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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욱(金弘郁)
[생졸년] 1602년(선조 35)~1654년(효종 5)
조선 후기에,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효종에게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상소하였으나 오히려 죄인으로 몰려 처형된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학주(鶴洲). 서울 출생. 김연(金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승지 김호윤(金好尹), 아버지는 찰방 김적(金積), 어머니는 화순최씨(和順崔氏)로 동지중추부사 최원(崔遠)의 딸이다.
1623년(인조 즉위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파방되어 합격이 취소되고 재시험에서 합격했다. 1635년(인조 1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검열이 된 뒤 설서(說書)를 겸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호종, 강경론을 주장했다. 당진현감으로 나가서는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 뒤 다시 복관되어 대교(待敎)·전적·지평·부수찬·정언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1641년 수찬이 된 뒤 1644년 교리·헌납을 거쳐 1645년 이조좌랑이 되었는데, 권신 김자점(金自點)과 뜻이 맞지 않아 사직했다. 1648년 응교가 되어 관기(官紀)·전제(田制)·공물방납(貢物防納) 등 시폐(時弊) 15개조를 상소했다.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1650년(효종 1) 사인(舍人)이 된 뒤 집의·승지를 거쳐 홍충도관찰사(洪忠道觀察使)가 되어 대동법(大同法)을 처음 실시했다. 1654년 황해도관찰사 재임시 천재로 효종이 구언(求言)하자 8년 전 사사된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 昭顯世子의 嬪)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상소했다.
이른바 ‘강옥(姜獄)’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종통(宗統)에 관한 문제로 효종의 왕위 보전과도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김홍욱이 이 말을 꺼내자 격노한 효종에 의해 하옥되었고, 결국 친국을 받던 중 장살되었다.
죽기 전 “언론을 가지고 살인해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고 한 말은 후세인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
1718년(숙종 4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21년(경종 1) 서산의 성암서원(聖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후손의 노력으로 연보 등이 추보(追補)된 『학주집(鶴洲集)』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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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78권 / 묘갈명(墓碣銘)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공(金公) 묘갈명 병서(幷序)
학주(鶴洲) 김공 홍욱(金公 弘郁)은 자(字)가 문숙(文叔)인데, 그의 맏아들 세진(世珍)이 나에게 명(銘)을 청하기 위하여 가지고 온 공의 행장을 보니 차마 갖추 쓰지를 못하였다. 아, 행장에 차마 쓸 수가 없었다면 명(銘)이라 하여 무슨 마음으로 그때 사실을 차마 다 쓸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효종대왕(孝宗大王)은 하늘이 낸 성군(聖君)으로 어쩌다가 그 은총(恩寵)이 고루 미치지 못한 실책이 있었지만 그것을 곧 뉘우치고 깨달아 그의 억울함을 씻어 주고 관작을 회복해 주었으니 그 정도면 영광이어서 공도 지하에서 감격하여 흐느끼고 있을 것인데 후인으로서 도리어 그것을 숨기려 하니, 이 또한 무슨 마음인가.
삼가 살펴보면 공은 경주인(慶州人)인데, 인관(仁琯)이라는 이가 신라(新羅)의 후예로서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냈고, 그후 자수(自粹)는 호가 상촌(桑村)인데 효행이 있어 태종(太宗)이 관직으로 불렀으나 고려의 유신(遺臣)이라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지조를 굽히지 않았었다.
증조(曾祖) 연(堧)은 목사(牧使)이고, 조부 호윤(好尹)은 승지(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적(積)은 찰방(察訪)이고, 어머니는 화순 최씨(和順崔氏)인데 동지(同知) 원(遠)의 딸이다. 공이 만력(萬曆) 임인년(1602, 선조35)에 태어나 일찍부터 과거 시험장에 드나들면서 이름을 떨쳤다.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자 진사시(進士試)에 3위로 합격하였는데 그 방(榜)을 파했다가 다시 설치했으므로 공은 또 합격하였다. 재랑(齋郞)을 제수하였지만 나아가지 않고, 을해년 문과(文科)에 합격한 후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을 말함)을 거쳐 한림(翰林 예문관(藝文館)을 말함)에 들어가고 겸설서(兼說書)가 되었다.
