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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大王이 만난 붓다-서울書藝博物館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이 만난 붓다> 特別展을 전시실(3층)에서
전시하고 있다. (전시기간: 2017.06.29~09.30)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大王(출생: BC 356/在位: BC 336~BC 323)은 그리스∙페르시아∙印度에
이르는 大帝國을 건설하여 東方遠征을 하고, 그의 문화정책은 그리스 문화와 각 지역의 문화를
융합하여 ‘헬레니즘’문화를 이룩하여 東西文化의 교류와 융합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예술 양식의
‘간다라 美術’을 탄생시켰다
東∙西文化의 가장 성공적인 융합으로 평가 받는 간다라 미술은 神을 人間의 形象으로 표현한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으로 400년간 지속되어온 佛像이 없던 佛敎에 최초의 佛像을 출현시켰다.
우리는 <알렉산더 대왕이 만난 붓다>展에서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그 해답을 찾고,
다양한 思想과 宗敎, 民族, 文化, 慣習, 언어의 평화로운 共存의 증거로 간다라 미술은 西洋의
藝術樣式과 東洋思想이 만나 최초로 佛像의 출현을 이루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當代 역사의 배경과 흐름은 당시의 문화에 숨김없이 나타나는데,
간다라 유물의 최대 所藏處 페샤와르博物館 所藏 遺物들이 전시에서 공개된다.
현재 탈레반의 문화유산 파괴와 약탈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역이지만, 2000여 년 전 多文化,
多宗敎, 多人種의 共存으로 가장 번영하고 평화로운 시대를 누렸던 간다라 미술품들을 통해
現時代에 우리가 마주한 세계의 葛藤情勢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전시되는 작품은
(1) 理想: ‘나는 여러분의 집에 침입하지 않는다.’
(2) 共存: ‘알렉산더의 정신을 이어받은 카니시카(Kanishka)王은 다양한 민족들의 包容政策으로
문화예술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3)화합: ‘간다라 미술은 인류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인종, 문화, 종교 간의 화합의 하모니이며
영원한 생명의 울림이다.’
(4) 自我省察: ‘他者는 결코 우리 바깥이나 우리 너머에 있지 않다.’
*설명판의 說明文이 길고 佛敎用語는 漢字用語가 많은데 漢字는 거의 없고 한글로만 적어 놓아
설명문을 要約∙整理하고 漢字와 佛敎用語를 찾아 보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알렉산더 大王이 만난 붓다>사진을 2회로 나누어 올린다.
2017.08.17 孤 山 朴 春 慶
알렉산더 大王이 만난 붓다-서울書藝博物館 (2-1)
알렉산더 大王이 만난 붓다
(01)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서울 瑞草區 瑞草洞 牛眠山 북쪽자락에 1988년 1단계로 開館할 때 같이 문을 연
서울書藝博物館은 書藝作品 전용전시관이다.
(02) <알렉산더 대왕이 만난 붓다> 포스터
(03) 알렉산더 대왕이 만난 붓다, 왜 간다라인가?
간다라 美術은 東∙西洋 和合의 結晶體로 人類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人種∙文化∙宗敎間의
하모니이다.
神을 人間의 형상으로 표현한 그리스, 로마의 藝術技法이 동양의 佛敎와 만나 佛像을
탄생시키고, 이 영향은 불상의 입체적인 옷 주름, 손 모양, 물결무늬머리모양 등을 통해
잘 표현되어 나타난다.
=왼쪽 사진; 로마 소포클레스 立像 -BC 340년
=오른쪽 사진; 간다라 부처 立像 -AD 2~4세기
(04) 알렉산더 大王의 東方遠征과 韓國佛敎의 傳來
(05) 알렉산더 大王의 東方遠征과 韓國佛敎의 傳來
간다라의 高僧 마라난타는 백제 枕流王 元年(AD 384) 백제(현재 法聖浦)에 도착하여
불교를 처음으로 전파하였다.
