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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교회의 여성관
중세 초기의 여성관
중세의 수도승들과 성직자들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으며, 또한 이들은 신의 섭리 속에 어떠한 여성관이 제시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자문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성직자들은 신이 주관하는 신성한 역사(Heilsgeschichte) 안에서 여성의 존재를 정의하려고 하였다. 여성은 결국 (남성) 성직자들에 의해서 신의 질서(ordo) 개념 속에서 파악되었고, 성직자들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교회의 여성관은 절대적인 것으로 비추어 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중세 교회의 여성관은 당시 사회의 여성 이미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중세에 “성직자에 의한 지식의 독점화 현상”(아놀드 하우저)이 기독교 2000년의 역사 중에서 그 어느 시기보다도 강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전제 조건에 별다른 이의가 없는 한, 중세 교회가 견지하는 여성관은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교부 시대에 신학자와 성직자들은 신학 연구와 사목 지침서에서 여성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교부들이나 중세 신학자들이 여성을 신학 연구의 독립적 대상으로 채택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여타의 신학적 교리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여성이 간헐적으로 언급되었을 뿐이라는 사실 또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중세 신학자들에게는 인간의 구원 문제 혹은 원죄 문제 같은 것들이 관심의 주 대상이 이었지 ‘여성 문제’ 자체는 그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부들의 여성관은 중세 내내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후대의 신학자들은 이를 그들의 학문적 자양분으로 받아들였다. 중세 인들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항시 ‘권위’ 있는 옛 것에 의존하려고 하였고, 그 결과 성경과 교부들의 저서는 지식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특히 교부들의 권위적 해석은 법률이나 교황 칙령과 동등한 효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교부들의 여성관은 중세 성직자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여성의 해악성을 강조해야만 했던 상당수의 중세 성직자들은 “늑대와 같은 존재들”을 가급적 멀리 쫓아 보내버리기 위해서 교부 시대의 권위 있는 ‘여성 전문가들’의 문구를 인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부들의 여성관은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 혼란을 초래하기에 충분한데, 이는 여성에 대한 교부들의 생각 자체가 이중적이었기 때문이다. 금욕적 수양 생활을 강조했던 대부분의 교부들은 여성을 두려움과 혐오감을 가지고 바라보았고, 특히 그들이 관심을 많이 기울인 것은 젊은 남성 성직자들을 여성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독신에 대한 찬양은 여성의 성적 능력에 대한 모욕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절제력 강한 일부 교부들의 여성 혐오는 매우 두드러져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만일 여성이 남성에게 아이를 낳는 협력자로서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과연 어떤 경우에 남성에게 도움이 되겠는가?” 히에로니무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도 여성의 본성은 악이라 기술했으나, 그들과 친밀한 교분을 유지했던 후원자들 중 몇몇은 여성이었다. 특히 히에로니무스의 경우, 4세기 후반의 성녀 파울라(Paula)를 칭송하는 글에서, 그녀의 희생적 신앙 생활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부들의 이중적 여성관에도 불구하고, 중세 초기에는 여성은 여전히 “유혹․마녀․악마․질병․해충․독”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졌고,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옳은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교부들의 서적들뿐만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로마의 ‘이교도’ 시대에 쓰여진 서적들을 참고하는 것조차도 꺼려하지 않았다. 이로써 고대의 반여성주의적 정서는 중세 기독교 사회에까지 계승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11세기 후반에 진행된 교회 개혁과 더불어 더욱 보수적으로 기울어지는 인상을 준다. 교회의 자유(libertas ecclesiae)를 강조했던 그레고리우스 개혁은 교회의 쇄신과 동시에 기독교 세계 내의 평신도들에게도 공동체적 삶을 가능하게 하였다. 동시에 세속 사회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예를 들면 결혼은 성사(聖事)가 되면서 혼인의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이 시기에 쓰여진 대부분의 여성 비하적 문구들이 여성이 아닌, 수도자나 재속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의 시대에 성직자들에 대한 규율 강화 차원에서 등장한 글들이기 때문에, 여성 적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글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것이 과연 여성 자체에 대한 성직자들의 부정적 평가로 보아야 할 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성직자들의 글들은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되어야만 할 것이다.
죄의 온상인 이브?
구약 성서에 의하면 첫 번째 여성이자 인류의 어머니인 이브는 여성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그녀의 이름은 원죄와 관련해서 여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사용되었다. 중세 여성에 대해서 언급한 기록들은 독신 성직자들에 의해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여성은 대체로 수양 생활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되었고, 오늘날의 역사가들도 이러한 중세의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브가 아담을 유혹하여 인류에게 원죄의 멍에를 지우게 한 장본인으로 보았다. 이러한 중세의 창세기 해석에 현혹된 일부 연구자들에게 중세 교회의 여성관은 부정적인 것으로만 기억되었다.
