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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간의 공백을 딛고 재기를 노리는 조진호는 미국 야구와 자신의 삶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했습니다 |
4년간의 원치 않았던 공백을 거친 조진호(32)는 다시 야구공을 잡았습니다. 올 시즌에는 다시 국내 프로야구 1군 무대에 복귀한다는 목표로 삼성 라이온스의 경산 훈련장에서 추위를 쫓는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몇 주전 주말 친구의 결혼식 때문에 잠깐 서울에 올라온 조진호를 만났습니다. 콩나물 해장국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조진호는 곧바로 다시 경산의 훈련장으로 내려갔습니다.
미국 마이너 시절부터 숨겨졌던 이야기들, 국내 복귀와 그리고 실형을 받았던 일들, 공익 근무를 하며 힘겹게 했던 재활 운동, 그리고 미국 야구에 대한 그의 소감과 후배들에 대한 조언, 아직도 남은 야구의 꿈 등을 소개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삼성 라이온스의 경산캠프에서 계속 훈련을 하고 있다. 구단에서는 신인 위주로 훈련을 하지만 나도 신인의 자세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구단에 부탁해서 훈련하고 있다. 신인들과 재활 훈련 하는 선수들 일부 있는데 무릎 수술 받은 심정수 선수도 나와서 운동한다. 나는 트레이너와 따로 개인 훈련을 하고 있다.
조진호는 2006년 1월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받았습니다 |
-팔꿈치 수술 받은 지 2년쯤 되는데 상태는 어떤가.(2006년 1월에 수술)
▶공을 꾸준히 던지고 있다. 나쁜 일로 야구를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이었고, 야구에 다시 도전하지 않으면 살면서 너무 후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일이 터졌을 때부터 반드시 재기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주위에서 좋은 이야기들 많이 해줘 힘이 됐다.
-팔꿈치는 언제부터 아팠나.
▶2003년 국내에 복귀해 SK에서 4승5패하고 그 다음해 스프링 캠프에 갔는데 아프기 시작했다. 아, 2003년 시즌 말에 조금 아프기 시작했는데 쉬면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스프링 캠프 가서 딱 던지는데 아프기 시작했다.
-미국에 있을 때는 괜찮았나.
▶잠깐 아픈 적은 있었다. 1999년 양키스와의 시범 경기를 던지는데 약간 아팠다. 그렇지만 너무 중요한 경기이고 참을만해서 그냥 던지려고 했는데 와! 정말 귀신이더라. 잠깐 불편한 동작을 알아채고 곧바로 투수 코치랑 감독이 올라오더니 공을 달라고 하더라. 그런 면에서 정말 아쉬움이 많다. 참 중요할 때 꼭 아파가지고.......
난 진짜 계속 던지려고 했는데 쉬라고 하더라. 그래서 전기 치료 같은 것을 한번 했다. 스테로이드제인가를 직접 주사는 안 하고 뿌리고 전기 치료를 딱 한번 했는데 다 나았다. 그래서 다음 경기에 일정대로 던지겠다고 했지만 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10일 쉬고 나갔다. 그런데 슬라이더를 던지지 말라는 것이다. 내 주무기였는데. 포수도 사인을 커브와 패스트볼만 내고. 그래서 막 맞았고 그리고 트리플A로 간 기억이 있다.
-미국 진출 과정을 얘기해 달라.
▶처음에는 97년이었는데 양키스가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중간에서 에이전트를 하겠다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나에게 거짓말을 했었다. 테스트를 받고 미국에 갔을 때는 양키스에서는 진짜 관심이 많아 당장 가계약이라도 하자고 굉장히 적극적이었는데 빨리 판단하고 결정을 했으면 양키스와 계약을 했을텐데 정말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난항을 보이다가 협상이 깨졌다.