*法聖浦
‘영광굴비’의 중심지인 전남 靈光郡 法聖面 해안에 있는 浦口 法聖浦는 東晋과 東支那海를
거쳐 高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한 데서’ 由來된 이름으로 부처님의
聖像, 佛法의 傳來地이다.
(06) 알렉산더 大王의 東方遠征, 東∙西文化의 새로운 세상을 열다.
(07) 알렉산더 大王[ALRXNDER THE GREAT]
*알렉산더 大王은 겨우 13년간 王位에 있다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夭折하였으나 영토확장은 물론 문화분야에도 엄청난 偉業을 달성했다.
(08) 고르디우스의 매듭-매듭을 풀 수 없다면? 단칼에 자르라!
(09) 간다라美術은 인류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인종, 문화, 종교 간의 和合이며, 영원한 생명의
울림이다.
(10) 부처의 一生 이야기
(11) 通度寺 靈山殿 八相圖 -보물 1041호(복제)-
通度寺 靈山殿 八相圖와 페르시아 浮彫를 비교해서 볼 수 있게 전시했다.
*通度寺 靈山殿 八相圖 -보물 1041호-
부처가 태어나 道를 닦고 涅槃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을 8부분으로 나누어 그린 八相圖로
가로 151㎝, 세로 233.5㎝의 비단에 채색하여 英祖 51년(1775) 抱冠 등 13명이 공동으로
그렸다.
釋迦의 일생을 ① 兜率來儀相, ② 毘籃降生相, ③ 四門遊觀相, ④ 踰城出家相,
⑤ 雪山修道相, ⑥ 樹下降魔相, ⑦ 鹿苑轉法相, ⑧ 雙林涅槃相의 8폭으로 나누어 圖說한
그림으로 각 화폭에 액자를 끼워 通度寺 靈山殿 壁面에 붙여놓았었으나 현재는
通度寺聖寶博物館에 소장∙관리하고 있다. (*籃: 대바구니 람 *踰: 넘을 유)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제작연대도 확실하여 조선시대 佛敎 繪畵硏究에 귀중한 자료이다.
(12) 마이트리칸야카 前生期 -AD 2~3세기 -片岩 -파키스탄 페사와르 박물관 소장
부처님 前生에 富豪船主 마이트리칸야카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를 殺害한 罰로 불타는
바퀴를 머리에 이고 있어야 하는 拷問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깨달아서 세상의 모든 罪人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고문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맨 왼쪽에 불타는 바위를 이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13)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 前生期 -AD 2~3세기 -片岩
*앞으로 -AD 2~3세기 -片岩 -파키스탄 페사와르 박물관 소장 유물은 제작시기와
材料, 소장처를 표시하지 않는다.
燃燈佛은 불교에서 過去佛로, 석가모니의 前生에 授記를 준 부처이다.
過去世에 儒童菩薩로서 菩薩戒를 닦고 있을 때 釋迦는 부처가 되겠다는 誓願을 세웠는데
燃燈佛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길가에서 기다리다 7송이의 연꽃을 부처에게 공양하였다.
연등불은 “너는 未來世에 釋迦牟尼佛이라는 부처가 될 것이다”라는 授記를 주셨는데 이를
燃燈佛授記라고 하며, 불교에서 菩薩의 개념이 생긴 연유이다.
(14) 마야부인[摩耶夫人]의 태몽[胎夢]을 해몽[解夢]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던 淨飯王과 摩耶王妃는 祈禱하며 잠이 들었는데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孕胎하였다.
王이 文師들에게 解夢을 부탁했으며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太子를 얻을
징조라고 해몽했다.
浮彫의 중앙에서 정반왕이 玉座에 앉아 解夢을 듣고 있으며, 오른쪽에 아시타 仙人이,
왼쪽에 젊은 브라만이 앉아 있다.
*정반왕(淨飯王): 釋迦의 부친이며 中部印度 가비라위國의 왕.
