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개한 벚꽃잎들을 심술 사납게 떨구어 대던 바람이 얄궂어 서둘러 그 뒤를 좇으며 조용한 삿대질을 할 때만 해도, 푸르게 시린 바람을 만나러 남도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몇 해 전 이즈음,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받고 달려가던 내 귓바퀴를 돌던 바람의 기억은 이후로도 몇 년째 신열처럼 봄을 앓게 하는 원인이 되었기에 감미롭게 봄바람을 즐긴다는 것은 차라리 내겐 고통이었다. 전날의 피곤이 눈꺼풀로 무겁게 내려앉은 4월 중순 어느 날, 불현듯 완벽하게 푸른빛으로 둘러싸인 보리밭 바람 속에 나앉아 보자며 고창 청보리밭 행을 부추기는 친구의 제의에 못 이기듯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고창은 꽤 여러 해를 다녔지만, 늘 선운사만(간혹 도솔암까지) 들렀다가 습관처럼 인근 카페에서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으로 동백을 표현한 가사 좋은 송창식의 <선운사> 노래만 듣다 오곤 했는데….
‘고창(高敞)’을 거꾸로 부르면 ‘창고(倉庫)’라고 어느 향토사학자는 우스갯소리를 했다던가. 해서, 이번엔 서해안고속도로 고창나들목에서 좌회전하여 말로만 들었던 ‘고창읍성’으로 향한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으로도 불리는 조선시대 단종 원년(1453년)에 만들기 시작했다는 고창읍성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을민들의 지혜로 쌓아올린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된 자연석 성곽으로,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하여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극복을 위한 국방관련문화재(사적 제 145호)로 보존되고 있다. 고창읍성을 들어서자 소풍 나온 아이들의 노오란 옷차림들과 성곽 아래 활짝 피어난 진분홍 철쭉이 시야에 들어온다. 둘레가 1,684m인 성곽은 반등산(半登山)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 ·서 ·북의 3문과 치(雉) 6곳, 수구문(水口門) 2곳, 옹성(甕城) 등이 있으며, 관아를 비롯해 22개 건물이 있었으나 일부만 복원됐다 한다. 고창읍성을 제대로 보기 위해 성벽 위로 난 길을 주저 없이 오른다. 성곽 곳곳 어떤 사람들이 축조했는지 알려주는 비석이 보인다. 이곳엔 예로부터 풍속으로 전해오는 여인들의 답성(성밟기)놀이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고 한다.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로 해석되며, 유사시 왜침에 석전으로 대비한 유비무환의 예지로도 추측된다. 고창군에서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군민의 날로 정하고 ‘모양성제’와 함께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성벽 안의 건물들에 다가서면 자동으로 방송되는 안내를 들을 수 있는데 목소리 톤과 음성이 아주 편안하다. 눈꽃처럼 날리는 벚꽃잎에 감탄하는 사이 맹종죽의 숲이 펼쳐지는가 했더니, 반질한 이파리로 하늘 향해 팔 벌린 어린 이팝나무들이 뒤이어 눈에 들어온다. 그 가지들 사이로 한낮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한바탕씩 쏟아져 내린다. 모양성 안의 건물과 자연의 어우러짐을 감상하는 사이 주목할 만한 것이 나타난다. 바로 척화비다. 이 비는 조선 말기 대원군이 쇄국정책의 상징으로 병인년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운 것으로,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후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도화선이 된 바로 그 비문이다. 한 바퀴를 돌고 나오니, 돌을 이고 걷진 않았어도 왼쪽 무릎관절이 오늘 하루일정을 잘 버텨주려니 하는 마음이 내심 생긴다. 고창읍성을 나오자마자 왼편으로 아담한 고택이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판소리 대가인 동리(桐里) 신재효의 집이다. 1979년에 보수, 정화되었다는데, 원래는 마루 밑으로 물을 끌어들여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하니, 그의 예술적 감성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마음 같아선 고택 옆에 자리한 판소리 박물관에도 들러 판소리 체험시간도 가져보고 싶었으나, 슬슬 허기도 지고….? 다음 기회로 미룬다. 물어물어 찾아간 조양식당은 5, 60년대 영화 세트장을 재현해 놓은 듯한 고창읍성 천변에 있었다. 60년 된 마당의 등나무가 대변하는 식당 주인의 자존심처럼 각종 해산물로 푸짐한 귀한 상차림에 배고픈 나그네의 행복한 손놀림은 그저 부산하기만 하다.