당시 나도 쌍방울과도 계약을 하지 못하고 고민했었는데 토론토와 샌디에고 등 갑자기 여러 팀에서 연락이 왔다. 그런데 98년 초 보스턴의 박진원씨와 레이 포인트빈트씨가 직접 한국까지 왔다. 그러면서 테스트를 하자고 했다. 잠신중학교에선가 실내에서 던졌는데 30개 정도 던지니까 레이씨가 그만해도 된다고 했다. 당시 겨울이라 다칠지 모른다며 그만 던지게 했는데 당시 내 슬라이더가 정말 좋았다.
그런데 별 말이 없길래 그냥 원광대학교로 내려갔는데 바로 다음날 계약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당시 나는 빨리 계약을 하지 않으면 98년에 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많이 초조했었다. 레드삭스는 처음에 80만 달러를 이야기했었다. 당시 에이전트도 없고 아버님도 편찮으시고 해서 앞뒤 가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 더 달라고 했더니 5만 달러를 더 주겠다고 해서 85만 달러에 계약을 했다. 인터컨티넨털 호텔 방에서 레드삭스에서 온 팩스를 받고 곧바로 사인을 했다. 협상이고 뭐고 없었다. 뒤늦게 한국 팀들에서 연락이 왔지만 난 이미 계약서에 사인을 할 후였다.
보스턴 시절 조진호는 최고의 유망주 투수였다가 부상 여파로 화려한 꽃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
-미국 처음 가서 해프닝도 많았다는데.
▶스프링 캠프를 한 달 정도 늦게 합류했다. 그래서 난 루키 리그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김)선우랑 (최)경환이 형은 싱글A에서 했는데 2주가 지나니까 캠프가 다 끝났다. 그런데 둘이 사라소타로 떠나고 나 혼자만 포트마이어스에 남으니 정말 막막했다.
룸메이트라도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혼자 남았는데 영어도 한 마디도 못하고 정말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그저 호텔방과 훈련장만 오갔다. 운동 끝나고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 그 마이너 음식을 억지로 조금 먹고는 버텼는데 정말 힘들었다. 운동 끝나고 러닝을 하면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 때 선우랑 가면서 컵라면 5개를 주고 갔는데 호텔에 가면 그것을 먹는 것이 낙이었다. 그것도 얼마나 웃겼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촌놈이었냐 하면 커피포트가 있었는데 난 그저 물을 받아놓으면 뜨거워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30분을 기다려도 물이 안 뜨거워지더라. 나중에 알아보니 위에서 붇더라.(웃음) 결국 수도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가지고 억지로 라면을 불려서 먹었다.
1주일쯤 후에 경환이 형이 전화가 와서 1층에 식당이 있다며 가서 햄버거나 치킨 이런 거 달라고 하라며 알려줘서 그때서야 음식들을 제대로 먹었다. 첨엔 배도 고프고 자려고 하면 그 따뜻한 곳인데도 몸도 으슬으슬거리고 어지럽고 정말 웃기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98년 시즌은 정말 좋았는데.
▶루키 리그에서 2주를 더 운동했다. 두 게임을 던지고 나니 곧바로 싱글A로 가라고 하더라. 그때부터 성적이 너무 좋았다. 첫 게임만 지고 3연승을 하고 나니 때마침 더블A와 메이저리그 팀이 더블A 트렌턴에서 팬들을 위한 친선 경기가 있었다. 그런데 나더러 메이저리그 팀의 선발로 나가라는 것이다. 처음 루키리그에서 던질 때는 패스트볼이 88마일 정도로 시작했는데 계속 좋아지더니 싱글A 막판에는 94마일까지 나왔다. 그래서 정말 좋은 기회다 싶어서 마운드에 올랐는데 1회에 왼손 4번 타자에게 3점 홈런을 맞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고집이 있었다. 그 타자가 다시 나왔는데 계속 직구만 던지면서 삼진을 잡았다. 그리고 5회까지 무실점으로 던졌다.
-그리고 더블A로 갔나?