拘利城 善覺王의 딸 摩耶를 왕비로 맞았으며, 왕비가 싯다르타(釋迦)를 낳고 죽자,
그녀의 동생을 後繼王妃로 맞아들여 싯다르타를 기르게 하였으며, 그 후에 그녀에게서
난타(難陀)가 태어났다.
(15) 석가모니[釋迦牟尼]의 탄생
아기를 낳기 위해 親庭으로 가던 마야부인이 룸비니 동산에 이르러 無憂樹 나무에 손을 뻗자
오른쪽 옆구리를 뚫고 태어난 이는 바로 古代 印度 카필라國의 太子 釋迦牟尼이다.
浮彫에 王妃는 오른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있으며, 왕비의 동생이 왼쪽에 서서 어깨를 눌러
태자의 탄생을 도와주고 있다.
(16) 석가모니 탄생 직후 목욕
싯다르타 太子는 태어나자마자 홀로 일어나 東西南北을 향해 일곱 걸음을 걷는다.
그러자 天上에서 더운물과 찬물이 흘러내려와 태자의 머리를 적신다.
前面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여자는 태자를 목욕시키고 맨 오른쪽의 王子服裝을 갖춘 사람이
合掌하며 敬意를 표하고 있다.
(17) 갓 태어난 太子가 ‘天上天下 唯我獨尊’을 외치다.
갓 태어난 太子가 四方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한 손은 하늘, 한 손은 땅을 가리킨 채
‘天上天下 唯我獨尊’을 외치다.
*<傳燈錄>에는 "석가모니불이 태어나자마자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고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사방을 둘러보며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고 말하였다.(釋迦牟尼佛初生 一手指天 一手指地 周行七步 目顧四方曰
天上天下唯我獨尊)"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18) 데바닷타(Devadatta)가 보낸 술 취한 코끼리가 부처님께 조복[調伏]
부처님의 사촌동생 데바닷타는 총명하고 힘도 셌으나 世俗的인 욕심으로 出家한 후에도
부처님을 괴롭혔으며, 地位를 빼앗기 위해 살해하려는 試圖가 실패하였다.
이 浮彫는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여 길을 걷는 부처님을 밟아 죽이려 하였으나
코끼리가 부처님 앞에서 慈悲三昧에 압도되어 발에 묻은 먼지를 코로 불어내고 일어나며
調伏한 모습을 形象化하였다.
*調伏: 부처에게 祈禱하여 부처의 힘으로 원수나 악마를 굴복시킴.
(19) 釋迦牟尼와 야소다라 公主와의 결혼식
太子의 出家를 막으려고 부친 淨飯王은 16세 때 결혼시켰으며, 新婦가 된 公主는 ‘순결한
名聲을 지녔다’고 야소다라(Yasodhara)라고 부르게 되었다.
古代 印度 베다敎의 결혼식은 신랑이 신부의 손을 잡고 불의 祭壇 둘레를 7步씩 함께 걷는
儀式을 행하는데 이 부조에서도 신랑 신부 사이에 불 제단이 놓인 것을 볼 수 있다.
(20) 석가모니가 宮殿을 떠남
淨飯王은 아들을 世俗에 묶어두기 위하여 주변을 꾸며주었으나 釋迦牟尼는 四門出遊를
경험하고 煩惱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出家를 결심하였다.
*四門出遊(四門遊觀): 出家 전, 太子 때에 카필라城의 동∙남∙서∙북 四門 밖에 나가 인생의
四苦를 직접 보고 출가를 결심한 일.
(21) 석가모니의 大 出城
정반왕은 태자를 世俗에 묶어두고자 매일 밤 宴會를 베풀었으나 人生에 대한 煩惱를 느끼며
宮殿을 떠나기로 한다.
