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완서의 작품세계
1931년 개성의 외곽 지역인 경기 개풍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 당시 서울대 국문과를 중퇴했다. “그해의 나이인 스무 살에 영혼의 성장이 멈췄다”는 그는 1·4후퇴 당시의 혹독한 추위를 잊을 수 없다면서 같은 민족이 서로 총을 겨눠야 했던 비극의 무자비함을 성토하곤 했다. 그의 등단은 두고두고 화제였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현상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었을 때 그는 다섯 아이를 둔 40세의 전업주부였다. 미군 초상화부에서 함께 근무했던 박수근 화백에 대한 추억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독자의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박완서 씨의 작품세계는 전쟁의 상처와 가족의 문제, 소시민 의식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전쟁을 겪으면서 글로 그 시대를 증언하겠다는 생각이 작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고백한 그는 평생 시대의 아픔과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그렸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드러내며, 때로는 자본주의가 만든 황폐한 인간성을 통렬히 비판했다. 특히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의 작품에서 남성중심주의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여성 문제에 민감한 관심을 보였다. 평론가 황도경 씨는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일그러진 개개인들의 삶의 초상, 도시문명 사회의 불모성과 그 안에서의 허위적이고 물신주의적인 삶의 양태, 권태롭고 무기력한 소시민의 일상, 억눌린 여성 현실, 죽음과의 대면과 극복 등 그녀의 문학이 담아낸 세계는 실로 놀랄 만큼 다양하다”고 평했다. 언어의 조탁도 탁월해서 ‘엄마의 말뚝2’가 이상문학상을 받았을 당시 심사위원들로부터 ‘유려한 문체와 빈틈없는 언어 구사는 가히 천의무봉’이라는 평을 받았을 정도였다. 등단은 늦었지만 작품 활동은 왕성했다. ‘휘청거리는 오후’ ‘서 있는 여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의 장편을 냈으며, 소설집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등을 펴냈다. 이밖에 ‘나 어릴 적에’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부숭이의 땅힘’ ‘보시니 참 좋았다’ 등의 동화집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독자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으며 여러 편이 TV드라마로 옮겨졌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감싸는 산문집도 여러 권 출간했다. 남편과 외아들을 먼저 보낸 슬픔을 담은 ‘한말씀만 하소서’ ‘어른노릇 사람노릇’ 뿐 아니라 ‘세 가지 소원’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살아 있는 날의 소망’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두부’ ‘호미’ 등이 있으며 지난해 7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냈다. 김지영 kimjy@donga.com ![]() |
[박완서의 작품 세계]
- 고단한 세월 속의 삶
유 종 호
1
박완서(朴婉緖)의 「나목」은 전쟁과 청춘의 책이다. 환도하기 이전인 전쟁중의 서울을 무대로 전개되는 이 작품에서 전쟁의 현장은 단 한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서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작중 인물들의 의식과 행동을 규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은 단순한 배경임을 넘어서 일차적인 작중 현실을 이루고 있다.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줄거리가 유독 전시에나 가능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전쟁의 여러 충격과의 함수 관계가 분명해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 책을 전쟁의 책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당화해 준다. 한편 젊음의 실상과 그 뜻하는 바를 이모저모로 싱싱하게 보여주고 있어 이 책은 우리 문학에서 희귀한 청춘의 책이 되고 있다. 젊음의 불안과 추위와 아슬아슬함, 그리고 그 잠재적인 폭발성을 포함하는 순수함이 구김 없이 드러난 이 책은 독자들에게 청춘은 아름답다는 속된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불러일으켜 주기도 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경이라는 작중 설자(作中說者)이고, 이 작중 설자의 가족 있는 화가에 대한 강렬하나 짧은 수밖에 없었던 사랑이 줏대되는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서울이 하나의 기지촌과 같았던 전쟁 중 미군 PX에 근무하는 주인공은 미군 초상화를 그려주는 환장이들 가운데서 화가로서 일가를 이루고 있었던 옥희도 씨를 발견하게 된다. 전쟁통에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고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어머니와 살면서 답답하고 암울한 집안에 정을 못 붙이고 있던 주인공은 이내 주변의 혐오스러운 사람들과는 무엇인가 달라 보이는 이 탈속한 화가에게 끌린다. <여자와 남자가 이루는 풍경, 거기엔 적어도 춥지 않은 무엇이 있었다. 저들도 춥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을 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추운 김에 아쉬운 대로 옆에 있는 옥희도 씨라도 좋아해 볼까 보다고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하느라 별로 무섭다는 생각도 없이 어두운 길목들을 지났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의 감정은 두 사람이 위스키를 따라 마시는 장난감 침팬지 앞에서 만나게 되는 도수가 불어감에 따라 절실한 것이 되어간다. 감기로 일터에 나오지 못한 옥희도 씨를 일터에서 알게 된 황태수란 청년과 함께 찾아간 여주인공은 옥희도 씨 내외가 아주 귀엽다는 듯이 너그러운 웃음으로 바라보는 것을 지그시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고 <어떤 심한 모욕도 이보다는 견디기 쉬웠으리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완구점과 명동의 성당 사이를 거닐며 사랑을 계속하지만 완구점과 성당 사의의 공간은 이 사랑이 짧을 수밖에 없고 현실에서 여물 수 없음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몇 차례의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긴 뒤 여주인공은 애초에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는 사이의 홀가분함을 추호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는 태수와 맺어지게 된다. 그 사이 어머니의 죽음으로 해서 사실상의 처녀 고아가 된 여주인공에게 남겨진 가장 순리에 맞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 장에서 중년에 접어든 주인공 내외가 옥희도 씨의 유작전을 참관하는 것으로 책이 끝난다.