▶그 경기가 끝나고 싱글A 사라소타로 돌아갔는데 감독이 더블A로 다시 가라는 것 아닌가. 금방 트랜턴에서 날아왔는데 또 곧바로 짐을 챙겨 트랜턴으로 돌아갔다. 싱글A에서 한달 하고 다시 한 단계 올라간 것이다.
그런데 자동차로 8시간이나 떨어진 포틀랜드로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경기에 던지지도 않았는데 거기까지 가서 두 게임을 보고는 다시 트랜턴으로 돌아갔다. 정말 힘들더라. 버스를 탔는데 아무도 모르지, 자리는 운전석 바로 뒤의 좁은 자리 하나만 남아있었다. 바로 옆쪽에는 감독이랑 코치가 앉아 있고.
그런데 8시간 동안 화장실 갈 때를 빼고는 음악을 들으면서 정자세로 꼼짝 안하면서 갔었다. 랄프라는 투수 코치가 계속 나를 쳐다봤는데 그런 내 자세가 좋았는지 정말 잘 해주었다.
-더블A에서도 승승장구 했는데.
▶첫 경기에서 3이닝을 무실점으로 잘 던졌는데 땅이 딱딱해서 그랬는지 발목이 약간 아팠다. 그래서 발목은 잠깐 만졌더니 또 곧바로 빼는 것이 아닌가. 아, 이러면 안되는데 또 싱글A로 내리려나 하면서 조바심이 생겼는데 그냥 다음 경기부터는 발목에 테이핑을 하고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원정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뒀다. 그때부터 승승장구였다. 5게임인가에서 3승 무패에 평균자책점이 0.87인가 그랬다. 그러니까 분위기가 확 달라지더라. 2승인가 하고나니까 버스 뒤쪽의 편한 곳의 한 자리 아예 다 비워 주더라. 정말 편하게 다녔다. 그러더니 트랜턴 지역 신문에서 기자들이 와서 사진도 막 찍고 그랬다. 그래서 이제 트리플A로 올라 가려나 했는데 갑자기 메이저로 올라가라고 했다.
-첫 해에 루키리그부터 메이저리그까지 올라갔고 그것도 9월 확장 로스터가 아니었는데.
▶7월초였다. 미국 독립기념일이니까 7월4일이었는데 화이트삭스전에 등판해 6이닝 1실점했다. 그런데 팀이 0-3으로 패하면서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1점은 카메론인가 하는 타자에게 홈런을 맞았다. 수비 잘하는 선수였는데.
(당시 화이트삭스에는 알버트 벨과 프랭크 토마스 등 쟁쟁한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한국 언론들도 대서특필한 그 게임에서 조진호는 8번 마이크 카메론에게 홈런으로 1점을 내줬습니다. 산발 6안타에 4사구 1개 삼진 2개를 잡았고, 투구수 77개에 스트라이크가 50개였습니다. 최고 구속은 150km가 나왔고, 61번을 달고 펜웨이파크 마운드에 올라 호투하고 교체될 때는 레드삭스 팬들의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닮은 점이 많아 제2의 박찬호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1998년 조진호의 레드삭스 데뷔전를 대서특필한 국내 신문입니다 |
-두 번째 경기에서도 홈런을 맞았다.
▶태어나서 처음 만루 홈런을 맞았다. 볼티모어전이었는데 에릭 데이비스에게 맞았다. 그런데 경기 전에 투수 코치랑 1번부터 9번까지 분석을 했는데 데이비스는 몸쪽 하이볼이 약점이라고 했다. 바깥쪽 슬라이더로 가다가 몸쪽 하이볼로 유인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첫 타석에서는 그렇게 해서 플라이로 잘 잡았는데 만루에서 포수가 자꾸 바깥쪽 직구 사인을 내는거다. 약점이 저게 아닌데 하면서도 던졌는데 중견수 글러브에 맞고 펜스를 넘어가버렸다. 원정 경기였는데 야구장 안에서 그렇게 귀가 따가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맛에 야구를 하는 것 같았다. 만약 저 함성 소리의 주인공이 나라면 얼마나 뿌듯할 것인가.
