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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 社長과 Mark 사모님의 대결투 (총 16부)
[제1부] 내 머슴이 되어주시오!!
오케이 社長은 골프광이다.
물론 그의 드라이버 샷은 일품이다.
신기의 아이언 샷도 예술의 경지이다.
버디를 노리는 그의 어프로치 샷은 동반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이다.
그런데 그에겐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있다.
1미터도 안 되는 퍼팅을 이상하게도 넣지 못한다.
그의 입담은 너무 걸쭉해서 동반자들을 기죽게 만든다.
너무나 골프실력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은 그가 60센티의 숏 퍼팅을 놓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그는 어프로치를 60센티에 붙여놓고, 천천히 걸어오면서 동반자들에게 큰소리 친다.
"자네들은 영어도 모르나, 무식하게..."
그러면 동반자 中 그의 신기의 샷에 기죽은 사람이 꼭 하나는 있어서, [오케이]를 하고 만다.
오케이 社長은 그렇게 싱글을 치는 사람이다.
오케이 社長이 배우자와 死別한 건 3年 前의 일이다.
외로운 시간을 골프로 소일하다 보니, 어느덧 골프실력은 일취월장해서 동네연습장에선 최고수 싱글 고수로 통한다.
연습장엔 내노라 하는 싱글 고수들이 즐비했다.
싱글 고수들은 아무도 그의 실력을 의심치 않았다.
그의 골프에 대한 지식이나 실력 모두 최상의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연습장 챔피언이 된다는 건 해보나마나 라고 이구동성 입을 모았다.
챔피언 戰은 1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훤칠한 키에 빼어난 몸매를 가진 묘령의 사모님이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사모님의 골프실력도 대단하여 사모님이 타석에 들어서면 골퍼들이 입을 벌리고 뒤에 늘어서서 감상하는 일이 이젠 자연스런 일이 되었다.
자신의 원 포인트 레슨을 갈구하던 저 下手들이 이젠 저 사모님에게 넋이 빠져있으니, 오케이 社長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겠다.
묘령의 사모님에 대해 연습장 사장님에게 물으니, 그녀가 당대 최고의 아마추어 고수로 아마대회에서도 여러 번 우승할 뻔했다고 하면서
"그런데 아마 그녀가 홀몸이라지…"
하는 묻지않는 말까지 보탰다.
그런데 그 사모님 별명이 [마크 사모님]이라고, 그녀는 친선게임에서도 단 30센티도 마크하라고 하는 고지식한 골퍼여서, 이젠 동창들도 그녀와 골프치기를 꺼린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연습장의 自他가 공인하는 최고수인 오케이 社長, 연습장 월례회에서 2언더도 가끔 하는 그였다.
핸디가 5라는 마크 사모님의 스크라치 게임 제의를 그가 계속 미루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다.
홀아비가 과부에게 관심이 있는 건 인지상정이라.
더구나 그녀처럼 매력 있는 여인에게 도전장을 받았으니,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왠 떡이냐 싶었던 게다.
"허허허… 그럼 게임에는 내기를 해야 되는데, 어떤 내기를 하시겠소?"
"社長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사옵니다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 내가 이기면 社長님은 내 머슴이 되고, 내가 지면 社長님이 원하는 걸 들어주리다."
오만방자하기 그지 없지만, 정말 호탕한 여걸 아닌가.
"허허… 머슴이라, 좋소이다. 나중에 절대 딴소리 하기 없기요."
"말이 길소이다. 남아일언 풍선 껌이요, 여아일언 억만금이라 하더니 겁이 나시는 게요?"
이리하여 연습장 챔피언 전을 앞두고 오케이 社長과 마크 사모님의 1對1 대결투는 成事되었다.
오케이 社長은 거실에 퍼팅 매트를 펼쳤다.
이론적으로 어떻게 하면 된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안다.
1미터 퍼팅을 연속적으로 100번도 넣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젠 60센티, 아니 50센티 퍼팅도 잘 안 들어간다.
기억을 더듬었다.
언제부턴가 숏 퍼팅이 안 들어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건 아내와 死別한 後부터인 것 같다.
그렇게 커 보이던 백팔밀리 홀이 이젠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여 도저히 넣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롱 퍼팅이나 어프로치 실력이 귀신 같아서 1미터 內에 대부분 붙여 동반자들의 자동 오케이를 받아내어, 고수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질 않은가.
그런데 만약 누가 저 숏 퍼팅을 넣으라고 한다면, 으으.. 그건 꿈에도 생각하기 싫다.
마크 사모님은 예전부터 똑순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어른들은 그녀의 꼼꼼한 면을 보고, 살림 잘 할 거라고 칭찬이 자자했었다.
그녀는 맺고 끊는 게 확실했다.
이런 성격으로 因해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과 사귀었지만, 남자들의 허풍과 엉성한 마무리에 늘 실망했다.
이런 그녀가 골프를 하게 되었으니, 1미터 마크는 당연하고, 50센티 심지어 30센티도 모두 마크라.
그래서 마크 사모님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젠 골프친구도 다 떨어져 나가고, 홀로이 아마추어 대회를 전전하는 유랑 골퍼가 되었던 게다.
아마추어 대회는 그래도 대회라 오케이(기브)가 없으니, 그녀가 박박 마크하라고 안 우겨도 되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오케이 社長과 마크 사모님의 운명을 건 대결투는 시작되었는데....
[제2부] 처녀장가
나와는 십년지기인 오케이 社長이 입이 귀에 걸려 나를 찾아온 건, 엄동설한의 동장군이 주춤한 토요일 오후였다.
동계훈련 기간동안 비디오에 중독되어 소파를 구들장삼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던 나는 오랜만에 몸이나 풀어볼까 하고 연습장을 찾았는데,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귀신같이 찾아온 것이었다.
"여보게 무싸! 나 처녀장가 가게 되었다네. 내일은 내가 한턱 거하게 살 터이니, 그리 알고 커피한잔 하세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요,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하고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나의 손을 이끌고 자판기로 향하는 그의 입에선 콧노래가 나온다.
어찌 됐던 친구가 홀아비신세 면하게 되었다니 그것도 처녀 장가라니 축하해줄 일이지만,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그가 꽃뱀한테 사기나 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싸, 자네 내가 꽃뱀한테 물린 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가 본데, 내 얘길 들어 보라구."
친구도 오래 사귀면 텔레파시가 통하나 보다.
오케이 社長과 나는 서로가 핸드폰을 들고 불평한 적이 많았었다.
"자넨 웬 전화가 매일 통화 中인가, 나 몰래 바람 피는 거 아냐?"
"누가 할 소리, 자네야말로 핸드폰 좀 그만 하게. 근데 언제 전화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는 건 둘 다 핸드폰 들고 같은 시각에 전화를 걸었을 때 생기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만약 전화 걸었다가 통화 中이면 홀수 날엔 내가 다시 걸고, 짝수 날엔 오사장이 다시 걸기로 해서 그 문제는 해결이 되었었다.
"여보게 무싸 저기 7번 타석 좀 보시게나. 스윙 괜찮지, 거의 캐리웹이지 않나?"
"점입가경이군. 처녀장가 간다더니 웬 여자 꽁무니나 쳐다보구 헛소리만 계속하는기여?"
군침을 꿀꺽 삼키는 오사장의 목젖에서 '꿀꺽' 소리가 나는 것은 그의 독수공방이 꽤나 길었음이라.
"햐아… 그런데 진짜 보면 볼수록 나도 군침 도네 그랴, 나도 저런 부드러운 스윙을 해야 할 텐데 말야.."
"무싸! 자네 꿈도 꾸지 말게. 저 여자는 임자 있는 몸이라네."
"누가 임잔데, 자네가 웬 참견인감. 어, 혹시 그럼 자네가 말하는 처녀장가하고 저 여자하고 관계가…"
"이제야 형광등에 불 들어오는가 보군. 그리고 자네 내일 시간 되지? 옷 좀 깨끗이 빨아 입고, 롯데호텔 커피샵으로 10時까지 나오게. 내일 내 약혼식이 있거든."
"아니, 그럼 벌써. 어 그럼, 형수님한테 인사드려야지."
"잠깐 참게나. 이건 자네와 나만의 비밀일세, 조용하게나."
나는 귀신에 홀린건지, 아님 내가 낮잠을 자다 꿈을 꾸고 있는건지 분간이 안되었다.
"그럼 열심히 연습하게나. 난 약혼식 준비가 바빠서 말야. 그럼 내일 보세, 약속 시간 잊지 말고, 핸드폰 켜 놓고.."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 열심히 공을 쳐댔다.
공은 왜 이리도 안 맞는지. 오랫동안 연습을 안 하다 나와서 그런가, 아니면 오케이 社長의 종잡을 수 없는 얘기가 귓전에 맴돌아서 그런가.
나는 클럽을 도로 캐디백에 집어넣다가 문득 아까 그 캐리웹이 생각나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또박또박 부드러운 스윙으로 공을 날리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기까지 했다.
참 내, 오사장은 뭔 복이 있어서 저렇게 골프 잘하고 예쁜 마누라를 얻게 되었단 말인가.
점점 왕비 병에 바가지만 늘어가는 우리 마누라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라…
오사장이 그리 잘 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변머리가 좋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똑티 나는 규수를 얻었는감?
스윙할 때마다 옷 속에서 꿈틀대는 그녀의 숨은 근육들이 재봉선을 터뜨릴 듯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제3부] 하리수게임
약속 장소인 롯데호텔 커피샵에 들어서니 비발디 四季의 선율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오케이 社長은 먼저 와서 손을 들어 나를 불렀다.
"오사장 오늘 약혼식이라며. 약혼식 장소는 어디지?"
"여기가 약혼식 장소일세."
"커피샵에서 약혼식을? 하객도 없이?"
"기다려보게나, 무싸"
잠시 後 출입문쪽에서 깔금한 투피스 정장을 한 캐리웹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서 사슴 눈망울을 한 어여쁜 규수도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던 캐리웹은 이쪽의 우리를 보고, 이내 성큼성큼 환한 미소를 띠며 다가와 자리를 했다.
"자, 인사들 하십시다. 저는 오케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오늘 증인이 되실 저의 십년지기 무싸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무싸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목례를 가볍게 한 캐리웹이 받아서 소개를 이어갔다.
"저는 마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쪽은 저의 동기 동창인 꽃사슴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첨 뵙겠습니다. 꽃사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間 통성명이 끝나고 우리는 차와 음료를 시켰다.
다소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 캐리웹 마크가 말문을 열었다.
"일전에 오사장님과 구두로 定했던 결투에 대한 내용을 문서로 만들었으니 읽어보시고 이의가 없으시면 밑에 서명하시도록 하시죠."
"마크 사모님, 아아니 결투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
"모르셨어요. 무싸님. 저하고 여기 오사장님하고 일생일대의 대결투에 대한 결투 조인식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점입가경이라.
일단 마크가 건네준 [결투 서약서]를 읽어보았다.
[결투서약서]
오케이와 마크는 대결투를 진행함에 있어, 대한민국의 신사도와 숙녀도를 걸고 아래 사항을 지킬 것을 서약합니다.
1. 대결투 일시 : 2002년 3월~5월 (1~3차 결투 진행)
2. 대결투 장소 : 발안 C.C
3. 대결투 방법
1) 제1차 대결투 (3/17) : 18홀 스트록 플레이로 진행
2) 제2차 대결투 (4/21) : 18홀 매치 플레이로 진행
* 2차 대결투로 승부가 나지않을 경우 제3차 대결을 진행한다.
3) 제3차 대결투 (5/19) : 하리수 매치 플레이로 진행
4. 대결투 판정
모든 룰은 PGA룰과 발안C.C 로칼 룰을 적용하여 3판 2승제로 한다.
증인 무싸와 꽃사슴은 동반 라운드를 하며, 이 두 사람의 대결투가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한다.
5. 대결투 결과에 따른 약속 이행
마크가 이길 경우에는 오케이가 마크의 평생 머슴이 되고, 오케이가 이길 경우에는 오케이가 원하는 바를 마크가 들어준다.
上記의 대결투 서약에 대해 대한민국의 신사 숙녀의 명예를 걸고 증인 앞에 약속을 이행할 것을 서약합니다.
결투자: 오케이 印 마크 印
증인 : 무싸 印 꽃사슴 印
기가 찰 노릇이었다.
별별 내기골프를 다 들어봤지만, 이런 내기는 첨이라.
그런데 오사장과 마사모의 불타는 눈길을 보니, 이미 그들의 대결투는 시작된 것 같았다.
이 농담도 진담도 아닌 것 같은 대결투와 승복조건에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먼저 서명한 오사장이 결투서약서를 내밀며 서명을 종용한다.
"여보게 무싸 뭐하나. 얼른 서명 하게나."
"하여튼 알았네. 나 원 참 기가 차서.."
우리는 무슨 역적모의에 사발통문 돌리듯 네 장의 서약서에 서명했다.
식어가는 찻잔에 다소 대결투의 열기도 숨이 죽을 무렵, 마크 사모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사장님, 지금 노비문서에 서명하신 거 아시죠."
"물론입니다. 마사모님 未婚이란 거 알고 있습니다. 마사모님은 지금 혼인서약서에 서명하신 겁니다."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걱정 마십시요."
"그런데 다 알겠는데, 하리수 매치 플레이는 뭡니까? 별별 방법 다 들어봤지만, 금시초문이라서요"
"아 그거요, 하리수가 지금 골프 친다면 어떻게 치겠어요?"
"그거야 뭐 이젠 여자이니까. 치마 입고 레이디 티에서 여성용 골프채로 치겠지요."
"바로 그거지요. 오사장님은 저의 골프채를 가지고 레이디 티에서 치시고, 저는 오사장님의 골프채를 가지고 남성용 레귤러 티에서 치는 거죠. 치마 입으란 말까지는 안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사모님께서 불리하지 않으실까요?"
"천만에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하리수 게임 하실려면, 한번은 저를 이겨야 할 겁니다."
"하하하 그렇게 자신만만하십니까. 좋습니다. 그럼 이제 서약식도 끝났으니, 제가 잘 아는 횟집에 가서 식사나 합시다."
골프역사에 前無後無한 대결투 서약식을 마친 우리 네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명동 횟집으로 향했다.
[제4부] 욕정의 눈동자
나의 손폰에서 전자음이 요란스레 울린다.
나의 손폰 벨 소리는 롯떼 껌 로고송이다.
요즘 좋은 노래도 많지만, 난 아직도 7~80년대 민주화 운동하던 시대의 노래들이 정겹게 들리는 까닭은 386세대의 추억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추억에 잠겨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다시 두 번째 손폰이 울었다.
제1차 대결투 날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토요일 오후 동네 연습장에서 안양 베네스트 연습장으로 훈련캠프를 바꾼 오케이 社長한테서 온 전화였다.
오케이 社長은 전력노출을 피하기 위해 훈련장소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나를 대결투의 전략연구소장으로 임명하고 마크 사모님에 대한 훈련상황을 면밀히 관찰하게 하는 한편, 자신이 이 결투에서 승리해서 장가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해온 터여서, 우린 이제 마치 냉전시대에 FBI와 KGB가 했던 첩보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미 상호 탐색전에 들어가 있었다.
"여보게 무싸! 그쪽 상황은 어떤가? 마크는 어쩌고 있느냐고?"
"여전히 예쁘구먼. 오늘은 날씨가 너무 포근하여 웃옷을 벗고 반팔차림으로 스윙하는데, 흰 살결이 아주 예술인데. 게다가 뭔 마음에 변화가 있었는지, 겨울연가의 최지우 헤어컷을 했다네. 한번 와서 보지 그래, 상큼한데..."
