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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피脫皮”는 절지동물이 예전 외골격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외골격을 만들어내는 과정Ecdysis이나 파충류와 양서류가 예전 피부를 벗는 과정Molt을 가리킵니다. 조류와 포유류 가운데 일부가 계절에 따라서 피부 부속기관에 속하는 털을 가는 과정도 생물학적으로는 탈피 가운데 하나입니다. 탈피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바다 가재Lobster는 마치 갑옷 같은 대단히 단단한 갑각 곧 껍데기로 온 몸이 싸여 있습니다. 무게는 보통 500g에서 1kg 정도 나가지만, 무려 20kg이 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몸은 머리가 다섯 마디입니다. 중간 부위인 가슴은 여덟 마디입니다.
배는 여섯 마디입니다. 총 열아홉 마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디는 갑각甲殼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각 마디를 연결해 주는 이음새 부분은 대단히 얇고 부드럽습니다. 몸을 자유롭게 굽히고 움직이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호흡은 가슴 양쪽 갑각 아래에 있는 아가미를 통해서 합니다. 특히, 머리 앞부분에는 집게발이 달려 있는 굵은 다리 한 쌍이 있습니다. 집게발 가운데 하나는 대단히 큽니다. 먹이를 으깨는데 쓰이는 굵은 이가 도드라지게 돋쳐 있습니다. 작은 또 하나의 집게발은 주로 먹이를 찢는데 쓰이는 날카로운 이가 도드라지게 돋쳐 있습니다.
어떤 쪽 집게발이 크냐에 따라서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로 구별합니다.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른쪽 집게발이 크면 오른손잡이로, 왼쪽 집게발이 크면 왼손잡이로 부릅니다. 10kg 정도 나가는 바다 가재는 집게발로 사람의 팔을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성장하는 동안에는 갑각을 벗어버리는 탈피를 쉬지 않고 반복합니다. 알에서 부화한 지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첫 번째 탈피를 통해서 갑각을 벗습니다. 이후, 한 달 사이에 세 번씩이나 더 탈피를 반복합니다. 문제는 대단히 단단한 갑각 곧 껍데기입니다.
일단 한 번 크기가 결정되고 나면 더 이상 커지지 않습니다. 그 상태로 쭉 유지됩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면서 쉬지 않고 자라는 안쪽의 생명체를 하루가 다르게 압박합니다. 당연히 대단히 불편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그러다가, 갑각이 속으로부터 가해지는 압력을 받아서 미세한 틈을 보이기 시작하면 곧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태가 되면 탈피가 시작됩니다. 바다 가재는 먼저 포식자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안전한 바위 밑으로 숨어듭니다. 미세하게 벌어져 있는 갑각 사이를 최대한 넓히기 위해서 근육을 쉬지 않고 반복해서 꼼지락거립니다.
틈이 충분히 벌어졌다고 판단될 때, 빠져나옵니다. 약 7분에서 15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하지만 바다 가재에게는 견디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 따릅니다. 실제로, 이 탈피 과정에서 죽는 개체가 한 둘이 아닙니다. 비록 탈피에 성공했다고 할지라도 움직일 힘조차도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됩니다.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갑각도 갖추지 못한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연약한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상태가 됩니다. 천적에게는 포식할 수 있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놓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합니다.
탈피와 함께 시작된 호르몬 활동으로 분비된 단백질Chitin質이 단단한 갑각이 될 때까지는 숨어 지내는 이유입니다.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피하는 과정에서 죽는 개체가 전체의 10-15% 정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힘겨운 이 탈피 과정이 성장기에 해당하는 처음 5년 동안에만 무려 스물다섯 번씩이나 반복됩니다. 이후, 해마다 반복됩니다. 탈피에 성공하게 된다면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단단해진 갑각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드넓은 바다를 마음껏 누비며 100년 가까이 살 수 있습니다. 실패하면 그대로 끝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갑각이 주는 편안함에 길들여져 탈피를 위한 골든타임Golden time을 허송세월하며 보내는 바다 가재가 있기도 합니다.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진 갑각에 완전히 갇히는 꼴이 됩니다. 견디기 힘든 압박을 받게 됩니다. 세균에 감염되기도 합니다. 갑각 안에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바다 가재에게 있어서 끔찍하고 쓰라린 탈피는 성장과 생명 연장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반드시 직접 맞닥뜨려야합니다. 직접 겪어내야 합니다. 벗어내야 합니다. 그때, 지금보다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도약跳躍할 수 있습니다.
한편, 유대 랍비인 동시에 정신과 의사인 그Abraham J. Twerski는 만에 하나 바다 가재에게도 의사가 있다면 견디기 힘든 강력한 압박을 느끼는 순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신경 안정제를 처방받기 위해서 의사에게 달려갈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자신을 절망으로 몰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으로까지 몰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껍질을 벗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당장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임시방편만 찾아다니고 있는 현대인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꼬집었습니다.