그렇게 4게임 동안 3패하고 다시 더블A 갔다. 결정적일 때 홈런을 맞은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98년은 정말 대단했는데.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초반부터 너무 좋았던 것이 역효과가 났다는 생각이 든다. 프로 생활이 처음이었는데 바로 메이저까지 간 것 아닌가. 단 1년이라도 마이너리그 한 팀에서 스케줄대로 5일 선발로 꾸준히 나가면서 내 몸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완전히 몸에 배게 운동하는 법을 익혔어야 했는데 너무 올라가고 올라가고 하다보니 정신이 없었다. 물론 야구장 마운드에 올라가면 혼신의 힘을 다해서 던졌지만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렇게 열심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다 너무 잘 되니까. 내 몸에 배게 모든 것을 만들어 놓고 어디를 가든 똑같이 하면 되는데 그것을 못한 것 같다.
-1999년은 어땠나.
▶스프링 때 약간 아파서 트리플A에서 시즌을 시작했는데 그래도 시작은 아주 좋았다. 5인 선발 중에 나머지도 괜찮았지만 내 성적이 제일 좋았다. 7승1패인가 그렇게 시작했다. 그런데 다른 애들이 차례로 빅리그로 가더라. 세 명이 그렇게 올라가니 정말 화가 났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화가 나서 경기를 열심히 던지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 팀에서 우리 선수 루 말로니를 두 번이나 맞추는 등 패싸움이 벌어졌다. 나도 뛰어나가 싸움을 하는데 투수 코치가 오더니 나를 잡고 말렸다. 그리고 나서 덕아웃에 들어갔는데 포수가 오길래 맞추자고 입을 맞췄다. 그래서 다음 이닝 첫 타자를 곧바로 맞췄고 바로 퇴장을 당했다. 퇴장당해 클럽하우스로 들어가는데 먼저 퇴장당한 말로니가 기다리고 있다가 고맙다고 하더라. 벌금을 500달러 맞았는데 동료들이 모두 모아서 냈었다.
-팀에서 어떤 조치가 있었을텐데.
▶내가 갑자기 성적이 들쭉날쭉하니까 당시 순회 투수 코치가 된 랄프 코치가 찾아와 감독 코치들과 모두 함께 미팅을 했다. 그래서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잘 던지는데도 나만 올라가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난다고 했더니 그러면 다음 경기에서 한번 보여줄 수 있느냐고 했다.
그 다음 경기는 메츠 트리플A와 붙었는데 98마일씩 던지던 옥타비오 도텔과 맞대결을 했다. 전날 가슴에 담이 왔는데 진통제를 먹으니 좋아져서 경기에 나갔다. 더블헤더 두 번째 게임이었는데 우리 타자들도 도텔의 공을 전혀 못쳐서 계속 0-0이었다. 그러다가 5회에 주자 1루에서 투수 땅볼이 나왔는데 도텔이 악송구를 하는 바람에 우리가 먼저 1점을 올렸다.
그런데 마지막 7회 초에 그만 역전이 되고 말았다. 주자 1,2루에서 제대로 꽂힌 스트라이크가 볼로 인정돼 볼넷이 됐고, 빗맞은 공을 우익수가 실수해서 놓치면서 2-1로 역전이 됐다. 결국 우리가 역전승을 거뒀는데 그 경기 후 바로 다시 메이저로 올라갔다. 그때가 6월 말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자마자 2연승을 했다. (조진호의 빅리그 첫 승리를 텍사스 레인저스를 상대로 거둔 것이었습니다. 토드 질에게 쓰리런 홈런, 이반 로드리게스에게 1점 홈런을 맞았는데 7-4로 승리했습니다. 날짜는 6월21일이었는데 조진호는 그 날짜는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내리 3연패를 하고나니 중간으로 돌렸다가 다시 선발로 하다가 그랬는데 양키스전에 구원으로 나갔다가 박살이 났다. 보스턴의 앙숙은 양키스 아닌가. 그 팀한테만 잘 던지면 마이너에 갈 일이 없는데 못하니까 다시 마이너로 갔다.
