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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10월 11일 금요일]
『대동야승』 제13권
[기묘록 보유 상권(己卯錄補遺 卷上)] [조광조를 죽이라는 상소]
○ 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 12월 14일 갑술 1번째 기사 1519년 명 정덕(正德) 14년
생원(生員) 황이옥(黃李沃)과 유학(幼學) 윤세정(尹世貞)·이내(李來) 등이 조광조 등의 사사를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러하였다.
"접때 성충(聖衷)이 스스로 깨달아 여덟 신하를 귀양보내시니, 중외(中外)가 모두 감복하여 ‘성명(聖明)이 요(堯)·순(舜)과 같으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풀의 덩굴이 뻗어가는 것이 걱정되면 서린 뿌리를 끊어야 하며 덩굴이 뻗으면 도모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인후(仁厚)에 여유가 있으나 강단에 부족하시고, 대신은 살육을 아뢰는 것을 어려워하나 먼 계책이 없으므로, 삼묘(三苗)의 찬축(竄逐)은 보였으나 양관(兩觀)의 주살(詄殺)에는 너그러웠습니다.
법을 굽혀 은혜를 펴는 것이 제왕으로서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나 죽을 죄인데도 용서하는 것은 조종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듯합니다. 정법(政法)은 우리 조종께서 만드신 것이고 후사(後嗣)가 지켜야 하는 것이니 전하께서 가벼이 변경하실 수 없고 신하는 더욱이 마음대로 변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크고 작은 죄를 결단할 때에 《대명률(大明律)》을 쓰는데, 《대명률》도 고황제(高皇帝)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조종의 법을 변란하는 신하가 있는데도 죽이지 않는 것은 조종을 업신여기는 것이고, 죄율(罪律)이 참형(斬刑)에 해당하는데도 낮추어 유형(流刑)에 처하는 것은 고황제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7∼8인의 죄지은 신하를 죽이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조종과 고황제를 이렇게 업신여기시니, 당사와 후세에서 전하를 어떤 임금이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주공(周公)과 관(管)·채(蔡)는 형제인데 주공이 죽였고, 석작(石碏)과 석후(石厚)는 부자간인데 석작이 죽였으나, 군자(君子)가 주공·석작을 순신(純臣)이라 일컬었으니, 그 대의(大義)에 의하여 친족을 멸한 것을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한무제(漢武帝)가 소평군(昭平君)을 죽일 때에 ‘한 아우 때문에 선제(先帝)의 법을 어긴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고묘(高廟)에 들어가겠는가?’ 하고 곧 법대로 논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거룩하신 전하께서 죄인을 죽이는 것을 아까와하여 도리어 주공·석작·한무제보다 못한 일을 하십니까?
신 등은 그 당(黨)을 갖추어 말하겠습니다. 조광조(趙光祖)·김정(金凈)·김식(金湜)·김구(金絿) 등 4인은 권세 있는 자리를 나누어 차지하여 노성(老成)한 사람들을 배척하고 후진을 끌어들여 요로에 벌여 놓고, 유용근(柳庸謹)·한충(韓忠)·정응(鄭譍)·박훈(朴薰)·윤자임(尹自任)·기준(奇遵)·박세희(朴世熹)는 조아(爪牙)가 되고, 최산두(崔山斗)·장옥(張玉)·이충건(李忠楗)·이희민(李希閔)·조광좌(趙廣佐)는 응견(鷹犬)이 되고, 안당(安瑭)·이자(李耔)·김안국(金安國)은 우익(羽翼)이 되었습니다.
형세로 서로 의지하고 안팎으로 서로 도우면서 날마다 폐지하는 것은 조종의 구법이요 날마다 끌어들이는 것은 일 만들기 좋아하는 신진이요 날마다 배척하는 것은 자기들과 배치되는 정인(正人)이었습니다. 무리를 나누고 당을 합하여 궤습(詭習)을 격렬히 양성하여, 아비를 비평하는 아들을 곧다 하고 형을 비평하는 아우를 공정하다 하였습니다.
위로는 조종의 법을 고치고 가운데로는 전하의 조정을 흐리게 하고 아래로는 우리나라의 윤리를 무너뜨렸으니 신하로서 이런 큰 죄를 졌는데 목 베지 않고서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춘추(春秋)》는 성인(聖人)의 형서(刑書)인데 신하로서 반역할 마음을 가진 자는 《춘추》가 죽였거니와, 신 등이 목 베어야 한다는 까닭은 이 때문입니다.