병자년 적의 선봉(先鋒)이 갑자기 들이닥쳐 공사(公私) 간 창황한 판국인데 무사(武士) 임항수(林恒壽) 등이 분연히 말하기를, “만약 군대 몇 백 명만 있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한번 나가 싸워 보겠다.”하므로, 공이 즉시 항수 등을 데리고 체부(體府 체찰사(體察使)의 주영(駐營)을 말함)에 가 뵙고 이어 말하기를, “적이 회오리바람 같아 오늘 중으로 서울까지 들어올 기세인데, 어찌 이 사람들로 하여금 용기를 분발하여 공격하게 하지 않습니까.”하고 있는데 마침 내관(內官)을 만나 그 사실을 또 상께 아뢰니, 상이 즉석에서 윤허하였다.
태복시 제조(太僕寺提調)가 늙어서 창졸간의 일에 대응을 잘못하는 것을 본 공은 급히 승지(承旨)에게 말하기를, “적의 선봉이 이미 닥쳤는데 상께서 타실 수레가 아직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으니 무엇으로 등대(等待)하렵니까.”하였다.
상이 그 말을 듣고는 드디어 간단한 차림으로 먼저 나가 겨우 숭례문(崇禮門)에 이르렀을 때 적이 과연 서교(西郊)에 육박하였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때 공은 관직이 낮았지만 자기의 직권을 넘어서까지 위급에 대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충성과 용기에 감복하였다.
공은 그 길로 숭례문에서부터 상을 호종하여 길을 돌려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였다. 공은 또 상께 아뢰기를, “적병이 곧 뒤를 밟을까 염려되오니, 바라건대 빨리 중신(重臣)을 오랑캐에게 보내 강화를 하자는 뜻으로 그들의 발걸음을 늦추게 하면 그동안에 성에 들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하니, 상도 그대로 따랐다.
성에 들어가서는 또 위험을 무릅쓰고 상이 강화도로 행행하려 하자 공이 중간에서 요행을 바라고 모험할 수는 없다는 뜻을 역설하니 상도 결국 그렇게 받아들여 그만두었다. 상이 이미 성을 지킬 것을 결정했는데, 화의(和議)가 또 일기 시작하여 장사(將士)들의 마음을 해이하게 하니, 공이 또 강개하여 극언하였다.
난리가 끝나자 즉시 호서(湖西)로 귀근(歸覲)하였는데 공의 백씨(伯氏)가 광주(廣州)에서 전사하였으므로 공은 그곳에 가서 시체를 찾아다 장례를 치렀다. 호종했던 공로로 전적(典籍)에 승진된 후,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지평(持平)에 임명되고, 왕명으로 관동(關東)을 염찰(廉察)한 후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을 말함)에 뽑혀 들어와 수찬(修撰)이 되었다
그때부터 삼사(三司 사간원(司諫院)ㆍ사헌부(司憲府)ㆍ홍문관(弘文館))에만 출입하였고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다. 부모 봉양을 위하여 당진 현감(唐津縣監)이 되었으나 얼마 후 그만두었다. 석실(石室 김상헌(金尙憲)) 김 선생이 오랑캐에게 끌려갔다가 석방되어 돌아오자 공이 상께서 불러 볼 것을 청하였고, 또 동계(桐溪) 정온(鄭蘊)에게 포장의 은전을 내림으로써 풍화(風化)를 격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의 형 홍필(弘弼)이 진사(進士)에 합격하자, 공이 상소하여 함께 돌아가 부모를 영화롭게 할 것을 비니 상이 연수(宴需)를 내려 주도록 명하여 영광되게 했다. 어머니 상을 마친 갑신년에 교리(校理)가 되고 을유년에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가 그만두었는데 다시 복직하게 되었다.
이때 김자점(金自點)이 위복(威福)을 제멋대로 부렸는데 공의 환심을 사려고 자주 문후(問候)를 했다. 공이 일체 응하지 않았는데 자점이 앙심을 품게 되자 공이 즉시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鄕里)로 돌아왔다. 그후 아버지 상을 당하여 무자년에 복을 마치고 응교(應敎)가 되어 상소하여 ‘언로(言路)가 막히고, 관기(官紀)가 문란하여 민생(民生)이 피폐하며, 융정(戎政)이 퇴폐한 상태를 역설하고 끝에 가서 오랑캐에게 굴복했던 수치를 잊지 말 것을 말하였다.
