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식 티비가 몰고 온 작은 체험기
조순희
올 초 내 거실에는 커다란 LCD TV가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최신형으로, 옛것이 점령하고 있는 나의 거실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다양한 기능에다 맑고 깨끗한 음질과 색상을 선사하여 구식인 내 정서에 새바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TV의 다양한 기능을 일일이 익히는 것이 번거로웠으나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나의 좋은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생각지 않은 선물이 들어와 내 생활에 변화를 주는 것을 보면 인생은 그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며 그 단면에 따라 삶에 여러 가지로 영향을 준다는 생각이 든다.
내 나이 칠십에 들어서기 직전인 지난해 12월 중순 어느 날 새벽이었다. 4시로 맞춰놓은 알람소리에 깨어 비몽사몽으로 화장실에 들러 나오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마른하늘에 날 벼락 맞는 듯 너무나 아찔한 순간이었다. 한쪽 발목이 골절되고 만 것이다. 비록 뼈가 골절되기는 했으나 더 큰 사고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살아오면서 어쩌다 실수로 넘어지기는 했어도 몸에 해를 입어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혼자 있다가 일어난 사고라 당혹스럽고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점점 밀려오는 아픔을 견딜 수 없었다. 이른 새벽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어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어린애처럼 기어 방으로 간신히 들어왔다. 시간이 갈수록 살을 도려내는 고통이 오고 다리가 퉁퉁 붓고 시꺼멓게 멍이 들었다. 어린 시절 응급처치를 떠올리며 옥도정기를 찾아 바르고는 날이 샐 때까지 기다렸다.
날이 밝자 근처에 사는 동생들의 도움으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약과 목발을 받아가지고 집에 오고 나서야 새벽녘의 일이 꿈처럼 다가왔다.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은 포기해야했다. 깁스를 한 발은 이미 활기차게 움직이던 나의 발이 아니었다. 연말이어서 할 일도 많고 치러야 할 행사도 나날이 잡혀있는데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책을 읽는 것이 유일한 일이고 낙으로 삼는데 은행에 근무하는 딸이 퇴근길에 들렀다. 아픈 엄마 보필하느라 음식을 사 나르는 고생을 하고 있던 터였다. 서울에 있는 딸에게는 며칠 올라가 애기를 봐주며 친정엄마 노릇 좀 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못하게 되었다. 딸 또한 갓난아기 때문에 아픈 엄마 간호하러 오지도 못한다며 마음 아파한다는 전갈이다. 나는 사골이라도 끓여 부쳐줘야겠다며 일요일에 차 좀 태워달라고 딸애한테 부탁했다.
딸은 운전대를, 나는 목발을 잡고 그래도 질이 좋은 고기라면 용암동 S물류센터라며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늘 가는 단골집이 있었지만 뜬금없이 그날은 그냥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도착하자마자 사골과 한우 세일이 막 끝난 참이었다. 몇 개가 남아있었지만 정상가로 판매 중이었다. 세일가격으로 달라고 우겨대니 내일 아침 9시 반부터 또 할 거라며 다시 오라고 했다. 한 번 더 가면 되는 것을 비싸게 구입하기가 싫었다.
월요일 아침에 용암동으로 출근하는 딸 차편으로 가서 기다렸다가 사골을 샀다. 마침 경품 행사기간이었던 터라 나도 접수 번호를 써서 경품 응모함에 넣었다. 목발에 짐까지 집에 어찌 가나 한걱정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물류센타에서 5만 원 이상 구매자에게는 집까지 실어다 준다는 것이었다. 편안하게 물류센터 콜벤을 타고 오면서 왠지 무언가를 덤으로 받은 듯해 기분이 좋았다.
어느 날 책을 읽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조순희 고객님이시죠?” “맞는데요.” “여기는 S물류센터입니다.”라며 경품에 1등으로 당첨되었으니 받아가라는 것이다. 42인치 TV란다.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1등으로 당첨 되었다고요? 그런데 궁둥이가 불쑥 튀어나온 구형 텔레비전은 싫어요.”했다. “요즘 나오는 최신식 텔레비전입니다. 시가로 백오십만 원 가는 제품이에요.” 수화기 너머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며칠 뒤 텔레비전이 도착했다. 검은 빛으로 세련된 디자인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니 마치 누군가 나의 칠십 생일에 맞춰 보내온 선물 같았다. 받는 기분도 좋았지만 우여곡절 많은 세월의 아픔을 딛고 고희가 되어 새롭게 출발하는 시점에 날아 온 행운 같아 흐뭇했다. 이참에 나는 카페 닉네임도 새롭게 바꾸었다. 아픔의 고통을 승화시키면 강건한 삶의 힘이 되듯이, 나는 다친 다리로 인해 의기소침해져 있던 내 늙고 구부러진 노년의 날갯죽지에 다시 희망이라는 싹을 틔워 올릴 참이다.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앞으로 좋은일만 가득하시길
건강하십시오.
어머! 선생님 너무 너무 축하 드립니다. 참 기쁘셨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선생님글 잘읽고 갑니다 행운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우와~! 당첨의 기쁨이 있었네요.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