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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흠신서(欽欽新書)의 구성과 서술방식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국어국문학과강 혜 종2009년 7월
<목 차>
Ⅰ. 서론Ⅱ.『흠흠신서』의 편찬 배경과 과정Ⅲ.『흠흠신서』의 체제와 구성Ⅳ.『흠흠신서』의 서술방식의 특징Ⅴ. 결론참고문헌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텍스트는 편찬자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고안된 정교한 장치이기 때문에 문자화된 텍스트의 구성과 서술방식은 작자의 저술의도를 심층적으로 파악하고 텍스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형정서로 널리 알려진『흠흠신서(欽欽新書)』는 정약용의 대표적 저술로서 내용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진 데 비하여 그 구성과 서술방식에 관한 연구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본 연구는『흠흠신서』가 선행연구에서 연구된 것처럼 형정연구서 혹은 형정에 관한 실무지침서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그동안 배제되거나 주변적 언급에 머물렀던 텍스트로서의 성격을 찾아내는 작업을 통해『흠흠신서』의 고유성과 글쓰기 방식의 의미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표면적으로 밝혀진 편찬 동기 이면에 정약용이『흠흠신서』를 통해 얻고자 했던 효과 혹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파생된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발견하고, 새로운 각도에서『흠흠신서』를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짚어보고자 한다.
2. 연구사 정리와 연구방법
그동안『흠흠신서』의 연구는 궁극적으로 정약용의 형정관과 당시의 법문화를 살피기 위한 방향1)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본고와 관련이 있는 흠흠신서 『』의 체제와 구성, 서지적 연구를 중심으로 선행연구를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1) 근래에 이루어진『흠흠신서』의 연구는 대부분 법사상의 관점에서 연구한 것이다. 윤재현,「다산의 유교적 자연법」,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 이원택,「정약용의 복수에 대한 인식과 친관념 :『흠흠신서』,「경사요의」를 중심으로」,『법제연구』20, 한국법제연구원, 2001.6. ; 조성을,「정약용의 형정관」,『학림』제23집,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2002. ; 전광수 ,「다산의 공직관에 대한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 김익수,「다산 실학에 있어서 경학과 경세학의 관련성 연구」, 경상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 강정훈,「정약용의 형정사상 연구-『흠흠신서』에 대한 윤리문화적 이해를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민윤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7 ; 김창도,「현대 한국 행정의 이념과 개혁방향에 대한 다산학적 해석 : 정약용의 국가개혁사상을 중심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흠흠신서』의 가장 초창기의 선행연구2)로 꼽을 수 있는 법제사적 연구와 서지론적 연구에서는『흠흠신서』에 관한 기본적이면서도 주요한 정보들과 특징들이 분석되어, 이후『흠흠신서』에 관한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
그 중에서 심희기는『흠흠신서』라는 텍스트의 실체에 초점을 맞추어 본격적인 연구를 시도하였다. 인명을 소중히 여기는 당대의 인명관을 바탕으로 모순된 형정제도를 바로잡기 위하여『흠흠신서』가 편찬되었다고 전제한 후,『흠흠신서』의 5부(部)3)의 전반적인 구성과 의미에 대하여 법제사적인 관점에서 상세히 분석하였다.『흠흠신서』에서 밝히지 않은 사례의 출전을 많은 부분을 본격적으로 확인하여4)『흠흠신서』의 텍스트적 성격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정약용의 설명과 비평의 서술방식을 설명하고, 각 부(部)에 대한 개별 분석을 통해 법학사(法學史)에서 조선시대 살옥서(殺獄書)5)로서 특수성과 전문성이 두드러진『흠흠신서』의 의의6)를 높이 평가하였으며,『흠흠신서』가 실무지침서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근대 법학적 관점에서 수용하기 힘든 사례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고찰하지 않았다.7)
2)『흠흠신서』의 초기 연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宮岐市定,「欽欽新書解題」,『朝鮮學報』47, 1968 ; 黃雲龍,「茶山刑法思想硏究」,『亞細亞學報』8, 1968 ; 朴秉濠,「茶山의 法思想」,『丁多産硏究의 現況』, 민음사, 1985 ; 沈羲基, 「欽欽新書의 法學史적 解剖」,『社會科學硏究』제5집 2권, 1985. ; 朴秉濠,「茶山의 刑法觀」,『茶山學의 探究』, 민음사, 1990.
3)『흠흠신서』를 구성하는 권명인「경사요의(經史要義)」,「비상준초(批詳寯抄)」,「상형추의(祥刑追議)」,「의율차례(擬律差例)」,「전발무사(剪跋蕪辭)」를 본고에서 각각 부(部)로 부르기로 한다.
4) 심희기는『흠흠신서』에서 출전을 밝히지 않은 사례들이『의옥집(疑獄集)』,『절옥귀감(折獄龜鑑)』,『당음비사(棠陰比事)』등에 수록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심희기, 앞의 논문 참조.)
5) 인명사건(人命事件)을 다룬 형서(刑書).
6) legal reasoning(재판에 있어서 행하여지는 사실판단 이외의 법에 관계된 논리적․정신적 추리과정)을 위한 전문서로서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심희기, 앞의 논문, 41쪽.)
7) 이러한 사례들을 법률적인 것이라기보다 일화적이거나 전설적인 것으로서, 다만 "수사학, 사실 인정학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이며, "당시 재판학이 일종의 종합학이라 자연스럽게 편입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심희기 앞의 논문, 46~47쪽.)
이후 유재복의 서지학적 연구8)는『흠흠신서』의 형성과정을 상세히 분석하여, 그동안『흠흠신서』의 전신(全身)으로 여겨진『사안(事案)』,『흠형전서(欽刑典書)』,『명청록(明淸錄)』각각의 특징을 고찰하고 그 편찬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혀,『흠흠신서』가 "문란한 형정에 대한 개선책"으로서 오랜 준비기간 동안 편찬된 저술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현존하는『흠흠신서』의 이본 34종9)을 확인하고 그 중에서 광문사본(廣文社本)과 신조선사본(新朝鮮社本)을 대조하여 오탈자를 바로잡아, 이후의 연구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권연웅10)은『흠흠신서』의「경사요의(經史要義)」편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특히 심희기의 연구에 이어「경사요의」편에 수록된 사례들을 도표화하고 일부의 출전을 밝혀내었다.11) 또한 구조주의적 접근방법으로「경사요의」의 내용을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방식을 시도하였으며, 형사사건을 처리하는 기준이 되는 경서(經書)의 윤리규범인 13개 대의(大義)의 의미를 상세히 고찰하고 사례와의 관련성을 밝혔다. 그러나 분류법에 맞지 않는 사례들에 대한 의미 도출이나,『흠흠신서』의 나머지 4부(部)의 각론(各論)은 이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두었다.