특히, 그는 “바다 가재는 자랄수록 (단단한) 껍데기가 몸을 점점 조여 오는 불편한 상황에 놓입니다. 그러면 포식자들(의 위험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안전한 바위 밑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껍질을 (미련 없이) 버리고 새로운 껍질을 만듭니다. 시간이 지나서 몸이 또 커지고 새 껍데기가 불편해지면 똑같은 과정을 수도 없이 많이 반복합니다.”, “불편은 바다 가재가 자랄 수 있도록 자극을 줍니다...불편 (곧 고난)은...당신이 성장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불편을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그것을 통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불편한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사람은 자신을 단단히 감싸고 있던 고질병적인 사고, 지극히 이기적인 습관, 죄 된 행동 패턴을 벗어버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한 단계 더 뛰어오르고 성장하기 위해서 도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契機입니다. 새로운 변화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강력한 온갖 천적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은 물론 마음껏 즐기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더 크고 단단한 갑각을 입기 위한 성장통成長痛입니다.
실제로, 탈피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한 단계 더 성장하면 곧 달라지면, 거듭나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사람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바람직하고,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주는 복된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골3:8a)라고 외쳤습니다. “이제는”은 불신앙을 버렸을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거듭났을 때를 가리킵니다. “모든 것”은 땅의 지체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을 사는 동안 누구나 다 반드시 맺을 수밖에 없는 온갖 죄의 열매들을 가리킵니다. 전후의 문맥에 따르면, 음란입니다. 부정입니다. 사욕입니다. 악한 정욕입니다. 탐심입니다.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음행입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이 해당됩니다. 하나같이 바르지 못합니다. 또 무제한적인 소유욕입니다. 탐심이 해당됩니다. 단어 하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탐욕貪慾입니다. 이미 충분히 가졌지만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 싶습니다. 불의와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가지려고 몸부림칩니다. 세상 전부를 다 가져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가질 수만 있다면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영혼까지도 얼마든지 팔아버립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못할 짓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장사치들은 이미 누구보다 부유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목구멍까지 차올라와 있었던 탐욕을 채우기로 작정했습니다. 광활한 우주조차 품을 수 없는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가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나님께서 희생제물을 드릴 수 있다고 사기 쳤습니다.
각종 세금과 성전 장사를 통해서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렸습니다. 그것을 지적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서 아주 지워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로마에 대한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정치적인 누명을 씌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6:24)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당신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불신앙이었습니다. 우상숭배였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죄였습니다. 죄罪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죄는 과연 무엇일까요? 도덕과 윤리적인 문제일까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행위일까요?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외면한 것일까요? 죄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가장 좋은 천국과 가장 나쁜 지옥이 결정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안에 있는 각종 나무 열매들은 얼마든지 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큼은 먹지 말라고 금지하셨습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섬뜩한 경고까지 덧붙이셨습니다. 그렇다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자체가 특별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나무 열매에 먹는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맹독이나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동산 안의 다른 나무들과 같았습니다. “열매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죽는다.”라는 하나님의 금지 명령이 붙어 있었다는 의미에서 볼 때만 특별한 나무였습니다. 당연히 나무 열매가 아니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중요합니다. 나무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핵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명령에 기꺼이 따라야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다가 징계를 받고 쫓겨난 사탄을 너무 쉽게 보았습니다.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습니다. 은밀한 유혹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불가항력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거짓말에는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경고는 아예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영원한 죽음으로 몰아붙이기 위하여 기회만 노리는 사탄을 섬기며 찬양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바라보았습니다. 희한한 일이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아니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먹음직스러웠습니다. 직역하면 “먹기에 좋았다.”입니다. “아름다웠다, 복스러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긍정적인 상태를 완벽하게 다 포괄합니다. 최상급입니다.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그만큼 먹음직스러웠습니다. 또 보기에 좋았습니다. 직역하면 “눈으로 보기에 즐거웠다.”입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쾌락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는 의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바라보는 하와의 눈이 감출 수 없는 탐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는 의미 역시 포함합니다. 또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지혜롭다שׂכל(사칼)”는 “완전하다, 통달하다, 형통하다, 흠모하다.” 등의 뜻을 포함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만 하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리게 될 것이라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착각에 사로잡혔다는 의미입니다. “탐스럽다חָמַד(하마드)”는 “부러움에 바라다, 대단히 탐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다, 욕망하다.” 등의 뜻을 포함합니다.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지 않을 도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하와의 열망과 의지가 얼마나 강렬했었는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명령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다분히 의지적이었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더 이상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탐욕에 눈이 완전히 매몰埋沒된 그들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했던 관계를 완전히 깨뜨리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 자유 의지를 사용했습니다. 죄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 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6:6-7)라는 증거대로, 가장 귀한 희생제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일 년 된 송아지를 드린다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강같이 흐르는 기름을 드린다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독자를 드린다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드린다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이 섞인 수고와 노력과 희생과 헌신을 드린다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싼 강대상을 바쳐도,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첨탑 곧 십자가를 세워도, 못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본 사람은 다시 찾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하고 웅장하고 거대한 벽돌집 곧 예배당을 지어 봉헌한다 할지라도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누구도 가지 않으려는 오지의 선교지로 들어가서 자신의 인생 전부를 투자해도,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드려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방법을 남김없이 다 동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아있는 죄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발생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관계에서는 죄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발생한 죄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오직 자신 하나만을 위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아담과 하와의 죄는 그들만의 죄가 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입니다. 실제로, 저와 여러분도 일상 속에서 마치 하루 세끼 밥을 챙겨 먹듯 수시로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자신이 주인인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은 절대로 아니라는 듯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지극히 먹음직스럽고,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까지 한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탐욕에 완전히 찌들어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 기꺼이 따르며 순종하기보다는 내가 보기에 좋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절대로 아니라고 손사래 치며 변명하지만 삶에서 하나님,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찾기란 그야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보다는 나, 내 가족, 내 자식들, 내 후손들을 위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와 가족을 위한 삶이 무조건 틀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와 가족을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보다 먼저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같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또 의지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죄의 현상들입니다.
