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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모 리
장수할 권리, 권리란 좋은 것이다. 어느 누가 그걸 깔고 자빠져 낮잠이나 잔단 말인가? 하지만 어느 점쟁이의 일흔 아홉 고개를 넘기기가 힘들겠다던 점괘대로, 병세는 급속한 하강곡선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의 장수할 권리는 이미 박탈당했던 건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몸에 기생한 암세포는, 텅 빈 달팽이 껍데기 같은 육체 속에서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어머니는 거의 아무것도 먹질 못했고 체중은 30kg밑으로까지 떨어졌다. 뼈대에 살가죽만 씌워 놓은 것 같은 어머니의 몸은 차마 인간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보존이 잘 된 미이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삭정이처럼 드러난 뼈대로 마지막 남은 날들을 숨 쉬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만 어머니가 죽기를 바랬다. 그것이 어머니에 대한 나의 마지막 효도일 것이다.
목욕시켜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아 침대에 누이자 자꾸만 울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무엇이 그렇게도 미안하다는 것인지, 마치 미안해야할 의무라도 주어진 것처럼 또 중얼 거렸다.
어머니는 기력 없는 음성으로 자꾸 뚝뚝, 얼음에 금가는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저승으로 열린 귀는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죽음의 소리라는 것을 몰랐다. 우리는 죽음을 알아보기에는 아직은 젊었던 것이다.
병실 텔레비전에서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곤충학자는 다양한 제스춰 까지 써가며 설명하고 있었다.
“나비는 삼천만 년 전에 나방에서 나비로 진화했어요. 나비는 알에서 육일 만에 나오는데 이들은 네 번의 허물을 벗는 동안 엄청난 양의 잎사귀들을 먹죠. 징그러운 애벌레로부터 눈부신 나비로 거듭나기 위한 숭고하고 끔찍한 노역입니다. 그 풀은 비단 실이 되어 몸에서 풀려나오는데 그 길이가 사십 킬로미터나 됩니다. 그리고 나비들은 굉장히 힘이 세죠. 모나코 나비는 지구를 반 바퀴나 도니까요. 멕시코 계곡에서 겨울을 난 뒤에 유럽까지 날아가요. 그러니까 삼천이백 킬로미터를 나는 거죠. 나비가 비상하는 것도 신기해요. 날개가 있다고 해서 언제 어느 때나 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우선 나비가 날기 위해서는 삼십 도 이상의 체온을 유지해야 하죠. 배 쪽에 비늘가루가 변한 털이 빼곡히 덮여 있는데 그곳에 최대한 햇빛을 쪼여 그 복사열로 체온을 올린답니다. 그래서 날씨가 맑은 날만 날고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은 비상하지 않지요. 체온을 높일 수가 없으니까요.”
나는 몹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 나비가 불 속으로 날아드는 것도 생에 대한 욕망, 결국은 비상에 대한 욕망 때문일까.
어머니의 웅크린 몸피에 갑자기 나비 고치의 영상이 겹쳐졌다.
가랑비가 소리 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도시는 밤의 차디찬 우수를 담고 덜 마른 수채화처럼 번지고 있었다. 창 밖에 불빛이 점점이 번져나가고 전철역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아파트 단지 쪽으로 몰려가고 있을 때, 어머니는 응급실에서 운명하셨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나는 잘못 배달된 짐짝처럼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기만 했다.
영안실은 5호실이었다. 어머니의 시신은 냉동실로 들어갔고 빈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꼭 어릴 적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 같았다. 술래가 안 볼 때는 얼마든지 움직이다가, 술래가 보면 시치미를 떼며 움직임을 멈추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언제 발버둥을 쳤느냐는 듯, 어머니는 그렇게 삶에게 시치미를 떼어버린 것이었다.