摩羅(힘이 센 사람)가 태자의 出城을 가로막고 있으나 執金剛菩薩(金剛手菩薩)이 金剛杵를
들고 호위하며 藥師瑠璃光如來들은 말발굽소리가 나지 않도록 愛馬 칸타카의 발을 떠받쳐
날아가듯 궁궐의 담장을 수월하게 넘었다.
왼편 끝에는 帝釋天과 梵天이 敬拜하고 있다.
(22) 出家 後 부브라만 修行者를 찾아감.
출가한 싯다르타 태자는 삶과 죽음에 대한 疑問을 해결하려고 스승을 찾아 간다.
첫 번째 스승에게서 苦行을 참는 修行의 가르침을, 두 번째 스승에게서 無念無想의 境地를,
세 번째 스승에게서 思惟를 초월하고 순수한 사상만 남는 非想非非想處의 경지를 배웠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깨우침을 터득하기 위하여 다시 떠난다.
이 부조는 첫 번째로 찾아간 婆羅門敎의 修行者 브라만을 찾아간 모습이다.
(23) 죽은 엄마의 무덤에서 나온 아이가 부처님께 歸依
王이 가장 총애하는 어린 王妃가 임신하자 첫째 왕비의 陰謀로 왕은 임신한 어린 왕비를
生埋葬하였으나 奇跡的으로 무덤에서 아이가 태어나 上半身이 살아있는 엄마의 젖을
먹으며 3년동안 살았으며, 무덤이 무너진 후 밖으로 나와 3년을 山 속에서 살았다.
어느 날 부처님이 그곳을 지날 때 그 아이를 만나 祇園精舍로 데려왔으며 부처님께 歸依하여
阿羅漢이 되었다.
浮彫 맨 아래쪽에 벽돌로 쌓은 둥근 무덤에 반쯤 죽은 女人이 누워있으며 젖가슴이 풍만하게
표현되어 아이가 젖을 먹고 살았다는 것을 暗示하고 있다.
(24)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행복과 이익을 행하라”
(25) 카니시카王 舍利函 -AD 2~3세기 -銅
(26) 카니시카王 舍利函
(27) 카니시카王 金貨
(28) 奇跡을 일으키는 부처[千佛畵 現象]
古代 印度의 코살라國의 首都 스라바스티에서 부처가 千名의 부처를 동시에 보여주었다고
하며, 1,000명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으로 宇宙空間에 時空間을 초월하여 계시는 부처를
뜻한다.
浮彫에 보이는 부처는 衆生을 향한 憐憫과 慈悲, 지혜로움을 표현한 것이다.
(29) 부처님께 흙을 보시(布施)하는 아이
부처님이 제자 阿難과 함께 托鉢하러 가던 중 두 아이가 흙을 가지고 장난하다가 한 아이가
흙 한 줌을 드리며 “이것은 보릿가루입니다”라고 하자 부처님은 기쁘게 받아 방바닥을
바르고 “이 功德으로 내가 涅槃 100년 후에 아소카王이 되어 나를 위해 8만 4천 塔을
세우리라”고 했다.
그 아이는 후에 인도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마우리아 王朝의 찬드라굽타의 아들인
轉輪聖王으로 칭송 받는 아소카王으로 還生하였다.
부조 오른쪽에 부처님께서 아이에게 닿게 몸을 숙여 鉢盂를 내밀고 아이는 발우에 흙을
布施하고 있다.
*轉輪聖王: 印度神話에서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일·지배하는 理想的인 帝王.
*아소카(Asoka)王: 인도 마우리아王朝의 제3대 왕.
그의 治世 중에는 불교를 비롯한 갠지스江 유역의 高度의 文化가 다른 지방에 급속히
퍼져 문화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30) 마라[Mara]의 誘惑[황마성도] *황마성도는 降魔成道의 誤記가 아닐까?
畢鉢羅樹(菩提樹) 아래 吉祥草 위에 앉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올라도 眞理를 깨닫지
못하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맹세한 太子는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法界定에 들어간다.