"이 친구가 지금 놀리고 있나. 아, 어서 베네스트로 오게나. 작전 숙의 좀 하게. 15번 타석이야. 그리고 난 아직 점심 前이거든. 올 때 뭐 김밥이라도 싸오라고. 난 오늘 여기서 1,000개는 때리고 갈 테니까 말야."
"알았네. 총알 같이 날아가겠네. 그리고 내가 디지털 카메라로 마크가 스윙하는 거 10秒 動영상으로 촬영해 놓았으니까. 자네 노트북에 연결해서 보면서 작전을 짜 보세나. 작전 名은 [처녀장가] 아니 것는감?"
3월 9일 토요일 오후의 햇살은 너무도 따스했다.
어느덧 봄바람은 골퍼들의 마음을 들뜨게 할 만큼 포근했다.
안양 베네스트의 잔디 밑에서는 파란 새싹들이 움터 오르고 있었다.
일주일 만에 본 오케이 社長의 얼굴은 다소 말라 보였다.
그리고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 같던 그의 뱃살도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그의 파워 드라이브 샷은 예전보다 더욱 힘차서, 240야드나 떨어져 있는 안양 베네스트의 그물망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신기의 아이언 샷도 중간 중간에 있는 그린에 나비처럼 날아 안착하고 있었다.
"아니 자네가 오케이 社長 맞는감. 난 웬 쎄미프로 시험 보는 프로 지망생인 줄 착각했다니까. 그리고 그 배흘림 기둥은 어데루 갔는감?"
"내게 있어선 일생일대의 대결투 아닌가 말야. 일주일 사이에 3킬로나 뺐다네. 내 복근 좀 볼래. 윗몸 일으키기도 이젠 100번은 할 수 있다네. 그리고 나의 약점인 숏 펏도 극복하기 위해, 나이센 퍼팅 연습기 사다 놓고 밤마다 두 시간씩 연습 中이라네. 그리고 발안 CC도 아홉시로 부킹해놨다네."
그의 비장한 목소리와 눈빛에는 마치 호랑이가 먹이를 놓고 단숨에 덮칠 기세가 담겨 있었다.
"자, 내가 사온 김밥일세. 우리 동네서 제일 맛있는 김밥 집에서 만든 것일세. 그리고 마크는 여전히 맹연습 中이고, 근데 말야 꽃사슴은 안 보이던데..."
"후후. 꽃사슴. 좀 前까지 저쪽에서 내가 연습하는 걸 보고 있더군. 아마도 나의 연습상황을 탐색하고 간 거겠지. 자네처럼... 하여튼 대단한 결투가 될 걸세."
"내가 마크의 스윙을 찍어 왔는데 말야, 한번 볼 텐가. 자네 노트북 가져왔지?"
오사장의 컴퓨터에는 골프스윙 해석 프로그램이 이미 깔려있었다.
내가 찍어 온 動영상을 그의 프로그램으로 18個 동작으로 나누어 분석에 들어갔다.
먼저 마크의 전체 스윙구성을 動영상으로 보았다.
역시 마크는 무림의 초절정 女고수 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연습장이라고 무턱대고 공을 치지는 않았다.
한 샷 한 샷을 마치 필드에서 진짜로 샷하듯 일정한 루틴에 따라 하고있었다.
그녀는 타석에 들어서기 前에 멀리 목표가 되는 기둥을 주시한 後, 타석에 들어 대략적인 어드레스로 조준선 정렬에 들어간다.
다음엔 그 자세에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목표를 겨냥한 後 가볍게 왜글을 한번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어드레스 자세에서 허벅지 안쪽에 힘을 모으고 어깨 턴과 함께 느린 테이크 어웨이를 하고, 손이 무릎 높이에 왔을 시점부터 오른 손목의 코킹을 시작하여 왼팔이 목표선에 올 때까지 끌어 올린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야리야리한 허리를 돌려 최대의 파워를 축적하여 교과서的인 탑스윙을 만들어낸다.
그녀가 탑에서 다운을 시작하여 코킹을 풀지 않은 상태로 거의 무릎높이까지 끌고 내려와 오른발을 지면에 붙인 채로 강력한 임팩을 만들어낸 後, 클럽헤드가 이끄는 대로 팔로우 스로우를 한 後 멋진 균형을 잡으며 박세리의 피니쉬 자세를 만들고 있었다.
너무나 완벽하다.
그녀는 한 샷에 총 8秒의 시간을 사용하고 있었다.
정렬, 조준, 왜글 및 어드레스에 4秒, 테이크어웨이 및 코킹으로 이루어지는 백스윙에 2秒, 다운 및 임팩에 1秒, 팔로우 및 피니쉬에 1秒…
정말 완벽한 샷이다.
그에 比하면 오사장의 스윙은 번개불에 콩 볶아 먹는 빠르고도 파워 있는 샷이다.
그의 샷은 그의 강력한 근육질 몸매에서 나오는 불 같은 샷이다.
그러면서도 그만의 루틴과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어드레스와 함께 핸드퍼스트로 목표를 노린다.
그리고 바로 얼리 코킹한 손목을 그대로 어깨 높이까지 올려 쓰리쿼터로 백스윙을 한 後, 바로 강력한 직선 임팩으로 이어진다.
그의 피니쉬는 어깨에 채를 둘러메는 것으로 끝난다.
그의 허리가 유연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는 늘 때리는 타법보다는 쏘는 타법을 구사해 왔기 때문에 그런 스윙을 구사한다.
바람을 이기는 낮은 탄도에 강력한 백스핀으로 이어지는 고래등 모양의 탄도를 가지는 최광수 선수의 샷과 많이 닮아 있다.
"꿀꺽.."
"아니 오사장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 침 넘어가는 소리 아닌가. 기껏 전략연구소장이 작전 세우고 있는데, 딴 데 한눈 팔고 있구먼."
사실이었다. 나도 침이 넘어갔다.
마크가 유연한 스윙으로 만들어낸 피니쉬 동작에서, 박지은처럼 짧은 티셔츠 밑둥을 비집고 하얀 배꼽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오사장이, 냉철한 킬러의 눈동자에서 욕망으로 불타 오르는 욕정의 눈동자로 변한 것을...
[제5부] 달달이
[제1차 오마대전]을 사흘 앞둔 오늘은 화이트 데이이다.
나른한 하루가 끝나 가고, 저녁에 애들하고 마누라한테 선물할 눈깔사탕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을 무렵 오케이 社長한테 손폰이 왔다.
"저녁에 안양 베네스트로 오시게나, 할 얘기가 있다네."
"오늘은 화이트 데이라서, 좀 일찍 들어가야 하는데..."
"걱정 마시게나. 내가 자네 집 선물도 다 사놓았으니까, 걱정말고 오시게나."
"잠깐 '선물도' 라니, 자넨 아들밖에 없질 않나. 누구 줄 사람이?"
"아까 점심때 마크를 만났었지. [오마대전]을 앞두고 한번 만나보아야 할 것 같아서 말야. 그래서 애들처럼 화이트 데이 핑계 대고 만나자 그랬지. 선물 주니까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좋아하더군. 남자한테는 처음 받아보는 화이트데이 선물이라면서 말야. 그러면서 자기한테 '사랑 고백'하는 거냐고 깔깔 웃더군. 그리고 덧 붙이는 말, '오사장님 머슴될 각오는 단단히 되셨겠죠' 하더군. 캬~하, 고것 참 맹랑하게도."
"알았네. 회의시간이 다 돼서 그만 끊어야겠네. 그럼 이따 봄세."
회의시간에 오케이 社長과 마크 사모가 만나서 주고 받는 일문일답의 장면을 생각하다 실소를 터트릴 뻔 한 것을 억지로 참았다.
[오케이 社長이 마크에게 사랑고백을! 그것도 눈깔 사탕으로, 크~하!]
오늘 일기는 아침부터 기다리던 봄비는 오질 않고, 찌부두두 하루종일 흐리기만 하였다.
그래도 오케이 社長 일을 생각하면, 마음 속은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었다.
[오마대전]의 오사장 側 장자방인 내가 좀 신경을 덜 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 前에 준비해 두었던 발안CC 공략도를 준비하고 안양 베네스트 연습장으로 향하면서 혼자서 연신 터지는 웃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오사장이 여자에게 선물을 다 하다니. 자기 부인 살아 있을 때 양말 한 짝 선물 안 하던 벽창호가 크~흐, 마크한테 첫눈에 반한 모양이구먼.
혼자서 키득키득 웃으며 연습장에 도착해보니, 오사장이 자리를 두 개 잡아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나 무싸, 그리고 여기 자네 딸래미와 마눌님께 줄 선물일세. 그리고 전략연구소장 아니 장자방, 전략은 다 세워 왔겠지?"
"물론이지, 여기 자료 다 있네. 발안 CC는 내 손바닥 보듯 훤하니, 이대로 공략하면 틀림 없네. 이 계산대로만 자네가 쳐 준다면, 1오바나 2오바는 문제 없네. 다만…"
"다만 뭐…? 그래."
오케이 社長은 바로 말꼬리를 잡더니, 이내 뭔가를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창피한 일이지만, 자네 생각이 맞네."
"아니 내가 뭘 말했다고 그러는감, 난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자네하고 나하고 십년지기 아닌감, 자네 집 숟가락, 젓가락 몇 개인지도 다 아는 사인데, 꼭 말해야 아는감? 그럼 우리 적벽대전을 앞두고 제갈공명과 손권이 했던 것처럼 손바닥에 써 보세나, 그리고 하나 둘 셋하고 펼치는 거야."
"갑자기 웬 삼국지 얘기인가. 그러지 그때는 그게 [火]자 였지."
그랬었다.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을 앞두고 춘추전국시대에 일약 스타로 떠오르던 유비의 장자방인 제갈공명이 손권과 손을 잡고 조조 軍을 물리치고자 할 때, 화공(火空)을 구상하고 서로의 이심전심과 실력을 가늠코자 행했던 일화이다.
오사장은 장난끼가 발동했는지 자신의 손바닥에 뭐라고 쓰더니, 이내 내게 볼펜을 넘겼다.
나도 세 글자를 뚜렷이 적었다.
그리고 우리는 합창하듯 하나, 두울, 세엣 하고 손바닥을 펼쳤다.
“달달이!”
그건 언제인가부터 내가 오케이 社長의 별명으로 지어준 이름이었다.
오케이 社長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별명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못 부르지만, 그와의 내기에서 내가 궁지에 몰릴 때면 써먹던 작전 용어였다.
내가 돈 잃고 헤매다가 금쪽 같은 만회의 기회를 잡았을 때, 오사장은 얄밉게도 벙커 샷을 핀 옆 60센치(오케이 또는 기브 거리)에 붙여 나의 꿈을 산산조각 낼 것 같은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비겁하게 써먹던 히든 카드였다.
"나이스 아웃! 제법인데, 달달이! 마크!!"
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다.
바로 [달달이]와 [마크]이다.
나는 그를 잘 안다.
그는 이 [달달이! 마크!] 소리를 듣고, 아직까지 나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
이 말을 들으면 오사장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지고, 목에 핏대까지 올라 흥분한다.
그리고 하는 퍼팅은 해보나마나…
그는 울그락 불그락 씩씩대며 퍼팅을 하는데, 그 모습이 부르르 달달달 떠는 모습이어서 내가 지어준 별명이었다.
그 별명 뒤엔 사실 아픈 과거가 묻어 있다.
난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달달이]라 부르기 때문에 더 나쁜 놈이다.
하지만 오사장이 화내는 건 그때 뿐, 뒤는 깨끗한 사람이다.
삼년 前 우리 [싱글회] 멤버는 발안CC 마지막 홀에 있었다.
우리 中에서 오사장이 60센치 거리에서 처음으로 칠자 싱글로 진입하는 싱글 퍼팅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다른 퍼팅 같으면 당연히 기브 오케이지만, 그걸 넣으면 79타로 장군핸디가 되는 중요한 퍼팅이었기에 우린 마크를 외쳤고, 오사장은 보무도 당당하게 퍼터에 키스까지 하면서 그린에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의 운명을 가르는 핸드폰 소리가 울렸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이건 오사장의 핸드폰 벨소리다.
70년대 새마을 운동할 때 마을 마을마다 울려 퍼지던 바로 그 멜로디이다.
그때 그는 그 전화를 받고 얼굴이 사색이 되었었다.
그러더니 그는 아무 말 없이 퍼터를 들고 싱글 퍼팅을 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그는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다.
"오사장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얼른 퍼팅 하라고."
우린 모두 그의 칠십대 싱글 진입을 축하하기 위해 박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동상처럼 서서 꼼짝을 안 하고 있었다.
"아니 오사장, 칠십대 싱글 되는 게 그렇게 감격스러운가! 얼른 치게나, 박수 칠 사람들 팔 아파."
그는 잠시 後 추운 겨울 남자들이 소변 보고 나서 온몸 떨 듯 경련하더니 이내 퍼터를 움직였다.
공은 홀로 빨려 들어갔고, 그의 두 눈엔 눈물이 글썽였다.
"아니 장군핸디 달더니 그렇게 감격스러운가, 눈물까지 보이다니. 오래 살고 볼일이야.."
"무싸 정말 미안하네.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집에 들어가야 하니, 내 짐 좀 부탁하네. 미안하네."
"여보게 오사장, 무슨 일이야..."
그는 바로 자신의 車로 뛰어가 버리고 말았다.
남겨진 우리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어이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우린 오케이 社長 부인의 부음 소식을 듣고서야, 그때의 일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사장 부인은 아침에 꼭 칠자 싱글을 하고 돌아오겠노라고 나간 남편의 푸짐한 저녁상을 준비하기 위해, 시장에 장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오는 화물차에 치어 병원으로 실려갔다고 한다.
오케이 社長이 병원에 도착하였을 때 담당의사는 고개를 저었는데, 오케이 社長이 부인의 손목을 잡고 "여보 늦어서 미안해" 하자, 마지막 의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부인이 잠시 의식을 되찾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여, 여보 사랑해, 그리고 애들을 부탁해..." 이 한마디 남기고 부인은 눈을 감았다고 한다.
너무나도 남편을 사랑했던 부인의 마지막 모습이 오케이 社長의 망막에 맺혀, 지금도 60센치 퍼팅을 남겨 둘 때면 불현듯 그때의 아내의 모습이 떠올라 퍼팅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도 칠자 싱글이 뭔지 마지막 퍼팅을 하려했던 자신의 이기심이 늘 오사장의 뇌리에 각인되어, 아내에 대한 죄의식으로 숨통을 조여 숏 퍼팅을 할 수가 없노라고 하였다.
[오마대전]에서 분명 마크 사모는 이름 그대로 숏 퍼팅에 모두 마크를 하라고 할 것이 분명하고, 오사장이 이기고 지는 것은 바로 마크 사모의 [마크]라는 청천병력 같은 말이 변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사장의 장자방인 나는 바로 [마크]라는 경계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오사장이 어떻게 [달달이 病] 一名 입스(YIPS) 病을 극복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여보게 무싸, 자넨 문제도 찾아냈으니, 答도 물론 찾아주겠지?"
"제갈공명이 제사를 지내 천지신명의 힘을 빌어 동남풍을 불렀듯이, 자네도 참마음으로 부인에게 祭를 올려 용서를 빌게나. 그럼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그 [달달이 病]이 낳을 수도 있질 않겠는가."