기축년,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즉위하자 공이 집의(執義)로서 자점을 탄핵하려 하는데 훈신(勳臣)들이 알력을 일으켰다. 공이 그 두 쪽을 다 배격하고, 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들들이 자기 어머니 사건에 연루되어 장기(瘴氣) 서린 섬에 귀양 가 있으니 보전(保全)할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을 말하고, 끝으로 언사(言事) 때문에 귀양 갔던 이응시(李應蓍)ㆍ심노(沈𢋡)ㆍ홍무적(洪茂績)ㆍ이경여(李敬輿) 등이 험한 곳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과 심동귀(沈東龜)가 귀양 간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니 비록 선조(先朝)에서 한 일일지라도 그들을 모두 풀어 주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학문에 종사하고 마음을 성실하게 갖는 것을 세상 다스리는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는데 상이 모두 좋게 받아들였다. 공이 자점을 탄핵하려 하여 동료들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동료들 의사가 모여지지 않자 인피(引避)하여 직을 그만두었다.
또 대행(大行)의 만사(輓詞)를 지어 올린 데에 기휘(忌諱)된 말이 있어 자칫 시(詩) 때문에 죄를 입을 뻔하였는데,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의 주선으로 가까스로 면하였다. 다시 관서(關西)를 염찰하고 돌아와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오랑캐들이 적신(賊臣)의 무고를 듣고 사신 8명을 보내 사실 여부를 샅샅이 조사하니 온 나라가 뒤집혀 공도 모면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공에게 모면할 수 있는 계책을 쓸 것을 청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뇌물을 주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편안하다.”하였다. 그때 효종대왕이 사류(士類)들을 위하여 스스로 변통책을 썼으므로 일이 그대로 무마되었다.
중간에 상서원(尙瑞院)ㆍ장악원(掌樂院)의 정(正)이 되기도 하였고, 보덕(輔德)으로 승지(承旨)에 승진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부묘도청(祔廟都廳)으로서의 노고 때문이었다. 호서(湖西)에다 대동법(大同法)을 펴기로 회의가 거듭되는 동안 조정에서는 적당한 인물이 없어 고심 끝에 공을 관찰사(觀察使)로 임명하였는데 다음해인 임진년에 사퇴하고 승지를 거쳐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옮겼다.
공이 조정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하여 외직을 바라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갔고, 갑오년에는 홍주 목사에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옮겼다. 이보다 앞서 강 서인(姜庶人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를 말함)이 죄가 있다 하여 인조(仁祖)는 그를 역률(逆律)로 논하여 사약을 내렸었는데, 효종이 즉위하자 민공 정중(閔公鼎重)이 상소하여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상은 편전(便殿)으로 그를 불러 인견(引見)하고 조용히 그 사건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다시 이르기를, “강(姜)이 사모(邪謀)를 하였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뒤에 다시 그 일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부도죄(不道罪)로 논하겠다.”하고는 금령(禁令)을 내렸다.
공이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한 후 마침 가뭄이 들자 7월에 상소하면서, 가뭄이 든 원인이 강빈을 죽인 데 있다고 주장하니 상이 매우 노하여 이르기를, “이제 겨우 금령을 내렸는데 이렇게 다시 범하는 자가 있으니 만약 엄중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뒤에 꼬리를 물 것이다.”하고, 마침내 공을 잡아들여 상이 친국(親鞫)했는데 공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할말을 다하니 상은 더욱 진노하였다.
공은 원래 몸이 수척하였으나 장(杖)을 맞고도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 얼굴을 들어 시립하고 있는 평소 친분 있는 자를 부르며 임금께 바른말을 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니 보는 이들이 다 장하게 여겼다. 그 달 16일 극시(棘寺)에 내려진 후 숨을 거두었다.
공은 영오(穎悟)하기 이를 데 없었고 또 매우 강직하여 말을 하거나 행동하는 데 있어 반드시 선철(先哲)을 표준 삼았다. 공의 형제 다섯 가운데 셋이 일찍 죽었으므로 공은 언제나 부모가 슬퍼할까 염려하여 장난과 우스운 짓으로 위안드렸고, 찰방공이 나이 늙어 환거(鰥居)하자 공은 반드시 그 곁에서 기거하고 한 번도 사실(私室)에 들르는 일이 없었으며, 무엇을 시키거나 반드시 자신이 직접하고 비복(婢僕)을 대신 시키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자기 어버이에게 효도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을 미루어 무엇을 하거나 거기에 맞는 도리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급기야 조정에 들어와서는 강개(慷慨) 격려(激勵)하여 항상 위망(危亡)이 금방 닥쳐오는 것처럼 서두르면서 잠시도 편히 쉬지 않았다.