이러한 어설픈 개요는 당연히 이 책의 한 모서리밖에 드러내 주지 않는다. 젊음과 사랑의 책인 것 이상으로 이 책은 전쟁과 불모(不毛)한 삶의 책인 것이다. 주인공들의 <완구점과 성당> 사이의 사랑을 가능케 했고 그 깨끗함과 대조를 이루며 나타나는 것은 억세고 잡스러운 사람에 대한 혐오감이다. 다이아나 김 같은 여인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겠는데 기실 여주인공의 옥희도 씨에 대한 사랑을 결정적으로 만들어주는 계기는 다이아나 김에게 곤욕을 당하고 난 그의 상심한 눈길이었다. <어리석지 않게 선량한 눈에 담긴 피로와 상심……순간 그의 상심이 예리한 아픔으로 나를 찔렀다> 속되고 잡스러운 것에 대한 강렬한 모멸은 다이아나 김이 사실상 동정에 값하는 생활인이고 장한 어머니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후에도 감소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특히 착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머니라는 이름에 너무 관대한 게 나에겐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난 그녀가 어머니라고 해서 그녀에 대한 내 모멸의 십분의 일도 상쇄시킬 수는 없었다.> 속되고 잡스러운 것에 대한 적의는 온갖 인위적인 것, 점잖은 체하는 것, 도덕적인 것으로 확대된다. 그것은 똑같이 속된 것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주인공은 다이아나 김이 동거하던 남자에게 처자식이 있음을 알고 첩노릇도 못 하겠고 남의 남편을 아주 빼앗을 수도 없었다면 <내가 물러나는 게 제일 깨끗하고 도리에 합당>한 일이었다고 털어놓을 때 <언닌 화냥년만도 훨씬 못하군요>하고 서슴없이 내뱉는다. <아니꼽게도 그녀의 체념에는 도덕적인 만족이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옥희도 씨에게 쏠리게 되는 것을 그녀의 반속지향(反俗志向)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일면적임을 면치 못한다. 우리는 주인공의 심층을 더 헤쳐볼 필요가 있다. 옥희도 씨와의 사랑이 마무리지어지지 않을 수 없는 시기에 벌어진 다소 연극적이나 능숙하게 처리된 삼자 대면의 자리에서 처자 있는 화가는 여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경아, 경아는 나로부터 놓여나야 돼. 경아는 나를 사랑한 게 아냐. 나를 통해 아버지를 환상하고 있었던 것뿐이야. 이제 그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봐. 응? 용감히 혼자가 되는 거야.> 실상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성숙한 화가가 토로한 이 말은 다목적적인 것이기도 하나 사태의 일단을 잘 파악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심층은 한결 두껍고 복합적이다. 그 중의 하나는 전쟁의 중압이다.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 인물들의 생활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은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전쟁 속에서 두 오빠를 잃었고 어머니마저 정상이 아닌 상태가 되어 엉망으로 불행해진 주인공은 한편으로는 전쟁의 계속으로 인한 재앙의 고른 분배를 원하고 있기조차 하다. 그것은 <남의 불행을 고명으로 해야 더욱더 고숩고 맛난 자기의 행복>을 음미하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숨김없는 반응이다. <속에선 하나의 심술궂은 생각이 사납게 일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전쟁이 몇 번이고 되풀이될 테고 그 사이에 전쟁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골고루 나누리라고. 나는 다만 재난의 분배를 일찍 받았을 뿐이라고> 전쟁이 계속되리라는 생각은 앳된 여주인공에게 장래 일을 합리적, 타산적으로 설계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타산적이고 현실적인 설계는 여주인공으로 하여금 황태수의 접근에 좀더 고무적인 반응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주인공은 이 장래의 배우자에게 알고 지내는 사이 이상의 감정의 경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즉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전쟁 속의 삶이 내일에 대한 설계로 이어질 수 없는 옥희도 씨에의 지금 바로 이곳에서의 사랑을 간절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옥희도 씨에의 사랑에서 우리는 또 어머니에 대한 여주인공의 적의나 복수 감정을 읽을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큰아버지의 내방으로 은신처를 바꾼 날 밤 두 오빠는 폭격 또는 포격으로 무참하게 죽는다. 그 충격으로 오랜 병을 앓게 된 어머니는 정신이 들었을 때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놓으셨노>하는 원성과도 같고 주문과도 같은 말을 한다. 이 말에 주인공은 잉여로 살아 남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미안감과 죽은 아들에 대한 탄식을 자기의 삶을 잉여의 것으로 치부하고 그 위에 포개어놓는 어머니에 대해 강렬한 미움을 느낀다. 야속한 어머니에의 미움은 어머니를 비참하게 하기 위해서 죽고 싶다는 자기 파멸에 대한 의지를 느끼게도 한다. 물론 그것은 단일한 충동에서 먼 복합적이고 앰비벌런트한 것으로서 주인공은 이내 살고 싶다고 속으로 외친다. 자기 파멸과 뜨거운 삶을 강렬히 체험하고 싶다는 동시 공존적인 충동이 앞에 적은 것 같은 복합적인 요인과 상승하여 여주인공의 옥희도 씨에 대한 공감과 사랑의 계기를 필연적인 것이 되게 준비해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여주인공이 미국인 일등병의 구애에 호응하여 경서 호텔로 찾아갔다가 정사 직전에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도망쳐 나오는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 13장은 이 책 가운데서 가장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우며 그렇기 때문에 또 설득력이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목」의 핵심적 주제를 어느 모로는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다음의 14장과 함께 우리의 주목에 값한다. 