"무싸! 역시 자넨 나의 장자방이야. 그렇게 하겠네. 그럼 내일 저녁 우리집에서 특별제를 올릴 터이니, 제문 좀 지어 오게나."
"알겠네. 우리 부친께서 제사 지낼 때마다 제문 지으셨는데, 어깨너머로 배워둔 게 있으니 걱정 말게나."
오케이 社長이 사준 화이트 데이 선물을 손에 들고 집에 돌아오니, 딸래미가 제일 먼저 나와 반긴다.
"에고 철부지 녀석, 엄마는 어디 가셨니?"
"플룻 불고 있어요."
나와보지도 않는 마누라지만, 저렇게 살아서 플룻이라도 열심히 불고 있으니 난 복 받은 놈이여...
[제6부] 부인이여, 용서하소서!!
난초 香이 은은히 흐르고, 정원에 파란 잔디가 움터 오르는 전원주택 오사장의 집.
깔끔하게 정돈된 듯 하지만, 왠지 모를 싸늘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다른 집처럼 여인의 분내도 없고,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도 메마른 그의 집은 흡사 俗世를 벗어난 절간 같다.
오사장과 두 아들은 모든 제사 준비를 마치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일도 아닌데 무슨 제사냐고 제법 철이 날 나이의 큰 아들녀석이 묻는다.
"그래, 오늘은 너희들 아빠께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지내는 특별한 제삿날 이란다."
젯상은 여느 젯상과 비슷했으나 몇 가지 특별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형형색색의 모듬 사탕과 분홍색 니트 스웨터가 젯상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준비해온 신위와 제문을 꺼냈다.
신위를 향나무 신위 첩에 끼우고, 초와 향에 불을 붙였다.
제주로는 오사장의 부인이 평소 좋아하던 매취순이 준비되어 있었다.
큰 아들이 따르는 술잔을 오사장이 받아서 향불 위에 세 번 돌리고 젯상에 올렸다.
오사장과 두 아들은 절을 두 번하며 故人의 신위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준비된 제문을 서서히 낭독하기 시작했다.
"유세차 임오년 삼월 십오일 저녁, 애부 오케이는 정부인 이씨 신위 앞에 엎드려 조아리니 부인께서는 차려 놓은 음식을 흠향하시옵고, 부디 애부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상 향."
나는 제문 낭독을 끝내고 나서 절을 두 번 올렸다.
그리고 오사장과 두 아들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사장은 안 주머니에서 지난 밤 동안 준비한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를 읽어 내려간다.
사랑하는 여보!
당신만을 홀로 저 차가운 땅속으로 보낸지도 어언 삼년이란 세월이 흘렀소.
당신을 보내고 나서야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따스했는지 깨달은 이 못난 남편을 용서해 주오.
결혼 십년 동안 회사 일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결혼 기념일 뿐 아니라, 사랑하는 당신의 생일조차도 잊어버리고 무심히 넘어간 해가 몇 번인가 헤아리기 어렵소.
남들처럼 화이트 데이에 사탕 한 봉지 사주며 사랑한다는 말해주기는 커녕, 반찬투정만 했던 이 남편을 꾸짖어 주오.
오늘 뒤 늦게서야 철이든 못난 남편이 늦은 화이트 데이 선물을 올리오니 부디 받아 주시오.
그리고 당신이 백화점 쇼윈도우를 지날 때마다 입고 싶다던 그 꽃분홍 니트 스웨터도 올리오니, 이 어리석은 남편을 어여삐 보아 받아주시오.
당신이 교통사고 나던 날 나는 그 전화를 받고도 그 알량한 칠자 싱글 패에 욕심이 나서 바로 달려오지 못했소.
당신이 나를 생각하는 그 마음에 比하면, 땅속으로 먼저 가야 할 사람은 바로 나요. 흐흐 흑…
나는 목이 메어 편지를 마저 읽지 못하는 오사장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손수건을 건네 주었다.
졸지에 어미를 잃은 뒤 웃음마저 잃어버린 저 불쌍한 자식들을 볼 때면, 못난 남편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오.
당신과의 이승에서의 인연은 이렇게 한스럽게 끝났지만, 당신은 나와 자식들의 마음속에서 현모양처로 남으리니…
부디 편안한 저승길 되시오.
그리고 하늘의 뜻에 따라 당신의 뒤를 이어 저 불쌍한 두 아들을 사랑으로 보살펴 줄 새 어미를 맞이할 기회를 얻게 되었소.
이는 이 한 몸의 욕심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오니, 당신의 하해와 같은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길 바라오.
그럼 저승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편안하시오…
구구절절 오사장의 속내를 진심으로 표현하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그의 편지가 끝나 갈 무렵, 나의 눈시울에도 이슬이 맺힌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오사장은 바닥에 엎드려 오열을 토한다.
지난 삼년 그를 옥죄어 왔던 양심의 가책이 이제 그의 뜨거운 눈물이 되어 편지지에 한 방울 한 방울 [참회의 꽃]으로 피어난다.
제사가 끝난 뒤 오사장과 나는 뒷마당으로 가서 꽃분홍 스웨터를 불에 태워 하늘로 보내주며 마음 속으로 다시 소원을 빈다.
[부인이시여, 부디 오사장을 용서하시고 우리가 '오마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제7부] 제1차 오마대전, 미인계 (上편)
오사장은 아침 일찍 나를 픽업하기 위해 우리집 앞에 車를 대고 어서 나오라고 핸드폰을 때린다.
영호남의 균형발전을 위한 서해고속도로는 언제 달려봐도 시원하다.
야트막한 야산들이 이어지는 이 길을 달리고 있노라면, 옛 백제인들의 심미안이 바로 이 산야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사장 달달이 병(病)은 좀 낳은 것 같나?"
"글쎄. 토요일 날 혼자서 코리아 퍼블릭 파3코스에 다녀왔는데, 잘 들어가긴 가는데 말야. 그거야 혼자서 치는 것이니까, 病이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는 오늘 겪어봐야 알 것 같지만, 그저께 특별 기제사 덕분인지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 건 사실이네."
내가 보기에도 오사장의 얼굴 빛은 밝아졌고, 오히려 불타 오르는 戰意가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뭔지 모를 두려움 같은 게 남아있는 듯했다.
한국의 봄은 황사타고 온다고 하더니, 하늘은 아침부터 중국으로부터 날아온 흙 먼지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제1차 오마대전]의 회오리를 시사하는 듯 일진광풍이 발안CC를 휘젓는 가운데, 오늘의 운명을 건 두 사람의 모습이 1번 홀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패션웨어로 한껏 멋을 낸, 마크와 꽃사슴은 벌써 1번홀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고 골프사상 최초의 운명을 건 대결투를 시작했다.
"오사장님, 그리고 무싸님! 긴급제안이 있는 데요."
세련된 니트와 가디건에 밤색 스커트로 한껏 멋을 내고 나온 마크가 말문을 열었다.
"제가 알아 본 바로는 오사장님께서 60센티 숏 퍼팅에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매 홀 마크를 하시라고 하는 것은 이 결투에서 좀 공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오늘만은 버디 퍼팅만 제외하고 60센치 以下는 모두 자동 오케이요, 기브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 아니 저렇게 예쁜 말을 하다니…
우리는 내심 [달달이 病] 걱정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마크의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에 맥이 탁 풀어지는 걸 애써 감추며 답했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좀 유리할 텐데, 마크 사모님께서 굳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일요일이라 팀도 많이 밀리니 그렇게 하기로 하십시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 지시더라도 딴 변명은 하지 마십시오."
어안이 벙벙해서 머리를 한참 굴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던 오케이 社長이 잽싸게 말을 가로채 마무리를 지어버린다.
저렇게 예쁜 모습의 마크가, 그리고 저렇게 사려 깊은 마크가 우리가 상대해야 될 敵이라는 게 믿어지질 않았다.
바로 前까지 적의(敵意)를 갖고 오로지 승리를 위해 마음 다짐을 해온 우리에게 마크의 제안은 [오마대혈투]의 오케이 장자방인 내 머리 속을 하얗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오사장님과 무싸님은 한편이 되어 어떤 종류의 助言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동의하시죠?"
"물론입니다. 그럼 자, 시작해 보실까요."
발안 1번 홀은 대개 오른쪽 슬라이스 홀이다.
몸이 안 풀려 어깨에 힘이 들어간 상태로 티 샷하면, 용서 없이 오비이다.
남자 티에서 먼저 티 샷을 해야 하므로, 우리가 먼저 티 샷하기로 했다.
드라이버의 귀신인 무싸가 먼저 길을 개척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먼저 티 샷을 했다.
나는 매우 느린 백 스윙으로 가볍게 무싸 타법으로 나의 스트라타 볼을 페어웨이 중앙으로 날렸다.
"나이스 샷!"
마크와 꽃사슴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합창을 한다.
다음으로 오케이 社長도 부드럽게 내가 개척해 놓은 루트를 따라 완벽한 티 샷을 한다.
"나이스 샷!"
매일 [굳 샷]이란 딱딱한 동반 남자들의 목소리만 듣다가, 오늘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두 천사의 [나이스 샷]이란 목소리를 들으니 절로 신이 난다.
오케이 社長이나 나 무싸나 누가 띄어주면 그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조폭들이 골목을 활보하듯 페어웨이를 느릿느릿 즈려 밟고 가는 버릇이 있다.
레이디 티를 향해가는 마크와 꽃사슴의 뒤를 따르며, 코끝에 와 닿는 여인의 향기에 매료되어 가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마음을 다잡아 본다.
[이게 아닌데,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음...]
마크와 꽃사슴도 평이한 샷으로 모두 페어웨이에 공을 보낸다.
"굳 샷!"
"스윙이 예술입니다."
이 말은 내가 초절정 고수와 대결할 때 상대를 방심하게 해서 무너뜨릴 요량으로 추켜세울 때 쓰는 작전 용어인데, 오케이 社長은 지금 진심으로 그녀들의 스윙에 반해 감탄사로 나오는 말이었다.
오늘은 오른쪽 그린의 뒷쪽 구중심처에 핀이 위치해 있다.
중앙에는 마운드가 있고, 그 너머 작은 계곡에 핀이 있기 때문에 세컨 샷이 짧으면 파 세이브가 어렵다.
숏 아이언으로 높게 띄어 그린 중앙 마운드 팔부 능선 정도에 공을 떨어뜨리고, 백스핀으로 속도를 줄여 능선을 넘어 천천히 계곡으로 흘러 내려가게 해야 한다.
또 다른 공략방법은 아예 길게 쳐서 오른쪽 뒤쪽 러프에서 어프로치로 공략하는 방법도 있다.
마크와 꽃사슴의 드라이브거리도 만만찮게 나와 있었다.
우리의 공보다 조금씩 더 나아가 있어, 우리가 먼저 세컨 샷을 했다.
나는 피칭 웻지로 풀 샷을 하여 오차 없이 마운드 팔부 능선에 공을 꽂았다.
오사장도 나의 작전서에 의해 가볍게 좋은 지점에 공을 가져다가 놓았다.
마크와 꽃사슴도 그린 중앙을 공략하여 약 5~6미터에 붙인다.
발안의 첫 홀 그린은 아침에 바다안개에 의한 이슬이 있어, 잘 구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세게 치다가는 쓰리 펏 예사다.
60센치에 붙이면 자동 파이니 무리할 것 없었다.
오사장과 나는 가볍게 밀어 모두 30센티에 붙여 도우미 아가씨가 오케이 파로 공을 집는다.
마크와 꽃사슴은 어떤 작전으로 나올 것인가.
마크는 승부사 답게 버디를 노리는지 강력한 스트록을 했다.
공은 홀을 그대로 밟고 지나가 1미터에 멈춘다.
"버디 아깝습니다."
자동 오케이 거리가 아니니, 다시 한번 스트록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마크는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홀 인하여 파 세이브를 하였고, 꽃사슴 또한 오케이 거리에 붙여 파를 잡아냈다.
발안 2번 홀은 파3로 내가 매일 보기하는 홀이다.
티 박스가 언덕 위에 있어서 아래로 내려치는 홀인데, 페어웨이 중간쯤 하늘에 돌개바람이 있어서 세게 치면 왼쪽 그린으로 밀리고, 약하게 치면 오른쪽 그린에 못 미치곤 하였다.
이런 현상은 티 박스의 앞쪽으로 올수록 심해서, 나는 티 마크에서 한걸음 반을 물러나서 티를 꽂았다.
그리고 7번 아이언으로 펀치 샷을 구사해 고래등 샷으로 오른쪽 그린을 공략했다.
공은 여지없이 그린을 향해 날았다.
그린을 오바할 것 같던 공은 역시 돌개바람에 밀리더니, 그대로 떨어져 그린에 못 미쳤다.
이를 본 오사장은 6번 아이언을 잡고 강하게 휘둘렀다.
오사장의 공은 좌측그린에 들어가고 만다.
"남의 집 잘 넘보시는 분들이 옆 그린에 많이 간대요."
꽃사슴이 까르르 웃으며 한마디 한다.
"험! 그런가요?"
오사장은 계면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는다.
다음은 마크의 차례.
마크가 마운드에 올랐다.
봄바람이 살랑이니 마크의 밤색 큐롯 사이로 흰 살결이 보일 듯이 말 듯이 눈을 어지럽힌다.
발안CC는 다른 골프장과 달리 골퍼가 티 박스에 올랐을 때 동반 골퍼에게 뒷 모습을 보여주는 홀들이 많다.
60센티 자동 오케이로 긴장감이 풀릴 대로 풀린 오사장이 뒤에서 이 모습을 보며 군침을 꿀꺽 삼키는 것을 본 건 나 뿐이었다.
{아뿔사!! 이 생각을 못했구나. 오사장의 독수궁방이 벌써 삼년째인데, 저런 마음 착하고 어여쁜 마크를 보고 대결투니 혈전이니 하는 거친 용어로만 전략을 준비했으니 큰일이다.}
요즘엔 데모진압 선봉에 예전처럼 중무장한 백골단이 아닌 야리야리하고 미모가 뛰어난 여경(女警)들을 선발하여, 아무런 무장도 없이 세운다고 한다.
백골단에 흥분했던 데모대들이 이런 女警한데 돌맹이를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발길로 얼굴을 찰 수 있을 것인가.
집에 가면 자신의 여동생 같고, 저녁이면 만나는 애인 같은 아리따운 女警들을 어찌 공격할 것인가.
그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데모대는 우왕좌왕 하게 된다고 한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애간장 타는 내 가슴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사장은 마크와 꽃사슴의 스윙에 침까지 흘릴 기미다.
두 美女의 공은 그린 턱을 맞더니 이내 런닝을 하여 핀 앞 4~5미터에 예쁘게 가서 붙어버린다.
역시 마크는 강호를 주름잡는 최고의 女고수였다.
별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하게 홀을 요리하면서도, 어쩜 그렇게 정확한 위치에 공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여보게 오사장. 이건 미인계네! 다음 홀부터 자네는 마크나 꽃사슴이 티샷할 때 뒤 돌아서서 쳐다보지 말게나. 자넨 이미 투사로서 戰意를 잃어가고 있네."
"허걱! 그렇군. 내가 잠시 마크의 미모에 미혹되어 현실을 잊었었네. 고맙네 무싸. 자네 말대로 하겠네..."
[제8부] 제1차 오마대전, 미인계 (下편)
왼쪽 그린에 가서 공을 주운 오케이 社長은 왼쪽 그린의 뒤쪽 러프에 공을 드롭하고 8번으로 어프로치를 했다.