어머니의 영정 앞에 동생이 엎드려 울었다. 외삼촌이 우는 동생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어떤 애절함도 남아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단지 가슴 한 귀퉁이를 후비고 지나는 아픔, 밑이 빠지는 듯한 공허 따위가 드문드문 떠있는 섬처럼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동생은 어머니의 얼굴을 빼다 박은 듯 닮아 있었다. 동그란 눈이며 오똑한 코, 어깨의 둥근 곡선이나 잔등까지도 어머니를 닮았다. 나는 영정 속의 얼굴과 쓰러져 우는 동생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동생의 얼굴에서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표정이 내게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오랜 투병생활에 비하면 장례식 준비는 너무나 간단했다. 장례용품과 상복, 육계장을 국물로 주는 접대용 식사와 음료수까지 모두 준비되어 있었고, 영안실 직원은 진단서를 첨부해서 사망 신고를 제출하는 일과, 시립 화장장에 연락해서 화장 순번을 받아내는 일을 도맡아 주었다. 운구용 버스를 예약하고, 제물을 준비하는 일까지도 영안실 직원은 전화 몇 번으로 끝냈다.
문상객들은 저녁이나 돼야 한 둘씩 나타날 것이고 안성에 사는 친척들은 내일에나 도착할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몸으로 감당해야할 사람은 나였지만, 어머니의 장례 일정 속에서 나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빈소에 설치된 전화기가 울렸다. 병원 경리 직원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하자마자 남은 치료비와 병실료를 납부해 달라고 요구했다. 조금도 겸연쩍어 하거나 미안하다는 기색 없이, 주민등록 번호나 학번을 묻듯이 사무적인 어조였다. 그들은 죽음에 위엄을 부여할 줄 몰랐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정밀검사와 고액치료가 많아 동생이 병수발 하느라 쓴 돈은 꽤나 많았고, 그 때마다 난 어정쩡하게 뒤통수를 긁적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환자가 이미 죽었는데, 치료비를 내놓으라는 요구는 어쩐지 공정한 거래가 아닌 것 같았지만, 하는 수 없이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동생에게 주고 경리 창구에 가서 계산을 하도록 했다.
“형은 좀 쉬지…….”
문상객도 없는 빈소를 지켜야 하는 일은 힘들었고 자꾸만 어머니의 영정에 겹쳐지는 동생의 얼굴도 사실 견디기 힘들었다.
동창회나 향우회에 연락은 동생이 알아서 했고 난 친구들과 모임에 전화를 했다. 아직은 문상객이 없다고 말했을 때 휴대폰 배터리가 끊어졌다. 휴대폰이 죽는 소리는 사소했다. 휴대폰은 마치 기력을 다한 어머니의 숨처럼 꼬르륵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죽었다. 휴대폰이 끊어지자 나는 어머니의 죽음이나 오늘부터 치러야 할 장례절차와도 단절되는 것 같았다.
맥박이 영으로 떨어지면서 어머니가 숨을 거둘 때도, 심전도 계기판에서 이런 하찮은 소리가 났을까.
빈소의 한 구석에는 작은 부속실이 딸려 있었다. 문상객이 없는 시간에 상주들이 틈틈이 눈을 붙일 수 있게 만든 방이었다. 전기 온돌방이었고 창문이 없어서 출입문을 닫자 방안은 캄캄했다.
몸 안에 잠복해 있던 피로는 어둠속 긴장이 늦춰진 순간에 급습해서 나를 혼절 같은 잠 속으로 밀어뜨렸다.
*
내가 여덟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삶이 극적이면 유언도 그렇겠지. 자신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던 저 광화문의 장군처럼.
그러나 내 아버지는 퍽 시시한 삶을 살았다.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하고 졸업 사진이나 약혼사진을 찍었다. 바늘처럼 가늘고 긴 연필로 필름에 수정을 했고 졸업식장을 찾아다니거나 예식장에 불려 다니는 사진사였다.
아버지는 싫은 소리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유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가족에게는 물론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놀림감이 되는 걸 본적도 있었다. 항변은커녕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비굴한 아버지를 보며, 왜 수모를 받으면서도 참기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외가에서 결사반대하던 결혼을 한 것이 처가 식구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조건이란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우리 집 생활비의 대부분은 어머니로부터 나왔고 어머니는 부자였다. 어머니의 아버지가 부자였으므로 어머니는 따라서 부자였다.
