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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심 덕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혔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잘 살고 못 되고 찰나의 것이니
흉흉한 암초는 가까워 오도다
이래도 일생 저래도 한 세상
돈도 명예도 내 님도 다 싫다
살수록 괴롭고 갈수록 험하니
한갓 바람은 평화의 죽음
내가 세상에 이 몸을 감출 때
괴로움도 쓰림도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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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에 떠도는 뼈저린 사랑/'사의 찬미'에 얽힌 사연
우리나라 가요사에 빼놓을 수 없는 크나큰 사건이 터져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자살사건이 있었다. 그것도 평민이 아니라 문화예술인라는 점에서 더욱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틀에 박힌 시대에 아니 양반과 상놈이라는 완고한 시대에 남녀 간에 깊은 사랑에 빠져 헤어나질 못하고 자살로서 아까운 젊음을 망망대해에 던져버린 윤심덕(尹心悳)의 비운(悲運)의 사랑을 소개하고자 생각하니 필자는 가슴이 저려옴을 느끼게 되며 이들의 사랑에 안타까운 마음이 글을 써는 이 가슴을 짓누르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게 한다.
이 사건은 1924년 8월 오후 11시 시모노세끼를 출발하여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 도꾸주마루(德壽丸) 항해를 하던 도중 새벽 4시경 양장을 한 여인과 중년 신사 두 사람이 서로 꼭껴안고 갑판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자살을 한 것이다.
이들 두 남녀는 이루지 못할 모진 사랑병에 걸려서 신음하다가 끝내는 이룰 수 없음을 원망하며 망망대해에 젊음과 사랑을 송두리째 던져버렸다.
이 세상에서 못 이룬 사랑, 저세상에서라도 못다한 사랑 꽃피우고자 이들은 자살을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낳게 한다. 어찌보면 이들의 사랑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랑이 아닌지, 이들의 사랑은 죽음으로써 아름다운 사랑의 꽃은 피었지만 그외 이들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그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다시 말한다면 죽은 사람은 죽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들로 하여금 그 얼마나 가슴이 아프며 이들을 얼마나 원망하며 또 원망할 것인가.
'사의 찬미(死의讚美)'는 윤심덕이 작사를 하고 노래도 직접 불렀다. 이 노래가 윤심덕이 자살한 후에 신문이나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자 그녀의 애절한 사랑에 동경심을 갖고 그녀가 살아생전에 불렀던 목소리를 듣고자 악기점에는 연일 그녀의 목소리가 담긴 레코드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대만원을 이뤘다.
그녀가 부른 노래제목은 그녀가 직접 겪고 있는 가슴에 담긴 그녀의 한의 소리다. 노래제목은 '사의 찬미'이며, 가사는 다음과 같다.
'광막(曠寞)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人生)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험악한 고해(苦海)를 너는 무엇을 찾으려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世上)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幸福)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서름'
이렇게 윤심덕은 자기의 답답한 심정을 노래가사로 지었으며 또한 그녀가 직접 이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자살을 할 결심을 하고서 이 노래를 만들었으며 또한 노래를 그녀 자신이 직접 부르게 되였다.
노래 곡조는 일본 사람이 지어놓은 곡조에다 가사를 붙힌 곡조의 노래다. 다시 자세히 밝힌다면 '사의 찬미'는 일본(日本)인 이바노비치가 작곡을 해놓은 '도나우강의 잔물결' 이라는 노래 곡조에다 윤심덕은 '사의 찬미'라는 자기가 지은 가사를 붙여서 자기 자신이 이 노래를 직접 부른 것이다.
이 노래는 평소에 계획도 없던 노래였다. 당시에 이 노래가 출반될 때는 아무도 이 노래 '사의 찬미'라는 노래가 취입이 될 줄은 작곡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녹음하는 날 여러개의 노래를 녹음하는 도중에 작곡가 이바노비치에게 윤심덕은 '사의 찬미'의 노래가사를 보이면서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이 가사를 붙여서 노래를 부를 것을 제의를 했다.