내친김에 무장읍성도 가 보자며 다시 오른 길 얼마 안 가서였을 게다. 화려한 백색의 향연으로 경계가 무뎌진 지평선이 나타난 것은. 4년 전 서울에서 이주했다는 주인아저씨는 4,500평의 과수원에 배꽃이 필 때면 그 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을 이루지 못하신단다. 못내 아쉽게 발길을 돌려 15번 지방도를 좀 더 들어가니,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주민과 승려 등을 동원하여 축조했다는 무장현 관아와 읍성(茂長邑城, 사적 제 346호)이 나온다. 객사 앞의 500년도 더 된 듯한 팽나무의 자태에 감탄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서둘러 달려온다. 문인이며 무장읍성 유적해설사인 김승규 님이 아니었다면, <송사지관> 앞 계단의 ‘건곤감리’며, 음양오행에 따라 새겨 넣은 문양의 의미조차 미처 깨닫지 못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복원작업이 좀 더 이루어지면 또 오겠다는 다짐에 서둘러 복사한 자료들을 들려주며 배웅하시는 그 분의 삶이 고맙고 아름답기만 하다. 다시 15번 지방도를 달려 이번 여행의 백미인 학원농장의 청보리밭 입구에 당도한다.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아들 부부가 지난 92년 귀농해 터를 일군 이곳은 초봄부터 초여름까지 청보리의 초록빛과 수확기 황금빛이 17만 평에 물결 되어 일렁이고(주변까지 합하면 30만 평이나 된다), 가을에는 4만여 평 대지 위에 핀 하얀 메밀꽃을 감상할 수 있단다. 이제 무릎까지 키가 자란 보리가 점점이 박힌 유채, 냉이꽃과 함께 기가 막힌 장관을 연출해내고 있다. 아이처럼 축제기간에만 운행하는 마차에 폴~짝 올라탄다. 말발굽소리에 박자를 맞추던 바람이 언젠가처럼 귓바퀴 부근에서 빠르게 맴돌다 사라진다. 알 수 없는 뜨거운 어떤 것이 목울대에 치밀어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평온해진다. 푸른빛 바람에 몇 년 동안 먹먹하게 아리던 가슴이 유쾌하게 씻겨지는 것 같다. 보리밭 오솔길로 앞서 달려 나간 친구가 보릿대를 뽑아 물고 ‘삘릴리’ 근사한 피리 소리를 낸다. 아무리해도 힘들기만 한 나와 달리 친구의 보리피리는 신재효의 판소리 추임새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아들 부부가 지난 92년 귀농해 터를 일군 이곳은 초봄부터 초여름까지 청보리의 초록빛과 수확기 황금빛이 17만 평에 물결 되어 일렁이고(주변까지 합하면 30만 평이나 된다), 가을에는 4만여 평 대지 위에 핀 하얀 메밀꽃을 감상할 수 있단다. 이제 무릎까지 키가 자란 보리가 점점이 박힌 유채, 냉이꽃과 함께 기가 막힌 장관을 연출해내고 있다. 아이처럼 축제기간에만 운행하는 마차에 폴~짝 올라탄다. 말발굽소리에 박자를 맞추던 바람이 언젠가처럼 귓바퀴 부근에서 빠르게 맴돌다 사라진다. 알 수 없는 뜨거운 어떤 것이 목울대에 치밀어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평온해진다. 푸른빛 바람에 몇 년 동안 먹먹하게 아리던 가슴이 유쾌하게 씻겨지는 것 같다. 보리밭 오솔길로 앞서 달려 나간 친구가 보릿대를 뽑아 물고 ‘삘릴리’ 근사한 피리 소리를 낸다. 아무리해도 힘들기만 한 나와 달리 친구의 보리피리는 신재효의 판소리 추임새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봄, 상실감으로 그대 앓고 있다면, 그 비인 자리 푸른 존재감으로 채워가는 청보리밭에 한번쯤 와 보심이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