그의 어프로치는 퍼터보다도 정확하다고 정평이 나있었기에 그가 핀 옆에 붙인다는 것은 전혀 의심치 않고, 나는 내 공의 위치로 와서 텍사스 웻지 (퍼터로 하는 어프로치) 샷으로 핀 옆 1미터에 붙였다.
"앗!"
저쪽 오사장쪽에서 들리는 단말마.
그의 공은 그린에 미치지도 못하고 러프에 쳐 박혔다.
뒷땅이다.
나는 얼른 오사장에게 달려갔다.
"오사장, 어찌 된 일인가? 정신차리게."
"나도 모르겠네. 내가 불리한 상황이어서 홀에 한번에 넣어 보려다가 그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 실수를 했네 그려."
예전의 오사장이 아니었다.
前 같으면 그는 일단 온 그린 한다는 자세로 부드럽게 어프로치를 하였는데, 그런 공들이 오히려 핀에 잘 붙어 파 세이브를 했었다.
"오사장, 이번 홀에서는 자네가 한 타 또는 두 타 졌다고 생각하게. 골프가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오사장은 다시 8번을 가지고 가볍게 그의 어프로치 샷을 했다.
공은 경사를 타고 흐르더니 이내 핀 앞까지 굴러와 멈춘다.
자동 오케이로 보기를 한 오사장, 한숨을 [휴~우] 하고 내쉰다.
마크는 4미터에서 쉬운 버디 퍼팅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홀을 한바퀴 돌면서 전체의 경사를 살핀 뒤, 공과 홀의 중간 지점에 서서 퍼터로 방향과 거리를 계산해 본다.
그리고 공을 놓고 마커를 집은 뒤에, 뒤로 가서, 웅크리고 앉아 몸을 최대한 낮게 구부려 퍼팅 라인을 살핀다.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엄청난 살기를 느꼈다. 썬 캡 사이로 섬광처럼 빛나는 눈동자.
그건 숲속에서 먹이를 노리고 있는 호랑이의 자세 [맹호은림] 그것이었다.
마크는 박세리가 쓰는 逆 그립 퍼팅을 사용한다.
逆 그립 퍼팅은 왼 손목이 꺽이지 않아 이런 거리의 버디 퍼팅에 유리하다.
공에 내리꽂은 그녀의 눈, 그리고 시계추처럼 움직이는 어깨.
그녀의 애마인 듯한 캘러웨이 레드볼은 거침 없이 잔디를 밟고 홀 속에 파고든다.
이 볼은 커버가 부드러운 우레탄으로 되어 있는 쓰리피스 공으로, 소렌스탐이 59타를 기록한 유명한 볼이기도 하다.
"나이스 버디!"
도우미 아가씨는 이미 숙녀들의 편에 붙어버렸나 보다.
男女性 대결임을 눈치 챘는지, 그녀는 귀청이 떨어지게 외친다.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두 홀에 벌써 두 타 差라!]
오사장이 사력을 다해 보기로 막았지만, 전차처럼 밀고 들어오는 마크의 내공에는 역부족인 듯 싶었다.
발안 3번홀.
여기처럼 티 샷이 까다로운 홀은 없다.
많은 칠자 싱글 고수들이 이 3번 홀에서 눈물을 흘리고 통탄하였었다.
여기서는 페어웨이를 보고 티 샷하면, 죽음이다.
좌우 모두 오비인 지역이다.
이 홀에서 살아 남는 방법은 오직 하나!
공을 왼쪽 경사면과 페어웨이가 만나는 곳에 IP를 정하고, 오로지 헤드 업 하지않고 연습장처럼 공만 보고 쳐야 한다.
나는 오사장에게 이미 이런 사실을 일러주며, 前 홀까지의 모든 스코어는 잊으라고 했다.
내가 먼저 티 샷하고, 오사장도 나를 따라 티 샷했다.
우린 모두 우리가 원하는 IP지점으로 정확이 공을 날렸다.
다음은 마크의 차례.
나는 오사장이 미인계에 다시 걸려들지 않도록 뒤 돌아서도록 했다.
마크는 크리크를 빼 들었다.
그리고 오른쪽 벙커쪽을 향해 힘차게 티 샷.
공은 벙커 앞까지 날아가 그대로 멎는다.
이를 본 꽃사슴도 스푼을 뽑아 비슷한 자리에 보낸다.
{아니 저럴 수가!! 여기서 크리크를 치면 남는 거리가 170미터는 되는데, 3학년 1반 작전인가! 오사장과 나는 110미터를 남겼다. 오르막에 뒷바람 살살 부니 피칭 웻지로 천천히 치면 바람타고 그린에 안착할 테지만, 마크는 투 온이 불가능한 상황 아닌가!}
두 타의 여유가 있어서 안전위주로 가려는 것일까.
마크가 제일 먼저 세컨 샷을 할 차례이다.
남은 거리는 170미터.
보통 이 거리이면 스푼치고 어푸로치를 해야 되는데, 스푼 치기에는 그녀의 공 위치가 세미 러프로 안 좋았고 그린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크리크를 빼어 들 때부터 궁금했었다. 그 다음 수가...
그런데 그녀는 이미 티 박스부터 피칭을 손에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가볍게 피칭 샷으로 90미터를 전진한다.
꽃사슴도 따라서 피칭 샷으로 비슷한 거리에 공을 가져다 놓는다.
"옳다구나. 기회일세. 우리 욕심내지 말고, 이번 홀에서는 파 세이브 하세나."
우리는 피칭 샷으로 가볍게 온 그린에 성공하고, 각각 3~4미터 버디 퍼팅을 남겼다.
마크는 80미터 남은 거리에서 다시 피칭을 잡고 쓰리쿼터 스윙으로 펀치 샷을 한다.
그녀의 공은 그린 중앙 마운드를 훨씬 넘겨 핀 뒤 50센티에 바운스를 하더니, 백 스핀이 걸려 그대로 뒤로 빨려와 다시 50센치 거리에 서버린다.
"굳 샷, 자동 오케이!"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그녀의 컨트롤 샷은 정말 우아하고도 정확했다.
꽃사슴의 공도 온 그린 했으나, 백 스핀이 약해 그린 엣지까지 굴러가 버렸다.
그러나 마크는 언니에게 자기 공을 그냥 두라고 한다.
그리고 그대로 가서 홀인 시킨다.
"죄송합니다. 저는 늘 숏퍼팅도 꼭 넣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마무리 퍼팅을 안 하면 화장실 갔다가 뒷처리 안하고 나온 것 같아서요. 저는 다 넣겠습니다."
"설사 못 넣더라도 자동 오케이니, 점수에 가산하지는 않겠습니다."
오케이 社長이 무슨 면죄부라도 주듯이 선뜻 이야기 한다.
나는 마크의 그 말에 등골이 오싹해오는 것을 느꼈다.
아마 초고수의 이름이 거저 얻어진 게 아니구나.....
3홀에서 꽃사슴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파를 기록했다.
그러나 여전히 2타차는 벌어져 있는 상태.
오사장은 내게 물었다.
"무싸. 우리의 승부 홀이 여기 4번홀 아닌가?"
"그렇지. 여기서 우리는 쉽게 투 온 할 수 있지만, 마크의 거리로는 도저히 투 온 할 수 없다네. 그렇지만 3홀에서 보여주었던 마크의 작전대로 3온 1퍼팅으로 나온다면, 우리에겐 별 得이 없긴 하지! 하여튼 우린 이 홀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파 세이브 하고, 마크가 보기하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질 않겠는감."
4번홀은 매우 긴 파4 홀이다.
드라이버로 오른쪽 벙커 좌측 끝으로 공략하여야만 파가 보장된다.
그 폭은 거의 5미터 밖에 안 되는 매우 어려운 핸디캡 1번 홀이다.
공이 왼쪽 언덕으로 가면 도저히 투 온이 불가능하고, 조금이라고 슬라이스가 나면 오비이다. \
나와 오사장은 부드러운 무사타법으로 150미터 지점에 정확히 공을 보냈다.
마크와 꽃사슴은 드라이버 샷으로 그린에서 180미터 남은 지점으로 공을 보냈다.
오른쪽 그린은 바닷바람에 건조되어 매우 딱딱하여서, 미들 아이언으로는 세우기가 매우 어렵다.
조금이라도 오른쪽으로 밀리면 그린 앞 항아리 벙커 行이다.
오른쪽 그린의 맨 왼쪽 끝을 겨냥하고 페이드 샷으로 런을 최소화하는 샷 말고는, 그린에 오를 수 없는 홀이다.
마크는 8번 아이언을 잡았다.
또 3학년 1반 작전인가보다.
그녀의 공은 페어웨이 한 가운데, 그린을 공략하기 가장 좋은 지점으로 갔다.
남은 거리는 70미터.
그녀의 실력이라면 52도 어텍 웻지로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오사장은 6번 아이언으로 부드럽게 점진 가속 직선 임팩 샷으로 그린의 왼쪽 입구를 공략했다.
공은 한 번 바운스한 後 그린의 뒤쪽 핀까지 굴러가, 내리막 2미터 버디 퍼팅를 남겨두었다.
"나이스 온!"
도우미 아가씨가 오랜만에 보는 멋진 샷이라고 칭찬한다.
마크의 세 번째 샷이 남았다.
마크는 역시 어텍 웻지를 잡고 강력한 펀치 샷을 구사한다.
공은 핀 앞 3미터에 떨어지더니 딱딱한 그린이어서 원 바운드로 4미터를 튄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녀의 공은 강력한 백 스핀에 힘입어 다시 핀을 향해 빨려 온다.
핀까지는 다시 40센치, 또 자동 오케이 거리이다.
오사장은 승부수를 띄워야 했다.
핸디캡 1의 홀에서 버디 퍼팅의 기회를 잡고서도 못 이기면, 승부는 물 건너 간 것이기 때문이다.
내리막 2미터.
살짝만 건드려도 공은 핀을 1미터는 지나갈 것이다.
마크의 아름다움 같은 건 안중에 없다.
이젠 그가 살아 남아야 한다.
그는 마크가 했던 것처럼 홀 주위를 한바퀴 돈다.
그리고 나한테 묻는다.
"7時지?"
"그런 것 같군."
이건 공이 홀에 들어가는 길을 우리가 암호化 한 것이다.
직선으로 들어가면 6時, 약간 슬라이스로 들어가면 7時, 훅으로 들어가면 5時이다.
오사장은 엉거주춤 잭니클라우스의 퍼팅 자세로 체중을 오른발 한 쪽에 모은다.
그리고 공을 홀과 사각으로 보며 사알짝 민다.
"나이스 버디!"
마크와 꽃사슴이 합창한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만약 그의 공이 홀인 하지 않았다면 공은 홀은 한참 지났을 것이고, 파 퍼팅에도 엄청난 프레스가 가해졌을 것이다.
이제야 오사장의 승부근성이 살아나는 것 같아 천만 다행이었다.
5홀, 6홀, 7홀…
그리고 이제 마지막 18홀이다.
오사장과 마크는 두 번씩 보기를 주고 받으며, 큰 실수 없이 18번홀 까지 온 상황이다.
현재까지 마크는 1오바, 오사장은 2오바, 나는 5오바, 꽃사슴은 7오바.
피를 말리는 접전은 오후 황사가 절정에 다다른 두시 반 경이 되어서야, 마지막 18번 홀에서 오늘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발안의 18번 홀은 左로 굽은 도그렉 파 5홀이다.
여기서 투 온은 매우 어렵다.
써드 샷에 핀에 붙여서 버디를 하는 방법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홀이다.
여기야 말로 오사장에게는 감회가 깊은 홀 아닌가.
이 홀에서 마지막 60센티 퍼팅으로 칠자 싱글이 되는 그 순간에, 아내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인간적 갈등을 했던 바로 그 홀 아닌가.
난 오사장에게 말한다.
"오사장 승부는 냉혹한 것이네. 하지만 자네는 이 홀에서 파 세이브만 하게. 오늘 경기는 이미 진 것일세. 겉으로 볼 때 지금까지 한 타 차이이지만, 마크는 숏 퍼팅을 모두 마무리 지었네. 반면에 자네는 12개 홀에서 숏 퍼팅을 하지 않고 자동 오케이를 받았다네. 만약 다 넣어보라고 하였다면 다 넣었을까? 그러니 오늘 경기는 마크의 완승이네."
"무슨 소리. 룰은 룰이고, 마크가 자청해서 한 규칙이니 승부는 장갑을 벗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번 홀에서 내가 버디를 잡고, 마크가 보기를 한다면 내가 이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욕심을 버리게. 자넨 이미 멘탈에서도 졌다네. 자신이 잘 쳐서 이기려고 해야지, [상대가 실수하길 바래서 이기려는 그 마음]이 이미 자네가 멘탈에서도 졌다는 증거일세."
아니나 다를까.
18번 홀에서 마크는 가볍게 파를 한 반면, 오사장은 무리하게 투 온을 노리다가 공이 그린 앞 항아리 벙커에 빠지는 바람에 어이없는 보기를 하고 말았다.
결국 미인계에 휘말려 생긴, 초반의 두 타差 승부는 18홀까지 이어진 셈이었다.
최종 합계. 마크 73, 오사장 75, 무싸77, 꽃사슴 79로 [제1차 오마대전]은 마크의 완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우리는 발안CC 근처 옛날 보리밥집에서 오리구이와 보리밥으로 저녁요기를 때우고 [제2차]오마대혈투를 약속하며 헤어지게 되었다.
"오사장님, 다음 대결은 매치 플레이니 자동 오케이는 없습니다. 호호호."
"잘 알았습니다.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 마크 사모님. 그럼 다음 대결에서 보십시다."
후회와 탄식에 사로잡혀 18홀을 복기하고 있는 오사장 대신, 내가 인사를 했다.
{보통 상대가 아니다. 아마 최고수의 이름이 아깝지 않구나, 마크여!!}
나는 돌아오는 길에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깊은 고민에 빠지는데...
[제9부] 다조마담
오케이 社長이 [제1차 오마대전]의 충격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일주일 동안 아무 연락도 없었다가, 내게 전화를 한 건 금요일 저녁이었다.
"무싸! 자네 시간 좀 내주게나. 술 한잔 하세."
"으응! 그러지. 그럼 이따가 [다조마담]이 하는 [알바트로스]에서 보세나."
요즈음은 이리도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임오년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月末이 다 되어간다.
월요일 아침부터 시작되는 첨단 고분자연구는 온 머리를 다 동원해도 쉽게 풀리지 않는 퍼즐 같다.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해답은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 나간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치의 오차도 없어야만 비로소 비밀의 옷을 벗는 고분자는 흡사 성격 까다로운 요조숙녀라고나 할까.
퍼즐의 실마리를 잡을 즈음, 다시 핸드폰이 운다.
오케이 社長의 독촉 전화다.
"아, 어서 안 오고 뭐해, 퇴근시간 인데..."
"자네는 社長이니까 아무 때나 시간 낼 수 있지만, 난 회사의 녹을 받는 머슴이니 업무시간 끝나야 나갈 수 있는 것도 모르나? 그리고 연구하던 게 좀 남았거든. 마저 마무리하고 30分內로 가겠네."
[다조마담]의 미소는 언제 봐도 싱그럽다.
그녀가 단골손님들은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되바라지지도 않으면서도 知性美 배어나오는 그윽한 미소 때문이란 것을 나는 잘 안다.
中年의 사내들이 자신의 아내들에게 얻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조마담은 잘 알고 있다.
직업마다 자신의 전공이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게다.
마누라는 조금만 심사가 뒤틀려도 바가지라는 무공으로 남편을 들볶지만, [다조마담]은 단골손님이 오랫동안 발을 끊어도 절대로 재촉 전화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와도, 왜 그 동안 소식 끊었냐고 묻지도 않는다.