-그 후로는 메이저에 가지 못했는데.
▶2000년부터 몸에 이상이 생겼다. 처음에는 어깨 뒤쪽이 굉장히 아팠다. 그런데 말을 하지 못했고 그냥 이겨내려고 했다. 그런데 통증이 허리까지 내려가더라. 왜 찬호 형이 허리가 아팠다고 했는데 바로 그것이었다. 허리 아픈 것은 결국 팀에 이야기를 했는데 아픈 걸 1년 넘게 달고 살았다. 화장실에 앉으면 내 살 같지 않고 어깨를 젖히면 아프고. 그런데 MRI를 두세 번 찍었는데도 아무 것도 안 나왔다. 2000년 초에 메이저 DL에도 올라가고 했는데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무리를 했나.
▶그때가 내가 프로 3년차였고 한 시즌을 모두 소화하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두 경기 정도의 기간을 쉬고 곧바로 나가서 던졌다. 그런데 어깨가 너무 아팠다. 그렇지만 내 욕심도 있었고, 또 시즌 시작하자마자 고꾸라지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좀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면서 참고 던졌는데 결국 1년 넘게 갔다. 그 때부터 내리막을 걸었던 것 같다. 2000년에는 DL 후에 싱글A, 더블A, 트리플A를 거쳐 재활했는데 그 때도 참 정신이 없었다. 2001년에는 선발이 워낙 안 되니까, 3승10패인가 그러니까 후반기에 마무리를 시키기도 했다. 그 때 상훈이형이 마무리였는데 나중엔 나랑 같이 마무리를 하기도 했다 10세이븐가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결국 2002년 시즌 초반 40명 로스터에서 빠지고 중반에 방출되고 말았다.
(13게임 11선발에 2승6패 6.51이 조진호의 메이저리그 성적입니다.)
-국내 복귀를 결정한 이유가 있었을텐데.
▶결국 걸림돌은 군대였다. 내가 고집을 부려서 남았더라면 보증선 분들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민은 많이 했고 혹시 해서 보스턴에 남아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팀들도 모두 내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부르지 않았다. 어머니도 돌아오라고 하시고 그래서 결국 SK와 계약을 맺고 국내로 복귀했다.
-2002년 국내 시즌은 기대에 못 미쳤는데.
▶그땐 주위에서 기대도 정말 컸고 나도 너무 잘 하려고 했다. 너무 잘해야겠다는 심적인 부담감이 너무 컸다. 주위에선 미국까지 갔다 왔으니 기본적으로 10승을 하겠다고 했다. 첫 게임부터 정말 의욕적으로 했는데 그게 오버가 됐다. 볼넷 주고 무너지고. 결국 4승5패로 첫 시즌을 보내고 말았다. 여러 가지로 잘 풀어가지를 못했다. 2002년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들어가지 못한 것도 아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병역 파문이 터졌는데 그게 언젠가.
▶2004년 시즌 중반에 터졌다. 그리고 9월에 실형을 받았다. 당시 60명 정도 걸렸고 많은 선수들이 실형을 살았다.
-왜 그런 일을 하게 됐는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야구이고 야구를 못하면 정말 막막한 것 아닌가.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 당시에는 브로커를 만나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큰 잘못이라거나 죄를 짓는거구나 하는 생각을 못했다. 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판단이 안 들고 야구만 할 수 있으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남들도 다 하는데 나도 하자 그렇게 생각을 했다.