외할아버지는 자식들 중에 어머니를 가장 사랑했고, 그런 딸이 아무런 능력 없는 사진장이와 결혼해 고생하는 걸 마음 아파해서 자주 돈을 보냈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양장점을 냈고, 우리들이 먹고 쓰는 돈은 거기에서 나왔다. 그래서 그랬을까,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 늘상 온순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가 뚜렷하게 자기식의 주장을 하거나 고집을 피우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양장점의 재봉사나 모든 여자들에게도 아버지는 항상 그랬다.
주변머리 없는 인물로 유언 한 장 없이 떠나 손수 찍은 사진을 영정으로 쓴 아버지.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는 쑥덕거림도 못 들은 체, 그 해가 가기도 전에 어머니는 양장점을 판 후 요리 집을 내었었다. 요리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엄명을 무시하고, 난 슬금슬금 드나들며 아이스케키나 엿을 바꿔 먹기 위해 빈 병이나 미제 캔 맥주 깡통을 주워 날랐다. 그 때마다 빨랫줄에 널려있던 화사한 색상의 여자 속옷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곳에서 자주 눈이 마주치던 한 남자는 유난히 나에게 친절했다. 그 친절 뒤에 무엇이 도사린 줄 어린 나이지만 난 대충 짐작 할 수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용돈을 쥐어 주곤 했지만 그 웃음 띤 얼굴을 돌아서며 침을 뱉곤 했다. 그런 날은 늦도록 어머니를 기다려야했지만 대체로 그런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문대로 어머니는 얼마 후 그 남자를 내게 인사 시켰다. 새 아버지. 그것이 멀리멀리 돌아서 번역되어온 그 남자의 새로운 호칭이었다. 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저수지 길을 달리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저수지 둑 위에는 달맞이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어서 달이 없는 밤인데도 희뿌옇게 저수지물이 드러나 보였다. 이제 초저녁인데도 벌써 밤이슬이 내려 달맞이 꽃 대궁에 종아리가 부딪힐 때마다 하얀 달맞이꽃에서 이슬이 흩어져 내렸다.
소리 내어 울었지만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고, 언덕 아래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잦아들면서 정적을 이따금 흔들어 주는 것은 교회의 종소리뿐이었다. 낡은 테이프로 음악을 흉내 내면서 울려오는 종소리는, 조금도 성스럽지 않고 단지 집회를 유도하는 호객 소리처럼 음험할 뿐이었다.
죽은 아버지를 떠 올렸다. 그의 혈육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싫어하는 거라고 짐작했다. 옷이고 신발이고 항상 좋은 것은 새로 태어난 동생 몫이었다. 친척도 이웃도 모두가 동생 편이었다. 능력 없던 아버지의 죄를 왜 내가 대속해야 하는지 몰랐다.
성이 다른 동생을 위해 형의 모든 권한을 포기해야 하는 날부터 나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기 시작했다. 가출을 하고 정학을 맞고 패싸움을 벌여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종종 지기도 했다. 이미 나에겐 혈연에 대한 아무런 소속감도 남아있질 않았다. 어쩌다 오갈 데가 없어져 며칠씩 집으로 돌아가 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확인 했었던 건 싸늘한 타인의 세계일뿐이었다.
동생은 날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나보단 분명 모범생이고 인정받는 처지였지만 사소한일까지 나에게 물어왔다. 동생의 십팔 번지는 ‘형 어떻게 생각해’였다. 친일파에 대해서 형 어떻게 생각해? 학생회장 선거에 대해서 형 어떻게 생각해? 심지어 조용필에 대해서 형 어떻게 생각해? 였다. 내가 만물박사라도 되는 것처럼 별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내게 물어왔다. 어머니에게는 의젓한 아들이 나만 만나면 갑자기 철부지가 되어 버리곤 했다.