다만 나그네가 잠시라도 俗世에 지친 마음 의지하고자 할 때 말없이 그늘을 제공해주는 마을입구의 느티나무 같은 존재가 되려 하는 게, [다조마담]의 경영 철학인 [다조정신: 말 그대로 다 준다는 뜻]이다.
오케이 社長이 부인과 死別하고 이 집에 단골이 된 것도, 다 [다조마담]의 경영철학이 맘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 오케이 社長의 말벗이 되어 외로운 시간들을 채워 주었었다.
[오마대전]에서 一敗를 한 오사장의 발길이 이곳으로 오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조마담]의 선술집은 술을 팔지 않는다.
술은 단골 손님들이 올 때 한 두병씩 들고 오고, [다조마담]은 그 술병에 이름표만 달 뿐이다.
[다조마담]은 안주를 준비하고, 손님의 말벗이 되어준다.
단골손님은 자신의 고민이나 외로움이 해결된 만큼, 자신의 성의를 표시하는 것으로 술값을 대신한다.
이 집에서 바가지란 말은 애당초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장사하는데도 [다조마담]의 수입은 다른 술집에 比해 다섯 倍는 더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다조마담]의 경영방식을 배우려고 많은 애기마담들이 줄을 서 있다고 한다.
애기마담을 채용할 때는 면접고사가 웬만한 대기업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한다.
게다가 애기마담은 월급 받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상당한 수업료를 내고 일 한다니, 과연 [다조마담]의 경영방식은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다조마담]의 명성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장안에 암암리에 퍼져 나가는데, 단골손님들은 자기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절대로 이 사실을 아무한테나 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더욱 희한한 일은 술값은 술을 사 가지고 들어가니 낼 턱이 없고, [다조마담]이 내 놓는 안주래야 고작 5만원을 안 넘을 텐데도, 단골손님들은 나갈 때 수십 만원을 내고 나가면서도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든다는 것이었다.
빨간 장미와 형형색색 촛불로 치장된 창가 자리로 우리를 안내한 [다조마담]은 예의 미소로 우리의 주문을 기다리며 말문을 연다.
"오사장님! 지난번에 골프 대결 하신다더니 결과가 궁금하네요."
"그렇지 않아도 그일 때문에 무싸하고 궁리하려고 왔지."
"그럼 전 안주 준비할테니, 말씀 나누세요."
[다조마담]은 단골손님의 지난 모든 이야기 내용을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다.
손님이 오신 순간부터 이야기는 다시 부드럽게 이어지기 때문에,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어서 손님의 心的 부담을 덜어주는가 보다.
오늘 오케이 社長이 가져온 술은 지난번 유럽출장 때 특별히 구해온 발렌타인 30年이었다.
나는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발렌타인 만큼은 한잔하고 싶은 술이다.
그런 연고로 오사장은 나하고 술 한잔 하고플 때면, 어떻게 해서든지 발렌타인을 구해오곤 하였다.
"여보게 무싸! 자네는 나의 장자방이니 그 동안 좋은 방도를 좀 생각해 봤겠지?"
"자네도 일주일간 생각해 봤겠지만, 마크는 보통의 아마추어 고수하고는 다르네. 그녀는 골프 기술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프로를 대적할 만한 배짱을 가지고 있네. 그래서 좀…"
말끝을 흐리는 내게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그 점은 나도 다 인정하네. 이제 다음 결투에서 이기지 못하면, 나는 바로 마크의 머슴이 되네. 天運으로 다음 결투에서 이기더라도 결승에서 이기지 못하면 결과는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어렵겠지만 내게는 두 번을 연속으로 이길 수 있는 비책이 필요하다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무싸! 방법 좀 일러주게. 그러면 내가 자네에게도 크게 보답하겠네."
"자네는 마크를 이길 수 없네. 그러하니 비겁하지만 도망가게나. 미국이나 호주로!! 아이들 다 데리고..."
"뭐라고? 자네 지금 농담하나? 대한민국의 남아로서 신사도를 걸고 한 약속일세, 도망자로서 비겁하게 사느니, 차라리 마크의 머슴이 되겠네."
"마크의 머슴이 되시겠다? 말 잘했네. 그럼 뭐 게임 끝난 거 아니겠나. 오늘 당장 보따리 싸들고, 마크 집으로 머슴 살러 가시게나!!"
"여보게 무싸! 사람 애간장 좀 그만 태우게. 사나이 한번 뜻을 세웠으니, 지던 이기던 끝을 봐야 하지 않겠나. 나의 남은 餘生과 全 재산을 걸고 하는 대결투일세. 내가 이제 와서 뭘 숨기고, 뭘 아끼겠나? 어떤 방법이라도 괜찮으니 이야기 해 보게나."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다조마담]이 한상 단단히 차려 내어왔다.
어느샌가 도화빛 한복으로 갈아 입고 온 [다조마담]은 우리의 이야기를 언뜻 듣고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는지, 앉으려다 말고 다시 일어나 턴테이블의 레코드 판을 갈고 있었다.
씨디 플레이어가 유행하는 지금도 [다조마담]은 검은 빛 레코드 판을 잘 간직하고 있다.
낮게 흐르는 음악은 [들길 따라서] 였다.
이 곡은 양희은이 젊었을 때 가녀린 목소리로 부르던 노래로,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는 마력이 있다.
"알았네. 내가 모시는 골프 사부님이 한분 계신데, 나에게 골도를 가르쳐 준 분이라네."
"골도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골프치는 기술을 [골술(術)]이라고 한다면, 골프치는 이론은 [골법(法)]이고, 이 골술과 골법을 갖추고 정신수양을 하는 것이 [골도(道)]라고 하셨네."
"골도라, 그래서..."
"사부님은 현재 KPGA 프로이신데, 골프에 대한 독특한 철학을 가지고 계시며, 지금도 불철주야 [골도연마] 中 이시라네."
"어디에 가면 그 분을 만나 뵐 수 있겠나?"
"요즘 통 연락이 안 되는 걸 보면, 북설악 황토마을에 있는 [무림산방]에 가 계신 것 같지만, 워낙 바람 같은 분이시라 정확히 알 수는 없네."
"그럼, 내일 당장 그리로 가세나."
"그게 걱정이네, 사부님은 아무나 제자로 안 받으신다네. 하지만 내가 간곡히 부탁을 올려 보겠네, 자네도 [삼고초려]할 자세로 마음 비우고 단단히 준비하게나."
[다조마담]이 따라주는 발렌타인은 더욱 흥취가 난다.
코를 간지르는 그녀의 [빈폴] 향수와 눈을 어지럽히는 도화빛 치마, 그리고 미소 지을 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백옥 같은 이와 금방 눈물이라도 떨어질 듯한 젖은 눈동자.
[다조마담]은 술좌석이 파할 무렵이면 영수증 대신 흰 봉투 하나를 테이블에 놓고 간다.
그러면 오사장은 지갑을 열어 자신의 성의를 봉투에 넣는다.
[오마대전]보다도 저 [다조마담]에 대해 호기심이 발동하는 건 왜 일까?????
[제10부] 무림산방의 화두(話頭)
三月의 미시령은 아직 겨울이다.
아침 저녁으로 살얼음이 어는 무림산방에 오케이 社長과 무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황토마을 주인장에게 무림산방 사부님의 소재를 물으니, 무림산방 옆 개울을 막아서 만든 작은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고 계신다고 한다.
저수지에 가서 사부님께 인사를 고한다.
"사부님, 무싸이옵니다. 무림산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사부님은 낚시 삼매경에 드셨는지 묵묵부답 대답이 없으시다.
아마도 무슨 수련에 들어가신 모양이다.
사부님은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이곳 무림산방에 오셔서 수련을 하시는데, 사부님께서 모시는 [현각대사]께서 근처 백담사에 머무르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무림산방에 오셔서 면벽 수련을 하시게 되면, [현각대사]께서는 사부님께서 오신 걸 어떻게 아셨는지 바람처럼 나타나셔서 [話頭]를 던지고 가신다고 한다.
깊은 사색에 들어가신걸 보면 [話頭]에 골몰하고 계신가 보다.
오케이 社長과 나는 무림산방의 방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돌과 흙으로 벽을 쌓고 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에는 라디오도 TV도 없다.
벽쪽에 쌓여 있는 자부동을 꺼내어 앉았다.
약간 으시시한 한기가 느껴지는 방안은 그저 적막간산 그 자체였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보니, 시간은 흘러 오후 다섯시가 다 되었다.
사부님은 아직도 오시질 않는다.
이번 [話頭]는 무척이나 어려운가 보다.
우리는 다시 저수지에 가 봤다.
사부님께서는 미동도 하시질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저수지에는 고기가 꽤 많았다.
낚시줄이 계속 흔들리는 걸 보면 입질을 계속 하는 것 같은데, 고기 담는 그릇에는 한 마리도 보이질 않는다.
"사부님 물고기가 입질만 하고, 덥석 물지는 않는가 봅니다."
"오늘도 틀린 거 같군. 벌써 일주일을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군."
사부님은 혼자 말씀으로 되뇌인다.
"그런데요, 사부님 저 물고기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를 잡으러 온 사람을 하루종일 이 자리에 묶어 두고 있으니, 이건 사람이 물고기를 잡는 게 아니라, 물고기가 사람을 잡고 있는 것 아닙니까요?"
"물고기가 사람을 잡는다? 옳거니! 바로 그것일세. 손님도 같이 온 듯 하니, 무림산방으로 가서 저녁이나 함께 하세나."
나는 사부님의 낚시도구를 챙기기 위해 낚시줄을 감다가 깜짝 놀랐다.
낚시줄 끝에 있어야 할 미끼 달린 낚시 바늘은 온데 간데 없고, 달랑 콩알만한 염주알만 달려있었다.
{허참 사부님도 이러니 물고기가 입질만 하고 잡히질 않지, 이걸 가지고 어떻게 물고기를 잡으신다고, 기가 막혀서...}
저녁을 간단히 먹고 난 後, 우리는 우리의 용무보다 사부님의 이상한 낚시에 더 궁금증이 나서 그것부터 여쭈어 보았다.
"저어 사부님! 그 낚시줄에 염주알…"
"그래 말해주지. 내가 올해부터는 KPGA 시니어 대회에 나가게 되었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마음을 다잡고 우승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방법을 찾으려고 무림산방에 왔다네. 내가 온 뒤 삼일째 되는 날 현각대사께서 다녀 가셨는데, 이 염주알 하나를 던져 주시면서 이 염주알로 물고기가 고통스럽지 않게 물고기를 잡으라고 하시더군."
"네에 그것이 [話頭]였군요. 그런데 어떻게 염주알로 물고기를 잡습니까? 물고기를 잡으려면 바늘을 미끼에 감추어서 물고기가 미끼에 속아 덥석 물었을 때 바늘에 걸려 잡히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물고기를 속이게 되는 것이고, 또 물고기에게 고통을 주게 되지 않겠나.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게 염주알을 낚시줄에 매단 것이지. 물고기가 물어서 삼키면, 그때 끌어 올릴려고..."
"사부님 물고기가 아무리 머리가 나쁘기로서니 염주알을 삼켜서 날 잡아가라고 하겠습니까요..."
"그렇다네. 난 그걸 알면서도 염주알 낚시로 며칠을 보내고 있으니 답답한 거 아니겠나.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話頭의 뜻을 깨우치지 못하고 있으니... "
나는 오케이 社長이 이곳에 오게 된 사연을 사부님께 말씀을 드리고, 도움을 청했다.
"나 또한 미련한 중생일진대, 누굴 가르칠 수 있겠나. 자네도 자네의 인생이 걸린 문제이니, 나와 함께 이곳에서 함께 수행하시게나. 현각대사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答은 내 안에 있고, 누구든 그 答을 찾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네. 그리고 [話頭]는 어떠한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바라보는 者에 따라서 자신의 문제의 答을 찾는데 응용할 수 있다고 하셨네. 그럼 내일부터 나와 함께 수련에 들어가세나."
나는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돌아왔고, 사부님과 오케이 社長은 무림산방에서 면벽 수련에 들어갔다.
나는 사부님과 오사장이 그 話頭를 풀 수 있을 지 매우 궁금하였다.
그 話頭를 풀면 오케이 社長도 게임에 이겨서 마크 사모님을 아내로 맞을 수 있을텐데...
[제11부] 고개 숙인 남자
일주일 後 나는 다시 무림산방을 찾았다.
지난 週 보다 날씨가 많이 포근해져 있었다.
오케이 社長은 나를 반갑게 맞았다.
그러면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문을 열었다.
"무싸! 우리 사부님께서 어제 새벽까지 면벽수련을 하시더니, 오늘 아침 웃옷을 모두 벗으시고 저수지로 가셨네. 아직 물이 찬데, 저러시다 감기라도 드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걱정 말게나, 오사장. 우리 사부님은 오랫동안 단전호흡으로 연마를 해오셔서, 추운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 수련을 하시기도 하셨네. 함께 가보세나."
저수지에 다다르니 사부님께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긴다.
"어서 오게나 무싸, 드디어 話頭를 푼 것 같네. 여기를 보시게나."
사부님은 물속에서 그 염주알 매달린 낚시줄을 물속에 넣고 살랑살랑 흔들고 계셨고, 물고기들은 사부님을 경계하지 않고 사부님 주위에 모여 들어 있었다.
사부님은 다른 한 손으로 물고기 밥을 주고 계셨다.
사부님은 가끔 두 손으로 손그릇을 만들어 물고기를 떠 올리기도 하셨다.
우리가 어렸을 때 개울가에서 놀던 그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무림산방으로 돌아오신 사부님께서 우리들에게 설명을 해주셨다.
"현각대사께서 내게 주신 話頭의 뜻을 깨달았네. 물고기를 고통없이 염주알로 잡으라고 하신 話頭의 진정한 뜻은 [내가 물고기와 敵이 아닌 친구가 되어라, 그러면 모든 것을 얻게 되리라] 라는 뜻이었네. 내가 물 밖에서 미끼로 물고기를 낚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네.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고통일세. 하지만 내가 물속으로 들어가 물고기 밥을 주니, 물고기들은 나를 경계하지 않고 친구가 되었다네. 나의 가진 것 다 버리고 다 주어야만, 기쁜 마음의 물고기를 내 손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네."
가만히 옆에서 사부님 말씀을 듣고 있던 오케이 社長이 무릎을 쳤다.
"사부님 말씀이 백번 옳으십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이 아니라, 실천으로 제게 가르침을 주시는군요."
"오사장 자네도 뭔가를 깨우친 모양이구먼, 축하하네."
오사장의 얼굴에 장님이 [開眼의 새벽]을 맞는 듯한 신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궁금하네 오사장! 자네가 깨우친 걸 이야기해 보게나."
"그러지 물고기는 마크 사모님일쎄, 그리고 나는 낚시하는 사부님이고. 처음 무림산방에 왔을 때, 낚시하는 사부님 모습이 현재의 내 모습이고, 오늘 아침 물속에서 물고기와 함께 계신 모습이 바로 나의 미래 모습일세. 그 동안 나는 마크를 골프실력으로 꺾어서 오마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그 결과로 그녀를 아내로 맞을 생각이었네. 물론 그녀가 가지고 있는 3億짜리 아파트도 저절로 내 것이 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네."
