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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판서이공신도비명 병서 - 이의현(李宜顯)
(刑曹判書李公神道碑銘 幷序)
옛날 주(周)나라의 강왕(康王)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남긴 공렬을 칭송하며 신하와 백성들에게 유시하기를, “웅걸스러운 용사들과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충신들이 왕가를 보호하고 다스렸다.”라고 하였다. 문왕과 무왕의 덕이 진실로 지극하지만, 만약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신하가 힘을 다하여 좌우에서 보좌하지 않았다면 끝내 훌륭한 치적을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숙종대왕(肅宗大王)이 오랫동안 인도하여 교화를 실현하면서 인재들을 모두 등용하였는데, 이때에 이공 홍술(李公弘述)을 종실(宗室) 중에서 선발하여 훈련대장으로 삼고 도성의 친병(親兵)을 전적으로 맡게 하였다. 당시 흉적들이 담처럼 에워싸서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던 가운데 공이 하루아침에 대장의 인장을 차고 무신들을 통솔하게 되니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이에 조정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말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간성(干城)의 장수를 얻어 긴요한 직책을 맡기셨다. 이제 국사를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공이 훈련도감을 맡은 지 5년 만에 숙종이 승하하니, 흉적들이 마침내 숨통을 틔우고 서로 경하하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제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행상(倖相) 남구만(南九萬)의 무리가 마침내 윤휴(尹鑴), 허적(許積)의 잔당과 함께 모의하여 은밀히 기회를 엿보았다. 이때에 경종(景宗)이 새로 즉위하고서 후사를 두지 못하였고 환관과 궁녀들이 권력을 행사하여 근심스러운 일이 만연하였다.
그러던 터에 마침 대관(臺官)이 상소하여 저위(儲位)를 세울 것을 청하자, 대신 김공 창집(金公昌集), 이공 건명(李公健命), 이공 이명(李公頤命), 조공 태채(趙公泰采)가 입대하여 이를 거듭 청하였다. 이에 성상이 동조(東朝)에 들어가 이를 고하고 자전(慈殿)의 뜻을 받들어 금상(今上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
명이 내리자 궐내의 세력과 결탁한 자들이 분을 내고 불평하더니 마침내 역신(逆臣) 유봉휘(柳鳳輝)의 상소가 있게 되었고 조태구(趙泰耈)와 한세량(韓世良)의 상소가 이어졌는데, 그 말뜻이 더욱 흉악하였다. 이윽고 또 김일경(金一鏡), 이진유(李眞儒), 박필몽(朴弼夢), 이명의(李明誼) 등의 흉적들이 같은 무리인 윤성시(尹聖時), 서종하(徐宗廈), 정해(鄭楷)를 이끌고서 구언(求言)하는 성지(聖旨)에 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였다.
또 환관과 궁녀가 궁중 안에서 이들과 협력하니, 일의 형세가 더욱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곧이어 김일경에게 특별히 높은 관작을 내려 대대적으로 도륙을 자행하였는데, 맨 먼저 비망기를 내리기를, “이 아무개는 간사하고 흉악하여 윤상(倫常)을 무너뜨리는 자로서, 망측한 마음을 몰래 품고 있으니, 훈련대장의 직임을 맡길 수 없다.”라고 하며 선전관을 보내어 병부(兵符)를 빼앗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간 이진유가 육현(陸玄)의 일과 관련하여 공을 조사하여 심문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육현의 일이 있었던 당시에 포도청 대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육현이 도적에게 회유되어 이름을 바꾸고 변장을 하는 등 행적이 망측하더니, 무리에 가담하여 도둑질을 하였다고 자백을 하고는 장형을 받다가 죽어 버렸다.