여주인공이 순순히 경서 호텔로 찾아가 미군의 애무에 몸을 맡기는 것은 일종의 자기 파멸에의 충동이랄 수가 있다. 사실 웬만큼 눈치 있는 독자들은 여주인공이 안전하고 탈없이 그곳을 빠져나오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되지만 그것이 두 오빠의 죽음과 연관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하고 또 그 의미는 다음 장에 가서야 뚜렷해진다. 어쨌거나 위기의 순간에 우리들의 사랑스러운 여주인공은 부서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 당장 내 육신이 죠오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질 것 같았다. 혁이 오빠와 욱이 오빠의 육신처럼 호청을 붉게 물들이며 참담하고 추악하게 조각날 것 같았다. 도망쳐야지. 도망쳐야지.> 그녀는 사실 도망에 성공한다. 「프리이즈 돈 브레이크 미」하고 애걸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장면과 조금 앞의 무참히 찢겨진 젊은 육체의 환시(幻視)는 심층적으로 보아 의미심장하다. 미국 병사인 죠오에게 몸을 여는 것이 파멸을 의미한다는 직관은 세상의 통속적 도덕에 의해서 매개되었다기보다는 두 오빠의 죽음을 초래한 어둠의 힘이 그대로 자기마저 휩쓸려 한다는 것을 아는 이를테면 육체적 직관이다. 그것은 전쟁을 몰고 온 어둠의 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고 있으며 억지스러운 허풍기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을 몹시 인상적인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중년이 된 여주인공이 <나목>에 의해서 촉발되는 감개는 이 작품의 열쇠 같은 구절이 되어주고 있다.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대하며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나목은 비단 옥희도 씨의 표상으로 그치지 않고 사람살이의 근원적인 외로움의 표상으로 이어진다. 사실 위에 적은 감개에 이어서 여주인공은 세속적인 소망의 두루뭉수리인 남편을 한 사람의 낯선 이방인으로 느끼고 느닷없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러나 그것이 진하게 얽혀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쩔 수 없이 간헐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인 사람살이의 홀로임을 달래주지 못한다. 젊은 시절 침팬지를 바라보고 있는 옥희도 씨가 고독을 앓고 있으며 그를 도와줄 수 없다고 느꼈던 여주인공은 중년의 종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가지를 비비댈 수는 있으나 서로의 거리를 좁힐 수 없는 어린 나목들임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많은 생동하는 작중 인물이 나온다. 정신이 반쯤 나간 어머니, 오만한 사촌 오빠, 그리고 특히 사람좋고 수다스런 태수의 형수, 혐오감을 자아내는 다이아나 김 등의 성격 묘사는 일품이다. 물론 어색한 장면이나 서둘러서 충분히 형상화되지 못한 대목도 허다하다. 여주인공이 옥희도 씨의 부인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나 기타를 놓고 어머니와 격투를 벌이는 장면 등에서 우리는 그것을 느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까부수고 남는 것은 주인공의 앙증스러우리만큼 섬세하고 날카로운 감수성이 포착한 음영 짙은 삶의 실상과 사랑에의 갈구다. <역사 사랑이란 말은 하도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느라 옥희도 씨를 향한 내 지극한 갈구를 담기에는 너무도 닳아 있었다.…… 나는 별 수 없이 또 사랑이란 소리를 강조하면서 그와 나 사이엔 암만해도 딴 낱말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아무도 안 써본 슬프고 진한 어휘가.>
「나목」은 모든 사람들이 쓰는 너무도 닳아 있는 말들을 통해서 무구(無垢)한 젊음의 그리움과 외로움과 미움과 설움과 담은 슬프고 진한 전쟁과 청춘의 책이다.
2
「나목」의 작가가 6년이 지난 후에 쓴 장편 소설 「휘청거리는 오후」는 그 규모에 있어 훨씬 크고 세부의 치밀함에 있어 한결 성숙한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전직 학교 교사였으며 소규모의 전자 제품 공장을 경영하는 허성 씨네 집안을 중심으로 해서 전쟁이 있은 지 사반세기 후에 이 땅의 세상살이의 실상을 아주 냉혹하게 그리고 있다. 박완서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아닌 보통으로 사는 사람의 생활과 양심의 몰락을 통해 우리가 사는 시대의 정직한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후기에 적고 있다. 딸 삼 형제를 둔 허성 씨네 5인 가족이 큰 부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딸 삼 형제에게 두루 고등 교육을 베풀 수 있었다는 것은 국민 전체를 고려에 넣을 때 부자가 아니랄 수도 없을 것 같다. 굳이 유별해 보자면 꽤 여유 있는 소시민이랄 수가 있겠는데 작품은 맏딸의 맞선 보기에서 시작해서 딸 삼 형제의 배우자 찾기의 과정을 보여주고 이 과정에서 물심양면으로 몰락한 허성 씨의 자살로 끝나고 있다.
먹을 것과 성(性)의 분배는 한 사회의 통합 원리의 근본을 이루는 것으로서 그것이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사회 속의 삶의 결과 가치관을 헤아리는 데에서 가장 시사적인 국면이다. 이 책이 초희라는 인물의 구체를 통해서 결혼 시장의 생태를 맨 먼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러니까 당연하다.