아는 것은 모두 다 말하여 머뭇거리는 일이 없었고, 그 의논은 언제나 사정(私正)을 구별하고 기강(紀綱)을 세우며, 폐법(弊法)을 고치고,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며, 군정(軍政)을 닦아 국치(國恥) 씻을 것을 주장하되 그 요점은 모두 임금의 마음 하나에 달렸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친구에게는 정의가 좋아서 한번도 훼예(毁譽)를 가지고 마음을 바꾸는 일이 없었으니, 공은 아마도 지금 세상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어느 사건을 만나 거리낌 없이 말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갑자기 형벌을 당하여 세상의 큰 경계거리가 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이미 임금의 노여움이 풀리고 성은(聖恩)이 도로 내려 은택이 구천(九泉)에 미침에 선류(善類)들이 서로 경하하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니, 공으로서 유감될 것이 무엇이겠는가.
공이 임종 때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를 부모 곁에 묻어 달라.”
하였기 때문에 다음해인 을미년에 서산(瑞山) 묵수촌(墨水村) 임좌(壬坐) 언덕에 공을 장사하였다.
배위는 오씨(吳氏)로 참의(參議) 정(靖)의 딸이요. 장남은 바로 세진(世珍)인데 찰방(察訪)이며, 다음은 계진(季珍)이다. 군수(郡守) 이기직(李基稷), 진사(進士) 한성열(韓聖悅), 사인(士人) 조지한(趙持韓), 군수 이기서(李基敍), 사인(士人) 박상주(朴尙胄)는 그의 다섯 사위이다.
찰방의 아들은 두성(斗星)ㆍ두정(斗井)ㆍ두규(斗奎)ㆍ두벽(斗璧)이고, 두 딸은 박전(朴錪)ㆍ윤명원(尹明遠)의 아내가 되었다. 안팎으로 손자ㆍ증손자가 약간 명 있다. 내가 공과는 교의(交誼)가 매우 두터웠는데, 공의 죽음을 듣고 너무 놀라고 슬펐던 것은 사사로운 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기해년 신원(伸冤)할 때 연신(筵臣)들이 말을 올리는데 동춘(同春) 송공 준길(宋公浚吉)이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 한가하실 때 그가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조용히 생각해 보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만약 그가 죄가 없는 것을 알았다면 조용히 생각할 것이 뭐 있겠는가.”
하고는 즉석에서 덕음(德音)을 내렸으므로 연신들이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물러 나왔던 일이 기억되니 아, 효종대왕이야말로 바로 대성인(大聖人)이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오늘, 세상은 여러 가지로 변하였고, 공의 무덤 앞 나무들도 이미 아름이 되게 자랐으니 옛날을 회상(回想)하고 지금을 볼 때 공을 위해 피눈물을 닦으면서 공의 사적을 이렇게 적는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강직했던 공이여 / 侃侃惟公
재주가 높고 뜻이 고결했네 / 才豪志潔
마음에 충효를 간직하여 / 忠孝存心
힘써 옛 철인을 따랐네 / 勔追古哲
병자년과 정축년에 / 在丙丁歲
나라가 위태로웠는데 / 國步危急
공은 바로 그때 / 公於此時
사초(史草) 쓰는 게 직책이었지만 / 職是載筆
강개한 마음이 복받치어 / 慷慨奮發
실성한 사람 같았다네 / 有如狂易
격렬한 충성심은 / 忠赤之激
말을 하면 사리에 맞아 / 言而多中
선비들이 그를 따랐고 / 士心旣附
명망과 여론은 갈수록 중하였네 / 名論益重
적신이 국권 잡자 / 賊臣秉柄
하늘을 덮을 듯한 그 세력에 / 勢若漫天
너도 나도 그에게 달려갔지만 / 人爭炙手
공만은 퇴연하여 / 公獨退然
거세게 흐르는 물속에 / 衆流之奔
우뚝 솟은 기둥이었네 / 亭亭一柱
세상이 다 눈 흘겨도 / 羣目皆側
공은 더욱 돌아다 보지 않았고 / 公益不顧
성조 초기에 와서 / 洎聖祖初
두 원로가 있었는데 / 爰有二老
공은 그들을 보좌하여 / 公爲輔介
세도에 도움을 주었으니 / 以翼世道
밝고 밝은 성주께서 / 聖主明明
공을 왜 모를까마는 / 豈不知公
말 한마디가 뜻을 거슬러 / 一語攖鱗
은의가 끝맺음 못하였네 / 恩義未終
공이야 또 무엇을 걱정하랴 / 公又何慼
사람들의 공의가 있고 / 公議在人
해와 달도 바뀌어서 / 日月之更
그때 그 시절 아닌 것을 / 況不留辰
왕의 말씀 따사로워 / 德音溫溫
하늘같이 인자하시니 / 上天孔仁
오직 이 무덤 앞의 / 維玆墓道
초목도 영화 머금어 / 草木含榮
천추만세 두고두고 / 千秋萬歲
고이 길이 잠드시리 / 維其永寧
<끝>
[각주]
[주01] 대행(大行) : 임금이 승하하여 아직 시호를 올리기 이전의 존칭이다. 여기서는 인조(仁祖)를 가리킨다.