한편, 문학에서『흠흠신서』와 관련된 연구로는 조선 송사설화나 송사소설에 관련한 연구와 중국의 공안소설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이헌홍12)은 먼저 송사소설이라는 개념을 규정하고,13) 여기에서『흠흠신서』를 비롯하여 각종 송사설화와 송사소설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특히『흠흠신서』「경사요의」의 사례들의 많은 부분이『당음비사(棠陰比事)』에 수록된 것을 확인하였고, 흥미있는 설화적 사건들이 문학적 모티브로 발전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또한『목민심서』에 수록되고 있는 사례들은 목민관의 자질함양이라는 교육적 목적을 위해 마련된 판결 지침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평가하였다.
8) 유재복,「흠흠신서의 편찬과 그 이본의 비교」,『서지학연구』제7집, 1991.
9) 유재복의 연구에 따르면 현존하는『흠흠신서』의 이본은 필사본 31종과 간본(刊本) 3종, 총 34종이며, 이본들 간의 항목 수와 배열 순서에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유재복, 앞의 논문을 참조.)
10) 권연웅(權延雄), 「欽欽新書硏究1 : <經史要義>의 分析」,『慶北史學』제19집, 1996.
11) "「경사요의」115건의 사례 중 원저에서 國史로 밝힌 출전이 모두 『국조보감(國朝寶鑑)』임을 확인하였다." (권연웅, 앞의 논문 9쪽.)
12) 이헌홍,「문헌 소재 송사설화의 유형과 의미」,『야담문학의 현단계 1』2001, 409~438쪽. ; 이헌홍, 「조선조 송사소설 연구」, 부산대 대학원 박사논문, 1987, 등.
13) 이헌홍은 公案이라는 용어가 訟事라는 용어에 비해 동음이의어 때문에 변별성이 결여되고, 용어자체의 어감이 지닌 규범적 도식성으로 인하여 포괄성 또한 부족하며, '재판 사건'이란 뜻으로 쓰인 우리 문헌상의 용례가 쉽게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 점 등의 이유 때문에 이는 우리 고전소설의 하위 갈래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적합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헌홍, 앞의 논문(1987), 15~20쪽
한편, 박명진과 박소현14)은『흠흠신서』에 수록된 여상두의 공안소설의 특징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하였는데, 여상두 공안소설의 문체적 특징, 판례서와 공안소설의 관계 등에 관한 연구를 통해『흠흠신서』에 수록된 공안소설에 관한 정보와 의미를 고찰하는 데에 귀중한 참고가 되었다.
위의 연구들은『흠흠신서』의 구성과 서술방식에 관한 연구에 중요한 초석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나 보다 더 심도 있는 연구의 필요성이 남아있는 바, 본고에서는 선행연구들을 바탕으로『흠흠신서』의 구성과 서술방식을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첫째, 편찬 배경을 사회문화적 측면과 개인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피도록 한다. 사회적 측면으로는 형정의 문란으로 인한 형정서 편찬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당시의 상황을 고찰하고, 문화적 측면으로는 당대의 서적 편찬이 다양화되고 증가하는 분위기 속에서 관찬서와 전문서적의 사회 참여적 기능을 살펴보겠다.
개인적 측면으로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유배당한 선비이자 지식인으로서 정약용이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사찬 전문서를 편찬하고, 큰 의미를 부여한 이유와 어떠한 관련이 있었는지를, 조선 후기의 국가적 편찬 사업과 편찬자가 처했던 정치적 상황을 바탕으로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이것은 편찬 동기가 텍스트의 구성과 서술 방식에 반영되는 방식을 밝히기 위한 작업이 될 것이다.
둘째,『흠흠신서』를 당대의 동류서들과 비교 분석하는 방식으로, 각각의 체제의 특징을 살펴보고 동일한 사례를 담은 텍스트가 편찬서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어 수록되는 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보겠다. 이것은『흠흠신서』만의 고유성과 이를 참조.)바탕으로 한 사찬 형정서로서의 경쟁력을 파악하는 하나의 방식인데,『흠흠신서』의 편찬자가 의도한 텍스트 구성의 차별화 전략과 그 의미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셋째,『흠흠신서』를 이루고 있는 텍스트들의 구성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고찰할 것이다. 다양한 층위의 텍스트들-문학적 텍스트, 공문서, 자기 경험적 텍스트-을 출전의 종류를 망라하여 폭넓은 사례로서 수록한 이유를 밝혀보도록 한다. 이를 위해 정약용의 세계관, 당대의 문화적 현실 인식과 형정에 대한 관점 등을 바탕으로『흠흠신서』를 통해 편찬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담론의 성격을 파악하여『흠흠신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려는 본고의 목적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앞장에서 살펴본 편찬 동기를 드러내고,『흠흠신서』의 구성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정약용의 서술방식의 특징을, 편집, 설명, 논증, 비평의 큰 틀로 나누어 살펴보겠다.『흠흠신서』가 독자들의 실천을 목적으로 한 형정 지침서이자, 형정 관리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편찬서라고 할 때, 정약용이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는 편찬자가 되기 위한 전략이 서술방식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양상과 그 효과를 중심으로 고찰하도록 하겠다.
14) 박명진의「明代公案小說專集의 創作과 刊行」,『중국어문학』제41집, 2003. ; 박소현,「공안소설 다시 읽기」,『중국소설논총』, 제17집, 2003.
Ⅱ.『흠흠신서』의 편찬 배경과 과정
1. 사회문화적 배경
1.1. 형정서 편찬의 사회적 분위기
조선후기에는 지방 사회의 제반 업무에 대한 효율적 통치를 위하여 목민서(牧民書)들이 많이 편찬되었는데, 이들 목민서에는 수령의 법률지식과 사법 운영에 관한 정보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또한 법령이 정비되고 전문적인 형정서들이 편찬된 것은 조선후기 사회가 이전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과 범죄가 발행했기 때문이었다.15)
다음은 정긍식의 연구16)와 심재우의 연구17)를 바탕으로『흠흠신서』가 편찬될 무렵까지 조선에서 편찬한 주요 형정관련 법률서와 수령의 법률지침서를 정리해본 것이다.<표-1> 조선시대 주요 관찬(官撰) 법률서
1395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1438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1484 당음비사(棠音比事), 의옥집(疑獄集)1698 수교집록(受敎輯錄)1732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1761 전율통보(典律通補)1778 어정흠휼전칙(御定欽恤典則),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寃錄言解)1791 추관지(秋官志), 증수무원록대전(增修無寃錄大典)1799 심리록(審理錄)<표-2> 조선시대 주요 사찬(私撰) 법률서18)
1494~1506 복식(服式)1585 사송유취(詞訟類聚)1649 결송유취(決訟類聚)1707~1767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형정의 법리적 근간이 되는 것은 조선전기에 수용되어 형정의 기틀로서 천명된『대명률(大明律)』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각종 중국 형사 법률서를 수입하였지만19) 수령들은 법률 서적을 바탕으로 형사사건을 심리하기보다는 엄형의 신문으로 사건을 해결하였다.