속되고 극성스럽고 잡스러운 것에 한 모멸은 「나목」의 중요한 한 모티프이고 그것은 주로 앳된 여주인공의 시점을 통해서 통렬히 매도되고 있으며 화가 옥희도 씨에게서 그 역상(逆像)을 찾아내고 있다. 「휘청거리는 오후」에서도 내면성이 결여된 물질주의와 돈을 토대로 한 광내기에서 어떻게든 남보다 이겨야겠다는 경쟁 심리로 뒤얽힌 속된 것은 거의 광기의 경지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 속된 것을 매도할 때의 작가의 필치는 앙증스럽고 얄미울 정도로 능숙하다. 허성 씨의 부인인 민 여사의 맏딸 초희는 배금주의에 넋을 잃은 사람들의 전형이 되어주고 있으며 속된 것의 매도는 대개 한 시대의 유물처럼 내면 황폐의 거리에서 비슬비슬하는 허성 씨의 시점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령 초희 모녀를 돈독이 오른 천박한 잡것들이라고 그냥 매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허성 씨는 젊은 시절의 민 여사가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생판 달랐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이 민 여사를 정나미 떨어지는 허욕의 비계 덩이로 만들었는가를 위해 많은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초희는 케이크 집의 케이크처럼 다듬어진 유망한 청년과 맞선을 보고 난 후를 다룬 제2장 <파탄(破綻)>에서 허성 씨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아빠, 난 아빠보다 더 좋아하는 게 딱 하나 있어. 그건 부자들이 할 수 있는 부자들의 생활의 재미야. 나는 철이 나고 우리가 가난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그걸 동경했었고 어떡허든 그걸 가져보고 싶었어. 아빠, 내가 그걸 가지려는 걸 방해하지 마. 나는 아빠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도 남아. 그 사람과 아빠는 너무도 이질적이야. 그렇지만 아빠가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딸을 설득하려 들지 마. 돈보다는 사랑이 제일이라는 유치한 설교 같은 건 더군다나 하지 마. 난 그런 소리가 먹혀들 만큼 정신적인 계집애가 아냐.
초희 모녀의 극성맞아 보이는 탐욕스러움은 가난에서 비롯되었고 한 경제 단위로서의 집안의 생활비 조달책인 허성 씨는 초희 모녀의 배금주의적 가치관의 형성에 간접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허성 씨가 이러한 역설적 상황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막연히는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가치관으로 보아서는 분명히 타락된 공간 운영을 묵인했다가 이미 시작된 몰락의 길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사실 그는 비싸지 못한 동정에 값할지는 모르지만 시장 지향성(市場志向性)의 인간 군상들이 억척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사회에서 톱니가 잘 맞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몰락할 수밖에 없고 더욱 비극적인 것은 억척맞은 사람들이 잘살기 위해서 될수록 그 수효가 많이 요구되는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희생자의 한 사람이다. 사실 공 회장같이 돈 잘 버는 비계덩이가 번영을 구가하기 위해서는 허성 씨 같은 사람이 될수록 많이 필요하다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돈을 선택함으로써 공 회장의 후처로 들어갔던 맏딸의 결혼 생활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사태로까지 발전한다. 그러나 사랑을 선택하여 가난과 결혼한 우희는 대학을 나온 것이 개천에서 용났다는 표현을 얻을 정도로 궁한 집안의 맏며느리로 들어가 순식간에 젊음도 잃고 궁상맞은 주부로 퇴색해 버린다. 초희와의 대조라는 소설적 대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희의 길은 너무나 불모스럽다. 어쨌든 우희의 선택도 행복의 기약과는 거리가 멀달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말희를 위해서 남아준 선택은 매우 한정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돈이나 가난한 사랑이란 양립할 수 없는 배타적 선택이 아니라 두 가지의 조화로운, 짓궂게 얘기해서 적당한 타협의 산물이다. 돈도 있고 사랑도 알고 또 허성 씨가 질색으로 알고 있는 속된 잡스러움에서도 먼 선택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은 말희의 짝 찾기가 아주 어색하고도 궁색한 우연에 의해서 매개되었으며 또 그들이 이 땅에서 삶을 지속하지 못하고 이민 길에 나선다는 전말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오늘의 이 상황 속에서 행복의 조건을 찾아 그들의 행복을 완성시켜 줄 자신이 없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의 영국 산업소설에는 산업화 과정이 사람들에게 준 충격 특히 근로자들의 삶의 비인간화 과정이 끔찍하리만큼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작중 인물들의 참담한 생활을 그리는 작가들은 등장 인물들을 비참 일색으로만 남겨둘 수 없다는 문학 관습사의 압력과 독자들의 압력을 함께 받았다. 이를 피하기 위해 작가들이 궁리해 낸 디어스 엑스 매키너deus ex machina는 알지 못하던 친척의 죽음으로 굴러들어온 유산과 캐나다나 미국으로의 이민이었다. 이러한 궁색한 방책은 「휘청거리는 오후」에서도 그대로 응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말희네의 외국행이 문제의 회피이듯이 허성 씨의 자살 역시 문제의 참된 해결을 가져올 수 없다>고 한 염무웅 씨의 소론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말희네의 이민과 허성 씨의 자살은 적어도 오늘의 우리 터전에서 균형 잡힌 가치관을 디디고 선 조화로운 행복이 철저하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음화적(陰畵的)으로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허성 씨와 같이 착하고 점잖은 사람의 존속을 허용치 않을 정도로 우리의 오늘의 살벌하게 황폐해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근대화란 존칭을 받고 있는 근자의 사회 변화에 대한 많은 발언을 들어왔다. 그 사회 변화에서의 수혜자라 할 수 있는 유복한 소시민인 허성 씨네 집안을 엿본 우리는 그들이 행복과는 너무나 먼 곳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의 사회 변화가 허성 씨네보다 훨씬 못사는 사람들의 낮은 임금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휘청거리는 오후」는 근자의 사회 변화가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문학적 답변이다. 글의 성질상 우리는 이 작품의 주제가 드러내고 있는 것의 의미를 추적해 보았지만 그것은 작품의 한 모서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소설이 매우 재미있으며 세상살이의 구체를 정확하고 실감 있게 그리는 데 극히 뛰어난 작가가 자기의 재능과 솜씨를 마음껏 발휘한 작품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여러 등장 인물이 그때그때 상황에서 겪게 되는 절망과 허욕과 노여움과 설움과 분함과 기쁨에 독자들은 고스란히 빨려들어가 그것을 제 일처럼 경험하게 된다. 작가의 섬세하고 유연한 필치에서 우리말은 이를 데 없이 적절하고 정확한 단위로 맺어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월과 터전을 정리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또 이 정신의 쑥대밭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휘청거리는 오후」읽기는 매우 뜻깊은 경험이 되어줄 것이다.
