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는 이제 곧 94세가 되십니다. 27세때 저를 낳으셨고 밑으로 여동생과
남동생을 더 낳으셨습니다. 제가 7세때, 그러니까 34세때 6.25가 났고 아버님은
피란 못가고 계시다가 당시 소속되었던 교향악단에서 단원들은 모이라는 연락을
받고 나가신 후 어떻게 되셨는지 지금까지 소식을 모릅니다.
아버님이 그리되신 후 세 자녀와 어머님과 시어머님을 모셔야 하셨습니다.
앞으로 살아나갈 일이 얼마나 막막하셨겠습니까? 주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친척도(무남독녀 외딸) 없없었으니 말입니다.
전쟁이 끝나고도 아버님은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언젠가는 통일이
되겠고 남편은 돌아오겠지 하는 희망을 가지셨기에 그나마 버티셨을 겁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참자'라는 각오를 하셨겠지요.
그래서 손수 쓰신 글이 위의 참을 '인(忍)'자 였을 겁니다.
위 사진은 원본 크기의 사진으로 그 전에도 몇차례 어머님의 농장 속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 검은 잉크를 찍어 펜으로 한자 한자 또박뽀박 쓰셔서
큰 글자의 연필 본에 채워 쓰셨겠지요.
요즘 어쩌다 어머님의 농장을 다시 열어 보다가 글씨를 보고 생각했습니다
저 작은 글씨를 쓰실 때 마다 얼마나 다짐을 하시면서 쓰셨을까?
엄청나게 작은 '인"자가 몇자나 되는지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어머님의 다짐과 참음의 횟수는 저 글자 수와 비교가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글자를 쓰지 않으셨다면 어머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자매들의 운명도
어찌되었을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창을 '인'자가 어머님의 다짐이였다면 아버님의 생환과 우리 남매의 미래는
바로 어머님의 '희망'이었을 겁니다. 어머님의 고생으로 우리 남매들을
훌륭하게 키워 주셨습니다. 비록 남에게 알려지는 유명인사는 못되었지만
나름대로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는 평범한 사회인으로 살 수 있도록
키워 주셨습니다.
지금은 10여년 넘는 치매현상으로 아들도 기억 못하시고 당신의
이름조차 잊으셨습니다.
살아계실 때 효도하라고 하는데 부족하지만 자식의 어머님에 대한
사랑조차 인식을 못하시니 이렇게 답답한 노릇이 또 어디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