그러자 흉악한 무리가 육현이 김공 창집의 음모를 알고 있으므로 공이 김공의 사주를 받아 육현을 때려 죽여 입을 다물게 한 것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니,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이었다. 이때에 공이 김공과 함께 왕실을 보좌하고 있었으므로 저들이 음모를 꾸미고자 해도 감히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공과 김공을 매우 미워하여 먼저 장수와 대신을 죽인 뒤에 대사를 행하고자 한 것이다. 육현의 일을 조작한 다음에는 또 궁성을 호위하려 했다는 설을 만들어내어 동궁을 위협하고 마침내 공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다. 공은 이때 나이가 76세였는데, 형신을 앞두고도 말씨가 의연하여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이에 의금부의 군졸들이 모두 혀를 내두르며 놀라고 탄복하였다.
흉악한 무리가 또 서덕수(徐德修)를 체포하여 회유와 협박을 반복하였는데, 서덕수는 바로 세제빈(世弟嬪)의 조카였다. 흉악한 무리가 서덕수가 혼절한 틈을 타서 한 장의 죄안을 꾸며내어 서덕수에게 강제로 서명하게 하고 이어서 공을 터무니없이 협박하였다.
그러자 공이 호통치며 말하기를,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내가 어찌 거짓으로 자복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형틀에서 생을 마감하니, 바로 임인년(1722, 경종 2) 5월 17일이었다. 이에 앞서 흉적의 무리가 역적 목호룡(睦虎龍)을 사주하여 급변서(急變書)를
올리게 하였는데 글 속에서 성상을 무함하여 몹시 불미스러운 말을 해대니, 사람들의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였다.
그들이 서덕수를 체포한 의도는 목호룡이 올린 급변서의 내용을 입증하여 위로 동궁을 침해하려는 데에 있었으며, 또 한편으로 반드시 공의 거짓 자백을 받아내어 흉악한 말을 사실로 날조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 뒤에 적신(賊臣) 김일경이 지어 올린 교문(敎文) 가운데 “만약 궁성에 병력을 배치하는 일이 실행되었더라면〔若遂宮城之陳兵〕”이라고 한 말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이진유의 족제(族弟)인 이진수(李眞洙)가 또 법을 남용하여 공에게 노적(孥籍)의 형전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다가 금상 원년(1725)에 제일 먼저 김일경과 목호룡을 주벌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모두 쫓아내었으며 사대신(四大臣)의 원통함을 씻어주었다. 그리고 죄안을 검토할 것도 없이 바로 공을 복관시켜주고 이어서 명하여 공에게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를 추증하였다. 또 제사를 담당하는 관원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2년 뒤 정미년(1727, 영조3)에 흉악한 무리가 다시 정권을 잡아 과거의 죄안들을 모두 그대로 되돌려서 임인년의 무옥(誣獄)을 다시 예전대로 유효하게 만드니, 공이 추증받은 관작 또한 다시 환수되었다. 흉악한 무리들이 한창 조정 안팎에 포진하고 있으면서 무신년(1728, 영조 4)의 반란을 빚어내어 성상을 무함하는 온갖 말들을 선동하더니 끝내 군대를 일으켜 흉포한 무리들을 이끌었다. 이 때문에 간악한 자들이 더욱 설쳐대어 의리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국가가 망하지 않은 것이 또한 다행이었다.
신유년(1741, 영조 17)에 이르러 하늘이 성상의 마음을 깨우쳐 준 덕분에 성상이 대훈(大訓)을 내려 임인년 무옥의 죄안을 불태우고 아울러 추후에 삭탈하였던 여러 공들의 관직을 회복하도록 명하니, 공도 다시 예전대로 복관되고 증작되었다. 이에 신축년과 임인년의 의리가 해와 별처럼 밝게 드러나서 충신과 역신의 구분이 백년을 기다릴 것 없이 정해지게 되었다. 이상이 공이 일생 동안 겪은 영욕의 대략이다.
공은 자가 사선(士善)이다. 중종대왕(中宗大王)의 아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은 선조(宣祖)의 생부인데, 그 뒤로 하원군(河原君) 정(鋥), 당은군(唐恩君) 인령(引齡), 응천군(凝川君) 돈(潡)이 3대를 내려오며 습봉(襲封)하였다. 그러다가 휘 석한(錫漢)에 이르러 비로소 왕실의 족보를 떠나 이조 판서에 추증되니, 이분이 바로 공의 선고이다. 선비(先妣) 증 정부인(貞夫人)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호군 광익(光翼)의 딸이다.