먼저, 성종 14년(1484년)에 실용적으로 형사사건의 심리에 도움이 되는 중국의 형사 사례집인『당음비사(棠音比事)』,『의옥집(疑獄集)』등을 간행하였다.20) 이후 재판에 실용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재판에서 자주 쓰이는 조문을 뽑아, 김백간(金伯幹)이 편찬한 사찬서『사송유취(詞訟類聚)』는 전주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는 등, 청송관(聽訟官)의 지침서로 활용되었는데 조선후기에 형사사건 관련 조문이 추가되어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21) 정긍식은 이러한 사찬법서들이 관찬법률서는 아니지만 실제에서 실질적으로 더 큰 영향을 끼친 책이라 평가한다.22)15) 심재우,「조선후기 목민서의 편찬과 수령의 형정운영」,『규장각』21, 1998, 89쪽 참조.
16) 정긍식,「법서의 출판과 보급으로 본 조선사회의 법적 성격」,『서울대학교 法學』제48권 제4호, 2007.
17) 심재우, 앞의 논문.
18) 이밖에 정확한 편찬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상피(相避)』,『청송제강(聽訟提綱)』,『사송유초(詞訟類抄)』,『대전사송유취(大典詞訟類聚)』,『결송지남(決訟指南)』등이 있다고 한다.
19) 정긍식, 앞의 논문, 96쪽.
20) 정긍식, 앞의 논문, 97쪽.
21) 수령의 입장에서는『경국대전(經國大典)』, 각종 수교(受敎) 및『대명률(大明律)』을 아울러 참고하여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에 요긴한 조문만 발췌하여 종합 정리한 사찬법서가 등장하였다고 한다. (정긍식, 앞의 논문, 98쪽.)
22) 정긍식, 앞의 논문, 99쪽.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에도 수령들이 법례에 따르지 않고 대부분 억측으로 결단하고 있어서 숙종 1698년에『수교집록(受敎輯錄)』이 활자본으로 간행되고, 1743년에는『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이 편찬되는 등 형정 정비의 노력이 계속되었다.23)
이후 18세기에 영조는 대대적인 형전(刑典)의 정비를 추진하는데, 완형주의(緩刑主義)를 표방하여 잔혹한 형벌을 폐지하고『대전통편』과『대명률』을 합친『전율통보』를 편찬하는 등 형정의 합리적 집행을 위해 노력하였다.24)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도 즉위 이래 예악과 형정을 왕정의 급선무라고 인식하고 각종 법전 편찬사업을 통해 국가 체제의 정비와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는데,25) 특히 판례집인『추관지』와『심리록』을 편찬한 것이 주목된다.
이러한 사례집의 편찬 목적은 일차적으로 형정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현실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민족의 자주성의 발현과 애민의식의 증진이 반영된 것이라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26)
형법의 보완이 두드러진 것은 개선된 법 제도의 특징이었는데, 형사제도 개선의 목표가 민(民)이라는 점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형사 법규는 대민 의식의 진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한다.27) 즉, 덕치를 위한 필요악으로서 형률을 치부하던 국가에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형정서에 대한 현실적 요구의 결과로, 판례들을 모아놓은 법률서와 서리들의 실무행정을 처리하는데 필요한 제반 사항들을 서술해 놓은 서적들이 조선후기에 편찬되지만, 18세기 당시의 관리들은 사회적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고 법률을 체계적으로 적용하여 집행하는 데에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것은 유가에서 뿌리 깊게 내려온 형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큰 원인이었으므로 관리들의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요구되었다.
여기에 수령의 자질에 관한 문제가 끊이지 않았고 되었고, 정조는 반드시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사람을 등용시키라고 지시하는 등 수령교육은 국가적 과제였으며 곧 왕권의 강화와 맞물려 있는 중대한 사항이었는데,28) 수령들은 어려운 법전을 아울러서 형률을 집행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수령의 업무인 형정과 관련하여 사죄사건(死罪事件)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살인사건에 관한 처리를 위한 전문서의 필요성은 더욱 커져 갔을 것이다.29)
23) 정긍식, 앞의 논문, 100쪽.
24) 정긍식 앞의 논문, 101~102쪽 참조.
25) 심재우, 「조선시대 법전 편찬과 형사정책의 변화 」,『진단학보』96, 2003, 243~264쪽 참조.
26) 정긍식은 사례집의 편찬은 조선의 법 경험을 집성하는 것으로 자주적인 법문화, 나아가 법치국가를 확인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평가하면서, 추상적인 법규범을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한 사례집의 편찬은 더 이상 자의적인 법해석을 용납하지 않고 역사적 경험, 조선인의 심성에 합당한 법을 집행하려는 법치주의의 체화 과정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정긍식 , 앞의 논문, 113쪽).
27) 심재우, 앞의 논문(2003), 258쪽.
28) 수령의 무능과 부패는 중앙집권 체제의 붕괴를 가져오는 요인으로서 왕은 수령이 지켜야할 덕목을 직접 하교하는 등, 조선초기 위정자들은 수령 자질의 향상을 위해 다각도의 모색과 정책적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능한 인재일수록 수령 부임을 꺼렸으며, (이명복,『조선시대 형사제도』,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7, 48~49쪽 참조.) 조선초기부터 중앙집권체제를 강화․유지하기 위해 지방 관료의 인사에 관한 여러가지 법적규제를 마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이후 지방행정은 문란해졌다고 한다. 그 원인으로 지방 관료의 인사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고 하는데, 수령 교체현상이 심하였고 수령이 재임하지 않는 공석기관마저 생겨나는 실정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수령직일지라도 일부의 수령은 세도정치의 파당 관계를 갖고 중앙 진출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징계의 대상자로부터도 모면될 수 있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김석희,『조선후기 지방사회사 연구』, 혜안, 2004, 337~364쪽 참조.)
29) "사죄(死罪) 중 가장 많은 것이 인명(人命), 즉 살인사건이다." (박병호,『국역 심리록』1권 해제, 15쪽.)
1.2. 관찬서의 사회 참여적 기능
조선후기에 형정서와 수령지침서의 편찬이 증가하는 것은 전반적으로 서적 편찬이 증가하는 흐름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30) 그 중에서 영조대에 어제류(御製類)의 양과 종류가 증가하고31) 이후 정조대의 규장각 편찬사업이 활성화되는 등32), 조선후기의 어제 편찬사업이 활성화 되었다는 사실은『흠흠신서』의 편찬 배경과 관련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30) 강명관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다독과 박학의 풍조를 바탕으로 정약용이 다작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강명관,『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306쪽.)
