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봉선생묘지명(晦峰先生墓誌銘)
민국 43년(1961) 4월 7일(갑인일), 회봉(晦峰)선생의 묘소를 덕곡 마을 동쪽 기슭 간좌 언덕에 이장하고서 문인 하용환(河龍煥), 하영기( 河永箕), 성환혁(成煥赫) 등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이보다 앞서 선생의 아들 영윤(泳允)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려할 적에 내개 유언으로 부탁하며 말하기를 "아, 선친께서 세상을 떠난 지 15년 만에 세상이 날로 격변하여 덕(德)을 아는 이가 더욱 없어졌습니다.
여러 사람이 말하길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는 것은 참으로 그만 둘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같이 어리석고 비루한 사람이 어떻게 선생의 묘지명을 지을 수 있겟는가!
회봉선생묘지명(晦峰先生墓誌銘) - 李一海
아! 선생의 휘는 겸진(謙鎭), 자는 숙형(叔亨), 자호는 회봉(晦峯)이다. 하씨(河氏)의 본관은 진양(晉陽)인데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문벌이 드러났다. 상서공부 시랑 휘 공진(拱辰)이 비조이다. 고조는 휘 이태(以泰), 호는 함와(涵窩)이며, 증조는 휘 정현(正賢), 조부의 휘는 학운(學運), 호는 만취(晩翠)이다. 부친의 휘는 재익(載翼)이며, 모친은 분성 허씨(盆城許氏) 정(湞)의 딸이다.
선생은 고종 경오년(庚午年, 1870, 고종 7) 1월 28일에 태어났다. 3세에 글자를 알았고, 9세에 긴 문장을 암송하였고, 20여세에는 준재(俊才)로 일컬어지며 식견(識見)을 깊게 하여 재목이 되었다. 그러나 오히러 각고의 노력을 그치지 않아 일찍이 한 달 동안 정좌하여 두꺼운 솜바지가 닳아 뚫어져 새것으로 바꾸어 입은 적이 세 번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옛 경전(經典)을 두루 읽고 성리설(性理說)을 정밀히 연구하여, 학문을 축적한 큰 규모와 도(道)에 나아간 깊은 조예는 사람들이 능히 측량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저술을 겸하여 단련했는데, 시(詩)는 정절공 도연명(陶淵明)의 유음이 있고 두보의 의리와 소식의 격조를 참작하였으며, 산문은 한유, 구양수, 왕안석, 증공 사이를 출입하였다.
이때에 다산의 곽 징군 선생이 유학의 종장이었는데 선생을 국기로 허여하여 자신을 이어 유학을 흥기시키리라 기대한 것이 매우 성대했으며, 창강 김택영, 난곡 이건방, 중국의 장건 등 또한 다른 사람을 통해 교육을 청하였다.
국가의 사직이 무너질 즈음, 선생은 이미 산림에서 중망 받고 있었다. 기미년(己未年, 1919) 이후 온 나라가 피로 물들었을 때에는 왜적의 정탐이 걸핏하면 선생 주위에 있었다. 파리장서 사건으로 유림들이 옥에 갇혀 욕을 당했는데, 더러는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선생은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와 나라는 서로 표리가 된다. 지금 정학을 강론하고 대의를 밝혀 나라가 망한 상태에서 인심을 선하게 하고 장차 나라를 회복하려 할 적에 천리를 인도해야하니,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라고 여겼다.
이에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고금의 학설을 모아 교감하면서 은미한 뜻을 분변하고 절충하여, 그것을 모아 "심위자모설"을 지었다. 또 당시 사람들의 윤리와 강상을 무너뜨리는 의론을 힘써 배척하여 물리쳤다. 만년이 되어서는 그 말씀이 날로 넉넉해져서, 선생의 한 몸에 사문의 중망이 달린 것이 대개 수십 년이나 되었다.
일찍이 관서 지방으로 가서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이르렀다. 후에 또 여러 번 이름난 산수를 유림하여 비분강개한 마음을 읊었는데, 풍유가 유장하였다. 평상시에는 책을 보고 글씨를 쓰면서 조용히 앉아 종일토록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때때로 정원을 산책할 적에는 작은 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나라 잃은 백성의 감회, 도학이 실추된 근심, 홀로 터득한 건해를 자신하는 기쁨 등이 머리속에 번갈아 떠오르고 뒤엉켜, 아련히 돌아오기를 잊은 것이 오래되었다.