3
우리는 앞에서 「나목」이 전쟁과 청춘의 책임을 보았고 「휘청거리는 오후」가 물질주의와 배금주의의 위세 앞에서 휘청거리는 사람다움의 여러 가치를 건드리고 있음을 보았다. 이에 더하여 우리는 박완서의 단편들 또한 이러한 기본 모티프를 중심으로 해서 회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젊음의 문턱에서 1950년의 전쟁을 체험했던 거의 모든 작가에게 그렇듯이 전쟁은 박완서에게서도 하나의 잊을 수 없는 강박관념이 되어 있다. 전쟁을 싸움의 현장에서 치렀던 것이 아닌만큼 그의 눈길은 싸움과 이에 따른 정치적 변화에 쏠려 있다. 전후 30년 동안 1950년의 비극은 되풀이해서 문학의 주제가 되어왔지만 독자 쪽에서도 작가 쪽에서도 이에 식상하게 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만큼 그것은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떨쳐버릴 수 없는 상흔의 기억이 되어주고 있다. 1950년대 비극의 되풀이 되는 작품화는 어째서 일회적인 트로이 전쟁이 그리스뿐 아니라 고전 고대의 기억의 원천으로 되풀이 상고되고 있는가 하는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어쨌거나 박완서의 많은 단편들에서 전쟁은 「나목」에서처럼 직접적인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가령 우리는 「카메라와 워커」를 예로 들 수가 있다. 일인칭의 작중 설자는 「나목」의 여주인공이 그렇듯이 난리통에 오빠를 잃는다. 첫돌도 채 못 되어 부모를 잃은 조카 훈이가 고등학교에서 문과 선택을 하자 집안에서 억지고 이과로 돌려놓는다. <어머니는 오빠가 평생 사회에 참여해서 돈 한푼 벌어들인 일이 없는 주제에 까닭없이 죽어야 하는 일엔 끼여들고 말았다는 사실이 문과 출신이라는 것과 반드시 무슨 상관이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녀의 합동 작전으로 문과 지망을 단념시키고 나서 할머니가 훈이이게 기대하는 것은 <좋은 학교 나와서 착실한 직장 가지고 결혼해서 일요일날이면 처자식 데리고 카메라 메고 놀러 나가고 당신은 집을 봐주는 게 평생 소원이시다.> 이와 같은 무사안온한 소시민적 생복의 성취는 그러나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머니와 고모의 소원대로 훈이는 공과 대학을 나와 기사가 되었으나 그는 워커를 신고 벽지의 도로 공사판에서 형편없는 몰골로 혹사당하고 있다.
훈이가 적먹이일 적 그때 그 지랄 같은 전쟁이 지나가면서 이 나라 온 땅이 불모화해 사람들의 삶이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던지는 걸 본 나이기에 지레 겁을 먹고 훈이를 이 땅에 뿌리 내리기 쉬운 가장 무난한 품종으로 키우는 데까지 신경을 써가며 키웠다. 그런데 그게 빗나가고 만 것을 나는 자인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나는 가슴이 답답해서 절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후회는 아니었다. 훈이를 키우는 일을 지금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이러이러하게 키우리라는 새로운 방도를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니, 후회라기보다는 혼란이었다.
기술직보다는 관리직이 우대받고 있다는 우리 사회의 일단을 이 작품은 잘 드러내주고 있다. 또 누구나 쉽게 얘기하는 최근의 <근대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처참한 희생과 노고에 의존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러한 세태와 일상의 자상한 관심, 그리고 그 성공적인 표출이 이 작품의 설득력에 기여한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의 핵심에서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은 1950년의 비극 체험과 이를 통해 체득한 목숨 보전에 대한 갈구라는 모티프이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우연의 희롱이 평상시라 하더라도 없을 리 없고 실상 사람의 목숨이란 이러한 우연한 희롱에 영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있다. 그러나 1950년의 전쟁 전후에 있었던 사람 손에 의한 방자스러운 목숨의 대량 파기는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진 만큼 우리들의 회한을 떨리게 하고 짙게 한다. 목숨 보전에의 갈구가 다시 목숨의 천대로 떨어져 있는 역설적 상황으로 우리의 시선을 모으게 하는 작가의 눈길은 사뭇 날카롭고 호소력이 크다. 그 점에서 「카메라와 워커」는 전쟁의 후일담으로서 보다 큰 무게와 의미를 얻고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 「나목」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언뜻 보아 이민 현상을 빈정대고 있으며 조국을 등지는 허영의 무리들의 허상을 쫓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별의 김포공항」에서도 전쟁 체험은 작품 등장 인물의 인간 형성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과장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는 것은 작품의 정독이 쉽게 확신시켜 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건이 인간 형성에 끼치는 굉장한 충격에 관한 통찰이야말로 이 작가의 강점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박완서 작품의 또 하나의 모티프를 이루고 있으며 「휘청거리는 오후」에서 유감없이 그 솜씨가 드러나 있는 것은 물질주의적 속물 성향에 대한 철저한 반대와 잡스럽고 염치없는 허영에 대한 신랄한 드러냄이다. 속물 성향과 잡스러움에 대한 공격은 너러나는 사람살이의 슬픈 허망스러움은 느껴지지 않고 그저 혐오스러움만이 민망스럽게 드러날 때도 이럴 때 우리는 「미더움이, 치사함에 대한 미움이 우리의 표정을 형편없이 일그러뜨리고 설령 그것이 不正에 대한 노여움이라 할지라도 노여움이 우리의 목소리를 쉬게 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한 시인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어떤 훈기를 아쉬워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작가의 反俗 성향이 치열함과 가차없음을 드러내주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지렁이 울음소리」는 이 작가의 反俗 성향의 치열함과 그 내력을 소상히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무사안온한 소시민적 행복을 성취해서 이웃사람들의 선망을 받고 있는 작중설자는 순치(馴致)된 행복에 저항감을 느낀다. 「나는 이렇게 내 행복을 철석같이 믿고는 있었으나 행복한 것의 행복감과는 무관했다」범속한 행복의 굴레에 대하여 작중설자는 순간적인 반역의 꿈을 피우곤 한다.