공은 3세에 모친을 여의고서 선고 판서공을 섬기며 극진히 효성을 다하였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의연하였고 말과 웃음이 적고 기개가 넘쳤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29세에 을묘년(1675, 숙종 1)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해서는 거상(居喪)을 잘 하였다고 이름이 났다.
상기(喪期)를 마친 뒤에는 활쏘기의 재주로 당상관에 올라 연이어 자산(慈山)ㆍ평산(平山)ㆍ창성(昌城)ㆍ선천(宣川) 네 곳의 부사(府使)와 소강 방어사(所江防禦使)가 되었다. 포계(褒啓)로 인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황해도 병사(黃海道兵使)가 되었다.
기사년(1689, 숙종 15)에 권흉(權凶)에게 미움을 받아 좌천되어 길주(吉州)와 회령(會寧) 두 변방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가, 갑술년(1694, 숙종 20)에 정국이 일신되고서 평안도 병사(平安道兵使),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후로 두 차례 총융사가 되고 한 차례 어영대장이 되었으며,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경기도 통어사(京畿道統禦使)가 되었다.
경인년(1710, 숙종 36)에 서쪽 지역에 문제가 생기자 다시 평안도 병사로 나갔으며, 들어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나갔다. 병신년(1716, 숙종 42)에 마침내 훈련대장에 제수되는 명을 받았고, 연이어 형조ㆍ병조의 참지가 되었으며, 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숙종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은혜를 미루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스스로 ‘종신(宗臣)으로서 성상의 신임을 얻었다.’라고 생각하여 반드시 죽음으로써 자신을 알아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세상의 변고를 만나서 혈성(血誠)을 다할 것을 마음에 맹세하여 마침내 순국하는 큰 충절을 이루었으니, 아, 위대하도다.
내가 일찍이 생각하건대, 공의 죽음은 보통사람들과 크게 다른 점이 세 가지 있다. 위태로운 상황을 지탱하고 기울어 가는 국면을 안정시켜 한결같은 마음을 환하게 드러냈으니, 이는 대행대왕(大行大王)을 위하여 죽은 것이요, 살육하는 기세가 만연하였는데도 끝내 말을 바꾸지 않았으니, 이는 세제(世弟)를 위하여 죽은 것이다.
또 음모와 계략이 십수 년에 걸쳐 끊임없이 자행되었으니, 이는 3백 년을 내려온 종묘사직을 위하여 죽은 것이다. 그러니 그저 자신의 몸뚱이와 한낱 사소한 절개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 공은 포부가 바르고 빼어나며 지려(志慮)가 곧고 확고하여 의리상 마땅히 행해야 할 일에는 발분(發奮)하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젊었을 때에 식암(息菴) 김공 석주(金公錫胄)로부터 국사(國士)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으며, 신공 여철(申公汝哲)은 꼿꼿하여 남을 인정하는 일이 적었는데 유독 공을 몹시 아끼고 인정해 주었다. 공이 말년에 크게 절의를 수립하여 백세토록 이름이 전해지게 되었으니, 선배들이 분명하게 인재를 알아보았던 것이 어찌 우연이었겠는가.