당시에 부형은 입을 다물어 감히 자제를 가르치지 못하고 조정은 치열한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하께 고하지 못하였으니 조야(朝野)가 조광조·김식·김정 등이 있는 것만을 알고 전하께서 계신 것은 몰랐던 것입니다.
하늘이 성충(聖衷)을 유도하여 사심(邪心)을 밝게 보시게 하매 혁연(赫然)히 진노하여 먼저 8인을 다스려 부처(付處)·안치(安置)하라는 명을 내리시니, 신민이 비로소 생살 여탈(生殺與奪)의 군력이 전하에게서 나오는 것을 보고서 전하께서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8인의 신하의 죄는 죽여야 마땅한데 특별히 안치·부처하셨으니 전하께서 간사한 자의 뜻에 대하여 매우 환히 아시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이제 크게 간사한 것이 제거되기는 하였으나 잡초가 아직 제거되지 아니하여, 조아·응견·우익과 그 나머지 아랫것들이 조정에 가득 차 있고, 아래에서 부화하는 백면서생(白面書生)도 많이 있을 것인데, 만약에 세월이 오래되어 천노(天怒)가 조금 풀리시고 구신(舊臣)은 늙어서 물러가고 대간은 체직되어 이 무리가 틈을 타서 예전처럼 도사리고 안치·부처한 신하도 따라서 은혜를 입어 점차로 진용되면, 변란과 경장(更張)이 예전보다 갑절로 더할 것입니다.
전하의 국가가 극심하게 손상되고 조종의 정법(政法)이 극심하게 손상되었으니, 죽이더라도 국가·정법의 손상을 보상할 수 없고 하늘에 계신 조종의 노여움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공자(孔子)와 같은 주살(誅殺)을 행하여 빨리 신민에게 보답하소서.
전일 전하께서 요·순과 같이 되려는 뜻을 두고 당우(唐虞) 때와 같은 정치를 간절히 바라시다가 마침 이런 사람들을 얻어 모두 현직(顯職)에 발탁하시매, 3∼4년이 못 되어 지위가 경상(卿相)에 이르렀고, 그들을 좌우에 두고 고문에 응하게 하여 말하면 들어 주고 계책하면 따라서 조금도 어기는 의논이 없으셨으니, 요·순과 같이 되기가 어렵지 않고 치도(治道)가 광대(廣大)하고 화락(和樂)해야 할 터인데, 근년 이래로 세도(世道)는 더욱 혼란해지고 인심은 더욱 궤사(詭詐)해져서 아비 노릇 못하는 아비와 자식 노릇 못하는 자식이 많고, 형 노릇 못하는 형과 아우 노릇 못하는 아우가 많으니, 오상(五常)의 실도(失道)가 이보다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람들이 한창 효제(孝悌)를 떠벌이고 태평을 가식하여 당우 때와 같은 치세(治世)가 올 것이라 하였고, 전하께서도 그렇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응험(應驗)은 위로 천지를 감동시켜, 넘어졌던 나무가 절로 일어나고 8월에 서리가 내리고 뭇꽃이 겨울에 피고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고 5월에 지진(地震)하고 8월에 해일(海溢)하고 바위가 절로 울고 견탄(犬灘)의 물이 7일 동안 붉고 해에 양훈(兩暈)이 있고 백홍(白虹)이 해를 꿰었는데, 이런 큰 재변은 전하께서 친히 들으셨습니다.
그밖에 애매하여 잘 나타나지 않은 작은 재변은 이루 셀 수 없는 데다가, 홍수와 가뭄이 잇달아서 흉년이 들어 기근이 거듭되어, 가난한 백성이 생업을 잃고 유리(流離)하여 사방으로 흩어진 지가 이제 4년이나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전하의 마음을 속였으니 어찌 재변에서 징조가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은, 전하를 속인 자는 전하께서 마음대로 하셔도 되겠으나 하늘을 속인 자는 전하께서 마음대로 하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들을 죽여서 하늘의 꾸지람에 보답하소서. 또 무리가 흩어지지 않는 까닭은 7∼8인이 살아 있는 것을 믿기 때문이니, 이 무리의 괴수를 죽여서 그 나머지에게 위엄을 보이면 오합지졸이 위축되고 조정이 안정될 것인데, 무엇이 어려워서 하지 않으십니까?