31) 이정민은 어제서를 어제류 중에서 단행본 서적으로 한정하면서, 70여건이나 되는 어제서가 전례없이 영조대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편찬되었다고 한다. (李姃玟,「英祖代御製書편찬의 의의」,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51쪽.)
32) 규장각은 세조 때에 이미 양성지(梁誠之)에 의해 '어제존각지소(御製尊閣之所)'로 그 설치가 제창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종정시(宗正寺)에 소각을 따로 세워 '규장각'이라 쓴 숙종의 친필 편액을 받아 걸고, 역대 왕들의 어제․어서를 봉안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후 유명무실한 존재였던 규장각이 정조대에 세력기반 내지 문화정책의 추진기관으로 재구성되었다고 한다. (정옥자,『정조의 수상록 일득록 연구』, 일지사, 2000, 21~22쪽.)
지식과 이데올로기가 서적의 형태로서, 사회적 관계에서 권력으로 작동하는 한 문화적 수단으로 기능한다고 볼 때,33) 특히 당시의 관찬 서적은 그 대표적인 수단이면서 동시에 제도의 기능을 수행하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영․정조대에 어제서인 관찬 서적이 기능하는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정민은 어제서를 비롯한 어제류의 편찬이 영조 후반기(1763~1776)에 일상적일 정도로 빈번했다는 점은, 편차인과 조정의 핵심 관료들로 구성된 교정참여자 등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많은 참여를 하고 있는 점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하였으며,34) 어제서 편찬사업이 탕평책의 일환이었다고 지적한다. 이것의 근거로 전문편차인으로 지명된 신료들은 탕평대신의 성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35)
정조도 역시 규장각 편찬사업을 통해『군서표기(群書標記)』36)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방대한 어제서의 편찬뿐만 아니라 정치적 친위대의 양성 등의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37)
33) Henry A. Giroux는 Paulo Freire의 관점에서, 문화란 역사상 특정 시점에 있어 한 사회 내의 상이한 집단들이 세운 불공평하고 동시에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구축한 생활경험, 물질적이고 인위적인 것들, 실천의 표현물이다. 또한 생산의 한 형태로서 그 과정은 사회적 특수성이라든가, 연령, 인종, 계급과 관련된 상이한 사회구성체의 구조화와 밀접히 관련된다고 하였다. 이 경우 문화는 권력의 역동성과 밀접히 관련되며, 목적을 규정하고 성취하기 위한 개인과 집단 간에 능력의 불균형을 낳는다고 하였다. 지배형태로서의 권력이 국가가 부여한 것뿐만 아니라, 권력․기술․이데올로기가 지식의 형태, 사회적 관계, 그리고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침묵시키기 위해 작용하는 구체적인 문화형태를 생산해내는 방식으로 표현되며, 지배는 피억압자가 지배자의 가치를 내면화시켜 그들의 억압에 참여하는 방식 속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파울로 프레이리(Freire) 지음, 한 준상 옮김,『교육과 정치의식-문화, 권력 그리고 해방』, 학민사, 1986, 28~30쪽 참조.)
34) 후반기에 들어 적극적으로 편찬에 참여한 인물은 편차인과 교정대신(校正大臣)인데, 편차인은 탕평대신으로 대대로 편찬에 참여한 집안의 자손이며, 교정대신으로는 전․현직 삼정승, 홍문관 제학, 승지 등이 대거 참여하는 등 조정의 핵심 관료들이라고 한다. 이는 승지가 주로 참여하였던 전례와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지적한다. (이정민, 앞의 논문, 30쪽.)
35) 이정민, 앞의 논문, 13쪽.
36) 정조 자신이 지은 어제와 신료들에게 명하여 편찬․간행한 책155종 3991권을 대상으로 엮은 해제집이『군서표기』이다. (신승운,『군서표기』해제, 『국역 홍재전서 18』, 2000, 2쪽.)
37) 정옥자는 정조가 자신이 편찬한 주자서를 전국에 보급함으로써 존왕사상을 확산시키려 했다고 지적하였고, (정옥자,『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도서출판 돌베개, 1999, 159쪽.), 김문식은『군서표기』에 수록된 많은 문헌이 편찬된 것은 君師, 즉 군주이면서 학자였던 삼대 성왕들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이유라고 하였다. (김문식,『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 해석사, 2000, 13쪽.)
이정민은 또한 어제(御製)가 "시비판별(是非判別)을 확정짓는 매개"로 부각되어 왕권이 강화되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실록의 편찬에 왕의 권한이 철저히 배제되는 것과는 반대로 어제서의 편찬과정에서 왕이 주도적은 편집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어제집의 편찬은 그 동안 사장될 수밖에 없었던, 사초(史草)들이 부활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마련한 셈이 된 것이다.38) 왕조실록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항하여 관(官)의 공식적인 기록방식이 다양화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특히『추관지』,『상형고』,『심리록』등의 판례서는 사부(史部)에 속하는데,『추관지』가 실록의 산삭(刪削) 원칙을 따르고 있는 점으로 판단하면,39) 편찬자가 판례서를 권위 있는 역사적 기록물 이라고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흠흠신서』,「상형추의」서(序)에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가 왕의 판부를 취합하여『상형고』일백권을 만들었다.(史臣聚前後御判爲祥刑考一百卷.)"고 언급된 부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흠흠신서』의 역사서로서의 성격을 정약용도 확실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제서의 편찬이 당대 정치 참여의 한 방식이자, 역사적 권위를 지닌 새로운 문화적 권력을 탄생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둘러싸고 왕과 신료들 간의 미묘한 역학관계가 존재했을 것이다.
38) 정부 각 기관에서 보고한 문서 등 연월일 순 정리 작성한 춘추관 시정기(春秋館時政記),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 기관문서와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史草), 개인문집 등이 사초가 되는데, 이 가운데 각 사관이 개인적으로 기록한 사초가 기관문서들과 함께 가장 중요한 1차 자료가 된다고 한다. (이덕일․ 이희근,『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세종서적, 1999, 184~185쪽 참조.)
39)『추관지』는 정조 5년(1781)에 형조판서 김노진(金盧鎭)이 낭관 박일원(朴一源)에게 위촉하여 편찬을 시작하여 이듬해에 증보, 1791년에 증보(重補)를 거쳐 완성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편집의 원칙을 밝히고 있다. "전교의 자구는 비록 정정하여 삭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실록의 기재에도 또한 간략하게 한다는 규정이 있으므로 삼가 이 규정에 의하여 약간 산삭하였다." (傳敎句字雖不敢點削而實錄記載亦有從簡之規故謹依此規略加節該.『秋官志上』,「凡例」, <刪削>, 한국문집총간.)