부인 광주 김씨(廣州金氏)는 증 승지 정탁(廷鐸)의 딸로, 양주(楊州) 옥류동(玉流洞)에 공과 함께 합장되었다.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세희(世禧)이고, 딸들은 각각 심수징(沈壽徵), 조명복(趙明復)에게 출가하였다. 세희는 아들이 없어 양자 명익(明翼)을 두었는데, 공의 덕분에 참봉이 되었다. 외손 조덕중(趙德中)은 수군절도사이다. 명익은 3남을 두었는데, 형덕(亨德), 형국(亨國)이며, 나머지 아들은 아직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왕실의 귀한 집안에서 / 天潢貴派
빼어난 정기를 넉넉히 쌓으니 / 厚厥亭毒
영웅호걸의 인재가 태어나 / 篤生駿雄
우리나라를 도왔네 / 佑我邦國
일찍부터 병법을 일삼아 / 早事韜鈐
활로 버들잎을 뚫을 정도로 재주가 오묘하더니 / 藝妙穿楊
서쪽 고을에서 공적을 남기고 / 西州留績
남쪽과 북쪽 지역을 통솔하였네 / 統南北方
주장(主將)이 되어 장수의 수레를 타니 / 中權笠轂
은총과 돌봄이 남달랐고 / 恩顧殊特
삼군의 장으로 발탁되니 / 擢長三軍
임금이 기둥처럼 의지하였네 / 倚如柱石
장차 공을 필요로 하여 / 逝將需公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는데 / 以擬艱棘
경종대왕 원년과 이듬해에 / 景宗元二
나라의 일이 망극해졌네 / 國事罔極
여우와 들쥐들이 소굴을 만들고 / 狐鼠窟穴
썩은 환관과 영합하였네 / 挾以腐子
서로 뒤엉켜 몰래 엿보니 / 盤互辟倪
귀신처럼 은밀하고 비밀스러웠네 / 鬼陰神秘
깊고 깊은 무덤가에 / 沉沉黃土
붉은 충심이 맺혀 있네 / 鬱鬱丹衷
공이 상제 계신 곳으로 돌아가 / 公歸帝所
손수 나쁜 기운을 몰아내었네 / 手抉雰雺
세 죄안이 말끔하게 씻어져 / 三案痛洗
오륜이 밝게 빛나게 되었네 / 五倫昭晣
옥류동의 언덕에 / 玉流之阡
공의 무덤이 우뚝하도다 / 堂斧嶻嵲
억울함을 머금고 풀지 못하니 / 有衘未洩
빛나는 기운이 왕성하여라 / 光氣熊熊
당당한 장부여 / 堂堂丈夫
세상에서 드물게 만날 수 있건만 / 間世一逢
어쩌다 한번 나타나면 / 或時發現
또 곤궁한 재앙을 당하네 / 又罹鞠訩
위태로운 때를 만나 길이 생각하게 되니 / 臨危永念
어쩔 수 없도다 다시 살아 돌아오게 하기 어려운 것을 / 已矣難作
내가 남겨진 훌륭한 공적을 서술하여 / 我述遺美
공의 영령을 위로하노니 / 以慰毅魄
천년만년토록 / 維千百禩
이곳을 지나는 자는 반드시 예를 갖출지어다 / 過者必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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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옛날 …… 하였다 :
강왕(康王)은 주 성왕(周成王)의 아들로, 성왕의 상중(喪中)에 백관들이 조회하여 천명을 공경히 이을 것을 권면하자 이들에게 유
시하여 말하기를, “옛날 군주이신 문왕과 무왕께서 크게 공평하고 부유하게 하시며 처벌을 힘쓰지 아니하사, 지극함을 이루며 가지
런히 하고 정성스럽게 하시어 밝은 정치를 천하에 밝히시자, 또한 웅걸스러운 용사들과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충신들이 왕가를 보호
하고 다스려서 문왕과 무왕이 상제에게 바른 명을 받으시니, 황천이 그 도를 순히 하시어 사방을 맡겨 주셨다.〔昔君文武, 丕平富,
不務咎, 底至齊信, 用昭明于天下, 則亦有熊羆之士, 不二心之臣, 保乂王家, 用端命于上帝, 皇天用訓厥道, 付畀四方.〕”라고 하
였다.《書經 周書 康王之誥》
[주02] 마침내 …… 이어졌는데 :
1721년(경종 1) 8월에 노론(老論) 사대신(四大臣)의 건의에 따라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로 삼을 것을 결정하자, 행 사직 유봉휘
(柳鳳輝)가 상소하여 세제를 책정한 일의 부당함을 논하고 이를 건의한 신료들을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튿날에 이 일을 두고 대신과 삼사(三司)가 유봉휘를 국문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자, 우의정 조태구(趙泰耈)가 차자를 올려 명을
거둘 것을 청하였다. 집의 조성복(趙聖復)이 세제를 참정(參政)시킬 것을 청함에 따라 경종(景宗)이 대리청정(代理聽政)의 명을 내
렸다가 다시 거둔 일이 있었는데, 부사과 한세량(韓世良)이 상소하여 조성복이 몰래 왕위를 옮길 계책을 품었다고 논핵하며 그를 처