제생이 학업을 청하면 반드시 그 사람이 가진 깊이와 장단을 살펴서 재단해 줄 뿐, 현모한 이치를 갑자기 끌어다 그가 미치지 못한 내용을 억지로 가르치지 않았다. 동년배들과 교유할 때도 또한 그러하였다. 향년 77세때 목에 종양을 앓아 병술년(丙戌年, 1946) 7월 11일 사곡리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음 달 증산 아래에 예로 장사를 지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 국권이 회복되었다.
선생은 작은 체구에 얼굴이 크고 이마는 네모나며, 눈에는 별빛 같은 광채가 있어 노년에 이르러 더욱 형형하였다. 마주앉아 애기하며 혹 5일이나 7일 밤을 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타고난 기상의 빼어남이 이와 같았는데 기거를 신중히 하고 기욕을 절제하여 수양이 극진해져서 화락한 기운이 넘쳐 흘렀다. 사람들이 이로써 '선생은 마땅히 오래도록 살아계실 것' 이라고 생각했는데, 끝내 그러시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버리신 것이다! 하늘이 버리신 것이다!
저술한 유서가 50권이다. 그리고 "주자어류절요" 20권, "동시화" 2권은 "동유학안" 30권과 함께 간행하였다. "명사강목" 약간 권을 정리하여 배껴두었으며, 수습하지 못한 유서의 간행은 페기하였다. 한성의 정인보가 잡저 몇 편을 보고 절하며 말하기를 "문장은 고인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으니, 어찌 단지 성리학의 대가일 뿐이랴!"라고 하였다. 여러 시문을 모아 정선하여 별본을 만들기로 약속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6.25 동란이 일어나 정인보가 북으로 납북되었다.
부인은 진주 정씨 정태표의 딸이다. 묘는 이장하는 날 합장하였다. 1남은 영윤이고, 2녀는 박덕종, 이병각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원근, 심근이고, 증손자 병동은 원근의 소생이다.
선생은 처음에 구강에 장수하는 공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와서 배우는 사람들이 좁고 누추한 것을 괴로워하자 덕곡서당으로 옮겼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 이곳에서 일년에 한 번 석전제를 지낸다. 지금은 묘역과 담장 하나 간격으로 가깝다. 동쪽 작은 문으로 나가 북쪽으로 꺽어 십여 보 올라가면 바로 묘소이다. 일어날 때나 앉아 있을때, 나아갈 때나 물러날 때에 신도가 아주 가까이 보이니 반드시 예전보다 남다른 감개가 있을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문이 도에 갈라지고
도 또한 도에서 나누어지네
유학의 도가 쇠퇴해져
서로 편협하여 지엽이 되었다.
회봉 선생께서 태어나셨는데
하늘이 훌륭한 자질을 내려주셨네
정밀하고 밝은 덕 내면에서 길러지고
화려하고 찬란한 재주 밖으로 배풀어졌네
화려하고 찬란한 재주, 정밀하고 밝은 덕으로
실추된 실마리를 부지하셨네
그래서 나는 군자라 말하지 않고
또한 성인의 무리라고 말하네
크나큰 천지의 조화
누가 행하고 누가 폐하리
덕과 재주 거두어 구천으로 돌아가시니
곧장 천년토록 영원하리
송지의 언덕에
넉 자 높이 묘소가 있는데
견고하고 안온하리니
이 묘지명을 그 안에 바칩니다.
문인 재령 이일해가 삼가 지음.
출처: 회봉집, 굴천집, 진양하씨문헌론, 19세기 경상우도 학자들 하.
회봉 하겸진 선생의 묘갈명이다. 갈명을 고제인 굴천 이일해 선생이 찬하셨다. 장문의 묘갈명이고 의미도 중후하다. 국역은 "19세기 경상우도 학자들 하권"에서 발췌했다. 원문과 대조해 보고, 약간 껄끄럽거나 부자연스러운 부분만 일부 수정했다. 번역자의 이해를 부탁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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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墓誌銘
民國四十三年四月甲寅. 改葬晦峯先生於德谷東麓坐艮原. 門人 河龍煥. 河永箕. 成煥赫等徵一海銘. 先是嗣君泳允病且死. 有遺囑. 亦云. 嗚呼. 自先生旣歿十有五年. 世變日劇. 而知德者愈無人. 二三子之必欲徵銘於同其親炙者. 誠非得己也. 不然如一海愚陋. 其烏足以銘先生哉.