오케이 社長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개안(開眼)의 순간을 맞으면 저런 것일까.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던 응큼한 생각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오사장, 그러면 이제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
"나는 마크 집으로 머슴 되러 가겠네. 머슴의 모든 소유는 모두 主人의 소유이니, 내 재산도 내 자식도 모두 마크에게 바치겠네. 만약 내가 속임수를 쓰건, 아니면 신비의 샷을 배워서 오마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그에 대한 代價로 마크가 내 아내가 되도록 한다면, 마크는 낚시바늘에 걸려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와 뭐가 다르겠나. 마크는 평생을 오마대전의 실패를 가슴에 담고 자존심을 꺾으며, 내 아내로 살아가야 될 텐데, 그건 진정 내가 바라는 게 아닐세."
오케이 社長의 말을 찬찬히 듣고 계시던 사부님께서 어리석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시며 말씀 하신다.
"그걸 답(答)이라고 찾았나, 자넨 아직 멀었어. 머슴조차도 아깝네."
"아니 사부님, 그럼 오케이 社長의 생각이 틀렸나요?"
"내 이야기 잘 들어 보게나. 마크가 오케이 社長을 대결투의 상대로 선택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아니겠나. 오케이 社長이 허풍 떠는 [달달이]이지만, 그래도 비굴하지 않고 대결투를 해보겠다는 사나이의 패기와 자존심이 있어서라고 생각되네. 마크는 오케이 社長이 대결투를 통해서 다시 진짜 사나이로 태어나 자신을 이겨주길 바라고 있네. 그녀가 지금까지 홀몸으로 살아온 건 아직 진짜 사나이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네. 좀 前에 자네가 말한 '오마대전의 패배를 가슴에 안고 살아갈 마크가 안스럽다'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네. 그럼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를 인정하며 비굴하게 기어 들어오는 [고개숙인 남자]에 대한 마크의 심정은 생각해 보았는가? 그리고 [고개숙인 남자]에게 무슨 매력을 느끼겠느냐 이 말이오?"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느껴지는 바가 많습니다. 저의 생각이 너무 짧았습니다. 어리석은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요."
"자네가 마음을 비운 건 그나마 다행이네. 자네가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이 대결투에 임할 때 한 가닥 희망은 있네. 자비나 아량 같은 것은 勝者의 몫일세. 비겁한 者나 敗者에겐 오로지 머슴의 길 밖에 없다네. 승부에서는 정정당당히 이기고 마크를 아내로 맞이한 後, 자네가 머슴의 자세로 마크를 떠받들고 살아가게나."
"사부님의 말씀 속에는 아무리 오래 생각하여도 보통 사람들이 깨닫기 어려운 지혜가 담겨 있군요. 사부님 그럼 다음 대결투는 매치 플레이인데, 어떻게 하면 매치 플레이에서 이길 수 있습니까?"
"내가 매치 플레이에 대해 오래 前부터 연구해 둔 戰法이 하나 있다네. 그건 [역지사지] 戰法이라네. 이번 결투에서는 이 戰法이 가장 좋을 것 같네."
사부님과 오케이 社長의 대화는 북설악 황토마을의 별 밝은 밤이 이슥하도록 계속되었다.
[제12부] 홀을 막아라!!
사부님은 손무의 손자병법에 능통하셨다.
별의별 전략이 손자병법의 병법서에 적혀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이 전법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이 정도로는 마크를 이길 수 있는 戰法으로 부족했다.
손자병법의 著者인 손무는 손자병법을 완성하고, 다음과 같은 名言을 남겼다.
"싸우지 않고서 敵을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戰法이다."
요즘의 강대국들이 核무기를 개발하여 다른 나라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이 이 방법에 속한다.
사부님은 손자병법에 관련된 뒷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손무가 어릴 때 어린 손무의 손을 잡고 전장터를 돌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장님이 있었다네. 그의 이름은 [귀곡자].. 손무에게 병법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주었던 귀곡자는 심리전의 大家였다네. 그의 심리전은 너무도 귀신 같아서 그의 말을 세 마디를 채 듣기도 前에 그에게 홀려버리기 때문에, 그는 살아 있는 귀신으로 통했다네. 사실 손자병법의 마지막 심리전 부분은 손무의 작품이 아니지. 마지막 여섯편은 귀곡자가 제자와의 숙명의 대결에서 패배하여 감옥에 갇혀 처형되기 전날 하룻밤 새에 완성시켜준 것이라네."
오케이 社長은 사부님의 말씀을 하나도 빼지 않고 듣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제2차 오마대전]을 앞두고 비장의 각오로 임하는 그의 눈빛은 별빛보다도 더 영롱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사부님 그럼 이번엔 아무도 모르는 귀곡자의 심리전을 쓰실 예정이신가요?"
"그렇다네. 이 방법 아니고는 자네가 마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네."
"그럼 어떤 심리전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자네의 말을 종합해 볼 때, 마크는 완벽한 골퍼일세. 자네 같은 아마추어하고는 틀리다네. 자네는 마크의 弱点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남자의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려 그녀는 두려운 존재입니다. 사실 제1차 오마대전에서 그녀는 저의 뱃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자세로 18홀을 쉽게 마무리하는 그녀에게서 弱点이나 흔들리는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럴 것이네. 프로들이 아마추어들을 상대로 게임을 할 때 신비하고도 멋진 샷으로 이기지는 않네. 골프는 실수를 줄이는 게임일세. 마크는 그 평범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골퍼라네. 그녀는 숏 퍼팅을 모두 마무리함으로써 자네에게 자신감을 보여주었고, 그녀 스스로 자신감을 쌓아갔다네."
"그럼 이번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귀곡자의 심리전이 마크의 숏 퍼팅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렇지. 자네는 내 말을 명심해서 잘 듣게나. 이번 심리전의 명령어는 [홀을 막아라] 이라네."
"홀을 막으라뇨. 사부님. 어떻게 퍼팅하는 데 홀을 막아버릴 수 있습니까요?"
"하여튼 자네가 홀을 막기만 하면 이번 제2차 오마대전에서의 승리는 자네 것이라네. 그리고 이것을 話頭로 줄 터이니, 남은 며칠동안 잘 생각해 보게나."
"사부님 그럼 18홀 전체를 다 막아야 합니까, 아니면 몇 홀은 열어야 합니까?"
"쯧쯧, 그러니까 자네가 어리석다는 것일세. 막으면 다 막아야지, 몇 홀은 왜 여는가!"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홀을 막을 궁리를 해보겠습니다."
타이거 우즈가 마스터스 2연패를 하며 골프황제의 자리를 다시금 확인시켜준 월요일 오후, 오케이 社長한테서 전화가 왔다.
"무싸 오랜만일세. 회사 일로 바쁜 줄은 알지만, 자네가 나의 장자방이니 자네가 나 좀 도와 주어야겠네. 사부님께서 비법을 일러주셨는데, 많이 생각해 봤지만 사실은 아직 그 話頭를 풀지 못했다네. 이따가 저녁에 다조마담이 하는 [알바트로스]에서 만나세."
"알았네. 오사장."
다조마담은 언제 보아도 그윽한 미소다.
마크한테서도 저런 여유로운 미소가 느껴졌었다.
자신감 있는 高手의 미소가 저런 것일까.
귀곡자의 심리전을 다조마담 또한 알고 있는 듯하다.
오사장의 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산사춘 두병이 들려 있었다.
"무싸 오랜만이네. 내가 산에서 며칠 道를 닦다 보니 입맛도 변해서 양주보다는 이 산사춘이 더 좋아졌다네."
"자네가 설악산의 정기를 조금은 받은 모양이군. 호연지기도 많이 키웠겠지?"
"말도 마시게나. 사부님께서 골프는 안 가르쳐주시고, 지옥훈련만 시키시는데 너무 힘들어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네. 아침 5時에 기상해서 가부좌로 명상 한 시간, 이십 리 구보 後에 개울에 가서 냉수마찰 및 선(禪) 체조, 기마 개운기공에 목검으로 촛불 끄기, 두 발 두 손 다 드는 조각배형 복근단련 등등…"
"그러고 보니, 자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같던 배는 온데 간데 없네 그랴."
"본론으로 들어 가세나. 사부님께서 2차 오마대전은 심리전이라고 하시면서, [홀을 막아라] 라는 話頭를 주셨네."
"그것 참, 기막힌 방법이군. 마크가 퍼팅할 때 홀을 막아버리면, 마크가 홀에 공을 넣을 수 없으니 자네가 이겼군. 그런데 골프 룰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홀을 어떻게 막는다고 그러나?"
"무싸! 사부님께서 허튼 말씀을 하셨겠나. 내 머리가 짧으니 이해를 못해서 그런 것 아닌가. 그러니 자네를 찾아온 것 아니겠나."
"사부님께서 다른 말씀하신 것은 없으셨는가?"
"그렇지. 한 말씀 하셨네. 마크의 자신감의 원천은 숏 퍼팅이라고 하셨네."
"어디 한번 잘 생각해 보세나. 음..."
{사부님은 좀 쉽게 설명해 주시지, 어찌 이토록 어려운 話頭를 주신단 말인가. 이번 게임은 매치 플레이니 기브를 줄 수 있다. [홀을 막으라]는 말씀은 마크의 공이 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라는 말씀이고. 음... 그렇지. 마크가 숏 퍼팅을 위해 동전으로 마크 해놓은 걸 오사장이 집어서 기브를 주어버리면, 마크는 숏 퍼팅을 할 수 없긴 한데. 사부님께서 마크가 숏 퍼팅을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신 뜻은 무엇일까? 다 기브를 주어버리면, 오사장이 불리하지 않은가. 오사장이 기브 주었다고, 마크 또한 기브를 주지는 않을 텐데…}
"아 그리고 무싸! 사부님께서 한 마디 더 하셨는데, 나 보고 숏 퍼팅 연습 많이 하라고 하셨네."
"오사장!! 話頭는 풀었는데 의미는 잘 모르겠구먼, 자네보고 져 주라는 뜻인가 보군."
"사부님께서 설마 지는 방법을 일러 주셨겠는가? 자네가 푼 話頭를 설명해 보시게나."
"홀을 막을 방법은 딱하나 있네. 마크가 숏 퍼팅을 위해 마크하면, 자네가 그 동전을 주워서 마크에게 주면서 오케이 기브를 하면 된다네."
"아니 그럼. 18홀을 모두 기브를 준단 말인가?"
"그렇다네. 일단 사부님께서 깊은 뜻이 있어서 하신 말씀이니, 그대로 해보시게나. 어차피 자네는 짐 싸들고 마크 집으로 갈 생각이었지 않나. 지금 와서 진다고 해도 별 차이는 없지 않은감."
알 수 없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대화를 듣고 있던 다조마담이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으며 따라주는 술잔에 [알바트로스]의 밤은 깊어 가는데...
[제13부] 제2차 오마대전(上편): 必勝卽敗 必敗卽勝
오케이 社長의 愛馬가 우리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친구 참 빨리도 왔네.
꽃 피는 사월의 날씨는 너무도 화사해서 일생일대의 대전을 치르러 가는 우리의 심정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운명의 날 4월21일!!!
오늘 오사장의 운명은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할 것이다.
마크의 머슴이 되느냐, 아니면 승부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고 결승전까지 끌고 가느냐.
서해안 고속도로의 주변에는 벚꽃들로 만개한 야산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사장 오늘의 大戰을 맞는 심정이 어떠하신가?"
"여보게 무싸, 그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네, 인생이란 짧고도 허무한 것이네. 그 동안 내가 왜 이리 아둥 바둥 살아왔는지 후회가 되네. 짧은 인생을 살다간 아내를 위해, 지난 밤 진실된 마음으로 용서를 비는 참회의 기도를 올렸네."
"오사장 자네가 불혹의 나이를 넘고서야 철이 드네 그랴."
"이번 오마대전을 통해 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네. 이루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꼈네. 오늘 내가 마크 사모에게 진다고 해도 한 점의 후회도 없네."
"자네가 정말 뭔가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군. 그럼 여기 사부님께서 가는 길에 펴보라는 편지 한 통이 있으니 읽어 보시게나."
나는 하얀 봉투 겉에 [사랑하는 오사장 보시게] 라는 사부님의 편지를 오사장에게 건넸다.
비장한 표정으로 편지를 받아 든 오사장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개봉했다.
"무싸! 이런 것 까지 준비하시다니, 사부님은 정말 나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셨나 보군."
편지 속에는 일필휘지로 써내려 간 행서체의 한자 여덟 글자가 있었다.
[必勝卽敗 必敗卽勝]
[반드시 이기고자 하면 곧 질 것이요, 반드시 지고자 하면 곧 이길 것이다.]
"오사장 이건 이순신 장군께서 임진왜란 당시 난중일기에 써 놓으신 어귀와 유사하군."
"그렇지. 난중일기에는 [必死卽生 必生卽死]라 했었지. [반드시 죽을 각오로 싸우면 곧 살 것이요, 반드시 살려고 하면 곧 죽을 것이다.] 그 말씀이었지."
"오사장 자네도 그걸 기억하는군, 자네에게 있어 이번 대전은 권율 장군께서 행주대첩 때 쓰셨던 배수진 이라네. 자네는 이번에 지면, 다음 기회는 없다네. 그래서 배수진이지. 권율 장군은 민병 승병 정규군을 합해 고작 2천餘의 군사로 3만의 잘 훈련된 왜적을 맞아 승리를 했다네. 그건 심리전의 결과이지. 뒤로 도망가고자 해도 절벽 낭떠러지이고, 앞에는 총을 든 왜적이니 사는 방법은 왜적을 물리치는 수밖에."
사부님의 사려 깊으심에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오사장 자네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잘 명심하시게나. 1차 대전에서 자네는 마크를 이겨보려고 기를 쓰다가 제 풀에 나가 떨어지지 않았는가 말야. 이번에는 마음을 비우고 접대 골프하는 자세로 치게나. 그리고 결과를 지켜 보세나."
오사장은 발안CC에 회원권을 가지고 있어 골든 타임인 열시에 부킹을 해놓은 터여서, 우리는 여유있게 제 2차 오마대전을 시작하였다.
마크는 여전히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인사를 청했다.
"오사장님, 그 동안 잘 지내셨죠. 제가 듣기로는 설악산에 들어가셔서 道 닦고 나오셨다는데, 오늘은 제가 좀 두려운데요. 지난 번에 약속한 대로 오늘은 매치 플레이 입니다.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오케이 기브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하니 오늘 제가 기브를 주지 않고 마크 하시라고 하여도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정말 대찬 여걸 아닌가.
역시 오사장은 마크의 상대가 되질 않는 걸까.
저런 여유는 어디에서 터득한 것일까.
"오사장, 이리 와보게."
나는 귓속말로 오사장에게 그녀가 숏 퍼팅을 할 수 없도록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의 마크를 집어 줄 것을 당부했다.
"두 분이 서로 사귀시나요. 남자들끼리 뭔 귓속말을 그렇게 다정하게 하십니까요."
마크 사모는 우리들의 모습이 우스운 듯 한마디 잊지 않았다.
"아 네. 오사장이 저한테 꿔 간 돈이 있는데 오사장이 마크 사모님의 머슴 되어버리면 못 받게 될까 봐, 그 前에 빚 청산하라고 했죠."
"호호호. 무싸님도 이 상황에서 그런 농담을, 걱정 마십시요. 오사장님이 저의 머슴 되시면, 제가 대신 갚아 드리리다."
"빚이 얼마인지도 모르시고, 어찌 그런 말씀을?"
"머슴의 主人은 저이니, 머슴이 진 빚도 主人의 빚 아니겠습니까. 그러하니 그 액수가 얼마인들 主人이 갚음이 도리 아닌가요."
참으로 당차고 배포 큰 여걸이다.