나는 불현듯 겨울의 남대문 꽃시장에 있고 싶어진다. 그 따습고 난만한 고장에, 국화, 카네이션, 금잔화, 동백, 프리지어, 튤립, 사이레리아……이런 꽃들이 어우러진 훈향……콧방울을 팽배시켜 이런 훈향을 가슴 가득히 들이마실 때의 즐거운 현훈(眩暈), 뜨거운 부정(不貞)을 청정하게 저지를 것 같은 설레임, 10년은 젊어진 것 같은, 아니 20년 전 청순과 방일(放逸)이 조금치의 모순도 없이 공존하던 19세의 나날 같은 자유, 이런 것들은 그 고장에서 누리고 싶었다.
이러한 낭만적 충동에 몸을 맡길 정도로 작중설자는 무분별하지가 않다. 에마 보바리가 되기에는 너무 말짱하고 야무지며 사려가 깊다. 속물주의의 화신 같은 이가 남편이란 사실을 억울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행복의 조건들이 표절한 미사여구처럼> 느껴지기는 하나 일상적 행복에 대한 순치가 어느 정도 순조롭게 진척되어 있는 터이다. 그녀는 우연히 만났던 옛날 스승에게서 반속과 반역의 잔상을 찾아보려 한다. 이미 그 늙은 전직 교사는 옛날의 반속의 자리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복원시켜 보려고 시도하나 그런 시도는 당연히 무위로 끝나 버리고 만다. 어디에서고 범속과 안온함의 일상적인 질서가 지배하고 있을 뿐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지향은 찾아볼 수 없다. 작중 설자가 황홀한 탈출의 순간을 상상했던 장소가 온실의 꽃시장이고 실제로 그곳에서 느낀 것이 배반감이었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일상을 넘어선 초일상적 질서에 대한 그리움과 짤막하나마 짜릿한 눈길이 이 작품의 기본 동력이 되어 있고 박완서 작품의 반속 지향의 원천이 되어 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 세계를 매력 있게 해주고 있는 것은 비판적 반속 지향이 있을 수 있는 충족된 행복에의 그리움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다는 사실이다.
(필자 : 연세대학교 석좌 교수·국문학)
<자료출처: 경희대 성과 문학 5조>
박완서의 작품세계
1. 작품세계와 문학적 특징
박완서 소설의 가장 큰 특징으로 ‘기억과 묘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모든 작가의 경우 필연적으로 자전적 요소가 투영되게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훨씬 넘어설 정도로 자전적인 요소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우리 시대의 탁월한 이야기꾼’이라고 지칭되는 그는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소설 속의 인물과 작가를 겹쳐서 읽을 여지를 많이 남겨 놓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 [나목]이나 [목마른 계절] 그리고 [엄마의 말뚝] 시리즈나 단편 [조그만 체험기]등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그대로 녹아 들어 있는 것으로 이미 정평이 나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놓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작가의 ‘천의무봉’한 문체 역시 이러한 착각을 더욱 부추기는 데 일조를 한다.
70년대 박완서의 소설은 대부분 6.25의 비극과 분단현실 그리고 중산층의 삶의 양식을 관통하는 물신주의적 풍토를 드러내는데 바쳐져 있다.
그가 20년 동안 써낸 작품들에는 전쟁과 분단의 체험이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는 하나 전쟁의 원인과 전개양상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분단상황 자체를 문제삼고 있지는 않다. 대체로 그의 전쟁분단 소재의 작품들은 전쟁으로 인해 한 가족이 겪는 엄청난 상처와 그것의 치유과정을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념적 갈등과 화해, 내재된 증오의 폭발과 그로 인한 새로운 증오의 형성,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복판에서 피어나는 휴머니즘 등을 다루어온 저간의 전쟁, 분단 소재의 작품들과는 사뭇 차이나는 독특한 작품세계인 것인데, 그러기에 폭은 좁지만 그만큼 개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1976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휘청거리는 오후]나 [조그만 체험기]같은 작품들의 경우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개인과 사회를 어떻게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마비시키고 타락시키는가 하는 문제, 이런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 착하고 순한 보통 사람들을 어떻게 소리도 없이 몰락시켜 버리는가 하는 문제들을 날카롭게 파헤쳐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조그만 체험기]에서는 작가 개인의 체험이 바탕이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실감나게 생생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 사회 전체의 이지러진 정신 구조, 이러한 사회 구조가 개개인에게 욕하는 비뚤어진 삶의 방식, 이런 삶의 방식이 모르는 사이에 가져오는 개인 및 사회의 몰락과 파멸 등 매우 포괄적이고 심각한 문제를 다루며 활달한 언어구사와 칼날 같은 비판정신으로 이 시대의 풍속적 혼란과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데 천재적인 솜씨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저문날의 삽화]와 그 이후에 발표된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현상의 하나로 구체적이고 친근한 소시민적 일상사의 여러 모습들을 자기 반성적인 시선으로 감싸안고 있는 것을 들수 있을 것이다. 이들 작품은 대개 중년이나 중년 이상의 여성을 작중 화자로 내세우고 있으며 따라서 이야기의 진행도 그들 세대의 일상적인 주변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전의 작품에서는 작중화자의 의식이 거의 완전히 작품에 밀착해있는데 비해 이들 작품들은 작가가 작중 화자의 의식에 대해 일정한 반성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작중 인물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의 의미를 보다 폭넓게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들 작품에서 작가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삶의 자질구레한 갈등들을 비교적 균형잡힌 객관적 시각으로 드러냄으로써 이야기의 진행을 비판과 애정의 어느 한 극단으로 몰고 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 태도는 이들 작품을 이 시대 소시민적 삶의 충실한 풍속도를 이루게 한다.