噫. 先生諱謙鎭. 字叔亨. 別自號晦峯. 河氏出晉陽. 著麗. 韓二代. 尙書工部侍郞諱拱辰. 其鼻祖也. 高祖諱以泰. 號涵窩. 曾祖諱正賢. 祖諱學運. 號晩翠. 考諱載翼. 妣盆城許氏湞女.
高宗庚午正月二十八日先生生. 三歲識字. 九歲背誦萬言. 二十餘號爲雋才. 淵識成材矣. 猶刻苦不轍. 嘗終月坐. 厚綿袴腐穿而易以新者三. 是以其包羅墳典. 硏精性理. 績學之大. 造道之深. 至於人不能測知. 而兼工述製. 其詩有陶靖節遺音. 而參之以杜甫之義. 蘇軾之調. 文則出入於昌黎. 歐陽. 王曾之間. 當是時茶山郭徵君先生儒宗也. 許先生爲國器. 所以屬望繼興者甚殷. 而金滄江澤榮. 李蘭谷建芳.及華士張謇諸公. 亦稍稍以其所能. 介人請交焉.
國社斬. 先生旣負重名於林下. 而己未以還. 血濺全域. 則賊詗動在左右. 長書儒林諸獄拘辱. 或至彌年. 先生顧不懼不撓. 以爲道與國互爲表裏. 當今講正學. 明大義. 淑人心於旣亡. 導天理於將復. 非余其誰也. 於是聚勘中東群儒古今學說. 辨其微而折其衷. 會之爲心爲字母說. 又力詆時人悖倫滅常之論而闢之.屬至晩節.其言日富.獨以一身繫斯文之望者.蓋數十年矣.嘗西行過鴨江.到安東縣.後又屢游名山水.吟嘯慷慨.風流悠永. 而居平.卽手卷肘硯.澹坐竟晷.無一語.有時步旋庭除.細杖蠲地而行.子遺之感.喪墜之憂.獨見自信之喜.迭集交凝於眉宇之上.窅然喪其所返者久之.諸生請業.必視其人所操之淺深長短而裁之而已.未嘗驟汲玄妙.强其所不逮.於交輩亦然.
享年七十七 患項核.以丙戌七月十一日.考終于士谷里第.逾月禮葬甑山下. 前一歲國復.
先生短軀.巨顱方顙. 眼有星彩. 至老益炯然. 坐語或 五七夜不色倦. 其稟受絶人如此. 而愼起居節嗜慾. 修養極而沖和溢. 人以是謂. 先生且當久視於世. 而卒不然者. 其天喪之矣. 天喪之矣.
所著遺書五十卷. 朱子語類節要二十卷. 東話二卷. 幷刊 行東儒學案三十卷. 方釐寫明史綱目略干卷. 廢棄不自收遺書之刊也. 漢城鄭寅普閱雜著數篇. 拜曰.文章臻古人最高處. 豈第理學也. 因約它日合諸詩文精選爲別本. 未幾北亂. 作絏寅普去.
配晉州鄭氏太驃女. 墓同日祔. 一男泳允. 二女爲朴德鍾. 李秉珏妻. 孫男元根. 樳根. 曾孫男炳棟. 元根出. 始先生有藏修之室於龜岡. 來學者苦其狹陋. 移之爲德谷書堂. 先生沒仍歲一釋奠於斯. 今與塋域隔一墻而近. 出東小門. 北折上十數步. 卽其地也. 興跪 進退之際. 顧瞻神道密邇. 其必有感慨之異於前也夫. 銘曰
文岐乎道. 道又道岐. 儒之衰矣. 胥褊而枝. 惟先生生. 天授其資. 精明內殖. 彪炳外施. 彪炳精明. 墜緖以扶. 不曰君子.
亦云聖徒. 大化茫茫. 孰行孰廢. 斂歸土中. 直千其載. 松旨之丘. 四尺有堂. 旣固旣安. 納此銘章. <끝>
門人 載寧 李一海 謹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