저 야리야리한 체구 속에 어쩌면 저리도 큰 배짱이 들어 있을까.
아무래도 이 오마대전은 잘못 시작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뇌리를 스쳤다.
"마크 사모님, 길고 짧은 건 대 봐야지 않겠습니까. 벌써 제가 머슴이고, 사모님이 主人 된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아!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마크 사모는 바로 정색을 하며 다시 결전을 치루는 투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크 사모의 심리전에 자꾸 오사장이 걸려드는 것 같아,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이렇게 하여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제2차 오마대전]의 서막은 올라가는데...
[제14부] 제2차 오마대전(下편): 수적천석
(水滴穿石: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는다)
골프게임에서 매치플레이는 타수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홀에서 이기면 1 UP, 지게 되면 1 DOWN으로 계산한다.
비긴 홀은 테니스 게임처럼 LOVE라 한다.
만약 15홀이 끝난 뒤 3홀을 남기고 내가 4 UP이면 나머지 3홀을 상대가 다 이긴다 해도 내가 1 UP이므로, 나머지 홀의 勝敗와 관계없이 15홀에서 게임이 끝나는 것이다.
만약 18홀까지 승부가 나지 않으면, 써든 데스 게임으로 18홀을 다시 하여야 한다.
오늘의 오마대전에서는 18홀이 끝났을 때 만약 러브상태로 끝나 勝敗를 가리지 못했다면, 18홀부터 백 카운트하여 먼저 UP이 된 사람이 우승하기로 하였다.
마크 사모가 오늘 승리하면 2勝이므로 결승전을 치루지 않고 그대로 게임이 종료되므로, 결승전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크 사모는 오늘로 승부를 가리려는 듯 첫 홀부터 강력한 롱 드라이브 샷을 구사하였다.
그녀의 세컨 샷은 70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오사장도 이에 질세라 가공할 만한 파워로 드라이버를 날려 동반자인 나와 꽃사슴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마크 사모의 샌드웻지 세컨 샷은 정말 일품이었다.
핀의 위치가 그린 뒤쪽 구중심처에 위치해 있어서 공략하기가 수월치 않았지만, 그녀는 공을 핀 근처에 떨어뜨린 後 강력한 백 스핀으로 홀까지 끌어오는 신비의 샷으로 기를 죽였다.
그녀의 공은 오르막 버디 퍼팅 1미터를 남기고 있었다.
오사장도 이에 질세라 P/S로 강력한 백 스핀을 구사하였다.
그의 공은 마크의 공만큼 백 스핀이 강하지 않아 핀을 지나 내리막 2미터를 남겼다.
나는 얼른 오사장에게 달려갔다.
"오사장, 사부님의 말씀 잊지 않았겠지. 얼른 가서 마크의 공을 집으라고. 그래서 마크가 숏 퍼팅을 할 수 없도록 하시게나."
"여보게 무싸. 아무리 사부님 말씀이 그러하시더라도, 이 상황에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저 공을 집어주면 그녀는 기브 버디이고, 나는 어려운 내리막 버디 퍼팅을 해야 하는데 그냥 져주자는 얘긴가?"
"그렇지. 사부님께서 [반드시 이기려고 하면 질 것이요, 반드시 지려고 하면 이길 것이다] 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일단 사부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시게."
"허참! 알았네. 내 그리하겠네."
오사장은 그린에 오르자 마자 마크 사모의 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퍼터를 들고 걸어오는 마크 사모에게 공을 건넨다.
"아니 오사장님, 지금 기브를 주시는 것입니까?"
"네, 물론입니다."
"이 정도 거리를 기브 주시면, 그냥 져주겠다는 말씀 아니신가요."
"매치 플레이니 기브는 저의 소관 아닌가요. 기브를 받으십시오."
마크는 의외라는 듯 공을 건네 받으며, 오사장의 내리막 버디 퍼팅을 지켜본다.
"오사장님께서 아무리 기브를 남발하신다 해도 저는 그리 못하니, 마크 하시고 퍼팅 하시지요."
오사장은 오늘의 이 게임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사부님께서 뭔가 깊은 뜻이 있으셔서 하신 말씀이니 무조건 따라보기로 했다.
평소 저 정도 거리에서 오사장이 버디 퍼팅을 할 때면 요리 재고 조리 재고 시간을 물 쓰듯 하다가 초 긴장 상태에서 동반자들까지 얼어붙게 만든 뒤 버디 퍼팅을 하는 데, 그 공은 홀에 3센치 못 미치거나 홀을 핥고 나오곤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상황이 틀렸다.
마크 사모는 이미 오케이 버디이고, 오사장은 어려운 내리막 2미터 버디 퍼팅이니 이 홀은 진 거나 다름 없었다.
오사장은 홀을 힐끗 보더니 이내 가볍게 공을 굴렸다.
"나이스 버디!"
도우미 언니가 큰 소리로 외친다.
오사장은 무슨 연습 퍼팅하듯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퍼팅을 했는데, 무슨 조화인지 공은 홀을 찾아 들었다.
"아니 오사장님, 퍼팅 연습만 하셨나요. 저의 버디 퍼팅을 기브 주시더니, 그 어려운 퍼팅을 가볍게 넣으시는 걸 보면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아요."
"마크 사모님, 칭찬이 과하십니다. 어쩌다 運이 좋아 하나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마크 사모님의 공은 오르막 1미터도 채 안되고, 퍼팅 라인도 곧 바르니 못 넣으실 리가 있나요. 그러니 기브를 드린 것 뿐입니다."
하이고 아찔했다.
매치플레이에서 한 홀은 매우 크다.
그 1 UP의 차이가 그대로 18홀까지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사장이 겉으로는 저리 태연한 척하지만, 아마도 간이 콩알만해 졌을 터인데.
2홀 파3로 가면서, 나는 오사장에게 물었다.
"자네 아까 퍼팅할 때 그냥 장난하듯 퍼팅 하던데 어떻게 된건가?"
"사실 그랬지. 난 1홀은 내가 졌다고 생각했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냥 붙일 요량으로 툭 굴렸을 뿐이네. 허허 그런데 그 공이 홀로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닌가 말야."
"아하, 바로 그것일세.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必勝卽敗 必敗卽勝]이 바로 그 뜻일세. 자네는 계속 마크가 숏 퍼팅을 못하도록 오케이 기브를 주게나. 그리고 자네는 마음을 비우고 가볍게 져준다는 마음으로 쉽게 쉽게 치도록 하시게나."
2홀 파3에서 마크는 고수답게 가볍게 그린에 올렸다.
오사장도 부드러운 스윙으로 핀을 향해 쐈다.
마크의 공은 핀을 지나쳐 내리막 7미터를 남겼고, 오사장은 오르막 3미터를 남겼다.
마크는 가볍게 홀을 향해 공을 굴렸다.
너무 경사를 의식한 탓일까, 공은 구르다가 맥없이 멈춰 다시 내리막 1미터를 남겼다.
오사장은 날쌔게 그 공을 집어 마크에게 던져주며 기브를 준다.
"아니 오사장님, 그건 어려운 내리막 퍼팅인데 그걸 기브 주시다니, 왜 그러십니까. 저야 주시면 고맙지만..."
"천만의 말씀 마크 사모님께서 그 정도 퍼팅을 놓칠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버디 퍼팅인데요."
오사장은 정말 여유가 생겼나 보다.
저렇게 인심 팍팍 쓰는 건 그와 골프를 친 역사 以來 처음이었다.
그는 오르막 3미터 버디 퍼팅을 연습 퍼팅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툭 밀어댄다.
그의 눈은 공이 있던 자리를 그대로 응시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공은 [땡그랑] 소리를 내며 홀 속에 떨어졌다.
"오사장님, 줄 버디 축하합니다. 아니 설악산에 道 닦으러 들어 가셨다더니 정말 뭔가 비법을 터득하신 모양이군요."
"하이고 어인 말씀을… 그냥 運이 좋았을 뿐입니다."
두 홀이 끝난 後 오사장이 1 UP으로 한 홀을 이기고 있는 가운데, 3홀로 걸어가며 나는 오사장에게 물었다.
"자네 쌍 버디를 하고도 흥분하지 않네 그려. 옛날 같으면 큰 소리로 한 얘기 또 하고, 또 한 얘기 또 하며 보기에 트리플까지 한 동반자들 가슴을 갈갈이 찢어 놓더니만 오늘은 사람이 달라졌네 그려."
"그러게 말야. 사실 나도 이번 홀에서는 그 공이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을 안 했다네. 그냥 안 들어가도 비기는 것이니, 거리만 맞춰 연습 퍼팅하듯 툭 쳤을 뿐인데 그게 들어갈 줄이야."
마크 사모는 3홀, 4홀… 홀을 거듭하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환상적인 드라이브 샷은 어디 가고, 자꾸 감겨서 언덕 위로 꽂혔다.
어려운 슬라이스 라이에서의 세컨 샷은 그린을 빗나갔고, 어푸로치 샷을 1.5미터나 2미터에 붙이는 데 그쳤다.
그때마다 오사장은 공을 집어 오케이 기브를 주었다.
오사장은 가볍게 홀을 공략했고 그는 쉽게 쉽게 파를 잡아냈다.
그가 롱 퍼팅을 80센치에 붙여도 마크는 오케이 기브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오사장은 그때마다 깔끔하게 숏 퍼팅으로 파를 잡아냈다.
15번홀까지 이르자 오사장이 2 UP인 상태로 戰勢는 완전히 오사장에게 기울었다.
마크 사모가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하며 한마디 한다.
"오사장님! 제발 숏 퍼팅 좀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오사장님이 공을 집어서 주어버리니, 14홀을 숏 퍼팅을 한번도 못해봤어요. 숏 퍼팅을 안 하니 뭔가 빠진 거 같고 꺼림직한 게 웬지 이상해요. 이건 저의 골프 스타일이 아니예요."
"아, 그러십니까. 하지만 그건 저의 고유 권한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매치 플레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혼돈에 빠진 마크 사모는 이성을 찾기에는 이미 때가 지난 듯 싶었다.
바위 같던 그녀의 마음이 저렇게 어이없는 곳에서 무너질 수 있다니, 골프는 참말로 알다가도 모를 스포츠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는 숏 퍼팅을 마무리 하면서 자신에게는 확신을, 상대에게는 위압감을 주어 왔던 것 같다.
숏 퍼팅 마무리가 그녀의 승리감의 원천이었는데, 그걸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으니 그녀가 카오스에 빠질 만도 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상대를 갈구고 자신의 멋진 샷을 상대에게 자랑하며 뽐내던 오사장은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져줄 생각으로 가볍게 가볍게 한 홀 한 홀, 한 샷 한 샷 무리 없는 게임 운영을 하니, 게임이 잘 풀려가고 있었다.
이제 두 홀을 비기고 나면 한 홀을 남기고 오사장이 2 UP이 되어 승부가 끝나 버리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발안의 16번 홀은 아주 짧은 파3 아일랜드 홀로 보통 피칭이면 충분하였다.
앞바람이 있어서 오사장은 9번을 빼 들고 쓰리쿼터로 펀치 샷으로 공을 낮게 쏘았다.
공은 그린의 프린지를 맞고 핀대를 향해 툴툴툴 굴러간다.
오사장이 5미터 버디 퍼팅 기회를 맞은 것을 보자 마크 사모는 피칭으로 강력한 백 스핀 샷을 구사하였다.
하늘로 치솟은 공은 바람에 밀려 간신히 물을 건너 러프에 떨어졌다.
앞 바람에서 강력한 샷은 오히려 스핀이 많이 걸려 거리가 잘 나지않는다는 것을 마크 사모는 착각했던 것이다.
마크 사모의 어프로치 샷은 핀대를 향해 곧장 굴러 갔다가 핀대를 맞고 옆으로 튀어 1미터에 멈췄다.
승리에 찬 오사장은 오케이 기브를 주려고 마크의 공을 집으려 걸어갔다.
"잠깐만요. 오사장님 제발 퍼팅 한번만 하게 해주세요."
"기브 드리려고 하는데, 왜 그러십니까. 알았습니다. 그러죠..."
오사장은 5미터 버디 퍼팅을 붙인다는 생각으로 주욱 밀었다.
공은 홀을 지나 60센치에 멈췄다.
이때 잽싸게 마크 사모가 걸어와 오사장의 공을 집어 기브를 준다.
"오케이 기브입니다, 오사장님!"
마크는 1미터 퍼팅을 이리보고 저리 살핀다.
감격스러운 퍼팅이었다.
오늘 처음 해보는 숏 퍼팅이었다.
사실 이 정도 거리는
마크에게 있어서 99%의 확률이 있는 쉬운 퍼팅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리 살피고 저리 살핀다.
그리고 조용히 퍼팅을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녀는 퍼터로 뒷땅을 긁고 말았다.
그녀의 공은 홀 앞 5센치에 서 버리고 만 것이다.
"사모님 그건 오케이 기브 드린다고 했더니... 이를 어쩌나?"
오사장이 남이 실수로 못 넣은 것을 저렇게 안타까워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사장은 저런 경우 쾌재를 부르며 계산도 빨리 해서 지갑을 털어가던 그런 [오놀부]였는데…
戰意를 상실한 마크 사모가 말문을 열었다.
"오사장님 오늘은 제가 졌습니다. 2홀을 남기고 사장님께서 3 UP이시니 남은 홀을 제가 이긴다 해도, 제가 지게 되니 이 홀로서 게임은 끝났습니다."
"아, 그렇군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마크 사모님. 오늘은 제가 運이 좋았고, 사모님께서 잘 안 되시는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오사장님. 오늘 저는 처음부터 오사장님을 이기려고 무리한 샷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오사장님께서 숏 퍼팅이 약하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모두 마크를 했습니다. 오사장님께서 숏 퍼팅 미스를 하시기만을 고대하면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제가 골프에서도 졌고, 멘탈에서도 졌습니다. 오사장님은 저에게 후하리만큼 오케이 기브를 주셨지만, 결국 저는 악착같이 이기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정말 한 수 잘 배웠습니다. 저도 산에 들어가 마음을 닦고 수양 좀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마크는 여걸이었다.
짧은 순간에 자신을 돌아볼 줄 알다니.
그녀는 오늘의 敗因이 자신의 욕심에 있었음을 벌써 깨달은 것이었다.
"그럼 이제 두 홀이 남았는데 어떻게 하실까요. 기왕 나왔으니 마저 마무리하고 가시지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승부는 이 홀로 끝이 났으니, 저는 먼저 저 오솔길을 따라 클럽하우스로 가겠습니다. 생각도 좀 하면서요. 여러분들은 마저 마무리하고 오십시오."
마크 사모는 축 늘어진 어깨로 걸음을 옮겼다.
"여보게 무싸. 자네하고 꽃사슴하고는 스토록 플레이니 끝내고 오게나. 나는 마크 사모와 먼저 가겠네."
"그러게나 벚꽃 흩날리는 오솔길에 둘이서 데이트라도 하며 가시게나."
꽃 비가 내리는 발안CC에 그들의 뒷모습은 처절한 승부사가 아닌 어느새 연인의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었다.
나와 꽃사슴이 18홀을 마치고 퍼터를 도우미 언니에게 건넬 무렵, 오사장과 마크가 다정한 모습으로 시계탑 아래서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가만히 스코어를 계산해보니 16번 홀까지 오사장이 1언더, 마크 사모가 2오바였다.
나와 꽃사슴은 간신히 79, 80으로 마무리했다.
나의 판단으로 오사장도 마크 사모도 사실은 너무도 잘 친 게임이었다.
