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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이야기(7) - 자사차호의 고향, 이싱으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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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카페를 열 수 없는 분들을 위해서 1편만 아래에 올렸습니다. 참고하세요~
처음 올릴 때는 이미지가 생생했는데~ 하루 지나 들어와보니 이미지가 다 가셨네요~
오후 늦게 돌아와 손을 봐야 겠네요 죄송^^
2014.05.04 - 2014.05.07
자사차호의 고향, 이싱으로 떠나다 |
안녕하세요! 오늘을 시작으로 몸모니는 2014.05.04 - 2014.05.07 간의 이싱 여정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모든 분들이 보실 수 있게끔 올려드리려합니다! 사진은 모두 핸드폰으로 촬영한 것이라 화질이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내용은 '박 현 선생님'과 '서해진 선생님'의 말씀을 참고해 알려드립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귀엽게 봐주세요~
▶ 상해 → 이싱
▲ 점심식사시간
차문화가 있었기에 도자문화가 있었던 것이고, 도자문화가 있었기에 차문화가 있었던 것일수도 있겠죠.
이싱을 부르는 이름은 총 5가지가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하나는 '도자기의 수도'입니다. 이싱은 1200만평의 차밭이 있기 때문에 '드넓은 차의 대륙'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넉넉합니다. 또한 600만평에 해당하는 대나무의 숲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나무의 푸른 바다'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걸어들어가서 물을 만나게 되고, 그 물을 거슬러 가거나, 배를 타고 나가면 다른 곳으로 출구가 있는 그런 동굴들, 김용의 무협소설에 등장하는 정도의 동굴들이 무려 40여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공개된 곳이 10여곳정도 됩니다. 이와같은 동굴들이 많다 보니까 '동굴의 천지'라는 별명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1949년 이른바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과 더불어서 배출한 이싱의 박사 수가 8000명에 이릅니다. 그래서 '박사의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8000명 박사가운데는 전, 현직 500명의 총장급 교수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농담으로 이싱이 없으면 중국에 대학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지역은 풍수적으로도 예부터 많은 존중을 받던 곳이여서 삼국시대때 오나라 손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도 바로 이싱입니다.
그 가운데서 저희는 우선 도자기가 어떻게 이싱이라는 곳에서 발전되어 왔는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도자박물관에 들리기로 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7000년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싱은 전 중국을 3000개 가까운 현으로 쪼갰을 때 경제, 생활 수준 전 중국 6위, 생태환경 도시 3위, 행복감을 주는 도시 1위에 해당합니다. 도자기 이외의 산업적으로는 케이블 산업의 요람지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싱으로 가는 길, 서부를 지날때 호수와 비슷한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호수가 아니라고 합니다. 바로 氿(구)라고 부르는 것인데요. 물이 어디서 흘러들어오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구라고 부른다고합니다.
상하이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저희는 단 하나의 산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평원을 지나온 것이죠. 이싱에 와서 서쪽편에서 산 하나를 만날 수 있는데 그 산을 넘으면 어느새 강소성이 끝나고 안휘성이 시작됩니다. 즉, 이싱은 강소성과 안휘성의 경계에 있는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절강성과의 경계를 이룹니다. 그래서 이싱은 강소, 안휘, 절강의 접경지역이기도 합니다. 옛날 지역에는 오나라가 되었다가 어느날에는 월나라가 되는 그와같은 문화적 충돌지이기도 합니다. 이와같은 문화적 충돌지는 문화 교접이 일어나고, 때로는 문화 융화가 일어남으로써 그 지역을 문화적으로 많이 발전시켰는데 이싱이 바로 전형적인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싱은 텃세문화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문화충돌에 의해서 자기 문화를 융합시켜온 곳이기 때문에 문화 수용능력이 매우 빠른 곳입니다.
이싱은 현지 인구 180만명의 도시이지만 그 안에 14개의 5성급 호텔이 있는 곳입니다. 동일한 인구를 2배를 가지고 있는 대구의 5성급 호텔의 무려 7배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얼마나 많은 유통량이 있는 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북경에서부터 광주를 지나갈 때 이 서쪽에 있는 산을 제외한다면은 이싱은 지나가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는 반드시 지나가는 병목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북경으로부터 남쪽으로 달리는 고속철의 주요한 병목이 되는 곳도 이싱입니다.
▶ 정촉진
이싱시의 남쪽에 있는 정촉진은 인구 25만에 외지인구 합산 40만이 있는 국가 특수진 입니다. 이싱시의 모습은 개발된지 오래 되지 않았기에 새로운 모습이지만 정촉진은 건물들이 허름한 경우가 많습니다. 워낙 일찍 경제적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지금와서는 오히려 허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 104번 국도
104번 국도는 중국의 간선국도중에 하나고, 과거에 고속도로도 없는 국토시절에는 중국의 남북을 이어주는 병목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곳을 통과하지 않으면 남북이 교통으로써 교류하기가 어렵습니다.