또 신 등은, 대신이란 원수(元首)의 고굉(股肱)과 같은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원수가 병들면 고굉이 구제하는 것이 의리인데, 오늘날의 신하 정광필은 수상(首相) 자리에 있으므로 백관을 거느리고 전폐(殿陛) 아래에 서서 위로 천총(天寵)에 아뢰고 아래로 군신(群臣)에게 타일러 정치를 문란하게 한 대부(大夫)를 죽여서 조정을 바로잡는 것이 직분인데도 능히 하지 못하고 도리어 뇌정(雷霆) 같은 위엄을 범하여 부월(斧鉞)의 주살을 늦추며 후환을 두려워하여 시종 구제하니, 저런 정승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대저 근일의 조정의 재상들은 전하께서 결단하시지 않는 것을 보고 이 무리가 다시 기용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흔히 양단(兩端)을 잡고 망설이며, 오직 4∼5인의 대간·시종 외에는 한마디 곧은 말을 내어 전하를 위해 공언(公言)하지 못하니, 신 등은 전하와 군신을 위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史官의 평] 사신은 논한다. 조광조가 귀양간 지 한 달 남짓 되어도 임금의 노여움은 아직 풀리지 않았으나, 죽이자고 청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쾌하게 결단하지 못하였다. 생원 황이옥이 이를 알아차리고 망령된 이내·윤세정 두 사람과 함께 상소하여, 조광조를 극심하게 헐뜯고 사류(士類)를 많이 끌어내어 조아·우익·응견이라 지칭하니, 임금이 소(疏)를 보고 곧 조광조 등에게 사사(賜死)하고, 따라서 이옥 등을 칭찬하여 술을 공궤(供饋)하라고 명하였다. 이옥이 처음에는 조광조 등이 하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곧 신구(伸救)하는 소를 기초하여 벗들에게 보였으나 마침내 올리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고쳐 기초하여 헐뜯어 임금의 뜻을 맞추니, 사람들이 다 ‘본디 성품이 흉악한 자다.’ 하였다. 이내와 윤세정은 서로 친하게 지내는 자들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참고자료 1] 황이옥(黃李沃)
1. 父 황필(黃㻶, 1464년 ~ 1526년)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492년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저작으로 기용되었다. 이어 전적·감찰 등을 거쳐, 1497년(연산군 3) 의정부사록·정언·교리 등을 지냈다. 연산군의 난정이 심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512년(중종 7) 의정부사인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후학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1521년 곤양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뒤에 예주현감·동부승지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24년 경주부윤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2. 子 황이옥(黃李沃) :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서, 유학 윤세정(尹世貞)‧이래(李來) 등과 유생의 신분으로 조광조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당시 조광조를 구명하고자 애를 쓰던 어숙권(魚叔權)의 형 숙균(叔均)을 방문하여 어숙균의 마음을 떠보고자 거짓으로
조광조를 구원하기 위한 상소를 썼다며 상소의 초고를 보여주는 등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반감이 극대화 될 무렵에 조광조에 반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빙고별좌(氷庫別座)로 직무 중이던 1534년(중종 29)에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아 사판(仕版)에서 제거되었다.
3. 孫 황기로(黃耆老, 1521년 ~ ?) :
자는 태수(鮐叟), 호는 고산(孤山)·매학정(梅鶴亭).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고향에 은거하여 여러 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초서를 잘 써서 금석으로 충주의 이번신도비(李蕃神道碑, 1555)가 있다.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초서로는 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제1인자라는 평을 받아왔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미쳐
[『紀年便考中宗實錄』]
[참고자료 2] (경북 구미) 조광조의 죽음이 얽힌, 낙동강의 아름다운 정자 '매학정'(梅鶴亭),
생원 황이옥(黃李沃)이 조광조를 죽이라고 상소를 올렸다. 횡이옥은 누굴까? 그의 고향은 경북 구미 선산(善山). 황이옥의 행적을 따라 가다보면 뜻밖의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구미 선산으로 향했다.
