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이라면 일상의 삶 속에서 크든 작든 화를 내는 일이 많다.
착한 사람도 그렇고 악한 사람도 그렇다.
똑똑한 사람도 그렇고, 우매한 사람도 그렇다.
그것이 어쩜 살아가는 중생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성을 낸다는 것은 분노를 일으킨다는 의미다.
그 분노는 복수에 대한 분노나 앙갚음 등
무겁고 심각한 것도 있지만 소소한 일상의 삶에서도 일어난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 논쟁할 가치도 없는 일이지만,
잠시만 뒤집어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을 보지 않고 우기거나,
상식적으로 누가 봐도 당연한 것을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더 나아가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궤변(詭辯)으로 우기면 더욱 화가 난다.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분노가 치달으면 극기야 우발적인 살인까지도 저지르게 된다.
분노(忿怒)를 교학에서는 진에(瞋恚)라고 한다.
중생의 근본 번뇌의 하나로 탐진치(貪瞋痴)라는 삼독의 중의 하나인
진(瞋)이 바로 분노다.
이는 자기 의사에 어그러짐에 대하여 성을 내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대하여 미워하고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을 편안치 못 하게 하는 심리 작용을 말한다.
사람의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소견[見]에 속하고, 둘째는 애착[愛]에 속한 것이다.
애착에 속한 것의 주(主)된 것을 느낌[受]이라 하고
소견에 속한 것의 주된 것을 생각[想]이라 한다.
이 느낌[受]과 생각[想]이 있기에,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고 모양을 취하면서 마음이 발동하기 때문에
분노를 일으키고 신구의(身口意)의 삼독(三毒)의 업(業)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 삼독(三毒)은 근본은 <나(我)>에 있고,
나의 뿌리는 무명(無明)이라고 부처님은 말한다.
그래서 삼독(三毒)을 이렇게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탐욕(貪欲)은 부정관(不淨觀)으로 다스리고,
성냄(瞋)은 자비심으로 다스리고,
어리석음(痴)은 인연관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부정관(不淨觀)을 알고, 자비심을 일으키고,
인연관을 이해하고 알기에는 마음공부 즉 수행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부단(不斷)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선지식들은 화가 날 때 한 걸음만 물러나서 생각하라고 한다.
말이 그렇지 사실 중생이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은
그런 시간적인 여유나 틈이 없이 바도 말이나 행동으로 이어진다.
누가 나를 험담하고, 비방하고, 욕을 하면 자비심으로 대해야 하겠구나.
어리석어서 그렇구나!' 하고 나는 그렇게 대응하지 말아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공부가 철저하게 되어 있는 사람이다.
중생은 그러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중생인 것이다.
선승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눈을 뜨고 꿈을 꾸고 눈을 감고 꿈을 꾼다.”라고.
깨어 있을 때나 잠을 잘 때도 꿈을 꾼다는 것이다.
깨어 있을 때 사물을 보는 것은
마치 거울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것이라는 의미다.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비치진 그림자,
내 마음에 투영된 그림자를 본다는 의미다.
그 그림자가 바로 상(想)인 것이다.
실체가 없는 허상들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분노는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잠들어 있을 때도 꿈속에서 일어난다.
정신분석학자들에 따르면 깊은 수면 즉 숙면(熟眠)에 들면
꿈을 꾸지 않는 것이 아니라 깨어나서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라고 한다.
법(法)이란 인연이 생하면 일어나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마음이란 곧 의식(意識)을 말하며,
이 의식이 바로 상(想)인 것이다.
경에서 상(想)이란 心性 작용의 하나로 사물의 相을 心上에 떠올려서
언어를 일으키는 因이 되어 일체의 마음과 더불어
서로 응하여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구사론4>』에서는
”想이라는 것은 대경에서 차별 상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고했고,
『유식론3』에서는 ”想은 對境에서 像을 취하여 性으로 삼고
갖가지 이름을 붙여 업을 삼는 것을 말함이요,
대경에다가 分齊相(차별상)을 세워놓고 바야흐로 갖가지 이름을 따라
말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을 말한다.”라고 했다.
분노란 바로 마음속에 좋지 못한 기억(想), 마음을 거슬린 기억들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에 꿈속에서도 표출되는 것이다.
의식(意識)이란 생멸하는 모습이다. 찰나적으로 생하고 찰나에 사라진다.