그의 소설에서는 또한 여성해방의식의 형상화가 보여진다. 박완서의 소설에 나타나는 어머니는 아들이라는 우상에 매어있는 , 그래서 딸만 남겨 놓고 아들을 데려간 세월을 증오하면서 죽어간 그 시절 전형적인 어머니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나목]의 어머니는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을 몽땅 잡아 가시고 계집애만 남겨 놓으셨노”라고 탄식한다. 그 어머니에 대한 단상들이 소설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이를테면 [서 있는 여자]에는 “여염집 여자란 말이 참 듣기 좋군요. 일부 조사를 삶의 목적으로 태어난 것 같은 정숙한 여자들, 얼마나 좋아요”라는 혹은 “엄마 좀 참으시지 그랬어요. 지금부터라도 참으세요. 여자가 참아야지 별 수 있나요”라는 비아냥거림과 “여자들이 본질적인 것에 무식하기가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은 그들의 언어 생활의 부정확성만 봐도 알고도 남는다니까”라는 언사에 대한 분노와 “여자가 남자가 하는 일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해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뿌리 깊게 가로놓인 문제가 본질적으로 달라지진 않는다는 얘기에요”라는 구체적인 고민이 세겨져 있다. 소설에 나타난 이런 측면들을 통해 그는 주체적인 입장을 가진 “인간”의 목소리를 소설 표면으로 복원하고자 한다.
2. 작가의 의식
(1) 생명주의
박완서의 생명주의는 완벽한 질서나 화려한 문명보다 삶의 근원적인 활력 내지 야성을 존중하고, 첨단적인 기술이나 기계보다 인간의 생명과 성적 활력을 오히려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엄마의 말뚝1]과 [공항에서 만난 사람]에서는 야성에의 지향이, [그 가을의 사흘 동안]과 [울음소리] 에서는 인간본질의 근원탐구에의 집착이 뚜렷이 나타난다.
박완서의 가족사의 일부분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 [엄마의 말뚝1]은 어머니가 자녀교육을 위하여 시골에서 나와 대처 서울에 정착하는 전후과정을 소녀의 눈을 통하여 기록한 1인칭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소녀인 나는 대처생활에 차차 길들어 갔지만 끝내 처음의 두려웠고 주눅들었던 문밖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과, 또 엄마의 신여성을 표방한 교육이 실제에 있어 모순을 지니고 있었고 나에게 거부감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나의 의식 내용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후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어머니의 자식교육을 위해 박은 말뚝에서 자식의 의식 내용은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서 우리는 박완서의 영원한 비도시적 문밖의식 내지 어릴 때 시곡생활에서 지니게 된 순수한 야성을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도시의 양복장이들, 이층집들, 가게의 신기한 물건들, 활기찬 소음 등의 번화와 누구나 맹종하고 있는 질서가 어린 박완서를 일시 주눅들게 했다 하더라도, 앞에 든 비도시적 문밖의식이나 어릴 때 오래 방목된 그녀의 야성은 끝내 무시되거나 소멸된 일이 없기 떄문이다. 소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런 야성은 삶의 그누언적인 활력으로서 박완서의 다른 작품들에도 거듭 나타나 있다.
[공항에서 만난 사람]에서 작자는 그 야성을 삶의 활력으로, 그 가운데서도 일종의 한국여인 고유의 오만하고 거칠은 생활력으로 구체화해놓고 있다. 이러한 야성의 여인상을 탁월하게 형상화 한 점이 돋보이는 이 작품의 주인공 무대소 아줌마는 이제 “주름이 난도질해 놓은 것처럼 처참한, 거칠게 늙은 여자” 이자, 과거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이었던, 외국인이면 누구나 “얕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터무니없이 오만한 어쩔 수 없는 우리 나라 사람” 으로 그려져 있다. 그것은 무대소 아줌마의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에서 드러나는데 그녀는 6.25 동란중에는 미군 PX 의 청소부로 일했고, 휴전 후에는 국민방위군이어던 남편의 비참한 죽음을 겪었고, 그 뒤 늙고 보잘 것 없는 양키와의 결혼생활과 그의 죽음을 당했고, 이제 자신의 트기 아이들 교육 때문에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두 번씩이나 과부가 된 것을 비롯하여 그녀가 겪게 된 운명이 사나왔다는 데 있다기보다, 그러한 운명에 그녀가 오만하고 당당한 위엄과 사납고 야성적인 활력으로 대처했다는 데 있는 것이다.
박완서의 이와 같은 야성지향적 생명주의는 [그 가을의 사흘 동안 ] 과 [울음소리] 에서 인간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변모된다. 전자의 작품에서는 30년 동안 의사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살아있는 아기를 받아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구체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소파수술한 임부의 손상되지 않은 태아에 뚜렷이 박힌 두 개의 눈을 보고 생명을 훼손한 과거의 자기 죄과에 대해서 깊은 뉘우침과 두려움에 떨기도 하는 그녀는 어느날 스무살도 안돼 보이는 앳된 소녀의 태아 처리를 하다가 뜻밖에 그 소녀의 살아있는 팔삭동이 미숙아를 받고 아기를 갖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나 아기는 죽게 되고 그녀는 그 아기를 자기의 새집 뜨락에 깊이 잠재워 아기의 무덤이라도 가진 여자가 되고자 한다.