태자의 깨달음을 막으려는 魔羅(힘이 센 사람)가 온갖 짓으로 방해하였으나 태자가 손가락을
펴 땅을 가리키니 大地가 벌어지면서 이를 증명하는데 이 부조에서는 大地의 女神이 나와
증명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31) 우전왕(優塡王)이 부처님의 肖像을 만들어 부처님께 바침.
부처님이 母親을 뵈려고 兜率天에 올라가자 우전왕이 부처님을 그리워하다 병이 들어
신하들이 부처님의 形象을 만들어 왕을 달랬다.
이 佛像이 최초의 불상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唐나라 玄奘法師가 7세기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이 이 불상을 恭敬했다고 한다.
*우전왕[優塡王]
BC 6세기경 인도 반사국 왕으로 신앙심이 깊어 원시 佛敎聖殿을 비롯하여, 後代의 각종
經典에도 그의 전설이 전해지며 많은 인도문학작품 속 文藝說話의 중요한 소재가 된다.
(32) 어머니를 위해 兜率天에 올라가 說法하시고 地上에 내려오심.
부처님은 舍衛城에서 千佛化現의 기적을 일으키고, 모친 摩耶夫人과 天上의 神들을 위하여
兜率天에 올라가 3개월간 說法하다 사리붓다의 請으로 地上으로 내려 온다.
*兜率天: 불교에서 말하는 欲界 六天 중의 第四天. (*兜: 도솔천 도)
*舍衛城: 현재 네팔 남서쪽에 인접해 있던 코살라(kosala)國의 都邑地.
(33) 부처님께 鉢盂를 바치는 四天王[四天王 奉鉢圖]
*발우(鉢盂): 절에서 부처 또는 승려들이 소지하는 밥그릇.
(34) 쿠샨 王朝 時代의 貴族
(35) 용왕(龍王) 엘라파트라 부처님 방문
龍王 엘라파트라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카샤파 부처님이 계실 때 比丘로 석류나무
밑에서 살았는데 前生의 잘못으로 뱀으로 태어났다.
그는 前生의 잘못을 후회하며 부처님을 찾아가 敬拜하며 인간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祈願하였다.
이 부조에는 용왕 엘라파트라가 부처님의 說法을 듣고 있고 부처님 양 옆에는 比丘들이
설법을 듣고 있다.
(36) 부처의 대 열반[大 涅槃] (*涅: 개흙 열 *槃: 쟁반 반)
부처가 正覺을 이룬 후 45년동안 眞理의 法을 전하다가 80세에 涅槃하였다.
기원전 486년 2월 15일 滿月日에 쿠시나가라 근처 沙羅樹 나무 아래에 열반의 자리를 펴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누우셨다.
이 부조는 부처님이 寢床에 누워있고 발이 보이는데, 늦게 도착하여 부처님의 열반을 보지
못한 摩訶迦葉이 애석해 하며 슬피 울자 발을 내밀어 보였다.
침상 밑 왼쪽에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있는 十大弟子 중의 한 사람인 阿難陀이다.
*열반[涅槃]: 불교에서 修行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迷惑과 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解脫한 최고의 境地.
*沙羅樹: 쌍떡잎식물 二葉杮科의 常綠喬木으로 부처가 열반에 들 때 사방에 있었던 나무이다.
*마하가섭[(摩訶迦葉)/迦葉尊者]
부처님의 衣鉢을 받은 上首第子로 부처님이 入滅한 후, 5백 아라한을 데리고 第一結集을
하였다. 부처님 이후의 法統을 말할 때는 그가 初祖가 된다
(37) 사리 분배[舍利 分配]
부처가 涅槃 후 茶毘했는데 숯덩이가 남지 않고 이상한 光明을 비추는 精骨舍利가 나왔으며
이를 碎身舍利라고도 한다.