그러면서도 앞의 뜻으로 인하여 법을 반연(絆緣) 하면서 의식을 낳게 된다.
말하자면 한 생각이 나고 사라지면서 마음이 차례로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이 마음 때문에 모든 마음을 일의(一意)라 한다.
한 생각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상(想)을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꿈은 왜 꾸는가?
마음에 상(想)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재되어 있던 상(想)이 인연이 되어
꿈속에서 표출되는 것이 꿈인 것이다.
『대지도론』을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연이 없으면 업(業)은 생기지 않고
인연이 없으면 생각[思]도 생기지 않습니다.
인연이 있어야 업이 생기고 인연이 있어야 생각도 생깁니다.”
말하자면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인연이 있으면 업이 생기고
인연이 없는 데서는 생기지 않는다.”라는 의미다.
꿈은 想을 인연으로 하여 생하고 멸한다는 의미다.
선하고 기분 좋았던 상(想)들은 꿈속에서도 즐겁고 행복한 꿈을 꾸고
억눌림 당하고, 상처를 입고, 분하고 억울했던 일들의 상(想)은
꿈속에서 고통을 받는 악몽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꿈이란 것은 깨어 있던, 꿈을 꾸든 모든 것이
마음 즉 상(想)이라는 의미다.
그 상(想)을 멸하는 것이 “깨달음”이요, 깨어 있음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나>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분별 망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들리는 소리에 따라, 소견이 일어나고 호(好), 불호(不好)의
애착이 일어나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를 참는 것이 아니라 분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안으로 잠시 잠재되었던 것은
언제가 다시 인연이 닿으면 표출하기 때문이다.
그 수행의 길을 예시한 하나로
대승에서는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을 말하고
근본불교에서는 사념처(四念處)를 말한다.
교학에서는 수행인이 어지러움 마음(亂心)을 그치게 하는 것을
사마타(奢摩他=止)라 하고 사념처에 의하여 관혜(觀慧)을 발하는 것을
비파사나(毘婆舍那= 觀)라고도 부른다.
이는 곧 지관(止觀) 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번뇌를 근원적으로 멸하기 위해서는 지관(止觀)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념처(四念處)는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
신념처(身念處)는 물질[色衆]을 대상으로 하고,
수념처(受念處)는 느낌[受衆]을 대상으로 하고,
심념처(心念處)는 의식[識衆]을 대상으로 말하고,
법념처(法念處)는 생각[想衆]과 지어감[行衆]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념처는 일어나 상(想)에 소견을 갖지도 말고
집착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想을 벗어난다는 말은 번뇌를 벗어난다는 의미다.
위에서 의식[識衆]이라 함은 안팎의 6입(入)이 화합하기 때문에
여섯 가지의 깨달음을 내므로 의식[識]이라 한 것이다.
안의 연의 힘[內緣力]이 크기 때문에
안식(眼識)이라 하고 나아가 의식(意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꿈을 꿀 때는 전오식(前五識)이 작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즉 오근(五根)이 작동하지 않는다.
이를 전오식(前五識)이라 한다. 이 전오식에 의지하지 않고
의식이 홀로 작동하는 것을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 한다.
꿈이란 전오식(前五識)과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일어나
십팔계(十八界)의 의식을 반연(伴緣)하는 것이다.
우리의 꿈이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독두의식인 것이다.
선정에서는 육식(六識)의 심(心), 심소(心所)를 멸진(滅盡)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선정의 경계를 멸진정(滅盡定)이라 하고,
모든 심상(心想)을 없애는 것을 무상정(無想定)이라 한다.
외도는 무상정의 과를 얻으면 열반에 든다고 한다.
꿈이란 실체가 없는 허상인 것이다.
눈을 뜨고 꾸는 꿈도, 눈을 감고 꾸는 꿈도 모두가 허상인 것이다.
그 허상이라는 것이 바로 상(想)이라는 것이다.
그 상(想)을 인연하여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일어나는 번뇌를 멸하기 위해서 심(心)과 심소(心所)의 모든 상(想)을
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길이 선정(禪定)이요, 삼삼매(三三昧)라는 것이다.
삼삼매(三三昧)라는 공삼매(空三昧), 무상삼매(無相三昧),
무원삼매(無願三昧)를 말한다. 대승에서는 유루정(有漏定)을 삼삼매라 하고,
무루정(無漏定)을 삼해탈문(三解脫門)이라고 분별하기도 한다.