[주02] 극시(棘寺) : 조선조 때 의금부(義禁府)를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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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黃海監司金公墓碣銘 幷序
鶴洲金公弘郁字文叔之胤世珍狀公行。謁銘於余而不忍備書。嗚呼。於其狀旣有所不忍。則於其銘亦何心忍書其事耶。旣而思之。孝宗大王以天縱之聖。其於覆盆之下。偶失臨照。而旋卽悔悟。洗冤復官。則榮耀多矣。公應感泣於泉下。而後人乃反諱之。亦獨何心哉。謹按公慶州人。有仁琯以新羅後裔。麗朝大師。其後有自粹號桑村。有孝行。我太宗以官徵。自以麗氏臣。自殺以立其節。曾祖堧牧使。祖好尹 贈承旨。考積察訪。妣和順崔氏。同知遠之女也。公以萬曆壬寅生焉。早歲游場屋。輒屈其人。仁祖反正。中進士第三名。其榜罷而復設。故公復中焉。除齋郞不拜。乙亥。捷文科。由槐院入翰林。兼說書。丙子。賊鋒猝急。公私蒼黃。有武士林恒壽等奮曰。若得數百兵甲。則當以死迎戰矣。公卽以恒壽等見于體府。且曰。賊兵飆忽。今日當到京城。何不使此等人。賈勇奮擊乎顧眄之間。適遇內官。又以啓於上。上卽允之。公見太僕提調老不能應猝。亟言于承旨曰。賊鋒已逼。而輿御尙未戒。奈何等待。上聞。遂以寡約先出。到崇禮門。聞賊果薄西郊矣。公時以卑官。能越職副急。人服其忠勇。遂自崇禮門。扈蹕轉向南漢。公又白上曰。卽恐賊兵追躡。請亟遣重臣于虜。緩以和事。則其間庶可入城矣。上亦從之。旣入城。又將冒危西幸江都。公又力言其不可僥倖。上以爲然。故事遂已。上旣定城守計。而和議又起。以解將士心。公又慷慨極言之。亂已。卽覲于湖西。伯氏戰亡于廣州。公尋尸歸葬。以扈從勞陞典籍。歷禮曹佐郞。拜持平。奉命廉察于關東。選入玉堂爲修撰。自是出入三司。未嘗有佗遷。乞養得唐津縣。未幾罷。石室金先生被拘於虜。得釋而還。公請上召見。且言鄭桐溪蘊。宜有褒典以勵風化。公兄弘弼中進士。公上疏乞與榮歸。上命給宴需以榮之。憂吉。甲申校理。乙酉吏曹佐郞。罷復拜。時金自點久專威福。欲交歡公。問候頻仍。公不爲應。自點銜之。公卽謝歸鄕里。遭外憂。戊子服闋。以應敎。上疏力言言路不通。官方淆亂。民生困瘁。戎政頹廢之狀。末言無忘城下之恥。己丑。 孝宗大王卽位。公以執義。將擧劾自點而有勳臣自成傾軋之端。公兩斥之。且言昭顯諸兒坐其母。徙處瘴海之中。宜思保全之道。末言言事被謫臣李應蓍,沈𢋡,洪茂績,李敬輿等禦魅窮荒。沈東龜被謫尤可冤。雖事在先朝。皆當有以疏釋。終以典學誠心。爲爲治之基本。上嘉納焉。公欲劾自點。發簡于同僚。僚議不咸。遂引避遞職。又製進大行挽詞。有忌諱語。幾被詩案。賴議政李公景奭救解得免。復廉察于關西。歸拜舍人。時虜人聞賊臣交搆語。遣八使根査。中外洶洶。以爲公亦將不免。