40) 규장각은 정조의 문화적 포부와 정치적 의도가 혼합된 문화기관이자 정치기구로서, 그 목적이 개혁 세력의 양성에 있는 만큼, 교과의 내용도 제술보다는 경학과 역사였으며, 각신과 마찬가지로 초계문신에게는 각종 혜택을 주었다고 한다. (이석무,『조선시대 당쟁사 2』, 동방미디어(주), 2000, 203~249쪽 참조.)
그런데 당시 서적의 편찬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규장각에서 정약용은 초계문신40)이자 예문관 검열이었다 . 이후 그는 정치적 핍박으로 제도권에서 밀려나지만 관료적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제도권 밖에서 관찬 서적에 대응하는 서적편찬을 통해 자신을 뜻을 치열히 펼쳐나가려고 한 것이다.41)
다음으로, 전문서의 편찬이 곧 관직의 세습으로 연결되는 권력의 재생산으로 볼 수 있다는 관점에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어제서 편찬의 내용적 측면을 살펴본다면, 전대와는 달리 전문서적의 편찬이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국가에서 편찬하는 책의 범위가 확대된 것은 영조와 정조의 문화적 소양, 사회문화적 요청에 따른 것이겠지만, 이는 당시의 서적의 기능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보여주는 증거임과 동시에 당시 선비들이 서적 편찬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를 북돋는 계기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조는 어제서의 서명(書名) 아래에 반드시 친찬(親撰)과 명찬(命撰)을 구분하여 표시함으로써, 어제서 편찬에 참여한 신료들의 노고를 표시하도록 하였으며42), 관직의 수여 등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한 것으로 보인다.43) 마찬가지로『추관지』와『심리록』등 전문적인 어제서 편찬에 관리가 참여한다는 것은 해당 분야에 대한 권위 있는 관리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으므로, 관리로서의 능력과 자부심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될 뿐만이 아니라 해당 분야에서의 입지가 튼튼해지는 등의 실질적인 보상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 다산의 손자인 정대무(丁大懋)가 쓴 글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나의 벼슬생활 년 동안 14 검관을 거의 100여 번 맡았는데 혹은 대부에서 정송되고 혹은 인읍에서 대부에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왜 나만 자꾸 지목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여 그 까닭을 물으니 대부에서 말하기를 "흠서의 자손이다", 인읍에서 말하기를 "흠서의 가문이다"라고 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44)
윗글을 보면 정약용의 전문서 편찬은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 전문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흠흠신서』의 편찬은 단순한 서적의 생산이라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후손이 해당 관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영향을 주었다.『흠흠신서』는 독자들이 정약용의 관료적 능력을 인정하고 정약용 가문의 형정 수행능력을 신뢰하도록 만든 것이다. 사회 참여적 서적 편찬 통하여, 기대할 수 있었던 이러한 효과는 정약용의 저술 활동과『흠흠신서』의 편찬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41) 박무영은 여유당전서 500권이, 개혁에의 의지가 실현의 길을 봉쇄당하자 저술로 자신의 개혁 구상을 완성시켜 남겨 놓으려는 불굴의 열정으로 개화한 것이며, 개혁방안을 구상하는 것에 그치지않고 그것의 철학적 기반까지 마련하려고 하였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정약용 지음, 박무영 옮김,『뜬세상의 아름다움』, 태학사, 2001, 25~26쪽.)
42) 신승운,「弘齋全書와 群書標記의 編纂과 刊行에 關한 硏究」,『書誌學硏究』第22輯, 2001, 384쪽.
43) 신승운은『규장전운』의 인쇄가 끝나고 이 책의 교정과 출간을 담당한 최고 공로자인 이만수(李晩秀)가 육품직으로 승진하는 등의 보상이 행해졌다고 한다. (신승운,「奎章全韻을 통해서 본 正祖朝의 書籍頒賜와 그 規模」,『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제35권 제4호, 2004, 314쪽 참조.)
44) 심희기의 앞의 논문 61쪽 번역 참조.
余作宰十四年檢官之役機爲百餘遭或自大府定送或自隣邑請行于大府訝其偏而愬之則大府欽書之孫也, 隣邑曰欽書之家也余何言哉. 『欽欽新書』, 廣文社本, 光武5년, 序.
2. 개인적 편찬 동기와 과정
2.1. 형정 참여 경험과 전문서 편찬
정약용은 정치적 부침 속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뛰어난 관리로 촉망 받으며 정조의 신임을 얻었다.45) 결국 다시 복귀하여 선정을 펼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는 그 이후에도 저술을 통해서 당대의 사회적 현실과 제도의 개선을 위한 목소리를 높였는데 , 이것은 사회 부조리에 대항한 정약용의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경세치학(經世治學)46)에 관심이 많았던 정약용의 저술에서는 그의 사회적 책임의식과 애민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흠흠신서』의 서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또 죽이기도 하니 사람의 생명은 하늘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목민관이 또 그 중간에서 선량한 사람은 편안히 살게 해주고 죄지은 사람은 잡아다 죽이는 것이니 이는 하늘의 권한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 뿐이다. …중략… 사람의 생명에 관한 옥사는 군현에서 항상 일어나는 것이고 목민관이 항상 마주치는 일인데도 실상을 조사하는 것이 언제나 엉성하고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언제나 잘못된다. 정조시대에는 형정이 올바르게 이루어졌지만 근년에 와서는 다시 제대로 다스리지 않아서 억울한 옥사가 많아졌다.『목민심서』의 편찬 후 전문적인 인명에 관해 "이는 마땅히 전문적으로 다루는 것이 있어야겠다."하여『흠흠신서』를 별도로 편찬했다.47)
정약용은 수령이 백성과 직접 대면하여 애민정신을 펼쳐야 하는 관리임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목숨이 달린 형정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태도가 일반적인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법률조문을 읽지 않으며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목민심서』와는 별도로『흠흠신서』를 편찬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정약용은 형정에 관한 관리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함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45) 정약용의 관직 정리: 1790년(정조 14년) 예문관 검열. 1791년(정조 15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1792년(정조 16년) 홍문관 수찬. 1794년(정조 18년) 성균관 직강, 비변랑(備邊郞), 홍문관 교리ㆍ수찬, 암행어사. 1795년(정조 19년) 동부승지, 병조참의. 1796년(정조 20년) 병조참지. 1797년(정조 21년) 곡산부사(谷山府使). 1799년(정조 23년) 형조참의. (『與猶堂全書』,『經世遺表』, 韓國文集叢刊, 정약용 연보 참조. )
46) 윤대식은 이익의 경학관이 청의 고증학에 부합하며, 형법과 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治道를 인식하였다고 평한다.(홍선표 외 지음,『17․18세기 조선의 독서문화와 문화변동』,혜안, 2003, 219~221쪽.)
