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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8 - 스코틀랜드를 침략한 브레이브 하트, 롱생크라고 불린 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1세는 1154년에 세워진 플랜타지네트 왕조 잉글랜드 왕국의 왕인 헨리
3세의 아들이며 에드워드 2세의 아버지로, 잉글랜드 중앙집권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의회를 창설하여 그 기초를 닦은 명군으로 손꼽
히지만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입장에서는 잔혹한 침략자이며 학살자 이기도 합니다.
키 188cm로 당시 엄청난 키였고, 현대에도 장신이니 꺽다리 에드워드 롱생크 (Edward
Longshanks) 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한편 에드워드 1세는 숙적
스코틀랜드를 크게 격파하고 스코틀랜드 독립을 위해 활동한 윌리엄 월레스를 붙잡아
죽였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인들의 망치(Hammer of the Scots) 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존 왕의 손자이자 헨리 3세의 장남으로 헨리 3세 때에는 할아버지
존 왕이 치세 시절에 일으킨 갖은 사고로 인하여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가
수립된 이후,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던 시대였으며 프랑스와의 사이도 좋지 못했고
내분도 심하게 일어나니, 잉글랜드의 국력은 무척 쇠약해져 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에드워드 1세는 태자 시절 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던 부왕 헨리 3세를 도왔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위기에 처하기도
했는데 그중 가장 큰 위기는 귀족이었던 시몽 드 몽포르가 일으킨 2차
바론 전쟁에서 부왕 헨리3세를 도와 국왕군에 참전했으나 패배했던 일이었습니다.
프랑스 혈통의 귀족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에게 있어 최대 정적으로 헨리 3세의 왕권
강화책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그 힘을 바탕으로 왕을
압박하여 옥스퍼드 조례를 인정하도록 굴복시키기도 하였는데 헨리 3세가
번복하려 하자 시몽 드 몽포르는 분노하여 귀족 세력을 규합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에 헨리 3세는 국왕군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오히려 루이스 전투(Battle
of Lewes) 에서 시몽 드 몽포르와 귀족들이 이끌던 군대에게 완패하고
말았으니 결국 에드워드 1세는 부왕과 함께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으며
옥스퍼드 조례가 통과돼 버리고...... 잉글랜드 의회가 소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복수하기 위해 탈출을 감행하여 글로스터 백작인 길버트 드 클레어와
변경 귀족들과 함께 국왕군을 결성했고, 이브샴에서 다시 한번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군
과 싸웠으며.... 마침내 이브샴 전투(Battle of Evesham) 에서 반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이 싸움에서 전사했고, 에드워드 1세는 자신에게 큰 굴욕을 주었던
그의 시체를 찾아내 오체분시해 난자했으며... 몽포르의 장남인 헨리 드 몽포르
도 죽여 복수하는데..... 왕세자의 신분임에도 부왕 헨리 3세 이상의 영향력과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잉글랜드의 실권은 에드워드 1세의 것이 되었습니다.
명예욕에 불탔던 에드워드 1세는 큰할아버지인 리처드 1세의 선례를 따라 1271년에 제8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였는데, 동행햇던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일찍 죽고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이억던 키프로스의 위그 3세는 이집트의 바이바르스와 휴전을 선언해 버립니다.
에드워드 1세는 이 휴전에 반대했지만 이슬람 측에서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어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 여러 악조건에 부딪혀 결국 귀국하였는데, 그 와중에 부왕 헨리 3세가 잉글랜드
에서 병사하였고 이 소식을 듣은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로 돌아오자마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세자 시절부터 대담한 활약을 보인 에드워드 1세는 왕위에 오른 이후 강력한 군주
로 군림하였으며, 왕권을 강화하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초석을 다지기
위해 이전의 왕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덕분에.......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기존의 관습법을 정비하여 국법의 불합리하던 점들을 해소시키기도 했지만 또한 법령
을 통해 강력한 교회의 권력을 억눌렀으며, 영주들이 지닌 땅을 재분배하여
권력을 분산시켜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고 양모와 와인의 생산을 장려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시키는 등....... 잉글랜드의 중앙 집권화를 착실히 이루어 나갑니다.