『반야경』으로 말하면 무상정, 멸진정으로 이르는 길은
곧 반야 바라밀의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지도론』
“꿈은 거짓이어서 마치 미치광이가 헛것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며,
이 삼삼매는 바로 진실한 법이다.”라고 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만일 반야바라밀의 진실한 지혜로 인하여 5중(衆)은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는 것이요, 자기 모양[自相]을 여의고
제 모양이 공이어서 본래부터 필경 나지 않은 것이라고 관찰하면
그때 나와 내 것이란 마음이 소멸하는 것이
마치 해가 뜨면 모든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나와 내 것이란 마음이 소멸하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번뇌가 소멸하고,
그 밖의 다른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에 업의 인연도 소멸하며,
업의 인연이 소멸하기 때문에 나고 죽는 가운데서
왕래하는 것이 끊어지는 것을, 이것을 바로 깨끗하다[淨]고 한다.
비록 온갖 법의 모양은 공하다 하더라도
또한 이런 인연 때문에 깨끗한 것도 있고 더러운 것[垢]도 있다.”라고 했다.
선가에 “몽중일여(夢中一如)”란 말이 있다.
깨어 있을 때나 꿈을 꿀 때도 마음이 깨어 있으라는 의미다.
또 이를 오매일여(寤寐一如)”라고도 한다. 깨어 있다는 말은 곧
상(想)이 멸한 상태를 말한다. 무상정(無想定)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완전한 숙면 상태에서 심(心) 심소(心所)의 모든 상(想)을 멸한
멸진정(滅盡定)에 든다고 한다. 이는 성인의 경지요,
십지(十地) 이상 위(位)에 오른 보살의 경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생이 잠을 자면서도
의식이 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부단한 수행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대해, 또는 상대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날 때
내가 과거의 상(想)에 애착을 느껴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면 분노를 벗어날 수 있다고 경은 말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소견(所見)과 애착(愛着)으로 인한 것이
상(想)이 되어, 이 상(想)을 인연으로 분노가 일고,
번뇌가 생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지혜가 없으면 또한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경에서는 그래서
“번뇌가 인연에서 생긴다는 것을 알면 보리를 얻는다“라고 말한다.
인연으로부터 번뇌가 생김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자신의 성품이 없이 일어난 법이고,
이는 생함이 없는 법임을 아는 것이다.
경에서 보리를 얻었다는 말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
중생이 실천할 수 있는 길은 깨어 있을 때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마음을 주시하는
그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조금만 노력하고 주시하면 된다.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면 흔들림도 없다.
듣고 보고 행하는 일에 애착을 가지고
집착하는 마음만 다스리면 가능한 것이다.
선가에서 말하는 “수처작주(隨處作主)” 란 말도 이를 말하는 것이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매사 깨어 있으라는 의미다.
보고 듣고 행하는 그 마음이 일어나는 그것을 주시하라는 의미다.
그렇게 사유하는 것이 일상화되면 분노도 점차 극복할 수 있고
꿈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분노와 일체 번뇌가 내 마음의 상(想)이 인연이 되어
발생함을 알기 때문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듯이
자연은 머물지 않고 변해간다. 우리 마음 또한 마찬가지다.
분노도 마찬가지다.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요, 의식이기 때문이다.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마음공부가 따라야 한다.
보살 수행의 으뜸인 육바라밀에서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을 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유의할 것이 있다. 정진+ 바라밀이다.
부단한 노력에 지혜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맹목적인 수행의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실제가 아닌 모든 번뇌 등은 실제가 없음을 가까이하고 익히면
곧 제거하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번뇌는 가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제거함이 있다면 곧 가는 것이 있게 되고,
이미 가는 것이 있다면 곧 오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일체의 결사는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유위는 오는 일도 없고
가는 일도 없음을 아는 것을 번뇌를 벗어난 것이라 합니다.”
(대방광비밀여래장경)
가고 옴이 없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의미다.
허상이라는 의미다.
분노도, 일체 번뇌가 모두 그러함을 이해하고 마음을 부단히 주시한다면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여
소견을 일으키고 애착을 일으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곧 분노와 일체 번뇌의 결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박이란 곧 탐착(貪着)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탐착하지 않고
둘로 분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상(想)에 매몰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묶는
부동심을 가져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