47)『흠흠신서』번역은『역주 欽欽新書』1권~3권(現代實學社, 1999) 편을 바탕으로 필요에 따라 수정․보완하였다. 惟天生人而又死之人命繫乎天迺司牧又以其間安其善良而生之執有罪者而死之是顯見天權耳…중략… 人命之獄郡縣所恒起牧臣恒値之迺審覈恒疏決擬恒舛昔在我健陵之世藩臣牧臣恒以是遭貶稍亦警戒以底愼比年仍復不理獄用多冤余旣輯牧民之說至於人命則曰是宜有專門之治遂別纂爲是書.『欽欽新書』, 序.① 사대부가 법조문을 읽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해독을 끼침이 이와 같으니, 항우 패공의 시 제목을 , 내걸고 음풍영월함과 마조강패(馬弔江牌)를 즐김을 어찌 폐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48)
② 영원군수도 법조문을 읽지 않았고, 평안도 관찰사도 법조문을 읽지 않았고 군수의 조사보고서에 법조문을 인용하지 아니하고 가벼운 형벌로 처리할 것을 요청했고, 관찰사의 제사에도 법조문을 인용하지 아니하고 곧 석방할 것을 장황히 기록해 아뢰었으며 세월이 흐른 뒤에 겨우『속대전』의 조문을 인용했으니 또한 참으로 사람을 아끼는 절실한 마음이 없습니다.
한번 기록해 아룀에 그쳐 드디어 또 해를 넘기게 했고 끝내는 임금이 여러 가지 정무를 보살피시는 가운데 임금의 심려를 번거롭게 한 뒤에야 사건이 이와 같음은 어찌 사대부가 법조문을 읽지 않은 데에만 국한되는 일이겠습니까. 참으로 큰 폐단입니다.49)
①은 정약용이 법률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판결을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10년간 백성을 옥에 가두고 고문한 관찰사를 비판하는 대목이며, ②는 공무를 수행하다가 사람을 죽게 만든 사람에게 형률을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하는 관리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부분이다.
③ 옛날 구양 문충(歐陽文忠)은 이릉(夷陵)에 있을 적에 관아에 일이 없자 해묵은 공안(公案)을 가져다가 이리저리 사례를 끌어내어, 이를 일생 동안 옥사를 다스리는 데 경계의 자료로 삼았는데, 하물며 자신이 그 지위에 있으면서 그 직무를 걱정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50)
③에서 정약용은 관리들이 구양수와 같이 형정에 힘써야 함을 강조한다.51) 그런데 이릉 현령은 구양수가 좌천되어 외직으로 나간 것이다.52) 이처럼 정약용이 흠흠신서 와 목민심서에서 구양수를 모범이 되는 형정 관리의 모습으로 인용한 것은 관리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 이외에, 1795년 천주교 문제에 연루되어 황해도 곡산부사라는 외직으로 좌천되었으나 오히려 이것을 선정의 기회로 삼았던 자신의 입장을 중의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48) 士大夫不讀律其毒民如此項羽沛公之詩馬弔江牌之戲如之何其不廢也.『欽欽新書』卷23,「祥刑追議」十一, <公私之判二(地保催科村氓致斃根由公幹實因被打)>.
49) 寧遠郡守不讀律平安監司不讀律檢報不引律以請薄勘題辭不引律使卽決放張皇錄啓經年閱歲而後僅引大典之文亦殊無眞切愛人之心一啓而止遂又經年畢竟萬機之中勞煩聖慮而後乃蒙恩放嗟乎八路諸獄其若是者何限士大夫不讀律誠大弊也.『欽欽新書』卷23,「祥刑追議」十一, <公私之判三(地保差役逃卒受笞根由公幹實因被打)>.
50) 昔歐陽文忠在夷陵公署無事取陳年公案上下紬繹爲一生之所資助況身都厥位不虞其職事哉.『欽欽新書』序.
51)『목민심서(牧民心書)』,「형전육조(刑典六條)」에도 사대부들이 법률을 읽지 않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구양수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52)『宋史』卷319 ,「歐陽脩傳」.
또한 정약용은 서문에서 『흠흠신서』가 다음과 같이『세원록(洗寃錄)』,『대명률(大明律)』과 같은 역할을 해내기를 기대한다.
일을 처리하는 틈틈이 이 책을 펼쳐놓고서 인증(引證)하고 우익(羽翼)으로 하여『세원록』과 『대명률』의 보좌로 삼으면 그 유(類)를 미루어서 아주 정밀한 데에 이르러 아마도 또한 심의하는 데 도움이 있을 것이요, 하늘이 준 권한도 그르치지 않고 떳떳하게 집행할 것이다.53)
『세원록』은 중국 최초의 법의학서로,『무원록(無寃錄)』보다도 앞서는 것이며, 송(宋) 나라 송자(宋慈)가 지은 책으로서 검험서(檢驗書)의 시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대명률』은 당시 형률의 종조격인 법전이다. 즉, 이와 같은 형정을 위한 초석과 같은 책들의 위상과『흠흠신서』의 위상을 견주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흠흠신서』는 수령이 형정에 참고할만한 저술로 편찬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왕의 판부를 수록하고 비평하며 제도의 개선 등에 대한 대책을 제안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고위관리와 국왕도 독자의 범위에 상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권위있고 전문적인 형정서로서 평가받고 활용되기를 바라는 정약용의 소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조정에서 서적을 편찬하는 일은 관리로서 매우 의미있었다. 그런데 한창 관리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무렵에 끊임없이 정적들의 견제를 받으면서 유배를 떠난 정약용에게, 국가를 경영하고 지방관으로서의 임무 수행에 대한 지침을 담은 1표 2서는 서적의 편찬을 통해 관리이자 선비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시문집이 선비로서의 삶의 궤적을 증거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문예적 표현의 방식으로 형상 화 시키는 수단이라면 국가 경영에 관한 전문 서적의 편찬은 관리로서의 자질을 독자들에게 한껏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를 통해 정약용은 사후에도 후대에 모범이 되는 관리로서 현실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또한 당시 형정의 개선이 정조의 큰 정치적 과제였다는 점과 정약용이 이에 부응하는 형조참의 관직을 수행하다가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는 점은, 정약용이『흠흠신서』의 편찬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정약용은 관찬 전문서를 의식하면서『흠흠신서』편찬에 정성을 쏟았을 것이며『경세유표』,『목민심서』와 함께 큰 의미를 부여하였을 것이다.54) 다음의 기록을 보면 결국『흠흠신서』는 정약용이 바란 바대로 널리 읽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다산의 저작은 하나도 간행하여 배포된 것이 없고, 다만 사사로이 서로들 책을 그대로 베껴서 단종(單種)으로 각각 흘러 다니고 있었다.『흠흠신서』․『목민심서』서의 경우, 이 두 책은 형사소송이나 지방행정에 더욱 절실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당론이 다른 집에서도 값진 책으로 보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미 수백본이 나돌고 있는데 어로불변(魚魯不辨)이 되지 못한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되고 빠진 것이 많아서 읽을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었다.55)
위의 글에서는『흠흠신서』와『목민심서』가 당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심희기는 위의 글과,『흠서요개(欽書要槪)』,『흠서철영(欽書掇英)』등,『흠흠신서』에서 주요 부분이 발췌된 책과 다산의 설을 논박하는 의견이 담긴『흠서박론(欽書駁論)』56)이 편찬된 것 역시『흠흠신서』가 어느정도 유통되었고 실무 지침서로 활용된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1905년과 1907년 두 번에 걸쳐 출판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57)
53) 聽事之暇明啓此書以引以翼爲洗寃錄大明律之藩閼則推類充類庶亦有裨乎審擬而天權不誤秉矣.『欽欽新書』序.