내가 카메라를 망가뜨렸을 때도, 장롱속의 돈을 빼 냈던 게 들통 났을 때도 어머니는 대뜸 나를 지목했다. 딱 잡아떼는 나를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 쓴 건 뜻밖에도 동생이었다. 의아해하는 어머니에게 조목조목 알리바이와 사용처를 허위 자백하는 동생의 눈엔 눈물이 그렁거렸다. 회초리가 부러져야 끝나는 매질과 울음소리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동생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생의 눈빛을 보면서 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생을 향한 어떤 진실이 내 마음속에서 움트고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헛간에 처박아 둬서 먼지가 쌓이고 녹슬어 있던 감정이 그렇듯 우연찮은 순간에 조용히 나를 흔들며 지나갔던 것이다.
흥! 사법고시? 놀고 자빠졌네!
세상을 떠도는 동안 어머니와 동생의 꿈을 가소롭고, 가증스럽고, 황당무계한 것이라고 비웃으며 살았다. 어쩌면 그런 저주를 지탱삼아 사막처럼 거친 세상을 하루하루 견뎌낸 것인지도 모른다.
동생이 일류대 법과에 합격하고 판검사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키우기 시작한 직후부터 나는 한번 노골적으로 동생을 비웃을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오면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너 같은 돌대가리가 판사가 된다면 나는 대통령이 되겠다. 어머니가 편애한 것 말고 네가 나보다 나은 게 뭐지? 노력을 통해 모든 걸 다 성취할 수 있다고 해도 어린 시절부터 동생이 나에게 느껴온 열등감은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거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 한 번씩 마주칠 때마다, 동생이 보이는 어정쩡한 태도를 통해 나는 변함없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열의 척도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동생은 어머니를 무조건 따랐고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무한정 성실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동생의 소심한 성격은 어머니로부터 유전된 차분한 성품으로 미화되고, 나의 성격은 아버지를 닮아 싹수가 없어 보이는 성품으로 폄하되곤 했다. 어머니가 늘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동생은 그와 나 사이에 운명처럼 주어진 우열의 진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어머니만큼 노골적으로 왜곡하고 은폐하지 못해 괴로워했으리라. 그가 판검사가 되고 내가 대통령이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진 않겠지만, 동생과 나 사이의 우열관계에 대해서는 평생 역전극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얼마나 통쾌한가.
한 번, 두 번, 사법고시 낙방소식을 접할 때마다 쌓여가는 통장 잔고를 확인해보는 것처럼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위로 한답시고 신림동 고시촌을 찾아가 진탕 고기와 술을 퍼 먹이면서 되지도 않는 얘기들을 지껄여 댔다.
인생을 사랑하는 자에겐 이 모든 상처들이 심오한 행복이 되어 빛날 것이다. 그 빛은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 속에서 너의 등을 떠밀며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너는 단지 그 과정 안에 있을 뿐이다.
희미한 가로등불 아래서 토악질하는 등을 토닥일 때, 싸구려 술집과 당구장이 늘어서 있는 길가에는 누군가 방뇨한 오물과 담배꽁초, 비닐봉지 나부랭이가 흩어져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진작 때려치우고 말단 공무원 시험이라도 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에선 넌 우리 집안의 기둥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뱉고 있었다.
나는 나의 야비함을, 추억을 하나의 감정적 자산으로 등기해 놓고 그 자산의 가치를 은밀히 계산 했으며, 이렇게 알량한 비열함으로 팔아먹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런 돌대가리가 덜컥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고 말았다. 이런 세상에! 이건 분명히 채점이 잘못돼도 뭔가 한참 잘못된 것이다. 온 동네 사람이 부러워하며 잔치가 벌어졌을 때 난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왁자지껄한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내가 어디에 누워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빈소에 딸린 부속실이라는 걸 기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눈을 찡그리며 형광불빛으로 나오자 거긴 바로 빛의 세계, 아니 죽음의 의식이 있었다. 저 캄캄한 부속실이 삶의 세계였는지 죽음의 세계였는지 잠시 혼돈스러웠다.
문상객들과 함께 조화들이 줄지어 영정 좌우로 늘어서기 시작했고, 동창회나 향우회에서 보내온 만장들로 빈소 입구가 채워졌다.