유대인 랍비Jonathan Sacks가 “랍비가 풀어내는 창세기Covenant & Conversation: A Weekly Reading of the Jewish Bible, Genesis, the Book of Beginnings”라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자유는 최고의 높이로 오르거나 최하의 깊이로 낮아지게 만들 수 있다.”라고 주장한 대로, 죄는 자유의 남용에서 비롯됩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삶과 죽음이 결정됩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에 들어갈 수도 있고, 영원한 죽음과 저주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도 있고, 지옥 불구덩이라는 가장 낮은 자리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자신을 적나라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는 없는지 확인해 볼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위해 살고 있다면, 만족을 모른 채 끝없이 타오르는 탐욕을 추구하고 있다면, 무늬만 화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솔직하게 인정해야합니다. 회개해야합니다. 자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로부터 당장 돌아서야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모든 것을 조금도 남기지 말고 던져 버려야합니다. 아무리 많은 고통과 슬픔과 희생과 손해가 따르게 된다 할지라도 탈피脫皮하고 또 탈피해야합니다.
벗어버리고 또 벗어버려야 합니다. 삶의 현장 속에 넘쳐나는 문제 해결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몸부림쳐야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면 당연히 그에 어울리는 삶이 따릅니다.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3:8b)라는 사도의 외침대로, 분노를 쉽게 외부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은밀한 분노를 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을 훼방하거나, 면전에서 욕하거나, 속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리에 함께하지 않은 이웃을 쉽게 비방하지 앉을 수 있습니다.
음탕하거나 버릇없는 말을 아무렇게나 함부로 쏟아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극히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의 능력으로는 죄로부터 탈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인생을 굽어보시며 지각이 있어 당신을 찾는 자가 있는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2-3)라는 시인의 한탄은 사실입니다. 의도적이며 의지적인 배교, 타락, 온갖 종류의 우상숭배 등으로 얼룩져 있는 성민 이스라엘의 역사는 물론 인류 역사를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입니다. 이론적으로 볼 때, 바다 가재는 탈피를 하면 할수록 껍데기가 단단해집니다. 번식력도 좋아집니다. 노화로 죽는 일은 없습니다. 죽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천적에게 먹힐 때입니다.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이유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을 한 단계 성장시켜주는 탈피에 실패하거나 포기했을 때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적인 죄에게 완전히 사로잡혔을 때 죽습니다. 죄로부터의 탈피에 실패하거나 스스로 포기하고 아예 눌러 앉아있을 때 죽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6:6-7),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라는 외침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 안에서 하나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았습니다. 어떤 상황에 몰린다 할지라도 반드시 그렇게 여길 수 있어야합니다.
중세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동시에 신학자인 그St. Augustine는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Dilige et fac quod vis”고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침묵하려면 (하나님) 사랑으로 침묵하라. 말을 하려면 (하나님) 사랑으로 말하라. 남을 잡아 주려면 (하나님) 사랑으로 바로 잡아주라. 용서하려면 (하나님) 사랑으로 용서하라. 당신 마음 저 깊숙한 곳에 (하나님) 사랑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믿으려면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믿으라.”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선물로 받은 완벽한 자유를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지극히 죄 친화적이고, 죄의 경향성이 농후하며, 작은 죄 앞에서도 너무나 허무하고 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죄 곧 나, 나 곧 죄”에 불과한 자아라는 갑각으로부터 단 하루라도 빨리 탈피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평생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탐욕이라는 우상 숭배를 완벽하게 탈피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하고 안전하며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까지 인도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갑각으로 무장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복된 삶, 저와 여러분을 순식간에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는 죄라는 천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는 복된 삶,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환난과 시험을 넉넉히 참고 견디며 이기는 복된 삶, 허락해주신 모든 일을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당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할 수 있는 복된 삶, 무엇보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가장 안전하고 단단한 갑각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