잉글랜드 봉건 제도의 종말을 알린 왕으로 봉건시대 유럽에서 강력한 권력을 누리던 영주들과 교회
를 끝없이 견제하고 약화시켰으며, 또한 노르만 귀족 계급과 앵글로색슨족 평민 계급을
하나로 뭉쳐 단결력을 높이기 위한 취지에서 의회를 운영함에 있어서도 제법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했던 잉글랜드의 귀족과 왕족들에게 영어의 사용을 권장
하기도 하였으니, 비록 태자 시절에 꺾었던 정적 시몽 드 몽포르를 증오하기는
했지만 그의 의회 운영법 만큼은 적극적으로 참고했으며 문화적, 정치적
으로 상하 정치 계급의 화합을 이루어 강력한 결속력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의회를 통해 과세징수를 했는데 1295년에 연 모범의회에서는 귀족, 주교와 대주교,
각 주에서 기사 2명, 소도시들에서 대표 2명이 참석하는 등 광범위한 지역과
계층에서 대표를 보내도록 하여, 중앙통치에 도움이 되도록 의회의 권위를 높혔고
하원, 상원 체제를 구축했으니 영국의 의회정치는 여기서 시작되었다고도 말합니다.
에드워드 1세는 내정으로 통치력을 다지는 한편 대외적으로 잉글랜드 세력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으니 당시 까지는 웨일스는 사실상 독립국이었는데,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의 독자적인 세력을 제압하고 실질적인 통치력을 발휘하고자 하였으니 원정
을 나가서 직접 통치에 반발하는 웨일스의 토착 영주들 과 싸워 이겨서 복속시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던켈드 왕조의 왕 알렉산더 3세가 1286년 3월 18일 낙마 사고로 사망
했는데, 그는 헨리 3세의 딸 마거릿과 사이에서 자식들을 뒀으나 딸 마가렛 하나
외에는 요절해 후계자가 없었으니... 알렉산더 3세의 유일한 혈손으로 딸
마가렛이 노르웨이왕 에이리크 2세와 결혼해서 태어난 외손녀인 마가렛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렛이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지목되자 에드워드 1세는 마가렛을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2세와 혼인시켜 스코틀랜드까지 집어삼키려 했지만 어린 나이에 병사하는 바람에 실패했는데,
기회를 노리다가 스코틀랜드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자 자신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인정하는 이에게 실질적인 지배자가 될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제안합니다.
이때 존 발리올이라는 영주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 의
강력한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되었으나.... 정작 그에게
실권은 전혀 없었고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1293년 조카를 대신해 파이프 백작위의 계승권을 주장한 스코틀랜드 귀족 맥더프
가 잉글랜드왕의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는데, 스코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잉글랜드인 재판관이 심리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스코틀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 1290년 버갬 조약을 에드워드 1세가 멋대로
반한 것이라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주장했는데, 하지만 사실 1292년 발리올이
에드워드 1세를 상왕으로 인정하고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왕국을 대표
하여 그에게 신서를 한 시점에서....... 이전의 조약은 무효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다음해에 영국왕 에드워드 1세가 발리올과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영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스코틀랜드인들이 참전할 것을 요구했을 때 갈등은 정점에 달했으니.....
결국 1295년 2월 존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에게 바친 신서를 파기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격노한 에드워드 1세는 반역자 발리올을 왕국으로 부터 추방한다는 판결과 함께 그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비롯한 모든 재산의 몰수를 공표한 후 1296년에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으니, 에드워드 1세는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한 다음
저항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도륙했고, 발리올을 사로잡아 폐위시킨 후 런던 탑에 가둡니다.
그리고 아예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 나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왕임을 선포하며
스코틀랜드를 합병했으며 스코틀랜드 왕권의 상징이었던 '운명의 돌' 과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성 마거릿 검은 십자가상 마저 빼앗아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으로 가져가버립니다.