동창생들이 들어왔다.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듯 서리가 내리고 주름이 잡힌 얼굴들이지만 희미하게나마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삼 내 나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나의 삶은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어느새 인생의 반을 넘게 왔는데 재산이 있나, 자식이 있나, 도대체 난 아무것도 내세울게 없으니.
절을 마친 문상객들은 모임별로 모여 앉아 육개장으로 저녁을 먹었다. 좌석은 혼잡했다.
죽음은 가까이 있었지만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생명현상의 일부일 뿐 어떤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휴대폰이 죽거나 화분의 선인장이 죽듯이 그냥 꺼지는 것 뿐 일지도 모른다.
내세는 있는 걸까….
슬픔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이 그저 형식적인 인사치레에 부의금이나 내고 가는 조문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기야 정확히는 자기 자신의 죽음은 아니니까.
졸업 후 처음 만난 노래방을 한다는 초등학교 여자 동창생에게 사소한 몇 가지 옛 추억을 일깨워 주었다. 짐작대로 감탄을 연발하면서 기뻐했다. 그렇게 세세한 일까지 잊지 않고 있는 나의 끈질긴 우정을, 거의 까무러칠 듯한 호들갑으로 보답하면서 마침내는 완벽하게 옛 친구의 자리로 되돌아와 있었다.
네가 가업을 이은 사진작가가 되어 네이버 검색창에 이름만 쳐도 나온다는 것과, 내 친구라는 사실을 믿지 않던 주위사람들의 어리석음, 신문에서 네 사진과 이름을 발견할 때의 기쁨이 어떠했는가를 몇 번씩이나 되풀이 말하였다. 오랜만에 만나 시작된 대화는 긴 세월을 풀어놓느라 길게 이어졌다.
“왜, 너의 엄마가 하던 요정 이름이 엇모리였잖아. 그 땐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했었거든? 딸이 국악을 하다 보니 그게 중요한 인물이 등장할 때 일부러 한 박자 늦춰서 치는 장단이던데, 그게 누군지 되게 궁금하더라?”
어렸을 때 우리 집을 그렇게 부러워했고, 너의 엄마가 하는 양장점에서 옷 맞추어 입는 일이 소원이었다고 깔깔대는 여자애는 건설업을 한다는 다른 동창생 이름을 들먹였다.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 하자 네 동생과는 자주 만나는 모양이던데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동생의 역할은 뻔했으리라. 이렇게 변호사와 트고 지낼 만큼 나도 유식한 놈이란 걸 확인시켜주도록 옆에만 있어주면 됐을 것이다. 신분 포장용으로 동생을 불러내는 불순한 동기를 생각하면 왠지 치사스러워진다.
친구들은 초저녁 무렵에 들이닥쳐 영안실 접수창구 옆 의상 보관소에서 상복을 갈아입고 밤샘을 할 작정인지 고스톱을 쳤다. 자정이 가까워오자 문상객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몇몇 친구들만 남아 화투를 하느라 떠들어 댈 뿐 상가는 또 정적에 휩싸였다.
나는 어머니의 영정을 바라보았다. 영정 속에서 어머니는 머리카락에 윤기가 돌았고 엷게 웃고 있었다. 미소 띤 사진은 영정으로 쓰지 말라고 미리 유언이라도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밖엔 내 머릿속만큼이나 무거운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
어머니는 소리에 민감하셨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셨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으면서도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물 쏟아지는 소리가 어쩌면 이리 맑다냐. 그러나 어머니는 정작 그 흔한 유행가 한번 흥얼거리는 걸 들은 적은 없었다.
어머니가 내는 소리는 그저 피리소리 밖에 없었다.
노을 비낀 하늘을 향해 멀리까지 울려 퍼지던 피리소리, 들을 때마다 가슴 간질간질한 두려움을 일깨우게 하던 어머니의 피리소리. 나는 어머니가 동생만 데리고 어디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멀리 나가지 마라. 다시 들려오는 어머니의 다그침. 그것은 어디든 제발 멀리 좀 갔다 오렴, 하는 말의 다른 표현처럼 들렸다. 그럴 때마다 나도 어머니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통쾌하게 복수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달콤하게 상상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저녁을 지을 때면 흰 사발에 숟가락을 걸쳐들고 장독대로 가곤 했다. 부엌에서 장독대에 이르는 작은 텃밭에는 고추와 파가, 그 바깥으로는 붓꽃과 봉숭아가 피어 있었다. 붓꽃은 저녁 무렵에 꽃잎을 열었다. 어머니는 붓꽃 이파리를 따 입에 물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이어지던 ‘빼-애’ 피리소리,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하던 놀이를 멈추곤 했다.