或勸公以計得免者。公笑曰。以賂而生。不如死之安也。時孝宗大王爲士類。身自彌縫。故事遂已。間爲尙瑞掌樂正。以輔德陞拜承旨。蓋錄祔廟都廳勞也。會議行湖西大同法。朝廷難其人。以公爲觀察使。翌年壬辰。辭遞。由承旨移禮曹參議。公不樂在朝。求外爲洪州牧使。甲午。自洪州移拜黃海道觀察使。先是姜庶人得罪仁祖。以逆論死。及上卽位。閔公鼎重上疏訟其冤。上引見於便殿。從容語其首末。且曰。姜之邪謀。無可疑者。後復有敢言者。當以不道論。遂下禁令矣。公交事後。適有旱災。七月。上疏以爲咎在姜死。上怒甚以爲纔下禁令。而復冒犯如此。不爲重究。後將不止。遂拿致公。上親鞫。公辭氣益厲。天威甚震。公素瘦弱。杖下顏色不變。仰呼侍立所親。責其不言。人皆壯之。以其十六日。還下棘寺而絶。公穎悟絶倫。又甚堅介。立言制行。必以先哲爲準。公兄弟五人。三人早亡。公每念父母悲傷。設娛戲以慰之。察訪公年老鰥居。公必侍寢於側。未嘗入私室。凡所使令。必自承奉。不令婢僕代之。嘗曰。人能孝於其親。則推以及佗。無不盡道矣。及其立朝。則慷慨激礪。常若危亡之勢迫在朝夕。遑遑汲汲。不敢寧息。知無不言。無所媕婀。其論常主於辨邪正立紀綱。革弊法厚民生。修軍政雪國恥。而其要則歸於人主之一心而已。其於舊要。情義篤好。未嘗以毀譽而易心。公蓋非今世人也。惟其遇事敢言。觸犯天怒。猝被刑禍。爲世大戒。然雷霆旣收。雨露旋濡。恩及九泉。善類相賀。光榮永世。公又何慼。公臨絶顧言曰。葬我於父母之側。遂以翌年乙未。窆于瑞山墨水村負壬之原。配吳氏。參議靖之女。長男卽世珍察訪。次季珍。郡守李基稷,進士韓聖悅,士人趙持韓,郡守李基敍,士人朴尙胄。其五女壻也。察訪男斗星,斗井,斗奎,斗璧。二女爲朴錪,尹明遠妻。內外孫曾總若干。余與公交誼甚厚。聞公之亡。驚痛之心。蓋不但爲私而已。記昔己亥伸冤之日。筵臣進說。同春宋公浚吉曰。殿下須於暇時。靜思其有罪無罪。上曰不然。如知其無罪。何待靜思。卽下德音。 筵臣皆感泣而退。噫。斯其所以爲大聖人歟。只今十數年間。世道變嬗。而公之墓木亦已拱矣。俯仰今昔。爲之抆血而書公之事如此云。銘曰。
侃侃惟公。才豪志潔。忠孝存心。勔追古哲。在丙丁歲。國步危急。公於此時。職是載筆。慷慨奮發。有如狂易。忠赤之激。言而多中。士心旣附。名論益重。賊臣秉柄。勢若漫天。人爭炙手。公獨退然。衆流之奔。亭亭一柱。群目皆側。公益不顧。洎聖祖初。爰有二老。公爲輔介。以翼世道。聖主明明。豈不知公。一語攖鱗。恩義未終。公又何慼。公議在人。日月之更。況不留辰。德音溫溫。上天孔仁。維茲墓道。草木含榮。千秋萬歲。維其永寧。<끝>
宋子大全卷一百七十八 / 墓碣
황해감사 학주 김홍욱선생 묘 /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대로화곡길 50-13 (대산읍 대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