이 때문에 후에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을 자칭하며 독립을 선언하기 전 까지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식민지가 되어 왕도 없이 몇 년을 지내야만 했는데.....
특히 스코틀랜드 왕실과 귀족들은 엄청난 굴욕을 당한 터라 에드워드 1세를 증오합니다.
에드워드 1세의 잔혹한 학살에 증오심을 품게된 스코틀랜드인은 독립을 요구하며 거세게 저항
하자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에게 호의적인 몇몇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뇌물과 권력으로
달래어 포섭하는 등 회유책을 쓰면서도 반항하는 도시와 마을들을 가차없이 짓밟고 해당
지역 사람들을 귀족 시민 가릴 것 없이 무차별 학살하는 등 더욱 잔혹한 통치를 일삼았습니다.
이러한 잔혹한 학살은 역효과를 불러와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 귀족과 백성들의 원한과 증오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저항군을 조직해
수차례 잉글랜드 군대를 패퇴시켰으니... “멜 깁슨과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 입니다.
특히 월레스의 군대는 스코틀랜드와 가까운 잉글랜드 북부의 도시와 마을까지 공격하여 약탈
하는 대담함까지 보였으니 위기감을 느낀 에드워드 1세는 토벌군 1만 5천명을
파견하여 폴커크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 6천명을 격파했으며 윌리엄 월레스도 붙잡아
그의 사지를 찢어죽여서 본보기를 보였지만 끝내 스코틀랜드 저항군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스코틀랜드의 지도자 윌리엄 월레스를 동족인 귀족의 배신으로 잡아 죽이긴 하였으나,
이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을 더욱 부추겼을 뿐이었으며 스코틀랜드 귀족과
평민들의 추대로...... 스코틀랜드 국왕이 된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선포합니다.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1세와 싸우기 위해서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원정을 나갔고, 메스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 저항군과 싸워 그들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자 패배한 로버트
1세는 아일랜드로 도주했지만...... 에드워드 1세는 병을 얻어서 진중에서 68세로 일생을 마칩니다.
사후 그의 시신은 장례를 치른 다음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안장되니 끝내 스코틀랜드를 평정하지
못했던 에드워드 1세는 최후까지도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고 전해지는데 '내가 죽거든
시체를 화장해서 남은 잿가루와 뼈를 부대 자루에 넣고 병사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진군하라.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평정한 후에 나를 묻어달라.' 라고 유언했다고 합니다.
에드우드 1세는 중세 잉글랜드인 에게는 명군이지만, 스코틀랜드인에게는 악마
의 현신이자 마왕 그 자체인데........ 잉글랜드를 발전시키고 중앙 집권화의
초석을 쌓았으며 대외적으로도 큰 활약을 펼친 위대한 명군으로 손꼽힌힙니다.
전략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는데 수많은 전투를 치렀음에도 루이스 전투 외의
패배를 겪어본 바 없고 그나마도 이때는 자신이 총사령관이 아니었으며
또한 장궁의 도입을 권장했는데 이는 훗날 백년전쟁에서 연승의 요인이 됩니다.
한편으로는 성품이 대단히 완고했고 적에게는 무자비하다 못해 잔혹하였는데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나 윌리엄 월레스와 같은 정적들에게는 사지를 찢어버릴 정도로 냉혹
하여 이 때문에 폭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머리도 좋고 군사적 능력도 뛰어나서 후대
15세기, 16세기 잉글랜드 왕들도 평정하지 못한 스코틀랜드를 거의 집어삼킬 뻔 했습니다.
조금만 더 오래 살았으면 입지가 불안하고 조직력이 엉망이었던 로버트 브루스의 군대
를 격파하고 스코틀랜드를 석권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많은데 그했다면
강압적으로 통합되어 지금 스코틀랜드와는 크게 달랐을 것이니 스코틀랜드
에서 공포와 경외심을 담아 스코트인들의 망치(Hammer of the Scots)라고 부릅니다.
