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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바디스 성당과 카타콤베
Domine, Quo Vadis & Catacombe
2014.08.25. 06:49
※ 사진을 포함한 PDF파일을 첨부합니다.
http://blog.naver.com/sun10com/220102589520
로마문화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는 너무나 밀접하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로마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황제 숭배사상과 살인을 거부하면서 로마에서는 교인들에 대한 피의 탄압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새로운 제국의 통치이념으로 간주하여 제국의 재건에 필요한 핵심적인 사상으로 흡수하려는 노력도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중세의 이념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또한 로마의 역사였다.
로마의 역사는 교회와의 관계사 속에서 존재가치가 인정된다. 공화정 말기부터 시작하여 제국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도록 로마는 그리스도교의 한복판에 우뚝 자리하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교가 편안한 상태에서 로마에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로마의 테베레 강물보다도 많은 양의 피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핍박의 역사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물론 수많은 원형극장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초창기 신자들이 몰래몰래 숨어서 믿음과 목숨을 지키던 카타콤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우렐리아 성벽에서 가장 잘 보전된 것으로 알려진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문을 지나 조금만 더 내려가면 아주 친숙한 느낌을 주는 자그마한 건물과 만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쿼바디스 성당이다. 영화를 통해 그 일대의 분위기를 익히 알고 있는 나그네들은 숙연한 마음으로 이 성당을 바라볼 것이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네로의 박해가 두려워 로마로부터 달아나는데, 바로 이 지점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다. 물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박해당하고 있는 로마로 돌아가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힐 의향이었다. 베드로는 깊이 뉘우치고 로마로 돌아와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그 자리에 세워졌으나 후에 훼손되었던 이 쿼바디스 성당(Domine, Quo Vadis)은 17세기에 이르러 바르베리니 가문에 의해 재건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쿼바디스 성당을 지나 조금만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숨어 지내던 지하 묘지 카타콤베와 만난다. 카타콤베가 그리스도교인들의 피신처이자 교회이고 무덤이었으며 또 그로 인해 수세기 동안 순례의 대상이 된 성지로 숭앙받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그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이며 이교도들도 카타콤베 형태의 묘지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로마 주변에 있는 60여 곳의 카타콤베 가운데 대부분은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
참배객을 가장 많이 부르고 있는 것으로는 아피아 가도에 있는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와 성 세바스티아누스 카타콤베, 셋테 키에세 거리에 있는 도미틸라 카타콤베가 아닐까 한다. '카타콤베'라는 용어는 원래 성 세바스티아누스 카타콤베에만 적용되었다. 다른 카타콤베는 안식처를 뜻하는 치미테로(cimitero)라 하였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님처럼 땅 밑 바위 속 굴에 아마천 담요로 싸여 묻히고 싶은 나머지 그러한 방식의 매장을 선호했다. 더구나 초기의 그리스도 교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거나, 노예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좋은 묘지를 마련할 수 없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성 안에 묘지를 둘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하여 묘지를 만들었으나 그것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이제는 땅속으로 파고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다음 그리스도교인들은 이제 땅 밑에서 밝은 햇볕 속으로 나왔다. 지하에 있던 공동묘지는 모두 교회의 재산으로 귀속되어 바티칸 관할에 속하는 여러 수도회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교회가 공인된 이후에도 카타콤베는 길고 긴 수난과 약탈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로마를 약탈했던 이민족의 침입 때 무덤 안에 있는 귀중한 자료와 보석 등이 훼손되고 도난당했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무덤 속에 평소 지니던 귀한 물건을 넣어주는 장례풍습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어느 지하 무덤에 가보더라도 관 뚜껑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파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8세기부터는 그때까지 카타콤베에 남아 있던 성인들과 순례자들의 유골을 로마의 성 안쪽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순교자들의 유골이 성 안의 기념 성당으로 모두 이전되자 순교자들의 발길은 카타콤베에서 점점 멀어졌으며, 이때부터 카타콤베는 역사에서 차츰 잊혀지기 시작했다."
나는 여러 차례 이 지하 묘지들을 참배한 일이 있다. 그 중에서도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 성 세바스티아누스 카타콤베, 도미틸라 카타콤베를 많이 찾아갔다. 우선 묘지의 성당에 모셔진 순교 성인들의 성상을 바라보며 깊은 명상에 잠긴다. 그리고는 정해진 루트를 따라 지하에 내려간다.