수없이 많이 쏟아진 쇄신사리를 각 王國의 대신들이 앞다투어 가져가려고 하자 ‘부처님은
慈悲와 平等, 忍辱으로 一切衆生을 濟度하였으니 사리를 분배하여 奉安하자”고 합의하여
8개 王國이 同等하게 舍利를 분배하였다.
(38)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의 터번 공경[恭敬]
부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涅槃 약 500년 後에
간다라와 미투라에서 만들었다.
그전에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佛塔, 傘蓋(햇빛을 가리는 양산), 三寶,
터번이나 진리의 수레바퀴, 발자국, 빈 玉座, 보리수, 鉢盂로 표현했으며
이 시대를 無佛像時代라고 한다.
이 조각에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옥좌, 산개, 터번을 함께 표현하였다.
(39) 삼보공경[三寶恭敬]
三寶는 佛敎徒의 세 가지 근본 歸依處가 되는 佛寶 ·法寶 ·僧寶이다.
이 조각의 三寶는 연꽃을 상징하는 원으로 맨 위에 진리의 바퀴 세 개를 묘사하였다.
연꽃은 過去∙現在∙未來의 부처님을 상징하기도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진리의
수레바퀴와 함께 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40) 불탑 경배[佛塔 敬拜]
불탑은 부처가 說한 法, 절대적 진리, 완전히 깨달은 者를 의미하므로 경배의 대상이며,
불교신앙의 핵심이 되었다.
이 부조의 塔 基壇 중앙에 계단이 있는데 간다라에 부처의 사리가 봉안된 다마라지카塔을
비롯한 중요한 탑에는 모두 동서남북 四方에 계단이 있다.
아래 왼쪽에 있는 사람은 불탑을 향하여 꽃을 뿌리고, 양 옆 아래 위 사람은 合掌하고 있다.
(41) 삼존불상[三尊佛像]
중앙에 부처님이 연꽃 臺座에 앉아 說法印을 하고 있으며,
좌우에 彌勒菩薩과 觀音菩薩이 있다.
初期의 梵天과 帝釋天이 있는 三尊像은 부처님이 選定印이나 說法印을 하고
있는데 彌勒菩薩과 觀音菩薩이 있는 삼존상은 說法印만 취하고 있다.
나중에 彌勒菩薩과 觀音菩薩이 夾侍菩薩로 중심이 될 때에는 부처님
바로 곁에 범천과 제석천을 조그맣게 표현하고 그 옆에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을 두었다.
*禪定印: 부처가 수행할 때 禪定에 들었음을 상징하는 手印.
*說法印: 부처가 최초로 설법할 때의 手印[손 모양].
(42) 하리티와 판치카
하리티는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食人種으로 鬼子母神이라고 부르며, 판치카는 그녀의
남편으로 野蠻族이 사는 마을의 酋長이다.
그 후 鬼子母 하리티는 깊이 뉘우치고 부처님께 歸依하여 産母들을 찾아가 보호하고
아기들을 받아 길렀으며, 하리티가 죽은 뒤에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이 그녀에게 빌면
아기를 점지해 주어 多産의 神으로 여겨 우리나라의 山神할머니처럼 되었다.
판치카는 사람들을 富者로 만들어주는 神으로 이들이 함께 있는 陶像은 豊饒와 多産의 像을
의미한다.
(43) 왜 똑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을까?
=왼쪽: 간다라지역의 부처 立像 -AD 2~4세기 -910 X 2380mm
=오른쪽: 로마시대 소포클레스 神像 -AD 1~2세기
‘超越的 存在’는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믿었던 東洋的 思想으로 부처의
涅槃 이후 약 500년동안 佛像이 없었다.
그러나 神을 人間의 형상으로 표현했던 그리스 神像文化의 영향으로 無佛像時代를 지나
손모양, 옷주름, 구불거리는 머리모양 등 많은 모양이 그리스 神像과 비슷한 佛像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간다라 美術의 시작이다.
- 알렉산더 大王이 만난 붓다-서울書藝博物館(2-2)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