그 시절 나는 어머니가 어딘가에 소리 주머니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버드나무 가지, 연한 보릿대, 무엇이든 어머니의 입에 닿기만 하면 소리가 되었다. 나도 해 보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그저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매콤한 풀잎 맛만 남곤 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소리 주머니가 실은 안으로 만 안으로 만 눌러온 온갖 감정들, 이루지 못한 희망,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원망들로 만들어 진다는 것을.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는 저마다 다른 크기의 소리 주머니가 있다는 것을. 그 모든 것이 ‘빼-애’ 피리 소리가 되어 나온다는 것을.
이젠 나도 붓꽃 이파리를 입에 물고 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중학교 때 얼굴이 흰 도덕 선생님은 아가페라는 단어 뒤에 이렇게 썼다. 절대자에 대한 사랑, 혹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
그 도덕 시간에는 유난히 창으로 빛이 많이 쏟아져 들어왔다. 칠판의 설명을 공책에 옮겨 적으며 햇빛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도 나는 아가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빛이 많이 쏟아져 들어오던 오후 도덕 시간을 기억한다. 아니다. 그 5교시를 기억하는 것은 그날 하교 후의 일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가운 빛으로 가득한 운동장을 지날 때까지, 나는 아가페라는 말을 떠 올렸다. 햇빛 속에서 궁굴리면 달콤한 과자냄새가 날 것도 같고 먼 나라의 향기가 묻어나는 것도 같은 말. 교문 가까이 와서야 길 건너 가로수 밑에 서 있는 한 여인을 보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머니는 이따금씩 그렇게 하교 길에 서 있곤 했다.
빵 집에 들어가서도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 때는 사춘기였다. 모든 사물에 대해 무차별로 반항하는 일이 당연하다고 믿던 때였다.
“네게 말해 주고 싶은 게 있다. 그런데 막상 널 보니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구나.”
그제야 난 눈을 똑바로 뜨고 어머니를 정면으로 바라다보았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어요.”
“이런 얘기 네가 더 큰 다음에 하려 했는데, 하지만 다시는 너와 얘기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햇빛을 받은 빵들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환각 속에서 어머니의 말을 들었다. 낮은 목소리, 붓꽃 피리소리가 아주 멀리 퍼져나가는 듯한 목소리.
사진에서도 한 번 본 적 없는 할머니는 언청이였고, 그 결함은 열성 유전이어서 아버지는 정상으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낳은 아이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첫 출산을 했을 때, 출산의 고통에서 한숨 돌리기도 전에 아버지는 핏덩이를 거적으로 말아 산으로 올라갔다. 미역국을 먹으면서 어머니는 아이를 어쨌느냐고 물어 보지도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가 사산을 했다고 믿었다.
붓꽃이 화득화득 피어나는 한 여름이었다. 언청이였던 어머니를 두었던 아버지는 그 고통과 불편, 그 눈물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 아이를 산에 묻은 다음부터 아버지는 거의 벙어리가 되었다. 다행히 나는 정상으로 태어났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말 없는 버릇이 고쳐진 건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침묵을 이해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이를 어디에 묻었는지조차 도 알려주지 않았다.
“넌 이것만은 알아둬라. 열성유전이라니까 네 자식 중에는 그런 아이가 혹 나올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점차 삐뚤어지기 시작하는 나에게, 어디론가 금방 떠나는 사람이 마지막 비밀을 털어 놓는 것처럼, 아니면 널 그렇게 어렵게 낳았으니 무조건 나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도 하나도 비장하지 않고 담담한 마음으로 그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독신을 결심하게 되었다.