스코틀랜드인들과 싸우는 와중에도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재정에 심각한 타격
을 입었으며, 이를 해결하려고 새로운 세금을 매겨 막대한 전쟁비용을
충당하려 했으니 잉글랜드 귀족들과 농민들의 반발을 샀고 특히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돈이 많았던 유대인 상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였습니다.
말년에는 민심에서 멀어졌으며, 잉글랜드 상공업에서 큰 영향력을 지녔던 유대인
상인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잉글랜드 경제
에 타격을 주기도 했으며 에드워드 1세와 귀족들 간의 갈등은 그의 아들
인 에드워드 2세 때로 접어들면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점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1세가 무수한 업적을 남긴 뛰어난 왕
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지금 까지도 잉글랜드인들에게 위대한 군주로
칭송 받기에 충분하니 그야말로 잉글랜드의 초석을 다진 왕으로 평가할만 합니다.
에드워드 1세의 시대 이전에는 잉글랜드 왕족이나 귀족들 대부분이 프랑스 왕족들과 혈연관계
에 있었으며 사실상 잉글랜드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프랑스인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였는데 사자심왕 리처드 1세만 해도 잉글랜드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재위 10년 동안
잉글랜드에는 단 6개월만 머물렀으며 영어는 능숙하지 못했고 주로 프랑스어를 구사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 때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에 어느 정도 존재하던 잉글랜드 소유의
봉토가 크게 줄었으며 자연히 잉글랜드의 왕족들과 귀족들도 점차 현지화되기
시작햇으니 이 시기부터 잉글랜드 귀족과 왕족도 프랑스어보다는 영어를 하기 시작
했으며 에드워드 1세 본인도 프랑스어 보다 영어를 더 유창하게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당장 에드워드의 이름부터가 노르만 정복 이후 처음으로 사용된 게르만계 고유어
이름인데..... 사랑했던 첫 번째 아내 레오노르를 일찍 잃었는데, 에드워드 1세는
너무도 깊은 슬픔에 잠겨서 한동안 일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는데 그녀는
10대 중반에 결혼해 40대가 될 때 까지 무려 4남 12녀의 아이를 낳아주었습니다.
왕비는 전쟁터에도 남편을 따라나섰고 에드워드가 이슬람 자객의 독검에 중독되었을 때도
간호해준 충실한 아내였는데 사망 이유는 평생에 걸친 다산과 노산(43세)의 후유증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에드워드는 레오노르 외의 여자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 16명 중에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에드워드 2세를 포함해 5명에 불과
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갓난아기일 때 죽었으며 두 번째 아내 마르그리트는 에드워드
가 죽고 나서 11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는데 그 전인 1284년, 45세가 되어서야 후계자
에드워드를 얻었으나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와 성격차가 심해 부자관계는 좋지 못했습니다.
에드워드 2세가 세자 시절에 친구 가베스턴을 지나치게 감싸고 돌자 분노하여
그의 머리채를 붙잡고 손찌검을 하고는 가베스턴을 잉글랜드에서
추방하기까지 하였다는데.... 금욕적인 성격으로 음식을 절제했고 물 외에
다른 음료는 마시지 않았으며 냉철하고 현실주의적인 성격 이었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1세는 평생 동안 십자군 전쟁에 대단히 집착했다는데 이는 에드워드 1세 또한
중세시대 유럽인들이 처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으로그는 태자 시절에 8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함께 원정길에 올랐던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가 병사하고
에드워드 본인도 자객에게 죽을 뻔하는 등.... 악재에 부딪혀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고, 틈만 나면 중동으로 돌아가 다시 십자군 전쟁
을 치르고 싶어했지만 그에게는 잉글랜드 왕으로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그 소원은 평생토록 미루게 되었으니 기사적 공명심에 불타서 국내
현안을 제쳐두고....... 십자군 원정을 떠났던 큰할아버지 리처드 1세와 대비되는 점입니다.
실책이 많았던 아버지 헨리 3세가 에드워드를 아들로 둠으로써 평가를 만회하는
반면, 에드워드 1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2세는 호부견자의 표본을 보여
주었고 부왕이 쌓아올린 업적을 갉아 먹었다고 손가락질 받으니........