▶ 도자박물관
▲ 도자박물관 입구
▲ 도자박물관 입구 옆 도자기 확대
위의 사진에 있는 모든 것이 손으로 하나하나씩 붙여서 완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대단하지 않나요?!
▲ '도자의 도읍 이싱, 동방의 명주'
이싱 도자박물관의 현관에 들어서면 '도자의 도읍 이싱, 동방의 명주'라는 글이 크게 적혀있습니다.
저 글씨는 均陶(균도)라는 재료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 출처 : '자사차호의 세계로 떠난 16인의 이싱여행 2편' / 작성자 : 이정하 선생님
▲ 박물관 중 하나
저희는 먼저 이 곳을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이싱 도자기의 역사는 7000년 정도 되었습니다. 장강 하류다보니까 사람들이 초기부터 문명생활과 정착해서 생활하는데 유리했고 그다음에 오랜 퇴적층이 있다보니까 도자기를 만드는 니료가 애초부터 다른지역보다 발달되었습니다.
애초에 그릇은 물과 불을 이용하기 위해서 필요했는데, 그래서 처음에는 가공할 필요가 없는 돌이라던가 나무와 같은 재료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흙에 물을 섞으면 덩어리가 되는 것을 발견하고 토기류가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그후에 조금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 도기가 발달하게 되는 것 입니다. 나중에 더 발달해서 사기류가 생기고 그게 더 고급스럽게 발달하다 보니까 자기류까지 발달하기 되고 그렇게 지금까지 흘러들어오게된 것입니다.
제가 이 설명에서 참 재미있다고 느낀 것은 불과 물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했던 그릇을 불과 물을 이용해서 만든다는 것이였습니다.
▲ 龙头荷花缸
계단을 올라가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龙头荷花缸'입니다. 명나라 초기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깊이가 87cm, 입구의 둘레가 111cm이며 안쪽과 바깥쪽모두 균도라고 불리는 재료로 코팅되어있습니다. 시간이 오래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색과 광택이 아직까지 선명하고 밝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방화수를 저장하는데 쓰였으며 뜰에 놓여졌습니다.
- 출처 : 설명문
▲ 龙头荷花缸 내부
▲ 龙头荷花缸 바깥모습
바깥쪽에는 모란, 연꽃, 국화, 납매의 네가지의 꽃으로 장식이 되어있는데 이것은 1년의 사계절을 의미합니다.
▲ 한나라 시대의 유물
저 움푹 파여있는 곳에 물을 부어놓으면 저장품이 덜 상한다고 합니다. 김치같은 것을 저장할때도 항아리 입구에 저런식으로 만들고 물을 부어 놓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 박물관을 둘러보시는 모습
▲ 청자
놀랍게도 사진 속 도자기는 청자입니다. 청자이기는 한데 소성방식을 달리하면, 거꾸로 하면 저런 색이 나온다고 합니다.
청자라고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게 푸른색인데, 그와 대비되는 색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청자라는게 믿겨지시나요?
▲ 다른 박물관 입구
첫번째 박물관을 둘러보고나서 다른 건물로 이동합니다. 이곳에는 '자사'에 대한 설명과 그에 맞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공춘 조소상
이것은 공춘의 조소상입니다. 공춘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잠시 뒤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 전체적인 설명
▲ 니료층에 대한 설명
예전에는 야적을 해놓다가 나중에는 더 효율적으로 캐기 위해서 갱도방식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자사니료의 층에대한 사진입니다.
▲ 자사 원광의 분류
자사 원광이 분류가 되어있는데, 자사니료는 채굴하는 사람, 재련하는 사람, 작가들의 3가지 입장이 서로 다릅니다.
▲ 형태에 따른 자사차호의 분류
자사차호를 분류할 때는 대게 형태를 가지고 분류합니다. 둥글한 것을 '원형기', 모가난 것을 '방형기', 근육처럼 되어있는 것을 '근문기', 자연사물을 본따서 만든 것은 ‘꽃 화’자를 써서 '화확'이라고 하고 '자연기'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분리되는 이유는 형태도 있지만 만드는 과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형기같은 경우에는 가장 일반적인 차호인데, 오직 손을 이용해서 만들 수 있는 차호입니다. 그에비해서 방형기는 전수공으로 만들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만약 모든 것을 손으로 만든다면 정말 대단한 것이지만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약간의 틀을 사용합니다. 근문기도 대부분 석고틀을 이용합니다.