54) 六經四書以之修己一表二書以之爲天下國家所以備本末也. 「自撰墓誌銘」, 集中本.
55) 茶山所著一未刊布而私相鈔寫單種各行至於欽牧兩書尤切於吏治獄訟故雖論議異趣之家無不珍藏今已數百本而但魚魯訛缺不可讀文燮尤頑鄙無識賣其全稿. (황현 저, 이장희 역,『매천야록上』, 명문당, 한국고전문학사상명저대계 11, 2008, 194~195쪽).
56) 심희기, 앞의 논문, 61쪽.
2.2. 관직 참여의 좌절과『흠흠신서』편찬의 의미
『흠흠신서』의 편찬을 차근차근 준비한 정약용의 태도를 살펴보면, 정약용이 국가의 형정서 편찬 작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던 미련이 남았음을 알 수 있다. 유재복의 연구에 따르면『흠흠신서』는『事案』(1790~1794)-『흠형전서』(1807~1816)-『명청록』(1807~1818)-『흠흠신서』(1822)의 단계를 거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58)『흠흠신서』의 최초 단계인『사안』59)이 이루어진 시기는 정약용이 예문관 검열로 어제 편찬에 관련된 문서들을 열람할 수 있던 시기였으며, 이때에는 규장각에서 1787년에『심리록』10권을 편집하여 정조에게 처음으로 바친 후에 계속『심리록』의 편찬 작업이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이 시기에 정약용이 정식으로『상형고』나『심리록』의 편찬 관련 작업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으므로,60)「상형추의」서(序)에서 한림시절「상형고」를 읽은 적이 있다고 밝힌 것처럼61), 관련 자료를 열람하면서 따로 판례서의 편찬에 대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57) 심희기, 앞의 논문, 62쪽.
58)『事案』의 113건의 판례 중 67건의 판례가『흠흠신서』의「祥刑追議」편에 수록되었고,『欽刑典書』의 13개의 항목 아래 48건의 판례 중 5건을 제외하고 모두「상형추의」편과「剪跋蕪詞」편에 흡수되어 있으며,『흠형전서』가『흠흠신서』의 편찬 이전의 것이라고 한다. (유재복, 앞의 논문, 183쪽.)
59)『事案』에는 정약용의 의견이 수록되지 않았다고 한다. (유재복, 앞의 논문 참조.) 따라서 유배된 이후 채제공과 정조의 죽고 난 후 관직으로의 진출이 불가능하기 쉬우므로,『흠형전서』의 편찬이 본격적인 사찬 형정서를 위한 작업에 도입한 것인지는 이후의 연구를 통해서 분명히 밝혀볼 필요가 있다.
60) "위의『祥刑考』3권은 내가 정사년(정조 21, 1797) 봄에 상의 명을 받들고 찬술한『상형고』초본(草本)이다.『상형고』는 그 양이 아주 방대하므로, 이 초본 3권은 비유하면 마치 바닷물의 한 표주박 물과 큰 솥의 한 점 고기에 불과한 것이다"(右祥刑攷三卷臣於丁巳春所嘗承命撰次之草本也祥刑攷編帙浩穰此其海水之一蠡大鼎之一臠也.『與猶堂全書』,「跋祥刑攷艸本」, 한국문집총간.) 본고에서는『흠흠신서』이외의『여유당전서』의 인용문의 본문과 역주를 한국문집총간본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 수정․보완하였다.)
이후 정조의 왕명을 받고 1797년『상형고』의 편찬 작업에 직접 참여하였을 당시 정약용의 직책은 교서관이었는데, 주위의 견제를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겠다는 소(疎)를 올리고 곡산부사에 좌천되었지만, 재임시절 황해도에서 일어난 의심스러운 옥사를 훌륭히 재조사한 공으로 입직한다. 그러나 입직 이후 누적된 소송사건을 공정히 처리하며 왕을 야대하면서까지 총애를 받아 반대파들이 날카로워졌다고 한다.62) 따라서 형조참의가 된 후 곧바로 또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므로 정약용이『심리록』,『상형고』와 같은 당시 관찬 형정서의 편찬 과정에는 더 이상 관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약용이 관직을 떠난 이후 그 동안 진행되어온『심리록』은 완성되는데, 박병호의 해제에 따르면, 현재 확인되는『심리록』의 이본은 총 5종이며63), 이 중『심리록』완고본(完稿本)과『심리록』규1770본은 홍인호(洪仁浩)64)와 홍의호(洪義浩)65)형제에 의해 따로 작업되었던『심리록』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추정한다.
홍인호는 이미 규장각에서 진행하던『심리록』의 작업과정에 투입되어『심리록』의 편찬과 간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으며, 홍인호의 사후에는 동생 홍의호가 임무를 이어받았다. 그런데 규장각의『심리록』작업에도 참여했던 홍인호, 홍의호 형제는『홍재전서』에『심리록』26편이 수록완료 된 이후에 자신들의 심리판부 16권을 따로 간행하려 하였다.
61) 舊在館閣曾已較閱流落以來不復覩記近有人就祥刑考中選公案數百以示.『欽欽新書』,「祥刑追議」, 序.
62) 금장태,『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이끌리오 2005, 141쪽.
63) 박병호의『심리록』해제에 따르면『심리록』의 이본은 다음의 5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필사본 3종,『홍재전서』수록 인쇄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 장서각(藏書閣)필사본이 있다. 규장각 소장 필사본은 각각 다음과 같다. 규장각 소장 고5120-12본(本)(완고본(完稿本)), 규장각도서 규1770본, 규장각 도서 규5792본. 본고에서『심리록』의 편찬 양상을 정리한 것은 박병호의『심리록』해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64) 홍인호(洪仁浩)(1753~1799):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원백(元伯)이다. 참판을 지낸 홍수보(洪秀輔)의 아들이다.