로버트 1세와의 싸움에서도 패배하여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결국 에드워드 2세는 프랑스 공주인 아내에게 살해당하는 바람에 그녀가 데려온 프랑스
가신들의 손아귀에 잉글랜드가 놀아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가 이들을 무찔러 다시 잉글랜드의 왕권을 바로 잡았습니다.
웨식스 시대에 에드워드가, 잉글랜드왕국 성립 이후 순교왕 에드워드, 참회왕 에드워드로
이미 에드워드 왕이 세 명이나 있었지만 1세라는 넘버링은 그가 차지했는데 아마도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왕조의 지배로 앵글로색슨(웨섹스) 계통이 끊어져 당대 사람들이
웨식스 왕조와 노르만 정복후 잉글랜드 왕국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 정복에 공을 들였던 1154년에 건국된 플랜타지네트 왕조의 에드워드
1세의 아들이지만 스코틀랜드 정복 의지는 없었고 기사 피어스 개버스턴 및 특정 인물만
총애해 의회의 반발을 샀으니, 추락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으나
허술한 전략에 패하고 이사벨라 왕비가 이끄는 반란 세력에 의해 추종자흫 모두 잃고 폐위됩니다.
그는 폐위후 감옥 안에서 폭행을 당하여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예민한 예술가적 소양
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유약한 인물로서 지도자다운 정세 판단 능력이
부족했던 왕이었는데, 에드워드 1세의 4남으로 웨일스 북부 카나번 성에서 태어
났으니 웨일스의 카나번성을 왕자 출생지로 직접 선택한 사람은 에드워드 1세였습니다.
에드워드 왕자가 태어난 1284년은 부왕인 에드워드 1세가 콘위성을 쌓은후 웨일스의 북부
지역을 막 점령해 나가던 시기였으니 그는 웨일스인들에게 이제부터 잉글랜드
국왕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됨을 각인시키고 싶었던 것이니 에드워드 1세는 왕자의
탄생 장소를 카나번성으로 정했고 태어난 아들에게 '웨일스의 왕자' 라는 칭호를 내려줍니다.
왕자의 양육도 생모인 카스티야의 공주가 아닌 웨일스인 유모에게 맡겼는데 위로
세 왕자가 죽었는지라 태자가 되니 부왕은 왕자의 위생과 건강에
신중을 기하여 낳자마자 유모에게 왕자의 양육을 맡겼으니 에드워드 왕자는
왕가의 일상적인 교육을 받았고 승마와 웨일스 음악과 악기 등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부왕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정복 하려는 염원이 강했으니....... 노쇠한 몸이지만
스코틀랜드를 탈환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칼라일 근처에서 사망하기 전에 자신의 뼈를
화장해 부대에 담아 군사들과 함께 진군할 것,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정복했을 때 자신의 뼈를
묻을 것, 묘비명에 '스코틀랜드의 왕 에드워드 1세가 여기에 잠들어 있다' 고 새길 것을 주문합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변방의 귀족들을 의식해 일단 원정을 계속하는 듯했지만 형식적인
원정은 오래가지 못했으니 얼마 뒤 런던으로 돌아갔고, 부왕에드워드 1세와는 달리
스코틀랜드 정복을 포기했으며 1307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즉위했습니다.
에드워드 2세는 즉위후 1308년 프랑스왕 필립 4세의 딸인 이사벨라와 결혼했지만 이는
프랑스와 화평 유지를 위해 치른 정략결혼이었는데, 그에게는 정부도 있었으니
사생아 아담 피츠로이의 출생 시기는 즉위한지 얼마 안 되는 1307년 초반인데
이사벨라 와의 사이에서 에드워드 3세, 존, 엘리노어, 조안 등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사벨라 왕비와는 소원한 관계였으며 기사 피어스 개버스턴을 계속 가까이
하였으니 의회의 반발을 샀고, 의회는 랭커스터 백작이자 에드워드의 사촌 토머스
를 중심으로 에드워드 2세에 대항하기 시작했으니 의회는 40여개의 칙령을 선포
하였는데 그중 절반이 개버스턴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으니 추방하기에 이릅니다.
