세, 9세, 12세의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후루다에 살고 있는 바루다세르 후스라는 마녀재판관은 19년간 7백명의 마녀를 화형 시켰는데 자신의 일생동안 1천명을 처형하기를 소원하였다고 한다.
로트링겐에 살고 있던 니콜라스 레미라는 사람도 재직 15년간 화형 시킨 마녀가 9백명에 달했다고 한다.
@@@@ 마녀라는 증거
당시의 재판관들은 악마의 부하가 되었다는 최대의 증거는 악마의 집회(사바스)에 참가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마녀 재판의 최대 목표는 사바스에 참가했다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종교재판이 열리던 시절에는 누가 보아도 확실한 흔적을 사탄이 새로운 추종자들에게 남겨놓았기 때문에 별다른 어려움없이 마술부리는 여자들을 고발 할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날카로운 정의감을 지닌 사법관들은 때때로 다른증거들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1. 밀고
15세기에는 혼자 외딴곳에서 산다거나 혹은 어떤동물을 특히 좋아한다는 것은 곧 그가 마법사이며 악마와 밀접한관련을 맺고 있다는 증거로 간주되었다.
2. 불완전한 묵주를 가지고 있을 때
어떤 마녀의 묵주에서 알아하나이상 빠져있다면 그녀는 마녀일 가능성이 높다.
더더구나 묵주에 십자가가 달려있지 않다면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3. 사도신경을 잘 모를 때
고발당한 여자들에게 사도신경을 암송해보라고 요구했는데 잘 모를경우 (특히 몇몇단어들을 발음하지 못하고 우물거릴때)에는 의심을 갖고 보았다.
4. 울지 않을 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특징은 매우 확실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왜냐 하면<여자들이란 원래 시도때도없이 눈물을 쏟고 한숨을 내쉬는 인간들이 며>(보뎅), <눈물이라는 것은 속죄자들이 그들의 죄를 씻어내고 영횬을 깨 끗이하는데 주로 쓰였기 때문>(보귀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는 마법사가 눈물을 셋방울만, 딱 셋방울만 그것도 오른쪽 눈에서만 흘렸다는 점이다.
5. 고문을 당했는데도 입을 꼭 다물고 있을 때
이같은 침묵은 자신의 추종자들이 비밀을 누설하도록 사탄이 걸어놓은 묵비의 주문에 의한것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매우 부정적으로 해석되었다.
그들의 혀는 마비되고, 성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례를 받지않은 어린아이의 간을 가루로 만든다음 기장을 섞어서 만든 흑빵을 먹어도 이처럼 입이 굳게 닫혀버리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빵은 마녀집회에서 사용되었다.
6. 보기보다 몸무게가 덜 나갈 때
마녀들은 하늘을 날아다녀야 하기때문에 그들의 몸무게보다 너무 많이 나가지 않도록 마왕이 미리 손을 써놓았다.
그렇기때문에 마녀로 고발당한 사람은 신명심판(神明新版)이라던가 수장(水葬)심판같은 확인단계를 거쳐야만했다.
1)신명심판(神明新版)
이것은 중세전기에 널리 유행하던 시험이었다.
먼저 사흘간 금식을 하고 그다음에는 마녀라고 추정되는 여자의 유죄여부를 알려달라고 신에게 요청한다.
그런다음에 고발당한 여자의 손에 새빨갚게 달구어진 쇠를 쥐어주고 쇠와 손을 함께 천으로 둘러싼다.
사흘뒤에 붕대를 풀었을 때 화상을 전혀 입지 않았다면 그녀는 무죄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아예 그 여자를 통째로 불태워 버렸다.
물이 펄펄 끓는 작은 솥안에 고발된 여자의 팔을 집어넣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2) 수장심판
마녀는 몸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곤발을 끈으로 묶어서 강물속에 집어넣는다고 해서 곧장 물속으로 가라앉지는 않는다.
만약 물속으로 곧장 가라앉을 경우 원칙적으로는 다시 건저주게 되어있었다.
원칙적으로는.....