벌할 것을 청하였으며, 다시 대리청정을 명하는 비망기가 내리자, 조태구가 상소하여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다. 《景宗實錄 1年 8
月 20日ㆍ23日ㆍ24日, 10月 10日ㆍ12日ㆍ13日ㆍ14日》
[주03] 사간 …… 청하였다 :
1720년(경종 즉위년) 9월에 당시 포도청 대장으로 있던 이홍술(李弘述)이 술사(術士) 육현(陸玄)을 장살(杖殺)한 일이 있었는데,
1721년 12월에 사간 이진유(李眞儒)가 청대하여, 육현이 김창집(金昌集)과 친밀하게 지내다가 배반하고 떠났으므로 이홍술이 김
창집의 사주를 받아 육현의 입막음을 하기 위해 그를 장살하고 거짓으로 옥안(獄案)을 만들어내었다고 아뢰고 나국(拿鞫)하여 엄중
하게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景宗實錄 1年 12月 12日》
[주04] 궁성을 …… 설 :
노론(老論) 대신들이 세제(世弟) 대리청정(代理聽政)의 비망기가 내리면 소론(少論)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중군(中軍)을 시켜 궁성
을 호위하게 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당시 훈련대장으로 있던 이홍술(李弘述)이 김창집(金昌集)의 분부를 받아 김창집의 심복인 유
취장(柳就章)을 중군으로 임명했다는 내용이다.《景宗實錄 2年 5月 17日, 7月 21日》
[주05] 서덕수(徐德修) :
1694~1722. 자는 사민(士敏), 본관은 대구(大丘)이다.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장손으로, 영조(英祖)의 비
정성왕후(貞聖王后)에게 조카가 된다. 1722년(경종2)에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옥사가 발생하였는데, 김창도(金昌道), 이정
식(李正植), 조흡(趙洽) 등이 서덕수가 독약을 사용하여 임금을 시해하려는 역모에 참여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이에 김용택(金龍澤), 심상길(沈尙吉), 이천기(李天紀), 정인중(鄭麟重) 등과 함께 국청(鞫廳)에 잡혀 들어가 심문을 당하다가 29
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되었다. 1738년(영조14)에 무고하다는 사실이 밝혀져 신원이 회복되었고, 이후 집의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주06] 만약 …… 실행되었더라면 :
1722년(경종 2) 9월에 역적이 토벌되었음을 태묘(太廟)에 고하고 이어 김일경(金一鏡)이 지어 올린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는데,
그 교문에 “만약 궁성에 병력을 배치하는 일이 실행되었더라면, 어찌 궁중의 뜰에 유혈이 낭자함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倘或遂宮
城之陳兵, 抑何免禁庭之蹀血.〕”라는 구절이 있다.《景宗實錄 2年 9月 21日》
[주07] 노적(孥籍)의 형전 :
중죄를 지었을 경우 본인을 극형에 처한 뒤에 그 처자식까지 연좌시켜 같은 형률을 적용하거나 노비로 삼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이
른다.
[주08]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1530~1559. 이름은 초(岹), 자는 경패(景伂),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중종(中宗)의 일곱째 아들로, 중종의 후궁인 창빈(昌嬪) 안
씨(安氏)의 소생이고, 부인은 판중추부사 정세호(鄭世虎)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에 명종(明宗)이 후사 없이 죽자,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이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그가 곧 선조(宣祖)이다. 1569년(선조2)에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주09] 포계(褒啓) :
각 도의 관찰사나 어사가 고을 수령의 선정(善政)을 포창(褒彰)하도록 임금에게 아뢰던 일을 말한다.
