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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숙
빛, 빛깔의 시인 그 섬세함과 치밀한 상상력을 찾아서
대구문학 아카데미 대표를 근 20년 지켜 오시면서 150명의 제자들과 60여명의 시인을 배출하시느라 얼마나 고단하셨을까요? 새삼 그 격정의 세월에 대해 짐작해 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신경림의 ‘갈대’를 낭송하실 때의 그 열정에서 시 한편이 소설보다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계기가 되어 더욱 인상 깊습니다. 지금 팔순을 넘기느라 가물가물해진 시력 때문에 대구문학아카데미 10주년을 지나면서 16기부터 필자에게 시창작반을 넘겨주셔서 파도 센 바다에서 시의 길 찾느라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전국 60여명의 제자와 인터넷 포엠스쿨 정숙반까지 운영하면서 여러 제자들이 계간지 ‘시안’ ‘시와 시학’ ‘전태일 문학상’ 포엠토피아 신춘문예‘ 등 그 외 여러 문학잡지로 등단하는 많은 성과가 있어 늘 감사드릴 뿐입니다. 감히 스승님의 글을 평하기보다 잊혀져가는 楚民 박주일 시인의 시세계를 재조명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1. 시집[바람아. 문둥아]에서 시에서 상상력의 기능
시 쓰는 일은 그 자체로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며, 가장 순수한 나로 회귀하는 일이라면서 관습에서의 해방, 자유로운 세계를 위하여 시인은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상상력은 모든 사물의 고정관념을 부정하는 힘이며,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성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면서 그 일상성을 긍정한다는데 그래서 부정과 긍정의 교차에서 시의 원리가 여러 알레고리로 나타나는 가 봅니다.
네 번째 시집[바람아. 문둥아]는 그러한 비실제성의 집약이며, 일상성을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해방되는 시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해방이 또 하나의 구속이기에 시인은 외로움의 늪에 다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엔가 우연히
너는 있고 네 그림자가 없는
그림자는 있고 네가 없는
그런 시간에
눈은 있고 눈깔이 없고
잇빨이며 혓바닥이 달아난
그런 시간에...... -[문둥아.40]에서-
눈은 있고
눈깔은 없다.
눈썹은 바람에 가고
살점은 놀 끝에 묻어있다. -[문둥아.24]에서-
시인의 시안에 비친 [눈은 있고 눈깔이 없고/ 잇빨이며 혓바닥이 달아난],[눈썹은 바람에 가고/살점은 놀 끝에 묻어있다.] 문둥이를 통해 버림받거나 소외된 존재에 대한 아픔을 절규로 자학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학으로 자기를 억제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바람’을 역동적으로 이미지화하고 있습니다. 그 아픔에 순응하지 않고 기계화에 시간에 자신도 모르게 풍화되어 가고 있는 현대인의 위기의식을 바람의 빠른 흐름으로 표현하는 젊은 감각이 숨어 있습니다.
2. 죽음에서 삶을 유추하다, “新羅遺物詩抄”
죽어간 사람은/ 살아남은 사람을 밤새/손가락 사이로 기웃거린다/하나의 사람은 살아있지만/살아남은 사람은/ 죽어간 사람의 발치에 깔려/끝내 눈감을 수 없고, __[動物土偶]
遺物이라는 소재를 두고 얼른 느껴지는 회고적인 넋두리에서 즉 재생상상력에서 해방되어 있습니다. 즉 신라라는 역사적인 소재의 좁은 세계로부터 독자의 눈을 넓고 구애되지 않는 시야로 이끌어 주고 있는 것은 유물을 유물로 보지 않고 연상상상력으로 자유롭게 유추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즉 유물과의 사이에 자기 동일시가 이루어지고 있어 시간과 죽음을 노리게 다루듯 하는 어린애처럼 순진해 보이는 시인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하십니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어야 새로운 삶이 생성되는 순환과 흐름의 우주 원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요.