17세기 네델란드의 우드워터라는 작은 도시는 유럽 각국에서 궁지에 몰리다 찾아온 마법사나 마녀들에게 그들의 몸무게게 타고난 체격과 일치 한다는 것을 보장해 주는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하지만 결국 따져보면 마녀라는 혐의를 받은 여성이 무죄를 선고받는 경우는 백에 하나 있을까 말까였다.
영국의 종교재판관들은 고발당한 여성의 눈이 지나치게 크고 옆으로 길게 찢어졌다든지, 아니면 그냥 손으로 시체를 만지기만 했는대 피가 흐를경우에는 마녀로 간주하였다.
본격적으로 사냥이 시작되기 이전의 마녀들은 사람들이 덮친 온갖 불행의 희생양들이었다.
늙은 여자, 못생긴 여자, .... 그리고 지나치게 예쁜 여자등 평판 나쁜 모든 여자들은 가장먼저 희생되었다.
그러나 종교재판으로 실제로 마녀사냥을 한 기간은 1484년에서 1520년까지 겨우 40여년정도에 불과하였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사법부가 바톤을이어받았던 것이다.
교회로서는 책임질 일이 없어진 이 탄압의 물결은 훨씬더 무자비하였다.
17세기 말까지 200여년간 이 상에 걸쳐서 공공장소에 설치된 수많은 화형대에 불이 붙었다.
주민들은 마술사라는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밀고하기도 하였고 린치를 가함으로써 직접 사람들의 손으로 판결을 내리기도 하는등 이 인간살육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많은여자들이 끌려가서 채찍질을 당한 다음 투석형이나 익사형을 당해 죽었다.
이때는 높은 지적수준을 갖춘 속인 재판관들이 악마학 개론서를 써서 큰 성공을 거든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마녀사냥이라는 것이 해일이 밀어닥치듯 어느날 갑자기 시작되어서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민들이 마녀사냥초기부터 그들이 마술을 부린다고 믿은건 아니었다.
<마녀들이 회개할수있다고 믿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마녀 재판관들은 생각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파기가 불가능한 계약을 사탄과 맺었기 때문이다.
사탄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마녀의 몸에 찍어놓은 낙인은 그녀가 회개하건 안하건 간에 다시는 지울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부 관대한 재판관들은 회개의 의지를 보이는 마녀들에게는 화형당하기 전에 교수형 당하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럼 최초의 마녀 혐의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그것은 자신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사람을 계략에 빠뜨리거나, 재해나 갑작스런 병이 들 때 일종의 액땜으로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결국 평소 미움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던 사람이 고발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재난을 예방하는 조치로서 마녀 사냥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은 유럽에서만 30만~900만 명 정도였다.
주술이나 마술을 사용하는 '마법'의 역사는 인류와 함께 매우 오래되었으며, 어느 문화권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마녀 사냥은 16~17세기 서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과 프랑스, 미국 일부에서만 나타났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인간성 존중과 합리주위를 부르짖은 르네상스, 양심의 자유를 강조한 종교 개혁의 시대에 학살과 미신으로 얼룩진 마녀 사냥의 회오리가 거세었던 셈이다.
게다가 이러한 바람을 일으킨 것은 교황, 고위 성직자, 국왕, 귀족, 당대의 제일가는 학자, 재판관 등 '초일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조직적으로 마녀 사냥이 행해졌던 곳은 바로 기독교 국가였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렇게 경계하고 있다. "인간은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행할 때일수록 기쁨에 넘쳐, 철저하게 악을 행한다."
첫댓글 이건 아직 완전히 쓰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되는데로 수정하겠습니다.
네엡~~ 항상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발췌가 있다해도 참잘쓰신 겁니다. 제가알기로는 고문당할때 비용도 본인부담 이었다고 알고 있어요
본인부담이라기 보다는 재산 압류가 아니었을까요? (나아~~~~~~~쁜 넘 들)
으아........-0-(경악중..) 저거 완전 죽으라는 거지.....(정말 옛날사람들이 훨씬 무섭다는깐...)
단순히 한 개인의 재산 압류만은 아니였을 겁니다. 그 정도로 그치지 않고 연대책임을 무는 게 보통이였니 그 파장은 보통이 아니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