황이옥의 아버지는 경주부윤을 지낸 황필(黃㻶: 1464~1526년)이다. 구미문화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황필 형제들은 선산 고을에서 수재들이었다. 황린(黃璘), 황위(黃瑋), 황필(黃㻶)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그런데 아들 황이옥의 상소로 조광조가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황필은 깊은 시름에 빠졌다. 심지어 황필은 점필재 김종직에게 공부를 배우고 출사한 ‘김종직의 문인’이었기에 충격은 더 컸다.
김종직에게 조광조는 손제자(孫弟子: 김종직→ 김굉필→조광조)가 된다. 황필이 아들 황이옥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긴 이유이다.
황필은 그 일로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 선산에 집을 짓고 손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그 손자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라는 인물이다. 황이옥의 아들 황기로 역시 부친의 허물이 부끄러워 잠시 별좌직을 맡은 것 외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출처] (경북 구미) 조광조의 죽음이 얽힌, 낙동강의 아름다운 정자 '매학정'(梅鶴亭),|작성자 고산자
[참고자료 3] 해동초성’(海東草聖)으로 유명했던 황기로
황기로는 초서를 잘 썼기에 ‘해동초성’(海東草聖)으로 불렸다. 명나라에 갔을 때는 ‘해동장옹’(海東張翁: 조선의 장욱)이란 별칭도 얻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터를 잡은 곳에 정자를 짓고 세상을 음유했다. 그 정자가 낙동강변의 매학정(梅鶴亭)이다.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 강정마을로 들어섰다.
강정마을 주민들 이야기에 따르면, 황기로가 매학정에서 지내던 어느 날 한양 손님을 맞게 된다. 놀랍게도 스물두 살의 청년 율곡 이이였다.
율곡은 선산과 이웃한 성주로 장가 들었다. 성주목사로 재직하던 노경린(盧景麟)의 딸 곡산노씨와 혼인한 것. 1557년 9월의 일이다.
율곡은 결혼 후 성주에서 잠시 머무는 사이 황기로의 명성을 듣고 매학정을 찾았다. 거기서 뜻밖에 혼사를 성사시키게 된다. 막내동생 옥산(玉山) 이우(李瑀: 1542~1609년)를 황기로의 사위로 들여보낸 것.
이우는 신사임당의 7남매 중 막내로, 율곡과는 여섯 살 차이가 난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예술적 기지를 물려받은 이우는 거문고 솜씨도 뛰어났다. 삼절(三絶)도 뛰어나거늘, 이우는 시, 서예, 그림, 거문고(詩·書·畵·琴)에 모두 능해 4절(四絶)로 불렸다.
이우는 장인 황기로에게 초서 필법을 배웠고, 딸 하나만 둔 황기로는 매학정을 사위 이우에게 물려주었다. 이우는 비안현감 시절 선정을 베풀었고, 괴산군수 시절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아 큰 공을 세웠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처가(구미 선산)에 내려와 살았다.
조광조는 선조 원년에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됐고, 이듬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선조 3년엔 능주 죽수서원에, 선조 38년엔 용인 심곡서원에 배향됐다.
그림을 한번 그려보자. 조광조 사사 상소를 올린 황이옥.→ 그 아들을 부끄러이 여겨 벼슬길을 포기한 황필. →그 황필의 유지를 이어받은 손자 황기로. →그 황기로의 딸에게 장가든 옥산 이우. →그 이우의 초서를 사랑했던 선조 임금. →그 선조에 의해 명예 회복된 조광조. 꼬리에 꼬리를 물며 큰 원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출처] (경북 구미) 조광조의 죽음이 얽힌, 낙동강의 아름다운 정자 '매학정'(梅鶴亭),|작성자 고산자
[팔경논주]
조광조 등을 단칼에 주살하려던 중종의 계략이 정광필, 이장곤 등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어 유배형에 처하고 난 후에, 중종은 어떻게 죽일 가를 꼬누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저 경상도 선산 땅의 생원 황이옥 윤세정 이내 등이 올린 상소가 1달 만에 올라오는 게 아닌가.
황이옥이 상소문의 모두에서 중국의 고사를 들어 조광조 등 사림파들을 참형에 처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주공은 형 관숙과 동생 채숙이 반란을 했기 때문에 죽였고, 석작이 아들인 석후를 죽인 이유는 왕자인 주우가 자기 애비인 위환공을 시해하는 역모에 석후가 가담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무제는 소평군이 여동생의 아들이지만 살인범이기 때문에 죽였다.