3. 시집 [잡초기] 연작시에서 본 생명의 끈질김과 긴장미
선생님께서도 가장 아끼는 작품이 연작시 [잡초기]라고 말씀하시는데 잡초는 民草이면서 강한 민중성을 표상하는 쉽게 꺾이거나 좌절하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여름날
모질고 모질던 쇠풀의
고 속심을 보라.
불의 땅바닥에 착 배깔고
미련도 아무런 애무도 없이
푸른 몸뚱아리로 사방에 들어선다.
내 핏줄에 잠든 잠을 깨우며
나의 온몸을 덮는다.
나는 조금씩 김이 새는 기분이고
차츰 맥박이 처진다.
깨어나도 쇠풀은 될 수 없고
그냥 이대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갈라진 땅 위에
하루해는 너무 길다.
강인하고 집요하게 생명 활동을 전개하는 쇠풀에 감탄하면서도 그 쇠풀처럼 생명 현상의 무자비한 법칙에 따를 수 없는 자신의 삶의 한계를 물끄러미 방관자로서 바라볼 밖에 없음을 한탄하는 시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것은 ‘미련도 아무 애증도 없이’자신의 삶을 확장해 나가지만 그럴 수 없기에 인간인 것입니다. 그런 한계를 다음 시에서는 순응하면서 관조하면서 받아들이는 내면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산에는 산만큼의
바람과 울음이 있다.
밤이면 산은
소나무와 자작나무들을 데불고
계곡으로 떨어져 내린다.
들판에는 들판의 넓이로
울음과 눈물이 고여 있다가
겨울 들판을 수시로 쓸어 올리고
쉴 새 없이 밀어 붙인다.
그것은 자연과 인생의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지요. 예순을 넘긴 시인이 오랜 세월 동안 삶의 각박한 인생살이의 쓰고 떫음을 견디고 마침내 얻어 낼 수 있는 채찍으로 자기 단련의 길을 보여주는 소중한 사리이겠지요.
그러면서 세파에 부대끼며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몰고 가는 물]에서,
내 바람으로 떠날 때/ 그대 갈잎에 기대어/ 흔들리며 날리며 가리라,/ 어쩔 수 없이/ 바람은 바람으로 떠나야 하고/갈잎은 갈잎으로 파도쳐야 한다,/ 후회 없다./
바람의 흐름과 파도의 출렁임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시인의 정신이 잠시도 멈추어 있지 않음을,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후회 없다.] 한 마디로 끊어 시적 긴장미를 살려주고 있습니다.
시에서 긴장미란 생명이라고 배웠는데 요즘 이상하게 수필 같은 늘어진 시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독자층을 늘이겠다는 뜻도 있겠지만 그래도 진정한 시인은 고독을 즐겨 끌어안고 사리 한 알로 승화 시킬 줄도 알아야겠지요. 잡초기 연작시 가운데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 한편이 있습니다. ‘안윤하’시인의 낭송과 함께 음미해야 맛이 나긴 하지만 수련을 통해 눈길은 늘 바람 부는 쪽으로 돌려져 있어 마음은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떠돌고 있지만 몸은 지친 다릴 묶고 또 걸어가야 하는 시인의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숨 가쁘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갈 수 있겠는가/ 뜨거운 숨소릴 밀치고/ 빈 가슴으로 훌쩍/ 떠날 수 있겠는가/ 이글이글 타는 눈 버리고/고독의 벌판을 지나/ 아득한 바람의 늪에서 내/ 눈감을 수 있겠는가/ 너를 버리고/ 젖은 음성 널 버리고/ 깨풀이며 강아지풀이나 죽이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훌훌 한 세월/ 잊을 수 있겠는가/ 살기 위하여/ 잡초같이 살아남기 위하여/ 지친 다릴 함께 묶고/ 초록빛 사이/ 저 시퍼런 하늘 뭉게며/불기의 모래밭 짓밟고/ 박토의 그늘을 마구 자르고/ 억새풀 치를 떠는 그늘을 피의/ 상채기 재우고 재우면서 영원히/영원히 우리는/잠들 수 있겠는가/