개버스턴의 처형과 칙령 선포 때문에 왕권이 약화된 에드워드 2세는 다시 왕권을 강화
할 방법으로 스코틀랜드 재정복에 나서 첫 전투는 폴커크에서 치렀습니다.
스코틀랜드왕 로버트 1세는 도끼를 잘 쓰는 군사를 내세워 일대일 대면전을 시도하는 수법
으로 병사의 사기를 북돋운 반면, 에드워드 2세에게는 전략이 없으니 침공은 실패합니다.
두번째 전투는 1314년 6월 베넥번인데 잉글랜드군은 기병과 장궁병을 선발했으며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군의 삼분의 일로 원형 전투대형으로 방어하다가 궁수들이 나와 기습하는 전술을
구사하니, 잉글랜드군은 잠복중인 스코틀랜드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참패하는데 스코틀랜드
의 로버트 1세는 귀족과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추대된 반면 에드워드 2세의 왕권은 약화됩니다.
에드워드 2세는 치세 전기에 가스코뉴의 기사 가베스통을 중용해 편파적으로 총애했는데 그의
교만한 태도는 귀족들의 반감을 샀으며 치세 후기에는 휴 데스펜서를 시종으로 임명해
총애했는데, 그는 모든 관직 임명에 관여하고 사기를 치거나 무력을 행사해 웨일스에서 소유지
를 넓혀 남부 웨일스에 하나의 왕국을 세울 정도의 많은 영토를 확보하는 등 권력을 농단합니다.
영토적 야망은 반 국왕 세력의 결집을 불러일으켜 웨일스 변경 영주들과 북방 영주들 사이에 많은
적을 만들었으니 그중에서도 헤리퍼드와 모티머의 반감이 특히 컸는데 1321년 에드워드 2세의
실정에 분노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의회는 데스펜서 부자를 추방했지만 에드워드
2세는 중도파를 규합해 출병하여 랭커스터 백작을 처형하고 항복한 모티머를 런던탑에 가둡니다.
다음 해 탈출한 모티머는 프랑스로 도망쳐 왕과 데스펜서에 대한 반항운동을 주도하는데
1325년 이사벨라 왕비는 그녀의 동생 샤를 4세와 가스코뉴 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파리에 파견되었다가 같은 입장에 있는 모티머를 만나 연정을 느껴 합류했으며 또한
왕 대신 프랑스 왕에게 신서하도록 파견된 12살의 왕세자 에드워드까지 왕비를 따랐습니다.
1326년 9월, 이사벨라 왕비는 모티머와 함께 에드워드 2세를 쫒아내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건너오자 이들의 모반에 왕의 형제들을 포함한 왕국의 유력자들 거의
모두가 가담했으니, 마침내 휴는 귀족들에게 붙들려 교수형에 처해졌고 왕 또한 체포
되어 감옥에 갇혔으며 왕비와 모티머, 그리고 많은 귀족들은 에드워드 2세의 퇴위를 요구합니다.
1327년 1월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는..... 그의 무능함과 대관식 서약을 어긴 잘못을 물어
에드워드 2세를 탄핵하고 폐위하니 에드워드는 브리스틀 북쪽의 버클리 성에 감금당했는데
왕을 탈출시키려는 한 차례 기도가 있고 난 뒤, 에드워드에게 가장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모티머는 왕을 잔인하게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아들 에드워드 3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1330년에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모티머를 체포해서 바로 처형했는데 죄목에는
역죄 외에 부왕인느 에드워드 2세의 살해죄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미 죽었지만 에드워드 2세의 시신은 버클리 성에서 방부 처리되어 글로스터 사원으로
옮겨졌다가 같은 해 12월에 장례식을 치렀는데, 왕비 이사벨라는 면죄를 받았지만
그래도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며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시작합니다.