사실 처음에 한국 들어왔을 때는 1년 운동하고 바로 군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일단 한국에 오니 (유혹이)계속 오더라. 군대 어떻게 했냐며 쉽게 뺄 수 있다고 계속 유혹이 왔다. 나도 급한 상황이었고.
그런데 딱 터지고 나서 문제가 커지니까 내가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뼈저리게 들었다. 남자답게 죄 값을 치르고 나서 다시 야구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8개월 형을 받았는데.
▶단 하루도 빠지지 않는 정확히 8개월을 살고 나왔다. 처음엔 사실 집행유예 같은 것을 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8개월을 다 살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초범이고 하니 좀 봐주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다. 그런데 실형을 딱 받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데 정말 막막하더라. 아무 말도 못하고 헛구역질이 나오고 참담했다. 며칠 동안은 밥도 못 먹었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을 잡고 견뎠나.
▶며칠 마음고생을 하고 나니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다. 어차피 다 정해진 것 마음을 비우자고 생각하고 다이어트와 운동을 시작했다. 원래는 서울 구치소에서 있으면 팔꿈치 수술을 받으려고 했었다.(2003년 초부터 팔꿈치가 아파 전혀 던지지를 못했다.) 그런데 이감 조치가 나와 그것도 어려워졌고,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운동도 열심히 하고 일도 열심히 했다. 봉투 접는 일을 하고 일요일 빼고 하루에 한 시간씩 주어지는 시간에 운동을 참 열심히 했다. 30분은 달리고 나머지는 팔굽혀펴기나 다른 운동을 계속했다. 10kg 이상을 빼고 나왔다.
-나와서는 어떻게 지냈나.
▶한달 정도 공백이 있다가 공익 근무를 시작했다. 남인천 세무서에서 우편물 분류와 회의가 있으면 의자 정렬 등 잡일을 했다. 그리고 2006년 초에 김진섭 정형외과에서 팔꿈치 인대 접한 수술을 받았다. 그땐 팀 소속도 없었고 내 돈으로 수술을 했다. 야구를 다시 해야겠기에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년2개월 동안 근무를 하고 지난 9월에 소집해제가 되고 나서 경산에 가서 테스트를 받았다.
-그 동안에 운동은 어떻게 했나.
▶혼자서 꾸준히 했다. 헬스장을 다니고 병원에 가서 물어보고 레드삭스에서 트레이너하던 이창호 형이랑 자주 통화를 하면서 홀로 운동을 했다. 수술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팔꿈치를 필 수 있게 되면서부터 계속 운동을 했다. 그리고 올 해 초부터는 신임 서장님의 배려로 더욱 운동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지난 늦봄부터 동산고에서 공도 던지기 시작했다.
-수술 후 혼자 재활을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데.
▶정말 힘들었고 또 안 좋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공을 다시 던지기 시작하는데 어깨도 아프고 팔꿈치고 아프고 정말 아팠다. 그러나 수술을 받은 사람은 다 그렇고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고 하길래 참고 던졌다. 사실 투수 코치가 옆에서 동작이나 폼을 봐줘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니까 안 아픈 쪽으로 공을 던지다보니 폼이 엉망이 됐다.
경산에 가서 테스트를 받는데 내가 생각해도 ‘이거 선수도 아니네.’ 싶더라. 아픈 것을 참고 70개 정도나 던져야 몸이 겨우 풀리는 정도였다. 이래가지고 계약이 되겠나 싶었는데 내가 열정을 가지고 하는 것이 예뻐 보였는지 연습 게임 두 번 던지고 나서 삼성과 결국 10월에 1년 5000만원 계약을 맺었다.
-벌써 게임을 던졌다는 말인가.
▶대학교와 게임에 두 번 나갔었다. 첫 게임에 나갔는데 1회에 120km가 조금 넘게 나왔다.
1회에 박살이 나고 다음 이닝에는 스피드가 138km 정도 올라 그런대로 던지고 3회 투구수 50개까지 던지고 내려갔다. 그리고 두 번째 게임에 또 나갔는데 140km까지 나왔다.