석고 모형이라는게 모두들 잘 아시는 고경주대사님이라던가 서한당 대사님과 같은 분들이 유행시킨 것이라고합니다. 옛날에는 궁궐이라던가 사대부같은 사람들만 쓰는 예술품이였지만 공예품이 되면서 수요가 엄청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하루에 하나정도 만들게 되면 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에 서한당 대사님과 고경주 대사님이 유행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하나 모형을 써도 차호가 다 다른데 모든과정을 손으로 만드니까 10개를 만들면 그 10개가 다 틀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양을 같게 만들기 위해서 석고틀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유행하면서 어느정도 생산량이 많아지게 되었고 그제서야 공예품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옛날에 만들어진 작품을 똑같이 만들 수가 있습니다. 유명한 대사들의 작품을 한국돈으로 계산하면 기본 2-300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데 그 작품을 똑같이 만들 수 있기에 석고틀이 자주 사용됩니다. 대사와 같은 경우 차호를 직접 만들 시간이 부족하고 그래서 밑에 있는 제자들이 만들게 되는데 그때도 이 석고틀이 유용하게 사용된다고 합니다.
석고모형을 이용해서 작업을 하는 것도 규정상으로 자사차호에 들어갑니다. 옛날에도 석고는 아니더라도 다른 모형틀을 이용해서 만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형을 이용하는 것은 완전한 자사가 아니다! 라는 부정적인게 전혀 아니며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긍적적인 부분이 많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 니료가 만들어지는 과정
먼저 채굴을 하고난 후에 야적을 시킵니다. 자사는 분사질이라고 나누어지는 자갈입니다. 즉 점토성이 있는 퇴적암이면서도 나누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적을 시키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야외에다가 풍화를 시켜놓으면 저절로 부스러지기 때문입니다. 이 풍화되는 과정속에서 암석의 성질이 자갈로 바뀌고, 자갈의 성질이 모래로 바뀌고, 모래의 성질이 진흙으로 바뀌는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지며 자사속에 포함되어 있는 불순물이 녹아 사라집니다. 그래서 반드시 자사는 이런 세월을 거쳐야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보이차와 비슷하게 급하다보면 막 갈아버립니다.
야적 후 풍화된 자사를 옛날에는 멧돌로 갈았습니다. 지금도 멧돌을 이용해서 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럴 경우에 재료비만 해도 우리나라 돈으로 몇 백만원을 훌쩍 넘어간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은 대부분 기계를 이용해서 갈고, 다음에 체를 이용해 거릅니다. 아주 미세한 것 부터 100무, 80무, 40무 등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통은 4- 60무를 이용하여 차호를 제작합니다. 체에 거르는 것을 마쳤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 물하고 이겨서 긴세월 숙성을 시킵니다. 어떤 것은 이 과정이 10년 이상 걸리기도 하는데 그것을 '노니'라고 부릅니다. 그 후 찰떡 찌듯이 기계에다가 놓고 반죽을 한 후 하나씩 뽑아내서 하나당 5kg 정도하는 6개를 한 무리로 판매가 됩니다.
▲ 차호 제작시 사용되는 도구
▲ 차호 제작시 사용되는 도구
▲ 차호 제작시 사용되는 도구_명침
차호를 만들때 가공된 니료를 가지고 바로 제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 망치를 이용해서 다시 찰떡 두드리듯이 두드리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어느정도 만든 다음에 물소뼈로 만든 '명침'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계속 빗질을 합니다. 나무망치로 많이 칠수록 찰져지며 명침으로 빗질을 하면 할수록 윤기가 납니다. 이것이 바로 차호 사이에 가격차이가 나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이 두 과정에 의해서 가격과 품질이 좌우되며 잘되면 잘 될 수록 정성이 들어간 정품이 되는 것입니다.
▲ 차호 제작시 사용되는 도구_나무망치
▲ 차호 제작시 사용되는 도구_명침
<이싱 자사의 기원 - '양선명호계'에 근거한다면>
옛날 한 스님이 '부귀사세요, 부귀사세요'라고 외치며 한 동네를 돌아다녔습니다. 다른 것은 못해도 정말로 귀한,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을 팔수있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모두가 미친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그러길래 한 사내가 궁금증을 품고 스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스님을 따라 길을 떠났고 후에 스님이 가르킨 곳이 바로 이싱의 '황룡산'이라고 합니다.
▲ 온도에 따른 자사 색의 변화
아래부터 온도가 낮은 순서로 배열되어있습니다.
▲ 黄龙山红泥
▲ 黄龙山大红泥
▲ 黄龙山·台西矿区 绿泥
산에 있는 원광, 캐어낸 후의 자사, 구워낸 후의 자사의 색이 완전히 다릅니다.
작년 1월에 도자박물관을 왔을 때와 가장 달라진 점이 바로 이곳이였습니다. 니료에 대한 설명이 아주 자세하게 되어 있었는데요. 그에맞는 샘플들도 전시가 되어 눈으로 볼 수 있어서 비교적 쉽게 다가왔습니다.