작곡가 이바노비치는 윤심덕의 당당한 태도에 황당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미 세상에 알려진 노래곡조에다 자기가 지은 가사를 붙여서 다시 부른다고 하니 작곡자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가. 다시 말한다면 곡조는 하나인데 노래제목은 두 개가 되니 말이다. 그러나 윤심덕은 비장한 마음으로 작곡가 이바노비치를 쳐다보며 승락을 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며 즉시 피아노 곡조로 연주하여 부르겠다고 당당한 자세로 요청을 하며 즉시 녹음할 것을 제의하여 윤심덕은 여동생인 피아노 연주자 윤성덕에게 피아노연주를 해줄 것을 부탁하고 즉석에서 '사의 찬미'라는 노래를 연습도 없이 막바로 녹음에 들어갔다.
물론 윤심덕은 그 전에 '도나우강의 잔물결'을 불러서 연습은 했던 걸로 생각된다. 이렇게 하여 '사의 찬미'라는 노래가 녹음됐다. 그리고 윤심덕은 이 노래를 부르고 귀국길에 오르게 됐으며 귀국길에 현해탄에서 자살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녀가 자살을 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자. 그녀는 원래 성악가였다. 그리고 일본(日本)에서도 명성을 떨친 장래가 유망한 음악가였다. 그런 그녀가 자살하게 된 동기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고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이다.
윤심덕의 자살사건에 대해 당시 신문들은 저마다 특색있게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윤심덕은 일본에서도 화려한 무대를 누비고 있는 성악가이면서 대중가요의 가수이기도 한 그녀였기에 각 신문 방송에서는 그녀의 죽음에 대하여 연일기사를 쏟아냈다.
여기서 당시 동아일보의 기사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반생을 찬미하는 윤양의 축음가(蓄音歌)는 어디로 외로운 청가묘곡(淸歌妙曲)'이라는 기사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성악가로서 유명했던 윤심덕이 저승길을 떠났기 때문에 다시는 무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청중을 매료했던 그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게 되었으나 그녀가 일찍부터 닛뽄 축음기회사로부터 초청을 받아 '메기의 추억' '아-그것이 사랑인가' '망향가' 등 많은 노래를 레코드에 취입했으며 이번에 저승으로 떠나기 전 일본으로 갔을 때도 십수 곡의 노래를 취입했다고 한다. 과연 어떤 유서가 나타날까 윤심덕은 다시 볼 수 없지만 그녀가 남긴 목소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 살아 있을 것이다.
이상이 당시의 동아일보 신문기사다. 노래의 여왕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윤심덕의 정사 사건은 과연 장안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그녀의 유서 '사의 찬미'는 세상에 나오기가 바쁘게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소개를 하자면 '사의 찬미(死의 讚美)'의 레코드 뒷면에 들어있는 노래는 그녀의 심정을 더욱 대변하고 있다.
윤심덕(尹心悳)은 마이크 앞에서 자기 여동생인 윤성덕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어느새 소리없는 눈물이 주루룩 주루룩 뺨 위에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면서 저마다 따라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녀의 목매인 노래소리는 듣는 사람들에게 애간장을 녹이는 비통의 소리였다. 이 노래는 템포가 느린 곡이다. 거기에다 가수가 감정을 넣고 차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이 노래에 취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우리가곡 '봉선화'라는 노래와 같이 생각하면서 들으면 영락없이 봉선화 노래곡조의 흐름과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이 노래를 느리게 부르면서 윤심덕은 자살할 것을 생각한 탓인지 마이크 앞에서 하염없이 우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케 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녀는 이미 자살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하염없이 소리없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우는 심정을 아니 그러한 마음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그녀의 혼자만의 답답하고 괴로웠던 그 심정을 우리는 뒤늦게나마 알 것 같다. 아니 알게 됐던 것이다.
그러니 윤심덕은 그당시 그녀 자신만이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다가 끝내는 자기의 유서와 같은 노래가사를 작사하여 세상에 내놓으려 얼마나 고심을 했으며 또 얼마나 괴로웠을까.
자기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랑의 아픔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남기고자 한 그녀의 심정을 뒤늦게나마 우리는 알게 됐으니 그녀의 괴롭고 안타까웠던 심정은 어떻게 다 표현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튼 그녀의 사랑은 보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만은 누구나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당시의 윤심덕의 심정을 생각해 본다.
왠지 가슴이 답답하니 터질 것만 같은 아픔을 느낀다. 사랑이 무엇이길래 이처럼 하나밖에 없는 고귀한 생명까지도 버려야 하는 것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사랑이 야속하고 밉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미워할 수 있는 것도 못 된다. 그래서인지 사랑은 어찌보면 목숨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랑 때문에 고민하다가 끝내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게 사랑을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친다고 했던가.