그런데 먼 나라 아득한 1500년 전 고사를 논거로 할 것 없이 바로 조선, 선대왕들의 대의멸친을 논거로 들었으면 더 확실했다. 태종 이방원은 종사를 위해 어린 동생 방번과 방석을 죽이는 대의멸친을 했고, 증조부 세조 이유 역시 조카 단종과 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종사를 위해 대의멸친을 했다. 이렇게 실감 나는 사례를 들었다면, 종사를 위해 형제들과 조카를 죽여버리는데 그까짓 신하들이야 떼로 주살해버려도 아무런 거리낄 게 없다고 중종이 단번에 결심했을 것이다. 친위쿠데타를 하던 그 날 밤에 재상들의 만류로 주살하지 못한 섭섭함을 단번에 풀었을 것이다.
중종이 이 상소를 읽고, ‘이옥 등을 칭찬하여 술을 공궤(供饋)하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조광조를 죽이려는 중종의 심정을 긁어주는 시원한 상소를 올리면 종3품 정도는 받으리라 여겼는데 겨우 술이었다. 선대왕들의 대의멸친 사례를 들었다면, 중종이 무릎을 탁치며 단박에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랬으면 종5품 정도는 됐을 것이다. 황이옥이 잔머리는 잘 굴리나 큰머리는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시골구석 천정지와 일개 생원이 큰 인물들을 소탕해버리는 데 마지막 총대를 멨다.
중종은 옳다구나 하며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버렸다.
선비로서 가장 치욕은 사약을 받거나 참수되는 게 아니라 사판(仕版)에서 제거되는 것이다. 글을 읽고 쓰며 세상의 이치를 생각할 자격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지식인임을 부정당하니 얼마나 치욕인가. 그것을 알기에 아버지 황필과 아들 황기로는 차마 부끄러워 벼슬을 포기하였다.
과거 급제하여 경주부윤을 지낼 정도로 지식인인 아버지에게서 어찌하여 저런 아들이 태어났을까. 아들 황기로가 초서의 대가로 유명하다니, 저런 애비에게서 어찌하여 저런 아들이 태어났을까. 경상도 선산 땅은 영남 인재의 절반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인재들이 대를 이어 태어나지만, 어쩌다 가끔 저런 못된 자들이 태어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참고자료 3]에서 보면, 율곡 이이가 황기로 집안과 사돈이 된다. 매화와 학인 梅鶴亭이 남아 기묘사화 그 참담한 역사를 속죄하는가. 이에 대한 감회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얻은 고산자님에게 드린 글로 대신한다.
「대동야승 기묘록보유 상권을 읽으며 글을 쓰다가 황이천 검색으로 여기까지 전파를 타고 들렀습니다. 인사드립니다. 안동에 중수 초의 박희용입니다. 기묘사화, 참 안타까운 역사입니다. 기묘사화에 이리저리 얽힌 연산군과 중종, 명종 시대의 인물군상을 보며 연민과 분노를 함께 느낍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황이천이 선산인이었고, 그의 아버지 황필과 아들 황기로가 얼마나 번민에 번민을 거듭했을까 생각해봅니다. 또 그 황씨 집안과 율곡 이이가 사돈이고, 그로 인하여 영남 좌도 일우 선산 지역에 서인의 학맥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여러 생각이 떠오릅니다.
율곡은 조광조의 직계 제자는 아니지만 도학정치의 정신을 잇는 서인의 조종으로 아는데, 조광조를 사사하라는 상소를 올려 중종에게 사사의 명분을 준 황이천의 집안과 어찌해서 사돈을 맺었는지 궁금합니다. 정신이 반듯한 선비는 혼맥은 가려서 하는데 말입니다. 하물며 황이천은 기묘명현들에게 원수인데 말입니다.
또한 이이는, 신사무옥을 일으켜 안당 집안 사람들과 기묘사화로 유배형에 처해졌던 사림파 젊은 선비들을 죽도록 한 송사련의 아들인 송익필과 친구이기도 합니다. 송익필은 김장생 등 서인들의 영수들을 가르친 스승입니다.
조광조, 김안국, 이자, 김식, 김정, 심정, 남곤, 황이천, 송익필 등 모두 글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각 인물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다릅니다. 대동야승을 읽으며 조선 초중기를 살다간 많은 인물의 부침을 목격합니다. 한때의 부귀영화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한눈에 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제가 쓰는 글에 옮겨서 보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