▲ 간략적인 작품 사진
▲ 5인에 대한 설명
자사에 대해서 관심있으신 분은 이 다섯분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시는게 좋다고 하십니다.
① 공춘 - 그 이전에도 자사차호를 만드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공춘은 자사차호를 작품으로 전환시킨 사람이며 그 전환시킬 때 매개체가 되었던 것이 그림속의 이 작품입니다. 이것은 은행나무의 혹모양을 자사를 가지고 흉내내서 만든 것인데 그것을 '수영호'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저게 상징이되서 공춘호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공춘은 명나라 초기, 한 관원의 서동이였고 그의 주인은 금사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금사사에는 자사를 이용해 그릇을 매우 잘 만들던 노화상이 있었는데 공춘은 그로부터 차호 기예를 익히게 됩니다.
어느 날 공춘은 노화상이 니료를 수비해둔 항아리 바닥에 가라앉은 니료를 이용해, 금사사 부근의 큰 은행나무 혹(수영)을 보고 차호를 만들고, 수영의 무늬를 조각했습니다. 이 차호는 단시간에 자연형상을 모방한 차호를 대표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를 '공춘호'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고, 사람들은 당시 조잡하던 자사기예를 공예예술품으로 이끈 공을 공춘에게 돌렸습니다. 이후 황옥린, 강안청, 왕인선, 서한당 등등 허다한 자사명인들은 공춘호를 모방해 만들었고 연구와 제작에서 공춘의 수영호는 고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 출처 : '이싱 자사차호 고전중의 고전을 뽑는다 1' / 서해진 선생님 블로그 참조
② 시대빈 - 자사차호는 명나라때 유행을 하였습니다. 그 계기가 되었던 게 명나라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면서 긴압차를 만들지 말고 산차를 마시라고 한 것이였는데요. 예전에 대부분이였던 긴압차는 끓여서 달여마셨는데 산차를 달여마시면 물러지니까 차호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사차호가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시대빈은 명나라 사람으로써, 그 이전부터 있었던 전체적인 유행을 재정비한 사람입니다. 즉, 자사차호가 기형으로써의 나름대로 완성을 맺게끔 정리를 한 사람입니다.
③ 천만생 – 천만생은 원래 작가가 아니라 학자였습니다. 한 지방에 관리로 있다가 자사차호를 너무 좋아해서 자사차호 설계에 뛰어들었습니다. 설계를 하고 글을 새기면서 만생 18식, 만생 32식이 유행하게 된 것 입니다. 즉, 천만생을 통해서 인문과 도자기가 만난 것입니다.
다른 도자기와는 다르게 자사는 그러한 장점이 있습니다. 즉, 설계할때 물레를 이용해 바로 뽑아내는게 아니라 자기가 다 손으로 수작업을 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만드는 사람이 각도와 모양 모두를 신경쓰게 됩니다.
그래서 인문학자가 나름대로 개념을 전달하면 작가는 만들어내고, 거기에다가 어울리는 글을 새기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④ 소대형 – 소대형은 동양의 64괘라던가 8괘라던가 태극 음양이라던가하는 동양적인 철학을 차호로 그려냅니다.
▶ 숙소 및 저녁만찬
▲ 숙소의 모습
▲ 저녁 만찬
여러 작가분을 비롯한 많은 분들과 즐겁고 활기찬 저녁 식사 시간이였습니다.
▲ 저녁 차회
저녁식사후에는 각자 방에 모여서 저녁차회를 열었습니다. 저는 제주분들이 모이신 방에서 차를 홀짝홀짝 마셨는데요. 아무래도 여정을 지속할수록 가장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도, 인상에 깊게 남는 것들 중에 하나도 저녁차회인 듯 합니다.
다들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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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황룡산과 청룡산★
▲ 청룡산
▲ 황룡산
이번 여정에서 청룡산과 황룡산은 다녀오지 못했으며 사진은 작년 1월 제가 이싱에 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혹시나 궁금해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같이 올려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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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2014.05.04 이싱 여정 첫째날의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라 화질이 좋지 않은 점, 글을 적는 것이 미흡하고 빠진 부분이 많은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긴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하루 잘 마무리하시구요! 조만간 둘째날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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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원님들은 불편함이 있어도 한 번도 내색을 하지 않으시니 제가 많이 불편합니다~
이 번 올린 글은 네이버에 접속없이는 제대로 볼 수 없는 글이네요~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인데요^^
방법은 글과 사진을 따로 따로 스크랩하여 처음부터 다시 업로드하는 건데~^^
이번 기회에 네이버 아이디 없는 분들은 하나씩 새로 만들어놓으면 어떻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