그리고 사랑은 국경도 없고 사랑을 위해선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린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병치고 아주 고약한 병이 사랑병이라고 했던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병이 사랑병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면 처음부터 예방에 신경을 써야 될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사랑병에 걸리지 않게 철저한 예방이 중요함을 깨닫고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윤심덕과 같은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윤심덕의 사랑병은 치료도 못 하고 그만 중병에 빠져 끝내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러면 윤심덕은 어떠한 여자였나. 그녀의 지난날을 살펴보기로 하자. 윤심덕은 지금의 서울시 서대문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일본 순사 지금의 경찰조서에 의하면 서대문정2정목 173번지 윤수선 30세로 돼 있으나 그것은 예명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된다.
그리고 윤심덕이 사랑했던 사람은 전남 목포부 지금의 목포시 수교(水橋) 김수선 30세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명이고 본명은 김우진(金祐鎭)이며 1897년 목포(木浦)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에서 대농의 지주(地主)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의 구마모토현립 농업학교(顯立農業學校)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고 김우진은 같은 전라도 출신인 채동선과 가까운 친구였으며 조명희, 홍해성 등과 연극예술극협회를 창립하고 서구의 극작품을 번역하여 연출을 담당하고 김수산이라는 필명으로 몇 편의 작품도 발표한 장래가 아주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그러던 그가 연극활동을 하면서 윤심덕과 알게 됐으며 연극활동을 하면서 연애로 이어져 사랑으로 빠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우리 도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특히 유부남은 더더욱 연애를 해서는 안 된다는 관습률이었다. 그러니까 관습법이라는 당시 도덕에서이다. 그 당시 김우진(金祐鎭)은 자식까지 있는 유부남이었기에 더욱 이들의 사랑은 맺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미 넘지 못할 선까지 넘다 보니 이들의 사랑은 더욱 깊은 정에 점점 깊히 빠져 들어가게 됐으니 아니 그러다 보니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더욱 깊은 생각을 하게 됨은 당연한 일이 아닐지.
이렇게 윤심덕과 김우진은 사랑해선 안 될 사랑을 하게 됐으며 사랑으로 인하여 이들은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되어 또한 동반자살에까지 이르게 됐다.
이들 두 남녀는 일본에서도 연예활동에 인기가 좋은 예술인들이었다. 그러기에 일본을 비롯하여 우리 조선에까지도 이들의 죽음에 대하여 애석하게 느끼게 되었다. 특히 우리보다 예술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윤심덕의 죽음에 대하여 자기들의 일인양 윤심덕을 무척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노래를 틀어놓고 윤심덕이 평상시에 무대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우는 여성들도 많았다는 당시의 신문보도도 있었다.
그만치 윤심덕은 일본여성들로부터 그녀의 노래연기를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와 반대로 윤심덕이 사랑했던 김우진은 유부남이라는 점에서 윤심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라는 치명적인 낙인이 찍힌 사람으로 지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론자들도 많았다. 그것은 윤심덕(尹心悳)과 같이 자살했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처음부터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을 했던 것이기에 지금에 와서 이러쿵 저러쿵 함은 올바르지 못한 일이지만 그러나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기에 한 번 더 부딪쳐 보는 것이다.
아무튼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것이다. 앞에서 밝힌 사랑의 사건은 빼놓고 말이다. 다시 말한다면 진정한 사랑의 자격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한해서이다.
난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용감한 사랑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잘못된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이들 두 사람의 사랑과 용기 있는 자살에 대해서는 참으로 대단함과 무한한 사랑의 힘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말한다면 나를 욕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해서는 안 될 사랑인 줄을 잘 알면서도 과감하게 사랑한 이들의 두둑한 배짱과 버려서는 안되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까지도 사랑을 위하여 버릴 수밖에 없는 진한 사랑이 더욱 고개를 숙이게 한다.
윤심덕이 자살한 사건으로 일본은 전 국민들이 윤심덕의 자살 배경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들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다. 한편에서는 그녀의 자살에 대하여 아름답다 할 만큼 사랑을 위하여 진정함을 보였다는 여론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그녀에게 욕설과 비난이 많았다.