붓꽃 잎으로 피리를 불던 어머니, 끼니 때 마다 따뜻한 밥을 지어주던 어머니, 열이 오르는 이마를 짚으며 머리맡에서 꼬박 밤을 새우던 어머니, 땅을 팔고 집을 팔아 끊임없이 자식의 뒤를 대다가 종내는 빈털터리가 되어 혹처럼 대접받던 어머니.
내가 어머니 인감을 빼내어 집을 담보 잡힌 걸 밖에서 들려오는 소문으로 알게 되지만 않았더라면, 어머니는 분명 고향 마을에서 여생을 마쳤을 것이다. ‘애비 없는 자식’소리를 가장 겁내던, 남들이 한동안 보이지 않는 내 안부만 물어도 속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던 어머니에겐 또 그만큼 치명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세상의 중심을 향해 끊임없이 나부대는 바람에 어머니는 그 펄럭이는 꿈의 자락에 쓸려 거듭 엎어져야만 했다. 급작스럽게 죽은 남편 대신 재산을 불려 놓은 어머니의 야무짐도 속수무책이었다.
목돈이 집안에 들어올 때면 꿈에 돛을 달고 펄럭이던 난, 몇 달 안가 난파된 배 조각에 몸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도박을 했을까, 사기를 당했을까, 결혼하지 않겠다더니 혹시 여자가 생겼을까, 어머니는 궁금해 했겠지만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야위고 늙어가는 동안, 고향에 남아있던 전답은 야금야금 없어졌다. 내겐 물려줄 자식도 없는데 고향에 땅뙈기를 굳이 남겨놓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내가 교제하는 사람들의 격에 맞춘 교제비, 그들이 지닌 것과 같은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구입하는 명품 카메라이거나 자동차등이 되었다. 명목상 그런 걸 구입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급히 막아야 할 돈’ 이었고 그게 없으면 당장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정도의 상황으로 둔갑하고는 했었다.
어머니가 한 푼도 없는 뒷방 노인네로 전락하면서 어머니의 피리소리도 가물가물해졌다.
*
“간다아아, 간다아아, 나느은 간다아아. 오우하아, 오우에에.”
버스 안에서는 딸랑거리는 요령소리와 상여꾼들이 부르는 애간장 녹이는 처량한 소리가 테이프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월 따라 죽음의 의식도 이렇게 달라지는 걸까.
화장장에 도착했을 때 조문객들은 가까운 친척 이외에는 몇 명 남아있지 않았다. 화장장은 최신식이었다. 버스 터미널처럼 잇따라 캐딜락 장의차와 근조라고 쓴 버스가 계속해서 오고 사람들이 꾸역꾸역 내렸다. 대기실 오른 쪽 구석의 대형 모니터에서는 극락왕생을 책임질 것 마냥 납골당 광고가 계속되고 있었다.
염이 끝난 어머니의 몸은 긴 나무토막처럼 보였고 그 아래 꽃신이 걸려 있었다. 유리창 너머 마스크를 쓴 화장장 직원이 유족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보냈다. 그리곤 버튼을 눌러 소각로 입구를 열었다. 직원은 어머니의 관을 소각로 안으로 밀어 넣고 입구를 닫았다. 동생이 울었다.
전광판에는 ‘화장중’이라는 글자가 들어왔다. 소각이 끝나려면 두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소각 완료’글자가 들어올 때마다 유족들 몇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여기저기서 소복 차림의 여자들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었고 울다가 실신한 젊은 사람을 밖으로 옮겨갔다.
지하 식당은 혼잡했다. 메뉴판을 살펴보았다. 설렁탕, 갈비탕, 육개장, 식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서면서 침을 삼켰다.
자신과 연결된 누군가가 재로 변해가고 있는 시간에, 사람들은 줄서서 농담을 하고 밥을 먹고 이를 쑤셨다.
나무 밑의 벤치에는 외삼촌이 마른 허리를 반쯤 접고 앉아 손톱이 다 타 들도록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외삼촌은 정말 원숭이처럼 인중이 길었다. 불그레한 게 취기가 오른 모습이었다.