[주10] 갑술년에 정국이 일신되고서 :
기사년(1689, 숙종 15)에 일어난 환국(換局)으로 폐위되었던 인현왕후(仁顯王后)가 갑술년(1694, 숙종 20)에 일어난 환국(換
局)으로 다시 복위되고 정권 또한 남인(南人)에서 서인(西人)으로 넘어오게 된 것을 말한다.
[주11] 활로 …… 정도 :
궁술(弓術)이 뛰어남을 표현하는 말로,《사기(史記)》〈주본기(周本紀)〉에 “초(楚)나라에 양유기(養由基)란 사람이 있는데, 활
을 잘 쏘아 백 보 밖에 있는 버들잎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라고 하였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류재성 김창효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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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刑曹判書李公神道碑銘 幷序。
昔周之康王, 稱揚文、武之遺烈, 以告諭臣民曰 “則有熊羆之士, 不二心之臣, 保乂王家。” 蓋文、武之德固至矣, 苟無勇敢忠實之臣, 戮力而夾助之, 則卒無以得僝其治功矣。 洪惟我肅宗大王, 久道化成, 群才畢登, 迺簡拔李公弘述於璿籍中, 爲訓鍊大將, 一以輦下親兵畀之。 于時凶賊堵立, 國勢危疑, 公一朝佩將印, 領群弁, 而衆心帖然以安。 於是中外人庶咸一口言曰: “我聖上旣得干城之將, 任以心膂, 國事其無虞矣。” 公掌訓局五年, 而肅宗上陟, 凶孼乃吐氣相賀曰 “吾輩可以逞矣。” 倖相九萬之黨, 遂與鑴、積餘黨協謀, 陰伺𡼏巇。 是時景廟新卽位無嗣, 宦妾用事, 憂端澒洞。 會臺臣上章請建儲, 大臣金公昌集、李公健命、李公頤命、趙公泰采入對申請。 上入告東朝, 承慈旨, 封今上爲王世弟。 命下, 諸糾結幽奧者, 憤然不平, 遂有逆臣鳳輝疏, 泰耉、世良疏繼之, 意愈凶慝。 已又一鏡、眞儒、弼夢、明誼等諸賊, 率其徒聖時、宗廈、楷, 托以應旨, 聯章投匭, 宦妾從中應和, 事機尤有不忍言者。 俄特擢一鏡秩, 大行屠戮, 首下備忘記以爲 “李某奸凶蔑倫, 陰懷不測之心, 不可置之將任。” 發遣宣傳官奪符以來。 亡何司諫眞儒請究問公陸玄事。 蓋公時兼捕盜廳, 玄爲盜所引, 變名幻服, 情迹叵測, 旣輸結黨爲盜, 而徑斃於杖。 凶黨刱蜚語, 以爲玄知金公昌集陰事, 公受金公嗾, 撲殺使口絶, 乃杜撰也。 時公與金公共奬王室, 渠輩有謀, 不敢動, 甚忌之, 欲先殺將相, 仍行大事。 旣粧出玄事, 又做宮城扈衛之說, 危逼東宮, 遂以淫刑加公, 公時年七十六, 臨刑辭氣凜烈不少屈, 金吾軍卒, 無不吐舌驚歎。 凶徒又收徐德修, 且誘且喝, 德修卽東宮嬪之姪也。 凶徒乘德修昏絶出一案, 使德修强押, 又姿意脅公。 公大言曰: “死易耳, 吾豈誣服者哉?” 竟卒於桁楊之下, 寔壬寅五月十七日也。 先是, 凶賊輩嗾逆豎虎龍, 上急變書, 書中誣及聖躬, 語極狼藉, 令人髮豎。 其收德修意在證成虎龍書, 以上浸東宮, 而又必欲受公誣服, 以實凶言。 其後鏡賊敎文所謂“若遂宮城之陳兵”一句語, 卽指此也。 眞儒族弟眞洙, 又骫法請施孥籍之典。