그것은 김우진이 아내와 자식이 있는 유부남(有婦男)이라는 점에서다. 그래서 윤심덕은 사랑과 미움을 팬들로 하여금 동시에 받게 되는 돌이킬 수 없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세상을 떠났어도 그녀에 대한 여론이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끊이질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김우진과 윤심덕은 일본에서 예술가로서 일본사람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는 예술인이였기에 더욱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들의 자살은 일본만의 일은 아니었다. 우리 조선에까지 이들의 자살사건이 신문상으로 보도되면서 조선사람들도 일본사람 못지 않게 이들을 비난하며 또 비난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유교사상이 뚜렷한 민족인지라 이들의 죽음에 대하여 좋은 시선으로 곱게 접하지 않았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이들 두 사람의 자살에 대하여 조선(朝鮮)과 일본(日本) 양국 간에 국민들은 따가운 비판의 시선과 뜨거운 동정론에 희비가 엇갈리는 여론들로 들끓었다.
이들의 자살사건으로 이렇게 한동안 여론이 끊이질 않았다. 물론 여론의 핵심은 이들의 행위 즉 유부남과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가 사랑했다는 점과 자살한 데 대한 곱지 않은 비판들이다.
특히 유교정신이 강한 조선에서는 더욱 이들의 자살에 대하여 좋은 여론이 있을 리가 있으랴. 윤심덕이 자살한 사건은 우리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것도 처자식이 살아있는 유부남과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와 뜨겁게 사랑을 하다가 두 남녀가 현해탄에서 포옹을 한 채 동반자살한 사건은 조선에서는 최초로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기에 각 언론에서도 대서특필로 이 사건을 다루게 되여 더욱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이들의 자살사건은 아니 연애사건은 우리 가요사(歌謠史)는 물론이요 역사적으로도 기록이 되는 사건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불륜이 사상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가요계에서는 이들의 죽음에 대하여 지금도 애석하게 생각하며 간혹 각 언론사에서도 이들의 사랑과 자살사건을 보도하는 예도 있다.
그렇게 윤심덕은 이 세상을 떠났어도 그녀의 화려했던 옛날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현재 우리가요계다. 그녀가 살아 생전에 마지막으로 작사한 작품에서 밝혔듯이 그녀는 살아 생전사랑으로 병든 한을 그녀의 마지막 유서이자 노래가사인 '사의 찬미(死의 讚美)'다. 그리고 윤심덕이 노래를 발표하여 유서 아닌 유서로서 노래가 될 줄이야. 지금에 와서 깊이 생각해보니 '사의 찬미'는 그녀가 시낭송으로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노래 3절을 살펴보자. '허영(虛榮)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속헛슴을 네가 아느냐 세상(世上)의 것은 너에게 허무(虛無)니 너 죽은 후에 모두다 없도다' 이 가사를 봐서도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고 또 남을 것 같다. 그리고 윤심덕과 김우진은 똑같은 일본에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었다.
윤심덕은 성악을 공부하며 대중가요도 부르는 가수였다. 그리고 김우진은 농업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연극계에 입문하여 다시 공부를 하고 극본과 연출을 하는 다재다능한 청년이였다. 이들이 만나게 된 것은 바로 연극회에서이다. 이곳에서 이들은 윤심덕을 배우로서 같이 일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김우진의 요청에 따라 연극배우로 활동할 것을 쾌히 승낙을 하고 연극에 몰두하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들 두 남녀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살다 보니 여러가지로 고생도 많았다. 그리고 고향생각에 외로움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똑같은 조선사람이요 또 똑같은 유학생이다 보니 서로가 이국땅에서 겪는 외로움이나 고향생각 하는 마음이 하나가 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더욱 가까워짐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남녀 간에 이성의 정은 날이 가면 갈수록 깊어만 갔고, 끝내는 이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이란 덫에 걸려 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랑의 덫에 걸린 두 남녀는 한시라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들은 하루만 안봐도 견딜 수가 없는 아주 고약한 사랑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들 두 사람은 행복에 빠져 즐거운 삶을 사는 부부가 아닌 부부로 동거생활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두 사람은 일본에서도 예술활동에 일본사람들로부터 인기스타로서 명성을 떨치게 됐다.
특히 윤심덕은 성악도 잘 했지만 대중가요도 잘 소화를 하여 일본에서도 인기가 대단한 가수였다. 그러기에 그녀가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일본 여성들은 그녀의 자살에큰 조의를 표하며 그녀의 죽음에 대하여 깊은 애도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