도대체 신념이란 무엇이고,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토록 허허롭게 남아 있는 유해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 모든 것이 헛된 거야. 하지만 헛된 것을 알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게 신념이고 신앙이란 말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하다가 서둘러 결론 아닌 결론을 내리고 계면쩍은 듯 성모송의 후반부를 읊조린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지하 무덤에 잔해로 남아 있는 이 순교자들의 육신이 분명 '안식의 터'에서 편안히 쉬고 있고, 그들의 영혼은 찬란한 축복의 장미꽃 너울 안에서 한없는 행복감에 취해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 또한 영과 육이 갈라질 때 조용한 음성으로 성모송을 되뇌지 않았을까? 폴리도리에 의하면 "지하 묘지들의 총 연장길이는 대략 900㎞이고, 300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무려 6백만 명이 거기에 묻혔다 한다. 카타콤베는 사실상 공개된 비밀장소나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법에 의하면 묘지란 성스럽고 침해될 수 없는 곳이었기에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지하의 미궁 속으로 피신해 들어가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다."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는 3세기 때부터 그리스도교 공식 묘지로 지정되어 많은 교황들이 모셔진 곳이다. 박해가 극심하던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제피리누스는 로마의 명문 체칠리아 집안으로부터 이 지역 땅을 희사받아 당시의 부제(副祭)였던 칼리스토에게 관리를 담당케 하였다. 칼리스토 부제는 20년 동안 이곳에서 임무에 충실하며 지내다가 제피리우스 교황이 서거하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그 자신 순교한 뒤 이곳에 묻혔기에 그의 이름이 이 카타콤베의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공적 재산으로서 가장 오래된 이 지하 묘지는 현재 5층까지 발굴되어 있으며, 그 중 한 통로는 2㎞나 뻗어 있을 정도다. 여기에는 폰시아누스, 파비아누스, 식스투스 2세 등 교황들과 성인들의 묘지가 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박해를 받은 음악의 수호성인인 산타 체칠리아가 죽기 전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토지를 교회에 봉헌하고 순교한 뒤 이곳에 묻히기도 했다. 체칠리아는 뜨거운 욕탕에서 증기로 질식사당한 뒤 참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17세기 초에 조각가 스테파노 마데르노에 의해 형상화된 그녀의 조각상이 이 성당에 있는데 성녀의 순교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조각의 원본은 트라스테베레에 있는 성 체칠리아 성당에 있고 여기 있는 것은 모사한 것이다.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유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성인 중의 하나이다. 그는 갈리아 출신으로 디오클레시아누스의 병영에서 높은 직책을 수행하다가 박해를 받아 오늘날 성 보나벤투라 성당이 있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304년에 순교했다. 그 뒤 그의 유해가 여기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붙여진 이름이 성 세바스티아누스 카타콤베인데, 이 시절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묘지가 온갖 수난을 당하고 있던 터라, 바티칸 계곡과 오스티아 가도에 버려져 있던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올로의 유해를 여기에 모셔왔다고 한다.
도미틸라 카타콤베 역시 중요한 성지이다. 이곳의 토지를 기증하였던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로마의 총독이었던 클레멘테의 조카였으며 로마 황제의 친척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자였기 때문에 도미치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지중해의 폰차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순교하였는데,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모두 교회에 바쳤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순교했던 성인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의 유해가 여기에 모셔지면서 순교자들의 묘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표된 뒤에도 신자들은 성인들 곁에 묻히고 싶어했기에 이곳의 묘지가 많아졌다고 한다. 두 성인의 무덤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데, 그곳에는 4세기 중엽의 벽화가 원래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어린 소녀가 천국의 정원에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카타콤베는 897년에 지진으로 파괴되었는데, 19세기 중엽에 발굴되었다. 지하 4층까지 발굴되었는데, 2층까지만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지하묘소. 이교도나 유대교도의 것도 있지만, 특히 그리스도 교도의 것을 가리킨다. 본래 로마 교외의 성 세바스찬의 지하묘소를 가리킨 <아드 카타쿰바스(ad catacumbas, <웅덩이의 옆>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고대 로마의 매장 형식은 2세기 전반에 화장에서 토장형식으로 이행하고, 지상의 묘지 외에 소규모의 지하묘실인 히포게움(hypogeum)이나 지하에 광범위하게 통로로 연결한 묘실을 가진 카타콤베 형식의 묘소가 있었다. 그리스도 교도도 이 전통에 따라서 2세기 후반부터 7세기경까지 지하묘실을 사용하고, 발전시켰다.
박해시대에는 피난소나 예배당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원칙적으로 각 카타콤베는 순교 성인의 이름을 가지며, 역대의 교황이나 성직자, 그리스도 교도의 묘소이다. 나폴리나 시라크사 외에 소아시아, 북아프리카의 각지에도 그리스도 교도의 카타콤베가 발견되고 있는데, 대부분은 로마 및 그 근교에 있다. 카타콤베는 1578년에 재발견될 때까지 오랫동안 잊혀졌다. 최근에도 1955년에 로마 교외의 라티나가 길을 따라서 하나가 발견되었다. 비교적 단순한 히포게움 형식의 것도 포함해서 현재 로마 근교에는 39개의 카타콤베가 알려져 있으며, 모두 고대 로마 성벽 밖의 주요 가도를 따라서 위치한다. 주된 것에 라비카나 가도의 성(聖) 베드로와 마르케리누스의 카타콤베, 앗피아 가도의 성 카리스투스의 카타콤베(역대 교황의 묘가 있었다), 도미티라의 카타콤베 등이 있다. 모두 미발굴된 부분도 있지만, 수백m 사방의 부지 지하에 통로로 연결된 무수한 묘실이 3층이나 4층을 이루면서 설치되었는데 묘실에는 석관이 있다. 요소에 통기공이나 채광공을 가진 통로의 벽면에도, 상하로 선반처럼 겹쳐진 가난한 자를 위한 무수한 묘가 묻혀져 있다. 묘실의 벽면은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석관부조와 함께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의 귀중한 유례가 되어 있다.