-[잡초기 중 -----수련에게 전문]
한줌 뜰귀에서도 짐짓/ 잘려나가는 여름의 그림자,/ 핏줄 또한 안으로 가다듬은/ 풀잎 하나에도/ 벌레 울음은 또한 스민다./ 그 운 오래오래 삭아서/
제스네리아 빛으로,/ 제스네리아 빛으로,/
타고 있는 眉間,/ 때때로 눈 어두워/ 그대 만남이 잔잔한 虛空인/
것을 알리라./
나의 깊은 곳으로/ 아, 풀잎 속살의 제일 아픈/곳으로/다가오는 발자국 소릴/ 이젠 알리라/ 잘린 그림자여./[제스네리아] 전문
“그는 늘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다. 술맛에 민감하고 안주 맛에 민감하다. 그는 술과 안주를 다루듯 시를 다룰 뿐이다.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시던 김춘수시인의 말씀 속에는 피는 꽃 뿐 아니라 지는 꽃잎에서 낙엽 더미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닌 박주일 선생님의 시세계 특색들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제스네리아’ 라고 하는 사물과는 상관없이 소리의 울림이 빚는 어떤 빛깔이고 정경이겠지요. 한 사물과의 교감과 상응의 세계에서 그 결이 너무도 섬세해서 ‘제스네리아’란 단어를 반복하다가 보면 어느새 아주 낯선 순수감각의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시인의 시세계가 모네의 수련 한 폭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고 김춘수시인처럼 의미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항상 귀를 열어놓고 기다리는 사람이기에 발자국 소리에 민감하지요. 그것은 사물을 그윽이 순수지각의 눈길로 바라보면서 우정을 나누다가 시인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돌담 언저리/ 기웃거리던 하루해도 마지막/ 긴 수염을 자르고 나면/ 풀잎 새 풀잎바람으로 흔들리는/ 저 가녀린 미동을 어쩌나,/
돌밭엔 돌꽃끼리/ 무덤엔 하얀 눈끼리ㅣ 어루만지다가/ 쉬 외로운 빛 거두고 나면/누가 몸으로 울고 있나,/울어선 한량없이/ 어두운 강을 이루고 있나/
[동행]이라는 시의 부분에서는 ‘풀잎 새 풀잎바람’‘돌밭엔 돌꽃 끼리 리듬과 똑같은 비중으로 그 돌꽃과 하얀 눈이 끼리 끼리 편을 갈라 가는 듯하지만 결국 그 속에서 동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의미가 미묘하게 드러나면서 시의 밀도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들이 모발로 몇 겹이나 엮어놓은 듯이 섬세하면서 질기게 보이는 것은 신선한 상상력과 감각의 섬세함이 문장의 밀도를 통하여 얻게 된 견고성이라고 김춘수 시인이 평하고 있는 이유를 알 듯 합니다. 이미지에만 머무르다 보면 자칫 말장난이나 단어의 나열 밖에 될 수 없는 현대시의 한 형태에서 벗어나려는 그래서 뭔가 진한 감동을 찾아내려는 의지가 보여 더욱 그런 밀도가 느껴지는 것이리라 짐작해 봅니다.
4. 감각의 결 , 그 섬세함 [시집, 피그미 풀꽃]
피그미꽃/ 1밀리의 잎에/ 무성히 여름은 다가온다/ 물론 철은 한철인데/ 무심한 눈들에는 잘 보이지 않는/ 난쟁이 피그미꽃에/ 칠월 햇살은 사정없이 꽂힌다/...중략....