65) 홍의호(洪義浩)(1758~1826):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양중(養仲), 호는 담녕(澹寧)이다. 홍인호의 아우이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심리록』의 이본들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밝혀보아야 할 사실이지만 규장각에서 국가 편찬사업으로 진행되는『심리록』을 진행하면서도 따로 심리판부를 편찬하여 간행하기를 바란 이유는66) 편찬에 관여한 관리들 간의 관점이나 서로 편찬을 통해 얻고자 했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홍재전서』의『심리록』은 명찬(命撰)이 아니라 "어정(御定)"으로 분류되어 있어67) 편찬자는 정조가 된다. 따라서 정조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투영되었을 것이다. 또한『홍재전서』의 간행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심리록』홍재전서본이 편집되어 수록되는 방식이 홍인호․홍의호 형제의 의견과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이들은 규장각에서 편찬되어『홍재전서』에 수록된『심리록』보다 자신들의 견해가 보다 주도적으로 투영되는 심리판부를 남기고 싶어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판례서의 사료(史料)적 성격이 각종 사안의 가치판단 여부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의 글은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재판기록의 사료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너희들이 끝내 배우지 않고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면, 내가 지은 저술과 간추려 뽑아 놓은 것들을 장차 누가 모아서 책을 엮고 바로잡아 보존시키겠느냐.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는 나의 글이 끝내 전해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내 글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대계(臺啓)와 옥안(獄案)만을 의거해서 나를 평가하게 될 것이니, 나는 장차 어떠한 사람이 되겠느냐. 너희들은 아무쪼록 이 점을 생각해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써 나의 이 한 가닥 문맥(文脈)이 너희들에게 이르러 더욱 커지고 더욱 왕성해지게 하여라. 그렇게 되면 훌륭한 집안의 좋은 벼슬도 이러한 청귀(淸貴)함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를 버리고 도모하지 않느냐.68)
66) 이들 형제의『심리록』은, 1802년(순조 2) 7월에 16권으로 정리되어 순조에게 바쳐진 후 간행을 약속받지만『홍재전서』처럼 출간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박병호, 앞의 해제 참조.)
67)『군서표기』에 모두 史部로 분류되어 있는데,『추관지』와『상형고』는 명찬(命撰)으로『심리록』은 어정(御定)으로 분류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68) 汝輩遂不學自暴則吾所爲著述撰定將誰收拾編次刪正存拔耶旣不能然是吾書竟不傳吾書不傳則後世之人但憑臺啓獄案以議吾矣吾將爲何如人耶汝須思念到此奮勵向學使吾一些文脈至汝益大益昌卽弈世軒冕不足以易此淸貴矣何苦捨此不圖.「寄二兒」,<壬戊十二月卄二日康津謫中>.
윗글은 정약용이 1802년 강진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이 편지는 정약용이 절박한 심정으로 글쓰기 작업에 매달리는 와중에 쓴 것인데69), 사헌부․사간원의 대계(臺啓)와 자신이 죄인으로 결정된 옥안(獄案)에서 왜곡된 자신에 대한 평가가, 자신의 저술을 통해 정당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규장각에서 진행되던『심리록』에 참여하면서 개인적으로 심리판부를 편찬한 홍인호와 홍의호 형제는 정약용과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공서파(攻西派)70)의 인물들이었으며, 정약용과 형정 처리과정의 관점이 달랐을 확률이 높다.71)
따라서 정약용도 이러한 정치적 상황의 영향으로 관리로서의 뜻을 제대로 펴기 힘든 상황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편찬서에 더욱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며, 관찬서의 편찬에 참여하기가 어려워지자 개인적인 판례서를 편찬하려는 동기부여를 받았을 것이다.
『흠흠신서』의 내용을 살펴보면『심리록』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자신이 참여했던『상형고(祥刑考)』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이것을 바탕으로「상형추의(祥刑追義)」를 편찬한다는 바를 밝히고 있다. 정약용이 참여한『상형고』는 정조가『심리록』과 함께 형정에 활용하였으므로72), 당시 정약용은 그 누구보다 정조의『심리록』에 대한 애정과 작업 내용을 소상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흠흠신서』에서는 자신이 참여했던『상형고』73)만의 편찬 정신을 잇고 있다고 밝히는 점도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 한다.
69) "나는 천지간에 외롭게 살면서 의지하여 운명으로 삼는 것은 오직 문묵(文墨)일 뿐이다. (吾孑立天地所依爲命唯文墨是已.)“
70) 진산사건 이후 홍낙안, 이기경, 강준흠 등이 채제공 직계를 서학 신봉자집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청남 정파에서 떨어져 나가 앞서 나간 목만중 등과 결합했는데 이들을 공서파(攻西派)라고 한다. 공서파는 이가환, 정약용, 권철신, 이승훈, 홍낙민 등을 천주교 신봉자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사실은 이들이 채제공의 뒤를 잇는 차세대 집단이기 때문에 공격한 것이라고 한다. ( 박광용,『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5, 참조.)
71) Ⅳ-1에서 분석한 <수안군 김일택 사건>에서 홍인호는 정약용의 의견에 반대한다.
72) "정조는 등극한 이후로 특별히 의금부와 형조로 하여금 결옥안(決獄案)을 석 달마다 수정하여 아뢰는 규정을 새로 두어『상형고』,『심리록』과 더불어 옥안(獄案)을 녹계(錄啓)하도록 하였다. 그러고서도 또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여 한 해 동안 판결한 죄수들을 분등(分等)하여 출도(出都) 이상은 침전에다 간직해 두게 하였다." (御極以後特使王府司寇刱置決獄案三朔修啓之式與祥刑考審理錄錄啓案猶且瞿瞿一歲之決囚分等出都以上藏諸寢殿.『弘齋全書』卷四十六, 批五.)
유배 이후에도 정약용에게 '어떤 이'가『상형고』를 보였고, 그것을 바탕으로「상형추의」를 저술한다고 밝히는 것을 보면, '어떤 이'는『상형고』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거나 열람할 수 있었던, 정약용과 가까운 인물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정약용은 관직을 벗어난 후에도『상형고』편찬을 이어가는 것은, 결국 정약용은 더 이상 적극적으로 형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였지만,『흠흠신서』를 통해 형정 관리로서의 전문성을 인정받았으며, 당대의 형정을 비평할 수 있게 되었다. 제도권에서 억울하게 쫓겨난 선비 정약용은 인명사건 처리의 기록과 분석에 그치지 않고, 관리들의 실정을 포함한 사회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본인의 가치관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찬 형정서인『흠흠신서』를 통해 정약용은 제약받지 않고 확대된 담론을 담을 수 있었다.
73)『상형고』는『흠흠신서』에 100권,『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28권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공교롭게도『추관지』나『심리록』과 달리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심재우,「審理錄硏究: 正祖代 사형범죄 처벌과 사회통제의 변화」,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논문, 2005, 74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