사실 처음엔 내가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좀 무리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계현 코치님이랑 김현욱 코치님이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너무 보여주려고 할 필요 없고 몸 만든다고 생각하고 하라는 말씀을 듣고 차근차근 운동을 했다.
그리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나니 그제서야 내 폼이 완전히 선수도 아니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내가 느끼고 있던 바로 그 점이었다. 그래서 김현욱 코치님이랑 맨날 씨름을 했다. 괌에 훈련 가기로 한 것도 포기했고 어깨 정밀 검사도 받고 상태가 나쁘지 않아 이겨내면 된다는 결론이 나온 후로는 김현욱 코치님에게 1대1 과외를 한 셈이다. 이제 많이 좋아졌고, 통증도 거의 없다.
-하루 훈련은 어떻게 하나.
▶오전에 공 던지고 오후에 웨이트한다. 병원도 다니고 치료도 받고, 삼성에서 그런 것을 참 잘해 준다. 공은 하루 200개 정도 이틀 연속 던지고 하루 쉬고 이틀 또 던지고 그런다.
그 외의 시간에는 그냥 숙소에 있다. 책을 좀 많이 읽으려고 한다.
-미국 야구 이야기 좀 해보자. 가장 아쉬웠던 점은 무엇인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시즌을 치르면서 자기 관리를 확실히 몸에 배게 1,2년 정도 마이너리그에서 하면서 체계적으로 만들고 가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라고 생각한다. 말이 안 통하면 그 집단에서 소외가 된다. 어울리질 못하니까. 야구 선수로서 메이저리그 가서 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다면 영어 공부를 착실히 하라고 그런 말을 해주고 싶다.
-우리 어린 선수들이 여전히 미국 야구에 계속 도전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마이너 생활도 정말 험하고 힘든데.
▶그건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선 이겨내야 한다. 향수병에 걸린다 뭐 그런 것이 있으면 아예 꿈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게 나약한데 미국 생활을 어떻게 하겠나. 자기들이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도전하는 것은 참 좋다고 생각한다. 갔다 오더라도 아주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자꾸 많이 나갔으면 좋겠다. 꼭 어렵다고만 생각할 것도 아니다. 야구는 다 똑같다. 그러나 외적인 것을 잘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영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올 시즌에 몇 승을 하고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진짜로 갈망했던 것, 1군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것, 그것을 이루고 싶다.
-그래도 상황이 괜찮은 편 아닌가.
▶어차피 경쟁이다. 임창용도 빠지고 삼성 선발이 많이 무너졌다는 말도 하지만 어느 팀을 가던 다 경쟁이다. 프로 처음 시작할 때부터 다 경쟁이었고 그런 것을 이겨내는 것도 내 몫이다.
-장기적인 희망은
▶일단 욕심은 내년에 좋은 모습을 보이고 내가 만족할만한 성적이 나오면 좋겠다. 5년 정도는 현역 선수로 꼭 뛰고 싶다. 아직은 수술도 했고 통증도 조금 남았고 반신반의하지만 그런 생각 날 때마다 바로 바로 비운다. 한때 151km까지 던졌는데 팔꿈치 수술을 받으면 더 좋아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힘은 타고 났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해 도전해 보겠다.
-올해는 선발 마운드에서 볼 수 있겠다.
▶글쎄 그건 모른다.(웃음) 선발이 될지 구원이 될지, 들어갈 수 있을지. 난 선발을 하고 싶지만 그건 내가 정하는 것은 아니니까.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할 뿐이다. 지금은 한 70% 정도가 만들어졌고 아직은 약간 밸런스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많이 예전의 것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엉망인데 손목의 힘이나 감이 좋아 제구가 꽤 된다고 김현욱 코치님은 이야기하신다. 여러 가지를 잡아가면 더욱 좋아질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