피그미 꽃은 속으로 피 말리지만/ 담배씨만큼의 소망 하나 쯤/ 캄캄하고 아득한 흙에 묻으면/ 살아가는 일이며 밤은/ 여전히 어깨 누른다/ 때론 달빛 한 줄도 무겁다/ 그럴 수밖에 없다./_[칠월, 피그미풀꽃]
지구상의 가장 왜소한 종족으로 알려져 있는 피그미족에서 차용한 이미지로 피그미풀이란 새로운 단어를 조어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숨은 민족어를 찾아 갈고 닦거나 새로운 시어를 개발하는 그런 사명감이 있어야겠지요. 그 조그마한 사물을 의인화하여 자신을 낮추고 작게 함으로써 생명 사랑의 한 모습을, 그
속에서 달빛 한 줄도 무거운 자신의 고단한 삶과 그 와중에도 담배씨만한 꿈 하나 쯤 갖고 살아가는 자신의 삶과 동일시하여 아주 구체적이고 때깔 좋은 천을 짜고 있습니다.
5. 시집 [는개 그리고 달빛]에서의 궁합과 관능과 묘사력
궁합이란 게 있기는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세계에서는 흔히 궁합이 맞다, 안 맞다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하나의 작품 세계에서도 그 작품을 이루고 있는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이 궁합이 맞는 단어들이 모여 있나, 그렇지 않나에 따라서 작품의 성패가 결정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는개 그리고 달빛]은 이 낱말 궁합 맞추기에 힘을 써보았다. 궁합이 맞았다면 오래 빛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쉬 시들어질 것이다.___자서 중에서
어느 봄날 청도 적천사 진달래 꽃길 오르면서 ‘이상번 ’시인이 선생님 ‘는개가 무슨 뜻입니까?’ 하니 선생님은 싱긋이 실눈 미소 지으며
‘는개는 갓 목욕탕에서 나온 여인의 몸을 감싸는 따스운 김이지’
대답하시던 그 모습 잊혀 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5편의 연작시인데 그 중 한편을 예로 들어보면 칠순이 지난 그 연세에도 관능에 가슴 떨며 잠 못 이루는 남성임을 자랑스레 과시하는 예리한 미적 언어의 연금술을 보여줍니다. 그런 정서의 묘사를 위해 동원된 낱말들이 얼마나 감각적이고 동적이면서 궁합이 잘 맞는지 읽으면서 전율이 온 몸으로 물결쳐 오는 느낌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런 자화상을 통해 늘 숨가쁜 가슴으로 사물을 사랑하며 꼭 알맞은 시어 하나로 우주의 원리를 꿰뚫을 수 있는 명사수가 되기 위해 오늘도 자신의 정서를 조율하고 계실 것입니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방 하나/ 벌써 방은 는개에 젖어 있었네/ 아무것도 모르는 달빛은/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알몸에 싸늘히 감기고 있었네/ 사방의 벽은 완고하다./ 한강 쪽 유리문 하나가/ 바람의 출입 지키고 있었고/ 시방 한강 물빛이/ 강의 몸둥아리를 끝없이. 이끌어가고 있듯이/ 그대 눈빛이 숨의 방향을/ 한 곳으로 몰아가고 있었네/ 눈빛 끝에 타오르는 촛불 가까이/ 사랑은 휘청거렸네/ 잠을 잃은 사랑은 초록빛이다. 밤이 는개에 젖는 동안에/ 내 곁에 네 그림자 있었고/ 그 옆에 숨가쁜 가슴 있었네/-[는개 그리고 달빛 1 전문]
이 글을 읽다보면 달 밝은 여름밤이 생각납니다. 무논에서는 개구리 울음 소리 요란하고 외진 산길, 옆에 사람은 있지만 소통이 되지 않고 누군가 그리워서 몸 깊은 곳에서 파도치는 그 무엇이, 관능이 걷잡을 수 없는 그런 뜨거운 밤 말입니다. 숨가쁜 가슴이 실제로 옆에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또 어떻습니까? 상상력은 시인이 가꿀 수 있는 또 다른 피안의 세계이기도 하지요.