그런데 오사장이 기록한 1언더는 그가 최근 2年 사이에 기록한 스코어 中에서는 최고의 스코어였다.
그리고 그의 오늘의 샷은 정말 특별한 것도 무리한 것도 없는 그저 그런 평이한 샷이었던 반면, 스코어는 아마추어로서 경이로운 1언더를 기록한 것이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水滴穿石) 라고 하더니, 마크의 욕심이 슬금슬금 바위 같던 마크의 마음을 흔들었구나.
우리는 오사장이 미리 예약해 두었던 시골밥상 집에서 근사한 저녁에 동동주로 하루의 피로를 잊으며 다음 결승전을 기약하였다.
"오사장님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말씀 하십시오."
"다음 결승전은 하리수 매치 플레이이므로 오늘 우리는 서로 골프채를 바꾸어 가지고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채로 한달간 연습한 뒤 결승전에서 하리수 매치플레이를 하기로 되어 있지요."
"네 그렇지요."
"저도 수덕사에 제가 모시는 사부님이 계신데, 가서 수양 좀 하고 올까 합니다. 그래서 일생일대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승전이니 만큼, 좀더 준비할 수 있도록 우리의 결승전을 두 달 後인 6月 중순경에 하였으면 하고 부탁 말씀 드립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정확한 날짜는 부킹되는 대로 알려드리지요."
시골밥상 집 처마 밑으로 둥근 초저녁 달이 차오른다.
동동주에 얼큰하게 취한 마크 사모의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달빛에 물드는데...
[제15부] 수덕사의 여승
우리나라가 이탈리아를 제물로 삼고, 월드컵 8强에 진출하며 한반도 전체가 붉은 악마의 물결로 가득차던 6월18일 저녁, 늦은 시간 핸드폰이 울렸다.
"무싸, 나일세. 여기 [알바트로스]인데 이리 오시게 한잔하게."
"그럼세. 오늘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는 날이니 밤새 마셔 보세나."
아파트나 거리나 어딜 가나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붉은 악마의 물결이었다.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거리를 달리는 청소년들.
폭죽으로 밤하늘을 수놓으며 8强의 환희를 만끽하는 시민들을 뚫고서 [알바트로스]에 도착해보니, 벌써 오사장은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다조마담은 예의 미소를 나를 반긴다.
"무싸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연구가 무척 바쁘신가 봐요?"
"아 예. 요즘 저도 연구하는 게 진도가 착착 잘 나가서 좀 바빴어요."
"우리의 장자방 무싸 오셨는가. 이리 와서 한잔 받게나. 자네 좋아하는 발렌타인 21年짜리 일세."
오사장은 월드컵 8强 진출과 그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꺼낸 後 [제3차 오마대전]에 대한 준비에 대해 물었다.
나는 4月 제2차 오마대전 後 연구가 바빠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벌써 약속했던 6月도 반이 휙 지나가버린 것이다.
"아 참 그렇지.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군. 세월이 유수같다더니, 그 말이 참말이네 그려."
"이 사람 무싸. 자네는 자네 일 아니라고 신경도 안 써주고 세월타령만 하는구먼. 나는 그날 以後로 [일일여삼추]였다네."
그러고 보니 제3차 오마대전은 [하리수 매치플레이]으로 오사장이 마크 사모의 골프클럽으로 레이디 티에서 치고, 마크 사모가 오사장의 골프클럽으로 레귤러 티에서 치기로 하였었지 않는가.
2차 대전에 패한 마크 사모가 수덕사에 계신 사부님께 가르침을 받으러 간다고 하였었는데, 그 일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였다.
"오사장 제3차 대전은 언제 하기로 하였는가?"
"그게 말이야. 좀 문제가…"
"왜 그러나 오사장. 마크가 [수덕사]에 들어가 여승이라도 되었다는 얘긴가."
"글쎄 말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여튼 그날 以後 연락이 두절 되었다네. 핸드폰은 연결이 안되고 해서, 꽃사슴에게 연락해 보았더니 그 쪽에서도 행방을 알 수 없다는구먼. 일단 날짜는 6월30일로 잡아놓았다고 꽃사슴에게 전해달라고 했네. 마크의 핸드폰에도 문자 메세지를 남겼고."
"음 그래. 천하의 여걸 마크가 꼬랑지 내리고 도망갔을 리는 만무하고, 무슨 일이 생겼나..."
나는 애타는 오사장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기던 지던 3차 대전을 끝내야 머슴이 되던지, 아내를 얻던지 할 텐데, 이처럼 마크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면 오사장은 완전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마는 것 아닌가.
"오사장. 이거 농담 아니고 진짜로 마크가 道 닦다가 뭔가를 깨달아 [수덕사의 여승]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네."
"무싸.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분위기는 일순 심각해졌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아니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마크가 사라져 버리면 오마대전은 어찌 되는 건가.
다급해진 오사장이 발렌타인 한잔을 스트레이트로 주욱 마신 뒤, 심각하게 말문을 연다.
"여보게 무싸. 이번 주 일요일에 자네 나하고 수덕사에 함께 가보세나. 나는 마크를 찾아야겠네. 2차까지 오마대전을 치루며 마크에 대한 감정이 남다르다네. 미운 정 고운 정하고 다른 또 다른 감정이라네. 마크는 내 인생의 앞날을 밝혀 줄 등불 같은 존재라는 것이 느껴지네."
"그러세, 오랜만에 바람도 쏘일 겸 함께 가도록 하지."
어느새 알바트로스의 밤은 삼경을 넘어서고 있었다.
우리는 반 병이나 남은 발렌타인을 다조마담에게 건네주고 밤거리로 나왔다.
이 미명의 새벽 시간에도 붉은 악마들의 물결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온 나라가 축제의 도가니였다.
뻥 뚫린 듯한 오사장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나가는 스포츠카의 젊은 청춘이 응원 구호에 맞추어 크락숀을 울린다.
오오오~ 대~한민국 빠방 빠 방빠!!!!
오오오~ 대~한민국 빠방 빠 방빠!!!!
오오오~ 대~한민국 빠방 빠 방빠!!!!
오오오~ 대~한민국 빠방 빠 방빠!!!!
오오오~ 대~한민국 빠방 빠 방빠!!!!
[제16부] 마지막회: 제3차 오마-꽃무대전
수덕사로 향하는 일요일!
산 새벽의 아침 공기는 너무도 맑았다.
6월22일 토요일 대한민국의 역사는 새로 쓰였다.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월드컵 4强의 신화를 창조해 낸 우리 태극전사와 4천7백만의 붉은 악마의 응원으로 이루어낸 쾌거였다.
"여보게 무싸!! 난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네.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는다고."
오사장은 흥분된 어조로 어젯밤의 스페인과의 혈전을 몇 번이고 생중계를 해 대었다.
"오사장! 이는 대한민국의 國運이 하늘에 통하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오늘 같은 날 가슴 벅차지 않는 대한민국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나 저나 우리 오사장의 일도 잘 풀려야 할텐데. 수덕사에 가면 마크 사모가 있을는지."
나의 말을 듣고 있던 오사장이 빙긋이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게나. 무싸! 어젯밤 전화가 한 통 왔었네."
"누구한테. 꽃사슴? 아니면 마크 사모한테?"
나는 궁금해서 재촉하여 물었다.
"아 글쎄. 그 사람이 내 속을 까맣게 태우더니 우리가 4强에 진출하고 길길이 기뻐서 뛰던 그 순간에 전화를 했지 뭔가."
"그 사람이라면, 마크 말인가?"
"그렇다네. 그 동안 사부님 밑에서 정신수양하느라 연락을 못해 미안하다며, 대한민국의 역사가 새로 쓰이는 그 순간에 자기도 붉은 악마가 되어 응원했다는 거야. 홍명보 선수가 골을 넣는 순간 뜨거운 눈물이 줄줄줄 나왔다고 하며,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보고 싶다고 하였네.”
"허어!! 그런 일이 그래서 자네 안색이 밝구먼."
대한민국의 4强 신화가 그 차갑던 마크의 마음도 녹였단 말인가!
오사장은 마크가 수덕사 일주문 앞에서 기다릴 거라고 했다.
어머님 품 같은 덕숭산에 안겨있는 수덕사가 가까워 올수록 묘한 흥분이 뇌리를 스쳤다.
마크는 어떻게 변했을까?
마크의 사부님한테 뭔가 비장의 무기를 배운걸까.
나의 머리 속에는 온갖 상상이 다 스쳤다.
이윽고 우리가 탄 車는 수덕사의 주차장에 이르렀다.
일주문을 향해 걸어가는 오사장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맞으러 나오는 흥분되고도 씩씩한 발걸음 바로 그것이었다.
향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올라가니 저기 멀리 수덕사의 일주문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수련복을 한 여인이 보이는데, 바로 마크 사모였다.
우리가 오는 모습을 보고 마크 사모는 환한 미소로 맞았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사장님, 그리고 무싸님! 기왕 수덕사까지 오셨으니 수덕사 경내 한바퀴 돌고 제가 수련하는 견성암(見性庵)으로 가시죠."
"너무 반갑습니다. 마크 사모님. 그 동안 연락이 없으셔서 걱정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이 오사장은 마크 사모님 걱정에 애간장이 다 녹았답니다. 하하하..."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이라는 수덕사의 대웅전이 그 고색창연함을 빛내고 있었다.
우리는 사찰을 조용히 돌며, 그 동안 지낸 이야기들을 풀어 나갔다.
"그런데 마크 사모님 여기 수덕사는 원래 비구니 여승들로 유명한데, 남자 스님들만 보이는데요. 어찌된 일이죠."
"아! 네. 수덕사는 오래 前부터 비구니 김일엽 스님으로 유명하죠. 비구니들이 거처하며 참선하는 도량은 좀더 올라가야 합니다."
얼마 後 우리는 마크 사모가 참선하고 있던 견성암에 다다랐다.
참으로 공기가 맑고 나무들이 울창하였다. 견성(見性)이라면 불교용어로 [자기자신의 본성을 본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
註) 참된 자기를 깨닫고 앎으로써 깨달은 者가 되는 것을 선종(禪宗)에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말한다. 선(禪)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불성(佛性) 그대로이며 그 밖에 본성이라고 인정할 만한 것은 없다고 본다. 이 불성을 열어 나타내는 것이 견성성불이다.
見性!! 참으로 뜻 깊은 말이다.
마크 사모는 참선 공부 속에서 견성을 했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걸어가는 사이 오사장과 마크 사모는 어느새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둘이서 속삭이듯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것이 흡사 연인사이처럼 보여 괜한 질투가 난다.
우리는 참선도량의 시원한 마루에 앉아 마크 사모가 떠다주는 시원한 약수로 목을 축였다.
약수를 먹고 나니 속세의 번뇌가 씻기듯 가슴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단 일주일이라도 속세의 삶에서 벗어나 이런 참선도량에서 욕심에 찌든 마음을 털어내고 싶기도 하다.
새로운 고분자 연구한다고 매일 속태우고 애태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對比되어 보인다.
오사장과 마크 사모는 칠월칠석날 만난 견우와 직녀처럼 너무나도 다정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3차 오마대전에서 피튀기는 하리수 게임으로 승부를 갈라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다.
"무싸 이리 오시게나, 할 얘기가 있네. 자네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모두 통하였네. 나는 마크 사모를 처음 볼 때부터 이미 나의 인연인줄 느꼈다네. 마크 사모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군. 그래서 우리는 대한민국 온 국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월드컵 4强의 신화를 창조하는 이 때에 서로를 이기려고 아둥 바둥하는 오마대전을 끝내고 모두가 하나되어 氣를 모으는 한마음 골프를 하기로 했다네."
"그럼 자네와 마크 사모가 마음이 통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지. 그래서 다음 週에 잡혀 있는 3차 오마대전에서는 나와 마크 사모가 한 組가 되고, 무싸와 꽃사슴이 한 組가 되는 베스트 볼 게임을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베스트 볼 게임이라. 그거 좋지. 오사장과 마크 사모가 한 組로 베스트 볼을 한다면, 아마도 3언더 以下는 나올텐데."
한 組가 된다!
마음이 통했다.
처음부터 눈이 맞았다.
참내 그럼, 난 뭐여! 그 동안 무슨 일을 한 거지.
왠지 질투심에
은근히 화 같은 게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둘 사이가 해피 엔딩으로 장식된다니, 축하해줄 일 아닌가.
"무싸! 자네 맘 다 아네. 하지만 자네도 우리의 행복을 빌어줄 것이라 믿네. 나는 결혼하면 마크의 머슴이라는 마음으로 살 것이고, 마크 또한 나의 가장 아름다운 아내로 살 것이라네. 그리고 결혼식 사회는 자네가 맡아줘야겠네."
6.25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아깝게 석패하고, 6.29 터키와의 3,4위전에서도 연패하는 한 週였지만, 터키戰 後 두 나라 선수들이 서로 유니폼을 바꿔 입고 함께 월드컵 신화를 만든 혈맹으로서의 멋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고 우리는 성숙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던 한 週였다.
그리고 6.30 일요일 [제3차 오마대전]은 오마-꽃무 베스트 볼 大戰으로 바뀌어 진행되었다.
찌던 햇볕 오후가 되자 구름에 가리고 살랑살랑 바람까지 불어 여름 날씨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이미 부부가 된 듯한 [오마팀]은 매 샷 다정하게 의견을 나누며 코스공략을 의논하며 베스트 볼 플레이를 이어 나갔다.
오케이 社長이 무너지면 마크가 위기를 극복해 주고, 또 마크가 실수를 하면 오케이 社長이 어깨를 두드려 주며 위로하고 하면서, 아슬아슬 홀마다 파와 버디를 번갈아 엮어 나갔다.
우리 [꽃무팀]은 그저 매 샷 자신의 최선을 다하며 게임을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내가 잘 칠 때 꽃사슴도 잘 치고, 꽃사슴이 무너질 때 나도 어이없는 실수로 무너졌다. 우리 꽃무팀은 버디에 파에 보기를 골고루 섞어가며 게임을 이어나갔다.
내용은 우리가 더 멋진 것 같았는데 18홀이 끝나 장갑을 벗어보니, 오마팀이 7언더 꽃무팀이 1언더로 마감하였다.
역시 베스트 볼 방식은 같은 팀의 파트너가 결정적인 실수를 할 때, 파트너가 만회를 해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았다.
오늘처럼 오케이 社長과 마크 사모가 앞으로 험난한 인생을 살아갈 때, 서로가 의지가 되고 도움이 되는 [베스트 볼] 인생이 되기를 바랬다.
"오사장, 그리고 마크 사모님! 오늘처럼 호흡이 척척 잘 맞으시면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사시겠어요."
"무싸! 그동안 고마웠네. 자네 나의 영원한 장자방이네. 우리도 우리가 이처럼 잘 해낼지 예상치 못했다네. 서로가 마음을 열고 한마음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니, 이런 좋은 결과가 나왔다네. 오늘의 베스트 볼 게임은 우리 두 사람의 인생좌표가 될 걸세. 자, 우리 한번 대~한민국! 응원 한번 해보세."
"대~한민국 짜자작 짝짝!!
대~한민국 짜자작 짝짝!!
대~한민국 짜자작 짝짝!!
대~한민국 짜자작 짝짝!!"
우리들은 돌아가며 한번씩 구호를 외쳤다.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이 힘이요 진리이니!!
첫댓글 감사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흠~ 정말 재미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할수있게하는 글이군요. 마치 페어웨이 에서 직접 플레이 하는듯한 생각 새삼 되뇌이며..즐감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