실제로 중세의 신학 문헌에서 여성에 대해서 편파적인 내용을 담고있는 글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여성의 모습을 한 악마가 한적한 곳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수도자를 유혹하려고 했다는 기록들은 자주 발견되고 있으며, 이 경우 이브는 유혹의 상징으로 종종 언급되고 있다. 물론 이브가 중세 초기에 여성의 부정적 유형을 상징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일부 연구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브의 이미지로부터 부정적 여성관만을 유추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인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중세 초기에 이미 여성과 남성의 동등성이 이론적이지만 어느 정도 인정되는 사례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585년에 마콩에서 개최된 한 시노드에 대한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기록을 참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모임에서 한 주교가 여성(mulier)은 완전한 인간(homo)이 아니라는 주장을 전개하면서 설전이 벌어졌는데, 이에 대해서 다른 참석자들은 구약 성서의 창세기를 인용하면서 “신은 인간을 남성(masculum)과 여성(femina)으로 창조하였고, 이러한 이유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동정녀이신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셨다”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참석자들은 그 외에도 다른 몇 가지 이유를 더 제시함으로써, 결국 논쟁은 마무리지어졌다. 이 논쟁에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창세기가 여성을 원죄의 근원으로 몰고 가지 않고, 오히려 남녀의 동등성을 부각시키는데 인용되었다는 사실이다. 585년의 논쟁은 창세기가 중세 교회의 부정적 여성상을 정립하는 교리적 기초가 되었다는 기존의 통념적인 인식 체계를 해체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많은 여성학 연구자들은 중세를 여성 적대적인 사회로 규정하고, 이에 상응하는 문구들을 짜깁기함으로써, 실제와는 다른 왜곡된 중세의 여성관이 ‘재창조’되고 있는 듯 싶다. 논의를 좀더 구체적으로 심도 있게 전개하기 위해 중세 성직자들의 이브관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마도 망각되었던‘대항 기억’을 좀 더 많이 발굴하게 되면, 당시의 역사적 현실은 더욱 치밀하게 재구성될 수 있지 않을까?
중세 초기의 성직자들은 여성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이브를 즐겨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위에서 언급된 바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아담의 갈비뼈로 빗어진 이브는 악마의 유혹에 이끌리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하여, 인류 최초의 남자와 여자는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이후로 이브에게는 원죄의 원흉이라는 죄목이 붙게된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중세 교회의 성직자들이 성서의 이브와 아담의 이야기를 주해하면서 여성에게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었다고 보았다. 물론 일부 중세 성직자들이 여성을 “이브의 딸들”로 바라본 것은 사실이지만, 이브적 여성관이 중세 초기 교회의 여성관을 대변한다고 일반화 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브는 (남성) 성직자들이 여성을 적대적으로 폄하하는 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중세 초기의 여성관=이브적 여성관=부정적 여성관’이라는 획일적인 일반화가 지속적으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우선, 창세기 자체가 여성의 창조를 남성에 대한 인류 창조의 완성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중세 초기의 성서 주석가들도 이 같은 성서의 전달 메시지에 별다른 이의를 첨부하지 않았다. 흐라바누스 마우루스(Hrabanus Maurus, 780-856)의 성서 주석서 역시 여성은 창조 신화의 완벽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위해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9세기의 한 연대기 작가도 창세기 3,20을 인용하면서 이브는 모든 창조물의 어머니로, 그녀의 도움 없이는 인류가 번성할 수 없다고 기록했다. 레미기우스(Remigius von Auxerre, 841-908)는 조물주께서는 태초에 여성에게 단순히 자손 번창의 임무가 아닌, 모든 창조물의 번성을 주관하는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는 흥미로운 창세기 주석을 남겼다. 이상의 인용문들을 종합해 볼 때,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여성의 생식 능력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던 교부 시대의 여성관에 어느 정도 변화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세 초기의 여성들은오늘날의 많은 역사가들이 평가하는 것과는 달리성직자들에 의해서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평가되었고, 비록 남성에 대한 순종이 강조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성 존재 가치는 남성의 그것과 어느 정도 대등하게 인정되면서, 그 결과 여성의 가치가 전적으로 부정되지도 않았다.