6.시집[물빛, 그 영원]-- 미당 형님과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미당 형님과의 수많은 대화 가운데 지금도 가슴에 선연히 살아있는 게 하나 있다. ‘내 영원은 물빛’이란 말씀이다. 새로 시집을 꾸미면서 시집명으로 [물빛 , 그 영원]이라고 한 것도 미당 형님과의 추억을 더듬는데서 연유한다. 개구리 수영을 익히던 시절은 갔지만 내 가슴에 자리 잡고 있는 형님의 시의 세계와 인연은 영원할 것이다. -------------[시인의 산문] 중에서
김은진의 해금 소리 끝없이 풀리고 더러는 내 가슴 속 뚫고 휘돌아 나간다. 지금 네 가버린 소리 더듬거리며 내 귀 따라 나선다. 어쩌면 혼의 세계 돌아오는 그 아슴한 파도 떨리는 파도떼서리 보인다. -[해금소리와 추억의 귀와]
절친한 친구 분 중 지휘자였던 이기홍 음대 교수님이 계셨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미샤 마이스키]의 ‘悲歌’ 멜로디에 시를 붙여 제자들께 노래를 시키기도 하셨고 수업 중 [차이코브스키]의 ‘우울한 세레나데’는 가슴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후벼 파는 애절함이 있어 한숨을 쉬기도 했었습니다.
특히 김은진의 해금 연주를 좋아하셔서 취한 듯 흥얼거리면서 강의 시간에 흥을 돋우시던 모습 생생히 살아납니다. 그 소리 떨림에 대한 밝은 시안과 상상력은 또 얼마나 젊은가요? 역동적인 출렁거림이 살아 흐르는 묘사력에 새삼 감탄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시력이나 연세에 만족하거나 머물지 않고 얼마나 외롭게 정진하셨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7.마무리
시집 [가솔송아 꿈결 같구나] 까지 열 네 권의 시집을 상재하면서 지상에서 차려내는 마지막 모국어의 성찬일지도 모르겠다 셨지만 지금도 원고 정리를 하시다가 잘 풀리지 않는다며 끙끙 앓으시는 모습에 죽어서도 시를 쓰겠다던 각오 아직도 버리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에게 ‘시는 재미가 있든지 감동을 주어야한다’ 던 그 열정 모든 제자들 가슴에 뿌리깊이 심어주시고 신선한 이미지에 깊은 깨달음이 있는 결 고운 시를 살며, 쓰고 또 쓰려고 노력하고 계신 것입니다.
담을 넘어오는 꽃줄
노란빛의
꽃줄이 귀여워보이는데
하루가 더 힘이 있어
안내하는 첫줄이
왕성하다
어서 오시게!
--[유도화] 전문-----
약간 모호하면서도 독자에게 상상력의 길을 열어주는 연상상상력의 이미지 시입니다. 현대시에서는 상상력이 그 시의 수준을 말해 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의 등급이기도 하지요. 상상력이 단지 추억 회상 형식인 재생상상력인가, 아니면 체험을 이미지화한 연상 상상력인가, 거기서 한 단계 더 뛰어 오르려면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연상상상이 아닌 아주 낯선 창조적인 상상력이 내재되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상상력만으론 일회성에 그치기 쉽습니다. 진한 감동을 주려면 그 속에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선생님의 시는 곳곳에 번득이는 기지를 이미지화한 수준 높은 젊은 감각에 촘촘한 견고성과 섬세한 밀도가 있어 새삼 놀라울 뿐입니다. 어떤 자리에서 ‘신경림’ 시인이 ‘참여시’도 이제 예술성을 가미한 서정시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생각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시는 만고의 역적이다’ ‘고은’선생님 말씀처럼 그렇게 시는 보는 각도에 따라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그 얼굴 모습이 순간순간 변하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자신의 시 한 편을 위해 뼈를 깎는 아픔 견디면서 노력해야 한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자로서 스승의 작품을 알 기회 늦었지만 앞으로 더 세밀히 끌어안고 야무지게 음미해봐야겠습니다. 선생님의 시 가슴속 달큰한 엑기스만 남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