“다 허망한 일잉겨, 죄다…. 늬 엄만 벌 받은 게다.”
관심이 없는 척 했지만 내 온몸의 세포들은 구멍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었다. 외삼촌의 목소리는 또렷또렷 내 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왔다.
“아, 그 눔하고 정분이 난 걸 알구서야, 늬, 늬, 아부지가 저수지에 그냥 빠져 뿌링거 아니것냐. 고깟 멫 년도 못 살 놈 헌티 팔자를 고쳐서, 늬 동생만……. 산다능게, 가심 한 복판에 한, 한 줌 냉기는 일잉겨.”
외삼촌은 씨받이 옥수수 알처럼 성근 옥니를 드러내며 헛웃음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 있었다.
‘소각 완료’ 라는 글씨가 소각로 문짝에 켜져 있었다. 유리창 너머에서 화장장 직원이 다시 거수경례를 하고 버튼을 눌러 소각로 입구를 열었다. 뼛조각과 재들이 소각로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직원이 어머니의 흔적들을 유골함에 담았다. 그리고는 흰 보자기에 싼 유골함을 유리창 아래쪽 작은 구멍을 열고 내밀었다. 나는 유골함을 받았다. 동생이 또 울었다.
*
오랜만에 밟아보는 고향땅이었다. 염소들이 풀 뜯고 달맞이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저수지 둑은 이제 조그맣게 줄어들어 보였다.
둑에 앉아 보자기를 풀었다. 서산으로 지는 햇빛으로 물 위에는 수천, 수만 개의 금빛 비늘이 반짝였다. 저수지는 큰 물고기의 꿈틀거리는 몸통 같았고 반짝이는 잔물결은 그 큰 몸통을 뒤덮은 오색의 비늘 같았다.
동생은 상자 속에서 하얀 가루를 한 움큼 꺼내 쥐고 어머니 유언대로 저수지 물 위에 뿌렸다. 흰 가루는 소리 없이 물속에 잠겨 사라졌다. 물방개 몇 마리가 도망치고 있었다.
동생은 상자를 내게 건네주었고 나는 상자에 손을 넣고 유골을 한 움큼 쥐었다.
부드럽고 하얀 가루였다.
나는 하얀 가루를 정성스레 모두 뿌린 후 상자를 물 위에 띄웠다. 흔들거리며 떠가는 어머니의 마지막 육신을 난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사라졌던 아버지가 하루 만에 떠올랐던 곳.
말잠자리 두 마리가 허공을 선회하는 걸 바라볼 때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퍼져나가 잔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이제는 어머니가 내게 미안해하지 않으실 거란 생각이 든 것은 동생이 안고 있는 어머니 영정의 미소가 물 위에 언뜻 비쳤을 때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동생이 어머니의 유품이라며 전해준 쌈지는 빨간 공단에 금색수가 놓아져 있었다. 얼마나 오래 간직하셨는지 모서리가 반질반질 닳은 쌈지엔 은비녀와 쌍가락지가 들어 있었다.
지금도 가는 손에 끼워져 있던 가락지와 동그란 어머니의 쪽진 머리를 기억한다. 은비녀를 꽂은 조그만 머리다발은 단아하고 정갈해 보였었다. 이걸 왜 나에게 전해주라고 당부 하셨을까.
동생이 전하는 어머니의 유언을 들으면서 차창 밖만 바라보았다. 기록영화처럼 풍경들이 스쳐 갔다.
“형과 나는 아버지가 같아. 난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는데, 꼭 돌아가신 뒤에 얘기 하라고 해서…….”
동생은 뒷말을 싹둑 잘라 애써 혀 밑으로 꾹 누르고 있었다.
내 속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 속으로 오랫동안 키워왔던 것이 해빙기에 눈 녹듯 어이없이 풀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낮고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직이, 기억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고 바람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는 끊길 듯 말 듯 들려왔다.
‘빼-애’ 그건 어머니의 피리 소리였다.
눈을 감으니 저수지 길 달맞이 꽃망울들이 함초롬히 열리는 게 보인다.
<2009. 8. 충북 작가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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