2세기 말~3세기 중엽의 벽화는 백지를 선으로 구획하고, 식물이나 동물의 모티브를 배열한 단순한 것이 많다. 거기에는 이교도 미술의 모티브를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전용한 것이 많으며, 물고기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도 나타난다. 3세기 중엽 이후에 성서장면이 나타나는데, 아담과 이브를 비롯해서 노아, 다니엘, 요나, 모세의 이야기 등 『구약성서』장면이 압도적으로 많다. 4세기에 들어가면 <그리스도와 사자들의 모임>과 같은 『신약성서』의 주제도 나타나는데, 이미 교회의 승리 시대가 되어서 지상의 교회당에 그리스도교 미술이 개화하자 카타콤베의 벽화는 그 주류에서 벗어나게 된다. 또한 카타콤베의 벽화에는 고대 신화장면 등의 이교적 주제 및 모티브도 많이 인정된다. 그 중에는 명백히 그리스도 교도 이외의 비교(祕敎)를 믿은 자들의 묘실로 보여지는 것도 존재한다.
관광지로서의 로마 카타콤베
출처 : 저스트 고(Just go) 관광지
낮은 지대의 모퉁이’를 의미하는 카타콤베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지하 묘지로 사용되었다. 로마에는 카타콤베가 여러 개 있는데, 가장 큰 카타콤베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있는 것들로 산 칼리스토의 카타콤베,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의 카타콤베, 도미틸라의 카타콤베가 유명하다.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와 같이 아마천에 덮여 돌을 파서 만든 관에 매장되기를 원했는데 신자들 대부분은 빈민층이나 노예 신분이었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드는 지상의 영묘에 묻힐 상황이 아니어서 지하에 묘지를 쓰게 된 것이다. 지하 10~15m 정도에 계단을 만들어 지하 5~6층을 이루게 되었는데 로마법에 의하면 묘지는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에 마련된 공동묘지의 미로로 피신할 수 있었다.
지하 묘소에는 양쪽 벽면에 시신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장방형의 공간들을 만들고 조금 넓은 공간에서는 종교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로마에 있는 지하 공동묘지들의 구조는 모두 동일하며 여기에 남겨진 많은 벽화들은 고대와 중세 기독교 미술을 보여 준다.
산 칼리스토의 카타콤베(Catacombe di San Callisto)는 이곳에 묻힌 교황 칼리스토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로마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카타콤베로 3세기부터 그리스도교인들의 공식적인 묘지가 되었고 이곳에 교황들의 묘소가 있다. 지하 묘지는 화산암 지대 밑 30m의 깊이에 4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연장이 20km나 되는 복잡한 통로로 이어져 있다. 로마 대부분의 카타콤베는 관리를 담당하는 성직자들이 직접 방문객들을 안내하는데 특히 산 칼리스토의 카타콤베의 경우에는 한국어 안내 녹음테이프를 비치해 놓아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음악의 수호성인 성녀 체칠리아(Cecilia)의 무덤도 있었는데 831년에 교황 파스쿠알레의 명으로 트라스테베레의 성 체칠리아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성 체칠리아의 순교한 모습을 보여 주는 대리석상도 있다. 이 석상을 보면 체칠리아가 손가락으로 삼위일체를 표시한 채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리고 있으며 그녀의 목에는 칼자국이 선명하다. 1599년에 성 체칠리아의 관을 열었을 때 시신이 손상되지 않고 순교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조각가 스테파노 마데르노는 그 모습 그대로 대리석 조각을 남겼는데 이곳에 있는 대리석상은 복제품이다.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의 카타콤베(Catacombe di San Sebastiano)는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의 유해를 임시로 보관했던 곳이며 후에는 성 세바스티아노가 순교한 후 그의 유해를 보관했던 곳이다. 성 세바스티아노는 로마제국 군대의 장교로 있다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젊은 나이에 순교한, 유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성인이다. 그래서 이 지하 묘지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성지 순례지로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곳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을 기념하는 커다란 성당이 세워져 있다. 성당 내부에는 성 세바스티아노가 화살을 맞고 순교한 모습의 대리석상이 장식되어 있고 그의 몸에 박혔던 화살이 따로 잘 보존되어 있다.
도미틸라의 카타콤베(Catacombe di Domitilla)는 로마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1세기 말에 시작되었으며 4세기 말에 건축된 성 네리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의 성당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이 카타콤베는 황제 가문인 플라비우스 가(家) 출신 귀부인으로 기독교 신자였던 도미틸라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곳에서는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종교 벽화와 그리스어로 쓰인 비문들을 볼 수 있다.
가는방법
베네치아 광장 서쪽에서 관광 버스인 아르케오부스(Archeobus)가 출발한다. 아피아 구가도(Via Appia Antica)를 돌아 로마 수도교(Acruedotti)까지 가는 버스다. 1시간에 1대씩 출발하며 요금은 €7.50다. 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에서 하차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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