다음으로 원죄의 원인과 관련해서도 이브는 단순히 사악한 여자로 기억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성서 속에서 여성 비하적인 문구들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고(예를 들면 디모테오 전서 2,11 이하, 교부들과 중세 초기의 대다수 신학자들이 원죄의 근원을 여성에게 돌리고는 있지만, 정작 중세 초기의 성직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누가 원죄의 근원인가’가 아니라, ‘왜 이브(여자)가 아담(남자)을 유혹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같은 이유로 필자는 기존 연구 결과의 범주에서 벗어나 ‘여성 문제’와 관련해서 좀더 폭넓고 심도 있는 사료 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유혹의 원인과 관련해서 이시도르(Isidor von Sevilla)는 “이브가 이성적 판단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대안을 제시했다.물론 이시도르의 해석이 여성에게 전적으로 이성이 결여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대 성직자들의 관념 속에는 신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창조된 여성도 이성을 소유한다고 보았다. 반대로 성서가 이 점을 부각시키고있지 않다고‘불만’을 토로하면서, 여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이성적 능력의 소유자임이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상의 논거들을 종합해보면, 중세 초기의 교회가 여성에 대해서 이브적-부정적 입장을 취했다는 뒤비의 해석 방식은 이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세 초기의 교회는 여성에 대해서 이중적인비록 부정적인 견해가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긍정적인 해석도 존재하고 있다는 면에서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 자체가 애매 모호한 사목 지침을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에 대한 부정적 서술은 여성 자체에 대한 편견 때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순결과 독신의 계율을 준수하기 위해서 여성으로부터 보호막을 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결국 중세 초기의 금욕주의(Anti-Sexualism)가 반드시 반여성주의로 변질되지 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여성 비하적인 문구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일부 성직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 예를 들면 토지 소유권 논쟁과 같은때문이기도 하였고, 혹은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의 순결 서약을 지키기 위한 자기 방어적인 교리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을 비하하는 일부 성직자들의 글이 반드시 여성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여성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일부 성직자들의 여성관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철학자들과 교부(敎父)들의 여성 비하적인 사고에 ‘오염’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일부 중세 성직자들의 관념적 사고가 중세 교회의 공식적인 여성관으로 확대 해석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세는 여성적대적인 남성중심적 사회”라는 구호가 역사적으로 타당성을 갖기에는 너무도 많은 반증적인 논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되고 있는 것만큼이나 망각되고 있는 과거의 사실들이 많다는 원론적인 사실을 상기하면서, 동시에 새롭게 발굴된‘반역사(anti-history)’의 가능성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중세의 여성 적대론’은 예외적인 사실들을 전제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료 수집과 해석에 시간을 투자하기보다는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으려는데 관심을 쏟고 있는 일부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무책임한글들은 신중하게 독해되어야 할 것이다.
변화된 중세 후기의 여성관
더욱이 중세 후기로 갈수록 여성을 죄악시하는 인식이 상당 부분 희석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세 교회의 여성관을 여성 적대적인 것으로 획일시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자주 인용되고 있는 사례이긴 하지만, 엘로이즈와의 서신 교환에서 드러나고 있는 아벨라르의 여성관은 중세 성직자의 사고에 많은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여성인 엘로이즈 자신의 여성관이 무색할 정도로, 아벨라르는 구약과 신약 성서에 나타난 여성들을 일일이 나열하면서 여성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각에 복음서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위해 봉사했던 여성들만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도들에게 처음 전달한 사람들도 여성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여성의 특별한 사명을 강조하고 있다. 아벨라르에게 있어서 이들 여성들은 사도들과 동등한 여성 사도들이었고, 또한 구약 성서에 기록된 여성들도 남성들 못지 않게 신을 칭송하는데 적극적이었다.