이와 같이 아기를 갖고 싶다는 일종의 여성 고유의 생명에 대한 사랑의 눈뜸은 [울음소리]에도 약간 변모된 형태로 나타난다. 칠년적 딱 한 번 낳은 아기가 살아 있은 삼주일 동안 뇌성마비로 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이 부부는 아이를 다시는 갖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이 부부가 함께 멀리서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환청으로 들으며 행복한 공감으로 사랑의 순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정욕보다 더 강렬한 생명에의 갈구로 이루어지는 부부의 성적 결합 장면은 박완서의 생명주의의 특이한 일면을 잘 드러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단순한 기계문명 존중이나 육체의 예찬과는 다른, 강렬한 생명애에 기초한 박완서의 생명주의는 [유실]에서 인간존재의 정체탐구에 집착한다. [유실]은 제목 그대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지만 여기서 추구하는 잃어버린 것은 물질이 아니라 주인공 자신의 숨겨진 존재의 정체이다 그것은 우리의 평행 감각을 일탈하는 일종의 인간 속성인 동시에 삶의 원동력으로서의 성본능과도 불가분의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박완서의 생명주의는 이와같이 삶의 근원적인 활력으로서의 야성 및 성본능을 중시하고, 직접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고, 중용과 평형에서의 일탈을 가능케 하는 싱싱한 인간내면을 추구하기도 한다. 결국 그러한 생명주의는 인간의 참다운 삶의 가치를 밝히고 지켜나가는 것과도 다르지 않는 것이다.
(2)비판의식
박완서는 1970년대부터 창작활동을 시작하였고 작품의 시대적 배경 역시 대부분 그것과 비슷한 시기를 택하고 있다. 이무렵 우리 사회는 파행적인 산업화와 경제 발전 그리고 기형적인 도시화 등으로 갖가지 사회적 부조리와 불균형, 비리와 타락이 계속 심화되는 중이었다. 게다가 6.25동란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형무형의 상처와 고통으로 남아 있으며, 분단의 문제는 여전히 절실하고 심각한 민족적 과제로 엄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완서의 많은 소설들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상황과 역사적 조건에 대해서 그녀 자신이 문학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데는 우리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깊은 투시와 날카로운 비판이 수반되어 있다. 박완서의 작품이 모두 총체적 상황의식을 지니고 있는지는 더욱 검토를 요할 문제이지만 현실에 대한 이 작가의 투철하고 예리한 비판의식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현대분명의 획일성이 초래하는 인간소외 문제를 다룬 [닮은 방들], 우리 사회의 편의주의적 자기기만성을 고발한 [상], 관료사외의 모순을 비판한 [조그만 체험기], 그리고 분단의 모순과 고통을 그려낸 [엄마의 말뚝2]등은 그 두드러진 작품들이다.
사회비판적인 작품으로는 그밖에도 세속적인 안일주의의 사회풍조를 풍자한 [지렁이 울음소리], 가난한 사람의 성실한 삶이 농락되는 현실을 고발한 [도둑맞은 가난], 금력과 허영심이 지배하는 풍토에서 아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없음을 말한 [낙토의 아이들], 무식과 교만, 비겁과 위선, 타산과 과욕이 판을 치는 저질의 사회를 비판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에 힘들 정도로 많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적 타락이 전쟁과도 연관되는 것으로 본 경우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기 이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이다. 피난 도중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딸인 내가 양갈보 되기를 바랐고, 나는 세 번이나 시집가서 타락한 세태를 겪어야 했는데 세 번 모두 나는 후취로 시집을 갔고 그 세 남편은 한결같이 돈에 기갈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배금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사회를 살아온 나는 어느 날 관광 안내원이 경제제일주의의 깃발 아래 대외적으로 나라 망신도 불사하는 것을 보고 잊었던 부끄러움을느끼게 되어,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될 것 같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박완서는 이처럼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타락뿐만 아니라 분단과 전쟁이 남긴 개인적 내지 민족적 고통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쏟는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박완서의 작품들이 제시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들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생명주의와 비판 의식이다. 삶의 근원적인 활력을 소중히 생각하는 이 작가의 생명주의는 답답한 질서나 기술이나 기계보다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고 또 중용과 평형에서의 일탈을 가능케 하는 싱싱한 인간내면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주의는 인간의 참다운 삶의 가치를 밝히고 지켜나가려는 박완서의 휴머니즘과도 동질적인 것이므로 그것은 그 자체를 저해하는 사회와 역사의 모순이나 문명의 해독을 비판하게 마련인 것이다.
3. 정리
1970년 [여성동아]에 장편[나목]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 박완서는 그야말로 ‘문학사’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소설에 드러나는 중산층의 허위의식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라든가, 자신의 가족사에 근거한 분단 비극의 형상화, 그리고 최근 들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페미니즘이나 생명사상에 대한 따뜻하고도 설득력 있는 공감 등, 이 작가가 이제까지 다루어 온 주제들은 한결같이 해당 시기마다 우리 문학의 가장 예민한 공감대를 형성해 온 바 있다.
그의 개인사는 단순히 개인의 실존적인 고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박완서와 동일한 시대를 살아갔던 무수한 개인들의 고백을 대표한다. 이것은 박완서 세대가 우리 역사에서 남달리 중요한 시기. 예컨대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에 이르는 기간, 그리고 해방기의 혼란으로부터 한국 전쟁의 참사에 노출된 시기 등 굴곡진 삶을 살아왔다는 의미에서 그러할 뿐만 아니라 작가가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회한에 가득차서 회고하는 삶의 내용이 개인의 삶의 그것만으로 머무르지 않는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 곧바로 한 집단이나 한 세대의 일반적인 경험의 양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은 그 경험이 강제하는 고통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분명 작가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축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최근 들어 비슷한 소설적 경향을 보여 주는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박완서 문학만의 독특한 특징이 아닐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박완서 문학은 개인사를 넘어서는 세대의 기록으로 다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자료출처: 경처리 사는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