上之元年, 首誅鏡、虎, 屛黜群凶, 追伸四大臣冤, 不待考案而復公官。 又命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 又命祠官賜祭。 粤二年丁未, 凶黨復得志, 盡仍前案, 壬獄之誣自如, 而公之官贈, 亦被還奪。 群凶方排布內外, 釀成戊申之亂, 凡係聖誣, 無不煽俑, 終爲擧兵, 群醜之倡導。 由是凶孼益肆, 義理滅絶, 國之不亡亦幸耳。
至歲辛酉, 天誘聖衷, 誕降大訓, 命燒壬寅誣案, 竝還追削諸公職, 而公之復官贈爵, 又復如初。 於是辛壬義理, 昭揭如日星, 而忠逆之分, 不待百年而定。 此公終始伸屈之大略也。
公字士善。 中宗大王子德興大院君, 宣祖之本生考, 而河原君鋥、唐恩君引齡、凝川君潡三世襲封。 至諱錫漢, 始離宗籍, 贈吏曹判書, 卽公之考也。 妣贈貞夫人慶州金氏, 護軍光翼女。 公三歲失恃, 事判書公克盡誠孝。 爲人沈毅, 寡言笑, 富氣槪, 善騎射。 二十九, 登乙卯武科。 丁外憂, 以善喪聞。 制除, 用射藝陞緋, 連爲慈山・平山・昌城・宣川四府使、所江防禦使。 因褒啓陞嘉善, 爲黃海兵使。 己巳, 爲權凶所忌, 左遷吉州、會寧二邊守。 甲戌, 更化, 爲平安兵使、統制使。 自後再爲摠戎使, 一爲御營大將, 爲北兵使、京畿統禦使。 庚寅, 有西顧憂, 再出平安兵使。 入爲漢城左尹, 出水原府使。 丙申, 遂有訓局之命, 連貳刑、兵二曹, 又特陞資憲。 以肅廟入耆社, 推恩陞正憲, 拜判尹、刑曹判書。 公自以宗戚之臣, 蒙被聖上之倚任, 必欲以一死報答知遇, 遭罹時變, 誓心瀝血, 卒成殉國之大忠, 嗚呼偉矣! 余嘗謂公之死有絶異於凡人者有三。 持危定傾, 一心炯然, 則以大行而死; 殺機蹶張, 終不易辭, 則以震器而死; 陰謀密計, 亘十數年未已, 則以三百年祖宗鍾簴而死焉, 不但以一身一節死也。 公抱負經奇, 志慮貞確, 義所當爲, 奮不顧後。 少時息庵金公錫胄嘗期以國士, 申公汝哲簡亢少許可, 獨深推許公。 公於末年, 有大樹立, 百世可傳, 先輩鑑識之明, 夫豈偶然也哉夫人廣州金氏, 贈承旨廷鐸女, 與公合窆于楊州玉流洞。 生一男二女: 男世禧, 女適沈壽徵、趙明復。 世禧無嗣, 有繼子明翼, 以公任爲參奉。 外孫趙德中, 水使。 明翼有三男: 亨德, 亨國, 餘幼。 銘曰。
天潢貴派, 厚厥亭毒。 篤生駿雄, 佑我邦國。 早事韜鈐, 藝妙穿楊。 西州留績, 統南北方。 中權笠轂, 恩顧殊特。 擢長三軍, 倚如柱石。
逝將需公, 以擬艱棘。 景宗元二, 國事罔極。 狐鼠窟穴, 挾以腐子。 盤互辟倪, 鬼陰神秘。 沈沈黃土, 鬱鬱丹衷。 公歸帝所, 手抉雰雺。
三案痛洗, 五倫昭晢。 玉流之阡, 堂斧嶻嵲。 有銜未洩, 光氣熊熊。 堂堂丈夫, 間世一逢。 或時發現, 又罹鞠訩。 臨危永念, 已矣難作。
我述遺美, 以慰毅魄。 維千百祀, 過者必式。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