특히 여성성을 상징하는 이브가 중세에서 단순히 유혹이라는 단어와 동일시되었다는 설명은 신중하게 재검토되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중세 초기의 신학자들은 이브로 대변되는 여성을 원죄의 근원이자 인류가 죄의 넝쿨에 얽매이게 된 원인으로 해석하려 하였고, 그 결과 여자는 남자가 타락하게된 원흉으로 인식되곤 하였다. 초기 스콜라 철학자들도 이 같은 여성상(女性像)을 파괴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12세기 샤르트르(Chartres) 학파의 신학자들은 “조물주께서는 여성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구성 분자들을 잘 못 배합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브관에도 11세기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서 미미하나마 변화의 징후들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즉, 중세 초기 성직자들의 사고에 짖은 인상을 남겼던 부정적 여성관이 후기의 문헌 속에 모두 스며들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이브’라는 단어조차도 문헌 속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갔다는 사실은 중세 교회의 여성관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비록 여성을 이브적 사고의 틀 속에 묶어두려는 기존의 사고 양식이 답습되기는 했지만, 여성은 더 이상 단순히 원죄의 근원인 이브의 딸로 묘사되지 않았다. 특히 아래에서 좀더 자세히 조사되겠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마치 힐데가르트나 크리스니타(Christina de Pizan)와 같은 당대의 여성 지식인들만이 새로운 여성관을 제시한 것처럼 밝히고 있으나, (남성) 신학자들도 역시 변화된 여성관을 글로 남겼다는 사실 또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중세 후기의 수많은 신학자들이 저술한 엄청난 분량의 작품들에 나타난 여성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를 일목 요연하게 정리하는 작업은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 결과들을 종합해보면, 12세기를 전후로 해서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세 후기로 들어가면서 ‘유혹의 악마’로 묘사되었던 중세 초기의 여성 이미지는 긍정적 이미지의 여성상(女性像)으로 점차 대체되어 갔기 때문이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여성을 3 등급으로 구분했다. 일등급 여성은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들로, 이들은 100 배의 보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되어 졌고, 다음으로는 과부들로 이들은 60 배의 보상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혼한 부인들은 30 배의 보상을 받는다고 보았다. 제롬 성인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안된 것으로 알려진 이 ‘등급표’는 중세 전 시기에 걸쳐 통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 같은 차등화된 여성관도 서서히 사라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최하위 등급으로 분류되었던 결혼한 여자의 영적 고통도 사목 활동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12세기의 수도승 마르보드(Marbode, 1123년 사망)는 정숙한 부인은 남자와 다를 것이 없고, 모든 일상 생활에서 보여지는 부인들의 탁월한 능력은 칭송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곡식을 심을 들판이 없다면, 씨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그의 표현은 인간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을 엿보게 한다. 물론 여자의 능력은 아직도 자식을 낳는 역할에 국한되고 있다는 인상을 떨치기 어렵지만 말이다. 하지만 결혼한 부인들도 성서 속의 회개한 여인들처럼 신 앞에 참회한다면 마리아 막달레나의 경우에서처럼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여성은 원초적으로 죄인이고, 따라서 고행과 참회를 해야만 하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으로는 무엇보다도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종교적 영역에서 자신들의 열정과 바램을 표출하는 ‘여성 운동’은 이미 사회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이들 여성들 중에 일부가 카타리와 왈도와 같은 이단에 가담함으로써 상황은 점차 악화되어 간다고 교회는 파악했다. 목자들은 서둘러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하지만 되돌아 온 양들은 예전의 울타리 속에서 계속 머물러야 했다. 비록 탁발 수도회와 같은 일부 교단이 수녀원을 세우고, 청원자들을 받아들였으나 수녀들에게도 조차 침묵의 계율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성경을 주석하고 이에 대해 설교하는 것은 (남성) 성직자들의 몫이었고, ‘지식의 독점화’ 현상을 깨트리려는 어떠한 시도들도 용납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흥미로은 사실은 여성 지식인들도 서서히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입장을 글로써 표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는 인류 최초의 여성이 뱀에게 유혹되어 조물주의 명령을 거부한 사실보다는 남성의 가슴속에 품어져있는 오만함을 지적하는데 더 적극적이었고, 비록 남성이 육체적으로 강할지라도 여성에게도 긍정적인 면이 있음을 부각시키면서 여성은 모든 창조물들 중에서도 주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은 대상임을 강조함으로써 힐데가르트의 여성 찬양론은 절정에 다다른다. 메히틸드(Mechthild von Magdeburg)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원죄에 대해서 동등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고, 그 결과 모든 죄를 여성에게 뒤집어씌우려던 일부 (남성) 성직자의 신학적 사고를 수정하고자 했다.
인류의 타락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는 창세기 3장도 여성의 입장에서 새롭게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남성의 정액이 자녀 출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원죄는 아담을 통해서 그의 모든 후예들에게 전파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원죄의 근원은 남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를 통해서 중세의 여성 비하적인 신학적 전통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기존의 무비판적인 해석은 수정의 여지가 있다. 아퀴나스 역시 여타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여성관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방대한 신학 서적 중에서 몇 구절이 여성 비하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고 해서 그를 단순히 반여성주의자로 낙인찍는다면, 이러한 해석 자체가 비역사적일 수가 있다. 아퀴나스와 동시대의 프란치스코 교단 역시 상당히 순화된 여성관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면 보나벤투라(Bonaventura)의 생각, 즉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도움을 받듯이, 남성도 여성의 은혜를 입는다”는 구절은 남성과 여성의 상호 보완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성의 독립된 정체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